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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SUMMER

문화 예술

전통 유산 장인 5,700번의 눈빛으로 시작하다

조선 말 19세기 중엽부터 4대째 이어온 조대용(趙大用) 염장(簾匠)의 가업은 대나무로 발을 만드는 일이다. 발은 한국의 전통 가옥에서 시선을 차단하고, 빛을 조율하며, 공간을 구분 짓는 기능을 한 생필품이자 가문의 염원을 문양으로 새겨 감상했던 예술품이기도 했다. 100일 동안 수만 번의 손길이 가야 비로소 완성되는 대나무 발은 만드는 이에게는 수행과 다름없다.

발틀에 동그란 실패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대발은 1㎜ 두께로 쪼개 다듬은 대오리를 발틀에 올려 명주실로 엮으면서 글자와 문양을 함께 짜 넣어 제작하는데, 글자와 문양의 난이도가 높으면 500개 이상의 실패가 걸리기도 한다.

그는 아버지를 ‘움직이는 손’으로 기억했다. 아버지는 통영 바닷가 마을에서 그물을 손수 짜던 사람이었다. 직접 재단해 엮은 아버지의 그물에는 된바람이 불건 갈바람이 불건 고기가 알맞게 들곤 했다. 겨울이 깊어갈 때면 아버지는 그 야무진 손으로 해풍 맞은 대나무를 꺾었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대오리를 줄줄이 엮었고, 그 길이가 어른 키만 해질 때야 손길을 거뒀다.
아버지의 손을 떠난 대발은 며칠 뒤 이웃 마을 아무개집 방문 앞에 걸리곤 했다. 발의 재료는 대, 갈대, 겨릅 등 다양했지만 아버지는 오직 대발만을 만들었다.
“옛날엔 남녀칠세부동석이었으니, 아녀자의 공간인 안방엔 외부인이 거의 드나들지 못했잖아. 안방 문을 열어 놓으면 내부가 훤히 보여서 발을 달아 가림막을 삼은 거지. 그런데 안에서 보면 발이 눈을 가리지 않고 바깥이 다 보여. 반대로 밖에서 보면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고 발이 눈에 들어오고. 명암 차이 때문이지. 게다가 발은 뜨거운 볕은 막으면서 바람은 솔솔 들게 하지.”
발은 안과 밖을 구획하며 환경을 영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도구이자 안과 밖의 시선을 분리시키는 장치였다. 그 역사는 1천여 년 전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궁궐에서는 왕의 얼굴을 함부로 쳐다볼 수 없도록 용상 앞에 발을 쳤고, 사당의 감실 같은 의례의 장소에서도 발을 달아 세속의 공간과 성역을 구분했다. 가마 문에도 발을 설치해 올라탄 이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빛이 슴슴히 비치는 오후에 바람이 발의 표면을 결대로 훑고 지나가면, 발 문양은 발을 넘어 풍경 위에 새겨지는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빛이 변하는 대로, 바람이 바뀌는 대로 문양을 이룬 실의 짜임은 도드라지기도 하고 풍경에 묻히기도 한다.

대나무 채취 과정
조대용은 아버지의 발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틈틈이 엮던 발 근처엔 늘 그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딱히 배움의 시작과 끝이 없었고, 하겠다 또는 못하겠다는 의지나 체념도 없었다. 그저 발을 엮는 도구인 발틀 앞에 앉은 아버지의 손을 무심히 보았을 뿐이다. 그러다 그 발틀을 처음부터 내게 속한 것처럼 사용하게 되었다. 지치면 발틀을 구들방 윗목에 밀쳐 놓고 누웠다가, 그것을 당겨오는 힘으로 일어나 앉는 일상이 그의 지난 시간이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시간이기도 했고,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시간이기도 했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한 증조할아버지가 직책을 받기 전 소일거리 삼아 대발을 만들어 조선 25대 임금인 철종에게 진상했는데, 임금님이 그걸 받고 크게 기뻐하셨다고 해.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생업이 따로 있었는데 짬짬이 발을 만들어 주변에 나눠 주시거나 때때로 팔아서 용돈 정도 벌어 쓰시기도 하셨고. 아버지는 퇴직 후에 본격적으로 만드셨는데, 나는 그때 아버지와 대회 출품작을 함께 준비하다 이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그게 1970년대 중반이었지.”
생업이 아닌 어떤 솜씨를 4대째 대물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려받은 그것은 삶일까, 문화일까, 기술일까. 한 가계에서 대를 이어 손에 남기는 기운이나 움직임은 과연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까. 국가무형문화재 제 114호 염장 기능보유자이자 한국 최고의 대발짜기 장인이 된 조대용에게 대발은 과연 무엇일까. 그와 마주한 마음에 온갖 질문이 쌓였다.
“집 짓는 목재도 나무에 물이 오르기 전에 베잖아. 대나무도 마찬가지야. 봄 되기 전 휴면 기간에 베어야 해. 여름에 벤 대는 건드리면 똑 부러지고 똑 부러지고…. 대는 원래 그렇게 안 부러지는데 벌레가 속을 뺑 돌아가며 파먹어서 그렇지. 그래서 여름 대는 양잿물에 삶아 썼어. 벌레 못 먹게 하려고.”
재료의 질은 작품의 질을 좌우한다. 그래서 대나무를 판독하는 그의 눈은 까다로웠다. 그는 대나무 중에서도 ‘해장죽(Arundinaria simonii (Carrière) Rivière & C.Rivière 海藏竹)’을 재료로 삼는다고 했다.
“왕대는 굵직한 것이 듬성듬성 자라서 흠도 거의 없고 껍질 벗겨서 엮어 놓으면 색이 맑아. 그런데 강한 만큼 잘 부러져. 해장죽은 아주 가늘고 촘촘히 무리 지어 자라거든. 그래서 태풍이라도 오면 지들끼리 부대껴서 상처도 많이 나지만, 연해서 잘 부러지지도 않고 탄력이 좋아. 옛날에 화살이나 담뱃대 만들던 그 가는 대 있지? 그거야.”
그는 작업실 한편에 있는 대오리 뭉치를 보여 줬다. 지난 해 12월부터 올 1월까지 한 달 남짓 채취한 1년치 재료라고 했다. 일고여덟 작품은 만들 수 있는 양이란다. 그런데 그 재료를 얻는 일이란 게 몸을 낮추고 해장죽의 지난 삶을 살펴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그는 빽빽한 해장죽 밭을 헤치고 들어가 상처 없고 곧게 뻗은 대를 찾는다. 1~2년생 어린 대는 취할 수 없다. 쪼개면 잘 갈라지지 않고 종이처럼 찐득한 탓이다. 그를 만족시키는 대는 칼 들어가는 각대로 쩍쩍 갈라지는 3년생뿐이다. 골라 쥐는 대 10개 중 1개만이 그런 기준을 통과한다.

대발을 만드는 일은 19세기 중엽부터 4대째 이어지고 있는 조대용 염장의 가업이다. 5대째 장인이 되는 딸 조숙미(趙淑美) 씨가 아버지 옆에서 발틀에 달린 실패를 옮기며 함께 발을 짜고 있다.

「쌍희자귀문발」, 조대용, 2017년, 175 × 135 ㎝.
거북등무늬로 이루어진 ‘기쁘다’라는 뜻의 한자를 중앙에 나란히 두 개 넣어서 짠 대발이다.

생필품인 동시에 예술품
“대밭에서 한 달을 그러고 나면 허리가 늘 안 좋아. 의사들마다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데…. 평생을 앉아서 살아서인지 앉지 않는 게 더 힘들어.”
대 베는 일은 시작일 뿐이다. 곧이어 가로 125~180cm, 세로 180cm의 발 크기에 맞게 대를 재단하고, 대가 까매지기 전에 껍질과 속을 모두 벗겨 성글게 쪼개야 한다. 그러곤 한 달간 볕, 바람, 이슬에 맞혀 가며 말린다. 푸른 대가 미색으로 변해 가면 1mm 두께로 쪼개는 것까지 모두 그의 일이다. 가장 어려운 건 그다음 과정으로 대오리를 정제하는 고무쇠(철판) 작업이다.
“얇은 고무쇠 앞면을 못으로 때리면 뒷면은 구멍이 필 듯 말 듯 쭉 밀려 나가겠지. 밀린 그 끝을 숫돌로 삭삭 갈면 구멍이 조금 나올 거 아니야. 그 작은 구멍에 1mm 두께의 대오리를 통과시키는 거야. 대오리를 미세한 날에 훑으면서 깎는 거지. 그걸 세 번 해. 그러면 0.6~0.7mm까지 가늘어져. 그런데 밀어 넣는 대오리 각도가 칼날의 각도와 맞지 않으면 대오리가 금세 부러지거든. 집중해서 그걸 잡고 끌고 훌치다 보면 손끝이 닳고 가시도 들고…. 손의 예민한 감각으로 움직여야 하는 거라 장갑도 못 껴. 아무리 얇은 거라도.”
발 한 개를 만드는 데 필요한 대오리는 약 1,800개. 여유분까지 총 1,900여 개를 고무쇠에 3번씩 통과시킨다는 얘기는 대오리를 5,700번 잡아당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팔의 감각을 5,700번 다스리는 일이자 0.1mm의 변화까지 알아채야 하는 눈빛이 5,700번 다녀가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 숫자를 생각한 적이 없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물었을 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냥 하는 거야. 잘될 때까지. 다른 과정은 몰라도 이 작업은 최소 5년은 해야 감을 잡을 수 있어.”
그가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00일. 그중 25일을 대오리만 다듬는다면 나머지 75일은 엮는 일이다. 가늘디가는 대오리를 발틀에 올려 명주실로 엮는데, 그때 글자와 문양도 함께 짜 넣는다. 글자와 문양은 온전히 실의 짜임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문양의 난이도에 따라 실을 돌돌 만 작은 실패(고들개)가 발틀에 500개 이상 매달리기도 한다. 500가닥의 실로 짜는 문양이란 얘기다.

대발 하나에 들어가는 1,800개 이상의 대오리를 얻기 위해 조대용 염장은 매해 12월에서 1월까지 한 달 동안 통영 주변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라는 대나무밭을 샅샅이 뒤진다. 그가 재료로 사용하는 대나무는 가늘면서도 잘 부러지지 않는 탄성 좋은 3년생 해장죽이다.

“주로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글자를 많이 써. 벽에 걸어둔 저 발을 봐. 중간에 쌍 희(喜)자가 보이지. 그런데 글자 속 무늬도 보여? 거북등무늬, 그물코무늬로 획이 빼곡히 채워져 있잖아.”
벽에 액자처럼 걸린 그 발에선 문양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하다. 자세히 봐야 눈에 들어오는 두 무늬는 소박하고도 잔잔한 멋이 있지만, 오래도록 눈길을 끌진 않는다. 그러나 그 발이 한옥 방문 앞의 제자리를 찾아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빛이 슴슴히 비치는 오후에 바람이 발의 표면을 결대로 훑고 지나가면, 발 문양은 발을 넘어 풍경 위에 새겨지는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빛이 변하는 대로, 바람이 바뀌는 대로 문양을 이룬 실의 짜임은 도드라지기도 하고 풍경에 묻히기도 한다. 그렇게 시공간에 열려 있는 대발은 매 순간 변화하는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생필품과 예술품의 경계를 넘나든다.

주거 환경 변화에 따른 위기
“매년 똑같은 발을 만들 수 있나. 대도, 실도 더 가늘어졌지만 가늘어지는 데에도 한계가 있잖아. 그래서 저번 것과 다르다는 걸 문양이 알려 주거든. 같은 사이즈의 발 안에서 글자를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고…. 그런데 글자가 많고 획이 많아지면 획 속의 육각형 문양 비율이 안 맞을 수 있거든. 이게 쉬워 보여도 하나하나 설계하듯 맞춰 가야 하는 거야. 50여 년을 했는데 아직도 조심스러워.”
문양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조대용이란 사람의 무늬도 드러난다. 지금껏 만나 온 발 중에서 가장 품격 있는 발을 물었을 때였다.
“훼손된 발 수선 의뢰가 들어왔어. 이승만 전 대통령 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미국으로 가실 적에 자기 집안에 주고 간 발이래. 전부 해체해서 복원할 수 있지만, 귀한 분이 물려준 것이니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권했지. 결국 그냥 그대로 두시더라고. 그리고 그 문양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을 만들었지. 그걸로 대한민국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어.”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가 곧 순천 송광사에서 만난 잊을 수 없는 발을 떠올린다. 대발로 만든 불경 보관용 두루마리였는데, 날아가는 박쥐 수십 마리의 문양이 특별했다고 기억했다. 그 발을 오래도록 회상하는 그에게 그런 발이 욕심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용기가 안 나는 게…. 내가 볼 적에 이건, 스님이 2~3년간 다른 거 다 내버리고 오로지 여기에 전념하며 공을 들인 것 같아. 보면 알지. 만드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인간문화재의 위치에서도 그렇게 스스로를 경계하는 염장이 처한 현실은 위태롭다. 한옥이 하나둘 사라지면서 발 수요가 급감한 탓에 어느 순간부터 ‘만드는 문제’보다 ‘파는 문제’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구 하나 사사받을 엄두조차 내지 않는 탓에 전수도 쉽지 않다. 아들과 딸이 이어 받고는 있지만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까닭 없이 온종일 길어지는 빗줄기에 연신 불편한 허리를 짚던 그가 결국 바닥에 엎드리고 만다. 그렇게 엎드려서 고개만 든 채 촘촘한 박음질 같은 답변을 이어간다. 이야기인즉슨 6~7년 전에는 유치원생들이 한 차를 타고 와서 눈으로, 손으로 발을 경험하고 갔는데 지금은 그런 발길 자체가 끊겨 서운하다는 것이다.
5대째로 넘어가는 이 집안의 기예가 세월이라는 모진 바람 앞에 서 있다.

강신재 (Kang Shin-jae 姜信哉) 자유기고가
안홍범(Ahn Hong-beom 安洪範)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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