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한복판의 한 연구소 4층에는 평범한 캐비닛이 놓여 있다. 캐비닛 13호다. 그 속에는 포스트휴먼 종으로 진화하는 특징을 보이는 ‘심토머’에 관한 375개의 자료가 있다. 어떤 이들은 휘발유, 유리, 철 같은 물질로 연명한다. 또 다른 이들은 몸에서 이상한 것들이 자란다. 한 사람은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고, 한 여자는 혀에서 도마뱀이 자란다. 또 ‘타임스키퍼’가 있는데 이들은 몇 날, 몇 개월, 심지어 몇 년 동안 사라져 버리는 듯하다. 그리고 ‘토포러’는 놀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잠을 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과거를 좀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해 기억을 편집하고, 또 어떤 이들은 외롭게 우주로 라디오 메시지를 보내며 밤을 보낸다.
연구소 행정과 공덕근 대리는 어느 날 우연히 13호 캐비닛을 보게 된다. 무료함과 호기심으로 캐비닛 속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캐비닛을 관리하는 권 박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른다. 몰래 캐비닛을 열어본 것에 대해 벌을 주는 대신 권 박사는 자기 조수로 일하길 공 대리에게 요청한다. 권 박사는 심토머들이 현재의 인간 모습을 대체하는 진화한 인간 종이며 미래의 인류가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가 원하는 건 이들이 괴물로 분류되지 않는 것뿐이다.
공 대리는 파일을 다루고 심토머들을 응대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에 대해 알게 된다. 하지만 권 박사가 중병에 걸리고 공 대리가 모든 일을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프로젝트 진행이 어렵게 된다. 유언집행주식회사라고만 알려진 한 그림자 조직이 공 대리에게 접근하는데 이들은 심토머를 괴물이 아니라 기회로 간주한다. 이 조직이 원하는 건 정확히 무엇일까? 권 박사는 그동안 무엇을 숨겨온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오면 공 대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캐비닛』은 어떤 책이라고 정의하기 힘들다. 과학과 마술, 인본주의와 포스트휴머니즘 사이를 오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현대적인 도시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게 만든다. 심토머들이 기이하게 보이긴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몇 년의 시간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느 순간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소셜미디어라는 광활한 공허 속으로 메시지를 보내며 그곳에 정말 누군가가 있는지 혹은 우리가 정말 이 세상에 속해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한 챕터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들 모두 자신 역시 심토머가 아닌지 묻는다. 일화들을 읽다 보면 심토머와 비심토머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런 해석은 전체에 대한 일면일 뿐이다. 쉬운 대답에 유혹될까봐 공 대리는 이야기에 아무런 도덕이 담겨 있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건 교훈을 찾으려 하고 잠언을 얻으려 하지만 교훈과 잠언은 결코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는 각각 자신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