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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SUMMER

기획특집

돌의 섬 제주 이야기 기획특집 3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키는 돌들

제주의 부드러운 산언덕 무덤가에 둘러진 나즈막한 산담과 무덤 앞에 서 있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의 동자석은 화산섬 제주의 고유한 풍토와 신앙이 만들어 낸 상징물들이다. 사람의 솜씨를 뽐내지 않는 겸손하고 소박한 이 조형물들을 통해 우리는 제주 사람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온 역사,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구좌읍 당오름에 산담군이 펼쳐져 있다. 무덤을 사방에서 둘러싼 돌담인 산담은 내륙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방목된 말과 소들이 무덤을 훼손하거나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아 준다. 산담의 상당수는 중산간 지대나 오름에서 볼 수 있지만, 밭 한가운데 자리 잡은 산담도 있다.

한반도에 속해 있는 약 3,300 개의 섬 중에서 가장 큰 제주는 하나의 거대한 산이라고 볼 수 있다. 섬 전체가 해발 1,950m의 한라산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길게 누운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 170만 년 전 이 한라산의 폭발로 만들어진 화산섬 제주의 지표와 지하는 용암 분출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바로 제주의 독특한 경관을 상징하는 현무암이다. 어디를 둘러 보나 검은색에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이 널려 있는 제주도를 돌과 바람과 여자의 섬이라는 의미에서 ‘삼다도’라 부르기도 한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활용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제주 사람들 역시 거부할 수 없는 자연 조건인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자연 조건인 돌을 사용했다. 방풍과 방파를 목적으로 해식애에서 떨어져 나왔거나 파식대에서 구르는 돌을 모아 해안이나 밭두렁을 따라 돌담을 쌓았고,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산담을 쌓았으며, 동자석을 깎아 세워 사자(死者)의 곁을 지키게 했다.
제주를 상징하는 돌담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며 쌓아 내려온 노동의 축적이다. 아버지가 큰 돌을 적당한 크기로 마름질하면 아들이 그 돌무더기를 날라다 담을 쌓았고, 어머니는 밭을 일굴 때마다 수시로 호미에 걸리는 잔돌로 돌담의 구멍을 메웠다. 이 단순하고 고된 일이 얼마나 오래된 노동의 반복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그러나 하늘에서 이 섬을 내려다 보면 크고 작은 검은 돌담이 자유분방한 선을 그리며 섬 전체를 휘감아 안고 있는 것이 마치 거대한 미술 작품을 보는 듯하다. 대지를 캔버스 삼은 작자 미상의 이 신비로운 ‘예술 작품’들이 특별한 것은 사람의 손길보다는 천연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제주의 돌담들은 하나같이 정해진 규칙이나 양식이 없이 제멋대로 구불거리며 대지를 휘감고 있다. 그리고 그 돌담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선들은 마치 바람에 쓸려 저절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래서 누군가는 “제주의 땅과 돌담은 원래부터 한 몸이었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제주 사람들은 돌로 울타리를 세운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다가 죽으면 다시 돌담이 둘러쳐진 무덤에 누웠다. 그렇게 돌은 인간의 삶과 죽음 모두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무덤을 지키는 동자석은 남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상이다. 제주의 동자석은 성긴 현무암이 주는 질감과 단순하면서도 영적인 분위기를 살린 표현 방법이 눈길을 끈다.

산담은 크게 한 줄로 쌓는 외담과 겹으로 쌓는 겹담으로 나뉘는데, 산담의 크기와 형태는 집안의 재력을 가늠하는 징표가 되기도 한다.

사자를 위한 돌담
온 섬에 뒹구는 제주의 돌은 신의 선물일까, 아니면 재앙일까? 농부의 일손을 더디게 할 때는 잠시 재앙이 되지만, 돌이 이처럼 흔치 않았다면 사람과 짐승의 집은 물론 죽은 자의 영혼이 쉴 무덤 또한 제대로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주 사람들은 돌로 울타리를 세운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다가 죽으면 다시 돌담이 둘러쳐진 무덤에 누웠다. 그렇게 돌은 인간의 삶과 죽음 모두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제주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여러 형태의 돌담 가운데 무덤을 둘러싼 돌담을 ‘산담’이라 부른다. 산담은 여러 용도의 돌담 중 유독 신성시되는 것으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이자 영혼의 집임을 표시하는 경계선이기도 하다. 산담은 한 줄로 쌓은 외담과 겹줄로 쌓은 겹담으로 나뉘는데, 외담은 다시 모양에 따라 원형 산담과 도토리 모양의 산담, 사각형 산담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무덤 뒷부분을 좁게 조성한 사다리꼴의 겹담도 있다.
산담에는 영혼이 다니는 신문(神門)인 ‘올레’를 둔다. 산담 좌측 혹은 우측에 약 40~50cm 정도를 터놓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터진 공간 좌우측 담장 위에 긴 돌 1~3개를 올려놓아 마소나 사람의 출입을 통제한다. 올레의 방향이 좌우로 나뉘는 기준은 무덤 주인의 성별이다. 남자의 무덤은 망자의 시점으로 볼 때 좌측에 만들고, 여자는 우측에 만들며, 합묘인 경우 남자를 중심으로 좌측에 만든다. 간혹 산담 앞쪽에 만든 사례도 있으며, 쌍묘에서는 특별히 좌우 양쪽에 올레를 내는 경우도 있다.
산담은 원래 밭머리가 아닌 들판에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화재로 인한 소실, 또는 마소 등 짐승의 침입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다. 하지만 들판이었던 땅이 점차 경작지로 변하면서 밭머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물론 친인척에 의한 관리의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해 밭 한쪽에 무덤을 만들고 산담을 조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인가 근처에 있더라도 산담의 돌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타당한 이유나 허락 없이 산담을 함부로 넘어서도 안 되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길을 잃었을 때에 한해서는 산담 안에 들어가 잠을 자면 무덤 속 영혼이 보호해 준다고 믿었다.
산담에는 일반 돌담과는 달리 돌을 다루는 제주 사람들의 기술을 가늠할 수 있는 품격이 다른 조형적 미학이 배어 있다. 그 조형성을 간단히 정의하면 ‘한국적인 선의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한국의 기와집은 처마의 선이 좌우로 갈수록 부드럽게 하늘을 향해 들려 있어 마치 가볍게 날아오를 것 같은 리듬감을 느낄 수 있다. 산담의 선도 이와 유사한 아름다움을 보인다. 높이가 낮은 뒤쪽에서부터 천천히 위를 향해 들리듯 구부러져 흘러서 앞쪽 좌측 끝에 오면 담장의 각은 하늘을 향해 살아나 유연한 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이 선이 중앙으로 이동할수록 서서히 잠기듯 낮아지다가 반대편 우측 끝으로 갈수록 다시 살아나 좌측 끝과 대칭을 이룬 뒤 멈춰 선다. 더 나아갈 수 없이 살짝 멈춰 버린 산담의 선은 바라볼수록 평온하다.

영혼의 심부름꾼 동자석
산담 안에 세우는 동자석은 이름 그대로 어린 남자, 또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자석은 여러 기능으로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해 예를 갖춘다. 그중에는 숭배적 기능, 봉양적 기능, 수호적 기능, 장식적 기능, 주술적 기능, 유희적 기능이 있다. 제주의 동자석은 내륙으로부터 온 여러 성씨의 입도 시조나 부임하는 목사, 제주 출신의 양반 토호, 유배객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하지만 불교적 색채가 채 가시지 않은 채 약간의 지역적 특징만 더해진 내륙의 대다수 동자석들과는 사뭇 다르다. 유교 문화의 중심권인 한양 지역에서 잉태된 묘비석인 동자석이 멀리 남쪽 끝 변방인 제주까지 흘러오는 동안 각 지역의 독특한 풍습과 여러 신앙이 결합되고, 여기에 제주의 풍토와 사상이 더해지면서 매우 독특한 동자석으로 재탄생했다. 다시 말해 제주의 동자석은 불교, 무교, 도교 및 토속 민간신앙의 다양한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반영된 점이 특징이다.
제주의 동자석은 매우 친근한 정감을 준다. 특히 18세기 조선 영·정조대에 만들어진 동자석들은 눈이 크고 선이 부드러우며 보다 정교한 특징을 지녔다. 이는 육지 왕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은 국상(國喪) 때마다 능역(陵役)을 자원하여 육지에 다녀왔다. 인조 재위 때인 1629년에 내려진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육지 출입이 쉽지 않았던 탓에 능역 자원 봉사는 제주 사람들이 육지로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때 그들이 왕릉 조성 과정에서 보고 기억한 석상을 재현한 것이 지금의 제주 동자상이다. 문인석을 모방해 만든 것인데, 기술이 부족한 아마추어 장인들의 손에서 전혀 다른 형태의 석상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 결과 제주 동자석은 육지에서는 보기 드문 현무암을 사용해서 매우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에는 고유의 단순미에서 우러나는 건강한 원시성으로 인해 제주의 매력적인 얼굴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일상의 생활 도구로 쓰였던 제주 돌

화산섬 제주도는 현무암이 발달해 있어서 예로부터 주로 돌로 된 생활 도구들을 사용했다. 돌이 흔하기도 하거니와 비가 많이 오고 습도가 높아 나무 도구가 빨리 썩기 때문이다. 돌로 만든 제주의 전통 생활 도구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물팡, 물방애, 돗통시이다. 그밖에 맷돌, 화로, 정주석, 도고리도 있다. 요즘은 대부분 사용하지 않지만, 제주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추억이 어려 있는 물건들이다.

물팡은 물을 긷는 허벅을 올려 놓는 받침대로 주로 부엌 문 밖에 설치했다.

물팡
물을 긷는 허벅을 올려놓는 물팡은 현무암 돌로 만든 사각형의 받침대이다. 기능성과 동선을 고려해 주로 부엌 문 밖에 설치하는데, 제주 여성들은 수시로 허벅을 등에 지고 마을의 공동 샘에서 물을 길어다 이곳에 내려놓았다. 샘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마을마다 집마다 물을 길어 오는 거리가 제각기 달랐다.
해안가 마을은 일반적으로 마을 중심지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샘이 솟아났다. 이 물을 ‘산물’이라고 불렀는데, 조수간만의 차에 따라서 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물때를 맞춰서 물을 길어 왔다. 산간 마을에서도 빗물이 고인 봉천수를 허벅으로 날라다 먹거나 비가 올 때 나무에서 흐르는 빗물을 받아 생활 용수로 삼았다. 산물이 부족한 곳에서는 초가 지붕에 내리는 빗물을 받아 저장해 두었다가 먹었다.
물은 주로 부인들이나 여자아이들이 길어 왔다.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며, 소와 말, 돼지에게도 먹였다. 제주 여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허벅 지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들의 하루는 허벅을 지고 물을 길어다가 물항아리를 채우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허벅은 물을 운반하기 좋게 만든 둥글고 검붉은 옹기 그릇이다. 먼 거리에서 나를 때에도 물을 흘리지 않게 목이 좁고 배가 불룩하게 만들었으며, 나이에 맞게 쓸 수 있도록 크기도 다양했다.

돌방애는 제사에 올릴 떡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되었으며, 옷감에 감물을 들이는 데도 긴요한 도구였다.

돌방애
가족의 생일보다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중요하게 여겼던 제주 사람들은 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내어 떡을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방아가 필요했다. 이 돌로 만든 방아가 제주 말로‘돌방애’이다. 방애는 2명, 또는 3명의 여성이 번갈아 가며 찧었다.
방애는 노동복을 만들 때도 긴요하다. 제주도 민가에서는 여름 장마철이 지나면 풋감을 따서 옷감에 감물을 들였다. 푸른 풋감을 따서 방애에 넣고 빻으면 반달 같은 감씨가 나오고(아이들은 재미로 이 떫은 감에서 나오는 감씨를 먹곤 했다), 풋감이 적당히 뽀개지면 삼베나 광목 천을 방애에 넣고 손으로 골고루 문질러 옷감에 감즙만 묻히고는 돌담에 널어 햇볕을 맞게 한다. 감옷이 마르면 다시 물을 적셔 널기를 반복하여 열흘 이상 지나게 되면 빳빳하고 질긴 천이 되는데 이를 ‘갈천’이라고 하고, 그 천으로 만든 옷을 ‘갈옷’이라고 한다. 이 갈천으로 각종 노동복을 만들어 입었는데 갈옷은 땀이 잘 차지 않고 시원하며 빨래를 할수록 점점 질기고 색이 짙어진다.
도정을 위해서는 실제로 돌방애보다 ‘남방애’라고 불리는 나무 방애가 선호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가볍고 관리도 편하기 때문이다. 돌방애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마당 구석에 세워 두고, 남방애는 비를 피해 외양간 소 뒤편에 세워서 보관했다.

돗통시는 제주 특유의 돌담을 두른 돼지 축사인데 화장실과 이어졌으며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거름으로 농사를 지었다.

돗통시
제주에서 돼지를 키우기 위해 돌담으로 두른 집을 ‘돗통시’라고 한다. 제주에서는 돼지를 ‘도새기’라고 부르는데, 단백질 공급을 위해 매우 중요한 가축이었다. 그러나 곡물이 귀해서 주로 인분(人糞)을 먹여 키웠다.
돼지의 축사인 돗통시는 화장실 역할도 했지만 농작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거름을 만드는 장소이기도 했다. 바닥에 늘 보리 짚을 깔아 두어 인분을 먹은 돼지가 그 위에 배설을 하고 밟으면 자연스럽게 거름이 만들어지게 한 것이다. 겨울철이 되면 그 거름을 담장 밖 골목길에 쌓아 두고 두어 달 발효시킨 후 이른 봄 보리씨와 함께 섞어 밭에 뿌렸다.
돼지를 집 안에서 키운 이유는 또 있었다. 제주에서는 아들이나 딸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어린 돼지를 두 마리 사다가 키웠다. 한 해 남짓 키워 다 자라면 결혼식 날에 맞춰 돼지를 잡아 고깃반을 만들어 하객에게 대접했다.

고깃반은 돼지고기 석 점, 순대 한 점, 두부 한 개를 올려 놓은 제주 고유의 음식으로 지금도 제주에서는 “돼지고기 석 점 언제 먹을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 언제 할 거냐?”란 뜻이다.
인분을 먹고 자라는 ‘똥돼지’는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 흑돼지는 제주가 자랑하는 특산물이다.

김유정 (Kim Yu-jeong 金唯正) 제주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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