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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SPRING

CULTURE & ART

GUARDIAN OF HERITAGE 고악기 복원 - 개량 전문가 김현곤 씨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인 ‘종묘제례악’은 편종의 종소리로 시작해 편경의 경소리로 마무리한다. 조선왕조 오백 년에 걸쳐 궁중음악 연주에 핵심 역할을 했던 유율 타악기들이다. 일제강점기에 맥이 끊겼던 이 악기들을 복원한 이가 김현곤(金賢坤) 악기장(樂器匠)이다. 국립국악원, 각 시도 국악원과 주요 음악대학 한국음악과들이 그가 제작한 악기를 소장하고 있다.

지난해 9월 18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파리 국립샤이오극장(Theatre National de Chaillot) 대극장. 한국-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한•불 상호교류의 해’ 개막작으로 종묘제례악 전곡이 최초로 해외무대에서 연주되었다. 깊이가 강조된 무대 뒤쪽에 벽처럼 늠름하게 선 악기 네 틀(4대)이 보였다. 편종과 편경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와 춤을 추는 무동 뒤에서 음악의 맥을 잡아주는 유율(有律) 타악기다. 이 악기들이 파리에 가기까지 무던히 애를 쓴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 201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보유자로 지정된 김현곤(81)씨다. 사계절 온도변화에 약한 두 악기를 손보고 조율하느라 며칠 밤을 샜다고 했다. 생물처럼 살아 숨 쉬는 그들이 제 소리를 내도록 구석구석 살피는 그의 손길이 섬세하다. 일하며 깨우친 서양악기의 구조와 이치 편종과 편경은 음의 높낮이가 있는 타악기라 조율이 어렵다. 편종은 쇠로 주조한 16개 종, 편경은 옥돌을 깎아 만든 16개 ‘ㄱ’ 모양 돌인데 모두 똑 같은 크기로 만들어져 두께로 소리를 조절한다. 두꺼울수록 높은 소리가 나는데 그 미묘한 차이를 조절하는 게 ‘피아노 조율은 저리 가랄 정도로’ 어렵다. 절대음감이 있어야 하고 손재주가 뛰어나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이 끊이지 않던 집안 내력이 그를 절대음감의 소유자로 만들었다. 네 살 때 집에 축음기가 들어왔는데 전통음악, 양악 할 것 없이 종일 판이 돌아가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큰형이 노래를 잘하고 풍물을 좋아해 때때로 소리꾼을 모셔다가 판을 벌였던 추억이 그의 몸 안에 녹아있다. 이런 이력이 그를 악기장으로 이끌었다.

음악을 정규 교육기관에서 배우신 일이 없는데도 그처럼 다양한 악기를 다 만지고 수리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나요?
제가 전북 순창 출신인데 공부 욕심이 많았어요.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명문 고등학교 시험을 쳤는데 준비가 없으니 떨어졌지요. 야간 상업고등학교에 적을 걸어놓고 낮에는 악기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집안 어르신들과 이웃이 다 음악을 즐겨서 늘 음악에 젖어 살았던 셈인데 그 피가 어디 가겠어요. 게다가 일터에서 하루 내 LP판을 틀어대니 음악감상실이 따로 없었죠.
피내림을 바탕 삼아 독학으로 악기 수리를 배우신 셈이군요.
한국전쟁 뒤끝이라 서울 충무로며 종로3가 거리에 미군부대 등지에서 흘러나온 악기가 쌓이던 때였어요. 당시 연악사(硏樂社)라고 예술인들의 사랑방 같은 악기점이 있었는데 거기 모이는 이들이 다 한국에서 손꼽는 연주자들이었죠. 이 분들 틈에 끼여 귀동냥을 하면서 하나 둘 해체해 제 나름으로 악기를 만지고 고쳤어요. 그때 무슨 책이 있습니까, 선배가 가르쳐줍니까. 공구도 없고 재료도 변변찮은데 그저 제 손과 귀에 의지해 해나갔죠.
1950년대 중반에 악기점이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고려, 서라벌, 미광, 자유, 연악사 등이 있었죠. 3년을 꼬박 밤새 서서 각종 악기를 분해하고 실험하면서 무슨 악기든 만들 자신이 생겼어요. 특히 아코디언이나 오르간 같이 어려운 분야는 거의 다 제가 고쳤죠. 뭘 가져와도 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악기 수리 전문가로로 이름이 나면서 종로 3가에 터를 잡고, 일하던 집 이름을 따 ‘연악사’를 열었다. 1960년대 중반 교재용 악기가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실로폰, 탬버린, 리코더 등을 자체 제작해 납품했다. 수출용 악기도 만들었다. 악기공장을 따로 짓고 열심히 일했다. 그때 운명적 만남이 없었다면 악기장 김현곤은 없었을 것이다.

국악기 복원에 참여
1983년 친구 따라 나간 교회에서 성가대를 이끌던 한만영(1938-2007) 서울대 음대 교수를 만났다. 그의 악기 제작 솜씨를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한 교수는 1983년 제6대 국립국악원장으로 취임하자 우리 악기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국악기는 낯설어서 망설여지지 않으셨나요?
같은 악기이고 공정도 비슷하니 뭐 어렵겠나 싶었어요. 첫 주문이 세종문화회관 개관식 때 정악단이 연주할 타악기 ‘방향(方響)’을 복원해 달라는 거였죠. 종묘 수장고에 가보니 조선시대 만들었다는 악기 100여 점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방치돼 있어요. 하나씩 쓸고 닦아내 성한 걸 한 세트 골라 서울 음대 국악과에 보냈죠. 1984년 방향 한 틀을 만든 게 전통악기 복원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양악기에서 국악기로 대 전환기가 왔군요.
일이 산더미로 쌓여있는 겁니다. ‘국악기 개량 위원회’가 꾸려져 한만영, 황병기, 권오성, 이승렬, 이상규 씨와 함께 15년 동안 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전화에 불이 나고 사람이 찾아오고 수리 상담이 줄을 이었어요. 내 나라 악기를 부활시키고 널리 보급하니 보람 있더군요.

편경의 옥석을 찾아 지구 반 바퀴
1989년 또 다른 임무가 그에게 주어졌다. 편종과 편경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50대 중반에 경험이 쌓여 무서울 게 없던 그는 무슨 악기든 제작은 자신 있다는 자세로 나섰다. 하지만 복병이 숨어 있었다. 편종의 원료인 합금을 만드는 것은 옛 기록대로 하여 수월하였으나 편경을 만들 돌이 막상 찾아보니 없었다. <악학궤범>의 기록에 의지해 국내에 있음직한 지역을 다 뒤졌지만 쇳소리를 내는 옥돌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해외로 나가기로 했다. 당시 수교가 안 된 중국 땅을 밟기 위해 연변 동포와 인연을 맺고 동행했다. 악기에 쓰는 돌이 있다는 곳이면 수천 리를 마다 않고 가봤지만 운이 닿지 않았다. 여러 옥으로 실험을 했으나 원하는 소리가 안 났다. 의뢰처에 약속한 기한은 다가오는데 재료가 없으니 속수무책이었다.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요.
연변에서 출발해 내몽골, 윈난, 저장, 둔황까지 2년이 넘게 돌아다니며 사비 10억 원을 쏟아 부었지만 허사였어요. ‘국악기는 이제 접어야겠다’ 마음먹고 천진 공항에서 귀국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허탈한 마음을 달래려 기념품점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옥으로 만든 ‘건신구’가 눈에 들어왔어요. 손에 넣고 주물럭거리면 건강에 좋다는 옥구슬이었는데 경석(磬石) 재질이에요. 귀국해 광업진흥공사에서 성분 분석을 하니 바로 찾아 헤매던 옥돌인 겁니다. ‘아이고, 살았다’ 눈물이 납디다. 그 후에도 허난성에서 이 돌의 생산지를 찾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야 <세종실록>에 기록된 대로 경기도 여주지역에서 남양옥을 찾았습니다.
실제 만들 때는 어려운 점이 없었는지요?
산 넘어 산이었죠. 옥돌을 깎고 다듬어 광을 내기까지 3천 번을 밀어야 하는 중노동입니다. 마른 돌을 깎는 섬세한 작업이라 장갑도 못 끼고 맨손으로 해야 해요. 미묘한 음의 차이를 잡아내려면 귀 못지않게 직관도 중요합니다. 두께 2, 3mm를 놓고 씨름하노라면 인내심과 순발력이 바닥 날 때가 있는데 그 한계를 넘어야 물건이 나옵니다.

세계악기박물관 건립의 꿈을 키우며
김 악기장은 요즘 개량 대금의 특허를 내고 그 제작에 힘을 쏟고 있다. 사람들이 대금 소리가 좋아 불고 싶어 하지만 전통 대금은 운지법이 너무 어려워 몇 년씩 훈련해도 제대로 연주하기가 힘든 데 착안했다. 학교 음악시간에 누구나 손쉽게 배울 수 있도록 플라스틱 대금을 개발했다. 여름쯤이면 각급학교에 보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세계악기박물관 건립 계획도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 누구보다 동서양 악기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그는 대륙별, 악기별 전시관을 꾸며 전 세계 사람들이 와서 체험할 수 있는 교육장을 만들 설계도를 그렸다.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된 악기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도 꿈꾼다. 악기제작 전수관을 세워 한국 악기 장인들의 우수함을 널리 알리는 것도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목표 중의 하나다.
“남북 통일시대를 대비해 임진강가에 박물관과 전수관을 짓고 싶어요. 가능하면 북쪽 가까이에 땅을 잡으려는데 어찌 될지. 올해는 시작을 해야 할 텐데.”
그의 곁을 지키는 동지가 이제 20여 년 경력을 쌓아 온 아들 김종민(49) 씨와, 이제 일을 배우고 있는 고등학생인 큰 손자이다. 이들이 악기장으로 대를 잇겠다는 혈육의 뜻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다. 명예도, 부귀도 없는 길이지만 인류의 위대한 무형유산인 음악을 나르는 메신저 역할의 보람을 알기 때문이다.
김 악기장은 1년에 꼭 한 틀씩 편종과 편경을 제작하는데, 얼마 전 그 전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기록을 남기기 위한 1차 작업이었다.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요즘에는 작업 중에 왼손마디가 붓고 탈진해 새삼 세월이 가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의 손에서 부활한 편종과 편경 소리가 고단했던 악기장의 삶을 길이길이 전해줄 것이다.

정재숙(鄭在淑, Chung Jae-suk)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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