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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UMMER

생활

인문학 기행 문경의 세 갈래 고갯길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 남쪽으로부터 쳐들어 오는 적을 막아 수도권을 지키기 위한 국방의 요새. 문경 새재가 불러오는 단상들이다. 예로부터 영남 지방의 관문 역할을 해 온 경상북도 문경의 고갯길을 걸어 본다.

영남대로 능선 중 가장 높은 주흘산의‘부봉(釜峯)’에서 내려다본 문경새재.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40분가량 걸리는 문경새재는 그 역사가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로부터 중요한 교통로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지금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 유적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로 붐빈다.

한국어에서 자주 쓰이는‘분수령(分水嶺)’이라는 말은 ‘분수계(分水界 drainage divide)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산지가 70퍼센트인 한반도에서 수계를 나누는 기점은 대개 고갯마루처럼 높기 때문에 그 경계를 고개로 대신한 말이다.

산봉우리와 분수령을 잇달아 이어 놓은 것이 한국의 산줄기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분수령에서 갈라지는 물의 행로에 따라 산줄기의 위상이 달라진다. 곧 고갯마루에서 이쪽과 저쪽으로 나뉜 물이 다시 만나지 않고 서로 다른 하구로, 바다로 흘러간다면 그 분수령에는 더 높은 품격이 부여된다. 한반도 북단의 백두산에서 시작해 이런 품격 있는 분수령을 따라 남쪽의 지리산까지 1,600㎞가 넘는 큰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부른다. 한국인들은 이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종주하는 것을 명예롭게 여긴다.

근대의 축척 개념을 적용해 세밀한 지형도를 그린 조선 시대의 지리학자 김정호(1804~1866 추정)는 만년에 백두대간의 산줄기와 하천, 고을을 용이나 태극의 모습으로 형상화해 그린 목판본 생활 지도를 따로 만들어 보급했다. 바로 유명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이다. 그 배경에는 백두대간을 한반도 자연 지리의 상징이자 이 땅의 문화와 사회, 역사, 환경을 이해하는 바탕으로 여겼던 그의 자연관이 있었다. 애국가 첫 소절에 백두산이 등장하고, 초등학교를 비롯해 각급 학교의 교가(校歌)마다 어김없이 인근 산의 정기를 이어받았음을 강조하는 가사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경새재의 제1관문 주흘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이 지역의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가치가 새로이 인식되어 1708년 조령산성을 축성하면서 세워졌다.

삼국의 각축이 심했던 5 세기경에 축조된 약 1.6 km 길이의 고모산성은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다. 성벽에 올라서면 주변의 빼어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세와 현세를 잇는 길
중부 내륙 지방의 충주 수안보에서 남동쪽을 향해 자동차로 20분쯤 달리면 옛 도요지가 나온다. 여기에 차를 두고 굽은 길을 두어 번 돌아 걸어가면 훼손된 석탑과 거대한 돌미륵상이 서 있는 옛 절터를 만난다. 고려 시대 위용을 자랑했던 미륵대원 터다. 돌미륵상은 보수 중이다. 무상한 마음에 발걸음은 표석을 따라 하늘재로 향한다. 굽은 길을 따라 펼쳐진 숲은 울창하지만 걷는 이를 위압하진 않는다. 길이 아늑하고 편안하니 저절로 걸음이 느려지고, 눈길은 한가로이 기이한 형상의 나무와 바위 틈 사이에 핀 들꽃에 머문다. 숨이 가빠질 즈음 야트막한 고갯마루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우리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다. 내리막길은 문경 땅이다. 이 고갯마루에 비가 내려 문경 쪽으로 흐르면 낙동강 물이, 충주 쪽으로 흐르면 한강 물이 된다. 충주 쪽의 지명은 내세를 뜻하는 ‘미륵리’이고, 문경 쪽은 현세를 뜻하는 ‘관음리’다. 관음리 길에도 석불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아쉽게도 이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하늘재의 옛 이름은 계립령, 즉 ‘닭이 서 있는 모양을 한 고개’이다. 역사서 『삼국사기』(1145)에는 “156년, 신라의 아달라 왕이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阿達羅尼師今 三年 夏四月 開鷄立嶺路)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신중한 역사학자들은 이 고개를 기원전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부족 국가들이 만든 교통로로 추정한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 세 나라가 한반도의 중앙을 관통하는 한강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이곳을 놓고 수백 년 동안 다투긴 했지만 그 시기의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고 왕권도 약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접경지 길목이라 해서 항상 군인들만 들끓은 것은 아니다. 이 고갯길은 오래 전부터 남북에서 생산된 물산이 오가던 길목이었으며, 아도화상(阿道和尙)이라는 고구려의 승려가 처음으로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넘어온 길이기도 하다. 이 고갯길을 넘어 아도화상이 포교를 했다는 구미에 있는 모례(毛禮)마을은 오늘날 신라 불교의 성지로 대접받고 있다.

하늘재를 넘어 북쪽을 향해 길을 떠났던 야심찬 신라인들의 목적지는 문화 예술의 황금기를 이룬 당나라였다. 경주에서 출발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가려면 여러 도시를 지나 문경에서 하늘재를 넘은 뒤 충주에서 한강 수로를 타고 서해안으로 나가 당은포(唐恩浦)에서 배를 타고 북쪽의 연안 항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승려 원효(617~686)와 의상(625~702)은 최소한 이 길을 두 번 오갔다. 서른네 살의 원효는 650년 의상과 함께 이 고개를 넘어 당시 유행하던 당나라 유학길에 나섰다가 요동에서 고구려 국경 수비대에 붙잡혀 되돌아왔다. 그로부터 10년 뒤 원효는 다시 한 번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은포에서 배를 기다리다 불현듯 의상과 헤어져 되돌아온다. 잠결에 마신 달고 시원한 물이 깨어나 보니 해골에 고인 빗물이라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해동고승전』(1215)에 전한다. 그 뒤 원효는 성당(盛唐) 문화가 압도하던 시기에 독자적인 사상 체계로 한국 불교사에 큰 자취를 남겼으며, 의상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신라 불교의 성행을 이끌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국운이 기울자 935년 고려에 항복했다. 고려에 귀의해 수도 개경에서 만년을 보낸 경순왕이나 신라의 재건을 다지며 금강산으로 들어간 그의 아들 마의태자나 뜻은 달랐지만 모두 이 하늘재를 넘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1594년 중성(中城) 축성과 함께 만들어진 제2관문 조곡관은 문경새재의 관문들 중 가장 먼저 세워졌으며, 다른 관문들에 비해 주변 산세가 험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더 가파른 고갯길로
고려 시대 미륵대원은 공무로 길을 떠난 관리나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역원(驛院)의 관리를 대행했던 사찰이자 인기 있는 여행지이기도 했다. 김변(金賆)이란 사람의 처 허(許) 씨(1255~1324)의 묘지명은 그 시절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허 씨는 남편이 죽자 무덤 부근에 절을 짓고 금은으로 사경(寫經)을 하는 등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10년이 넘게 불사를 했다. 그러다 57세 때 길을 떠나 이름난 사찰과 명산을 순례하였는데 그녀가 예를 올린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미륵대원의 석불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고 남녀의 사회적 지위가 비교적 평등했던 고려 시대 여성들의 성지 순례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늘재에서 남쪽으로 40분쯤 오르면 탄항산 정상이다. 여기서 평탄한 능선을 따라 봉우리 몇 개를 지나면 첩첩이 늘어선 산 사이로 문경 새재의 3관문인 조령관이 내려다보인다. 이곳 또한 조령관 지붕에 빗물이 떨어져 북서쪽인 충주로 흐르면 한강 물, 남동쪽인 문경 쪽으로 흐르면 낙동강 물이 되는 분수령이다. 조령관에서 문경 쪽으로 2관문 조곡관을 지나 1관문 주흘관으로 이어진 길이 바로 충주와 문경을 오가는 새재 길이다. 하늘재에서 능선을 타면 새재까지 반나절 거리다.

문경 새재는 조선이 건국 초기에 크게 개척해 500년 동안 한양과 동래, 즉 오늘날의 서울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의 중요한 교통로이자 고갯길로 이름을 떨쳤다. 그렇다면 왜 조선은 천년이 넘게 이용해 온 평탄한 하늘재를 버리고 해발 100여 미터나 더 높고 더 가파른 새재를 개척했을까?

유림의 길
하늘재는 조세로 거둔 곡물 따위를 운반하는 조운선(漕運船)이 오가던 한강 수로와 이어진 교통로라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한때 일본을 위협하던 원나라와 고려가 쇠퇴기에 들어서면서 바다에는 왜구가 창궐했다. 왜구들의 노략질이 일상화되자 수운(水運)은 점점 약화되었다. 몽골과 홍건적의 침입을 막지 못해 방어선으로서 하늘재의 역할도 무색해졌다. 반면에 새재는 방어에 유리한 험로(險路)였고, 육로로 오간다면 이 길이 더 짧았다.

왜구들은 조선 초기까지 들끓었다. 조선의 3대 군주 태종(재위 기간 1400~1418) 은 무력과 무역이라는 두 가지 수단으로 왜구의 도발을 억제하는 한편 빠른 통신과 교통을 위해 전국을 사방으로 연결하는 대로를 구축하고 길목마다 군사들이 주둔하며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역참 제도를 시행했다. 큰 산을 넘거나 물을 건너는 자연 거점에 역이나 원을 두었던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역은 30리마다, 원은 10리마다 하나씩 체계적으로 설치했다. 문경 새재가 영남대로의 일부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새재를 이용하자 다른 고개들보다 이동 시간이 빨라졌다. 대로라고 해 봐야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어깨가 부딪치는 정도의 폭에 불과했지만 목축을 하지 않는 농업 국가에서, 또 적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는 나라에서 이 정도의 육로면 부족할 게 없었다.

다만 이 길을 개통하면서 왜 방어를 위한 성벽인 관방(關防)을 설치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방심 때문인지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해 파죽지세로 북진해 올 때 천혜의 요새인 새재 협곡에서 막지 못하고 충주에서 기마전을 펴다 결국 패배했다. 이 소식은 선조(1552~1608)가 수도를 포기하고 달아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영의정 유성룡(1542~1607)의 건의로 새재에 방어 성벽인 2관문을 설치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3개의 관문이 완성된 것은 병자호란 이후인 18세기 초다. 그러나 그 뒤로는 큰 전란이 없어 변방의 경비나 사신 왕래를 위한 관문 역할에 충실했다.

외세의 침략에 의한 부침은 고려나 조선 모두 피할 수 없었지만, 그 길 위에서 벌어진 삶의 모습은 크게 달랐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10개 도시 가운데 절반이 이 영남대로에 걸쳐 있어 새재는 조선의 문화를 지켜볼 수 있는 상징적인 고갯길이 되었다. 관리를 뽑는 시험은 고려 때도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정기적으로 과거 시험을 치렀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 입신양명을 할 수 있었으므로 유학을 공부한 영남 지방의 많은 선비들이 관리 등용의 부푼 꿈을 안고 이 길을 떠났다. 따라서 돌아오는 길은 금의환향하는 축복의 길이자 동시에 부끄러움과 한숨이 서린 길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유림들이 조정에 간언이나 진정을 하러 떠나는 상소(上疏) 길이기도 했다. 유림의 고장 안동 유생들이 상소문을 들고 출발해 문경 새재를 넘는 데 4일이 걸렸고, 조정에 전달해 해석을 받아들고 돌아오는 데는 모두 석 달이 걸렸다. 여기에 왕의 특명을 받고 신분을 감춘 채 지방을 감찰하러 가는 암행어사, 정부의 문서를 전하러 가는 관리, 명승지로 유람을 떠나는 풍류객들로 문경 새재 부근의 역원이나 주막은 붐볐으리라. 1관문과 2관문 사이에는 정자가 있는데 이는 새로 부임하는 경상도 관찰사와 떠나는 관찰사가 관인을 인수인계하던 곳이다. 이 정자 앞에는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작은 폭포도 있다.

문경 새재를 지나는 특별한 손님이라면 일본을 오가던 조선통신사들을 꼽을 수 있다. 임진왜란의 상처를 딛고 두 나라의 교류를 위해 꾸려진 외교 사절단은 조선의 학식과 문화를 대표하는 이들로 400~6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출발해 몇 개 도시를 거쳐 문경 새재를 넘은 뒤 부산에 이르렀다. 이들의 숙식은 모두 지역의 부담이어서 조정에서는 갈 때와 올 때 길을 달리해 부담을 줄이도록 규정했다.

대로라고 해 봐야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어깨가 부딪치는 정도의 폭에 불과했지만 목축을 하지 않는 농업 국가에서, 또 적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는 나라에서 이 정도의 육로면 부족할 게 없었다.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한 길로 유명했던 토끼비리는 벼랑을 깎고 바위를 깨뜨려 만든 길로, 한쪽은 까마득한 벼랑 아래에 영강(穎江)이 흐른다. 현재는 2㎞ 정도만 남아 있으며 그중 절반만 통행이 가능하다. 수백 년 동안 왕래하던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길바닥 바위들이 반들반들하게 닳았다.

이름 없는 이들의 길
3관문에서 몇 개의 바위산을 넘은 뒤 계단이 많고 가파른 길을 1시간 반가량 오르면 해발 1,026m의 조령산 정상이 나온다. 여기서 남쪽으로 3㎞쯤 내려가면 이화령이다. 이곳의 물도 괴산 쪽으로 흐르면 한강에 합류하고, 문경 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에 합류하는 분수령이다.

이화령은 길이 험하고 산짐승의 피해가 두려워 여럿이 함께 어울려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경상도 문경과 충청도 괴산을 동서로 잇는 유일한 길이어서 예부터 존재했을 것이 분명하나 사료는 없다. 다만 어려서 이화령을 넘는 봇짐꾼들이나 소떼를 몰고 넘는 소장수들을 보았다는 노인들의 목격담으로 미루어 충주로 가는 새재의 우회로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안전하고 숙박 시설이 잘 갖춰진 새재 길을 마다하고 여럿이 어울려 이 길로 에둘러 돌아간 사람들은 누구일까. 전국의 장터를 돌며 물건을 팔던 보부상들이었을까. 이들에게는 트집을 잡아 인정이나 뜯어내려는 포졸들이 득실대는 새재 길보다는 산짐승 울음소리를 벗 삼아 여럿이 어울려 넘어가는 이화령 길이 더 나았던 것일까. 역사 속의 그들은 결코 존경받는 신분이 아니었지만, 남다른 기동성과 결속력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면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서 싸웠다.

이화령 옛길은 새재나 하늘재와 달리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영남과 서울을 잇는 신작로로 만들어져 각광을 받다가 1994년에 이화령 터널이, 2001년에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길 옆을 지나면서 지금은 등산객들이나 자전거 동호인들이 오가는 한적한 길이 되었다.

이 세 길 중에 당신이라면 어느 길을 걷는 여행자가 되고 싶은가?

미륵대원 터에 있는 높이 10.6m의 화강암 석조여래입상. 바로 앞에는 높이 6m의 오층석탑과 팔각 석등도 남아 있다. 고려 시대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대원은 사찰과 역원의 역할을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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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기 (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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