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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SUMMER

생활

인문학 기행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뒤엉킨 땅

조선 시대 서울에서 출발하여 동북 변방 함경도 경흥(慶興)에 이르는 유일한 교통로였던 경흥대로 – 지금은 그 일부가 국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마저 의정부와 철원을 지나 군사분계선 앞에서 끊겨 있다. 더 이상 북쪽으로 갈 수 없는 이 길은 누군가에는 고향으로, 다른 이들에게는 잃어버린 자신으로, 혹은 그저 그 무엇으로 돌아가고픈 바람을 대변한다.

북서울 꿈의 숲(Dream Forest)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근의 연립주택가 풍경. 이 공원이 조성된 오패산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퇴각한 경로의 일부이다.

제롬 드 그루트(Jerome de Groot)의 『역사를 소비하다 Consuming History』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은 최근 2,30년 사이에 변화된 역사의 소비 행태를 그 이전과 확실히 구분 짓는다. 정보화라는 전례 없는 기술적 진보로 수많은 미디어가 등장하고, 여기에 대량 소비를 겨냥한 거대자본이 개입하면서 유행처럼 일어난 역사 소프트웨어의 붐 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물론이고 텔레비전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리얼리티 쇼에서 게임까지 역사가 관여하지 않는 곳이 없다. 멀게만 느껴졌던 역사가 다양한 미디어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참여하고 체험하는 장르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역사 소비 시대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푸는 데는 두꺼운 책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의 수사학이면 족하다. 대중문화는 시나 소설 같은 복잡한 장르와 달리 남다른 상상력이나 표현보다는 유형을 더 중시한다. 누구나 그럴 듯하다고 느끼는 것에 매달려 삶 자체를 쉽게 유형화하는 대중문화에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설득력과 ‘전형적인 인물’들이 판을 치는 역사는 아주 질 좋은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역동적인 국가주의와 함께 민족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깊은 맛이 우러나야 더 많은 고객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비평가들의 조언도 하나 추가하자.

중국 지린성 쪽에서 바라본 두만강 하구의 북한-러시아 간 철교. 북한 라선경제특구에서 철도를 이용해 러시아 하산으로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게 된다. ⓒ 연합뉴스

강원도 철원군 월정리역에 전시되어 있는 붉게 녹슨 열차 잔해. 맞은편에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북한군의 화물 열차 골격도 보존되어 있다. 서울과 동해안의 원산을 잇는 경원선은 1914년 전 구간이 개통되었지만, 남북 분단으로 인해 현재는 남한 내 일부 구간에서만 운행되고 있다. 폐역된 월정리역은 남방 한계선에 인접한 위치로 주요 관광지가 되었다. ⓒ 연합뉴스

두 고갯길
지난 3월 넷플릭스가 아시아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 출시한 『더 킹덤』 시즌 2는 17세기 조선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은 한국형 좀비 드라마다. 외신은 『워킹데드』의 느려터진 서양 좀비에 비하면 그 속도만으로도 공포를 느낄 만큼 빠른데다 『왕좌의 게임』에 버금가는 시대극을 더해 전 세계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 양반 계층의 의상 중에서도 갓이 ‘신비한 모자’로 화제가 되면서 코스튬 드라마로서의 볼거리도 한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 드라마의 최대 격전지는 자막으로도 여러 번 소개되는 문경 새재다. 조선이 개척한 중요 간선도로이자 문화의 소통로로 기능했던 영남대로의 길목인 이 가파른 고갯길은 수도 방어에도 매우 유리했다. 하지만 1592년 4월,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주력군인 고니시(小西行長) 부대가 이 고갯길을 넘을 때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8000의 기병을 과신해 고개 너머 평지에 진을 친 한 사령관의 오판 때문이었다. 충주가 뚫렸다는 소식에 선조는 새벽같이 한양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나섰고, 왜군은 사흘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장악했다. 『더 킹덤』의 작가는 바로 이 문경새재에서의 아쉬움을 드라마를 추동하는 역사적 상상력의 한 발화점으로 삼은 것이다.

城에서 시작해 城으로 끝나는 서양의 역사 드라마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역사 드라마는 길에서 시작해 길로 끝나는 관습적 비유에 익숙하다. 이때 고갯길과 그 關門(성문이 아니다)을 통과하는 일은 고난이나 국면 전환을 상징하곤 하는데 문경새재는 그 역사성과 빼어난 자연 경관을 더해 한국의 고갯길의 대명사로 대접받고 있다. 그러나 길 위에서 펼쳐지는 스토리텔링이 역사 문화상품으로 ‘소비’될 때 그 관심의 불균형은 심화되고 국가주의는 부풀려진다. 어떤 길은 기념하되 어떤 길은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다. 이번 기행은 잘 관리된 공원이나 친절하게 재현된 기념관은커녕 팻말이나 기념석 하나 없는 코스다. 걷는다기보다는 찾아 나선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이 비공인된 ‘역사를 다룬’ 불안정하고 몽상적인 방식은 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의정부 축석령 전투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무공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동상. 경흥대로의 일부 구간인 축석령은 서울 북부를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1950년 6월 26일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고 국군이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만드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서수라에서 동대문까지
구글 어스에서 한반도의 동북부 끝인 두만강 하류를 내려다보면 몇 개의 석호(潟湖)가 있는 아름다운 작은 만(灣)이 보인다. 강 건너편은 러시아의 하산이다. 간간이 러시아 말이 들릴 듯 한 거리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묘사했던 “오랑캐와 접경(接境)하여 백성(百姓)이 모두 굳세고 사납다”는 함경도 사람들이라면 몇 마디는 쉬이 알아들었을 것이다. 이곳 사람들의 기상은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라는 관직도 없는 선비가 의병 3,000명을 모아 왜군 2만 8,000명을 물리친 것으로도 이름 높다. 숙종은 이들의 공덕을 기려 길주에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세웠는데 러일전쟁 때 이를 본 한 일본군 장군이 제 나라로 반출했다 100년 만에 돌려받은 뒤 북한으로 되돌려 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만의 남쪽으로 뉴스에서 자주 듣던 나진 · 선봉 지구가 보인다. 북한이 가장 먼저 자유 무역 지구로 개방한 경제 특구다. 만의 동쪽 끝이 한국 최북단의 옛 서수라(西水羅) 항 자리인 듯싶은데 지도에는 항구의 흔적도 표기도 없다. 조선은 이곳에 서울과 연결하는 첫 번째 봉수대(烽燧臺)를 두고 적의 침략에 대비했다. 서수라 위쪽으로 은성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이곳이 옛 경흥이다. 서울로 가는 경흥대로는 서수라에서 경흥을 거쳐 잠시 두만강을 거슬러 오르다 우람한 산맥들 사이로 뻗는 실핏줄 같은 길을 따라 남쪽으로 길을 튼 뒤 함흥과 원산을 경유한 뒤 강원도 철령을 넘는다. 남쪽으로 뻗은 영남대로에 문경새재가 있다면, 동북 방면으로 가는 경흥대로에는 철령이 있다. 모두 백두대간을 넘는 분수령이다.

지도에서 보듯 철령은 높고 가파르다기보다는 비탈길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이다. 이 같은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 고려와 조선은 이곳에 요새인 철령관(鐵嶺關)을 세워 동북 방어의 진지로 삼았다. 이 철령관을 기점으로 북쪽의 함경도는 관북(關北), 서쪽의 평안도는 관서(關西) 지방으로 나눈다. 철령을 넘어 다시 남쪽으로 길을 잡고 내려가다 보면 동남쪽에 그 이름난 금강산이 있다. 아쉬움을 남긴 채 서울이 있는 서쪽으로 길을 틀어 내려가면 차츰 길들이 희미해지는 지점이 남과 북을 끊어 놓은 휴전선 언저리다. 휴전선을 훌쩍 뛰어넘어 김화 평야에서 포천을 지나 축석령을 넘어 의정부로 들어서면 눈앞에 떡 하니 서울을 에워싼 북한산이 버티고 있다. 의정부역에서 전철을 타면 서울의 동대문역까지 40분이면 도착한다.

이번 여행을 굳이 구글 어스를 통해 가보지도 못한 북한 땅인 경흥 서수라에서 출발한 까닭은 이 길을 따라 도문선, 함경선, 경원선으로 연결된 1000㎞가 넘는 철길이 남북 분단으로 단절되었음을 알리려는 뜻도 있지만, 예부터 함경도 북쪽의 여진족들이 통상이나 외교를 위해 조선의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야인입경로(野人入京路)’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경흥으로 가는 길은 ‘되돌아가는 길’인 것이다.

1964년 6월 착공된 미아리 고개 도로 확장 공사 장면. 당시 이 길에는 인도가 따로 없어 차와 사람이 같이 지나다녀야 했다. ⓒ 서울시

현재의 미아리 고개. 1950년 북한군이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진격해 들어왔으며, 이후 15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길을 통해 강제로 북한에 끌려가 <단장의 미아리 고개(Miari, Hill of Wrenching Sadness)>라는 대중가요가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돈암과 미아리
경흥대로의 공식적인 기점은 동대문이지만 여진족의 사신들은 동대문보다 북쪽에 있는 혜화문을 이용한 듯하다. 혜화문은 일제 때 도심을 넓히면서 헐린 뒤 지금은 그 위치만 알려져 있다. 혜화(惠化)는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으로 여진족들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혜화문을 나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려면 성북천 위에 놓인 삼선교를 건너 삼선평(三仙平)이라는 들판을 지난 뒤 북한산 끝자락과 이어진 개운산 사이의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이 고갯길이 돈암동 고개다. ‘되너미 고개’로 불리던 지명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되놈’이란 동북방의 이민족을 지칭하는 낮춤말로 언제부턴가 여진족들이 이 고갯길의 대표적인 손님이 된 것이다.

그 연유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깊다. 동북 지역의 토호였던 이성계의 아버지는 원명 교체기에 100년 가까이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동북 지역을 수복하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그 지위를 이어받은 이성계 역시 동북 지역의 토착 기반을 이용하여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으로부터 이 곳을 지켰다. 특히 여진족과의 화친은 그만의 외교적 자산으로 건국에 큰 힘으로 삼았다. 이성계는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이 길로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개경을 지켰으며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생을 이 길을 오가며 살았다. 그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도 이 길과 이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경흥대로에는 태조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돈암동 고개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미아리 고개다. 고개 너머에 미아리라는 행정 지명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미아miari'를 검색하면 두 가지 내용이 뜬다. 하나는 ‘미아리 텍사스’라는 별명을 가진 집창촌이 폐쇄되었다는 기사이고, 또 하나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싸우던 최후의 격전지라는 소개 글이다. 동두천, 의정부 전투에서 북한군 주력인 인민군 1군단에 밀린 국군은 미아 사거리에서 돈암동 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탱크 부대를 막기 위해 개운산 능선에서 마지막까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로 개운산은 민둥산이 되어 버렸지만 포연이 가신 지금은 전망 좋은 아파트단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에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대중가요가 빅히트를 하면서 이 지명을 다시 한 번 널리 알렸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은 ‘한 많은’ 미아리 고개보다는 돈암동 고개라는 지명을 선호한다. 옛길을 복원해 문화 탐방로 만들기에 공을 들이는 지자체의 사업에서도 ‘미아리 고개’란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노랫말에 나오는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끌려간 민족의 비극적인 현장으로 기억되는 것이 영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끌려간 사람의 주체가 후퇴하는 인민군에게 끌려가다 학살당한 우익 인사인지, 정부의 말만 믿고 서울에 남아 있다 인민군에 부역한 혐의로 끌려가 처형된 사람인지 모호하다는 것도 한 이유다. 서울 수복 후 부역자로 몰려 검거된 사람은 5만여 명이고, 이 중 160여 명이 사형을 당했다.

1. 상상톡톡미술관
2. 미아리고개 예술극장
3. 미아리 점성촌
4. 혜화문

동두천, 의정부 전투에서 북한군 주력인 인민군 1군단에 밀린 국군은 미아 사거리에서 돈암동 쪽으로 밀고 내려오는 탱크 부대를 막기 위해 개운산 능선에서 마지막까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로 개운산은 민둥산이 되어 버렸지만, 포연의 기억이 사라진 지금은 전망 좋은 아파트 단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북서울 꿈의 숲은 서울에서 4번째로 큰 규모의 공원이다. 과거 놀이공원이 있던 부지에 2009년 개장되었으며 지상 3층, 높이 49.7m의 전망대를 갖추고 있다.

돈암동 제일시장은 1952년에 자리 잡기 시작한 전통 시장을 1970년대에 들어 새롭게 단장한 지역의 명소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오래된 가게들이 많아 인근 주민들에게 친숙한 일상의 공간이기도 하다.

꿈의 숲을 만들다
미아 사거리에서 북한산 칼바위와 오패산 사이에 난 수유리 고개를 넘은 뒤 중량천을 따라 의정부가 있는 북쪽으로 가는 3번 국도는 몇 차례 넓혀지고 비껴간 것을 감안하면 얼추 경흥대로와 나란히 간다. 큰 고개도 없다. 그래도 옛길의 맛을 좀 더 느끼고 싶다면 방학사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큰 길에서 왼쪽으로 한 블록 뒤로 들어가면 폭이 10미터 정도 되는 길이 도봉산역 앞까지 약 3㎞ 정도 이어진다. 길의 중간쯤에 북서울 중학교가 있다. 이 길이 옛 경흥대로다. 길의 양쪽은 대개 상가가 아니면 시장통이다. 놀랍게도 500년도 훨씬 넘은 길이 과거의 재현이 아닌 아직 생활 속에서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당을 쓸고 물건을 사고팔며 살아가는 이 길이 그 옛날 어떤 놀라움과 아우성과 기쁨의 시간들로 흘러넘쳤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간간히 길가에 보이는 표지판에는 도봉산 둘레길과 왕족이나 세도가들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 세세히 그려져 있을 뿐이다.

서울의 동북부나 경기도 의정부 방면에 사는 사람들에게 미아리 고개는 도시로 가는 일종의 관문과 같았다. 미아리 고개를 넘지 않고는 그럴 듯한 물건을 사거나 볼거리를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청춘 시절을 추억하며 쓴 『그 남자네 집』에서 ‘그 남자’가 “어둑시근한 카바이트 불빛이 무대 조명처럼 절묘하게 투영된 자리에서”, “나직하고도 그윽하게 정지용과 한하운의 시를 암송하곤 했”던 곳도 삼선교 포장마차 집이었고, 그 빤한 감자국밥이나 선지가 들어간 우거지된장국도 돈암동 제일시장에서 먹으면 왠지 국물 맛이 더 깔끔하게 느껴졌다. 전차 종점이 있던 돈암동까지는 도시였고, 전차가 다니지 않는 미아리는 시골이었기 때문이다.

1939년에 개통되어 1968년까지 30년 간 운행된 전차가 이런 인식을 깊게 심어주었다면, 2002년 서울시의 균형 발전을 위한 뉴타운 지정은 미아리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바꿔 놓았다. 개발의 속도와 규모는 엄청나 불과 10여년 만에 사람들의 기억에 있는 미아리의 이미지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그 대표적인 상징이 오패산 자락을 주민들의 생활 속 휴식처이자 문화 공간으로 펼쳐 놓은 ‘북서울 꿈의 숲’이다. 이곳 전망대에 오르면 서울의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대중문화 속에서는 그럴듯하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며, 그럴듯하지 않은 상상은 상상이 아니다.”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의 말이다. 의정부역 앞에서 북쪽으로 뻗은 길은 크게 두 방면으로 갈라진다. 오른쪽으로 튼 동북쪽 길이 축석령을 넘어 휴전선을 지나 북한 땅인 원산, 함흥을 거쳐 두만강으로 가는 경흥대로다. 그대로 직진하면 동두천, 연천, 철원을 지나 역시 휴전선을 넘어 압록강으로 이어진다. 나는 땀내를 풍기며 휘적휘적 내 곁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본다. 굶주림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장사치들과 섞여 양주골 누원(樓院)까지 내려온 북관 선비가 살곶이로 가는 중량천 배 위에 짐을 부리고 홀가분한 얼굴로 다시 축석 고개를 넘고 있다. 마음속으로는 선비로 돌아갈 날을 염원하면서. 바람이 잔뜩 든 젊은 양반 하나가 노새를 타고 가다 졸음에 겨워 비탈길에서 잠시 휘청거린다. 등짐을 가득 진 어린 종들은 발바닥이 부르튼 줄도 모르고 마냥 즐겁다. 금강산은 아직 멀다. 긴 소총을 어깨에 메고 대열의 후미에서 목청껏 군가를 부르며 행군하는 소년병의 쉰 목소리가 문득 잠긴다. 나는 어느 쪽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다.

이창기(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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