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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UMMER

생활

한국의 벗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위한 빛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삶을 사는 건 쉽지 않다. 먼 이국땅에서 그렇게 하기는 아마 더 어려울 것이다. ‘안광훈’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로버트 존 브레넌은 반세기도 더 전에 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뉴질랜드 출신의 브레넌 신부는 이제 ‘빈자의 친구’로 자신의 고향보다 한국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영어로 시작된 대화는 거의 5분도 채 안 되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국어로 바뀌었다. 놀랄 일은 아니다. 53년 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이후 로버트 존 브레넌 신부는 한국인들,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친구로 살며 그들의 언어로 소통했다.

그는 현재 ‘삼양주민연대’의 대표로 봉사하고 있다. 삼양주민연대는 서로 돕는 공동체 조직으로 강북의 가난한 동네인 삼양동 주민들에게 직업과 교육, 거주 관련 지원을 한다. ‘강북’이 암시하는 대로 이곳은 오래된 지역으로, 국제적으로 히트한 싸이의 <강남 스타일>에서 선보인 서울의 부와 최첨단 유행을 상징하는 ‘강남’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곳이다.

로버트 존 브레넌 신부는 뉴질랜드 출신으로 1966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이후 지금까지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아 왔다. 한국인들에게는 ‘빈자의 친구 안광훈 신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공동체 상호 부조
삼양동은 강북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한 곳이다. 작년 여름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가난 체험’을 위해 한 달간 머물기 위해 선택한 곳이기도 하다. 옥탑방에 이사한 후 박 시장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추천으로 새로 생긴 교구 성당의 첫 주임신부가 되면서 1992년부터 삼양동 주민이 된 브레넌 신부에게 인사 전화를 했다.

“제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언덕을 덮고 있는 판잣집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이곳에서도 곧 강제 철거가 시작되겠다고 생각했죠.”라고 브레넌 신부는 기억을 되살렸다.

그가 처음 해야 했던 일은 머물 수 있는 집을 빌리는 거였다. 3년 후 재개발로 이 지역의 집들이 철거되기 시작했다. 브레넌 신부의 집은 주민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는 장소가 되었다. “할 일이 많았어요.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교육하고 그들에게 임시 거주지를 마련하는 것을 포함해서요.”라고 그는 말했다.

이후 1997~98년에 아시아 경제 위기가 닥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브레넌 신부는 한국성공회가 운영하는 자선단체 ‘나눔의 집’과 협력해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직업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주거복지 센터와 마이크로크레딧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렇게 ‘삼양주민연대’가 시작되었다. “중요한 건 주민들이 하나가 되도록 격려하고 공동체를 형성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거였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재개발 프로젝트의 문제점이었던 것들, 폭력배를 동원해 주민들을 위협하고 세입자를 몰아내는 것 같은 일은 이제 많이 개선이 되었어요.”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그는 말한다. 요즘은 일상과 좀 더 밀접하게 연관되는 작은 활동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한다. “막 출산을 한 산모를 위해 사람을 보내 도와주거나 집안일 도우미 제공, 대학생 봉사자를 야간 학교와 연계시켜주는 일 등이죠.”라고 그는 설명했다.

브레넌 신부가 6·25 성골롬반 순교기념비에서 자신과 성이 같은 패트릭 브레넌 신부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정원에 있는 이 기념비는 한국전쟁 중에 목숨을 잃은 7명의 순교 신부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 뉴스뱅크

빈민가의 신부
철거민과 불법 거주자를 위한 브레넌 신부의 활동은 1980년대 서울 서쪽의 목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다가오면서 도시가 한창 정화되고 꾸며지고 있었죠. 그때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 중심가로 가는 길목에 있던 목동에는 낡은 집들이 빼곡했어요. 정부 관리자들의 눈에는 그게 눈엣가시였어요.”

브레넌 신부는 철거와 이주 대상이 된 주민들과 합세해 공무원들과 재개발업자, 그리고 이들이 고용한 폭력배들에게 저항했다. “그 사람들은 심지어 노인과 어린애들에게까지 폭력을 가했어요. 경찰들은 그 옆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고요.”라고 그는 말했다.

브레넌이 목동의 주민들과 맺은 인연은 오늘까지도 아름다운 결실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그 당시 함께 싸웠던 젊은 사람들의 결혼식 주례를 서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중년 부부가 되었고 그들의 아이들은 이제 서울올림픽 당시 부모의 나이가 되었다.

“그들이 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이들은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면 행복하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가족 중 한 가족은 그를 주말마다 집으로 초대하고, 그는 여느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의 ‘손자’와 ‘자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즐거워한다.

잊지 못한 일화도 있다. 삼양동에서 근근이 살아가기도 힘든 한 병들고 가난한 이가 있었다. 브레넌 신부는 봉사자들을 보내 그를 여러 방면으로 도와주었다. “몇 달 후에 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했어요. 자신이 목동에서 철거민을 괴롭혔던 폭력배 중 한 명이었다고요. 그는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었어요. 자신을 돌봐줘서 감사하다면서요.”라고 브레넌 신부는 일화를 들려줬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항상 약하고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걱정했고, 그들 옆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애쓰셨죠.”라고 기억을 떠올리며 브레넌 신부는 추기경님이 자신을 서울에서 가장 궁핍한 지역 두 군데에 보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를 위한 교회는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사람들에게 오라고 말하면 안 되고, 그들에게 스스로 다가가야 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1968년 한국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브레넌 신부를 이끌었다. 그가 처음 일했던 곳은 강원도 정선의 탄광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광부와 그들 가족에게 의료적인 조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 병원을 설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정선과 인근 항구 도시 삼척에서 1979년까지 봉직했다.

그는 강원도에서 11년간 지낸 후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김수환 추기경이 그를 목동에 보냈다.

“제 희망은 한국이 좀 더 인간적인 사회가 되는 거예요. 젊은이들은 노인을 배려하고,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고, 배운 이들은 덜 교육 받은 이들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회가 되는 것이죠.”

독실한 천주교 가족
로버트 존 브레넌은 1941년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천주교 가족의 다섯 형제 중 첫째로 태어난 그는 똑똑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부모님은 그에게 큰 기대를 했고 세속적인 직업을 갖게 되길 희망했다.

하지만 젊은 브레넌은 어머니가 구독하는 성당 뉴스레터에서 감동적인 기사를 읽게 된다. 그는 특히 한국이 일본 식민 지배 하에 있던 1933년에 한국에서 봉사를 시작한 뉴질랜드 신부들에 대한 기사에 끌렸다. 이후 한국전쟁 동안 일곱 명의 신부가 순교했다. “그 신부들 중 한 명이 나와 성(姓)이 같았어요. 그래서 마음을 먹었죠.”라고 그는 말했다.

브레넌은 1959년 호주 시드니에 있는 신학대학 골롬반선교회(Columban Mission Society)에 입학하기까지 부모님을 설득하느라 큰 곤경을 치렀다. 그곳에서 6년간 공부한 후 196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에 한국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첫 두 해는 언어를 비롯해 한국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는 프란체스코회 사제들이 운영했던, 지금은 없어진 정동의 명도언어학원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서울대 학생들과 친해졌고 이들이 그의 한국 이름 ‘안광훈’을 지어줬다.

“그들이 ‘빛을 전파하고 가르친다’는 내 이름의 한자어 의미를 알려줬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본명보다 한국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브레넌 신부가 삼양주민연대 사무실 앞에서 주민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서울의 취약 지역 중 하나인 삼양동 주민들의 실업 및 주거 복지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창립된 주민 공동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 아산문화재단

사회 참여
1969년에 그는 원주에서 이제는 고인이 된 지학순 주교를 만난다. 지학순 주교는 힘없고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희생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또한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싸움으로써 존경받고 있었다. 지학순 주교는 처음 만난 이후 줄곧 브레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지금도 브레넌 신부는 교회 안팎에서 활동하면서 그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저는 공식적으로는 은퇴를 했지만 아직도 가끔 설교를 합니다. 제 설교를 처음 듣는 사람은 제가 해방신학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라고 말하며 그는 빙그레 웃었다.

“저는 항상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려고 노력하고, 사회적 이슈를 논합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의도는 없습니다. 대신에 사람들이 선거에서 옳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개인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무엇이 나라 전체에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보라고 하지요.”

브레넌 신부는 한국 정부의 도시 재개발 정책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했다. “재개발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다른 지역에서 온 부자들을 위한 비싼 아파트를 짓기 위해 주민들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좋은 재개발 프로젝트는 쇠퇴하는 지역을 갱생시키고 지역 주민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어야 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또한 노인들이 좀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튀어나온 계단들이 있는 좁은 골목들을 새롭게 단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역시 시니어인 브레넌 신부는 젊은이들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노인들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을 때면 마음이 심란하다고 했다. “제가 처음 한국에 왔던 1960년대에 한국은 가난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좀 더 배려했었어요. 젊은이들도 노인을 좀 더 공경했고요.”라고 그는 말한다.

“이제 한국은 부유해졌고 힘이 세졌어요.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인정이 없어졌어요. 제 희망은 한국이 좀 더 인간적인 사회가 되는 거예요. 젊은이들은 노인을 배려하고,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고, 배운 이들은 덜 교육받은 이들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회가 되는 것이죠.”

“한국인들은 좋은 의미에서 억셉니다. 일본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기 위해 투쟁한 것처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끝까지 싸우죠. 또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심성을 갖고 있어요. 물론 그런 넉넉함이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상당히 줄었지만요.”

영구적 주거지
브레넌 신부는 한국에서 봉직하고자 결심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가끔 그는 자신의 형제와 자매가 살고 있고 그들의 자식들이 그를 열렬히 환영하는 뉴질랜드를 방문한다. 하지만 몇 년 전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고향을 찾는 일이 점점 드물어졌다.

“물론 제 형제자매와 그들의 자식들이 저를 잘 대해주죠. 하지만 며칠만 지나면 그곳에서 할 일이 없는 저는 지루해집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몇 년 전 세 번의 시도 후 브레넌 신부는 마침내 영주권을 얻었다. “쉽지 않았어요. 제가 한국에서 한 일이라곤 성당 일과 한국인들과 함께 살았던 것뿐이었기 때문이죠.”라고 그는 농담조로 말했다. “하지만 저는 떠나고 싶지 않아요. 이미 죽고 나서 묻힐 장소까지 준비해 두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삼양주민연대에서 일하는 봉사자 한 명은 신부님이 충청북도 제천에 있는 원주 교구 소속 천주교 성소 묘지인 배론성지에 자신의 안식처를 마련해 놓았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브레넌 신부는 젊었을 때 술과 담배를 즐겼다. 이제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가끔 좋아하는 치킨과 함께 소수 반 병이나 맥주 한두 잔을 마신다. 무릎이 약해지고, 공기 오염과 미세먼지 때문에 마른기침을 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건강상 문제는 없다. 또 걸어서 다니는 것 외엔 특별히 하는 육체적 활동은 없다.

“집에서 성당이나 연대 사무소까지 오가며 걷기, 옷을 빨래하고 가끔 요리를 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어요. 가끔은 피곤해서 정말 은퇴를 하고 싶지만, 사람들이 못 하게 해요.”라고 그는 말했다.

삼양동의 이웃뿐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한국 사람이라면 브레넌 신부가 가능하면 오랫동안 건강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최성진 한국바이오메디칼 리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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