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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SPRING

CULTURE & ART

INTERVIEW 인순이,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가수’가 되고 싶다

인순이는 트로트, 솔, 댄스를 두루 섭렵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 중 한 사람이다. 80년대에 얻은 댄싱 디바로서의 명성에 압도적 가창력, 인생에 대한 체험적 통찰로 곡 해석력이 더욱 깊어지며 널리 사랑 받는 ‘국민가수’가 되었다.

엄마 얘기부터 해야겠다. 주말마다 엄마 때문에 다들 난리니 말이다. TV 드라마 <부탁해요 엄마>(KBS2)와 <엄마>(MBC)는 가족을 위해 헌신한 엄마가 주인공이다. 시청자는 저마다 자신의 엄마를 떠올리며 눈물 훔치기 바쁘다. 이 중 <엄마>가 인기를 끈 데는 OST도 한몫 했다. “아득히 머나먼 길을 걸어/생의 한가운데를 지나서”로 시작하는 이 노래 ‘이토록 아름다웠음을’은 겨울나무들 사이의 메마른 햇살처럼 처연하다. 감미롭고도 청아한 음색과 서정적이고도 격정적인 멜로디. 고백하건대,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나는 이 곡에 빠져들었다. 복받치는 감정의 물결에 마음의 돛단배가 마구 떠밀려갔다. 가수 인순이의 저력을 새삼 확인한 순간이었다.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인순이는 생동감이 넘쳤다. 우리 나이로 예순이라는 사실을 누가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터틀넥에 면바지, 그리고 운동화를 신었다. 은발 머릿결이 카페의 회색 벽면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녀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였을까?
“장군이었어요. 지칠 줄 모르고 뭐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스타일.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
어머니는 10년 전 머나먼 곳으로 떠나갔다. 인순이는 “제 나름 효녀였지만, 가시고 난 후 못 해드린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차별을 딛고
인순이는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다. 혼혈인에 대한 냉대와 차별을 극복하고 오로지 실력으로 정상급에 오른 유일한 가수이기 때문이다. 1978년 걸그룹 희자매(Hee Sisters)로 데뷔한 그녀는 1983년 로큰롤 댄스곡 ‘밤이면 밤마다’로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다. 이후 10여 년간 히트곡 없이 나이트클럽 무대를 전전하다 1996년 ‘또’로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이후 래퍼 조PD와의 듀엣곡 ‘친구여(2004년)’, 발라드 풍의 노래 ‘거위의 꿈’(2007년), ‘아버지’(2009년)가 잇달아 히트하면서 제2 전성기를 맞아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14장의 정규 앨범을 포함하여 총 19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 인순이는 1957년 주한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아주 어릴 때 미국으로 되돌아간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고 노래하는 그녀의 대표곡 ‘아버지’가 특별한 울림을 주는 이유다. 2011년, 유명 가수들이 청중평가단에게 심사를 받는 형식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MBC)에 출연한 인순이가 불러서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유명 가수와 모창자들이 블라인드 경연을 벌이는2014년 <히든싱어 3>(JTBC) 인순이 편에서 모창자들의 ‘눈물 파티’로 다시 한 번 화제가 됐다.
‘아버지’는 6•25 참전용사 107명을 초대했던, 2010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 공연에서 갈채를 받은 곡이기도 하다. 인순이는 이날 “혹시라도 한국에 저 같은 자식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가슴에 돌을 얹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이제는 내려놓으시라. 다들 자신의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고 여러분은 모두 제 아버님이다”라는 말로 청중의 눈시울을 적셨다.
‘아버지’ 역시 시적인 가사와 격정적 멜로디가 돋보이는데, 내 생각에 이 노래의 백미는 마지막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이다. 인순이는 곡을 쉽게 보내줄 수 없다는 듯 “사•랑•했” 세 음절을 각각 길게 뺀 다음, “었다”를 붙이기 전 흐느끼듯 짧은 탄식을 토해낸다. 장인의 경지가 이런 걸까. 나는 이 대목에서 컥 숨이 막혀온다.
“그 부분은 나도 매번 똑같이 못 불러요. 비가 올 때 감정과 해가 뜰 때 감정이 다르듯. 밤에 부를 때와 낮에 부를 때가 다르고, 청중이 남자가 많은지 여자가 많은지에 따라 다르고요. 까딱 정신 놓으면 울게 돼요. 정신 차리면 노래가 잘 안 되고. 그래서 어떨 때는 부르기 싫어요. 내가 나를 컨트롤하지 못하니.”

거위의 꿈
그녀의 가장 대중적인 히트곡은 리메이크 곡 ‘거위의 꿈’이다. 1997년 김동률과 이적의 프로젝트 그룹 ‘카니발(Carnival)’이 발표했던 동명의 원곡이 그녀의 곡 해석에 힘입어 10년 만에 빛을 본 것이다. “난 난 꿈이 있었죠”로 포문을 여는 이 곡은 극저음과 극고음을 넘나드는 고난도 곡으로도 유명하다.
“연습할 때마다 정말 많이 울었어요. 힘든 날들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죠. 그전까지 나도 꿈이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그냥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저는 이게 꿈이라고 생각해요. 그 꿈을 청춘들에게 화두로 던지고 싶었는데,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이 곡 덕분에 방송에도 많이 출연하고 부자 됐죠.(웃음)”

역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말고 당당하게 나아가자는 건전가요 풍의 이 노래에는 인순이의 오뚝이 같은 삶이 투영됐다는 평이 따른다. “2000년쯤 나는 어떤 가수로 남을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가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뒤 내게 온 곡 하나하나가 희망에 대한 노래였어요. 아니면 가족이거나. 작곡가나 작사가에게 내 생각을 말한 적도 없는데 그들 눈에 제가 세월의 흐름 속에 바뀌어가는 모습이 비쳤나 봐요.”
그녀가 애착을 갖는 또 다른 곡으로는 ‘딸에게’가 있다. 1994년 대학교수 박경배 씨와 결혼하여 얻은 외동딸 세인에게 바치는 노래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세인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라나는 과정을 담은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2013년 같은 제목의 책을 낼 정도로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엄마는 나이가 들면서 딸과 친구 같은 관계가 되잖아요. 어느 날인가부터 엄마가 점점 딸 같은 존재가 되고 나는 딸을 낳고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딸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면 우리 엄마도 나에 대해 이런 감정이었겠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2000년쯤 나는 어떤 가수로 남을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가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뒤 내게 온 곡 하나하나가 희망에 대한 노래였어요. 아니면 가족이거나.”

다문화 가정 청소년 대안학교 운영
그녀는 딸에게 “그냥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 고 했고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도 가르쳤다. 부모에게 기대지 말고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걸 강조한 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절약하는 습관이 배어 딸아이는 지금도 비싼 건 잘 안 사요. 저도 그래요. 무대에 올라갈 때는 나의 직업이니 최고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투자하지만, 나 자신만을 위해서는 돈을 안 쓰는 편이에요. 그런데 남을 위해 쓰는 건 아깝지 않아요. 제가 쓰는 돈으로 누군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워요.”
고아원, 양로원을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해온 그녀가 요즘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일은 다문화가정 청소년 대안학교인 해밀학교 운영이다. ‘해밀’은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을 뜻한다. 2013년 강원도 홍천에 세운 이 학교 학생 수는 중학교 과정 15명이다. 지난해 12월 첫 졸업생이 배출됐다.
사단법인 ‘인순이와 좋은 사람들’이 운영하는데, 인순이가 이사장이다. 운영비는 200여 명의 후원자로부터 나온다.

 

그간 식사비 정도를 받았으나 올해부터 완전 무상교육을 할 방침을 세웠기에 더 많은 후원금이 필요하다. 올 여름엔 학교 건물도 짓는다. 최근 사들인 폐교가 새 터전이다. 해밀학교 학생들의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어머니는 대부분 동남아시아 출신이다. 아이들은 어머니와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머니 나라 말을 배우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인순이는 “그러니 엄마가 아이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특별한 사연이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하자, 인순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들을 밝게 키우려 데리고 왔는데, 그들의 아픈 부분을 세상에 드러내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더러 후원해주겠다면서 아이들의 가정사와 관련된 영상을 요구하는 데가 있어요. 그럴 때면 ‘내가 더 열심히 뛰겠다’고 다짐하고 영상을 안 보내요. 아이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거든요.”
굴곡 많았을 법한 그녀의 삶. 언제 가장 좌절했을까. 삶의 밑바닥에 떨어졌다고 느끼는 순간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답변이 허를 찌른다.
“저는 그런 것을 못 느꼈어요. 하나하나 힘들다고 여겼다면 못 견뎠겠죠. 살다 보면 비도 맞고 눈도 맞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는 것 아니에요? 평탄한 길만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어지는 그녀의 고백이 다시 가슴 한구석을 찌른다.
“저는 아직 말 트고 편하게 지내는 친구가 없어요. 사람들이 저한테 개인적인 관심이 없고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별 관심이 없어요. 요즘에야 누구랑 밥 한 끼 같이 먹을지를 생각하는 정도예요. 방송국 프로듀서 분들도 잘 몰라요. 내가 사람들을 찾아 다닐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찾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어요. 다행히 내 실력을 인정해주는 분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지요.”
올해 꼭 하고 싶은 일을 묻자 두 가지를 얘기한다. 하나는 백두산에 오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산에 있는 UN군 묘지의 비석 2300여 개를 닦는 일이다. 이곳엔 6•25 전쟁에 참전했던 외국 군인들이 영원히 잠들어 있다. 이미 지난해 11월 네덜란드 군인들의 묘비 30여 개를 닦았다고 한다.
“한국 전쟁 당시 그들의 나이가 10대 후반이었어요. 우리 아버지도 그 또래였지요. 무슨 철이 있었겠어요. 그저 좋아하는 노래 듣고 여자 아이들이나 쫓아다닐 나이였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아버지를 충분히 이해하겠더라고요.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외국인에게 감사해야죠. 그래서 묘비 얘길 듣고는 ‘이건 내가 할 일이다’라고 생각해 바로 시작했어요.”
코끝이 찡해졌다.

조성식(Cho Sung-sik, 趙誠植)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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