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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WINTER

궁궐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를 해설하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외국인에게 길을 안내해 주면 묘한 뿌듯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런 보람을 매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의 궁궐인 덕수궁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있는 장수영(Chang Su-young 張殊英) 해설사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영어 강사의 길을 접고 덕수궁 해설사가 된 장수영 씨가 중화전(보물 제819호) 앞에 서 있다. 그는 해설사가 된 지 2년여밖에 되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고 말한다.

“대학 시절 처음 지리산에 갔는데 너무 좋아서 그 후로 자주 가게 되었어요. 1박 2일로 짧게 다녀올 때도 있었고, 1주일 동안 천천히 능선을 따라 걸을 때도 있었어요. 산 정상에서 구름바다를 내려다보면 도시에 살면서 마음 졸이고 머리 아파했던 일들이 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리산은 저에게 휴식의 장소라서 지금도 자주 찾고 있어요.”

장수영 씨는 항구 도시 부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일상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바다보다 산을 더 좋아했고, 자신이 특히 좋아하게 된 지리산을 비롯해 한국의 어지간한 산은 거의 다 올랐다. 그는 그렇게 찾았던 산들이 자신의 진로까지 바꿀 줄은 몰랐다.

“산길을 걷다 보면 가늠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고, 산이 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돼요. 지리산은 ‘어머니 산’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가 산이 주는 포근한 느낌 때문만은 아니에요. 한국전쟁 때 빨치산들이 그 산에 숨어들기도 했고, 지금도 삶에 지치거나 아픈 사람들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들어가잖아요. 저는 지리산을 통해 그 산이 품었던 사람들의 발자취까지도 사랑하게 됐어요. 나아가 이 나라 곳곳에서 살다 간 선조들의 흔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는 부산 신라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학교와 학원에서 10년 넘게 영어를 가르쳤다. 아주 평범한 선택이었고, 정해진 수순처럼 살았다. 하지만 산에 다니면 다닐수록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2017년 6월 마침내 덕수궁 해설사가 되었다.

궁궐로 출근하다

장수영 씨가 출근하는 직장인 덕수궁은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로 현재 8명의 공식 해설사가 활동 중이다. 해설사들은 한국어 해설은 기본이고 각자 하나씩의 외국어 해설을 제공하는데, 영어 해설사가 4명, 일본어와 중국어 해설사가 각각 2명씩이다. 보통 하루에 2~3회, 1회당 50분 내외에 걸쳐 해설이 진행된다. 덕수궁 입장객들은 무료로 해설을 들을 수 있으나, 10명 이상 단체로 해설을 듣기 원할 때는 미리 신청해 예약해야 한다. 단, 야간 개장 시간에는 해설을 제공하지 않는다.

“덕수궁은 다른 궁궐들에 비해 규모도 작은 편이고 관람객도 적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궁궐보다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서 해설을 하려면 한국사의 전체적 흐름을 알아야 하죠. 특히 일본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 많았던 곳이라 해설사들이 한국과 일본의 특수한 역사적 관계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요. 요즘에는 역사를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잘 전달하는가도 참 중요하단 걸 느끼게 됩니다. 역사란 것이 워낙 민감한 부분이 많아서 자칫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단어 하나 뉘앙스에도 조심하게 돼요.”

덕수궁은 왕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던 행궁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피난 갔던 선조(재위 1567∼1608)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경복궁을 비롯해 성 안의 궁궐들이 모두 불타버려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 있던 월산대군[조선의 9대 왕 성종(재위 1469∼1494)의 형]의 저택과 주변 민가들을 손보아 행궁으로 삼은 것이다. 이곳에서 즉위한 선조의 아들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중건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 이 행궁은 경운궁이란 이름을 얻는다. 이후 경운궁이 우리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했던 고종(재위 1863∼1907)이 이곳으로 돌아오면서였다.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이곳 경운궁에서 거행했다. 이후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재위 1907∼1910)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경운궁은 덕수궁이란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요즘 덕수궁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 중에는 덕수궁이나 한국의 역사, 문화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거나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아요. 어떤 분들은 ‘왕’이나 ‘황제’ 모두 최고 권력자인 건 마찬가지인데, 왜 굳이 고종이 자신을 황제로 칭했느냐는 구체적인 질문을 하기도 해요. 그러면 고종이 국호를 바꾸고 황제를 칭한 것은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해 자주 독립 국가임을 선언한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지난 2년여에 걸친 기간 동안 수십 개국에서 온 외국인들을 만났다. 그러는 동안 그는 국가별로 해설을 듣는 유형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분들의 태도가 특히 기억에 남아요. 단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고 연구하는 자세로 해설을 들으세요. 질문도 가장 많아요. 파란만장한 덕수궁에 관한 얘기를 듣다가 눈물을 보이는 분들도 있었죠.”

숱한 역사적 상흔의 현장이자 소중한 문화 유산인
덕수궁으로 출근하는 수영 씨의 하루하루는 즐겁다.
자신의 해설을 통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덕수궁이란
우리의 유산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이다.

흰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 위에 남색 두루마기를 입은 장수영 씨가 즉조당 앞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해설을 하고 있다. 덕수궁 해설사들은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보통 한복을 입는다.

끊임없는 공부

“일본과 얽힌 얘기가 많다 보니, ‘그럼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어떠냐’고 묻는 외국인들도 있어요. 공식 관계는 그렇게 친밀하지 않지만, 민간 교류는 많다고 얘기해요. 일본어로 해설하는 해설사들은 한일관계에 대해 훨씬 민감하고 많은 질문을 받을 거예요.”

그의 말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역사가 짧은 나라에서 온 관광객일수록 역사적 사실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자신보다 해설사 경력이 더 오래된 동료들에게 “전에 덕수궁을 찾아오던 관광객들과 요즘 오는 분들의 특징이 다르다”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K-Pop, BTS, TV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공부한 관광객들이 많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설사들은 전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비단 역사뿐 아니라 건축에 대한 전문적 지식도 쌓아야 한다.

“건축물은 그 자체가 역사의 현장이라 역사를 거론하면서 건축물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소실됐다가 새로 지어진 중화전, 즉조당, 함녕전 같은 전각들에 대해 얘기하면, 외국 손님들이 아주 열심히 들으세요. 어떤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에 이렇게 멋진 건물들을 다시 지을 수가 있었느냐’며 놀라기도 하죠. 더욱이 덕수궁에는 다른 궁궐들에는 없는 서양 근대식 건축물들이 있어서 그런 건물들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합니다.”

그의 설명처럼 덕수궁엔 전통 한국식 건축물과 서양 근대식 건축물이 함께 어울려 있다. 대표적인 서양식 건축물인 석조전은 유럽풍 석조 건물로 영국 건축가 J. R. 하딩이 설계해 1900년에 기공, 1910년 준공했으며 고종이 외국 사절들을 만날 때 주로 이용했던 곳이다. 그런가 하면 1936년에 기공돼 1938년에 완공된 석조전 서관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 중이다. 또 1900년에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설계로 지어진 정관헌은 왕궁에 건설된 최초의 유럽식 건물로 동서양 양식을 두루 갖추고 있다.

지식만큼 중요한 체력

숱한 역사적 상흔의 현장이자 소중한 문화 유산인 덕수궁으로 출근하는 수영 씨의 하루하루는 즐겁다. 자신의 해설을 통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덕수궁이란 우리의 유산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이다. 그는 어김없이 아침 7시 50분에 집을 나서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덕수궁으로 향한다. 출근 시각은 9시지만 그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 먼저 도착해서 하루 일과를 준비한다.

해설을 하러 나갈 때는 보통 한복을 입는다. 봄과 가을에는 흰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 여름에는 하늘색이나 베이지색 저고리에 남색이나 보랏빛 도는 남색 치마를 입고, 겨울에는 한복 위에 두루마기를 입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혹서기에는 한복 대신 반팔 블라우스와 바지를 입고, 혹한기에는 긴 패딩코트를 입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한복을 통해서도 외국인 손님들에게 우리 문화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의 궁궐들은 월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다. 따라서 수영 씨의 휴무일도 일반인들과 달리 월요일이다. 퇴근 후 1주일에 3번은 헬스클럽에 가서 요가와 필라테스를 하고, 수요일에는 피아노도 배운다.

“해설사가 되기 전엔 지리산에 들어가 살고 싶었죠. 하지만 지금은 여기 덕수궁에서 할 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보다 더 좋은 해설사가 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나라와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야 합니다. 또 해설에 필요한 외국어를 더 잘해야 하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해설을 해야 하니까 체력도 좋아야 하죠.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해설사는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영어로 된 우리 역사책을 열심히 읽고 있어요. 손님들로부터 ‘해설이 유익했다, 해설을 듣고 나니 다시 한국과 덕수궁에 오고 싶다’는 말씀을 듣고 싶어요.”

그는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단 한 사람을 위한 해설이었어요. 칠레에서 온 여대생이었는데, 참 친절했어요. 제가 ‘당신이 내 첫 손님이다, 당신에게 해설하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했더니, 그분도 자신이 제 첫 손님이 되어 영광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언젠가 칠레에 가게 되면 꼭 방문해야 할 명승지를 알려달라고 하자, 종이에 꼼꼼히 적어 주었어요.”

장수영 씨는 이름도 모른 채 헤어진 그 칠레 여대생이 다시 한 번 덕수궁을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때보다 더 나은 해설을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김흥숙(Kim Heung-sook 金興淑) 시인
허동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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