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2019 AUTUMN

문화 예술

전통 유산을 지키는 사람들 대나무에서 뽑은 실로 갓의 테를 짜다

한국 남성의 전통 관모인 갓은 일상에서는 퇴화됐지만 제작 기술과 체계는 여전히 보전되고 있다. 대나무를 삶고 말려 가늘게 쪼개 뽑아낸 실로 갓의 테를 4대째 만들고 있는 모녀를 만나 보았다.

장순자 씨는 갓의 차양을 만드는 일을 자신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아 제주 여성의 오랜 수공예 전통을 지켜 나가고 있다. 그는 뛰어난 솜씨를 인정받아 2000년 국가무형문화재 갓일 양태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갓은 한국의 전통 모자다. 그러나 ‘모자’라는 단어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갓은 과거에 일정 신분 이상의 성인 남자가 쓰던 모자였고, 그들은 바깥 출입을 할 때 도포와 갓을 갖춰야 복식의 격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그뿐일까. 상중인 사람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조상의 묘를 지키지 못할 경우엔 큰 방갓을 써서 감히 하늘을 볼 수 없는 참담한 마음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처럼 갓은 일상이며 의례인 동시에 신분을 구별하는 도구이자 사상을 담는 그릇이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 서구식 의습이 뿌리를 내리며 생활 속의 갓은 그 모든 의미와 함께 사라져갔다. 그리고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옛 물건’으로 남았다. 놀라운 것은 일상에서 사라진 이 물건의 제작 체계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갓은 둥근 차양(양태)을 만드는 일, 가운데 볼록하게 솟은 부분(총모자)을 만드는 일, 그 둘을 조립하여 마감하는 일이 각기 분업화되어 있다. 그리고 각 영역의 제작과 기술 전수가 자체적으로 이뤄지는데, 지금껏 그 분업 체계가 와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에 등록된 기능보유자만 양태장 한 명, 총모자장 한 명, 입자장(笠子匠) 두 명 등 총 네 명이다. 바꿔 말하면 갓은 한 사람의 손에서 온전히 완성될 수도 없고, 한 사람이 완벽에 가까운 성과를 낼지라도 그 결과물은 궁극적으로 불완전한 상태에 그친다.

이 다면적인 물건의 시간을 짚다가 그 속에 삶의 근간을 세운 한 가계를 만났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업을 물려받아 2000년 국가무형문화재 갓일 양태 기능보유자가 된 장순자(張順子), 그리고 3년 전 4대 전승자의 삶을 시작한 장 씨의 딸 양금미(梁錦美) 씨가 그들이다. 이 모녀에게 모계로 이어져온 양태 이야기를 들었다.

쌀과 바꾼 일
“다른 어머니들은 고사리철엔 고사리도 따러 가고 봄에는 바닷가에서 해물도 캐다 먹이는데, 우리 어머니는 죽으나 사나 이것만 했어. 이걸 짜야 쌀을 받아먹는다고. 학교 갔다 와도 어머니 곁에 오질 못하게 해. 멀리 앉아라, 물러나 앉아라…. 입김의 수분이 양태에 밴다고.”

살기 어렵던 시절, 대나무실로 짜는 양태는 제주항 인근 5개 마을 아낙들에게 생활의 젖줄이었다. 물질을 하지 않는 마을 여성들은 양태청이라는 공동 작업장에 모여 양태를 짰다. 그 양태를 배에 실어 육지로 보내면 통영, 예산 등지에서 총모자와 조립해 완성품 갓을 전국에 유통시켰다. 어린 딸의 입김까지 단속하던 장 씨 어머니의 양태는 제주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한동안 대가 끊겼던 국가무형문화재 양태 기능보유자로 장 씨의 어머니가 지정된 것도 오랜 입소문 덕이었다.

“어렸을 때 친구들끼리 동네 큰 집에 모여서 놀이처럼 양태를 짰어. 누가 먼저 한도리 돌았나 경쟁하면서 말야. 차양의 동그란 원을 한도리라고 하거든. 양태 바구니를 새벽같이 갖다놓고선 밥 먹고 다시 갔어. 서로 창가에 앉으려고 자리 싸움을 하니까 미리 맡아놓는 거지. 그때는 전깃불이 없었잖아. 양태는 밝은 데서 찬찬하게 해야 되거든.”

장 씨는 젊었을 적엔 사업을 하고 싶었다. “일당 받으며 품팔이 다니지 말고 스스로 노력해서 할 일을 개척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인생의 나침반이었다. 그래서 대나무 장사에 도전했다. 양태 만들 대나무를 공급하는 일이었다. 한번 육지로 올라가면 담양의 대밭을 60일씩 누볐다.

“20개월 된 분죽 중에서 마디가 넓은 걸로 찾아야 해. 그게 흔치 않았어. 왕대는 마디가 길어서 구하기 쉽지만, 억세서 손을 다칠 수도 있고 실도 가늘게 안 나오거든. 큰 마당이 있는 집을 빌려서 대나무를 마차로 열 대 정도는 실어왔지. 그걸 마디 하나하나 톱으로 잘랐어. 잘못 하다간 실 나오는 줄기를 막아서 실을 못 뽑으니 자르는 것도 기술이었지. 에휴, 지금 생각하면 못할 일 많이 했지. 그래도 11년 동안 돈은 많이 벌었어.”

이후 감귤 장사로 더 큰 돈을 벌다가 양태일을 이어받기로 한 것은 그의 나이 마흔 셋 되던 해였다. 양태 작업의 핵심이 대를 다뤄 실을 얻는 과정이었기에, 대만 보고 만지던 거친 세월이 약이 되었다. 양잿물과 재를 넣어 이틀간 삶고 말린 대에 칼금을 내고 얼마나 가늘게 뽑아내는지가 실 만들기의 핵심이었다. 그는 약 1센티미터 너비로 깎아낸 대에서 50~70가닥의 실을 뽑는다고 했다. 굵기 별로 열여덟 종류의 실을 뽑는데 머리카락보다 가는 실도 있다.

장순자 씨와 그의 일을 이어받은 딸 양금미 씨가 대나무실을 만들고 있다. 양잿물과 재를 넣어 이틀간 삶고 말린 대를 약 1센티미터 너비로 깎아낸 대에서 50~70가닥의 실을 뽑아 낸다.

양태는 원형으로 된 판에 살대를 둥글게 펼친 다음 가장 가는 대나무실을 네 올씩 꼬아 가며 중심으로부터 가장자리를 향해 엮어 나간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실의 굵기가 조금씩 굵어지며 섬세한 균형을 이룬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대나무 실
“칼금을 낸다지만 그게 눈에 보이질 않으니 손의 감각으로 하는 거지. 하고 나면 손이 험악해져. 그런데 하는 동안에는 몰라. 대 끝에만 집중하니까.”

두껍게 변형된 손톱, 지문이 닳아나간 손끝으로 그는 실을 엮는다. 원형의 나무판에 놓고 네 올씩 엮어가는 기술은 대단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공간의 크기를 읽어야 하고 그에 맞춰 굵기가 다른 실을 적절히 운용해야 하는 일이다. 총모자에 가까운 좁은 공간 쪽엔 가장 가는 실을 쓰고, 공간이 헐렁한 바깥으로 갈수록 굵은 실을 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열여덟 종류의 실 약 300~500올을 사용해 하나의 갓을 완성하는 동안 깨지면 안 될 것이 바로 균형인 것이다. “양태가 얼마나 넓고 촘촘하게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갓의 품위와 위용이 결정된다”고 곁에 있던 딸 양금미 씨가 얘기를 거들었다. 촘촘한 양태에 걸러진 햇빛이 착용자의 얼굴에 은은하고도 옅은 그림자를 드리울 때 갓의 고유한 품위와 아름다움을 새삼 실감하는 법이다. 양 씨가 덧붙였다.

“입자장이 대나무로 짠 양태, 말총으로 짠 총모자를 조립할 때 대나무실이나 명주실을 댄다거나 명주천을 한 번 덧씌우거든요. 이렇게 섬세하게 작업된 모자는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 거예요. 요즈음 영화나 여러 영상 매체에서 접하는 갓은 대부분이 모형인데 그것들과는 전혀 달라요.”

두껍게 변형된 손톱, 지문이 닳아나간 손끝으로 그는 실을 엮는다.
원형의 나무판에 놓고 네 올씩 엮어가는 기술은 대단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공간의 크기를 읽어야 하고 그에 맞춰 굵기가 다른 실을 적절히 운용해야 하는 일이다.

전시관에 인생을 담다
이야기 사이 짧은 침묵이 지날 때마다 장 씨의 말머리가 자꾸 흘러가는 곳이 있었다. 2009년 지은 갓 전시관 얘기였다.

“도청에서는 양태가 문화재로서 가치가 없다고 하길래 직접 문화재청에 찾아가서 예산 8억 9천만 원을 지원받았지. 아무 데나 못 짓는다 해서 과수원 3천 평 판 돈으로 부지 800평을 사서 제주도에 기부채납한 거야. 짓기까지 무시도 많이 당하고 고생도 많았지.”

전시관은 그의 돈과 기억, 신념, 그리고 세월까지 모두 모인 곳이었다.

“동네에서 이장을 할까, 도의원에 도전해 볼까 망설일 때 문화재청에서 어머니한테 후계자 세우라고 재촉하는 거야. 고민이 됐지. 이게 고독하게 혼자 하는 작업이잖아. 생각 끝에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 맘먹었어. 작품 꾸준히 만들면서 십수 년을 기다렸고, 62세에 보유자가 되면서 뭐라도 역사에 남겨야겠다 싶어서 전시관을 가슴에 품었어. 그때부터 돈을 아끼기 시작했지.”

일생을 전시관 안팎에 담으려는 팔순의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옆에는 자신의 대를 이어 양태로 새 삶을 시작한 딸이 있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디자이너로 생활하던 양금미 씨는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 끝에 직장을 그만두고 3년 전 귀향했다.

“살면서 이 일을 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자식들 중 누군가는 받아야 할 일이었지만,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 일이 저한테 온 거예요. 가정이 없어서 시간이 많다는 이유가 컸죠. 아직은 책임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밀감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전승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아요. 갓의 수요요? 수요라고 해봤자 1년에 몇 채 안되고, 세 장인이 같이 만드니 가격도 한 채에 천만 원이 넘어가거든요.”

하지만 그는 4대 전승자로서의 역할과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안다. 가늘고 잘 부러지는 대나무실의 내구성을 강화해 상품화하려는 시도는 물론, 양태 기법과 소재를 현대화시키는 연구를 틈틈이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온전한 제주 갓을 완성해서 완성에 대한 숙명적 갈증을 풀고 싶다고도 했다. 얘기를 들으며 딸의 맑은 성정과 능력을 거듭 논하던 장 씨가 말했다. 내가 작품도 충분히 준비해 놓고 길 다 닦아놨기 때문에 너는 놀지 말고 네 작품만 만들면 된다고. 딸이 웃으며 되묻는다. 엄마는 내가 희생하는 부분은 생각지 않느냐고. 어머니 역시 웃으며 농담을 섞는다. 희생일 수도 있는데 내가 봤을 땐 누워서 떡먹기라고. 다정한 모녀가 서로의 입장을 내세우며 투닥댄다. 그 끝에 장 씨가 하는 말.

“직장 다니면 언젠가는 퇴직할 거 아냐. 그래서 이 기술을 배워서 보유자 길을 걸어가고, 같은 인생 살더라도 사람답게 살라는 거지. 난 딸 불러들여서 이걸 이어갈 수 있게 한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스스로도 잘했다 칭찬해. 내가 죽으면 딸이 완전히 맡으니까 나는 손뼉치고 가는 거야.”

그가 전시관 내부를 설명해 주며 관람자의 속내를 스리슬쩍 들춘다. 전시관이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냐고, 사람들이 보러올 만하냐고. 기대에 모자라지 않을 답을 그에게 남기며 생각했다.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보전하려는 욕망과 의지에 대하여, 그것을 기꺼이 안고 사는 ‘대물림’이라는 숭고하고도 무거운 단어에 대하여.

조선 시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썼던 갓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는데, 특히 갓을 고정시키기 위해 묶는 갓끈은 호박이나 산호 같은 보석으로 장식해 아름다움을 더 했다.

갓은 역사 드라마에서 남성들의 아름다움과 품위를 더해 주는 의상으로 큰 역할을 한다. 특히 섬세하게 잘 짜여진 양태는 얼굴에 은은한 그림자를 드리워 격조를 높여 준다.

강신재(Kang Shin-jae 姜信哉) 자유기고가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