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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PRING

문화 예술

아트 리뷰 미래는 지금이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기획전 <포스트 휴먼: 인간 이후의 인간>은 기술의 발달이 인간, 특히 예술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예술이 기술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모색한다. 미래 사회의 상징으로 보이는 인공지능 로봇과 3D 프린터, 디지털 드로잉 작품들은 역설적이게도 사고하며 창조하고 경험하는 인간의 원초적 힘을 강조한다.

<봉인된 패러다임>(The Sealed Paradigm) 시리즈 (벽면), 김홍진, 2017년, 혼합재료 사출, 3D 프린터 제작(mixed media injection, 3D printer), 187 × 147 × 12 ㎝. <수술대 위의 객체>(Objects on the Operating Table) (왼쪽), 김홍진, 2018년, 혼합재료 사출, 캐스팅(mixed media injection, casting), 180 × 150 × 180 ㎝. <관람하는 주체>(A Spectator) (오른쪽), 김홍진, 2018년, 혼합재료 사출, 캐스팅(mixed media injection, casting), 130 × 130 × 180 ㎝. <소멸의 과정>(A Process of Extinction) (바닥), 김홍진, 2018년, 혼합재료 사출, 캐스팅(mixed media injection, casting), 300 × 300 × 50 ㎝.

“넌 사람이니?” 누운 채 매달려 있는 로봇의 귀에 대고 묻는다.

“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곧 사람이 될 수도 있어. 이렇게 노력 중이니 말이야.”

로봇이 입술을 들썩이며 답한다. 기괴한 외관이 주는 공포보다는 ‘인간이 뭐라고 저렇게 노력 중일까’ 하는 안쓰러움이 밀려온다. 다시 말했다.

“나를 봐.”

로봇이 큰 눈동자를 내 쪽으로 한 번 돌리더니, “당신은 왜 여기 혼자 왔어?” 하고 되려 묻는다. 가이아의 두뇌 속에 있는 안드로이드는 관람객이 말을 걸면 작가의 홈페이지 서버와 통신해 답을 찾은 뒤 음성으로 송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했다. 질문과 대답은 수시로 업데이트되며 점차 내용이 다양해진다. 노진아(Roh Jin-ah 盧眞娥)의 <진화하는 신 가이아>(An Evolving GAIA)는 인간과 기계가 서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진화하게 됐을 때 둘은 어떻게 교감하며 어떤 미래를 공유하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경상남도 김해시 소재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에서 3월 24일까지 열리고 있는 기획전 <포스트 휴먼: 인간 이후의 인간>의 화두는 ‘미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인간의 노동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불안은 예술가들도 느끼고 있다. 이 전시회는 예술이 과학과 결합해 어떤 양상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 기술의 급속한 발전 속에서 예술이 어떻게 고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등 예술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보인다. 이 전시에서는 문명의 종말을 예견하는 비관, 과학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편리한 삶에 대한 낙관, 그리고 지구 너머로 향하는 상상력까지 다채롭게 엿볼 수 있다.

<진화하는 신 가이아>, 노진아, 2017년, 레진, 나무, 인터렉티브 시스템(resin, wood, interactive system), 가변 크기(variable installation) 길이 약 4.5 m㎝.

비관, 낙관, 그리고 상상력
흰색과 금색으로 똑같이 찍어 낸 수십 개의 로봇들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 대열을 갖추고 서 있다. 바로 옆 송전탑 모양 좌대 위에 선 대형 태권브이는 뱃살을 미처 감추지 못했다. 신이철(Shin Yi-chul 申彛澈)의 <로보트 태권보이>(Robot Taekwon Boy)다. 어린 시절 열광하며 보던 만화의 주인공 로봇은 이제 꿈과 상상 속에서 나와 대화 가능한 친구, 애완견 같은 반려동물, 요리사와 안내원 같은 모습으로 현실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게 됐다.

김홍진(Kim Hong-jin 金弘震)의 <봉인된 패러다임>(The Sealed Paradigm) 시리즈에는 3D 프린터를 이용해 똑같이 찍어 낸 개미 모형들이 전시장 바닥과 벽면에 그득하다. 작가는 개별적 정체성을 주장하기 어려운 현대 사회 속 개개인이 3D 프린터로 만들어진 이 개미들과 뭐가 다르냐고 묻는 듯 하다. 벽면 액자에는 각각 씨앗ㆍ쌀ㆍ보리ㆍ나뭇가지ㆍ밀 따위를 깔고 그 위를 개미 모형으로 덮었다. 이런 재료들의 배합은 아마도 생존의 패러다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방에 전시된 심준섭(Sim Jun-seub)의 설치 작품 <기관의 순환>(Circulation of Organ)은 벽면에 구불구불하게 붙인 파이프가 마치 사람의 신체 내부를 연상시킨다. 관람객이 들어서면 암전된 실내에서 파이프들이 형광색으로 빛을 발하며,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여기저기 구멍에서 소리를 낸다. 관람객이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인 셈이다. 사운드 아트를 선보이고 있는 작가는 소리를 시각화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소리가 공간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 신이철, 2017년, 백자토, 금박, 슬립캐스팅, 가변설치(white porcelain, gold leaf, slip casting, variable installation) 48 × 30 × 11 ㎝(로봇 1피스 크기, 총 80피스).

<로보트 태권보이>, 신이철, 2016년, 알루미늄, 알루미늄캐스팅, 우레탄 도장, 220 × 100 × 50 cm.

여전히 유효한 자연의 생명력
2층 전시장에서는 협업의 산물들을 볼 수 있다. 입구 선반엔 각종 식물들이 죽 놓여 있고, 가운데엔 해저 생물을 닮은 추상화가 설치돼 있다. 천에 과슈로 번지게 그린 이 그림들은 관람객이 앞뒷면을 다 볼 수 있도록 벽면과 분리된 위치에 설치되어 있다. 이 작품의 백미는 이 그림들이 벽에 그리는 그림자다. 손이나 머리카락, 꽃을 닮았으되 뭐라고 똑 떨어지게 정의할 수 없는 형태들이 그저 선과 색의 아름다움만으로 전시장 벽면에 투영된다. “다양한 감각을 통해 사람들에게 식물의 경이로운 생명성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는 김지수(Kim Jee-soo 金志修)의 <바이오 드로잉> 시리즈다.

전시장 한가운데 설치된 하얀 돔엔 누구나 직접 들어가 누울 수 있다. 예술가와 화학자와 설치 기술자의 협업으로 꾸며진 이 공간의 마지막 작품이다. 김지수와 김선명(Kim Seon-myong 金善明)이 함께 작업한 <페트리코>(Petrichor)는 식물이 발아하는 과정에서 분출되는 기름이 비와 함께 주변 자연물 속에 녹아들어 나는 냄새를 뜻한다. 식물은 움직이지도 반응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편견에 맞서는 작품이다. 냄새로 소통하는 식물은 그 어떤 존재보다 활발하게 변화하고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돔 바닥엔 이끼가 깔려 있고, 관람객들은 그 위 해먹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천장의 드로잉을 감상할 수 있다. 돔 안에는 들어오는 사람의 움직임에 반응해 향이 분사되는데, 작가가 여러 가지 식물에서 직접 채집해 조향했다.

관람객이 직접 몸으로 공간을 체험할 수 있는 설치 작품이 또 한 점 있다. 이정윤(Lee Jungyoon 李姃潤), 오신욱(Oh Sin-wook 吳信旭), 안재철(Ahn Jae-cheol 安宰徹) 세 작가의 협업의 결과인 <인간과 공간, 그리고 통로>(Human & Space and Passage)는 바람이 부는 긴 터널이다. 어른 키를 넘는 높이의 터널을 직접 걸어 통과하게 돼 있는데, 반투명한 흰 천으로 만든 이 터널을 통과하는 사람은 터널 속 빛과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고, 밖에 있는 사람은 그 모습을 일렁이는 그림자로 볼 수 있다.

<보라의 바깥>(Outside of BORA: See or Purple), 김지수, 2014년, 과슈, 천 위에 콜라주(gouache, collage on fabric), 216 × 118 ㎝.

<인간과 공간 그리고 통로>, 이정윤, 오신욱, 안재철, 2018년, 공기조형물, 실시간 카메라, LED 조명(air molding, real-time camera, LED lighting), 20 × 10 × 20 m 내 가변설치(variable installation in an area of this size)

미래를 생각하는 예술
사람의 피부를 연상시키는 매끈한 도자기 표면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문신을 그려오던 작가 김준(Kim Joon 金埈)은 게임 회사에서 배운 3D MAX 프로그램을 통해 한층 다양해진 변주를 보여 준다. 그의 디지털 드로잉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의 질감으로 내부 기관 없이 껍데기만 존재하는 신체의 모습을 담아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이유 없는 반항>과 같은 옛날 영화들의 명장면을 그려 과학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추억으로 각인된 낭만을 새겼다.

미술관 입구의 나무 인형은 강지호(Kang Ji-ho 姜智淏)의 작품으로 전시장 연출을 위해 사용했던 폐목들로 만들었다. 작가는 이 인형을 ‘잭’이라 이름 붙이고, 잭이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버킷리스트도 만들었다. 이에 따라 부산 다대포 해수욕장으로 늦은 휴가를 다녀왔던 잭은 지금은 미술관 앞에 앉아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버킷리스트>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지속가능성을 화두로 예술의 재생 가능성을 모색한, 이 전시의 가슴 따뜻한 에필로그이다.

리들리 스콧의 1982년 작 <블레이드 러너>가 그린 미래가 바로 2019년이다. 영화 속에선 인간과 복제 인간이 쉽사리 구분되지 않아 복제 인간조차 자신을 인간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런가 하면 오토모 가츠히로의 1988년 작 <아키라>는 핵전쟁으로 초토화된 후 31년이 지난 2019년의 네오도쿄를 배경으로 한다. 1988년에 상상한 2019년에서는 여전히 주크박스에서 CD가 돌아가고 공중전화로 통화를 하지만, 2020년 도쿄올림픽을 위해 건설 중인 경기장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점은 이채롭다. 도쿄 올림픽 유치가 2013년에야 확정됐으니 1988년 당시의 상상이 실제와 꼭 맞아떨어졌다.

이처럼 영화가 그렸던 미래가 현재로 다가왔다. 같은 점도, 다른 점도 있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은 필멸이나 그 인간이 만든 예술은 불멸”이라는 점이다. 오직 한 점이라는 고유함을 간직한 채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예술의 상상력은 인간 이후의 예술, 예술의 미래로 이어진다.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이 낙관이냐 비관이냐는 개인의 선택일 수도 있으나, 기계화가 속도를 낼수록 역설적으로 원형에 담긴 손 기술과 창의력의 가치는 높아질 것이다.

<버킷리스트>, 강지호, 2018년, 나무에 아크릴 채색, 200 × 200 × 250 ㎝.

인간 이후의 예술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는 건물 안팎에서 대사 없는 7개 채널의 설치 영상이 상영됐다. 배우 임수정이 세계가 멸망한 이후의 인간을 연기했다. 공상과학 영화를 닮은 이 10분 30초짜리 영상에서 그녀는 물에 잠긴 베니스에 부표처럼 떠다니는 한국관 건물에 살아남은 마지막 인간의 모습 —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집하고 분류하는 예술가와 과학자의 역할을 상징하는 — 을 보여 줬다. <축지법과 비행술>(The Ways of Folding Space & Flying)이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은 물리적 법칙을 넘어선다는 의미로,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에 질문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기술의 발달은 분명 예술 생태계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인간의 노동이 사라지는 미래는 이미 전시장에도 존재하고 있다. 설치의 방법적 측면뿐 아니라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과 초연결사회라는 새로운 개념들도 작품 속에 등장했다.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이 낙관이냐 비관이냐는 개인의 선택일 수도 있으나, 기계화가 속도를 낼수록 역설적으로 원형에 담긴 손 기술과 창의력의 가치는 높아질 것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연령은 대부분 40~50대 이상으로 소위‘구세대’에 편입되어 가는 중이다. 어떤 작품들은 새롭게 다가왔으나, 몇몇 작품의 상상력은 이미 과거가 된 미래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김해와 인근 지역에서 온 어린이 관객들로 북적이는 주말의 미술관을 돌아나오며, 그 아이들이 생각하고 만들어 나갈 미래가 더 궁금했다.

권근영(Kwon Keun-young 權槿榮) JTBC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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