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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AUTUMN

생활

한국의 벗들 고속열차에서 파티세리로 궤도를 바꾸다

엘리트 엔지니어인 기욤 디에프반스(Guillaume Diepvens)는 한국 최초의 고속철도 시스템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일시적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다 고국 프랑스의 빵에 대한 사랑과 사업 정신으로 예기치 못한 직업의 궤도로 들어섰다. 서울에서 빵집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고속철도 엔지니어로 2002년부터 한국에서 일하게 된 기욤 디에프반스는 이후 진로를 바꿔 11년째 정통 프랑스빵을 만들고 있다.

당신이 예를 들어, 현대엔지니어링 건설회사의 한국인 엔지니어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곳에서 먹는 당신의 주식인 쌀밥과 김치가 만족스럽지 못해 하루라도 제대로 된 한국식 식사를 하고 싶어 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가능하면 빨리 파견 근무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면 집밥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기 위해 가능하면 자주 한국에 다니러 오려고 할 수 있다.

기욤 디에프반스 씨는 한국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 프랑스인은 아주 다른 선택을 했다. 한국에 머무르면서 제대로 된 프랑스 빵집을 운영하기로 한 것이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쌀이 주식인 아시아에 프랑스빵을 전파해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에? 사업적 도약을 하고 싶은 오래되고 억눌렸던 욕망 때문에? 대기업에서 일하는 일이 피곤해져서? 아니면 이 모든 것들 때문에?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손님으로 찾아온 한국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디에프반스 씨가 이러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과 사랑에 빠진 것이냐는 질문에 44세의 이 프랑스인은 질문으로 응대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여기서 17년을 살았겠어요?”

그는 한국에 온 지 6년 만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청담동에 프랑스 빵집 ‘메종 기욤’을 차렸다.

안전하고 편리한 나라
디에프반스 씨는 한국에서의 삶을 “캐주얼”이라는 말 한마디로 요약했다. 좀 더 설명을 덧붙여 달라는 말에 그는 한국이 외국인에게 “안전하고 편한” 곳이라고 했다. 특히 편리한 대중교통 시스템과 일상에 필요한 용품을 쉽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프랑스의 작은 농촌 마을 출신인 그는 파리에서 2년을 살고 미국에서 8개월 체류한 경험이 있는데 두 곳 모두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서울이 문화생활 측면에서 강남의 청담동을 벗어나면 고급스럽거나 화려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외국인에게는 유럽이나 미국의 대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편리합니다.”라고 디에프반스 씨는 말한다. 파리의 지하철 시스템에서 겪었던 불쾌한 상황을 서울에서 다시 경험하지 않은 것도 그에겐 또 하나의 이점이었다.

“물론 한국을 사랑해요. 하지만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어요. 서서히 좋아하게 된 거죠.”라고 그는 말한다. 한국 체류 초기 시절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어를 말하는 건 둘째 치고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거였다. 불어와 영어는 어휘나 문장 구조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는 완전히 낯선 언어에만 맞닥뜨린 게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아주 달라요. 언어뿐만 아니라 사고 방식에서도요.”라고 그는 말한다.

디에프반스 씨는 2002년에 철도운송 관련한 프랑스 다국적 기업인 알스톰(Alstom)의 직원으로 한국에 왔다. 프랑스의 엔지니어라면 누구나 일하고 싶은 회사인 알스톰이지만 파리테크 국립고등기술공예학교(Arts et Métiers ParisTech) 졸업생인 디에프반스 씨에게 이 회사 취업은 레드 카펫을 밟는 것과 같았다. 1780년에 설립된 이 명망 높은 파리테크 학교는 8만 5,000명의 엔지니어를 배출했고 이들은 기초 산업에서부터 항공우주 산업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알스톰은 디에프반스 씨의 첫 직장이었고 서울은 그의 첫 근무지였다. 그의 과제는 KTX 고속철도 시스템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거였다. 하지만 6년 후에 이 엘리트 엔지니어는 알스톰을 떠나 서울 강남 지역에 파티세리 ‘메종 기욤’을 열고 이에 전념하게 된다.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맛있는 프랑스빵을 맛보게 하기 위해 베이커리를 열고 싶었어요. 한국의 빵 중 프랑스빵에 상당히 가까운 것도 있지만 진짜는 아니에요.”라고 그는 설명한다.

“한국 사람들이 정말 맛있는 프랑스빵을 맛보게 하기 위해 베이커리를 열고 싶었어요.
한국의 빵 중 프랑스빵에 상당히 가까운 것도 있지만 진짜는 아니에요.”

엔지니어링과 작별하다
축적 모형 대신 구이판과 오븐을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당연히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그의 이 같은 드라마틱한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디에프반스 씨는 빵 만드는 일에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다. “저한테도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며칠 동안 결정을 고민했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부모님은 처음엔 반대했지만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다. “저의 부모님은 상당히 열린 사고를 갖고 계셨죠.”라고 그는 말한다.

디에프반스 씨는 프랑스로 돌아가 한 달 집중 코스를 통해 빵 만드는 법을 배운 후 경험 있는 파티시에 두 명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베이커리 운영을 돕게 했다. 마스터 제빵사들은 결국 프랑스로 돌아갔고 디에프반스 씨는 이제 두 개의 베이커리를 몇 명의 파트타임 프랑스 직원들과 운영하고 있다. 그의 두 번째 가게는 최근 서울의 남쪽에 위치한 판교에 문을 열었다.

“프랑스 마스터 제빵사들이 한국을 떠난 주 이유는 문화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라고 디에프반스 씨는 설명한다. 그 차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하기는 삼갔다.

포도빵(pain aux raisins)과 마카롱, 밀푀유 등 메종 기욤에서 판매하는 프랑스빵들.

문화 차이
“저는 한국말을 못하고 한국식 문화를 모르는 프랑스 요리사는 경험자라도 더 이상 고용하지 않습니다.”라고 디에프반스 씨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마스터 요리사를 고용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자신이 마스터 요리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분홍색 인테리어를 한 ‘메종 기욤’ 빵집에는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프랑스빵과 여러 가지 디저트 쿠키가 우아하게 진열되어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예쁜 파스텔 색의 마카롱, ‘천 장의 잎’으로 만들어진 파이인 밀푀유, 입 속에서 바로 녹는, 계란 흰자와 설탕으로 만든 귀여운 머랭이다.

메종 기욤의 정통 프랑스빵과 쿠키가 한국인의 입맛을 매료시키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008년에 문을 연 베이커리는 몇몇 사업체와의 경쟁에도 불구하고 시장 점유율 방어에 성공하며 지속적으로 번창했다.

디에프반스 씨의 성공 열쇠는 프랑스 요리법과 한국인의 입맛이 조화를 이루도록 끊임없이 ‘지역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에릭케제르(Erci Kayer)나 라뒤레(Ladurée) 같은 고급 프랑스 베이커리가 한국에 진출하는 것을 환영한다. 왜냐하면 이는 더 많은 한국인들이 프랑스 빵을 인정한다는 표시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요리를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려고 애쓰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빵과 이와 관련된 식재료, 잼이나 크림 같은 품목에 계속해서 집중할 생각이다.

디에프반스 씨는 현재 서울역 근처의 오래된 동네인 후암동에 살고 있다. “독신도 아니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는 하이킹과 자전거 타기를 즐긴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한국 곳곳을 여행했다. “요즘은 시간이 날 때면 그냥 산책을 합니다. 종종 개를 데리고요.” 아마도 파티시에 일은 머리뿐 아니라 체력도 필요해 다른 운동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많이 남지 않는 듯하다.

2008년에 문을 연 메종 기욤은 한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서울 강남에 이어 최근에는 경기도 판교에 2호점을 냈다.

소박한 채식주의자 입맛
채식주의자인 디에프반스 씨는 비빔밥(그의 경우 고기는 빼고), 칼국수, 수제비 같은 간단한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그는 가끔 동대문 근처의 광장시장에 들러 빈대떡을 사먹는다. 음식 기호로 따지면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노동자 계급이다.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뭐냐는 질문에 디에프반스 씨는 부족한 언어 능력과 한국인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대한 경험 부족을 들었다. “제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빵 만들기뿐 아니라 한국어를 먼저 배울 것 같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직업과 거주지를 바꾼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번 결정한 것은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제가 결정한 거니까요.”

현재로서는 치솟는 임대료가 서울에서 영업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걱정 중 하나이다. 그는 최근에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있는 가게 문을 닫아야 했는데 가게 주인이 짧은 기간 동안 임대료를 너무 많이 올렸기 때문이다. “임대료가 그냥 오르는 게 아니라 약간 과장하면 하루 밤새 두 배가 되어 버렸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디에프반스 씨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이다.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문제는 현재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제가 살고 있는 후암동에 인기 장소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또 치솟을 임대료 때문에 걱정이 되네요.”라고 그는 말한다.

최성진 한국바이오메디칼리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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