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와 금강을 끼고 있는 한산 지역은 습도가 높고 토양이 비옥해 질 좋은 모시풀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 그래서 조선 시대 한산모시는 지역 특산품으로 전국적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모시의 대명사로 통한다. 한산모시짜기는 1967년 국가무형유산 종목으로 채택됐으며, 2000년 기능 보유자로 지정된 방연옥 장인과 지역의 부녀자들이 함께 명맥을 잇고 있다.
방연옥 장인이 입으로 가늘게 쪼갠 모시를 틀에 걸어놓은 후 한 올씩 빼내 무릎에 대고 손바닥으로 비벼서 실을 길게 잇고 있다.
한산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여름철 옷감이다. 모시풀 줄기의 껍질을 벗겨 얻은 실로 전통 방식의 베틀을 이용해 직조한다. 모시 짜기는 가족 내 분업, 이웃과 마을 간 협업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 왔다. 이는 화합과 결속의 주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같이 공동체 안에서 전승돼 온 전통 기술이라는 점에서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모시는 아토피를 전혀 일으키지 않는 천연 섬유다. 땀에 젖어도 처지지 않고 살갗에 달라붙지 않으며, 바람을 맞으면 다시 까슬까슬해져 며칠을 입어도 상쾌하다. 그 시원한 착용감은 어떤 섬유에도 댈 게 아니다. 오래 입어 낡아져도 빨아서 풀을 먹이면 새 옷 같다. 살짝 구겨져도, 해져서 기워 입어도 멋스럽다. 한여름 무더위에 모시옷을 입은 이는 단아한 기품을 풍긴다.
고급 옷감
애초부터 모시는 멋을 내기 위한 옷감이며, 일할 때 입는 평상복 용도가 아니다. 예부터 모시는 예복이나 상복 등에 사용되는 고급 옷감으로, 나라에 바치는 진상품이나 귀한 교역품으로 쓰였다. 모시옷을 언제부터 입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경문왕(재위 861~875) 때 당나라에 모시를 보낸 기록이 있어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123년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고려(918~1392)에 와서 한 달간 머물며 쓴 보고서 『고려도경』에 보면, “직조 기술이 매우 정교해 왕부터 일반 백성까지 흰 모시옷을 입는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통해 이 시기에 모시옷 제작 기술이 크게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베틀에 걸린 모시 섬유의 모습. 한산모시는 실의 균일도가 일정해 다른 지역 모시보다 더 단아한 느낌을 준다.
조선 후기에는 모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가격이 폭등하고 위조품이 유통되는 등 각종 폐단이 일어나자, 나라에서 모시 생산을 아예 금한 적도 있었다. 옛날 문헌을 보면 충청도 전역이 모시 생산지로 언급되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천군 한산 지역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감각과 인내
모시 일은 한산 일대의 농가에서 가장 큰 부업이었다. 이곳 여인네들은 누구나 논밭일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모시 작업에 참여했다. 베틀에서 옷감을 짜는 일은 각자 집에서 하지만, 말린 모시풀 줄기를 실로 만드는 과정은 여럿이 모여 함께해 왔다.
모시는 다년생 쐐기풀로 6월, 8월, 10월 세 차례 수확한다. 수확 시기가 빠르면 모시가 약하고 늦으면 거칠기 때문에 8월에 수확하는 모시가 품질이 가장 좋다. 모시풀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면 푸른 속살이 나온다. 이 속대를 물에 담갔다가 볕에 말리기를 서너 번 반복해 푸른 물을 빼면 하얀 섬유질만 남는다. 이것을 태모시라고 한다. 추출한 태모시는 입에 물고 이를 사용해 하나하나 쪼갠다. 이때 혓바닥과 입술의 감각으로 굵기를 가늠하며 일정하게 쪼개야 한다.
“태모시 쪼개는 일은 기계로는 할 수 없어요. 숙련된 감각이 필요하거든요. 경험이 부족한 초보자는 입술이 터져 피가 나기도 합니다. 침을 적셔가며 째기 때문에 입안이 자주 마르는 사람은 하기 어렵죠. 사람마다 치아 구조와 혀의 감각이 다르다 보니 각자 쨀 수 있는 굵기가 다릅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쪼개 놓은 태모시 올은 가는 것, 중간 것, 굵은 것 세 종류로 분류한 다음 손바닥으로 비벼서 잇고 실로 만든다. 그 뒤엔 날실을 계량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실의 굵기가 다르므로 한 폭에 날실을 몇 올이나 쓸지 결정하는 단계다. 가느다란 날실이 많이 들어갈수록 고운 모시가 된다. 모시는 보통 7새에서 15새까지 있으며, 10새 이상을 세모시라고 부른다. ‘새’는 피륙의 날실을 세는 단위로, 1새는 80올이다. 모시 한 폭이 보통 30㎝ 내외이니, 10새 모시는 30㎝에 800올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새의 숫자가 높을수록 올이 가늘고 고우며 상품 가치가 높다.
“15새 모시는 비단보다 고와서 마치 잠자리 날개 같죠. 그렇게 짜려면 아주 촘촘한 바디가 있어야 하는데, 2006년 바디장이 돌아가신 뒤로는 구할 수가 없어요. 개량 베틀의 금속 바디로는 만들 수 없습니다.”
실을 베틀 바디에 한 올씩 끼운 다음에는 실이 매끈해지도록 풀을 먹인다. 이때 콩가루 풀을 조금만 잘못 발라도실이 엉키거나 끊어지곤 해서 장인도 애를 먹는다고 한다. 이렇게 실이 비로소 완성되면 베틀을 조립해 모시를 짠다. 한 필을 짜는 데 10새의 경우 15일 정도 걸린다. 한 필이면 보통 여자 치마저고리 한 벌과 남자 윗도리 하나를 만들 수 있다. 다 짜낸 직물은 물에 씻어 풀기를 빼고 말린 다음 보관한다.
“모시실은 건조하면 쉽게 끊어져요. 그래서 찜통더위 속에서 바람이 통하지 않게 문을 닫고 땀을 쏟으면서 짭니다. 요즘엔 가습기가 있어 습도를 맞추기 쉬우니 일하기가 조금 수월해졌죠.”
모든 공정이 어렵고 까다롭지만, 가장 힘든 것은 마지막 모시를 짜는 단계다. 습하고 무더운 한여름이 고운 모시를 짜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서다. 이렇게 모시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낸 직녀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한 주먹 정도의 모시 섬유 한 타래를 ‘한 굿’이라 부른다. 10굿 정도는 돼야 한 필의 모시를 짤 수 있다.
피, 땀, 침, 눈물
1945년생인 방 장인은 손놀림만 보면 나이가 무색해진다.
“어머니가 저를 젖먹이 때부터 데리고 일하셨어요. 제가 철들어 막상 배우려고 드니까 ‘고생한다’며 못 하게 하셨습니다. 8남매 중 막내인 저만큼은 힘든 모시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녀가 어깨너머로만 알고 있던 모시 짜기를 제대로 배운 것은 결혼한 다음이었다. 시집와서 보니 이웃 마을에 문정옥(1928~2016) 선생이 살고 있었다. 문 선생은 한산모시짜기가 1967년 국가무형유산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첫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사람이다.
“운명이었나 봐요. 저는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오며 가며 어르신이 마당에서 모시 일 하시는 것을 구경도 하고 도와드리기도 했어요.”
방 장인의 솜씨와 품성을 눈여겨본 문 선생의 권유에 따라 본격적으로 모시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1980년에 전수자가, 1986년에 이수자가 되었다.
“태모시를 째고 한 올씩 잇는 일은 어렸을 때부터 익혔던 터라 어렵지 않았지만, 날실에 풀 먹이기와 모시를 짜는 작업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문 선생님께 야단도 많이 맞았지요.”
그녀는 2000년 국가무형유산 한산모시짜기 2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녀만큼 모시를 솜씨 있게 짜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모시 일이 크나큰 고통에 불과했다. 결국 방 장인이 문정옥 선생의 뒤를 이어 기능보유자가 된 데는 솜씨를 떠나서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 한몫했다.
“모시 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시 짜는 데 피, 땀, 침, 눈물이 들어간다’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죠. 하지만 다 만들어 놓고 보면 참 뿌듯해요. 그 재미에 가르치고 배우는 거죠.”
팔순이 된 그녀는 여전히 전승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즐긴다. 딸과 며느리가 이수자로 같은 길을 걷고 있으니 힘들 게 없다고 환히 웃는다.
모든 준비 과정을 마친 후 베틀에서 모시를 짜고 있는 방연옥 장인. 이 작업은 상당히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며, 숙련도에 따라 모시를 짜는 기간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3일에 한 필 정도를 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