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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WINTER

생활

인문학 기행 모든 고향의 이름은 밀양이다

밀양은 인구 10만 8천여 명의 작은 내륙 도시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부산광역시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47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밀양은 서울에서는 자동차로 약 4시간 남짓 걸린다. 도심을 뚫고 흐르는 강 주변으로 구석기 시대 주거지부터 철기 시대 유적과 조선 후기 유림의 근거지까지 오랜 역사의 숨결이 깃들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밀양시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위양못은 약 63,000㎡ 규모의 저수지로 신라 시대에 농업 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되었다. 인근에 가산저수지가 들어서면서 본래의 기능을 잃었지만, 1900년 지어진 정자 완재정(宛在亭) 주변의 풍광이 빼어나 관광객들을 불러모은다.

한 편의 영화로 기억되는 도시들이 있다. 그중 이창동(Lee Chang-dong 李滄東) 감독의 2007년 개봉작 『밀양』(Secret Sunshine)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인터넷 기사에는 아직도 주인공 전도연(Jeon Do-yeon 全道嬿)의 연기에 “소름 끼쳤다”는 댓글이 붙어 다닌다. 그는 이 영화로 제60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의 첫머리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아저씨, 밀양이 어떤 곳이에요?”

“밀양이 어떤 곳이냐? 뭐라 카겠노… 경기는 엉망이고예, 그다음에… 한나라당 도시고, 그다음에… 부산하고 가깝고, 말씨도 부산 말씨고. 좀 급하고, 말씨가. 인구는 15만 정도였다가 요새는 한 10만으로 줄었고….”

“아저씨, 밀양이란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뜻요? 우리가 뭐 뜻 보고 삽니꺼? 그냥 사는 거지.”

“한자로 비밀 밀(密), 볕 양(陽). 비밀의 햇볕. 뜻 좋죠?”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주인공은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가다가 그곳으로 막 접어드는 도로에서 자동차가 고장이 나 정비소로 견인되어 가는 중이었다.

“여행 다니시는 모양이지예?”

“아뇨. 밀양에 살러 왔어요.”

‘살기 위해’ 온 그곳에서 그의 어린 아들은 유괴되고 살해된다. 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룬 곳, 그들의 삶을 둘러싼 여러 조건들이 끊임없이 평범한 개인의 행복과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곳, 어떤 이에게는 희망을 주지만 어떤 이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을 안겨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게 하는 곳, 그러나 대다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냥저냥 눌러 사는 곳. 그렇다면 모든 도시의 이름은 밀양이다.

전국의 전통 누각 중 가장 오래된 누각의 하나로 손꼽히는 영남루는 밀양강 옆 높은 절벽에 위치한다. 조선 시대의 내로라하는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경을 극찬한 여러 글과 글씨가 누각 내부에 편액으로 걸려 있다.

강의 도시
밀양은 강을 끼고 있다. 이 불변의 조건은 밀양의 옛날과 오늘을 구성한다. 강은 동쪽으로 여러 차례 휘돌며 남쪽으로 흐르다 낙동강과 합친 뒤 남해 바다로 들어간다. 이 강이 밀양강이다. 밀양 읍내는 이 강의 북쪽에 있다. 밀양이란 지명에 쓰인 한자 ‘양(陽)’은 ‘볕’이란 뜻도 있지만, 강 이름 뒤에 쓰일 때는 ‘강의 북쪽’을 일컫는다. 북쪽에 산이 있고 남쪽에 강이 있으니 얼마나 볕이 잘 들겠는가?

밀양의 지명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3세기 중국 사서인 『삼국지』에 보인다. 이 책에 언급된 ‘미리(彌離)’라는 국가명은 고대 한국어 ‘미르’를 중국 옛 한자로 바꿔 표기한 것이다. 고대 한국어의 ‘미르’는 물 또는 물의 신으로서 용(龍)을 뜻한다. 그러니 ‘비밀의 햇볕’이라는 이름 풀이는 이창동 감독 스스로가 밝혔듯이 자의적인 시적 인식에 불과하다.

밀양강 주변에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과 오래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공존한다. 2001년에 완공된 밀양댐 북쪽 구릉에는 공사 중 발굴된 2만 7000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이 있다. 이로써 밀양에 사람이 살았다고 입증할 수 있는 시기는 3세기보다 더 올라갔다. 그런가 하면 밀양강 하천 충적지에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유적들이 곳곳에 있다.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고 고속도로가 그 옆을 지나는 금천마을에는 청동기 시대 논농사 유적이 있다. 산 위 움집에서 비옥한 하천 근처 땅으로 내려오는데 수만 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집터는 자연 제방 위에 있고, 밭 자리는 집터 바로 아래, 논 자리는 그보다 낮은 곳에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봄이 오면 돌보습으로 땅을 갈아 기장이나 옥수수 따위를 심고, 그렇게 수확한 곡식을 빗살무늬토기에 저장해 추운 겨울을 났을 것이다.

좌절도 기쁨도 지금 우리보다 먼저 느꼈을 당시 사람들의 이 소박한 살림살이 흔적 위로 ‘비밀의 햇볕’이 비춘다. 그들이 지키고 싶어 했던 소중한 가치들은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다.

영남루 옆으로 부속 건물인 침류각이 계단식 월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천태산 자락에 자리 잡은 부은사는 금관가야의 2대왕인 거등왕이 부친인 수로왕을 기리기 위해 200년 무렵 세웠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굽이쳐 흐르는 밀양강 위로 낙동대교와 삼랑진교가 내려다보인다.

철기 문명의 도시
강바닥에서 출토된 허물어진 배의 구조물을 보면 옛 사람들이 강을 오르내리며 고기잡이를 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에게 배는 바람의 힘을 이용할 만큼 과학적이며 온갖 도구를 사용해 만든 첨단의 기술 문명이었다. 그들은 밀양강과 합쳐져 바다로 흘러가는 낙동강으로 종종 배를 몰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 모험성과 진취성으로 낙동강 하류 김해 지역에 새로운 북방 이민 세력이 세운 가락국과 연합해 500년 동안 가야 연맹의 일원으로 한반도의 철기 문명을 이끌었다.

밀양강을 바로 옆에 낀 마을 중에는 ‘쇠가 나는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금곡’이란 지명이 두 군데 있다. 흥미롭게도 두 곳 모두에서 제철 유적이 발굴됐다. 상동면에 있는 금곡마을과 그 인근에는 쇠를 달굴 때 나오는 부산물인 쇠 부스러기가 산을 이룰 정도로 쌓여 있었고, 얼마 전 도로 공사 중 발굴된 삼랑진읍 금곡마을에서는 제철로에서 폐기장까지 일련의 제철 과정이 모두 발견되었다. 밀양강 주변에는 예전부터 풍화나 침식으로 강가에 퇴적한 사철(砂鐵)이 많았다는 얘기다.

이런 고고학적 발굴은 밀양이 주변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에도 철을 수출했으며, 또한 가공한 철을 끈으로 묶어 화폐처럼 사용했던 변한(4세기경까지 낙동강 하류에 있었던 부족 연맹) 12개국 중 일원으로 활약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이 변한이 ‘철의 왕국’으로 일컬어지는 가야연맹으로 발전했으며, 신흥 세력인 신라에 병합된 뒤에는 자원과 기술을 제공해 신라가 강력한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불교의 도시
한반도의 다른 지역처럼 밀양에도 산천경개가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절이 들어서 있다. 그 중에 이곳 사람들이 각별하게 여기는 절은 부은사와 만어사이다. 부은사는 해가 지는 밀양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만어사는 검은 암괴류(巖塊流)가 절 앞 계곡에 길게 펼쳐져 있어 경관이 독특하다. 밀양 사람들은 이 두 절을 가야 불교의 성지로 여긴다.

역사책은 가야가 신라보다 앞선 5세기 무렵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부인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사를 지으면서 불교를 공식 수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절과 관련한 구비전승은 그 시기를 가야의 성립 초기로 이끈다. “수로왕이 만어사를 창건할 때 낙성식에 참석한 스님들이 부은사에서 자고 갔다”는 전설을 토대로 볼 경우 불교 전래 시기는 1세기경으로 앞당겨진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올 때 가지고 왔다는 파사석탑(婆娑石塔)에 관해 『삼국유사』는 “이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논의와 별개로 신라 불교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데 가야 불교가 기여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가야 문화는 그 고유성과 영향력을 인정받아 신라 시대는 물론 조선 시대까지 그들의 문화를 기리는 행사가 계속 열렸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지난 10월에는 2020년 3월 1일까지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가야 본성(本性)-칼과 현을 위해 김해의 수로왕비릉에 있던 파사석을 서울로 옮기기에 앞서 이전을 알리는 고유제를 지냈다. 이 제사에 지역의 정치인 등 유력 인사들이 참석했다는 것은 그 후손들이나 지역민들에게는 허황후 얘기가 단순히 전설이 아니라 역사로 함께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밀양 시내 곳곳에 ‘가야’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상점들이 많은 것도 그 증거이다.

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룬 곳,
그들의 삶을 둘러싼 여러 조건들이 끊임없이 평범한 개인의 행복과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곳,
어떤 이에게는 희망을 주지만 어떤 이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을 안겨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게 하는 곳,
그러나 대다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냥저냥 눌러 사는 곳…

밀양 사람들이 불교의 성지로 여기는 만어사는 1세기경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경내에는 12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다.

만어사 주변 너덜 지대에는 ‘만어석(萬魚石)’이라 불리는 검은 돌들이 가득 널려 있다. 전설에 의하면 용왕의 아들을 따라 온 수많은 물고기떼가 돌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커서 천연기념물 제5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남대로의 도시
영남대로는 수도 한양에서 한반도의 동남쪽 끝인 동래를 잇는 길로 조선 시대 가장 대표적인 육로였다. 천년 넘게 이용해 온 바다로 나가는 물길 대신 밀양이 이 길의 경유지가 되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우선 한반도 안에 통일된 국가 체제가 이어지면서 이웃 군현은 물론이고 중국을 오가는 빠르고 안정적인 길들이 확보되었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원의 쇠퇴 이후 일본의 국력이 강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왜구들의 발호로 이어져 활발했던 한반도의 수운(水運)이 그들의 횡포로 거의 마비되기에 이른다. 조선의 육로 확보는 이런 고육지책의 결과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영남대로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공격로가 되기도 했다. 부산포로 들어와 동래성을 함락한 뒤 교두보를 확보한 왜군이 양산을 지나 밀양의 관군과 마주친 곳은 삼랑진읍에 있는 작원관(鵲院關)이다. 이곳은 동래에서 서울을 연결하는 교통과 국방의 중요 관문이다. 그러나 고작 300여 명의 병력으로 1만 명이 넘는 적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왜군은 이 길을 통해 18일 만에 한양까지 점령했다.

그나마 위로를 주는 것은 밀양 출신 스님인 사명당(1544~1610)이 2000명의 승군을 모아 왜군이 점령한 평양성 탈환 전투에 참여하는 등 여러 곳에서 큰 전공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선조의 특사로 파견되어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000명을 데리고 돌아오기도 했다. 밀양읍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사명당의 동상이 밀양강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앞선 기술 문명이 있었고 해양 지향적이며 다문화적인 사회 시스템을 누렸던 밀양이 영남대로에 편입된 지 100년도 되지 않아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의 새로운 구심점인 사림파의 고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15세기 후반 신진 사류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밀양 출신 김종직(1431~1492)과 그의 제자들은 관료 세력들에 맞서 그들의 비리는 물론 임금의 처신까지 비판했고, 의리와 실천을 강조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밀양 부북면에는 김종직의 생가와 묘를 비롯해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예림서원이 있다.

나루와 기차역의 도시
조운 제도가 복원되어 삼랑리에 조창이 생기고 다시 세곡선이 오가게 된 것은 국제 정세가 안정되고 세금을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해서 내는 납세 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18세기 중반의 일이다. 영남대로와 이어진 수운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삼랑리는 관원들과 선주들이 일을 보던 사무실과 창고, 주막, 여인숙, 점포 등이 저잣거리를 이루어 붐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번영도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삼랑진에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끝이 났다. 기찻길은 대체로 영남대로를 따라 놓였다. 그 바람에 삼랑리는 다시 평범한 나루터가 되고, 삼랑진역은 읍의 중심이 되면서 새롭게 번창했다.

삼랑진역은 이광수(1892~1950)가 쓴 근대 문학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1917년)에도 등장하는데, 그에게 기차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가는 근대적 개인을 묘사하는 소설적 장치였다. 반면에 김정한(1908~1996)의 단편 「뒷기미 나루」(1969)에 묘사된 삼랑진은 다르다. 그는 “뒷기미 나루는 삼랑진을 더 거슬러 올라간 낙동강 상류께, 지류인 밀양강이 본류에 굽어드는 짬이라, 다른 곳보다 물이 한결 맑았다. 물이 맑아 초가을부터 기러기떼며 오리떼가 많이 모여 들었다”고 묘사하면서 동시에 이 나루가 “순한 백성들과 그들의 아들딸들이 징용이다, 혹은 실상은 왜군의 위안부인 여자 정신대다 해서” 건너간 비극의 장소로 인식했다. 밀양 삼랑진은 시인 오규원(1941~2007)의 고향이다. 그에게도 고향은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열세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얼굴이다.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평화와 안식이 준비되어 있는” “잠들고 싶고 꿈꾸고 싶은” “자궁과 같은 존재”이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불화와 궁핍의 근원”이었다. 그는 이 심리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중학교 때 고향을 떠난 이후로 아버지가 계신 고향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는 고향이란 “자궁을 지닌 어머니의 몸과 같아서 자궁 안의 자연의 언어와 자궁 밖의 현실의 언어를 품고 있는 시간적 공간”이며 “그 경계에 내가 서 있다”고 술회했다. 그렇다면 모든 고향의 이름은 밀양이다.

밀양강 하류의 오우진(五友津)나루는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세곡선이 오가던 수운의 요지였고,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모아 놓는 조창도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어 기찻길이 생기면서 평범한 나루터가 되었다.

이창기(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안홍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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