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Arts & Culture

마음을 잇는 음식, 잔치국수

Arts & Culture 2025 SPRING

마음을 잇는 음식, 잔치국수 한국의 식문화에서 국수를 이용한 음식은 일상식이 아니었다. 외국 사신에게 예우를 갖추기 위해 대접하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잔치에서 유래하여 이름을 얻은 잔치국수다. 과거의 잔치국수는 재료와 제조법이 현재와 상이하지만, 축원의 의미를 담은 음식이라는 점은 여전하다. 잔치국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국수 요리이다. 삶은 소면 위에 각종 고명을 얹고, 진하게 끓여낸 멸치 육수를 부어 먹는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밀이 매우 귀한 식재료였다. 한반도의 기후 환경이 밀 재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918~1392)에는 밀을 중국에서 수입해 먹었고, 조선 시대(1392~1910) 에는 상대적으로 기후가 서늘하고 건조한 북쪽 지방에서 늦가을에 파종해 초여름에 수확하는 겨울밀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수량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주로 메밀이나 녹두, 콩 같은 곡물을 곱게 갈아 면을 뽑았다. 그런데 이런 재료들로 면을 만들면 찰기가 없이 뚝뚝 끊어진다. 식감도 거칠고 색도 거무튀튀하다. 이에 비해 밀은 글루텐 함량이 높아 길고 가늘게 면을 만들 수 있다. 색도 뽀얗고 표면도 매끈하다. 색감과 형태가 말끔하고 세련되니, 옛날 사람들은 밀가루 국수에서 순결하다는 인상까지 받았다. 지금이야 밀국수가 흔하디흔하지만, 그것을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매료될 수밖에 없는 등장이자 존재였을 것이다. 국수 건조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자연 건조 시 온도와 습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진은 경주의 대표적 로컬 브랜드인 아화전통국수의 소면 건조 장면. ⓒ 아화전통국수 아화전통국수의 김영철 대표가 건조된 소면을 알맞은 길이로 재단하고 있는 모습. 아화전통국수는 2010년대 말 현대식 제면 기계를 도입했지만, 아직까지도 90% 이상은 예전과 같은 전통적인 수작업으로 국수를 만든다. ⓒ 아화전통국수 잔치의 주인공 고려 시대,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가 작성한 견문록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사신이 경내에 들어오면 10여 종의 음식을 제공하는데, 면식(麵食)을 우선하였다”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조선 시대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불교 행사 때 주요 손님들에게 유과, 두부탕, 과일 등과 함께 국수를 대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세조(재위1455~1468) 때는 명나라 사신에게 접대하는 면을 여러 고을에서 장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언급도 있다. 선조(재위 1567~1608) 때는 국수를 장만하기 쉽지 않으니, 사신에게 주는 음식으로 국수 대신 밥을 대접하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이처럼 국수는 사신이 오거나 나라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상에 올리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민가에서는 혼례나 회갑연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나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잔치의 주인공들이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축복해 주러 온 손님들이 다 같이 국수를 나누어 먹었다. ‘잔치국수’라는 명칭은 이러한 풍속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미혼 남녀에게 주변에서 “언제 국수 먹게 해줄래?”라고 묻는 것은 언제 결혼하느냐는 의미의 우회적 표현이다. 기계화된 제면법 잔치국수의 사전적 정의는 “따뜻한 맑은장국에 국수를 말고 갖은 고명을 얹은 음식”이다. 더 정확히 정의하자면, 멸치를 넣고 장시간 끓여낸 육수에 밀가루로 만든 가늘고 긴 국수인 소면(素麵)을 넣은 음식을 지칭한다. 한마디로 멸치 육수와 소면의 조합이 잔치국수의 핵심이다. 잔치국수가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재의 제조법대로 잔치국수를 먹게 된 것은 불과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전통 국수 요리에서 면은 재료나 형태가 오늘날처럼 단 몇 가지로 제한되지 않았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재료는 메밀 가루였고, 채소나 고기를 채썰어 가루를 묻힌 후 익혀서 면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때로는 꽃잎을 면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면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19세기 초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생활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왜면(倭麵)’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는 국수형 화채의 일종으로, 더운 여름철 소면을 삶아 오미자 우린 국물에 말아 시원하게 먹었던 계절 음식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이 편찬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왜면을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밀가루를 기름과 소금으로 반죽해 실처럼 늘어뜨려 말렸는데, 이 제조법은 현재의 소면과 유사하다. ‘왜(倭)’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소면은 조선 후기 일본에서 유입된 식재료일 가능성이 높다. 1930년대 신문 기사에도 ‘일본 국수 소면’이라는 표현이 등장해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국내에서 소면을 대중적으로 만들어 먹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추정된다. 제아무리 글루텐 함량이 높다고 한들 면발을 손으로 길고 가늘게 뽑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소면은 고도화된 제면기의 등장과 함께 발전했다. 1920년대 신문에는 ‘최신형 제면기 특가 판매’ 같은 광고가 자주 실렸는데, 이를 통해 그 당시 제면기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40년 조선일보 5월 8일자 기사에는 쌀 배급이 불안정해지자 대용식을 장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고, 이에 따라 소면이 인기를 얻어 주문이 쇄도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눈치 빠른 상인들이 쌀 장사를 접고 밀가루와 국수 장사에 대대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언급도 있다. 이후 제분기와 제면기 등 설비를 갖춘 국수 공장들이 전국 곳곳에 생겨났고, 기계화된 제면법이 활성화되었다. 1930년대 초반 출발한 식품 제조 회사 풍국면(豊國麵)은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국수 공장이라는 명예를 지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국내 최대 규모의 기업 삼성이 1938년 창업된 삼성상회(三星商會)와 이곳의 대표 상품 ‘별표 국수’에서 비롯됐다는 유래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지금과 같은 잔치국수의 전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피난민들이 멸치 어업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몰렸으며, 미국으로부터 잉여 농산물인 밀을 대량으로 원조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밀가루로 뽑은 면을 뿌연 멸치 국물에 말아 한 끼 식사를 해결했다. 마음을 위로하는 음식 오늘날 잔치국수는 더 이상 특별한 날에만 먹는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니다. 가정에서는 한 끼를 간단히 때우기 위해 끓여 먹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은 분식집이나 포장마차에서 저렴한 잔치국수를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곤 한다.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서양식 뷔페에 밀려 겨우 구색을 갖추는 정도로 퇴색했다. 그럼에도 정성껏 끓여낸 멸치 육수에, 찬물에 힘껏 빨아 전분기 없이 뽀얀 소면이 담긴 잔치국수가 목전에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한국인은 없을 터이다. 잔치국수의 입지는 예전만 못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인생의 어느 순간 잔치국수로 인해 위로를 받은 기억이 하나쯤 있으리라. 뜨끈한 국물이 대접 가득 낙낙히 담겨 있다.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살살 풀어 입에 넣으면 면발이 미끄러지듯 입안으로 빨려든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국수에 구수한 멸치 향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흡사 갯가에 나와 있는 듯하다. 눈앞에 푸르른 바다가 펼쳐진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잔치국수는 지금은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혼례나 회갑연 같은 잔칫날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이런 풍속에서 ‘잔치국수’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 셔터스톡

온전함에 대한 고찰

Arts & Culture 2025 SPRING

온전함에 대한 고찰 『희랍어 시간』 한강 작, 데보라 스미스, 원 에밀리 애 번역 펭귄북스, 2024 160쪽, 9.99 파운드 온전함에 대한 고찰 우리는 서로 대화하고 주변 세상을 보는 능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능력이 없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예를 들어,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과연 생각할 수 있을까?『희랍어 시간』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의 실어증으로 인해 ‘뿌연 침묵’에 휩싸인다. 말을 찾게 되었지만, 이후 부분적으로 다시 실어증을 앓게 된다. 듣고 읽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는 없다. 주인공은 다시 한번 침묵이라는 껍질에 싸여 주변 세계와 단절된다. 여기에 한 젊은 남자의 이야기가 주인공의 이야기와 엮이며 전개된다. 그는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가 17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결국 앞이 안 보이게 될 운명이다. 가족들은 그의 귀국을 반대하고 걱정하지만, 그는 독일 유학 시절 배운 고대 희랍어를 가르치는 아카데미 강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말할 수 없는 여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언어를 통해 언어와 다시 연결되고자 남자의 수업을 듣는다. 서로와 온전히 소통하지 못한 채 이렇게 한 공간을 오가다가, 우연한 사고로 인해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가장 표면적인 차원에서 봤을 때 『희랍어 시간』은 상실에 대한 고찰이다. 주인공들은 그들의 신체적 능력을 잃어가는 것 외에도, 소중한 사람의 상실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다. 여자는 얼마 전 이혼하고 전 남편에게 양육권을 빼앗긴 후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괴로워한다. 남자는 독일에 있던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폭력과 실연을 당한 기억에 시달린다. 이미 잃어버렸거나 약화되고 있는 그들의 능력(즉 주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은 산산조각난 관계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온전함’에 대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제는 죽고 없는, 남자의 친구 요아힘은 역시 신체적 아픔이 있었다. 그는 한때 “매 순간 죽음과 마주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삶에 대해 가장 잘 성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온전함의 의미를 가장 잘 관조할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의 중요한 일부를 상실한, 그리고 세상과의 연결을 잃어버린 사람들일지 모른다. 상실과 결핍이라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희랍어 시간』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오랫동안 서로를 맴돌던 여자와 남자가 마침내 함께하게 되었을 때, 미래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듯 보인다. 주인공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손쉬운 해결책이나 간단한 해피엔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내일은 오늘보다 더 밝아 보인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작, 안톤 허 번역 펭귄북스, 2024 272쪽, 28.00 달러 “네 잘못이 아니야”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 김수현은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잘못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떠난 여정 끝에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가 탄생했다. 부제는 ‘어른살이를 위한 체크리스트’라고 되어 있지만, 저자는 기존의 답답한 규칙 대신 또 다른 규칙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자는 확실한 한국적 관점에서 한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써내려가면서, 유교적이고 집단주의적인 한국 사회를 개인주의적인 서구 사회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얼핏 마치 외부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다행히도 실제는 그렇지 않다. 외국인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 저자의 조언 대부분은 보편적인 내용이다. 문화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사람은 결국 사람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누구나 희망, 두려움, 꿈, 불안을 느낀다. 어떤 것도 단순한 흑백논리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집단주의나 개인주의 같은 꼬리표는 사회 전반에 대해 적용하기에는 편리한 표현일 수 있지만, 개개인에 대해서는 그 특징을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가리는 결과를 낳는다. 분명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 매몰되어 그로 인한 신경증에 시달리는 이 시대를 위한 것이다. 독자들은 출신 국가에 상관없이 현대 사회의 부담감을 해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2 > 미역수염(Seaweed Mustache), CD, 김밥레코즈(Gimbab Records), 2024 창의적 콜라주 미역수염은 2014년 결성된 부산 출신의 4인조 록 밴드다. 2016년 발매한 미니 앨범 < The Whistle >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2022년 정규 1집 < Bombora >가 록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 무렵부터 한국의 헤비한 록 음악을 대표하는 밴드로 급부상했다. 두 번째 정규 음반 <2>는 1집에서 들려준 청각적 풍경을 확장시킨 명작이다. 음반 전체가 마치 성나게 덮쳐오는 파도 같다. 이 앨범의 주된 재료는 슈게이즈, 포스트메탈, 블랙게이즈 같은 장르들이다. 44분 동안 진행되는 여덟 곡에는 흉측한 불협화음과 황홀한 멜로디, 불분명한 노이즈와 선명한 속주(速奏)가 온통 뒤섞여 있다. 공존하기 힘들 듯한 이질적 요소들이 합체해 이율배반의 괴력을 뿜어낸다. 기타, 베이스, 드럼의 격렬한 총진격은 종종 가녀리게 끊어질 듯 미려한 곡선을 그려내는 보컬 멜로디를 만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포옹한다. 형이상학적 묘사, 서사, 나열로 점철된 불가사의한 영어와 한국어 가사도 흥미롭다. 첫 곡 < FALL >은 미역수염의 미학을 압축한 서곡이다. 광야를 울릴 듯한 공간감 속에서 베이스와 드럼의 느린 통타(痛打)로 시작되는 노래다. 남성과 여성의 보컬을 통해 전달되는 무기력한 멜로디가 분출하는 사운드 위로 황홀하게 짓이겨진다. 묵직한 리듬, 기타의 격정적인 트레몰로 연주, 한껏 증폭돼 지글거리는 노이즈가 멜로디 위로 불꽃놀이처럼 떨어진다. 이어지는 곡 < HEX >는 또 다르다. 듣는 이를 옥죄는 기타의 불협화음, 노랫말을 툭툭 랩처럼 뱉는 여성 보컬과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는 남성 보컬이 교차하며 새롭고 기이한 모자이크를 만든다. 후반부에 분출하는 고음의 기타 트레몰로 멜로디는 공포 영화의 기막힌 반전(反轉)처럼 기능한다. 극단적 음악을 구사하는 미역수염에게도 발라드 같은 노래가 있을까? 처연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섯 번째 곡 < SWEETHOME >이 그 답이다. 판소리라는 소재에 한국적 한(限)의 정서를 버무린 임권택 감독의 1993년 개봉작 < 서편제 >가 만약 30여 년 만에 리메이크된다면? 그리고 그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이가 의 나홍진이나 < 파묘 >의 장재현 감독이라면? 그 주제가로 추천할 만한 트랙이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음악평론가

경계를 넘어: 여성 작가들, 동시대 미술을 다시 빚어내다

Arts & Culture 2025 SPRING

경계를 넘어: 여성 작가들, 동시대 미술을 다시 빚어내다 한국 현대미술은 팬데믹 이후 국제 미술계에서 존재감을 크게 더해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한국 여성 작가들은 현재 전 세계 주요 미술기관과 갤러리로부터 전례 없는 관심을 받고 있다. 이들은 지리적 국경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각자의 시각으로 동시대의 화두를 살핀다. 기술과 인간 취약성의 관계, 디아스포라 상황에서 문화적 전통의 변화, 디지털 시대 정체성의 유동성과 같은 주제를 고유한 시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미래, 제이디 차, 정금형은 이러한 보편적 주제들을 혁신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2024년 영국 테이트 모던 터빈홀에서 열린 이미래의 < Open Wound > 전시 전경. ⓒ Tate, Photo by Larina Fernandes 지금 한국 동시대 미술은 젊은 세대의 여성 작가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전 세계 미술계의 변화와도 맞물린다. 최근 주요 미술 기관들은 적극적으로 프로그램에 다양성을 더하고 있으며, 글로벌 미술 시장의 확장으로 젊은 목소리에 전에 없던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의 문화 위상이 올라가면서, 이와 함께 젊은 세대의 한국 여성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작가들은 한국의 민주화와 개방의 혜택을 받으며 자났다. 따라서 이전 세대와는 뚜렷이 다른 청년기를 겪었고, 이러한 변화가 그들의 예술적 표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세대의 젊은 작가들은 젠더, 환경, 문화 정체성과 같은 현대적 이슈를 혁신적으로 다루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그들의 고유한 예술적 언어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 관객들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미래 지금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의 젊은 작가 중에는 유학 등 외부의 경험보다 한국 또는 현지의 문화적 환경이 빚어낸 인재들이 많다. 이미래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폭넓은 국제적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녀가 모든 정규 미술 교육을 한국에서 이수했다는 점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이미래 작가가 맡은 2024년 테이트 모던 터빈홀 커미션은 한국 동시대 미술에 새로운 장을 써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래는 이 프로젝트에 선정된 첫 번째 한국인 작가이자 역대 최연소 작가이기도 하다. 터빈홀에 설치된 < Open Wound >는 기계 시스템과 유기적 형태가 융합되어 터빈홀이라는 기념비적 공간을 맥박이 뛰듯 강렬한 감각을 자극하는 환경으로 변모시킨다. 이 작품은 이미래 작가를 더욱 널리 알린 계기가 된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와 MMK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개인전 <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 >(2022)에서 전개한 주제를 확장한다. 산업 자재와 키네틱 요소로 구성된 이미래의 작품은 폭력, 취약성, 욕망을 탐구하며 강렬하고도 깊이 있는 환경을 창출한다. 흘러내리는 액체와 유기물이 두드러지는 이미래의 설치 작업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선 엄청난 기술적 정밀함이 요구된다. MMK 프랑크푸르트에서 선보인 작업은 차가운 콘크리트와 키네틱 요소로 강렬한 신체적 감각을 불러일으키면서 이러한 대조를 잘 보여준 바 있다. 테이트 모던에서는 과거 발전소였던 기념비적 공간을 변형하여 산업적 요소와 유기적 면모 사이의 긴장감을 한층 더 고조시킨다. 산업 시설로 쓰이던 크레인에 매달린 7미터 길이의 터빈은 촉수처럼 보이는 실리콘 튜브와 한 몸으로, 체액을 연상케 하는 끈적한 적갈색 액체가 흘러내린다. 터빈홀은 산업 건축과 유기적 형태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환경이 된다. 이는 액체를 흡수하고 건조시킨 직물로 이뤄진 ‘스킨’을 통해 더욱 강조되며, 산업적으로 생산되는 동시에 살아있는 듯 계속해서 진화하는 설치를 만들어낸다. 이미래의 < Open Wound > 전시회장에 설치된 작품 일부. 이번 전시로 이미래는 터빈홀에서 작품을 선보인 역대 최연소이자 한국 첫 미술가가 됐다. ⓒ Tate, Photo by Oliver Cowling with Lucy Green 정금형 정금형은 국내외에서 동시에 경력을 쌓아가는 새로운 세대의 한국 작가들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은 먼저 현지에서 입지를 다진 뒤 세계 미술계로 활동 범위를 넓히기보다, 두 영역을 병행하며 경력을 쌓아간다. 2018년 서울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연 정금형은 쿤스트할레 바젤(2019)과 이탈리아 모데나 시각예술재단(2020) 전시를 통해 단기간에 국제 미술계에서 존재감을 확고히 했다. ICA 런던에서 최근 열린 전시 < under construction >(2024)은 이처럼 동시적인 궤적의 또 다른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다. 작가는 기계 부품과 결합된 인체 골격 모델들을 선보이며 유기적 형태와 기술적 형태의 경계에 대한 탐구를 이어갔다. 의료용 마네킹, 산업용 로봇과 상호작용함으로써 인간과 기계 신체 사이에 기이한 관계가 창조되는 것이다. 2018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정금형의 < 스파 & 뷰티 서울 > 전시 전경. Courtesy of SongEun Art and Cultural Foundation, Photo by Kanghyuk Lee 정금형은 기계를 추상적 시스템으로 다루는 대신 전시를 확장하는 퍼포먼스를 펼침으로써 친밀하면서도 불안감을 자아내는 관계를 발전시킨다. ICA에서 선보인 설치는 퍼포먼스에서 남겨진 흔적, 재료들과 함께 전시 공간에 놓인 하이브리드 오브제들을 보여주었다. 전시 기간 중 일정에 맞춰 진행된 퍼포먼스는 이러한 오브제들을 단순한 대상이 아닌 공동 수행자로 활성화하며, 인간과 기계 사이의 육체적 관계에 대한 탐구를 더욱 심화시켰다. 정금형의 독특한 예술적 접근 방식은 미술계를 넘어 널리 주목받았다. 2023년, 작가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초청으로 패션 하우스 미우미우의 런웨이 쇼를 퍼포먼스 작품의 무대로 변모시켰다.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탐구하는 그녀의 작업이 패션계에 진입한 순간이었다. 제59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에 초청된 정금형의 < Toy Prototype > 전시 일부. Courtesy of La Biennale di Venezia, Photo by Andrea Avezzù 제이디 차 런던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제이디 차는 밴쿠버에서 태어난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한국이라는 문화적 뿌리와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영감으로 삼는다. 그녀의 작업은 한인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정체성과 면모를 잘 드러낸다. 제이디 차가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한 데는 20세기 중후반 미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 이민자들이 정착하고, 그 후속 세대가 독립적으로 성장하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동시대 예술 담론을 재구성하는 상황도 큰 영향을 미쳤다. 퍼포먼스, 텍스타일, 비디오, 사운드, 멀티미디어 설치를 아우르는 제이디 차의 작업은 한국의 무속 전통과 당대의 디아스포라 경험을 엮어내면서 문화적 특수성과 정체성, 소속과 같은 보편적 주제를 담아낸다. 2024년 타데우스 로팍 파리 마레에서 열린 제이디 차의 < Rough hands weave a knife > 전시 전경.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Paris, Salzburg, Milan, Seoul ⓒ Zadie Xa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 House Gods, Animal Guides and Five Ways 2 Forgiveness >(2022)는 정교한 의상과 멀티미디어 설치를 통해 문화적 혼성성과 유동적 정체성을 탐구했다. 이 전시는 한국의 전통 색채론과 현대적 감성을 융합한 정교한 텍스타일 작업을 선보였고, 퍼포먼스에서는 한국 무속 의식과 현대 클럽 문화의 요소를 결합했다. 작가는 이처럼 다층적인 작품을 통해 문화적 이분법에 도전하며 디아스포라 경험의 복잡성을 다루는 몰입적인 환경을 창출한다. 그녀의 작업이 전통 문화의 요소를 동시대 세계를 아우르는 담론으로 번역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서 열린 작가의 첫 개인전이 런던 전시보다 다소 늦은 2023년 스페이스 K에서 열린 라는 것이다. 이는 한국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고국에서 입지를 다지기 전에 국제적으로 먼저 인정받는 경향이 있음을 시사한다. 세계 미술계에서 부상하는 젊은 한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성’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흥미로운 역설에 부딪힌다. 한국이라는 국가 정체성은 이들을 호명하는 참조점이 되지만, 그들이 창작하는 예술은 국경이나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는다. 이같은 복잡성은 한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들과 한인 디아스포라 작가들을 비교할 때 특히 두드러진다. 예컨대 제이디 차와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는 무속, 전통 색채, 민담 등 ‘한국적’ 요소가 두드러지며, 문화적 뿌리와 깊이 연결된 모습을 드러낸다.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탐구해야 할 필요성 자체가 한국 문화유산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키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재해석으로 이어진다. 2022년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제이디 차의 < House Gods, Animal Guides and Five Ways 2 Forgiveness > 전시 작품 중 일부. Photo by Andy Keate 지역적 특수성과 보편적 주제 이미래, 정금형과 같이 한국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작가들은 동시대 한국 사회와 문화를 살아간 경험에 발을 딛고 작업하며, 은유적이고 개념적인 접근을 통해 문화적 정체성과 관계를 맺는다. 그들의 작품은 명시적으로 ‘한국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산업화, 기술, 현대성과 얽히고 설킨 복잡한 (한국적) 관계를 체현한다. 기계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의 강렬한 융합에선 급속한 도시 발전이 가져온 긴장이 떠오르기도 하고, 기계와 관계를 맺는 정금형의 퍼포먼스는 초연결 사회에서 점점 모호해지는 인간과 기술적 사물의 경계를 건드린다. 디아스포라 작가들과 한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접근 방식 차이는 ‘한국성’이 개인적 경험, 역사적 맥락, 세계적 영향력 사이에서 오가는 역동적 대화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은 한국 동시대 미술의 가능성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미래, 정금형, 제이디 차의 작업은 국가 정체성으로 작가를 바라보는 단순화된 관념을 넘어서, 현대 예술가들이 지역적 특수성과 보편적 주제를 어떻게 섬세하게 탐구하는지를 드러낸다. 각자의 고유한 예술 언어로 국제 미술계에서 부상하는 한국 미술가들을 대표하는 이 세 작가는 상호 연결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정체성, 소속감, 문화적 번역의 문제를 다루며 이를 한국 동시대 미술과 연결한다. 물론,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한국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로운 면모 가운데 일부에 불과할지 모른다. 문화적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경계를 넘어서는 혁신적 시도로 깊은 전통과 끊임없는 변화의 긴장에서 의미 있는 예술적 혁신을 만들어내는 모습….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세 작가는 동시대 미술을 다시 빚어내고 있다.

목조 건축의 가능성을 향한 실험, 건축가 조남호

Arts & Culture 2025 SPRING

목조 건축의 가능성을 향한 실험, 건축가 조남호 조남호(Cho Namho)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건축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곱씹게 된다고 평가받는다. 1995년 솔토지빈(Soltozibin Architects, 率土之濱) 건축사사무소를 설립한 그는 기획과 기술의 결합이 새로운 건축을 만든다고 여기며, 목구조 시공 기술의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기부터 오랫동안 목조 건축의 가능성을 좇아왔다. 목재의 세포벽은 다공성(多孔性)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남호는 이러한 목재의 특성을 확장해 ‘숨 쉬는 폴리’ 건물 외벽을 다공성 목구조로 디자인했다. ‘기후 위기가 건축의 중심 과제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풀어낸 프로젝트이다. ⓒ 윤준환 건축가 조남호는 현대적인 구법을 통한 목조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해 왔다. 솔토지빈 설립 이전에 국내 대형 설계사무소에서 먼저 실무를 익힌 그는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을 설계하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여파로 사무소 존속 문제가 불거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수주에 급급해하는 대신 사무소의 성격을 학습 조직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에 따라 솔토지빈은 미래 지향적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새로운 건축 생산 체계에 관한 대대적인 연구를 하는 조직으로 거듭났다. 물론 여기에는 경제적 전략에 대한 고민까지 포함되었다. 그때 주목하게 된 것이 목조 건축이 지닌 가능성이었다. 설계 사무실에서 철근콘크리트조의 분업화된 공정을 주도하는 것보다는 목수라는 전문가와 함께 직접 시공까지 아우를 수 있는 목조 건축이 그에게는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제대로 된 현대적 공법들이 발달하지 못한 한국의 목조 건축 시장에도 새로운 공법의 고안이 필요해 보였다. 산업화 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국에는 일부 한옥들을 제외하고는 목조 건축이 거의 사라진 실정이었다. 솔토지빈이 설립되던 무렵, 북미 양식의 경골목구조가 유입되면서 경기도 일산을 중심으로 신도시에 목조 주택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북미 양식의 목조 건축을 그대로 수입한 것에 불과했고, 공급 방식과 공사비 등의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러한 사회적·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남호는 한국 현대 건축에서 많은 부분이 목조 건축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경제성, 환경 문제, 건축적 가능성 등을 고려했을 때 그 영역이 빠르게 확장되리라고 본 것이다. 조남호는 건축과 사회, 삶의 관계를 탐색하는 건축가이다. 특히 그는 목구조와 현대적 공법을 접목하면서 인간과 환경의 공존을 염두에 둔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여 왔다. ⓒ 스튜디오 켄 변용과 진화 새로운 건축 생산 체계에 대한 탐구는 프로젝트를 거듭해 나갈 때마다 변용되고 개진되면서 점점 진화해 갔다. 그 시작점에는 1999년 완공한 신원동 주택이 있다. 신원동은 서울 도심과 수도권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고층 빌딩들이 인접해 있으면서도 동네 안에는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는 경작지가 존재한다. 조남호는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감안해 도시 생활과 전원 생활이 절충될 수 있도록 집을 디자인했다. 그 바탕이 된 게 철근콘크리트조와 목조가 혼합된 복합 구조였다. 시공까지 도맡았던 이 작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도전이었다.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교원그룹 게스트하우스(2000)는 준공하던 해에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을 정도로 이목을 끌었던 프로젝트다. 당시 목조 건축에서는 드물게 주택 10채로 구성된 큰 규모였고, 중목 구조를 포함한 여러 목공법이 적용됐다. 구조 엔지니어링을 뒷받침할 국내 기업이 없어 캐나다 및 뉴질랜드 회사와 협업해 완공했다. 조선 시대 교육 기관이었던 서원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 건축물은 전통 건축과 새로운 목조 구법 사이에서 제3의 유형을 탐색하는 작업이었다. 그런가 하면 서울시립대학교 건설공학관(2005)은 철근콘크리트조 건물에 경골목구조를 활용한 우드월 시스템을 접목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경골목구조는 구조 자체이면서 단열재를 채우는 틀, 마감재가 붙는 벽 등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건축가는 이에 대해 “목구조의 놀라운 효율에 주목하게 되면, 한옥처럼 기둥과 보의 구조미를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한다. 이 프로젝트는 공법을 표현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의 기점이 되었다. 서울시립대 강촌수련원은 부재를 짜맞추는 기법을 통해 새로운 목조 건축의 형식에 도전한 작품이다. 목구조의 장점을 극대화한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11년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았다. ⓒ 박영채 서울시립대학교 강촌수련원(2009)에서는 모든 부재의 규격을 통일시켰다. 기둥이나 보 등 각기 역할과 조건이 다른 요소들에 폭과 길이가 동일한 부재를 사용한 것이다. 한 가지 종류의 부재가 전체를 관통하면서 통합된 분위기와 질서를 갖추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 트러스 원리를 활용한 복잡한 구조적 전략이 요구되기도 했다. 이 건물에는 건축의 중심을 해체하고 상징적 요소를 없애 공간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현대 건축의 특징이 담겼다. 비교적 최근작인 인왕산 숲속쉼터(2019)에서는 전통 목구조의 핵심 요소인 기둥과 보의 결합을 드러내지 않고, 기둥 사이에 지붕판을 끼워 넣어 마치 거대한 판이 떠 있는 것 같은 시각적 효과를 냈다. 결구이지만 비결구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일종의 역설이다. 일반적으로 기둥과 보로 이루어진 구조는 완결된 프레임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건축물에서는 시선이 내부 공간으로 쏠리기보다 바깥의 자연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비결구적 결구를 사용했다. 인왕산 ‘숲속쉼터’는 부재들을 입체적으로 조립해 3차원의 구조물을 조립하는 목구조의 전형적인 구법에서 벗어나 있다. 건축가는 철근콘크리트조 필로티 기둥 모듈의 1/2 간격으로 목재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지붕판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목구조의 새로운 형태를 실험했다. ⓒ 신정식 숨 쉬는 건축 조남호의 글과 말에는 “숨 쉬는”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광주폴리(Gwangju Folly)’는 광주광역시가 구도심 공동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추진 중인 도시 재생 사업인데, 조남호가 최근 광주폴리에서 선보인 작품의 제목 역시 ‘숨 쉬는 폴리’ (2023)다. 그에게 건축이 숨 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으니, 두 가지로 나눠 설명했다. 첫째는 말 그대로 건축물의 외피가 숨을 쉬는 것, 즉 바람이 통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는 단열 문제와 상충된다. 현대 건축은 기본적으로 단열과 기밀(氣密)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내부와 외부를 단절시킨 다음 열이나 오염 물질을 내보내 내부를 쾌적하게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특히 콘크리트 건축물에서 단열과 방수, 기밀이 이런 방식을 따른다. 숨 쉬는 폴리는 숨 쉬는 재료와 숨 쉬는 결합 방법으로 벽체를 구성했다. 나무라는 취약한 재료가 근대 이후의 건축이 지향해 온 강함의 원리에 대응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했던 프로젝트다. 서울숲에 위치한 야외 공연장 ‘숨 쉬는 그물’은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탄생했다. 조남호는 1미터 간격의 목조 유닛을 그리드 형태로 쌓아 올려 건축물을 완성했다. 그 결과 벽의 구멍은 새 집이 될 수도 있고, 풀과 꽃이 자랄 수도 있는 유연성을 지니게 됐다. ⓒ 윤준환 두 번째로 “형태를 구상하고 재료를 선정하고 디테일을 계획하는 건축 생산의 전 과정을 포함하여 그 이후의 사용과 유지 보수, 그리고 폐기에 이르기까지 주변 환경에 최소한의 피해를 주는 건축이 바로 숨 쉬는 건축”이라고 그는 정의한다. 숨 쉬는 폴리는 두 의미를 모두 충족한다. 우선 기능과 형태에 있어 숨 쉬는 건축이다. 목재 자체는 습기를 머금고 내보내는 기능을 하며, 외피와 내부의 구성은 숨 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또한 탄소 배출량은 콘크리트 건축과 비교했을 때 10분의 1로 줄었다. 태양광 전기 생산 시스템을 도입해 그마저도 상쇄시킨다면 15년 뒤에는 탄소 배출 제로 시설이 된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다산동 주택은 주거 공간에 대한 건축가의 실험을 엿볼 수 있는 프로젝트이다. 이 집의 1층과 2층은 갤러리 형태로 디자인되었는데, 집주인 부부가 오랫동안 수집해 온 미술 작품들을 전시함으로써 교류와 소통의 역할을 수행한다. ⓒ 김용관 비판과 탐색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앎과 이론적 앎의 앞에 기술적 앎이 있으며, 기술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창안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조남호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지난 25년 동안 목구조를 현대 건축에 적용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국내 목조 건축의 발전은 더디기만 하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한옥이라는 전통 목구조 양식에 갇혀 있는 건축 설계를 문제로 꼽는다. 한국은 7세기에 황룡사 9층 목탑을 설계하고, 8세기에 석굴암 같은 우수한 건축물을 지은 국가다. 그러나 조선 시대부터는 혁신적 건축이라 할 게 없다. 고유한 건축 유형을 지속적으로 개발한 다른 나라들과 대비된다. 그들은 고대와 중세를 거쳐 높은 수준의 장인들, 학자에 버금가는 기술자들을 길러냈다. 반면 조선은 기술을 천하게 여기는 사회였으므로 혁신이 일어나기는 힘들었다. 이러한 흐름에 더해 일제강점기 때는 건축 교육의 공백이 이어지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그는 한옥 육성책의 보수적 성향을 지금 한국 건축계가 극복해야 할 고질적 문제로 진단한다. 목조 건축에 전통적 한옥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리걸음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건축가들의 솔직한 비판이 동반되어야 하며, 기술적 탐색과 보완을 통한 혁신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

Arts & Culture 2025 SPRING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 ‘나주반’은 전라남도 나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반이다. 김춘식은 1940년대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춘 나주식 소반의 명맥을 이은 장인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우연한 기회에 나주반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지금까지 약 70년 동안 나주반을 지키고 있다. 국가무형유산 소반장 기능보유자인 김춘식 장인은 맥이 끊어져 사라질 뻔한 나주 소반의 명맥을 잇고 발전시켰다. 그는 수백 개의 헌 상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이를 통해 나주 소반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소반(小盤)은 나무로 만든 작은 밥상을 말한다. 좌식(坐式) 주거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식생활부터 각종 의례에 이르기까지 여러 용도로 음식을 담아 운반하던 부엌 가구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소반을 사용해 왔다. 5~6세기경 제작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여러 유형의 소반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으며, 신라(B.C 57~A.D 935)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도 타원형 소반이 있다. 조선 시대(1392~1910)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면 국가에 소속되어 상을 만드는 별도의 기관이 있었고, 제작 과정이 분업화되어 다양한 형태로 생산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반의 종류는 산지, 형태, 용도에 따라 약 60여 종으로 분류된다. 특히 생산지에 따라 지역색이 뚜렷해 황해도의 해주반(海州盤), 전라도의 나주반(羅州盤), 경상도의 통영반(統營盤) 등으로도 구분한다. 해주반과 통영반은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성이 뛰어난 반면, 나주반은 소박한 짜임새로 견고함과 간결함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상은 우리 문화의 근간이 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어머니들은 상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아이의 탄생을 기원했고, 삼신상을 차려 안전한 출산을 빌었다. 출생 후 백일에는 백일상, 돌에는 돌상을 차려 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염원했다. 자라면서는 생일상, 결혼 때는 혼례상을 거쳐 나이 육십에 이르러 환갑상을 받고, 죽은 후에도 오래도록 제사상을 받는다. 이처럼 상은 출생 이전부터 죽음 이후까지 삶을 관장하고 이어주는 도구였다. 원형 호족반. 소나무. 36 × 36 × 26 cm. 소반은 생산지, 형태, 용도, 재료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사진은 상판이 둥그런 호족반이다. 호족반의 다리는 위는 굵고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다가 끝부분이 위로 살짝 올라간 형태이다. 호족반의 재료는 주로 느티나무, 소나무, 은행나무를 사용한다. 솔루나리빙 제공 앉아서 받는 밥상 소반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술을 지닌 장인을 소반장(小盤匠)이라고 한다. 김춘식(Kim Chun-sik, 金春植) 장인은 일제강점기 이후 거의 사라진 전통 나주반을 복원해 냈다. 재료로는, 주로 여자들이 음식상을 차려서 운반한다는 점을 배려해 무늬는 아름다우나 무거운 느티나무보다는 가볍고 단단한 은행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목공예의 기본은 소반이지요. 임금님도 소반에 먹고, 양반이나 서민도 소반을 사용했습니다. 머슴에게도 개다리소반에 밥을 차려주었죠. 거지가 밥 빌러 와도 소반에 차려내는 것이 우리의 인심이었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단아한 소반에 오르면 초라해 보이지 않습니다.” 김 장인은 소반의 아름다움 이전에 소반에 담긴 문화를 강조한다. 서양식 식탁은 음식을 먹기 위해 사람이 식탁으로 가야 하지만, 소반은 앉아서 기다리면 음식이 사람에게 온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존중의 의미이다. “식탁에 다 같이 둘러앉아 밥 먹는 것도 좋지만, 늦게 들어온 식구에게 밥상을 차려 들여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넓은 식탁에서 혼자 먹는 것과 일인용 소반을 받아서 먹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지요.” 반월반. 은행나무. 43 × 31 × 28 cm. 반달 모양의 상판에 세 개의 평평하고 넓적한 다리가 달린 소반이 반월반이다. 다른 상과 합체하여 쓰거나 벽면에 붙여 장식용으로 사용하곤 했다. 나주반전수교육관 제공 당초문 나주반. 은행나무. 50 × 36 × 29 cm. 나주반은 대개 간결하게 제작하지만, 더러는 운각에 문양을 넣기도 했다. 짜임새가 견고해 상판이 휘거나 갈라지는 일이 거의 없어 상대적으로 큰 소반이 많은 편이다. 상판이 널찍해서 책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나주반전수교육관 제공 헌 상을 스승으로 김 장인이 소반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다소 의외다. 1936년생인 그는 같은 연배의 장인들이 10대에 도제(徒弟)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 20대 초반 나주 영산포에 공방부터 냈다. 누구 밑에 들어가 기술부터 배운 게 아니라, 기술자를 고용해 소반을 만들어 팔았던 것이다. “목수 일을 하던 팔촌 형님이 연장을 물려주며 ‘상을 만들면 먹고 살만은 하다’고 해서 무작정 공방부터 열었어요. 그때만 해도 잘살든 못살든 어느 집이나 장롱은 없어도 상 없는 집은 없었으니까요.” 당시 솜씨 좋은 목수들은 전국을 떠돌며 더 나은 조건의 공방에 머물며 일하곤 했다. 그는 그런 기술자들을 채용해 곁에서 배워가며 상을 만들었다. 단순한 목물상(木物商)이던 그가 맥이 끊긴 나주반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공방을 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받은 특별한 주문 때문이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왔어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제사상을 사정상 잃게 됐는데, 그게 나주에서 만든 상이라는 거예요. 그것과 똑같이 만들어 달라며 자세한 그림과 함께 선금까지 내고, 얼마가 걸리든 부탁한다고 했어요.” 아직 기술을 갖추지 못한 그는 나주반의 마지막 장인으로 알려진 이운연(李雲衍 1895~1972) 선생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하지만 선생은 고령으로 이미 손을 놓은 상태였다. 이운연은 일제강점기 조선 예술에 매료됐던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과 그 예술』(1922)에서 극찬했던 소반장 이석규(李錫奎 1866~1940)의 아들이다. 결국 그는 서울 손님이 부탁한 숙제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참에 전통 나주반의 원형을 알아보기로 하고, 꾀를 내서 헌 상을 수리한다고 알리고 다녔다. 이윽고 집집마다 창고에 묵혀둔 오래된 상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방에서는 기술자들이 막상을 만들고, 정작 사장인 그는 공방 옆 헛간을 빌려 헌 상을 해체하고 보수하고 조립하는 일에 매달렸다. “웬만큼 먹고사는 집에 한두 개쯤은 있었던 옛날 상들이 엄청 들어왔어요. 그것들을 받아 연구해가며 고치기를 십여 년 하다 보니 나주반을 직접 짤 수 있게 된 거죠. 내 스승은 바로 그 헌 상들입니다.” 배움의 한을 풀다 전통 소목이 그렇듯이 소반도 모든 이음 부분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는다. 먼저 나무판에 본을 대고 밑그림을 그린 후 재단해 상판을 만들어 대패질한다. 김 장인은 대패질이야말로 상의 품질을 가름할 첫 단추라고 강조한다. 그다음 상의 테두리 부분인 변죽을 만드는데, 이는 상판의 휘어짐과 갈라짐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준다. 해주반과 통영반이 상판을 파내서 변죽을 만드는 반면, 나주반은 변죽을 따로 만들어 상판에 홈을 파서 끼운다. 변죽을 돌려서 끼운 다음 상판과 다리를 연결하는 운각(雲脚)을 조각해 상판에 고정시키는데, 이때 접착제 외에 대나무못을 따로 만들어 박아서 고정하는 것도 견고함을 자랑하는 나주반만의 특징이다. 나주반의 운각은 보통 구름 문양이나 당초문이 많이 쓰인다. 상다리를 만들어 운각에 끼운 다음 다리와 다리 사이의 수평을 잡아줄 족대(足臺)를 연결하고 중간 가락지(中帶)를 만들어 다리 사이에 둘러준다. 상판을 대패질하고 있는 김춘식 소반장. 재단한 부재를 대패질한 다음 사포로 문질러 결을 다듬으면 상판이 완성된다. 대나무로 만든 못은 상판에 운각을 고정시킬 때 사용한다. 하나의 운각에 보통 4개의 대나무 못이 쓰인다. 백골 상태의 소반이 완성되면, 옻칠을 하고 말려서 사포로 문지르기를 7~8회 반복한다. 김 장인은 특히 옻칠에 자부심을 내비친다. 옻칠은 습기에 강해 나무를 보호하는 기능적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은은하고 아름다운 광채가 돌게 해준다. 이렇게 상 하나를 완성하는 데 40~60일 걸린다고 한다. 그는 재현해 낸 전통 나주반 70점을 모아 1977년 광주학생회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일반에 공개했다. 이 전시는 당시 방송 뉴스에 소개될 만큼 화제가 되었고, 나주반을 세상에 알린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공방은 존폐 위기에 내몰리기 일쑤였다. 전통 공예 장인들 다수가 그렇듯이 옛것은 지키기가 더 어렵다. 한때 직원이 열여덟이던 공방은 차압을 당하거나 작품이 경매에 넘어가기도 했다. “좋은 나무가 나오면 빚을 내서라도 무조건 사놔야 하는데, 그 나무들은 십 년 이상 묵혀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쌓인 나무만큼 빚인 거죠.” 그는 1986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유산 나주반장으로 지정되면서 공방을 접었고, 이후로는 전수 교육과 제작에만 힘을 쏟고 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소학교만 겨우 마친 그는 나주반을 만나면서 배움의 한을 풀었다고 한다. 2011년엔 오랜 염원이던 작품 전시실과 공방을 갖춘 나주반전수교육관이 세워졌고, 마침내 2014년 국가무형유산 소반장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전승에 대한 고민도 일찌감치 해결했다. 4남 1녀 중 막내아들인 김영민(Kim Young-min, 金鈴民)이 국가무형유산 전승교육사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그에게 소회를 묻자 눈시울이 붉어지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일등 공신은 제 아내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어요. 진짜 소중한 보물은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가 봅니다.” 2024년 12월 9일, 그와 62년을 해로한 이상순(李相順) 씨가 세상을 떠났다. 다양한 형태로 조각된 운각들이 벽에 걸려 있다. 나주반의 운각은 구름 문양과 당초 문양이 가장 많이 쓰인다. 상판의 형태와 상관없이 운각은 보통 두 쌍이 들어간다.

삶을 이야기하는 아트 토이

Arts & Culture 2025 SPRING

삶을 이야기하는 아트 토이 한국의 아트 토이 신(scene)은 해외에 비해 출발이 늦은 편이지만, 꾸준히 성장하며 발전하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들로부터 꾸준히 러브콜을 받으며 협업하는 작가들도 여럿이다. 올해로 결성 18년째인 핸즈인팩토리(Hands In Factory)도 그중 하나다. 이들은 조형미가 뛰어난 피규어를 넘어 삶을 매개하는 아트 토이 작업을 선보인다. 2008년 결성된 핸즈인팩토리는 한국 아트 토이 신의 1.5세대에 속한다. 업템포(사진 오른쪽), 락쿤, 하종훈(사진 왼쪽) 세 사람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팀을 이끌어간다. 이들은 국내외 전시 및 글로벌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작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아트 토이는 창작자의 철학이 깃든 장난감이다. 작가의 세계관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조형화된다는 점에서 단순히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입체화한 피규어와는 차이가 있다. 국내에서 서브 컬처로 치부되었던 아트 토이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현대 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2000년대 중반부터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젊은 소비자들이 신규 컬렉터층으로 등장했고, 온라인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로써 소수의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향유되던 아트 토이 문화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핸즈인팩토리는 국내 아트 토이 분야의 현재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크루이다. 2008년 결성된 이 그룹은 업템포(UpTempo, 본명 이재헌), 락쿤(RocKOON, 본명 박태준), 하종훈(Ha Jong-hun) 세 사람이 함께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은 자유로운 스트리트 컬처를 원동력 삼아 한국 아트 토이 신의 새 지평을 활짝 열어가고 있다. 아트 토이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 시작했나? 업템포: 우선 평면의 그래픽 디자인을 입체로 만들어 현실 세계로 불러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아트 토이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와 주제를 구현하는데, 이런 점을 젊은 층이 힙하다고 느끼며 열광한다. 아트 토이 문화의 기반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마치 악보를 읽지 못하는 이들이 기존 질서에 반하는 랩을 만들고, 오늘날 힙합이 전 세계를 관통하는 장르가 된 것처럼 말이다. 아트 토이도 일종의 ‘카운터 컬처’인 셈이다. 또한 아트 토이는 팬들과 소통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의 대표적 캐릭터 ‘러닝 혼즈(Running Horns)’는 ‘Run again and the again’이 슬로건이다. 내 작업을 좋아해 주는 이들에게 “남들 눈치 보지 말고, 당신의 속도대로 꿋꿋하게 달려라”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업템포 작가의 대표 캐릭터는 뿔 달린 초식 동물을 의인화한 ‘러닝 혼즈’다. 최근에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을 캐릭터에 담아내고 있다. 핸즈인팩토리가 작업을 지속해 나가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하종훈: 한마디로 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트 토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힘들 때도, 돈이 되지 않을 때도, 어떤 조건에도 상관없이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창작하는 일 자체가 흥미롭다. 만들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계속 떠오른다. 이것이 꾸준히 창작을 이어올 수 있었던 또 다른 원동력인 것 같다. 각 캐릭터들의 성장과 세계관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는 것 같다. 업템포: 보통 아트 토이 작가들은 캐릭터를 창조할 때 자신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요소를 투영한다. 내 경우도 과거에는 스트리트 컬처의 반항적 성격을 표현하거나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인형 놀이하듯 캐릭터에 입히곤 했다. 그래서 초기 작품에는 농구 시합하는 청년들이나 래퍼의 모습을 한 러닝 혼즈가 많았다. 최근에는 우편 집배원이나 정비사 같은 새로운 캐릭터가 생겨났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사회적 기준이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멋지게 보이더라. 하종훈: 도마뱀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 ‘하자드(Hazard)’를 만든 게 2016년이다. 나 역시 당시에는 캐릭터의 외형 묘사에 집중했다. 10년 정도 지난 지금은 캐릭터의 성격을 확장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주력한다. 겉모습이 귀엽다거나 스타일이 좋다는 평가를 들을 때마다 아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도마뱀 사육장을 디오라마로 연출하고 있다. 캐릭터가 살아가는 환경을 구현함으로써 생태계의 공존과 삶의 방식을 강조하고 싶었다. 하종훈 작가의 ‘하자드’는 꼬리가 잘려도 계속 살아가는 도마뱀을 형상화한 캐릭터이다. 그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강인한 의지로 삶을 이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캐릭터에 반영한다. 북청사자 프로젝트가 뜨거운 관심을 받았는데 어떻게 작업하게 됐나? 업템포: 우리는 러닝 혼즈와 하자드 캐릭터를 북청사자와 접목해 2023년 12월 공개했다. 스니커즈 브랜드 세븐에잇언더의 협업 제안을 받았을 때 우리는 단순히 그 브랜드의 신발을 신고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기존의 스니커즈 디자인에 핸즈인팩토리의 성격을 어떻게 매치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북청사자가 떠올랐다. 거대한 사자 가면을 뒤집어쓰고 여러 사람이 호흡을 맞춰 춤을 추는 북청사자놀음(Bukcheong Saja Noreum, Lion Mask Dance of Bukcheong) 말이다. 그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는 한 번도 한국적인 작업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 기회에 전통 민속놀이를 모티프로 한 작업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세븐에잇언더가 북청사자의 털을 신발끈으로 연출해 보자는 제안도 해줘서 더욱 생동감 있는 결과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 2023년 말, 핸즈인팩토리가 스니커즈 브랜드 세븐에잇언더와 협업하여 제작한 북청사자 캐릭터. 한국의 전통 민속놀이인 북청사자놀음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 핸즈인팩토리 제공 한국은 아직 아트 토이 마켓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아쉬움은 없나? 업템포: 지금 우리나라에는 아트 토이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플랫폼이나 채널이 없다. 아트페어에 참여하거나 전시회를 개최할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이 개인 웹사이트나 소셜미디어, 온라인 스토어에서 작품을 거래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중개자가 개입되었을 때보다 구매자와 작가가 더 직접적으로 교류하고 친밀감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장과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아트 토이가 ‘문화’를 넘어 ‘산업’의 단계로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아트 토이의 트렌드는 어떤가? 하종훈: 과거에는 점토가 주된 재료였고, 3D 프린터가 상용화되면서는 대부분 이 방식으로 제작한다. 하지만 근래에는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이루어 낸 상향 평준화의 반향으로 레트로 느낌이 물씬한 수제 아트 토이가 떠오르는 추세이다. 예컨대 나무를 재료로 써서 의도적으로 투박한 느낌을 주는 식이다. 레진을 사용할 때도 조각칼로 디테일을 덧입히는 등 핸드 메이드의 흔적을 남기려고 한다. 하종훈 작가의 또 다른 캐릭터 바인(VINE)은 퇴근길에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음악을 선곡해 듣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핸즈인팩토리 제공 솔로보다 팀으로 활동하는 이점은 무엇인가? 업템포: 혼자 작업할 때는 한계가 명확하다. 스튜디오에서 제작에만 열중하다 보면,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두기 어렵고 익숙한 영역에만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이들이 팀을 이루어 활동하면 지속적으로 새로운 의견을 접할 수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피드백을 얻기도 한다. 팀원들에게 아이디어를 얻을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도움도 받으면서 혼자였다면 결코 구현하지 못했을 작업을 해나가기도 한다. 핸즈인팩토리의 올해 계획은? 업템포: 패션 브랜드 뉴에라의 마스코트 캐릭터 ‘팔로(FFALO)’ 디자인을 우리가 했다. 올해 10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컴플렉스콘(ComplexCon)에 뉴에라와 함께 참여할 예정이다. 아트 토이 작가로서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업템포 작가의 작업 공간. 언젠가는 러닝 혼즈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하종훈: 내 작품을 2D나 그래픽으로만 전시해 보고 싶다. 우리끼리 대화하면서 디자인이 정말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데, 오로지 디자인으로만 전시를 꾸려 관객들에게 그 중요성을 전달하고 싶다. 스티커만 몇 백 장씩 있는 전시회는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그려 본다. 스케치 작업을 하고 있는 업템포 작가(왼쪽)와 도색 작업 중인 하종훈 작가(오른쪽). 아트 토이 산업이 발달한 해외에서는 작업 과정을 세분화해 분담하는 경우가 많지만, 핸즈인팩토리는 디자인과 모형 제작, 도색 등 일련의 과정을 모두 각자 혼자서 전담한다.

한강의 ‘질문하는’ 소설들

Arts & Culture 2025 SPRING

한강의 ‘질문하는’ 소설들 한강(Han Kang)은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Red Anchor)」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묵직한 주제 의식으로 국내 내로라하는 문학상을 수차례 받으며 주목받아 온 이 작가는 매 작품마다 인간의 폭력성과 존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녀는 한국 문학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는 대표적 작가로 자리매김했으며, 2024년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2024년 12월 10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메달과 증서를 받고 있다. 한강은 비극적 상황과 마주한 인간의 고투와 존엄을 유려하고 시적인 문장으로 그려내는 작가다. ⓒ 연합뉴스 노벨상은 세계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기에 자국민의 수상을 바라기는 어느 나라 사람들이든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 상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착은 별스러운 구석이 있다. 유난한 교육열과 성취욕으로 유명한 한국인들은 어쩌면 그 연장선에서 노벨상 수상을 염원하며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노벨상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가장 지명도가 높고 대중적 관심이 쏠리는 평화상과 문학상에 대한 열망이 특히 높다.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갈증은 가셨지만, 한국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노벨 문학상을 다음 목표로 삼아 왔다.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가 각각 1968년과 1994년에 이 상을 수상하고, 중국 작가 모옌이 2012년 수상자가 되면서 노벨 문학상을 향한 한국인들의 기대 심리는 한층 커졌다. 한반도와 근접한 두 국가의 작가들이 이 상을 품에 안게 되자 어쩐지 노벨상이 가시권에 들어온 듯한 느낌과 더불어 가까운 이웃 국가들의 문학적 성취에 부러움과 질투가 뒤따랐다. 노벨상으로 상징되는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민간 기관인 대산문화재단과 국가 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이 오랫동안 한국 문학 작품의 번역과 해외 출간을 지원해 온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다. 역사적 트라우마 마침내 2024년 노벨 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이 한국 작가 한강을 호명했다. 오랜 기다림의 끝이요 숙원의 달성이었다. 한국인들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을 원어로 읽는다”는 말로써 한국 문학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기쁨을 표현했다. 한강의 노벨상 선정 발표 시점에 그녀의 소설들은 28개 언어권에 걸쳐 82권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 통계는 앞서 언급한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학번역원의 노력을 보여주는 지표인 셈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 이것은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사유다. 이 기관이 한강의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덧붙인 자료에는 이렇게 좀 더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한강의 작품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동양적 사유와 긴밀하게 연결한다. 한강은 역사적 상처들과 보이지 않는 제약들에 작품으로 맞서며 매 작품마다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한강은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지니고 있다.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한강은 현대 산문의 혁신자가 되었다.” 이 글에서 밝힌 것처럼 역사적 트라우마를 상대로 한 고투는 한강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다. 특히 두 장편 『소년이 온다(Human Acts)』(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I Do Not Bid Farewell)』(2021)는 각각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Gwangju Uprising)과 1948년 제주 4․3 사건(Jeju uprising)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 그 사건들이 개인에게 가한 폭력과 상처를 특유의 시적인 문체에 담은 작품들이다. 2024년 노벨상 시상식 부대 행사의 일환으로, 한강 작가가 스톡홀름 외곽에 위치한 린케비(Rinkeby) 지역의 다문화학교에 방문해 아이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 Nobel Prize Outreach, Photography by Nanaka Adachi 한강은 등단 초기에는 주로 개인의 슬픔과 실존적 고통을 즐겨 다루었고, 2007년에 낸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에서는 육식 문화와 가부장제 같은 사회적 차원의 억압과 폭력을 문학적 도전 대상으로 삼았다. 이 작품은 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주인공 영혜를 둘러싸고 영혜의 남편과 아버지, 형부 등이 가하는 유무형의 폭력, 그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사코 육식을 거부한 채 차라리 나무가 되기를 꿈꾸는 영혜의 모습을 통해 폭력의 본질과 위험성을 환상적 필치로 그렸다. 데버라 스미스가 번역한 이 소설의 영어판이 2016년 세계적 권위를 지닌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하면서 한강은 일약 글로벌 작가로 떠올랐다. 이어서 영어로 번역된 소설 『흰(The White Book)』이 2018년 다시 한번 같은 상의 최종 후보에 오르고, 2023년에는 『작별하지 않는다』가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강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은 한층 높아졌다. 근원적 질문 한강의 주제 의식은 개인의 아픔에서 사회적 억압 쪽으로 나아갔으며, 여기에서 다시 역사적 차원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증언이 있다. 문학평론가인 정과리(Jeong Gwa-ri)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강의 노벨상 수상 결정 이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2010년 무렵 대학원 제자였던 한강이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이러했다. “앞으로 다큐멘터리 쪽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이러한 발언 이후에 쓰였다는 점에서 정 교수의 증언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물론 두 작품이 비록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기는 했지만, 과거에 벌어졌던 사건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와는 거리가 멀고, 어디까지나 문학적 가공과 형상화를 거친 작품들이기는 하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의 문학적 승화의 바탕에는 아무래도 해당 사건을 기억하고, 유예된 애도를 이어 가려는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 해야 할 것이다. 『소년이 온다』의 중심 인물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학살에 희생된 열다섯 살 소년 동호와 그의 친구 정대, 그 누나 정미이다. 그런데 동호와 정대의 주변 인물 중 살아남은 이들이 화자가 되어 당시 상황과 이후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은 이 작품의 일차적 동기가 기억과 애도라는 것을 알게 한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라는 작품 속 유명한 문장에 그 동기는 시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이 문장의 일인칭 대명사는 일차적으로는 동호와 함께 도청 상무관에서 시체 수습 일을 했던 은숙을 가리키지만, 그녀 말고도 사태에서 살아남은 다른 이들, 더 나아가서는 소설을 읽는 모든 독자들 역시 그 범주에 포함될 만큼 보편성을 지닌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군사 쿠데타와 폭력 사태를 경험한 튀르키예나 아랍 독자들이 이 소설을 자신들의 이야기로 읽었다는 독후감이 그 점을 확인시킨다. 『소년이 온다』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폭력과 저항, 희생과 기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어 세계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이 소설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고 그것이 이 작품의 가치와 의미를 더 높인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설에 삽입된 이 문장은 광주 5․18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한 대목에서 출발해 스페인 내전과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학살 등 인류사의 비슷한 경험들을 관통하는 근원적인 질문이라 하겠다. 한강은 자신의 소설을 가리켜 ‘질문의 소설’이라고 했는데, 『소년이 온다』를 읽는 일은 독자들이 소설 속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2021년 문학동네에서 발간한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 2023년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이다.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의 입지를 한 단계 확장한 소설 『채식주의자』. 2024년 출판사 창비가 출간 15년 만에 새로운 장정으로 선보였다. 2014년 작 『소년이 온다』는 전 세계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었고, 2017년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았다. 공감과 실천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도에서 벌어진 군경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루었다. 작품 앞부분에서 소설가로 등장하는 경하는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뒤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소설은 경하와 시각 예술가 인선의 우정에서 출발해 인선의 어머니 강정심의 투쟁으로 무게중심이 옮겨 간다. 강정심은 제주 4․3 당시 잡혀가 실종된 오빠의 행방을 찾고자 평생을 분투했는데, 독자들은 그 과정에서 연약한 한 여성이 강인한 역사적 주체로 부각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이 세 작품과 함께 2011년 작 『희랍어 시간(Greek Lessons)』이 비교적 여러 나라에 소개되어 있는데, 힘든 일을 겪으며 말하는 기능을 상실한 여성과 점차 시력을 잃어 가는 남성이 서로의 취약점을 알아보고 위안과 힘을 주고받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 소설 역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실천이라는 한강 문학의 큰 주제를 다루었다 하겠다.

전쟁이 남긴 푸짐한 맛, 부대찌개

Arts & Culture 2024 WINTER

전쟁이 남긴 푸짐한 맛, 부대찌개 부대찌개는 한국전쟁 이후 생겨난 음식이다. 전쟁 이후 세 끼는 고사하고 한 끼도 제대로 먹기도 힘든 가난했던 시절 등장한 부대찌개는 푸짐한 양으로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선사했다. 양만이 아니었다. 서양의 식재료를 한국인의 손맛으로 풀어낸 맛도 일품이었다. 김치, 고추장 등의 한국 식재료와 햄과 소세지, 베이크드빈 등의 서양 식재료를 더해 만든 부대찌개는 동서양의 식문화 조합이 돋보이는 음식이다. 한 국가의 식문화가 고유성을 확립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동한다. 기후, 토질 등이 선천적 요소라면,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재해 등은 후천적 요소다.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엔 전쟁이 있다. 전쟁이 전 세계 식문화를 바꾼 사례는 넘치고도 남는다. 끓는 물에 각종 채소와 소고기, 양고기 등을 넣어 살짝 익혀 먹는 샤브샤브는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가 세계 정복에 나서면서 퍼진 음식이다. 나폴레옹이 질 좋은 식량 보급품 마련을 위해 개발을 독려해 태어난 게 통조림이다. ‘부대’에서 시작한 맛 한국에도 이와 유사한 음식이 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 생긴 부대찌개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체제가 공존하는 땅이 됐다. 남한엔 종전 후에도 미군이 의정부, 파주, 평택(송탄) 등 여러 지역에 주둔하게 된다. 부대찌개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바로 이 미군 부대와 관련이 있다. 부대찌개는 육수에 햄, 소시지, 베이컨, 베이크드 빈스, 다진 고기, 김치 등을 넣고 고추장으로 맛을 낸 매콤한 양념을 섞어 끓인 음식이다. 여기에 라면까지 넣으면 감칠맛이 두 배가 된다. 조선시대엔 없었던 부대찌개는 어떻게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 되었을까. 부대찌개 원조집 중 하나로 알려진 의정부 오뎅식당의 역사를 들추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오뎅식당의 창업주는 1960년부터 포장마차에서 부대찌개를 팔았다. 창업 초창기부터 부대찌개란 메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뎅식당 누리집에 있는 기록을 보면, 당시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이가 가져다준 햄과 소시지, 베이컨으로 볶음 요리를 만들어 팔았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단골들은 밥과 함께 먹을 만한 국물 요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주인장은 고민 끝에, 기존에 팔던 볶음 요리에 물을 붓고 김치와 고추장 등을 넣어 찌개를 만들었다. 부대찌개가 탄생한 것이다. 고기 맛과 진배없는 소시지나 햄, 베이컨은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매콤한 국물은 밥을 말아 먹기에 충분했다. 단박에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몰렸다. 오뎅식당이 인기를 끌자, 인근에 부대찌개 식당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이 생겨난 사연이다. 2009년, 이 지역은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로 지정됐다. 부대찌개 명가들이 몰려있는 지역 대부분은 미군 부대 인근이다. 경기도 의정부, 동두천, 평택(송탄), 전북 군산, 서울 용산 등에는 맛이 조금씩 차이 나는 부대찌개 식당들이 즐비했다. 한편, ‘존슨탕’이라고도 불렸다. 1966년 방한한 미국 대통령 린든 베인스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1973) 의 이름을 땄다는 설이 유력하다. 부대찌개가 처음 만들어진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부대찌개 거리. 매년 이 거리에서 부대찌개 축제가 열린다. ⓒ 의정부시 상권활성화재단 맛을 완성하는 재료 서양에선 소시지나 햄을 구워 먹거나 빵 사이에 넣어 먹는다. 이걸 국물에 넣어 익혀 국물과 함께 먹는 일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한국인에게 국물 요리는 식사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부대찌개의 넉넉한 국물 안에서 익은 소시지나 햄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럽다. 또 소시지나 햄 특유의 기름진 맛이 국물에 스며든다. 여기에 베이크드 빈즈와 김치야말로 부대찌개의 간판 얼굴이다. 풍미를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시지와 햄의 쫀득한 식감에 지칠 때쯤 만나는 푹 익은 콩 요리는 혀의 쉼터가 되어줬다. 보드라운 질감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맛이다. 푹 익은 매콤한 김치는 부대찌개의 맛을 진두지휘는 장군 역할을 한다. 김치가 맛이 없으면 제아무리 다른 재료가 좋아도 부대찌개 특유의 맛이 안 난다. 식당에 따라선 라면이나 두부를 넣기도 한다. 치즈가 올라가는 식당도 있다. 라면은 탄수화물만이 줄 수 있는 넉넉한 포만감을 제공한다. 숟가락으로 들어 올릴 때마다 쭉쭉 늘어지는 치즈는 별미다. 치즈를 넣어 독특한 맛을 내는 한식이 부대찌개뿐이겠는가. 닭갈비, 등갈비 요리, 떡볶이 등 우리 전통 한식에 색다른 맛을 내려고 할 때 종종 출동하는 게 치즈다. 푸짐한 양과 다채로운 토핑, 감칠맛이 일품인 부대찌개는 김치찌개, 된장찌개 못지 않은 인기 메뉴이다. ⓒ 셔터스톡 특색 있는 부대찌개 노포 한국에서 부대찌개 명가는 어디일까. 부대찌개 식당은 동네마다 3~4개 이상 있을 정도로 많다. 프랜차이즈 부대찌개 식당도 전국에 퍼져있고 편의점에만 가도 시판 부대찌개 제품이 있다. 하지만 탄생 역사를 새기며 먹을 만한 곳은 역시 노포다. 더구나 부대찌개는 지역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 ‘OOO파’ 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선 ‘의정부파’부터 살펴보자. 이 파의 수장은 3대째 맛을 이어오고 있는 오뎅식당이다. 양념이 이미 진하게 배여 있는 볶음 요리에서 출발한 찌개다.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베이크드 빈스가 들어가지 않는 게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담백한 맛이 장점으로 꼽힌다. 의정부 부대찌개에 견줄만한 상대는 ‘송탄파’다. 그런데 현재 ‘송탄’은 행정구역상 없는 지역이다. 1995년 평택시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송탄식 부대찌개의 가장 큰 특징은 육수를 사골로 우린다는 점이다. 사골 육수라서 전체적으로 맛이 진하고 걸쭉하다. 치즈도 올라간다. 소고기 다짐육과 대파 등 고기와 채소가 한데 어우러져 풍미를 그윽하게 한다. ‘최네집 부대찌개’와 ‘김네집’, ‘황소집’, ‘땡집’ 등이 이 지역 부대찌개 노포로 알려져 있다. ‘최네집 부대찌개’는 1969년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당시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던 주인장에게 권유해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가네’는 주문 시 이 가게만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소시지와 햄 추가는 첫 번째 주문에서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미 졸아든 육수에 추가한 소시지와 햄이 짠맛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라면을 넣는 시간도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반쯤 끓었을 때 넣어 먹어야 면의 익힘과 맛이 가장 좋다고 한다. ‘황소집’도 한우 사골로 육수를 우린다. 다른 송탄파 부대찌개에 견줘 덜 맵다는 평이다. ‘파주파’는 부대찌개 양대 산맥인 ‘의정부파’와 ‘송탄파’에 견줘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채소가 다른 지역 부대찌개에 비해 많이 들어가 팬층을 확보했다. 쑥갓이 푸짐하게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사골 육수가 아니라서 국물이 상대적으로 담백한 편이다. ‘원조 삼거리부대찌개’가 이 지역 대표 노포다. 5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1990년대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정미식당 부대찌개’도 이 지역 부대찌개 강자다. ‘군산파’는 소고기로 육수를 내는 게 특징이다. 마치 평양냉면집처럼 얇게 썬 소고기가 올라간다. 1984년 문 연 ‘비행장정문부대찌개’가 이 지역 부대찌개 노포다. 독특하게 햄버거도 판다. 부대찌개와 햄버거를 함께 먹는 여행자가 많다. 서울은 부대찌개 강자가 많은데, 그중에서 용산 이태원에 있는 ‘바다식당’을 으뜸으로 친다. 이곳은 1970년대부터 영업해온 곳으로, 메뉴판에 부대찌개 대신 ‘존슨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부대찌개는 한국인의 창의력이 반영된 한식이다. 시대의 참혹한 현실에 조응해 탄생한 부대찌개. 사람들은 여전히 이 얼큰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으로 과거 역사의 상처를, 오늘날 고단한 삶을 위로받고 있다. 박미향(Park Mee-hyang, 朴美香) 음식 저널리스트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임영웅과 영웅시대

Arts & Culture 2024 WINTER

임영웅과 영웅시대 임영웅(林英雄 Lim Young-woong)의 서사는 단순한 성공의 이야기를 넘어섰다. 그의 노래는 음률을 넘어 대중의 삶에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으며, 팬덤은 그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퍼뜨리는 등불이 되어주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따뜻한 공동체는 우리에게 진정한 영웅이 무엇인지 새삼 일깨운다. 임영웅의 팬은 대부분 중장년 층이다. 이들은 팬덤 활동을 통해 공동체를 만들어가며, 봉사와 기부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한다. ⓒ 물고기뮤직, CJ ENM 일본에서 새롭게 형성된 대중음악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국의 ‘트로트’는 임(사모하는 사람)과 고향을 잃은 아픔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 당대인의 큰 호응을 얻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트로트가 한국 대중음악의 한 장르이면서 한국 전통 창법과 일본, 유럽,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결합한 장르로 소개되었다. 부침을 겪으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은 트로트는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 장르로 자리하고 있다. 영웅의 탄생 요즘 국내 트로트의 대세는 단연코 임영웅이다. 그는 2016년 디지털 싱글 < 미워요 >로 데뷔한 그는 2017년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 아침마당 >의 ‘도전 꿈의 무대’에서 5연승을 하며 이름을 알리더니, 2020년 TV조선의 트로트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본격적인 전성기의 문을 열었다. 이후 이듬해 발매한 <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My Starry Love, 我如同星光般的爱) >가 MBC 음악 프로그램 < 쇼! 음악중심(Show! Music Core, Show! 音乐中心) >에서 1위를 차지함으로써 독보적인 인기를 입증했다. 트로트 곡이 음악 프로그램에서 정상에 오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한국 최대 음원 플랫폼인 멜론에서 누적 스트리밍 100억 회를 달성했는데, 이는 BTS에 이어 두 번째이고, 솔로 가수로는 최초다. 그의 공연 실황을 담은 영화 <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은 지난 2024년 8월 28일 개봉한 이후 357,858명의 관객수를 기록했다. 창간 20주년을 맞이한 스타뉴스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과 함께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그는 ‘21세기 가장 사랑받은 트로트 가수’ 1위에 올랐다. 막강한 팬덤을 거느리며 이른바 ‘임영웅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여타 트로트 가수들과 차별화된다. 콘서트 공연 실황을 영화로 담은 < 임영웅 |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 포스터 ⓒ 물고기뮤직, CJ ENM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국민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할 당시 임영웅의 감미롭고도 부드러운 노래는 불안한 많은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 내일은 미스터트롯 > 방송 당시 실시간 국민 투표 7,731,781표에서 전체 득표수의 25%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이루어낸 성과이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때의 유행인가 했는데 그 인기가 벌써 몇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데다 오히려 날로 높아가니 일시적인 신드롬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영웅의 일대기를 닮은 삶 임영웅의 출현은 이름 그대로 영웅의 탄생이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그의 개인 서사는 많은 사람에게 연민과 공감의 감정을 불러왔다. 임영웅의 서사는 영웅의 일대기 구조와도 닮아있다. 영웅의 일대기를 비범한 탄생, 고난과 성장, 조력자의 도움, 위기 극복 후 승리자가 되는 것으로 볼 때,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임영웅의 개인 서사를 설명하는 데 이러한 영웅의 일대기가 유효하다. 모든 영웅의 서사에서 나타나는 고난과 역경을 임영웅의 성장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일차적 고난은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임영웅의 나이 5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임영웅의 가족은 큰 시련을 겪었다. 경연 당시 임영웅은 아버지가 잘 불렀다는 배호(裵湖 Bae Ho)의 1969년 리메이크곡 로 대중의 큰 공감을 받았는데, 노래에 개인적인 서사가 더해져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더해 그는 긴 무명 시절이라는 고난을 겪었다. 가요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음식점 서빙부터 공장, 마트, 편의점 등에서 일하며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는데도 한 달 수입이 30만 원이었고, 데뷔 이후에도 겨울에 군고구마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고난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었는데, 발라드에서 트로트로 주 장르를 바꾸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그에겐 모험이면서 동시에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거라는 말을 증명하듯, 그는 오디션을 통해 실력은 물론이고 성실함과 겸손함까지 보여주며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인 고전적 영웅과 달리 현대의 영웅은 꾸준한 노력과 인내를 통해 성공을 이룬다. 오디션이라는 경쟁적 시스템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임영웅은 노력과 열정으로 성공을 이루어낸 현대의 영웅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게 있다. 바로 임영웅이 영웅으로 우뚝 서는 데 도움을 준 조력자다. 그가 영웅이 될 수 있던 건 조력자 덕분인데, 그 조력자가 바로 임영웅의 팬이라 할 수 있다. 중장년층의 버팀목이 되다 현재 그의 공식적인 팬카페 ‘영웅시대’의 회원 수는 20만 명을 넘었다. 임영웅의 팬은 아이돌의 팬 못지않게 충성도가 높다. 임영웅 팬의 특징은 여타 트로트 가수들의 팬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전 세대에 걸쳐 다양한 연령대가 고루 분포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역시 주축은 50대와 60대의 중장년층 여성들이다. 중장년층의 여성들은 중년 이후에 찾아오는 갱년기나 자녀가 독립하여 집을 떠난 후 양육자가 느끼는 슬픔이나 외로움을 뜻하는 ‘빈 둥지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임영웅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텅 빈 가슴에 어느 날 들어온 임영웅은 그들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버팀목이 되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임영웅의 팬 중 많은 이들이 소위 ‘팬질’을 시작하면서 우울증과 불면증이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아무 의미와 즐거움을 찾을 수 없던 그들은 팬 활동을 하며 존재 이유를 찾고 자신처럼 고립된 여성들과 연대하며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고립에서 연대로, 소외에서 공감으로 나아가며 ‘다시’ 살기를 시작한 셈이다. 중장년층 여성들의 정신 건강을 책임지고 모든 가정의 화목과 평화에 이바지하였으니, 그의 업적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하다. 2024년 5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콘서트 현장. 이 날 콘서트에는 그의 팬인 ‘영웅시대’ 약 10만 명이 함께 했다. ⓒ 물고기뮤직, CJ ENM 물론 이는 단지 임영웅의 팬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다른 가수의 공연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중장년층의 여성들은 자신의 스타를 위해 연계하고 연대한다. 그런데 임영웅의 팬이 여타 팬들과 다른 점은 일단 그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 1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다른 가수가 아닌 임영웅을 선택하였을까? 임영웅의 개인적인 서사가 지닌 힘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그가 보여주는 노래와 태도가 팬들의 공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기존 트로트와 비교할 때 그는 비장하거나 비극적인 걸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몸짓이나 과잉된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창법에서 그는 담담과 덤덤 사이를 오가며 말하듯이 노래한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대중에게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2020)나 (2021) 같은 노래에는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으며 허세를 부리는 남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노래, 창법, 태도 등에서 ‘부드러운 남성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주효하였다. 또한 임영웅의 팬은 기부와 봉사 활동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부의 형태도 다양하여 청소년 자립 지원 기부, 장애인 가정에 기부, 소아암 환아를 위한 기부 선행을 이어가며 팬덤의 선한 영향력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임영웅의 인성과 실력,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팬들이 만드는 수많은 미담은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그래서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결국 임영웅이란 이름은 한 개인의 성공을 넘어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희망이 되어 가고 있다.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Arts & Culture 2024 WINTER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 철도원 삼대 』 황석영 작, 김소라/배영재 번역, 486쪽, 16.99 파운드, 스크라이브 퍼블리케이션즈(2023) 세대를 거쳐 이어온 투쟁 『철도원 삼대』는 일제강점기의 철도처럼 한국 근대사를 꿰뚫고 있다. ‘기차’하면 떠오르는 낭만적인 감성과 달리, 철도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억은 쓰라린 비극으로 가득하다. 철도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멈출 수 없는 근대 사회의 힘, 불과 철을 동력으로 삼아 밝은 미래로 질주하는 모습, 사람과 장소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연결성의 시대 등이다. 하지만, 소설 속 한 인물의 표현처럼, 한국의 철도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철도 부지를 만드느라 집에서 쫓겨나야 했고, 선로 작업에 동원되어 노동 착취를 당했다. 영문본 제목(『Mater 2–10』)은 당시 사용된 전설적인 기관차의 모델명이다. 소설은 민족 분단이 상징이 된 기관차를 제목으로 삼음으로써, 또 다른 비극의 단면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이진오가 공장 폐업에 항의하며 농성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물리적 세계는 우뚝 솟은 공장 굴뚝 꼭대기로 한정되어 있지만, 자신의 기억, 그리고 할머니와 친척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회상하며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이진오의 가족은 한반도 철도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증조부 이백만은 어릴 적에 기차를 보고 첫 눈에 반해, 아들의 이름을 각각 일철(한쇠), 이철(두쇠)로 지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회와 착취라는 철도의 양면성을 상징하듯 서로 엇갈린 행보를 보인다. 형 일철은 철도 종사원이 되어 기관수 자리까지 올라, 경제적으로는 여유롭지만 일제의 억압에 시달리며 그들의 입맛대로 맞춰야 하는 삶을 살게 된다. 반면, 동생 이철은 공산당원을 만나 노동운동가가 되어, 끊임없이 경찰에 쫓기는 신세임에도 정직한 양심을 갖고 살아간다. 결말이 명쾌하게 정리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이진오가 사측에 맞서 농성을 벌이는 모습은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국내 노동자들이 이어간 투쟁을 상기시킨다.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이래 투쟁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다. 이진오는 결국 자신도 무대에서 하나의 배역을 맡은 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하기로 결심한다. 『철도원 삼대』는 과거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발견해낸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한 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문학 번역은 매끄럽고 튀지 않아야 (즉, 순화 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대표적이지만, 이 작품의 번역자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지워버리지 않기 위해 친족 호칭과 지위 등 원문의 특정 요소들을 그대로 살렸다. 결과적으로는 독자에게 너무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한국적인 용어의 사용으로 훨씬 더 풍부한 내러티브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작, 안선재/김지형 번역, 278쪽, 28달러, 하와이대출판부(2024) 전 세계의 노동자들을 위한 목소리 1984년 27세의 한 공장 노동자가 박노해라는 필명으로 시집을 출간했다(‘노해’는 문자 그대로 ‘노동자의 해방’을 뜻한다). 군사정권의 금서 조치와 저자를 밝히기 위한 경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100만 부 가까이 판매되었다. 『노동의 새벽』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전에 발표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으로, 40년이 지나서 발표된 영문판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준다. 박노해의 시는 노동자의 글 답게 담백하고 소박하다. 화려한 기교 없이, 평범한 노동자의 담담한 언어가 시인의 감정과 경험을 빛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권력자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고, 빈부 격차의 문제를 고발하며, 평화로운 삶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갖고,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박노해 시인의 작품에 독자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대한민국 노동자들을 위한 밝은 새벽을 꿈꾸고 있다. 국내 독자들이 영문본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원문 전체가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에 실린 두 편의 글은 박노해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설명을 제공한다. 지금도 곳곳에서 투쟁하고 있는 억압받는 이들에게, 박노해 시인의 이번 영문본 작품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힘이 되어 주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문화 및 자연 유산을 만나다 국가유산진흥원 https://www.kh.or.kr/visit/en 한국의 문화 및 자연 유산을 만나다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은 한국의 유•무형 자연, 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코스를 소개한다. 홈페이지를 통해 북쪽의 강원도부터 남쪽의 제주도까지 전국의 75개 국가유산을 체험할 수 있는 10가지 방문 코스를 만날 수 있다. 선사시대, 민속 음악, 사찰, 유교 문화 등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방문 코스를 통해 일반적인 관광지를 넘어선 새로운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 홈페이지에서는 운영 시간, 입장료, 상세 길 안내 등 75개 국가유산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가이드북과 지도도 다운로드 할 수 있다. 외국인 방문객은 각 코스 체험을 기록할 수 있는 ‘여권(스탬프북)’을 인천공항 여행자 센터에서 신청해 캠페인에 참여할 수 있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삶의 질을 위한 치밀한 건축 언어, 건축가 민성진

Arts & Culture 2024 WINTER

삶의 질을 위한 치밀한 건축 언어, 건축가 민성진 SKM 건축사사무소(SKM Architects) 대표 민성진(Ken Sungjin Min)의 머릿속은 진행 중인프로젝트의 구상으로 늘 가득 차 있다. 그는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전체를 복기하는 것처럼 프로젝트의 작은 부분까지도 되새기고 상상한다. 그 긴 생각의 종착지는 효율적 기능과 감각적 아름다움의 균형이다. 아난티 클럽 서울(Ananti Club Seoul)은 주변의 울창한 숲과 자연환경을 고려하는 동시에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이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건축물의 대부분을 대지 안에 삽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고저 차이가 있는 경사진 지형을 활용해 공간을 5개의 레벨로 배치했다. 이를 통해 건물이 자연의 일부로서 대지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살릴 수 있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송재영(Song Jaeyoung) 민성진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쓴다. 사무실에 쌓여가는 드로잉과 모형들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그가 만들어 내는 크리에이티브는 근력처럼 단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나는 프로그램, 동선, 평면 등이 어느 수준의 완성도를 갖기 전에 물리적 형태를 머릿속에 미리 그리려 하지 않는다. 확정된 형태나 이미지에 프로그램이나 동선을 끼워 맞추기를 거부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에서 무수한 모형 작업과 디지털 기반의 3D 스터디를 통해 최적의 상태를 찾아 나간다.” 부산에서 태어난 민성진은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건축학을, 하버드대학교 건축대학원에서 도시디자인을 공부했다. 미국 손학식건축연구소(Hak Sik Son Architect)에서 근무했으며, 1995년 서울에서 SKM 건축사사무소를 설립했다. SKM 건축사무소 민성진 대표는 대담하고 파격적인 도전과 실험으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존재 이유가 분명한 건축물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주거, 상업, 레저, 문화 등 저마다 용도가 다른 건축물들을 디자인하면서 그가 놓치지 않는 단 하나의 목표는 사람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 스튜디오 켄(Studio Kenn) 기능과 감각의 레이어링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Clayarch Gimhae Museum)에서는 2022년 12월부터 2023년 7월까지 < 건축가 민성진, 기능과 감각의 레이어링 >이라는 기획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에서 민성진은 미래 농촌 주택에 대한 제안을 담은 파빌리온 ‘메타 팜 유닛(Meta-Farm Units)’을 비롯해 대표작 15점의 아카이브를 선보였다. 농막을 연상시키는 메타 팜 유닛은 간결하게 구성된 온실 속 주거 공간이다. 이 작업은 공간 미학과 디자인의 문제에서 벗어나 농가 주택을 스마트팜이라는 생산 방식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준다. 중앙에 데크를 두고 각각 침실과 주방으로 나뉜 공간은 자연스레 외부로 연결되며, 필요에 따라 유닛을 조합해 필요한 규모로 확장할 수 있다. 수십 개의 스마트팜과 농촌 주택들이 모이고 커뮤니티 공간이 더해진다면 마을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린다. 한편 대표작들은 건축 모형과 영상, 사진, 도면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소개되었다. 교외와 도심을 넘나들며 작업한 복합 휴양 시설 아난티(서울, 남해, 부산) 시리즈, 세이지우드 골프앤리조트(Sagewood Golf & Resort)를 비롯해 S 갤러리, 세스코 아카데미, 준오 아카데미(Juno Academy), 숭실대 형남공학관(Soongsil University School of Engineering) 등은 ‘기능과 감각의 레이어링’이라는 그만의 작업 방식을 잘 보여 주는 프로젝트들이다. “나는 기능과 감각의 상호작용에 관심이 많다. 미술관, 호텔, 사옥 등 건축물의 유형과 용도를 막론하고 하나의 목적을 갖고 설계를 시작한다. 그것은 내외부 프로그램의 완벽한 구현이다. 하지만 작업을 진행하다 보면 수많은 도전이 더해지며 결정해야 할 과제가 늘어난다. 그때마다 기능과 감각이 계속 레이어링되며 하나의 결정이 이루어지고, 다음 결정으로 이어진다. 이런 끊임없는 두 요소의 중첩된 관계는 좋은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하며, 여기에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직관과 장인 정신을 통해 디자인이 완성된다.” 세이지우드 골프 앤 리조트(Sagewood Golf & Resort)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700m 고지에 자리한다. 로비, 식당, 수영장, 객실 등은 글루램 목재 구조체를 사용하고, 질감이 자연스러운 재료로 내외부를 마감하여 숲속에 있는 건축물이라는 느낌을 강조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남궁선(Namgoong Sun) 도시-만들기 그는 가속화되고 있는 도시화 속에서 자신의 건축가적 역할을 찾고 있다. 근현대 건축사에서 이른바 명작이라 불리는 건축물들은 빛나는 조형 언어로 인정받았지만, 오늘날의 도시에서는 복합적 용도의 설계와 프로그래밍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충돌할 법한 이질적인 기능을 한 곳에 공존시키고, 다양한 층위의 사용자가 만들어 내는 공간들이 상생 효과를 낼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며,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공간적 실체로 재정립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이런 복합적인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얻은 창의적 대안이 자신의 건축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가 조형성에 천착하는 아틀리에 건축가와는 다른 길을 가는 이유다. “나는 오브제 같은 건축을 지양합니다. 건물은 조각품이 아니에요. 건축은 도시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고,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장소입니다. 처음부터 형태를 정해 놓는다면 프로그램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디자인이 되겠죠. 설계를 하면서 주어진 대지, 빛, 바람 등 주변 환경을 당연히 고려해야죠. 그런데 오늘날 더 중요한 것은 공공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건축입니다. 사용자와 주변 지역에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혹시 정형화되어 있는 것들이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고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존 홍(John Hong)은 민성진의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담론에 없는 ‘도시-만들기’라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도시-만들기는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차용하여 원래의 스케일을 의식하지 않고 일원화된 디자인 언어로 치환하는 시도다. 도시에 다양성과 교류에 기여하는 거리가 있다면, 건축에는 유사한 역할을 하는 복도나 길이 존재한다. 이는 동선, 오픈 스페이스, 물성, 이미지,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성까지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만들기는 정적인 명사가 아닌 동적인 동사로 활용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다층적 스펙트럼을 지닌 공적 공간의 가능성에 초점을 둔다. 도시-만들기는 개인과 집단의 관계성을 공론화하고, 프로그램을 연결하며,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연의 역할을 고양하는 개념이다.” 아난티 남해 골프 앤 스파 리조트(Ananti Namhae Golf & Spa Resort)는 국내 리조트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평가받는 건물이다. 아파트처럼 짓던 그동안의 관례를 깨고 전체 층수를 3층 이하로 낮게 설계해 자연과 어우러지게 했으며, 티타늄 소재를 이용한 굵직한 유선형의 외형을 도입했다. 사진은 꽃을 모티프로 한 클럽하우스이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송재영(Song Jaeyoung) 도시 복합체로서 건축적 면모는 도심의 작업뿐만 아니라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리조트와 휴양 시설 설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건축이 도시를 만날 때 지니는 공공 프로그램에 대한 전향적 자세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고급 휴양 시설에 새로운 가치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날것 그대로의 자연이 아닌,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계획이 선행되고, 여기에 다양한 성격의 건축물들이 서로를 배려하며 디자인된 결과다. 한 건축평론가는 부산 아난티 코브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아난티 코브는 그것이 자리 잡은 세계에 마찰 없이 순응하면서도 형용과 꾸밈을 우아하게 고집함으로써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무대에 올리고, 그것이 빚진 하늘과 땅과 바다를 드러낸다.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이 됨으로써,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연의 풍경들을 아름답게 빚어냄으로써, 삶의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부산 해안가에 위치한 아난티 코브(Ananti Cove)는 펜트하우스와 호텔로 이루어져 있는 대규모 휴양 시설이다. 건축가는 과감한 공간 전개와 예상치 못한 동선을 설계해, 방문객들이 새로운 자극을 느낄 수 있도록 유도했다. 아난티 제공 사용자와의 교감 그는 건축물의 가능성에 대하여 사용자와 가능한 한 많은 대화를 나눈다. 건축가 개인의 자의식보다 사용자와의 적극적인 교감을 통해 프로그램을 공간으로 조직하고 완성해 가는 것을 선호한다. 사용자의 꿈과 바람을 온전히 담아낼 때 그 건축물의 생명력이 형상화된다고 생각한다. 즉 보편적인 가치를 뒤엎는 새로운 개념의 공간 지각, 행동 패턴, 동선 등의 변화를 유도하고 그것을 통해 사용자의 삶의 질이 향상되도록 형태와 프로그램의 모든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는다. 한창 설계 중인 심문섭미술관의 클라이언트 심문섭(Shim Moon-seup)은 민성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술관 모형을 보고 놀랐다. 매인 매스를 약간 기울였다. 마치 미술관이 운동하는 것처럼 움직임이 느껴졌다. 지난 3년 동안 나는 그와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는 내 작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렇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민성진은 아티스트다. 그는 사고의 폭이 크면서도 작은 디테일에 천착하는 끈기 있는 작가다.” 사용자와의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그는 창의적 방식으로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한다. 주어진 환경과 요청을 기반으로 건축물의 형태를 드러낸다. 아난티 클럽 서울은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면서 각 지형과 레벨이라는 자연적 요소에 사용자가 이용하게 될 프로그램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땅속에 90% 정도의 공간을 묻고 자연을 복원하여 덮는 방법을 택했다. 아난티 클럽 서울은 골프장뿐만 아니라 테니스장, 야외 수영장, 레스토랑 및 카페 등 다양한 레저ㆍ문화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송재영(Song Jaeyoung) 인천에 있는 엠파크 허브 중고차 매매단지는 자동차 전시관이라는 정체성에 초점을 맞췄다. 단지 내 전망용 엘리베이터는 수많은 전시 차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방문객들에게 신뢰와 더불어 편의성을 더해줬다. 전시장 내부는 차양을 고려한 입면 디자인으로 적절한 감도의 자연광이 유입되고, 내외부 마감이 한꺼번에 가능한 패널을 적용해 공간의 요구 조건에 부합하면서도 비용을 절감했다. 세간에서는 민성진의 건축에 대해 “대담하고 단단하며 자유롭다”고 평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건축에 대해 소리 높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나의 개념어로 자신의 건축이 규정되는 것도 피한다. 작업을 끝까지 잘 해내고자 온 마음을 집중할 뿐이다. 건축은 다양한 조건 및 관계자들과의 조율, 그리고 오랜 시간 축적된 감각을 통해 최선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 정답이 없다는 것. 그것이 그의 생각이다. 새벽녘 야외 수영장에서 바라본 부산 빌라쥬 드 아난티(Village de Ananti)의 타워 콘도. 자연 속 휴양지와 대도시의 활기찬 에너지가 공존하는 다중적 성격의 리조트를 구현했다. SKM 건축사무소 제공, 사진 남궁선(Namgoong Sun) 박성태(Park Seong-tae, 朴星泰)큐레이터

아버지와 아들이 부활시킨 전통 명란젓의 맛

Arts & Culture 2024 WINTER

아버지와 아들이 부활시킨 전통 명란젓의 맛 부산의 로컬 기업 덕화푸드(Deokhwa Food)는 전통 방식의 명란젓을 되살려내, 명란 종주국의 위상을 되찾은 것으로 유명해졌다. 2011년 수산식품 분야에서 최초로 명장 칭호를 받은 창업주 장석준(Jang Sug Zuen, 蔣錫晙, 1945~2018) 회장의 뒤를 이어 현재는 아들 장종수(Jang Jong Su, 蔣宗洙) 대표가 2대째 덕화푸드를 이끌고 있다. 덕화푸드의 장종수 대표가 명란젓을 활용한 음식들로 상을 차리고 있는 모습. 그는 기업 부설 연구소 설립과 학문적 연구를 통해 명란의 역사와 가치를 조명하는 한편 현대적 레시피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특히 부친 장석준 회장과 함께 오랫동안 잊힌 전통 명란젓 제법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명태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생선이다. 명태의 알집을 명란이라고 한다. 명란에 소금을 뿌려 삭힌 것이 명란젓인데, 오랜 세월 한식 밥상에 한몫을 해온 전통 음식이다. 잘 삭힌 젓갈은 ‘밥도둑’이라고 했던가? 갓 지은 밥에 참기름으로 양념한 명란젓 한 토막을 올려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명란은 그 자체로도 맛있지만, 소금 역할을 해서 음식의 풍미를 높이기에 요리에도 활용된다. 주로 샌드위치, 파스타, 각종 안주류에 쓰이며 동서양의 경계 없이 맛의 세계를 증폭시킨다. 명란젓은 400여 년 전 조선에서 시작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으로 건너가 발전했다. 전 세계 명란 생산량의 80%를 일본이 소비하기 때문에 일본 음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원조는 한국이다. 명란젓이 일찍이 조선 시대 왕실과 민가에서 두루 즐기던 흔한 반찬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사료에도 나온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 승정원일기(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承政院日記) >는 조선 시대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서 각종 행정 업무를 기록한 일지인데, 여기에 보면 1652년 강원도 진상품으로 명태란(明太卵)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명란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제조법에 대한 최초의 기록물로는, 1820년경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가 쓴 수산물 도감 < 난호어목지(Nanhoeomokji, 蘭湖魚牧志) >가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명태 산지인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가 북한에 편입되면서, 이후 무분별한 남획과 수온 상승 등으로 명란은 서서히 우리 밥상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일본식 명란젓이다. 전통 명란의 부활 이 땅에서 사라졌던 조선식 명란젓을 되살려낸 회사가 있다. 명란 전문 기업 덕화푸드는 1993년 부산에서 수산 가공 유통업으로 시작해 2000년도부터는 오로지 명란 한 품목만을 생산해 오고 있다. 창업주 장석준 회장은 1970년대 역수입된 일본식 명란의 제조법을 전수받은 초기 세대의 기술자이다. 그는 우리의 전통 제조법을 접목해 발전시킨 점을 인정받아, 2011년 고용노동부 수산 제조 부문에서 최초의 대한민국 명장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이 부문 유일한 명장이다. 장 명장은 식품 기준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일본에서도 실력을 입증해 일찍부터 일본 수출길을 열었다. 2008년 말부터는 7년간 편의점 브랜드 세븐일레븐으로 유명한 일본 최대 유통 기업 세븐앤아이홀딩스에 PB(자체 브랜드) 제품을 전량 수출했는데, 이는 세븐일레븐 그룹 역사상 명란 PB 제품의 제조를 해외에 의뢰한 첫 사례이다. 덕화푸드가 위치한 부산 감천항의 국제수산물도매시장(Busan International Fish Market)은 수산 물류 및 유통의 중심지로, 전 세계 명란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거래된다. 현재 국내산 명란은 사라졌지만, 러시아 어장에서 오는 배가 이곳을 수출 통로로 사용하는 덕분에 부산이 명란 산지와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 러시아산이 70%, 미국산이 30%인 냉동 명태알은 전량 일본과 한국이 수입한다. “최고의 명란젓 비결은 첫 번째가 우수한 품질의 원물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좋은 명란은 선홍빛을 띠고 알이 탱글탱글하죠. 2018년부터 전 세계에 유통되는 최상급 명태 알집은 저희가 전량 수매하고 있습니다. 선사(船社)들이 깜짝 놀랄 정도죠.” 부친에 이어 가업을 잇고 있는 장종수 대표의 말에서 제품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전통 방식의 조선 명란젓은 일반 명란젓에 비해 발효 기간이 더 길고 염도가 높으며 쫀득하다. 깊은 풍미를 내기 위해 품질 좋은 항아리에서 숙성시키는데, 잘 발효된 명란젓에서는 은은한 향이 풍긴다. 숙련된 기술자들 명란젓 제조 과정은 크게 해동, 염지(鹽漬), 숙성 단계로 구분한다. 냉동 상태의 알집은 적정 온도를 유지하도록 설계된 공간에서 해동을 거친 후 일정 농도의 소금을 뿌려 절인다. 원료 상태에 따라 소금과 물의 양을 조절하고 온도를 달리하는 염지 과정에는 숙련된 경험치와 과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소금물에 절인 알집은 숙성 과정을 거쳐 맛을 내는데, 이때 소금 외에 청주를 넣으면 백명란이 되고, 소금과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으로 조미하면 양념 명란이 된다. 염지와 숙성 과정을 거친 명란은 알의 성숙도, 입자, 색상, 형태 등을 살펴서 등급을 나누고 검품 후 상품화된다. “명란은 잘 삭은 해산물 향이 있어야 합니다. 싱싱한 비린내가 살짝 나면서 알알이 톡톡 터질 때 나는 풍미가 중요하지요. 이 같은 명란 입자는 염지 과정에서 결정됩니다.” 워낙 예민한 명란 특성상 덕화푸드의 깐깐한 위생 공정도 업계에서 인정받는 자랑거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내세우는 것은 숙련된 기술자 중심의 시스템이다. “일부 생산 라인은 기계로 자동화되었지만, 매일 원료에 따라 염지할 배합액을 조절하고, 명란의 등급을 나누는 후반 작업은 숙련된 안목이 아니면 안 됩니다. 20년 이상 숙련된 기술자들이야말로 저희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이죠.” 염지와 숙성 과정을 끝낸 명란은 등급을 나누는 선별 과정을 거쳐 상품화된다. 이 후반 공정은 언뜻 간단해 보이지만, 오랜 경험과 숙련된 안목이 필요하다. 덕화푸드에 10년, 20년 넘게 장기 근속한 기술자들이 많은 이유다. 명장 아버지와 명인 아들 장종수 대표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2006년 부친의 부름을 받고 덕화푸드에 합류했다. “한국환경공단에서 공적자금 운용 업무를 하면서 유학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어요. 평소 힘든 내색 한번 안 하셨던 아버님이 임대에서 벗어나 자가 공장을 세우고는 힘들어 하셨어요. ‘함께 해보자’는 말씀에 바로 내려왔습니다.” 부친이 그에게 주문한 과제는 당시 전적으로 일본 수출에만 의존하던 명란젓의 국내 시장 개척이었다. 그는 먼저 6개월간 일본의 앞선 생산 시스템을 배우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명란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식 명란젓은 소금을 적게 넣고 가쓰오다시와 맛술 등을 넣어 절입니다. 짜지 않은 대신 단맛이 많지요. 요즘 우리가 먹는 명란젓은 이러한 저염식 절임 제조법이 역수입돼 우리 입맛에 맞게 정착한 것입니다. 옛날 맛을 잊지 않은 아버님은 평소 전통 명란젓을 상품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하셨습니다.” 2009년 부자는 명란업계 최초로 기업부설연구소를 만들고 맛 개발에 집중했다. 전통 제조법에 대한 지속적 연구는 천연 발효 유산균을 만들어 내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색소나 방부제 없이 우리 입맛에 맞는 다양한 맛을 낼 수 있게 됐다. 2012년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화 환율 급락으로 관련 수출업체들이 줄도산했을 때 결국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국내 시장을 염두에 둔 준비 덕분이었다. 방대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거듭된 연구는 마침내 전통 방식의 ‘조선 명란젓’을 되살리는 결실로 이어졌다. “소금, 고춧가루, 마늘만으로 생선알을 약하게 삭히고 발효시키는 과정은 한반도만의 유일한 방식입니다. 우리 전통 방식으로 재배한 고추와 마늘을 써야 이 맛을 낼 수 있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죠.” 장 대표는 전통 명란젓 제조법을 계승해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2022년 해양수산부로부터 대한민국 수산식품 명인으로 지정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국가 공인 명장과 명인에 지정된 유일한 사례다. “일본식 명란의 염도가 4%라면, 조선 명란은 7% 정도 됩니다. 짠맛이 강하고 질감이 쫀득하죠. 짜지만 건강하게 발효된 전통 식자재는 맛의 깊이가 다릅니다.” 장 명인에게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자 망설임 없이 “세계 최고의 명란젓을 만드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가 지금도 명란 공부에 힘쓰는 이유다.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