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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AUTUMN

생활

식재료 이야기 , 요리에도 요긴한 과일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배를 선물로 주고받는다. 가을 낙엽을 연상시키는 황금빛으로 잘 익은 큼지막한 배는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과일 중 하나이자 요리에도 널리 사용되는 과일이며 전통 민간요법에도 자주 이용된다. 또한 최근에는 미세 플라스틱의 대체재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배는 생각만 해도 시원한 과일이다. 황금빛으로 잘 익은 큼지막한 배를 집어 들고 향기만 맡아도 이미 시원하고 달다. 익지 않은 상태에서 팔리는 서양 배와 달리 한국 배는 잘 익은 상태에서 판매되므로 집에 가져오자마자 바로 먹을 수 있다.

배는 수분과 당분에 더해 식이섬유, 칼륨, 비타민 C와 다양한 항산화물질도 함유하고 있다. 과당과 소르비톨이 들어 있어서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날 수 있긴 하지만, 반대로 변비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배는 변비 완화, 숙취 해소, 기침 완화 등의 용도로 이용되어 왔다.

최근에는 배의 높은 칼륨 함유량이 혈압 조정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은 2015년 여름 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의 매니 노크스(Manny Noakes) 교수의 인터뷰였다. 그는 음주 전 한국 배 주스 한 컵을 마시면 숙취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아직 어떤 성분이나 이유 때문에 이런 효과가 나타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국 배 주스가 알코올 대사에 관련된 주요 효소의 활성을 높여 체내에서 알코올이 더 빨리 대사되도록 돕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술을 마시고 난 뒤 보다 음주 전에 배 또는 배 주스를 섭취해야만 이런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 일본, 미국에서 공동으로 행한 이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유전자형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도 한다.

장미과의 백색 과일
서구에서는 종종 사람의 체형을 ‘사과형’, ‘배형’으로 구분하는데 이 과일들의 생김새 차이 때문이다. 위쪽이 두툼하고 아래로 갈수록 홀쭉해지는 사과와는 반대로 배는 아래쪽이 불룩한 전구 같은 모양이다. 사과형은 대개 뱃살이 두둑하여 허리둘레가 굵고, 배형은 허리는 비교적 가늘지만 엉덩이에 지방이 많다. 사과형 체형은 주로 남성에게 많은데 허리둘레가 늘어나 있다는 것은 내장 지방이 많다는 의미여서 당뇨병, 심장병 위험이 높은 대사성 증후군일 가능성이 높다.

서양과 달리 한국에서 주로 먹는 사과와 배는 모양이 비슷하다. 그런 이유로 아시아 배를 ‘사과 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상 사과보다는 배가 큼지막하며 겉이 붉거나 푸른 사과와 달리 배는 황금빛으로 밝은 갈색을 띠고 있지만, 둥그스름한 모양만큼은 별 차이가 없다. 사실 사과와 배는 가까운 친척 관계로 둘 다 장미과에 속한다. 모두 유라시아를 원산지로 하며, 꽃받침이 부풀어서 만들어진 열매인 이과(pome 梨果)다. 하지만 한 입 깨물어 보면 질감만으로도 사과와 배를 바로 구분할 수 있다. 사과는 부피의 1/4을 공기가 차지하고 있어서 조금 퍼석한 느낌이 들지만, 배는 깨물자마자 수분이 터져 나온다.

배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후식용 과일 중 하나이면서 요리에도 자주 쓰인다. 또한 예로부터 기침 완화, 숙취 해소, 변비 완화 등의 효과가 있어 민간 요법에도 널리 사용되어 왔다.

음식 맛을 돋우는 고명
한국에서 배는 요리에도 자주 쓰인다. 배에는 단백질 분해 효소가 들어 있어서 불고기나 갈비를 양념에 재울 때 고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기도 하고, 아삭하고 달콤한 식감 때문에 육회에 곁들여 먹기도 한다.

과거 기록을 보면 다양한 요리에 배를 채 썰어 고명으로 얹어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연중 행사와 풍속을 다룬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에는 “잡채와 배, 밤, 소고기, 돼지고기 썬 것과 기름, 간장을 메밀국수에 섞은 것을 골동면이라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근대 조리서인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 1921년판에는 비빔밥에 배를 얇게 저며서 채친 것을 고명으로 올려서 먹도록 권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인 1924년에 발간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잡채의 재료 중 하나로 배를 넣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배 하면 떠오르는 것은 시원한 동치미와 냉면이다. 20세기 초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요릿집이었던 명월관에서는 조선 왕실 방식으로 동치미말이 국수를 선보여 대성공을 거뒀다. 1900년대 초에 나온 『부인필지(夫人必知)』라는 책을 보면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 무∙배∙유자를 얇게 저며 넣은 후 삶은 돼지고기를 얇게 썰고 달걀을 부쳐 채쳐 넣고, 후추∙배∙잣을 넣은 것이 바로 명월관 냉면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요즘 한식당에서는 비빔밥이나 잡채에 얹은 배 고명을 보기 어렵지만, 냉면이나 차가운 비빔국수에는 여전히 얇게 저민 배를 곁들여 낸다. 동치미를 담글 때 통배를 넣어 시원한 풍미를 더하는 것 역시 한국 가정 요리와 요식업에서 모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방식이다.

향이 진한 야생종 배
과거에는 배를 그대로 먹기에는 까칠하고 맛도 시큼한 편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가정 살림 백과사전인 『규합총서(閨閤叢書)』(1809)에는 배를 이용해서 만드는 ‘향설고’라는 별식이 등장하는데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시고 단단한 문배를 껍질을 벗기고 길이로 등분하여 모양을 낸 다음 통후추를 많이 박는다. 솥에 꿀물을 부은 뒤 얇게 저민 생강과 함께 넣고, 빛이 붉어지고 꿀이 속속들이 밴 후 씨가 무를 때까지 뭉근한 불에 서서히 조리면 된다. 배가 시어야 빛이 붉게 되고 시지 않을 땐 오미자국을 조금 치면 좋다. 마른 정과에 곁들여 쓰려면 국물을 졸여 단단한 기운이 있게 하고, 수정과로 쓰려면 졸이는 것을 덜 졸여 꿀물을 넉넉히 해서 계피가루를 조금 타고 통잣을 뿌려서 쓴다.”

배를 조각내어 젓가락으로 구멍을 낸 다음 후추를 박고 생강, 꿀을 함께 넣고 끓여 만드는 배숙도 향설고와 비슷한 음식이다. 이들 요리에 사용되는 문배는 크기가 작고 단단하며 단맛은 덜하고 신맛이 강해서 지금 기준으로 보면 돌배라고 할 수 있다. 야생 배나무에 열리는 열매는 서양 배나 아시아 배 할 것 없이 모두 단단한 돌배다. 셀룰로스와 리그닌이 풍부한 석세포가 들어 있어서 모래알같이 까끌하다. 과육이 부드럽고 꿀물처럼 달콤하며 과즙이 풍부한 배는 육종 전문가들에 의한 품종 개량의 결과다. 맛은 개량한 배보다 덜하지만, 향만큼은 야생종에 가까운 문배가 더 진하다. 생강과 후추를 함께 넣고 끓여도 결코 눌리지 않는 향이다.

작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정상회담 만찬주로 함께한 문배주는 평안도 지역 재래종 돌배인 문배의 향이 난다고 하여 이름이 문배주이다. 문배가 재료로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 향을 내니, 문배 맛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번 맛볼 만하다. 그런가 하면 전주 지방의 이강주는 배의 풍미를 녹여낸 술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다. 쌀과 누룩으로 발효 증류하여 만든 소주에 배, 생강, 율금, 계피, 꿀을 넣어 숙성시켜 만든다.

배는 아삭한 식감과 달콤한 맛 때문에 비릿한 육회에 곁들여 먹는다.

배에는 단백질 분해 효소가 들어 있어서 불고기나 갈비를 양념에 재울 때 고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기도 하고, 아삭하고 달콤한 식감 때문에 육회에 곁들여 먹기도 한다.

미세 플라스틱 대체재
최근 한국에서는 배를 미세 플라스틱을 대체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전에 육종 전문가들이 배의 까끌까끌한 석세포를 줄여서 부드러운 식감을 내는 데 힘쓴 것과는 반대로 배의 석세포를 화장품과 치약에 들어가는 미세 플라스틱 대체재로 이용하려는 것이다.

까칠한 석세포는 식용으로는 인기가 없지만 화장품의 각질 제거제나 치약 속 연마제로 쓰이는 미세 플라스틱을 대신하기에는 훌륭하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좋은 결실을 맺으면 주스나 통조림용으로 가공하고 남은 배나 땅에 떨어지거나 손상되어 먹을 수 없는 배를 버리지 않고 활용하면서 한편으로는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얇게 채 썬 배는 물냉면을 비롯해 다양한 요리에 고명으로 쓰인다.

배에 후추를 박아 저민 생강과 함께 꿀물에 끓여 식힌 음료인 배숙은 기침 치료제로 쓰였던 궁중음식이다.

정재훈(Jeong Jae-hoon 鄭載勳) 약사, 푸드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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