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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WINTER

기획특집

부산 : 시와 열정의 항구 기획특집 2 국제 교류를 이끌어 온 항구 도시

부산은 고대에 이미 주변국들과 활발한 교류를 펼쳤던 국제 도시였다. 특히 일본과의 왕래가 가장 잦았는데, 임진왜란 직후 17세기 초부터 양국 간 평화의 상징이었던 조선통신사 일행이 출발했던 항구이기도 했다. 부산의 국제 교류의 역사는 지금까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또는 강화도조약에 따라 개항한 조선 최초의 항구 부산항은 오늘날 세계 6위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기록하고 있는 국제적 무역항이다. 2014년 4월 준공된 부산항대교는 총 연장 3,368m로 부산항을 가로질러 연결함으로써 원활한 물동량 처리에 일조하고 있다. ⓒ 부산광역시(촬영 정을호)

한반도 동남단에 위치한 항구 도시 부산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마주한 국경 도시로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부산항은 한국의 수출입 제1관문으로서 인근 지역은 물론이고 국가 전체의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유라시아 대륙의 기점에 위치하여 동북아 물류 유통 허브항으로서 잠재력도 매우 중요하다.

부산은 전국 수출입 컨테이너의 60% 이상을 처리하고 있다. 부산항만공사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2018년 부산항의 컨테이너 화물 처리 실적은 20피트 컨테이너 기준 2,166만 3,000TEU로 2017년에 이어 세계 6위를 기록했다.

부산의 해양 교류사는 멀리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안가 마을인 ‘다대포’의 지명이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720년)에 ‘다대라원(多大羅原)’ 또는 ‘다다라(多多羅)’ 등으로 등장하는데, 이로써 역사 시대 초기부터 부산이 한일 간 통상과 교류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역 맞은편 골목에 자리하고 있는 차이나타운은 1884년 형성되기 시작해 지금도 많은 화교들이 살고 있으며, 관광객들의 발길을 끄는 부산의 명소 중 하나이다.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과 이야기를 소재로 한 벽화도 흥미로운 볼거리이다.

고대 동북아 교역의 중심
한국의 13세기 역사서 『삼국유사』에도 고대 부산 지역의 해양 교류 흔적이 남아 있다. 금관가야(1~6세기)를 건국한 김수로왕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하였다는 신화가 바로 그것이다. 허황옥 이야기는 김해 수로왕릉에 있는 쌍어문(물고기가 쌍으로 그려져 있는 문양)을 통해서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쌍어문 문양이 인도 문명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어 허황옥의 인도 도래설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가야국의 해양 교류는 비단 인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 발굴되고 있는 가야국의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이를 증명한다. 5세기 초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수많은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제철 기술과 스에키(Sue ware 須恵器) 토기 제작 기술을 전래함으로써 일본 고대 문명 성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한다.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인 ‘김해(金海)’는 그 이름에서부터 철 생산이 풍부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아름다운 남해 바닷가와 낙동강변에 자리 잡은 가야의 여러 연맹 국가들은 풍부한 철광을 바탕으로 동북아 교역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중국의 한나라 이후 다변화된 동북아 사회에서 가야국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중국 대륙을 잇는 요지였다. 또한 동북아시아 각국의 바닷길이 만나는 교역로에 위치하여 이 바닷길을 통해 자국의 풍부한 철을 주변 여러 나라에 공급할 수 있었다.

『일본서기』는 4세기 중반 백제의 근초고왕이 왜에게 보낸 물품 중에 덩이쇠(鐵鋌) 40매가 포함돼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철을 얇게 두드려서 만든 덩이쇠는 당시 중요한 생산 소재로 이것을 가공하여 각종 철기류를 만들 수 있었다고 전한다. 덩이쇠는 백제·신라·일본 열도 무덤에서도 종종 발견되지만, 특히 가야 지역에서는 수십 점이 출토되어 부장품으로서만이 아니라 화폐 기능과 철기 소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차이나타운 초입에 있는 ‘텍사스 거리’에는 외국 선원들을 위한 관광 상품 가게와 클럽들이 즐비하다. 부산항에 외항 선박이 들어오면 외국인 선원들로 붐비는 거리이다.

차이나 타운과 왜관
부산에는 1884년 청나라 영사관이 세워진 것을 계기로 형성된 차이나 타운이 현재도 남아 있다. 부산역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차이나 타운에는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음식점과 중국 음식 재료를 파는 상점, 환전소 등이 많으며 이들을 위한 학교들이 있다.

이곳 차이나 타운은 조선 후기(17~18세기) 부산항 매립과 해관 부지 공사 등을 위해 유입된 청나라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완성되었고, 현재는 화교 3〜4세들이 거주하고 있다. 국내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초창기에는 자국의 지원 아래 손쉽게 부산에 정착했으며,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 들어온 화교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1953년 부산역이 대화재로 소실되자 인근에 있던 집창촌이 차이나 타운으로 옮겨오면서 큰 변화를 겪어야 했다. 이후 1992년 한중 국교 수립이 이루어지고, 1993년 부산시와 중국 상해시가 자매 결연을 맺으면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이 자매 결연을 기념해 1999년 ‘상해 거리’란 명칭을 얻게 되었으며, 2004년부터 매해 ‘차이나 타운 특구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한편 부산에는 조선 시대에 일본인이 거주했던 마을 ‘왜관’도 존재했다. 고려 말 14세기부터 창궐했던 왜구를 단속하고 일본과의 외교와 무역을 담당시키기 위해 조선 조정이 개항지에 건물을 지어 주었던 곳이다. 1407년 부산의 부산포와 진해의 제포 두 곳에 왜관이 설치되었고, 1426년에는 울산의 염포에 한 곳이 더 추가되어 ‘삼포왜관(三浦倭館)’이라 불렸다. 그러나 1544년 통영 지역에서 왜인들의 약탈 사건이 벌어지자 삼포 중 부산포 왜관만 유지하게 되었다.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한일 양국의 외교 관계는 에도막부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후 처리에 따라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이에 왜관이 재차 설치되었는데, 조선 후기 부산포 왜관에는 약 500명 가까운 일본 남성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특히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초량 지역의 왜관은 그 규모가 총 10만 평 정도로 생활 공간을 비롯해 일본에서 온 사신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과 무역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왜관의 건축물은 조선 측에서 만들어 주었으나, 건물 내부는 일본식 실내 구조에 다다미를 깔았다. 왜관 밖에는 일본인의 출입을 감시하는 시설이 설치되었으나, 왜관 내에서는 일본 의상을 입고 일본식 칼을 차고 다녔기에 조선 속의 작은 일본 마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모포에 왜관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석. 조선 시대 경상도 해안 지역에는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마을인 왜관이 여러 곳에 있었는데, 부산 두모포도 그중 하나이다. 이곳은 1607년 설치되어 70여 년간 존속했으나 이후 초량 왜관이 생기면서 폐쇄되었다. ⓒ 네이버 블로그 ‘달콤한 날의 마실’

문화 교류의 기점
고대 이래 한일 양국은 거듭된 전쟁으로 관계가 순조롭지 않은 시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 약 210여 년에 걸친 에도막부 시기는 조선통신사를 통한 평화의 시대였다. 조선통신사란 양국이 임진왜란 이후 국교를 재개하고 12회에 걸쳐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선린 외교 사절을 지칭한다. 인접한 국가 간의 이 같은 평화적 문화 교류는 세계 역사에서도 매우 드문 일로 평가되고 있다.

2014년부터 한일 양국의 두 시민단체 부산문화재단과 일본 NPO법인 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朝鮮通信使緣地連絡協議會Liaison Council of All Places Associated with Chosen Tsushinshi)가 공동으로 추진하던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17~19세기 한일 간 평화 구축과 문화 교류의 역사 기록물」(Documents on Joseon Tongsinsa/Chosen Tsushinshi: The History of Peace Building and Cultural Exchanges between Korea and Japan from the 17th to 19th Century)이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기록물들은 한국이 보관하고 있는 63건 124점과 일본이 보관하고 있는 48건 209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부산에서 이루어진 유네스코 유산 등재 제1호이면서 한일 양국의 공동 등재 제1호라는 점, 또한 양국 시민의 교류를 통해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통신사의 규모는 대략 400~500여 명에 달했다. 통신사 행렬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 외교 활동 준비 및 날씨와 풍향 등을 살피며 부산에 머물렀다. 대한해협의 바닷길이 험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통신사 일행은 해신제를 지낸 후 항해하기에 좋은 날을 잡아 6척의 배를 타고 영가대(永嘉臺) 선창에서 출발했다.

일행은 쓰시마에 상륙하여 이후 최종 목적지 에도(현 도쿄)에 이르기까지 53개 역을 지났으며, 이때 동원된 인부만 33만 8,500여 명, 동원된 말이 7만 7,645필(1711년도 제8차의 경우)에 달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기준으로 봐도 가히 엄청난 규모의 행렬이 아닐 수 없다.

에도막부의 환대 또한 극진했다.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기 전 쇄국 체제를 유지했던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 방문을 큰 축제로 여겨 환영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관심은 에도막부의 집행부는 물론이고 무사와 서민, 상인, 농민에 이르기까지 대단하였다.

일본인들은 조선 문인들과의 접촉을 영예로 생각하여 사절단이 숙소에 들게 되면 그곳으로 몰려와 시의 창수(唱酬)와 비평, 서화와 휘호 등을 간청하였다. 이에 통신사 일행들은 눈코 뜰 사이가 없이 바빴다고 하며, 어떤 이들은 일본인들의 청에 응하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진풍경을 담은 기록이 현재 한국과 일본 전국 각처에 다수 남아 있으며 회화 자료로도 많이 전하고 있다. 당시 에도 문인들의 조선 문화 흡수는 놀랄 만했고, 이는 에도막부의 문예 부흥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이때 일본에서 간행된 문답집이 백 수십 권에 이르고, 우리 측의 문인과 관료들도 귀국한 다음 여러 권의 훌륭한 시찰 보고서를 남겨, 당시의 일본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늘날의 한류 열풍에 못지 않았던 문화 교류였다.

그 길의 출발점이 항도 부산이었다. 지금도 부산은 동아시아 및 아세안 지역과의 문화 교류를 비롯해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국제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이어나가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대략 400~500여 명에 달했다.
통신사 행렬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
외교 활동 준비 및 날씨와 풍향 등을 살피며 부산에 머물렀다.
대한해협의 바닷길이 험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중 <부산>. 이성린(1718~1777). 1748. 종이에 담채 (Ink and light color on silk). 35.2 × 70.3 cm. 《사로승구도》는 도화서 화원 이성린이 1748년 조선통신사 일행이 부산을 출발해 일본 에도에 이르기까지의 전 여정을 기록한 그림이다. 총 30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화폭에 풀어낸 것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 국립중앙박물관

인간 사이에 가교를 놓다

로이 알록 꾸마르 부산외국어대학 교수

2019년 11월 25~26일에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주최한 부산은 행사로 활기를 띠었다. 이번 행사는 30년을 맞이한 한․아세안 관계를 기념하고 제1회 한-메콩 정상회의를 위한 무대가 되었다. 평화와 번영의 조성을 위한 논의는 각국 정상들 간의 대화가 문화적 외교 또한 증가시킨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즉 대화를 통한 ‘원 플러스 원’은 둘보다 더 큰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민간 부분 상호 교류
오늘날 부산에서 아세안문화원은 이전에 멀리 느껴졌던 장소의 문화에 대한 상상과 관심을 촉발하면서 민족 간 교류 정신을 상징하는 기관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전통 의복과 음식을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언어 및 문화 코스를 제공하는 것까지 아세안문화원의 다양한 프로그램은 의미 있고 활발한 대화의 장을 마련해 풀뿌리 차원에서 문화 외교적 연결을 촉진한다. 문화원은 아세안 10개국의 교육 기관이나 전문 기관과 협력해 민간 부분에서의 교류를 상당히 강화해 왔다.

국제 도시인 부산이 해야 할 또 다른 일은 다양한 인구의 통합이다. 현재 약 6만 5천 명의 이주민이 자신들의 기술과 재능을 통해 부산에 기여하고 있고, 이 중 1만 2천 명은 교환 학생이다. 이들 중 아세안 국가에서 온 이들이 가장 큰 공동체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을 부산 사회에 기능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을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아세안문화원은 상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공존을 위해 노력하면서 외국인 주민과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 외교의 추구는 모든 글로벌 도시의 주안점이다. 부산광역시와 부산국제교류재단은 국제적 마인드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다리를 놓고 지역을 연결하면서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 그 활동은 단순히 자매도시 연결을 넘어서서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과의 협동을 강화하고자 한다.

최근에 부산의 글로벌 가시성은 능력 형성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눈에 띄게 성장했다. 2019년에는 콜롬보 프랜 스태프 대학(CPSC)에서 네팔의 의학과 기술 전문인 20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부산에 보내 폴리테크닉과 헬스케어 교육에서 인적 자원 개발을 탐구하도록 했다. 2020년에는 재무와 뱅킹 영역에서 같은 식으로 대표단을 파견할 계획이다. 2019년에만 해도 부산은 스마트 농업, 해양 어장 개발, 심폐 소생(라오스 단독), 도로 안전(에콰도르 단독) 분야에서의 훈련을 유치했다.

글로벌 가시성
지난 4년 동안 부산은 도시의 경제적 잠재력과 유라시아 대륙과의 문화적 관련성을 일깨우기 위해 유라시아 시민 대장정을 이끌어 왔다. 중국, 몽골, 러시아, 폴란드, 독일 5개국의 10개 도시로 떠난 2019년 여정은 두 개의 미션을 추가했다.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삼일절 독립운동의 역사적 발자취를 돌아보고, 1989년의 베를린장벽 붕괴로부터 한국의 통일이라는 복잡한 과업에 대해 배우는 것이 그 둘이었다.

동시에 부산국제교류재단이 운영하는 글로벌센터에서는 이주민과 외국인 거주자를 지원하기 위해 정보와 통역 서비스(13개 언어)와 함께 법률, 이민, 노동, 국제 결혼, 가족 관계, 세금 등 여러 이슈와 관련된 전문적 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세계화가 종종 하나의 도전이 된 격동의 시기에 부산의 경험은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여러 면에서 부산의 경우는 국가와 문화 간 ‘거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재구성하면서 열린 마음과 창의적인 기획을 통해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박화진(Park Hwa-Jin 朴花珍)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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