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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SUMMER

생활

식재료 이야기 가지: 뜨거운 여름을 상징하는 채소

가지는 뜨거운 여름을 대표하는 채소다. “장마철은 가지 먹는 맛으로 지낸다”는 우리 옛말이 여름철 가지가 지닌 매력을 잘 나타내 준다. 강렬한 햇볕에 맞서는 안토시아닌의 보랏빛 활력이 듬뿍 들은 가지를 먹으며 사람들은 더운 여름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요리는 인간의 기술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프랑스의 미식가 장 앙텔름 브리야-사바랭이 남긴 이 말에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어떤 식재료를 어떻게 요리하여 먹느냐에 따라 그 식문화의 특징과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말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역사가 오래된 식재료일수록 요리 기술이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가지과 식물인 가지와 토마토를 비교해 보자. 가지과 식물의 잎과 꽃은 자기 방어를 위해 함유하고 있는 알칼로이드 성분 때문에 먹을 수 없고, 우리가 먹는 부분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들 식물의 열매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밥상에 토마토가 반찬으로 오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토마토를 채소로 취급하는 것과 달리 한국인은 토마토를 과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풋토마토를 짭짤한 장아찌로 만들어 반찬으로 먹는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토마토는 대부분 과일로서 소비된다. 사과나 배처럼 식후 과일로 먹거나 갈아서 주스로 만들어 마신다. 반면 가지는 한국인의 밥상에서 채소 대접을 받는다. 무, 배추, 호박 같은 다른 채소처럼 밥에 곁들여 먹는다.
꼭지를 따고 씻은 가지는 시루에 찌거나 또는 밥이 다 끓은 다음 뜸들이는 동안 위에 얹어 쪄 낸다. 뜨거운 가지를 살짝 식혀서 데지 않도록 손에 찬물을 묻힌 후 세로 방향으로 쭉쭉 찢는다. 그런 다음 간장, 기름, 깨소금과 어슷하게 썰어 낸 풋고추를 섞어서 만든 양념장에 버무린다. 이는 1931년 8월 4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된 가지나물 요리법이다. 또한 이 기사에는 7~8월 가지가 흔할 때 말려 두었다가 겨울에 꺼내어 불려 물기를 짜낸 다음 양념에 무쳐 먹는 법, 날가지를 얇게 저며 채쳐서 소금에 잠시 절였다가 갖은 고명이나 겨자를 넣고 조물조물 주물러 먹는 등의 요리법이 소개되어 있다.

날것으로도 즐겼던 채소
오래 전부터 다양한 음식으로 조리되었던 가지는 요즘도 인기 있는 반찬에 속한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가지를 밀가루에 살짝 묻혀 튀겨서 양념에 버무리거나, 얇게 자른 가지 조각 위에 다진 소고기를 얹어 달걀물을 입혀 전으로 부쳐 먹기도 한다. 최근에는 해외여행과 교류가 늘어나면서 중국식 어향가지나 일본식 가지 구이, 이탈리아식 파르미지아나 디 멜란자네(parmigiana di melanzane)를 집에서 시도해 보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둘 다 가지과 식물의 열매이지만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토마토와 가지의 쓰임새가 이처럼 다른 것은 이들이 우리 땅에 들어온 역사와 관련이 있다. 라틴아메리카가 원산지인 토마토는 17세기 초 잠시 한국에 흘러들어 왔으나 정착되지 못하고, 20세기 초에 다시 유입되었다. 그러니까 토마토는 한식과 어울리기에는 그 역사가 짧았던 셈이다. 반면 열대아시아를 원산지로 하는 가지는 훨씬 이른 시기에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전해졌다. 이미 신라시대에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식재료로서 역사가 긴 만큼 요리의 역사도 깊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인의 밥상에서 가지가 차지하는 위치가 확고해진 것으로 보인다. 시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가포육영(家圃六詠)」이란 시에서 가지의 맛과 미덕을 이렇게 노래했다.

자색 바탕에 홍조를 지녔으니 어찌 늙었다 할 수 있는가
꽃은 보고 과일은 먹는 가지만 한 것이 어디 있는가
고랑 안으로 알들이 가득하니
생으로도 먹고 익혀서도 참으로 좋구나


가지를 날것으로도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놀랄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이다. 지금도 한국인들은 가지를 날것 그대로 된장에 박아 두었다가 장아찌로 먹거나 김치를 담가 먹는다. 태국인들은 골프공 모양의 녹색 가지를 날것으로 디핑소스에 찍어 먹기도 한다. 이렇게 가지는 날로 먹어도 무해하다. 가지에는 다른 가지과 식물의 열매와 마찬가지로 솔라닌이라는 독성 알칼로이드가 들어 있긴 하지만 워낙 소량이어서 한 번에 30~40개를 먹지 않는 이상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솔라닌 성분은 가열해도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솔라닌이 많이 들어 있는 감자의 싹튼 부분은 반드시 도려내야 한다.
한편 가지에는 니코틴도 들어 있다. 역시 가지과 식물의 특징이다. 음식 속 니코틴 또한 가열해도 파괴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지 10kg에 들어 있는 니코틴 함량이 담배 1개비에 함유된 양과 같을 정도로 소량인 데다가 그마저도 몸속으로 들어오자마자 대부분 간에서 해독되어 체외로 배출되는 탓에 인체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야생 가지에게는 이 쓴맛 성분이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가지를 먹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분명 독이다. 가지에 독성이 있다고 생각한 고대 로마인들은 이것에‘미친 사과(mala insana)’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이탈리아어로 가지를 ‘멜란자나(melanzana)’로 부르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베두인족의 오래된 기록물에 “그 색깔은 전갈의 배와 같고, 그 맛은 전갈의 독침과 같다”고 언급되어 있는 것만 봐도 가지의 쓴맛은 이후 수세기 동안 악명이 높았던 것 같다.

열대아시아를 원산지로 하는 가지는 토마토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전해졌다. 이미 신라시대에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식재료로서 역사가 긴 만큼 요리의 역사도 깊다.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품종 개발
하지만 오늘날의 가지는 과거의 ‘미친 사과’와는 거리가 멀다. 인류는 오랜 기간 육종과 작물화 과정을 통해 쓴맛 성분은 줄이고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품종들을 개발해 냈다. 그 결과 완두콩처럼 작은 품종(Thai Pea Eggplant)도 생겨났고, 40cm에 이르는 커다란 품종(Japanese Pingtung Long Eggplant)도 개발되었으며, 무게가 650g 정도로 무거운 품종(Black Enorma)을 비롯해 녹색∙흰색∙보라색에 줄무늬까지 색깔도 가지가지인 가지들이 만들어졌다. 그중 하나가 한때 미국에서 많이 재배되었던 흰색 달걀 모양의 가지다. 영어 단어 ‘eggplant’는 여기서 온 말이다.
한편 가지의 쓴맛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맛을 줄이기 위한 처리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가지를 잘라서 30분에서 1시간 동안 굵은 소금을 뿌려 두고 씁쓸한 맛의 즙을 빼내는 방법이 옛날 요리책에 종종 등장한다. 물론 소금이 물기를 빼내는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쓴맛 성분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많은 요리사들이 가지를 소금으로 처리했던 것은 소금의 짠맛이 쓴맛은 눌러 주고 향미는 더 좋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요즘 가지는 쓴맛이 적어서 굳이 이런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지만, 썰어 놓은 가지에 소금을 뿌려 두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요긴하다.

일반 가정에서 자주 해 먹는 가장 보편적인 가지 요리는 밥 반찬인 나물이다. 찜통에서 살짝 쪄 낸 가지를 먹기 좋게 찢은 후 간장과 식초, 다진 파,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부드럽게 주물러 섞는다.

손님을 대접하거나 가지를 특별하게 조리해 먹고 싶을 때는 납작하게 썰어 프라이팬에 굽거나 (왼쪽) 도톰하게 썬 가지 사이에 다진 소고기를 양념해서 넣은 후 밀가루를 묻히고 달걀물을 입혀 기름에 지져 전을 만들어 먹는다.

천 가지로 변신하는 식재료
가지의 조직은 스펀지와 같은 내부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질감은 달콤하면서도 독특한 풍미와 함께 이 채소가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튀기거나 기름에 볶을 때 무수히 많은 공기주머니 속으로 엄청난 양의 기름을 빨아들여 흐물흐물해진다. 따라서 미리 소금을 쳐 두면 세포 속 수분이 바깥으로 나와 공기주머니를 채우므로 이런 현상을 줄일 수 있다. 터키식 가지 요리나 중국 사천식 가지 요리는 향미유가 가지 속으로 스며드는 현상을 거꾸로 이용하여 풍미 가득한 요리를 즐길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런가 하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가지의 쓴맛을 역이용하여 요리에 맛을 더하기도 한다. 태국에서 그린커리에 쓴맛의 완두콩 가지를 넣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가지는 여러 나라에서 고기 대용으로 애용하지만 달콤한 디저트로 요리해서 먹는 채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가지는 매우 다채로운 속성을 지닌 식재료인 셈이다. 실제로 중동 지방에는 “가지를 요리하는 1,000가지 방법을 알기 전에는 결혼할 준비가 안 된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지 요리가 다양하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뜨거운 태양 아래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가지만큼 먹음직스러운 채소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다.
보라색, 적색, 파란색이 동시에 감도는 가지 껍질에는 항산화 물질인 안토시아닌이 풍부하다. 파란 물감처럼 스며 나오는 이 색소 성분은 주로 가지의 껍질 부분에 함유되어 자외선으로 인한 스트레스로부터 보호해 주는데, 100g당 700mg에 이를 정도로 풍부하다. 인체 흡수율에 대한 논란은 남아 있지만, 가지 요리를 할 때 껍질을 벗기는 것보다 가급적 껍질째 요리하는 게 좋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재훈 (Jeong Jae-hoon 鄭載勳) 약사, 푸드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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