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2018 WINTER

문화 예술

인터뷰 옷으로 열연하는 아티스트

“시나리오를 받는 순간부터 무당이 된다”고 말하는 조상경(Cho Sang-kyung 趙常景)은 언제나 작품을 집요하게 해석하고 철저하게 고증한다. <올드 보이>를 비롯해 수많은 영화의 의상을 만들어 온 그녀가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으로 다시 한번 한국을 대표하는 의상감독으로 떠오른 이유이다.

한국의 대표적 의상감독인 조상경은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고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의상을 만들기 위해 발로 뛰며 관련 문헌과 영상 자료를 집요하게 뒤지고 또 뒤진다.

처음 만나는 사람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기란 쉽지 않다. 수줍어하는 성격이 아니라도 그렇다. 에티켓을 가르치는 책에 “초면인 사람을 대할 때는 시선을 상대방의 눈과 눈 사이에 두라”는 조언이 나오는 까닭이다. 그런데 조상경은 어찌나 시선을 바로 주던지 눈이 부시다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미스터 션샤인>과도 정면 대결을 벌였다.
조상경은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 <괴물>(2006) 같은 해외 영화제 수상 작품들을 비롯하여 <신과 함께>, <택시운전사> 등 최근의 대표적인 블록버스터의 의상을 도맡아 왔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작품들이 더욱 빛을 발한 건 시대극에서였는데, 영화보다 훨씬 대중적인 매체인 TV 드라마를 통해 아는 사람만 알던 자신의 이름을 비로소 널리 알리게 되었다.

조상경 감독이 최근 영화 <신과 함께>에 나오는 염라대왕의 의상을 점검하고 있다. 실재하지 않는 인물의 의상을 만들기 위해 그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철저한 고증
작가와 연출가가 10여 년 동안 대본을 숙성시켜 왔다는 <미스터 션샤인>은 애초에 ‘상품’이 아니라 ‘작품’을 목표로 제작된 드라마다. 숱한 영화와 무대 공연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작업해 온 조상경에게 TV 드라마는 생소한 장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햇살’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 내기로 결심했다. 힘든 만큼 큰 도전이 될 것 같았고, 정말로 ‘작품’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꼼꼼하기로 유명한 조상경이 사전 제작 기간이 11개월이나 되었던 이 드라마를 얼마나 지독하게 준비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사전 제작 기간은 길었지만, 정작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한 달 남짓이었다. 게다가 애당초 16부작으로 기획되었던 작품이 20회로 연장 결정이 나더니 다시 24회로 늘어나면서 그 짧은 기간에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났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완결된 대본을 두고 시작하는 데다가 그러고도 다섯 달 남짓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가진다. 그러나 <미스터 션샤인>은 TV 드라마라는 특성상 이야기 전개에 대한 감독의 간략한 설명과 첫 2회분의 대본만을 가지고 전체 의상 콘셉트를 잡아야 했다.
그런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철저함은 드라마 여기저기에서 빛났다. 미 해병대 장교 유진 초이 역할로 나오는 주연 이병헌의 군복 이야기를 들어 보자.
“처음에 저는 유진 초이의 소속을 해병대가 아니라 해군으로 하자고 제안했어요. 그 당시 해병대 군복보다 해군 군복이 훨씬 멋지거든요.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솔직히 아직도 주인공의 의상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렇지만 군복 모양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잖아요. 작품 배경이 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 해병대 군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애썼는데도 결국 민원이 들어왔다니까요. 군복의 엠블럼 위치가 다르다고요. 별 수 있나요, 잘못했다고 사과했어요.”
조상경은 최대한의 리얼리티를 위해 미국에 군복 제작을 의뢰했다. 그것도 옷 따로, 모자 따로, 신발 따로 전문가들에게 맡겨 완벽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군복에 대한 그녀의 연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2010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고지전>으로 군복을 처음 디자인해야 했을 때 그녀는 이른바 ‘밀리터리 덕후’를 만났다. 덕후들이 박물관보다 훨씬 더 많은 군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는 온라인 ‘밀리터리, 군사무기 카페’ 운영자의 집에 별 기대 없이 따라갔다가 깜짝 놀랐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매트리스를 제외하고 아파트 한 채가 온통 군용품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군복, 군모, 메달, 배지에 이르기까지 과연 덕후는 덕후였다. 군대 이야기를 광적으로 하는 그의 열정이 버거워 두 번째 만나러 갈 때는 그의 이야기를 받아 줄 팀장과 동행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덕후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 동부전선 최전방 ‘애록고지’(백마고지를 모티브로 KOREA를 거꾸로 해서 만든 가상의 전투현장)에서 싸우는 군인들을 생생하게 재현해 낼 수 있었다. 발품은 영화 의상 디자인의 처음이고 끝이다.

영화 <친절한 금자 씨>(2005)는 13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한 후 출소한 여주인공이 치밀하게 준비한 복수를 실행하는 내용이다. 복잡한 내면을 지닌 주인공을 표현하기 위해 조상경 감독은 그의 과거와 현재, 친절함과 복수심 사이의 간극을 복고적 의상으로 표현해 냈다. © CJ ENM

또 다른 드라마
발품뿐 아니다. 문헌이나 영상 자료도 집요할 만큼 뒤진다. 극 중에서 유진 초이가 참가하는 미서전쟁의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 스페인 영화와 다큐멘터리들을 뒤졌다. 그런데 당시 다큐멘터리들은 흑백으로 제작된 터라 도무지 군복 색깔을 알 수 없었다. 간신히 컬러 화면을 하나 찾아서 그대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 미서전쟁 장면은 다 합쳐야 고작 5분이나 될까? 단 몇 분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해외에 주문을 한다고 모든 옷이 쉽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영화 <암살>(2015)에 등장하는 일본제국 군복의 샘플은 일본에서 직접 사오려고 했다. 그렇지만 일본의 군복 마니아들은 대체로 극우파인 경우가 많아, 아무에게나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중개인을 사이에 두고 어렵게 거래를 해야 했다. 이쯤 되면 의상 제작은 과정 자체가 하나의 드라마인 셈이다.
고증의 엄중함을 신념으로 가지고 일하는 그녀지만 때로 오해도 받는다. 영화 <후궁: 제왕의 첩>(2012)은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 못지 않게 의상이 주목받았던 작품이었다. 후궁들이 입고 나온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들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탄생했다. 논문 자료들을 비롯해 박물관 소장품까지 수많은 자료들을 토대로 디자인한 옷들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 옷이 아닐 것이다”라는 편견을 가졌고, 심지어 ‘왜색풍’이라는 비난까지 들었다. 다행히도 한복 전문가들이 그녀의 노력을 알아 주었다. “조선 중기의 의상을 보려면 영화 <후궁>을 보라”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한복 공부를 하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우리가 서양 복식사보다 우리 복식사를 더 모른다는 거예요. 한복은 뭉뚱그려져서 애매하게 이해되고 있어요. 조선 왕조 500년이라는 그 긴 시간 동안 한복 디자인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그녀는 한복 전문가들에게 당부하고 싶단다. 사극의 의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언해 주고 관여해 달라고 말이다. 책이나 강의보다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적 매체를 통해 한복에 대해 알게 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복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그것을 올바르게 재현하려면 전문가들이 대중 매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상경은 무턱대고 당대의 사실성만을 옷에 담아 배우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성이 배우에게 딱 맞아떨어져 빛을 발할 수 있게끔 일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아가씨>(2016)의 한 장면이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가 배경인 이 영화에서 차갑고 비밀스러운 귀족 아가씨의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조상경 감독은 화려하면서도 동시에 절제된 매력을 보여 주는 25벌의 의상을 만들었다. © CJ ENM

시를 읽어라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대개 그 분야의 영어 단어들을 자주 쓰는 데 반해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동양화와 무대 미술을 공부한 그녀는 그 대신 탐독가의 면모를 드러냈다.
“어렸을 때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친구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읽었죠. 1남 4녀 중 셋째였는데, 어머니는 제가 하고 싶다는 건 다 지원해 주시는 편이었어요. 화실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림 그리는 게 익숙한 놀이가 되었죠. 사실 저는 패션은 잘 몰라요. 패턴 뜨는 것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으니까요.”
의아한 일이다. 한국 영화계의 내로라하는 의상 디자이너가 패션 디자인을 배워 본 적이 없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측면에서 의아함을 느낀다고 한다.
“영화 의상을 만들겠다는 학생들이 시나리오 한 편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고 말할 때 정말 이상해요. 100명에 한 명 정도를 빼곤 대부분 시나리오를 읽지 않아요. 제가 콘셉트를 잡아 보자고 말하면 대뜸 포털 사이트부터 검색합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시를 읽으라고 조언해요. 저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인데, 시는 빨리 읽어도 자꾸 복기하게 되더라고요. 시로 그림을 그린 적도 많아요. 시를 잘라서 재조합하는 일이 재미있었거든요.”
재조합만이 아니다. 그녀는 매개의 역할에도 능하다. 사극에서 배우들에게 옷을 입힐 때 그녀는 그 옷을 입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왜 그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매개자 역할을 자처한다.

그래서 테스트 촬영이 매우 중요하다. 의상은 시대 정신도 담지만 무엇보다 그 배우에게 맞아야 한다. 그 배우를 빛나게 해 주어야 한다. 조상경은 무턱대고 당대의 사실성만을 옷에 담아 배우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성이 배우에게 딱 맞아떨어져 빛을 발할 수 있게끔 하는 일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아가씨>(2016)의 주연 김민희의 옷은 그녀를 옥죄어 행동 하나하나가 우아하면서도 지극히 절제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속옷까지도 그런 아가씨의 자세가 나올 수 있도록 디자인해서 입혔다.
하지만 모든 배우들에게 이런 역할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 배우들, 진지하게 물어 오는 배우들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왕 역할을 여러 번 했으면서도 언제나 왕의 옷에 대해 처음처럼 질문하는 한석규, 작품에 대한 진지한 접근 태도로 저절로 조언하게 만드는 이병헌이 그런 배우들이다. 최고의 배우들, 최고의 감독들과 함께 작업하는 일이 흥미진진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매일 밤 잠들 때 ‘내일 깨어나지 않을지도 몰라’ 하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래도 아무 문제 없나?’ 하고 하루를 찬찬히 돌아보곤 하죠. 그게 습관이 되어 버렸어요.”
“이런 제가 이상한가요?” 하는 표정을 지으며 예의 그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매일 최선을 다하시나 봐요. 그래서 삶에 여한이 없으신가 봅니다. 당신 인생에 ‘새드 엔딩’은 없을 것 같아요’라고.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쿠도 히나(工藤 陽花)의 의상 중 하나. 조상경 의상감독은 20세기 초 한성 최고의 호텔을 운영하는 부유한 미망인에게 어울리는 의상을 디자인했다.

<미스터 션샤인>의 여자 주인공 고애신은 외세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하기 위해 비밀리에 의병 활동을 하는 사대부 가문의 여성이다. 이 옷은 그녀의 사회적 신분을 기품 있게 표현하고 있다.

<미스터 션샤인>의 남자 주인공 유진 초이는 20세기 초반 미 해병대 소속 장교였다. 당시의 군복을 재현하기 위해 미국 현지에서 직접 제작해 공수해 왔다.

강윤주(Kang Yun-ju 姜胤珠) 경희사이버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