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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AUTUMN

생활

길 위에서 시 열심히 쓰시오,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길이 244km의 임진강은 한반도 중동부 산간에서 발원하여 하구에서 남과 북을 가르며 흐르다가 한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 든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에 위치한 임진나루는 분단 전 내륙 수상교통의 요지였으나 한국전쟁 후 군의 철책 순찰로가 지나는, 그래서 허가 받은 고깃배나 드나드는 쓸쓸한 나루가 되었다.

민통선 철책을 전시 공간으로 삼은 파주 임진강변 DMZ 에코뮤지엄거리 설치미술작품인 <날으는 평화의 고무신>은 북한 땅을 밟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북쪽을 향해 걸린 수백 켤레 고무신에 꽃을 담아 표현했다. 2010년 대학생공모전 우수작으로 성연귀/양시훈 공동작품이다.

강을 따라 걷는다.
바람 속에 짙은 풀꽃 향기가 스미어 있다. 지금 나는 두 동무와 함께 강변을 걷는다. 우리는 1970년대 초반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셋은 삶을 보는 공통의 눈이 있었다. 시를 쓴다는 것. 열일곱 열여덟의 나이에 어떻게 시 쓰는 일을 생의 업으로 받아들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비하기 이를 데 없다.

“이건 시가 아니군”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매주 두 차례씩 만나 시에 대한 토론을 했다. 한 차례는 기성 시인들이 최근에 발표한 시들을 읽었고 한 차례는 우리가 쓴 시들을 읽고 토론했다. 그 무렵 우리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기성 시인들이 문예지에 발표한 시보다 동무들이 쓴 시들이 훨씬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토론의 분위기는 동무들의 시를 이야기할 때 훨씬 격렬했다. 서로의 시를 분석할 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이건 시가 아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신비한 시를 써온다 해도 동무들의 입에서 같은 말이 떨어졌다.
어느 날 한 동무가 시를 발표했다.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인 시였다. 나는 그에게 얘기했다. 이건 시가 아니군. 형편없어. 기성의 냄새만 날 뿐이야. 왜 이게 시인지 말해봐. 그가 곁에 놓인 가방을 뒤적였다. 가방 안에서 그가 빼 든 것은 군용 대검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시를 쓴 그는 토론 전날 밤 광주의 한 재래시장에서 그것을 구입함으로써 나름 완벽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만약 이 시를 시가 아니라고 말하는 녀석이 있다면 더 이상 내 동무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강의실 밖으로 튀어나갔다. 대검을 든 그가 우리 뒤를 쫓았다. 칼을 들고 쫓고 쫓기는 모습을 보고 시민들이 신고를 했고 우리는 출동한 경찰 손에 체포되었다.

1971년 이후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군 순찰로가 45년 만에 파주 임진강변 생태탐방로라는 이름으로 개방되었다. 누구나 사전 신청 절차를 밟으면 정해진 시간에 해설사의 인도 아래 군사용 철책 너머 숨겨졌던 절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왜 대검을 들고 동무들 뒤를 쫓았습니까? 경찰이 물었다.
내 시가 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동무의 말을 경찰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경찰이 다시 물었다.
왜 대검을 들고 쫓았습니까?
내 시를 시가 아닌 쓰레기라고 했습니다.
경찰은 고개를 흔들었고 그때 학교의 상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경찰이 방금 쓴 조서를 선생님에게 보여 주었다.
자신의 시를 시가 아니라고 했다 해서 대검을 들고 쫓았다니 도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경찰관의 조서를 천천히 읽은 선생님이 짧게 답변했다.
말이 됩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보증 하에 훈방되었고 우리의 시 쓰기는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압록강변 의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임진나루는 지금은 민통선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고깃배만 가끔 드나드는 적적한 장소가 되었다.

아프고 또 아픈 강변 길
그 동무들이 함께 강을 따라 걷고 있다. 40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났다. 세월은 한 친구를 의사로 만들었고 다른 한 친구와 나는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시인의 격으로 치면 의사가 된 친구가 으뜸이라 할 것이다. 2년 전 우리 바다에서 비극이 있었다. 세월호라는 이름의 배가 침몰해 304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그 중 250명이 수학여행을 가던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는 매일 밤 한 영혼에게 한 편씩 모두 304편의 시를 썼다. 낮의 진료를 마치고 밤 깊은 시간 그가 절대의 슬픔과 싸우며 쓴 시들이 이 가을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나온다. 다른 한 친구는 1986년에 <임진강>이라는 장편 서사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김낙중이라는 20대 청년이 1955년 6월 임진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6월 남한으로 되돌아온 사건을 다루고 있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이 청년은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 이라는 통일안을 만든다.

휴전선에서 남쪽으로 약 7km 떨어진 지점에 세워진 파주 임진각의 3층 전망대에 오르면 임진강, 강을 가로질러 남북을 이어주는 자유의 다리, 그리고 북녘의 산과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임진각에서 서울까지는 53Km, 개성까지는 22km이다.

“20세 미만의 청년을 남쪽과 북쪽의 국적에서 제외하고 이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이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남과 북 두 체제가 공동으로 도움을 주자.”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이 통일안을 대한 남쪽의 이승만 정권은 그를 정신병자로 내몰았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비 오는 임진강을 건너 북측에도 이 통일안을 제출한다. 북의 반응 또한 다르지 않았다. 북의 정권은 그를 간첩으로 내몰다가 결국 남쪽으로 돌려보냈고 남쪽에서의 그의 삶은 다섯 번의 사형선고와 18년의 옥살이로 이어졌다.

한 청년의 삶을 관통한 역사의 비극을 안고 강물은 고요히 흐른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은 올 3월 파주 임진강변 생태탐방로라는 이름으로 민간에 개방되었다. 임진각에서 율곡습지를 잇는 9.1km 구간이다. 길섶에 보지 못한 꽃들이 피어 있다. <임진강>을 쓴 동무는 내가 아는 한 식물이름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 이 길을 걷기에 최고의 길동무인 셈이다. 우리는 철책선 남쪽을 따라 걷는다. 바람은 부드럽고 강물은 하늘빛을 담아 푸르고 푸르다.
2km 쯤 걸었을 때 철책선 위에 몇몇 설치미술작품들이 보인다. 한 작품이 눈에 잡힌다. 하얀 고무신들이 철책 위에 걸려 있다. 몇백 켤레인지 알 수 없다. 고무신마다 초록색 어린 풀꽃 하나씩을 담고 있다. 갈 수 없는 북한 땅을 밟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새긴 것이다.

임진강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같다. 아프고 또 아프다.
1983년 6월 30일 한국방송공사는 전쟁으로 흩어진 한국인들에게 살붙이를 찾아주는 방송을 시작하였다. 11월 14일까지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으로 방영된 이 방송은 10189명의 이산가족이 다시 만나게 했고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이 방송은 그 어떤 문학작품으로도 묘사할 수 없는, 인류가 빚은 참혹한 비극과 격렬한 사랑의 아픔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사니까 좋은 날이 오네요”
1999년 4월 우리 셋은 함께 북한 땅을 밟았다.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길이 열렸던 것이다. 이른 새벽 배가 장전항 외항에 이르러 닻을 내렸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북녘 땅은 모두 갈빛이었다. 산도 배도 건물도 같은 빛이었다. 통관절차를 밟기 위해 세관 건물로 들어설 때 앞으로 만나게 될 북한 동포에 대한 인사말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우리는 가슴이 설렜다. 몇 가지 인사말들을 궁리했지만 꼭 맞는 인사말을 찾지 못했다. 입국서류를 받는 이에게 나는 “사니까 좋은 날이 오네요” 라고 얘기했다. 그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강산 구정봉에 오를 때 안내원 아가씨의 볼이 고왔다. 복숭아빛 연지를 바른 것 같았다. 나는 그이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주의사항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진달래 꽃빛이 연지를 바른 듯 고와요. 아가씨의 등 뒤에서 혼자 가만히 중얼거렸는데 반응이 왔다. 참 곱지요? 나는 그렇게 그이와 첫 대화를 했다. 문답이 이어졌다. 동무는 뭐하오? 시를 쓰오. 살아오는 동안 어느 때 보다 큰 마음의 설렘을 느끼며 내가 하는 일을 밝힌 순간이었다. 좋은 시를 많이 쓰시오. 그이가 말했다. 헤어짐의 인사말로 이보다 좋은 인사는 내 기억에 없다.

파주 임진강변 DMZ 에코뮤지엄거리에 걸려 있는 한성필 작 은 뒷짐을 진 북한 장교에게 남한 병사가 손을 내밀고 북측의 판문각 현판을 통일각으로 바꿔 다는 상상 속의 장면을 담고 있다.

탐방로를 따라 7km 쯤 걸으면 임진나루에 이른다. 이 나루는 조선시대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경지대이자 중요한 싸움들이 펼쳐진 곳이다. 6.25 전쟁 중에는 남과 북의 군인들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몇 번을 번갈아 점령했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나루에는 작은 목선들이 10척 남짓 묶여 있다. 이곳 주민들이 쓰는 고깃배다. 철조망을 두른 나루엔 군부대의 초소가 서 있고 주민이 아닌 외부인의 출입은 금지된다. 의주로 가는 옛 국도 1호선의 요충지라 큰 나루일 거라 생각했는데 배구 코트 크기의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왕래가 끊긴 나루는 나루가 아니다. 율곡 습지 공원에서 생태 탐방로는 끝난다.

최전방 전망대와 평화습지원
이튿날 우리는 연천군의 태풍전망대를 찾았다. 서 울에서 65km, 평양에서 140km 떨어진 임진강변에 서 있는, 높이 264m의 전망대다. 신분 확인 절차를 밟아야 전망대에 들어갈 수 있다. 영내에 교회와 성당, 법당이 자리잡고 있다. 6.25참전 소년 전차병 기념비가 눈에 띈다. 어떤 소년들은 우리가 한참 시를 토론하던 그 나이에 전차를 몰고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우리는 강철 같이 단결하여서/ 전진하는 57중대 소년 전차대.” 비의 몸에 새겨진 소년전차대 군가의 일부다. 이름도 군번도 없이 산화해간 그들을 위해 잠시 묵념을 올린다. UN 미군 전사자 36940위 충혼비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열렬히 살고 싶은 꿈을 꾸다가, 그 꿈들을 한반도의 산자락에 묻었을 36940명의 영혼. 남은 이들은 어떻게 살아 그들의 몫을 다할 것인가.
전망대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에서는 북한군 초소를 육안으로 볼 수 있다. 군사분계선까지 800m, 제일 가까운 북한군 초소까지 1,6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DMZ 내에서도 최전방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평화습지원에 들꽃이 만발했다. 습지원 너머 보이는 연강갤러리는 연천군이 안보전시관을 리모델해서 올해 5월에 문을 연, 민통선 안 최초의 예술 공간이다. 건물 외벽에 한성필, 조상기 두 설치작가의 합작 <평화의 문>이 걸렸다.

남북을 가르며 흐르는 임진강 양쪽의 풍경이 확연히 다르다. 북의 산야는 붉은 빛 그대로다. 숲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훤히 보이는 빈 땅이 북한의 옥수수 농장이라는 것을 초병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아프다. 최전방 접경지에 옥수수를 심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인가. 날이 맑을 때는 이 농장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들른 날 북한 주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망원경으로 오장동이라는 북한 마을이 흐릿하게 보인다. 눈앞의 노리고지 정상에는 전쟁 당시 1평방m에 4500발의 총탄이 쏟아져 산의 높이가 5m 가량 낮아졌다 한다.

하얀 고무신들이 철책 위에 걸려 있다. 몇백 켤레인지 알 수 없다. 고무신마다 초록색 어린 풀꽃 하나씩을 담고 있다. 갈 수 없는 북한 땅을 밟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새긴 것이다. 임진강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같다. 아프고 또 아프다.

남북 화해무드 속에 1998년 금강산으로 가는 해로가 열렸고 2003년 육로가 열려 한국인들이 한동안 관광버스로 동해안 도로를 달려 금강산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감격을 맛보았다. 이 남북 협력 사업은 2008년 7월 중단되어 아직 재개되지 않았다.

태풍전망대에서 내려와 바로 곁의 임진강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평화습지원을 찾았다. 인공으로 조성된 이 습지원에서 철새인 두루미 수백 마리가 겨울을 난다. 한국인들에게 학(鶴)이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이 새는 온몸이 흰색이며 목뒤 부분만 붉은 빛을 띤다. 키140cm, 날개 길이 240cm, 몸무게 10kg의 이 새를 한국인들은 길조로 여긴다. 이 새가 찾아오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는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제일 좋은 일. 그것은 통일이다. 전쟁의 상처가 깊게 드리운 임진강 자락에 학들이 서식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그들이 해마다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은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토테미즘 같은 것이다. 연천군청에서는 이곳에 ‘두루미 느린 우체통’을 만들어 두었다. 지금 편지를 쓰면 1년 뒤에 부쳐준다 한다. 1년 뒤에 오는 두루미를 기다리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쩌면 1년 안에 불쑥 평화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표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엽서 한 장을 썼다. 뭐라고 쓰지? 금강산에서의 마지막 인사가 떠올랐다.
시 열심히 쓰시오,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곽재구 (Gwak Jae-gu, 郭在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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