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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SUMMER

문화예술

전통 유산을 지키는 사람들 오늘도 어제와 같은 마음

서울의 오래된 도심 경복궁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비원떡집은 조선 시대 궁중떡의 전통을 잇고 있는 가게다. 70년된 이 떡집의 3대 주인 안상민(安尙敏) 씨는 옛맛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묵묵히 소명을 다하고 있다.

0년 역사를 지닌 비원떡집의 3대 주인 안상민 씨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떡집을 8년 전부터 운영해 오고 있다. 그는 가게 로고와 포장 용기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디자인했지만, 떡 제조는 전통적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가게 앞엔 간판이 없었다. 다만 안이 들여다보이는 아담한 통창 위로 작은 기와지붕이 얹혀 있을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열대 위쪽 천장에도 기와가 올라가 있었고, 나무로 된 문과 바닥에선 한옥의 대청마루 느낌이 났다. 진열대엔 다섯 가지 떡이 나란히 정갈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았다.

그중 이 가게의 얼굴로 소문이 난 두텁떡(盒餠)에 먼저 눈길이 갔다. 찹쌀 반죽 안에 잘게 썬 호두, 밤, 잣, 대추를 유자, 꿀, 계핏가루에 버무린 소를 넣어 먹기 좋은 크기로 둥글게 만든 다음 볶은 팥고물을 얹어서 찐 떡이다. 고려(918~1392) 말기에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1392~1910) 시대에는 왕들의 생일상에 올랐고 부유한 양반집에서나 만들어 먹던 상류 사회 음식이었다. 팥고물이 가득 묻은 떡을 조심스레 베어 물면 견과류의 사각대는 풍성한 식감 사이로 유자청의 달고도 상큼한 뒷맛이 스쳐가 맛의 품격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값비싼 재료와 만드는 데 공이 많이 들어 지금도 일반 떡집에서는 제대로 된 솜씨를 만나기 힘들다.

미세한 식감
서울시는 역사가 오래된 가게들 중에서 특별히 가치가 있는 곳들을 골라 2017년부터 ‘오래가게’로 지정해 오고 있다. 비원떡집도 그중 하나인데, 유명세 때문인지 이곳을 소개하는 기사들이 제법 많다. 그 기사들에서는 이 가게의 유래를 이렇게 적고 있다.

“고종(재위 1863∼1907)과 순종(재위 1907∼1910)의 수라상을 담당했던 조선의 마지막 상궁 한희순(韓熙順 1889~1972)이 홍간난(洪看連 1925~1999)에게 궁중떡의 비법을 전수했다. 홍간난은 1949년에 비원떡집을 열었고, 그곳에서 1970년대부터 일을 배운 조카 안인철(安仁喆)에게 1984년 가게를 물려주었다.”

지금 진열대 앞에 선 안상민은 안인철의 아들로 스물세 살이었던 14년 전부터 떡 일을 배우면서 8년 전 아버지로부터 대표 자리를 물려받은 3대 운영자다. 주방과 홀을 오가며 바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조선의 마지막 주방 상궁의 솜씨가 과연 어떤 사연을 업고 당신의 이모할머니에게 전해질 수 있었느냐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다리는데 그의 답은 뜻밖이었다. “아버지에게 들은 건 그게 다예요. 아버지도 이모할머니께 상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하신 것 같아요.”

무엇을 묻건 그의 답은 좀처럼 길어지지 않았다. 그는 원래 말을 길게 못 하는 성미라고 했다. 14년간 일을 해온 지금 과연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물어도 답은 비슷했다. “전부 할 줄 알아요. 아버지가 모두 제게 맡기셨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일은 없는지 물으니 “전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40년 넘게 떡을 만든 아버지와 비교했을 때 본인이 아직 체득하지 못한 기술이 어떤 것일까 물었다.

“그런 것도 없어요. 제가 더 잘해요. 제 나름의 기준에서 식감을 조금씩 바꿨는데 매출도 늘고 평가도 나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예전의 설기는 좀 더 질기고 쫀득쫀득했다면, 지금은 보송보송한 파운드케이크 같은 식감에 가까워졌다 할까요?”

젊은 사람들의 입맛을 고려한 것인지 물으니 그는 자기 입맛에 맞춘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3대를 잇는 떡집 주인은 떡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좋은 떡의 기준은 여럿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식감, 다시 말해 맛 아닐까요? 떡마다 다른 고유의 쫀득한 식감이 살았는지 봐야죠. 다른 기준은 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맛을 결정짓는 요소요? 쌀가루 입자, 물의 양, 소금 이 세 가지일 것 같아요. 특히 식감은 쌀가루 입자에 영향을 받죠. 쌀을 곱게 빻느냐 좀 덜 곱게 빻느냐에 따라서 떡이 질긴지 덜 질긴지, 금방 굳는지 오랫동안 부드러운지가 결정되니까요. 그런 걸 많이 생각해요.”

자신의 직업을 미화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는 그의 답은 초지일관했다. 각종 매체에 꾸준히 노출되며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베이커리와 컬래버레이션하여 개발한 새 메뉴라든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디저트 카페 같은 청사진은 비치지 않았다.

한옥 기와를 천장에 설치해 고풍스럽게 꾸민 비원떡집의 내부. 이곳은 2017년, 서울시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가게를 골라 지정하는 ‘오래가게’에 선정되었다.

현대적 미감
미세한 식감의 변화와 함께 그가 챙긴 것은 떡과 떡집의 외관이었다. 손님 대부분이 단골인 상황에서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 특히 20~30대 젊은 층에게 호감을 주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는 떡을 층층 쌓아 랩으로 둘둘 두르는 오래된 진열법, 투박한 스티로폼 용기를 걷어냈다. 떡 하나하나 일일이 따로 싸는 개별 포장법을 택했고, 국내외 유명 빵집의 포장 디자인을 연구하며 가게 로고와 포장지를 새로 만들었다. 흰색 종이 상자에 몇 가지 떡을 멋스럽게 담은 선물 세트까지 내놓았다. 이후 젊은 층의 구매량이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맛의 핵심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의 생각엔 흐트러짐이나 불안감이 없어 보였다. 70년간 매일 같은 방식으로 같은 제품을 내어온 가게를 이어 가는 사람. 상품을 묵힐 수가 없는 기술이자, 긴 세월 고객들의 입맛으로 걸러지고 입증된 순도 높은 기술. 그에게서는 그 안정성을 손에 쥔 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아버지가 그랬듯 양질의 국산 재료를 꾸준히 사용한다는 이야기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 가지라도 재료의 품질을 낮추면 떡의 맛에 큰 차이를 불러오느냐 물으니, 그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그렇겠죠? 그런데 전 늘 쓰던 재료만 계속 사용해서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재료 10여 가지가 제대로 조화를 이뤄야 맛이 완성되는 두텁떡에서 가장 맞추기 힘든 포인트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답을 늦추며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뭐가 어렵고 뭐가 쉬운지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떡을 다른 곳에서 따로 배운 게 아니고 이 가게에서만 줄곧 해왔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안 돼요. 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1. 바람떡 2개를 입술 모양으로 포개어 붙인 쌍개피떡[雙甲皮餠]. 껍질 벗긴 팥을 삶아 으깨어 만든 소가 멥쌀가루 반죽 안에 들어 있다.
2. 약식은 물에 충분히 불린 찹쌀을 찐 후에 꿀, 흑설탕, 진간장을 섞어 옅은 갈색으로 물들인 후 반으로 쪼갠 밤과 4등분한 대추를 넣고 참기름을 섞어 다시 중탕하여 찐 다음 잣을 고명으로 얹어 만든다.
3. 비원떡집을 대표하는 두텁떡[盒餠]은 안상민 씨가 가장 좋아하는 떡이다. 고운 팥고물이 묻은 떡을 베어 물면 잘게 썰어 소로 넣은 여러 견과와 유자청의 달콤함이 입 안을 가득 메운다.

꾸준한 일상
떡집 주방에 흩어지는 증기 너머로 사물을 보며 자란 그였고, ‘두텁떡에 쓰일 거피팥의 수분을 날리기 위해 솥 앞에 서서 몇 시간이고 팥을 볶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가슴에 맺혀 떡집을 이어받기로 결심한 그였다. 노동량에 비해 보상은 보잘것없는 이 일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 그의 단 하나의 목표였다. 좀처럼 뜻이 머물지 않는 대학 공부는 제쳐두고, 군 제대 후 바로 떡집에 나와 새벽 3~4시부터 종일 일을 배웠다.

그렇게 그가 뿌리를 내린 떡집은 그의 시야 안에 온전히 들어온 세상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동안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요?”

“가족과 24시간 붙어 있으니 사소한 걸로 다투기도 해서 그 정도가 힘든 거지 다른 건 없어요.”

“이제 떡집 일도 틀이 잡힌 것 같은데 그게 매일같이 반복되면 마음이 느슨해지거나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어요.”

“떡집 운영하면서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간 부분은 없나요? 삶의 만족도가 떨어졌다든지.”

“아, 일하느라요? 그런 건 없어요. 쉴 땐 쉬고, 가족 여행도 자주 다니고 단합이 잘 돼요.”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야겠다는 계획이 있어요?”

“그런 건 딱히 없어요. 그냥 하던 대로 매일매일 해가는 거죠.”

자신의 직업을 미화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는 그의 답은 초지일관했다. 각종 매체에 꾸준히 노출되며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베이커리와 컬래버레이션하여 개발한 새 메뉴라든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디저트 카페 같은 청사진은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떡에 집중하기 위해 메뉴를 더 줄일 수 있다고도 했다.

그의 대답 속에서 계속 허전함을 느끼던 질문자는 그제야 질문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봤다. 모름지기 ‘대를 잇는 가게’의 젊은 주인장이라면 전통을 재해석하거나 혁신해야 한다고 미리부터 단정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러자 비로소 놀라울 것 없는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이 밀려들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하루를 떡집에서 시작하고 떡집에서 끝내는 일상. 주문이 넘치면 넘치는 만큼 일을 더 하고, 떡이 빨리 팔리면 한 뼘만큼 가벼워진 마음으로 가게 문을 닫는 삶. 다른 직업인의 인생과 내 삶의 오늘을 함부로 견주지 않는 태도. 먼 미래를 향해 뛰어가는 걸음에 조급해하기보다 오늘을 완성한 뒤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내일을 같은 마음으로 걸어 나가려는 자세.

그런 삶이 흘러가는 가게의 반들반들한 나무문을 열고 나오자 무언가 길가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세상 어느 골목마다 살아 있었지만,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던 꾸준한 일상의 가치가. 별것 아니면서도 한순간 젖어들면 때론 아름답기까지 한 평범한 삶의 지치지 않는 리듬이.

강신재(Kang Shin-jae 姜信哉)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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