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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 & Culture

길한 음식, 떡국

Arts & Culture 2025 WINTER

길한 음식, 떡국 떡국은 대표적인 세시 음식으로, 고깃국물에 가래떡을 어슷하게 썰어 넣어 끓인다. 지역에 따라 재료나 조리 방법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음식이라는 점은 어디나 매한가지다. 요즘은 명절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적으로도 즐겨 먹는 별미가 되었다. 맑은 국물에 가래떡을 가늘게 썰어 넣고 끓이는 떡국은 설날에 먹는 절기 음식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평소에도 일품요리 형태의 한 끼 음식으로 널리 상용된다. ⓒ 한국관광공사 겨울이 오면 본능적으로 뜨끈한 국물 요리를 찾게 된다. 그중에서도 떡국은 특별하다.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과 계절 감각을 함께 불러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설날 아침에만 맛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명절의 경계를 넘어섰다. 마트 진열대에는 간편식 떡국 상품이 늘어서 있고, 일반 식당이나 분식집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메뉴가 되었다. 그럼에도 설에 떡국을 먹지 않으면 마치 새해의 복 한 조각을 놓친 듯 허전하다. 그것은 아마도 떡국 한 그릇에 담긴 길하고 복된 기운을 우리 모두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를 세는 단위 떡국은 한 해의 복을 기원하는 음식이다. 근대기에 활동했던 문인이자 언론인인 최남선(1890~1957)은 1946년 한국의 풍속과 전통, 지리, 종교 등을 망라한 『조선상식문답』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 “설날에 떡국을 먹는 풍습은 매우 오래됐으며, 이는 상고 시대 이래 신년 제사 때 먹던 음복 음식에서 유래됐다”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음복이란 ‘복을 먹고 마신다’라는 뜻으로, 조상께 올린 제사 음식을 나눠 먹으며 복을 기원하는 전통을 말한다. 그가 언급한 상고 시대가 정확히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쌀밥을 짓는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 쌀을 찧어 가루로 만든 뒤 떡으로 쪄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는 학자들의 의견이 모인다. 떡은 시간이 지나면 굳기 때문에 국물에 넣어 다시 데워 먹는 방식이 자연스레 자리 잡았을 것이다. 조선 시대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서는 떡국을 ‘백탕’ 혹은 ‘병탕’이라 부르고 있다. 백탕은 국물이 희다는 뜻인데, 이는 단순한 색깔 묘사가 아니라 상징성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흰빛에서 청결과 순수를 떠올렸고, 한 해의 시작을 더럽힘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열고자 했다. 설날에 떡국을 먹는 행위는 그저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정화 의례에 가까웠다. 그래서 떡국을 조리할 때는 소고기든 닭고기든, 혹은 멸치 등의 해산물로 우려냈든, 색이 짙지 않게 맑고 흰빛을 유지하려 애썼다. 또한 병탕(餠湯)은 떡 ‘병(餠)’과 끓일 ‘탕(湯)’을 합친 용어로, 말 그대로 ‘떡을 끓여 만든 국’이라는 뜻이다. 한국인들은 생일과 무관하게 해가 바뀌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걸로 셈한다. 따라서 새해 첫날 먹는 떡국은 나이를 상징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내가 너보다 떡국을 더 먹었어”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내가 너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뜻이며, 삶의 경험과 식견이 더 풍부하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동국세시기』에도 옛사람들이 “병탕을 몇 사발이나 먹었느냐”라는 표현으로 나이를 물었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떡국은 세시풍속의 음식이면서 동시에 생물학적 나이와 삶의 연륜을 재는 도구이기도 하다. 떡국의 주된 재료인 가래떡은 그 자체로 담백하고 쫄깃해 주전부리로 즐겨 먹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살짝 굳은 가래떡을 석쇠에 노릇노릇하게 구우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말랑해져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불에 구운 가래떡은 주로 조청이나 꿀을 발라 먹는다. ⓒ 한국관광공사 복을 비는 마음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1748~1807)은 풍속지 『경도잡지』에서 떡국을 “멥쌀로 떡을 쪄서 치고 비벼 긴 가닥을 만들고, 굳기를 기다려 엽전처럼 얇게 썰어 꿩고기와 함께 끓이는 음식”으로 묘사했다. 그의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먹는 떡국의 원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옛사람들은 생명이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무병장수의 기원을 담아 가래떡을 길게 뽑았다. 그리고 그 떡을 엽전처럼 동그랗게 썰면서 재물과 풍요, 번영을 희구했다. 그렇기에 떡국은 단순한 겨울 음식을 넘어, 길한 음식으로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떡국은 한겨울에 꼭 필요한 실용적 음식이기도 하다. 소화가 더디고 체온을 유지하기 힘든 추운 계절에 가루 내어 익힌 떡은 부드러워 소화가 잘되었고, 흡수율이 높아 금세 에너지로 바뀌었다. 뜨끈한 국물과 함께 먹으면 몸이 데워져 새해 첫날 활기를 북돋기에 제격이었다. 국물 재료 선택에도 이유가 있었다. 농경 사회에서 소고기는 귀해 자주 쓰기 어려웠고, 대신 꿩이나 닭은 비교적 구하기 쉬운 단백질원이었다. 더불어 꿩·닭을 삶으면 국물이 맑고 기름기가 적어 백탕의 이미지와 잘 맞았다. 또 소화에 유리해 겨울철 보양 음식으로 적합했다. 특히 꿩은 예부터 “양기를 북돋아 몸을 덥힌다”는 인식이 있었고, 닭은 새벽을 알리는 동물로서 새해 시작과도 연결됐다. 하지만 야생 꿩은 구하기가 어려워, 일상적으로는 닭이 대체재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각 지역의 떡국 떡국은 지역색이 드러나는 음식이기도 하다. 지역마다 들어가는 재료가 다르기 때문이다. 개성은 조랭이떡국으로 유명한데, 양 끝을 비틀어 리본 모양으로 만든 조랭이떡은 특이한 모양새와 말캉하고 쫀득한 식감이 특징이다. 맑은 소고기 육수에 달걀지단과 김 가루를 고명으로 얹어 깔끔하고 절제된 풍미를 완성하며, 곁들이는 반찬으로는 담백한 동치미나 무김치가 어울린다. 함경도와 평안도 같은 북방 지역은 쌀이 귀해 떡 대신 만두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떡만둣국이 흔했고, 국물은 멸치·다시마·건어물로 내어 구수하면서도 진한 맛을 냈다. 마늘·두부·대파가 고명으로 올라가고, 김치·젓갈 같은 저장 음식이 반찬으로 곁들여져 긴 겨울을 버티는 데 필요한 열량과 온기를 보충했다. 강원도의 떡국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품은 지리적 특성이 드러난다. 산간 지방에서는 황태나 북어를 푹 끓여 국물 맛을 내고, 바닷가에서는 오징어나 생선을 활용하기도 했다. 메밀 피로 빚은 만두가 들어간 떡만둣국이 흔했다. 충청도에서는 멥쌀가루를 익반죽해 작은 덩어리로 만든 반죽을 두툼하게 썰거나 손으로 뜯어 넣어 끓였다. ‘날떡국’ 또는 ‘생떡국’이라 불리는 이 독특한 떡국은 두께가 일정하지 않아 씹는 재미가 있다. 국물은 소고기·닭·멸치를 담백하게 끓여내는 경우가 많았다. 고명은 단출했지만, 무생채나 동치미 같은 곁들임 반찬이 어우러져 충청도 특유의 소박한 정서가 배어난다. 서울과 경기도는 여러 지역의 영향을 아우르며 표준형 떡국을 만들어냈다. 소고기 양지나 사골을 고아 낸 맑은 국물에 어슷하게 썬 가래떡을 넣고,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추는 방식이다. 달걀지단, 파, 김, 소고기를 채 썬 고명이 기본으로 올라가며, 깍두기나 동치미 같은 반찬이 곁들여진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떠올리는 전형적인 떡국의 형태이다. 전라도는 국물이 깊고 진하다. 그중 닭장떡국이라는 향토 음식이 유명하다. 원래는 꿩을 넣어 끓이는 것이 상례였지만, 꿩을 쉽게 구하기 어려워지자 그 맛을 대신하기 위해 닭을 활용했다. 토막 낸 닭에 파, 마늘, 생강 같은 향신채와 조선간장을 넣고 짭짤하게 조린 후에 이것을 물에 풀어 국물을 내고 떡을 넣어 끓인다. 짭조름한 국물이 떡에 스며들면서 국물 맛이 한층 진해지고, 담백한 닭고기와 어우러져 든든한 별미가 되었다. 경상도에서는 ‘꾸미(국이나 찌개에 넣는 고기)’라 불리는 고명이 떡국 맛을 좌우했다. 국물은 멸치·다시마 육수나 소고기 국물을 쓰지만, 짭조름한 꾸미로 맛을 보강했다. 간장에 졸인 고기, 두부, 달걀, 김 가루가 고명으로 올라가고, 바닷가 지역에서는 굴이나 해산물이 더해졌다. 울산에서는 독특하게도 구운 떡을 넣어 고소함을 더한 ‘굽은떡국’이 전해진다. 멥쌀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어 익반죽한 반죽을 기름 두른 팬에 전병처럼 넓게 구운 뒤, 이를 한입 크기로 잘라 멸치 장국에 넣어 끓이는 방식이다. 기름에 구운 떡 특유의 고소한 향과 쫄깃한 식감이 국물과 어우러져 별미를 이룬다. ‘굽은’은 구웠다는 뜻의 지역 사투리이다. 오늘날 식재료가 풍족해지고 세시풍속을 따르는 사람들이 줄면서 많은 명절 음식이 빛을 잃었다. 떡국 역시 가정간편식으로 사시사철 맛볼 수 있는 일상적 음식이 되었지만, 길하게 여기는 마음은 한결같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설날 아침 가족이 한데 모여 떡국을 나눠 먹으며 새해의 안녕을 함께 빌고 덕담을 나눈다. 조랭이떡국은 개성 지방의 향토 음식이다. 일반적으로 떡국은 긴 가래떡을 어슷하게 썰어서 끓이지만, 조랭이떡국은 리본 모양으로 떡을 만들어 끓이는 게 특징이다. 국물을 내거나 고명을 얹는 방식은 다른 떡국과 비슷하다. ⓒ 경향신문

지금 대중문화가 무속을 다루는 방식

Arts & Culture 2025 WINTER

지금 대중문화가 무속을 다루는 방식 최근 들어 한국 무속을 모티프로 삼은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부쩍 늘었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예능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또한 무속인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상투적 묘사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각으로 이들을 그려낸다. 무속을 매개로 한 한국식 오컬트는 무속인들이 신의 중재자로서 귀신을 달래고 위로한다는 점에서 서구의 오컬트 장르와 차별화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이러한 한국 무속의 특성을 잘 담아내며, 한국식 오컬트가 하나의 장르적 계보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는 ‘K-팝’과 ‘데몬 헌터스’의 결합이 절묘한 애니메이션이다. 일반적으로서구의 오컬트 장르에서 데몬 헌터스는 구마 사제를 가리키지만, 이 작품에는 무당이 등장한다. 각자의 신을 섬기는 무당은 무속 의식인 굿을 진행하는 동안 접신하고 신탁을 전달한다. 선악 구도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구마 사제는 악령들과 싸우고 이를 물리치는 존재로, 어찌 보면 ‘파이터’에 가깝다. 하지만 무당은 악령들(한국에서는 원귀들)과 싸우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고 맺힌 한을 풀어줌으로써 응당 가야 할 저승으로 고이 보내준다. 그런 점에서 무당은 파이터라기보다는 ‘카운슬러’에 가깝다. 영매자인 무당의 역할이 구마 사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얘기다. 이러한 차이점은 사후 세계와 귀신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관점이 서구와 다른 데서 연유한다. 한국에서는 귀신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에는 무당의 후예인 헌트릭스 멤버들이 악령들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 루미가 진우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이 싸움은 대결보다는 구원에 가깝다. 루미는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혼을 팔아 악령이 된 진우를 물리치는 게 아니라 구원해 주려 애쓴다. 루미의 태도는 무당의 본질적 역할과 맞닿아 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의 헌트릭스가 무대에서 팬들과 교감하는 과정은 무당이 굿을 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이 의식은 전통적으로 춤과 노래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로 그 점에서 굿은 K-팝 아티스트들의 공연과 유사하다. 무당들이 굿으로 원혼을 위로해 주는 것처럼 K-팝 아티스트들은 춤과 노래로 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국내 대중문화에서 무당이 긍정적 역할로 묘사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무당은 대개 ‘신병’이라 불리는 원인 모를 병을 앓다가 내림굿을 받고 신을 받아들이는 혹독한 운명을 지녔다. 1970~8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무당의 영적인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미신으로 치부했다. 자연히 TV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무당도 대개는 무섭고 이질적인 존재로 그려졌다. 하지만 최근 K-콘텐츠 속에 나타나는 무당들은 훨씬 밝아졌고 당당해졌다. 영화 에 등장하는 무당 화림(김고은)은 가죽 롱코트를 휘날리며 귀신과 맞서는 스타일리시한 모습을 선보인다. 화림 같은 젊은 세대 무당은 올해 상반기 방영된 SBS의 이나 tvN의 같은 TV 드라마에도 등장한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의 여주인공 여리(김지연)는 첫사랑 윤갑(육성재)의 몸에 빙의한 이무기 강철과 함께 왕가의 저주를 풀어내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동안은 서사적 필요에 의해 조연이나 단역으로 등장했던 무당이 판타지 액션과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올라선 것이다. 이는 현재 무당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말해준다. 이런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이 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이 작품은 대본집이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을 정도로 화제성이 높았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성아(조이현)는 ‘천지선녀’로 불리는 고등학생 무당이며, 저주받은 존재인 첫사랑 견우(추영우)를 사랑의 힘으로 지켜내는 수호천사 같은 역할로 나온다. 견우를 구하기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당이 지니는 ‘힐러’로서의 면모를 강조한다. 의 루미와 유사한 설정이다. 국내 OTT 플랫폼 티빙의 오리지널 시리즈 은 귀신 현상을 겪은 제보자들과 무속인들을 밀착 취재해 귀신과 무속이라는 주제를 다각도로 탐구한 다큐멘터리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국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는 점에서 호평받았다. 티빙 제공 새로운 접근 방식 젊은 세대 무당이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 시대적 변화는 라는 매우 독특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탄생시켰다. 일정 기간 한 집에 머무르고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의 인연을 찾아간다는 포맷은 여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무당과 점술가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자신의 영적 능력을 토대로 연애 상대를 선택한다는 신선한 발상은 시청자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성 출연자들이 태어난 일시만 보고, 그중에서 운명의 상대를 선택하는 오프닝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의 뜻이나 점괘를 통해 알게 된 운명의 상대와 자신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상대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다른 연애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재미를 제공했다. 출연자들의 수려한 외모와 언변 또한 젊은 세대 무당에게 호감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 프로그램은 2024년 첫 번째 시즌이 방영된 후 인기에 힘입어 올해 초 두 번째 시즌이 전파를 탔다. 장르적 분화 그렇다면 최근 몇 년 사이 무속인들이 호감의 대상이 된 이유는 뭘까. 우선 무속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진 데 있다. 한국인들은 이제 무속을 음습한 미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카운슬링으로 여기게 됐다. 한마디로 과거에 비해 무속을 훨씬 캐주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사람들은 무속인이나 점술사들을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찾는다. 도시 변두리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던 무당집과 점집도 이제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에 자리를 잡은 경우가 많다. 한편 젊은 세대가 무속에 호감을 갖는 이유로,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꿈을 펼치기 어려워진 사회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이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은 이전 세대들이 젊은 시절 느꼈던 것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무속을 통해 보다 직관적인 조언을 듣고 그를 통해 위안을 느낀다. 무속에 관한 젊은 세대의 관심과 호감은 이 소재가 대중문화에서 다양한 장르로 분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 무속을 매개로 한 콘텐츠들은 사극, 로맨스, 액션 판타지로 그 영역을 넓혔다. 또한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 더해 같은 애니메이션, 같은 다큐멘터리의 소재로도 등장한다. 한국의 전통 무속 신앙이 지닌 문화적 요소들이 더욱 다채로운 형태로 새롭게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구아진의 네이버 웹툰 는 절대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무당들의 이야기다. 도서출판 들녘에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아 2022년 대한민국콘텐츠대상의 대통령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받았다. ⓒ 구아진, 투니드 엔터테인먼트, 도서출판 들녘

부당함에 맞서는 일에 관하여

Arts & Culture 2025 WINTER

부당함에 맞서는 일에 관하여 『서른의 반격』 손원평 작, 션 린 할버트 번역 하퍼비아, 2025 233쪽, 19.99달러 부당함에 맞서는 일에 관하여 손원평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인 이 책의 주인공은 ‘김지혜’다. 1988년생 여자 이름 중 가장 흔한 이름이기에, 그녀는 수많은 ‘김지혜들’ 속에 파묻힌다. 하지만 그녀에게 익명성은 오히려 편안하다. 무대에 선 사람들을 객석에서 지켜보면서, 조용히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서른 살이 된 김지혜는 대기업 DM그룹의 교육 계열사인 DM아카데미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원했던 인생은 아니었다. 꿈도 희망도 이루지 못했고,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런데 마치 맑은 하늘에 번개가 치듯 그녀의 일상에 한 남자가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바뀐다. 두 번째 인턴으로 채용된 이규옥이다. 물 같은 지혜에 비해 그는 불과 같은 성향이지만, 둘은 의외의 동지가 된다. 우쿨렐레 수강생 남은주와 고무인까지 합류하면서, 세상의 권위에 맞서고 정의를 구현하는 4인조가 탄생한다. 이들의 목표는 거창하지 않고, 방식도 유쾌하다. 갑질하는 상사를 상대로 협박문 느낌의 쪽지를 남기거나, 다리 밑에 낙서하고, 싫어하는 정치인에게 달걀을 던지는 정도의 소소한 장난이다. 처음엔 이 장난들이 나름대로 효과를 보인다. 체제가 전복되거나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의 일상은 조금 더 나아진다. 그런데 지혜는 점점 마음이 무거워진다. 진정한 변화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마침내 사상 최대의 계획을 실행할 기회가 찾아온다. 과연 4인조는 지혜가 바랐던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니면, 세상과 맞서 싸우기보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이 현명하다는 현실주의자들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게 될 것인가? 지혜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서른을 넘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10대에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변화가 너무 많아 스스로를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그 시기가 지나고 20대가 되면,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디며 가능한 많은 경험을 쌓아가게 된다. 그러나 30대에 접어들면, 사회는 ‘이제 진지하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하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사회가 정해 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틀에 맞서서, 자신이 원하는 꿈을 좇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혜는 둘 중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최소한 모두에게 맞는 답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각자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책을 읽고 얻은 메시지다. 독자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손원평의 작품이 탁월한 이유는 모두에게 똑같은 해답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받아들인다. 앞으로도 분명 그녀의 인생에는 수많은 시련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녀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옥춘당』 고정순 작, 박애린 번역 레빈 퀘리도, 2025 128쪽, 21.99달러 사탕처럼 달콤하고… 깨지기 쉬운 추억 작가 고정순은 『옥춘당』에서 따뜻한 글과 아름다운 그림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고아였던 두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손녀인 정순은 방학이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는데, 기억 속 할머니의 집은 ‘여름이 오래 머무는 곳’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세월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세상은 계속 돌아가지만, 모든 것에는 언제나 끝이 있기 마련이다. 작가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단어만 골라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간다. 대신 글 사이에 놓인 그림들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눈앞의 장면만이 아니라 마음의 여운까지 포착하며, 오래된 기억을 고스란히 불러낸다. 이야기의 끝에서 작가는 할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작은 실내화 한 켤레’를 떠올린다. 사람들이 세상을 떠날 때는 물건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기억 속에 다시는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만들어 두고 가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 빈자리는 우리의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드라마빈스 www.dramabeans.com 전 세계 K-드라마 팬들, 모여라 2007년, ‘javabeans’라는 닉네임을 쓰는 한 여성이 K-드라마의 세계에 푹 빠졌다. K-드라마를 향한 애정을 함께 나눌 곳을 찾아 인터넷을 뒤졌지만, K-드라마가 제대로 주목받는 곳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만든 사이트가 바로 ‘드라마빈스’다. 이 사이트의 주요 콘텐츠는 인기 드라마 요약이지만, 그 외에도 의 세계적 성공 등 드라마 현상에 관한 에세이, 드라마 업계 뉴스, 팬들을 위한 토론 게시판까지 다양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드라마빈스의 필진은 출신도 다르고, 살아온 길도 제각각이다. 이 사이트를 알게 된 경로 또한 각기 다르지만, 그들을 하나로 잇는 단 하나의 끈이 있다. K-드라마에 대한 사랑, 아니 어쩌면 집착에 가까운 애정이다. 현재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소위 ‘리캡 미니언’ 들은 대부분 드라마빈스의 초기 독자들로, 아끼는 사이트에 직접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꿈만 같다고 말한다. 이처럼 드라마빈스는 위에서 아래로 정보를 뿌리는 구조가 아닌, 팬에 의해, 팬을 위해 만들어진, 애정이 담긴 K-드라마 해설과 분석의 공간이다. 리캡 미니언들처럼 K-드라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겨찾기 해둘 만하다. 찰스 라 슈어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합성의 스토리텔러, 김아영

Arts & Culture 2025 WINTER

합성의 스토리텔러, 김아영 김아영은 영상,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등을 아우르며 다양한 서사를 연결하고 확장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작가는 현실과 허구, 기록과 상상을 교차시켜 불가항력에 저항하거나 그로부터 빗나가고 이탈하는 존재와 사건들을 탐구한다. 2024년 8월부터 2025년 2월까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개최된 < ACC 미래상 2024: 김아영 -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 >. 근대화 이후 사라져가는 여러 문화권의 전통적 우주론과 시간 체계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혁신적인 미래 가치와 가능성을 확장한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ACC 미래상’을 받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사진 홍철기 김아영의 작업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지난해 내가 목격한 광경을 떠올려 본다. 2024년 9월 7일, 나는 제15회 광주비엔날레를 취재하기 위해 외신 기자들과 프레스 투어 버스를 타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향했다. 그날 전시관의 중심에는 대형 스크린 세 개가 삼각형 구조를 이루며 공중에 들린 채 설치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지난해 ‘ACC 미래상’을 수상한 김아영의 신작 가 세 개 채널 영상으로 상영 중이었다. 나는 관람객을 위해 설치된 스크린 앞 슬로프에 누워, 영화 를 떠올리게 하는 테크노 오리엔탈리즘적 도시에서 사이버펑크의 전사 같은 여성 라이더 둘이 함께 질주하고, 싸우고, 뒤엉키는 장면을 보며 한동안 넋이 나가 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참 지나 버스로 다시 돌아왔을 때 외신 기자들도 “김아영이 누구냐?”며 서로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어떤 기자는 그 작품을 두고 “페미니즘적 자아 혹은 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사회 소외 계층으로서 라이더들을 영웅화하는 계급 투쟁적 이야기”라고도 말했다. 바로 그 전시에서 김아영의 작품을 접한 외신 기자들과 해외 미술 관계자들이 그녀가 지금의 국제적 명성을 얻는 데 직간접적으로 일조했음은 자명하다. 이후 작가는 2025년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고,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과 뉴욕현대미술관 PS1의 개인전 초대를 받았으며, 홍콩 M+ 뮤지엄의 파사드 커미션 작업을 의뢰받았다. 그녀의 작품이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의 마음을 짧은 시간에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나는 김아영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사변적 픽션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김아영은 자본주의나 이데올로기 같은 거시적 서사를 고고학, 미래주의, SF적 상상력이 가득한 중첩적 서사로 재구성한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의 독특한 작업 세계에 최근 국내외 미술계가 주목하고 있다. 2023년 골든 니카상, 2025년 LG 구겐하임 어워드를 수상했다. 에르메스재단 제공, 사진 김상태 딜리버리 댄서의 사변적 세계 (2022), (2022), (2024), (2024)로 이어지는 ‘딜리버리 댄서’ 연작은 작가가 마치 전도사처럼 주창해 온 사변적 픽션의 작동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시다. 이 연작은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비롯되었다. 김아영은 당시 여러 앱으로 배달 음식을 시키면서도 막상 그 음식을 배달하는 이들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누군가의 저녁 식사를 나르는 그들은 누구일까? 김아영의 사변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철저하게 리서치 중심적인 그녀의 사변은 취재를 통해 획득한 인식과 세상사의 원리를 나름의 방식으로 유추하거나 재정의하고, 이를 다른 사건이나 상황에 적용해 보는 실험의 과정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 방정식을 도출한 뒤, 그 식을 활용해 야구 선수가 힘껏 던진 공의 낙하지점을 유추하는 과정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더 나아가 상수에 변화를 준 인력의 공식을 대입해 화성이나 달 세계의 중력을 가상의 영상 이미지로 표현하는 단계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김아영은 ‘Monster’의 애너그램(철자의 순서를 바꾸는 것)인 ‘에른스트 모(Ernst Mo)’라는 여성 라이더를 창조하고, 바이크를 타고 달리는 라이딩을 ‘댄싱’으로 표현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 통행인이 사라진 세상에서 무언가를 정해진 시간 안에 배달하기 위해 빛의 속도로 달리는 ‘딜리버리 댄서’가 있다면, 그녀에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에른스트 모는 빛의 속도로 달리기 위해 접히거나 끊어진,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공간을 달릴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 곳을 달리다 보면 결국 다른 우주와 섞여버릴 것이며, 그렇게 두 우주가 만나는 지점(작품에서는 이를 ‘누수 지점’이라 말한다)에서 도플갱어와 맞닥뜨릴 것이다. 작품에서 에른스트 모는 그렇게 다른 우주의 자아인 ‘엔 스톰(En storm)’을 만난다. 그녀가 나타날 때면, 즉 두 세계가 교차할 때면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라 느리게 흐르고, 급기야 느리게 흐른 시간 탓에 배달 콜을 제때 수행해 내지 못한 에른스트 모의 등급이 점점 낮아져 새로운 임무를 배정받지 못하기에 이른다. 이 매력적인 이야기는 마치 파사칼리아처럼 악장을 달리하며 변주한다. 에선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가상의 도시 ‘노바리아’에서 ‘우연히 소멸된 것으로 알려진 과거의 시간관이 담긴 유물들’을 배달하며,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24시간 365일’이란 서구의 시간관에 질문을 던진다. 에선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시간을 되찾는 존재로 등장한다. 그들은 ‘사막과 도시와 차원이 교차하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시간을 운반하고, 미래에서 온 주시관들의 눈을 피하고 싸운다. 변주는 애니메이션과 실사 그리고 퍼포먼스를 아우르며 계속될 것이다. 에른스트 모와 엔 스톰이 만나 서로 대립하지 않고 생존하는 세계가 나타날 때까지. 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급부상한 플랫폼 노동의 문제를 그려낸 작품이다. 디지털 기술과 복합적인 스토리텔링을 통해 작가의 주제 의식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가 제공 사변의 시작: 다공성 계곡 사변의 변주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은 ‘다공성 계곡’ 연작이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에서 다공성 계곡은 ‘플롯 구멍’이 많은 계곡, 즉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이 살아가는 곳을 뜻한다. 이 개연성 떨어지는 가상의 공간에 사는 ‘페트라 제네시트릭스’는 암벽 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하고 기이한 암석 결정에 깃들어 사는 광물이자 데이터 클러스터다. 어느 날 다공성 계곡의 폭파로, 페트라는 다른 암석 플랫폼으로 이주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면서 당황스러운 실질적 문제에 직면한다. 이 이야기 역시 변주한다.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은 페트라가 크립토밸리라 불리는 섬의 해안가에서 눈을 뜨며 시작한다. 이 섬에서 페트라는 이주 당국에 붙들려 바이러스 취급을 당하고, 이주 심사에서 떨어져 ‘스마트 그리드’라는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어는 순간 환청과 환영을 듣고 그에 따라 탈출을 감행한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따라 동굴로 들어간 페트라는 그곳에서 ‘어머니 바위’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나고, 이 어머니 바위와 결합한다. 마치 신화 혹은 우화와도 같은 이 일련의 이야기들은 감상자가 이주, 난민, 국가, 경계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김아영은 2025년 11월 뉴욕 캐년에서 열린 ‘퍼포마 비엔날레 2025’에서 퍼포먼스 신작 〈 Body^n 〉을 공개했다. 도플갱어의 개념과 신체 재현 문제를 탐구한 작품이다. 으로 에미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차이 무술 감독과 스턴트 배우들의 동작을 실시간 라이브 모션 캡처를 통해 디지털화했다. 사진은 < Body^n >의 프로덕션 스틸. 작가 제공 석유, 기억 그리고 기계 김아영의 작품 목록에서 가장 무쌍하게 변모하는 또 다른 주제는 ‘석유’다. 그리고 이 주제는 ‘리서치 프로젝트’라는 작가의 또 다른 작업 양식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석유에 대한 관심은 작가의 가족사에서 시작한다. 한양건설 부장이었던 작가의 부친은 1979년 작가가 태어난 지 세 달 만에 쿠웨이트로 파견되었다가 1982년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1984년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 걸프전이 발발한 1991년에 돌아왔으며, 그 기간 매년 두 번씩 휴가로 한국을 찾았다. 작가는 어린 시절 느꼈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아버지가 선물로 들고 온 신문물이 가져다준 기쁨을 기억한다. 1979년 OPEC 중동 국가들이 석유 수출을 제한하며 제2차 석유 파동이 벌어졌으며, 외화를 확보해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 주도로 국내 건설 업체들이 중동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작가가 알게 된 건 성장한 후다. 석유 자본의 전 지구적 이동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 어린아이, 즉 자신의 성장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작가 자신을 매혹했다. 이것이 ‘석유 자본의 이동과 중동 특수에 관한 리서치 프로젝트’의 발단이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첫 작품은 연작으로, ‘제페트’는 역청을 뜻한다. 글로 읽어도, 영상으로 봐도 무척이나 난해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석유와 중동 특수에 대한 방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대본을 쓰고, 이 대본을 ‘논리 정연하면서도 혼돈스러운 규칙’을 통해 재생성할 기계 장치(컴퓨팅 장치)를 만든다. 참고로 작가는 이 장치에 ‘기계 장치의 신’을 뜻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극작 용어를 이름으로 붙였다. 작가는 자신이 쓴 대본과 이 대본을 기계 장치에 넣어 얻은 결과물에 각각 기계 알고리듬을 통해 만들어진 음률과 인간 작곡가의 음률을 붙이고 이를 합창 형식으로 공연했다. 최근작 ‹알 마터 플롯 1991›(2025)은 석유에 관한 이 방대한 리서치 프로젝트의 집약판이다. 작가는 아버지가 다니던 한양건설이 1979년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대규모 거주 단지 ‘알 마터 아파트’를 추적하며, 석유 자본의 형성과 이동의 거시사가 작가의 삶과 그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미시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한다. 현장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주변인들이 그 호화 주택 단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들을 수집해 생성형 AI와 CGI, 라이다 스캐닝 등의 새로운 기술들을 활용해 미래적 에세이 필름 형태로 완성했다. 김아영의 초기작은 몽타주 사진 작업이었다. 이후 자신의 변화에 관해 김아영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최근에는 몽타주를 포함하는 상위 개념으로 ‘합성’이라는 용어를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매끈한 합성이 아니라, 비뚤비뚤하고 거칠거칠한 이음매가 모두 드러나는 합성이요.” 김아영이 현실과 픽션을 거칠게 섞은 모습은 마치 관절이 다 드러난 사이보그 같다. 올해 3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오프닝에서 작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앞으로는 ‘딜리버리 댄서’와 리서치 중심의 작품들을 투 트랙으로 진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딜리버리 댄서’의 사변적 픽션이 현실의 핍진성을 떨쳐버리고, 그 작동 원리만을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인공 팔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리서치 프로젝트의 방법론은 작가의 해석이 담긴 현실 이야기를 매우 핍진하게 담아낸다는 점에서 육체적이다. 흡사 전자 의수를 단 사이보그, 강력한 기계 팔을 가진 아시안 퓨처리즘적 모습의 김아영이 합성의 이야기꾼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알 마터 플롯 1991〉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중 하나인 알 마터 주택단지가 배경이다. 개인적 경험을 근현대사로 확장한 작품이며, 석유를 매개로 경제 성장과 지정학적 분쟁 등 다층적 서사가 담겼다. 2025년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개인전 에서 공개됐다. 작가 제공

공공 너머 미래를 향한 건축, 건축가 전숙희

Arts & Culture 2025 WINTER

공공 너머 미래를 향한 건축, 건축가 전숙희 건축가 전숙희는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건축이라는 매개를 통해 동시대의 주요 질문들을 탐구하며 대안을 제시해 왔다. 그녀에게 건축은 단순히 조형물을 구축하는 행위를 넘어, 사회적 맥락과 인간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실천적 사유를 담아내는 그릇과 같다. 경상남도 남해에는 농업용 창고로 사용하기 위해 화강암을 쌓아 만든 1920년대 건물들이 군데군데 있다. 전숙희 건축가는 한 도예가의 요청으로 그중 하나를 도예 공방으로 리모델링했다. 외관은 그대로 보존하되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지붕에 전망대를 설치했다. ⓒ 노경 전숙희는 건축이 개인의 공간을 넘어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공공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신념을 꾸준히 피력해 왔다. 그녀는 건축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건축 교육을 받았다. 특히 이화여대 건축학과 첫 입학생이었던 그녀는 선배들의 부재 속에서 자립적으로 모든 것을 찾아 해결해야 했던 경험이 독립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프린스턴 대학원에서는 소수 정예 교육 시스템 속에서 교수진과 학생들 간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깊이 있는 탐구를 할 수 있었다. 이는 그녀가 건축을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하게 된 토대가 되었다. 장영철 건축가와 함께 2008년 와이즈 건축사사무소를 공동 설립한 이래, 그녀의 작업들은 이러한 비판적이고 탐구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건축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을 던져왔다. 95%의 건축 전숙희는 건축이 단순히 사적 소유물의 가치를 넘어,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공공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에게 건축은 도시의 일부로서,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사회적 자산이다. 따라서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할 때 주변 환경과 조화로운지 고려하고, 지역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녀는 이러한 관점에서 ‘95%의 건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기존의 민간 영역에 집중된 5%의 특별한 건축을 넘어, 나머지 대다수의 건축물이 공공적 가치를 실현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아산나눔재단 프로젝트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녀는 비영리 재단의 사옥인 이 건물에서 ‘공공에 문턱이 낮은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경험은 사적 소유물이라 할지라도 도시와 사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건축가로서 이러한 공공적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이후 참여했던 노무현시민센터 프로젝트는 이러한 철학을 실현하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그녀는 조선 시대 궁궐인 창덕궁 인근이라는 특수한 장소성과 북촌 지구 단위 계획의 제약, 시민들의 의견 수렴 과정 등 여러 가지 큰 난관 속에서도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경험은 건축가가 단순히 도면을 그리는 것을 넘어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는 주체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노무현시민센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동시에 시민들을 위한 공공 공간으로 설계된 곳이다. 창덕궁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 나지막한 구릉지였는데,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건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바닥과 벽, 지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곡선을 활용했다. ⓒ 노경 위안의 장소 전숙희는 건축가가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또한 그것을 잘 활용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건축가는 나무를 키우는 사람과 다르지 않으며, 나무가 숲을 이루기도 하고 정원이나 산책로가 되기도 하듯 결국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 건축가의 소임이라고 믿는다. ⓒ 이민희 전숙희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지쳐 있으며, 위안과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녀는 개인이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사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소통하고 교류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낯선 이들과 공존하는 공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 역사적 의미를 내포한 공간 등이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절두산 순교 성지를 예로 들며,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선 비종교적 차원의 정서적 공간으로서 이곳이 많은 사람에게 휴식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스웨덴 우드랜드 화장터를 방문했던 경험은 그녀에게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건축적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획일적인 현대의 장례 문화와 달리, 죽음을 엄숙하게 성찰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공간은 단순히 기능적 측면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슬픔을 치유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이처럼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건축적으로 섬세하게 다루는 것이 건축가의 중요한 역할임을 인식하고, 공간이 주는 위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피겨앤그라운드는 서울 강남 가로수길의 30여 년이 넘은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한 작업물이다. 폐쇄적이었던 저층부는 덜어내고, 상층부의 공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입면을 구성하는 벽돌 마감의 수평 띠는 발코니와 외부 계단인데, 각 층을 연결해 ‘길’을 형상화했다. ⓒ 노경 건축가의 시각과 과제 서울 성산동 주택가 깊숙이 자리 잡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던, 과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을 재현한 공간이다. 큼직한 안내판이나 근사한 로비 대신 작은 문 하나만 외부로 열어둔 채 가이드가 방문자들과 동행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선으로 설계됐다. ⓒ 김두호 전숙희는 기후 변화와 인구 감소라는 두 가지 시대적 과제에 주목하며, 건축이 이러한 문제 해결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그녀는 인구 감소로 인해 발생하는 도시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며, 특히 한국 사회의 고유한 인구 구조적 특징에 대한 건축적 대응을 모색한다. 그녀는 서울의 인구가 80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인구학적 예측을 제시하며, 이에 따른 도시 공간의 재편과 기존 인프라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런가 하면 고령화 사회에 대비한 건축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노인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주거 환경 조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기술적인 해결을 넘어 사회 구조적 변화가 건축에 미치는 영향까지 통찰한다. 구도심의 쇠퇴와 신도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다양한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건축가들이 반드시 직면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그녀는 건축이 그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파주출판도시 내 자리 잡고 있는 뮤엠 사옥은 영어 교육 회사인 뮤엠교육의 부엉이 로고에서 착안해 그루터기 형태로 건물을 완성했다. 전체가 검은 벽돌로 이루어진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에 율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절개된 듯한 비틀린 형태의 출입구를 만들었다. ⓒ 노경 중요한 것은 소통의 능력 전숙희는 건축이 단순히 설계 능력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녀는 건축 실현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과의 긴밀한 소통과 협력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건축주, 시공사,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경험을 쌓아 온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조율하며 최적의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설계도를 그리는 작업이 전체 프로세스의 일부에 불과하며, 실제 건물이 지어지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에서 소통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건축은 결국 ‘관계’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나 혼자 20%를 잘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80%를 채워줄 수 있는 ‘관계’에 의해서 건물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요. ‘관계’를 절차와 시스템, 심지어는 구현되지 않은 기술까지 아우르는 복합성을 띤 개념으로 확장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는 1988년 독일에서 시작된 글로벌 전시로, 암흑 속에서 시야가 차단된 채 다른 감각들을 일깨우며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묻는 프로그램이다. 어둠속의대화 북촌 전시장은 전통 대나무 발에서 모티프를 얻은 건물 외피를 통해 이 전시의 특징을 건축적으로 구현해 냈다. ⓒ 김용관 뮤엠 사옥 프로젝트와 같은 벽돌 쌓기 작업은 그녀가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 사례다. 초기 설계 의도와 현장 상황 간 불일치, 그리고 숙련공과의 소통 부족으로 인해 발생했던 어려움은 결국 현장에서 끊임없는 대화와 협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었다. 건축이 결코 건축가 한 명의 역량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소통, 그리고 때로는 고집과 자부심이 얽힌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한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공유하고 드러냄으로써 다음 세대가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선배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이는 건축계 전체의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며, 건축이 단순한 기능 구현을 넘어선 사회적 역량을 발휘하는 토대가 된다. "돌이켜보면, 건축이라는 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를 고민하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숙희의 건축은 단순히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행위를 넘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깊이 있는 질문이자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강력한 메시지다. 남해 돌창고의 내부는 곡식만 보관하면 됐던 단출한 공간을 현재의 용도에 맞게 바꾸기 위해 여러 방식의 보강이 필요했다. 오래된 목재 트러스를 철재로 바꿔 지붕을 떠받칠 수 있도록 했고, H빔을 설치해 기둥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 노경

복을 부르는 포용의 미덕

Arts & Culture 2025 WINTER

복을 부르는 포용의 미덕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호호당의 양정은 대표는 전통을 단순히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감각과 실용성을 결합해 일상에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재해석한다. 그래서 호호당의 제품에는 한국적 미학뿐 아니라 사용자의 삶을 아우르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양정은 대표가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호호당 쇼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는 보자기 포장 문화를 통해 품격 있는 전통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보자기는 물건을 싸서 보관하거나 실어 나르기 위한 용도로 네모나게 만든 천을 말한다. 보자기는 이처럼 예부터 가방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가방은 정해진 크기에 맞춰서 물건을 담는 데 반해 보자기는 물건에 맞춰서 감싸 담는다. 보자기 문화에는 사람을 대할 때 정성을 다하고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우리의 습성이 잘 드러나 있다. 보자기를 뜻하는 한자 ‘복(幞, 襆)’은 행운이나 행복을 뜻하는 ‘복(福)’과 음이 같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보자기에 물건을 싸두면 복이 든다고 믿었다. 혼례 시 신랑 신부가 주고받는 예물이나 함 등을 포장한 보자기가 대표적인 예다. 보자기를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시대 문헌들에 보자기에 얽힌 사화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일상 대소사에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왕실의 복식과 물품에 관한 규례를 적은 책 『상방정례』(1749)에는 당시 궁중에서 사용하던 보자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적혀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왕과 왕세자가 머리에 쓰는 관 종류는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3폭짜리 솜보자기로 포장했으며, 옷은 4폭 홑보자기, 버선과 신발은 3폭 홑보자기로 싸서 보관했다고 한다. 1폭은 오늘날로 치면 약 35㎝ 너비이다. 왕실에서 사용한 보자기의 재질은 주로 비단이며, 홍색 계열을 가장 많이 사용했고, 간혹 자주색과 남색, 청색, 백색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보자기는 옷보, 이불보, 상보 등 싸는 물건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붙는다. 일상에 필요한 물건 외에도 경전을 담는 경전보, 각종 제의에 쓰이는 특수용 보를 비롯해 혼례에 사용되는 사주단자와 함, 폐백 등을 담는 혼수보 등 용도에 따라 구분해서 사용했다. 또 혼례 예물을 싸는 보자기는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파랑, 빨강, 노랑, 하양, 검정의 오방색 실로 수를 놓아 부부의 화합을 기원했다. 이처럼 의식주 전반에 걸쳐 친숙한 포장 도구였던 보자기는 근대화를 거치며 사용 영역이 축소되었으나, 오늘날에도 정성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선물 포장에 쓰이거나 각종 예식에 두루 활용된다. 정성을 표현하는 도구 서울 청담동 명품거리 골목에 위치한 호호당 쇼룸에 들어서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중요한 순간들이 한눈에 스쳐 지나간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입히는 배냇저고리부터 돌반지, 복주머니, 한복, 유기그릇과 목각 인형 등 결혼, 임신과 출산, 명절, 각종 기념일에 필요한 전통 생활용품들이 보자기에 담겨 진열돼 있다. “보자기는 주는 사람의 정성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받는 사람이 계속 재사용할 수 있어서 매우 친환경적입니다.” 양정은 대표는 보자기의 실용성을 먼저 강조한다. 그녀가 보자기에 관심을 두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보자기는 제 삶의 뿌리 중 일부라고 할 수 있어요. 할머니와 아버지가 드라마와 영화 사극에 들어가는 특수 의상 사업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집 안에는 시대에 따라 고증한 한복, 갑옷, 소품들을 만들고 남은 원단이 가득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남은 천을 모아 보자기를 만들어 쟁여두셨어요.” 그렇게 만든 보자기는 명절이나 특별한 날 선물 포장뿐 아니라 도시락 주머니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줄 때도 고운 색깔의 보자기에 담아서 주셨다고 한다. 품질과 디자인은 물론이고 가격도 적당해야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보자기를 자주 사용할 수 있다. 양 대표가 가격이 비싼 전통 옷감 대신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리사이클 원단을 개발한 이유다. “집과 작업장이 위아래로 붙어 있다 보니 어쩌다 별식을 하면 넉넉하게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명절 때면 떡과 육포를 만들어 이웃에도 돌렸어요. 음식 포장은 주로 제 몫이었는데, 이런저런 모양을 내서 싸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죠.” 어려서 보고 자란 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일까? 음식 포장으로 시작된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은 대학에서 전통 식생활 문화 공부로 이어졌고, 한때는 오너 셰프로서 한식당 ‘정미소(井米所)’를 운영하기도 했다. 체력이 따라가지 못해 2년 만에 그만두긴 했지만, 이 일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이후 선물 요리에 집중했다. “주로 폐백, 이바지 음식을 주문받았는데, 포장용 보자기가 마땅치 않았어요. 그래서 과거 저희 집에서 작업하시던 분들을 수소문해 원단을 구해서 직접 만들었죠. 음식 보고 온 손님들이 보자기 포장에 반해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보자기는 어떤 형태의 물건이든 포장할 수 있는 유연함을 지녔다. 또한 묶기, 접기, 꼬기, 감기, 땋기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아름다움을 배가할 수 있다. 대중화 위한 소재 개발 2011년 문을 연 호호당은 세련된 보자기 포장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국내외 많은 럭셔리 브랜드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뷰티 브랜드 설화수를 시작으로 구찌, 루이비통, 보테가 베네타 등 해외 명품 브랜드와도 협업해 답례품, 선물 포장 작업에 참여했다. “설화수의 경우 10년째 디자인 작업을 함께 해오면서 저 또한 성장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오래도록 간직할 가치를 먼저 생각하게 됐죠.” 이 과정에서 그녀는 보자기를 일상에서 더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됐다. “전통 보자기는 실크나 모시로 만드는데, 너무 고가여서 한계가 있었죠. 전통의 아름다움을 누구나 손쉽게 누렸으면 하는 고민이 소재 개발로 이어졌고, 이를 충족할 기능성 섬유를 찾게 됐습니다.” 양 대표는 가격대를 낮추기 위해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이렇게 만든 리사이클 원단을 인정받아 호호당은 2021년 GRS(Global Recycled Standard, 국제 재활용 표준) 친환경 기업으로 공식 인증받았다. "저희와 협업하고 있는 호텔신라 보자기는 현재 100% 폐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원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호호당 보자기도 일부 천연 소재 외에는 바꿔나가는 중이고요.” 양 대표가 2024년 새롭게 선보인 색동 바구니. 색동은 예로부터 귀한 일에 사용하는 옷감이었다. 조선의 제21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가 정순왕후를 왕비로 책봉할 때 사용했던 두루마리의 색동을 재해석했다. 복을 부르는 마음 보자기 포장에서 생활용품 브랜드로 발돋움한 호호당은 굵직한 국내외 행사에 공식 기념품으로 채택돼 호평을 받았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경복궁 영추문 천장에 있는 백호를 응용해 자수 마그넷과 보자기 가방을 선보였고, 2021년 서울에서 개최된 P4G(Partnering for Green Growth and the Global Goals 2030, 녹색성장 및 2030 글로벌 목표를 위한 연대) 정상회의 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문양을 응용한 보자기 가방을 제작해 화제가 됐다. “원단에 들어가는 문양은 주로 우리 민화에서 응용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에 나오는 그 귀여운 호랑이를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호호당이 해온 일을 인정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양 대표가 이끌던 호호당은 무역회사에 다니던 남편 김준식 씨가 2016년 합류해 해외 직수출의 길이 열렸다. 현재 호호당은 서울과 대구, 베트남 호찌민에 공장을 둔 제조 기업으로 성장했다. “호호당은 제가 결혼할 때 ‘늘 좋은 일만 있으라’고 어머니가 저희 가정에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이듬해인 2011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무척 막막했어요. 혼자 출산을 준비할 때는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배냇저고리를 만들면서 그 허전한 심경을 추스를 수 있었죠. 어머니가 염원하신 것처럼 저도 호호당을 찾는 분들께 좋은 일만 가득 담아 드리고 싶어요.” 보자기에 담는 정성스러운 그 마음이 복을 부르나 보다. 부부간 신뢰와 화목을 상징하는 목각 기러기는 전통 혼례에서 가장 중요한 예물이었다. 장인이 호두나무를 정성스럽게 깎아 만든 호호당의 목각 기러기는 주로 전통 옷감인 양단이나 노방 보자기로 포장한다.

‘어쩔 수가 없는’ 삶에 대한 박찬욱의 풍자

Arts & Culture 2025 WINTER

‘어쩔 수가 없는’ 삶에 대한 박찬욱의 풍자 박찬욱 감독의 풍자적 스릴러 는 벼랑 끝에 내몰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일상의 불안정성을 탐구한다. 블랙 코미디와 도덕적 긴장감이 교차하는 이 작품은 사람들이 사회적·경제적 압박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그들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제도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드러낸다. 박 감독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이번 신작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2025년 8월 말 개막한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장면. 그는 신작 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이 영화제에 참석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 제공, 사진 Jacopo Salvi 한국 영화계의 거장 박찬욱 감독의 신작 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강렬한 심리 묘사와 시각적 대담함을 이어가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각본, 제작, 연출을 모두 맡은 그는 이번 작품에서 불확실성, 자동화, 도덕성의 붕괴를 다룬 블랙 코미디 스릴러를 선보였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했으며, 박 감독이 20여 년에 걸쳐 구상한 끝에 완성된 작품이다. 지난 8월,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처음 공개된 뒤, 9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관객에게도 소개됐다. 이 작품은 경제적 불안과 기술 발전이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극 중에는 해고당한 가장 ‘만수(이병헌)’와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아내 ‘미리(손예진)’가 등장한다. 는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사회의식이 가장 뚜렷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극단으로 내몰린 한 남자의 비극을 넘어, 진정한 선택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을 담아낸다. 이 이야기에 끌리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읽은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순간, ‘이건 꼭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우선 작품의 핵심이었던 비극에 매료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어쩌면 원작보다 더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저에 깔린 비극에 약간의 유머를 더하면 훨씬 매혹적인 이야기가 될 거라는 직감이 있었다. 또한 한 인간의 내면 심리를 따라가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를 함께 탐구하는, 두 가지 층위를 담은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 3차 포스터. 이 영화는 2025년 9월 17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였으며, 일주일 후 일반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국내 극장에서 개봉했다. 2025년 11월 말 기준, 전국적으로 약 300만 명의 누적 관객 수를 기록했다. ⓒ CJ ENM 어떤 장르를 염두에 두었나? 이야기의 구조만 보면 추리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어릴 적에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지만, 그런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추리소설은 대개 어떤 미스터리로 시작하는데, 그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고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시작부터 범죄를 저지르려는 한 남자가 등장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미스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이 작품은 오히려 사회 제도 속에서 점점 범죄자로 내몰리게 되는 한 평범한 사람의 심리에 관한 이야기다.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다르다. 이 작품의 내러티브는 훨씬 더 강렬하고, 집요하며, 절망적이다. 기본적으로는 비극이지만, 그 속에 깃든 부조리한 유머 덕분에 나에게는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가 영향을 주었나? 이 영화를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도끼〉 리메이크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처음부터 원작 소설에 매료된 것이었고,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는 그 이후에야 보게 되었다. 그의 버전은 톤과 정서가 완전히 달라서, 이 작품은 그 영화의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원작 소설의 또 다른 해석이라 보는 편이 맞다. 물론 당시 원작의 판권은 여전히 가브라스 감독이 가지고 있어서 제작 과정에서 약간의 조율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아내이자 프로듀서였던 미셸이 이번 영화의 제작에도 함께 참여하면서 원만히 진행되었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 이 이야기를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요즘 어떤 영화를 준비하고 있냐?”고 물으면, 나는 간단히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20년 넘게, 전 세계 어디서나 반응은 늘 같았다.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번번이 거절당했다. 미국 스튜디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작품이 만들어질 거라고 믿었다. 스튜디오들은 영화를 제대로 만드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적은 예산을 제시했다. 의견 차이를 좁히는 데 2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결국 오랜 기다림 끝에, 이 작품이 본래의 의도대로 구현될 수 있는 합의점을 찾게 되었다. 이 작품은 단지 현대 한국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디서든, 과거에도 미래에도 언제든 통할 이야기다. 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가 원작이며, 박찬욱 감독이 연출과 공동 각본을 맡았다. 주인공이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당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 CJ ENM 이번 영화에서 가장 다루고 싶었던 주제는 무엇이었나? 하나의 주제라기보다는, 서로 얽히고 겹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성과 중심의 노동, 과잉 생산성, 치열한 경쟁, 인공지능까지. 이건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인 문제다. 한국은 이 모든 글로벌 이슈가 한꺼번에, 그리고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한국이 겪는 문제들이 다른 나라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예를 들어 AI, 고용 불안, 중산층 붕괴, 남성성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사회적 질문들을 던지면서 자본주의의 단면을 비판하고, 그 너머의 더 큰 의미를 탐색한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정서는 깊은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블랙 코미디의 요소들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공허함과 비극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이 드라마의 본질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의도대로,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정리되는 감정을 느끼길 바란다. 주인공은 가족을 위해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 영화는 그 행동이 정말 가족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묻는다. 관객 각자가 이 가족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길 바란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를 것이다. 바로 그런 대화의 화두를 던지는 것이 내가 바랐던 부분이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이번에는 폭력의 강도가 훨씬 절제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폭력을 묘사하는 이유는 공포와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폭력의 공포, 그 뒤에 따라오는 고통을 드러내려면 결국 폭력적인 장면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폭력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까지도 파괴한다. 내 작품 속 폭력 장면이 유난히 아프게 느껴지고, 죄책감의 그림자를 동반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영화 속 폭력 묘사에 관해 내가 고민하는 부분이 두 가지 있다. 관객이 그 폭력 장면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폭력을 아름답게 느끼게 되는가이다. 나는 최대한 이 두 가지를 피하려 한다. 물론 나도 다른 감독의 영화를 보다가 폭력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연출의 미학적 완성도에 감탄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내 작품에서 그런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면,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것 같다. 이 영화의 코믹한 요소는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만수의 행동이 슬프면서도 동시에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모든 것을 합리화하지만, 그로 인해 가족은 오히려 무너진다. 우리는 도대체 이 모든 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묻게 되고, 그것이 단지 어리석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코미디가 필요했다. 영화는 한여름의 절정에서 시작해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는 예보와 함께 막을 내린다. 식물을 사랑하는 만수는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지나간다. 그것이 내가 원했던 배경이었다. 이는 만수가 일하는 회사 이름(처음엔 ‘태양’, 그다음은 ‘문 제지’)에서도 드러난다. 원작에는 AI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각본을 다듬어 가는 동안 세상은 변하고 있었고, AI가 현실에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다. 만수는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을 여전히 습관적으로 한다. 기계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직관’만큼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관객이 그와 함께 그 불확실한 미래를 상상하기를 바랐다. 이병헌과 손예진을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의 대부분을 이끌어가며 도덕적 갈등과 감정의 무게를 끝까지 견뎌낼 배우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병헌이 떠올랐다. 이번 작품에서 그의 연기는 남우주연상에 손색이 없을 만큼 강렬하다. 손예진의 경우, 아내 ‘미리’ 역할에는 낙관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실직한 남편을 붙잡고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 그런 기운을 가진 배우가 바로 손예진이었다. 촬영 현장 중 배우 손예진의 모습을 담고 있는 비하인드 스틸. 손예진은 극 중에서 주인공 만수의 아내 미리 역할을 맡았다. ⓒ CJ ENM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조용필의 열렬한 팬이었다. 언젠가 그의 노래를 영화에 쓰고 싶다고 늘 생각했고, 딱 맞는 순간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악을 한껏 키워 대사에 가려지지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흐르게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조용필의 명곡이 너무 많아서 어떤 곡을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고추잠자리〉가 가장 어울린다고 느꼈다. 장면에 따라 아이러니하게 들리기도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영화의 장면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곡을 정한 순간부터 편집은 몇 프레임씩 늘리고 줄이는 세밀한 조율 작업이 되었다. 기타 리프 하나, 가사 한 줄조차 배우의 움직임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게 만들고 싶었다. 영화 속 장면들은 바로 그 치열한 조율의 결과이다. 나는 어렸을 때 들었던 한국의 명곡들을 늘 영화 속에 담아냈다. 〈박쥐〉에서는 남인수의 노래들, 〈헤어질 결심〉에서는 정훈희의 〈안개〉가 그랬다. 내가 즐겨 들었던 노래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화 속에 다시 불러내고 싶다. 요즘 젊은 세대는 그런 노래들을 거의 모르는 게 아쉽다. 외국의 팝송은 지금도 어디서나 바로 알아듣지 않나. 우리 세대가 사랑했던 한국의 위대한 가수들, 작곡가들도 문화적 기억 속에 그만한 자리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은 정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묶인 채 살아가고 있는가?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사실 진정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주인공은 영화 내내 그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진실이라기보다 비겁함이 만들어낸 일종의 자기변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약함과 취약함, 결점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자기 정당화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세상의 어두운 면을 마주할 때 유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머는 우리가 잠시 한걸음 물러서서 더 명확히 바라보고, 때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일조차 버틸 수 있게 해준다. 가장 끔찍한 순간에도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본인이 실직당하는 상황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 영화 산업 역시 늘 전망이 밝지는 않다. 일자리와 안정감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은 누구나 안고 살아간다. 나는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형태는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이 극장에 모여 함께 영화를 보는 문화는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런 시대가 오더라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투자를 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계속 영화를 만들 것이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다 하더라도…. 이미 그렇게 해본 적도 있다. 방식은 바뀔지 몰라도,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마음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만수가 자신의 제거 대상인 범모(이성민)와 대립하는 장면을 담은 비하인드 스틸.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된 배우들의 연기에서 현장의 열기가 느껴진다. ⓒ CJ ENM

전 세계의 눈을 사로잡은 한국 창작 뮤지컬

Arts & Culture 2025 WINTER

전 세계의 눈을 사로잡은 한국 창작 뮤지컬 K-팝과 영화, 드라마를 넘어 최근에는 한국의 창작 뮤지컬도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2016년 초연한 이 있다. 이 작품은 제78회 토니상에서 6개 부문 상을 휩쓸면서,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 외에도 ‘국내용’이었던 작품이 ‘해외용’으로 기획돼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2025년 6월 8일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이 작품상·극본상·연출상·작사 작곡상·남우주연상·무대 디자인상 등 6개 부문을 휩쓸었다. 국내 초연의 창작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토니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 AP 연합뉴스 ‘이고트(EGOT)’는 미국 문화 산업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4개의 권위 있는 시상식을 가리키는 용어다. TV 프로그램에 주어지는 에미상, 음악 분야의 그래미상, 영화의 오스카상, 그리고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무대 예술 작품을 대상으로 한 토니상이 그것이다. K-콘텐츠는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이 오스카상을 받으며 파란을 일으켰고, 황동혁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은 2022년 에미상 6관왕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래미상은 1993년 성악가 조수미가 오페라 부문에서 본상을 받았으며, BTS가 여러 차례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여기에 더해 2025년 6월, 뮤지컬 의 브로드웨이 버전이 토니상을 받으며 K-콘텐츠가 ‘이고트’라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게 됐다. 파격적 행보 은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서로 사랑을 느끼며 겪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2016년 한국에서 초연했고, 2024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NHN링크 제공 한국 뮤지컬 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기록을 세운 은 무대에 오르는 과정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 작품은 비영리 문화예술 지원 단체 우란문화재단이 작사가 박천휴와 작곡가 윌 애런슨이 만든 초안을 2014년 발굴해 기획했다. 이듬해 리딩 공연, 트라이 아웃 공연을 시도하는 등 콘텐츠 인큐베이팅 환경이 잘 갖춰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며 구체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흥미로운 것은 2016년 뉴욕에서도 리딩 공연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크리에이티브 팀이 뉴욕대학교의 티쉬예술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하긴 했지만, 개발 단계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치밀한 개발 과정을 거쳐 토니상 수상까지 끌어낸 이 작품의 스토리는 무척 매력적이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에는 인간을 도와주는 로봇인 낡은 헬퍼봇들이 살고 있다. 어디로 갔는지 주인들은 사라지고, 헬퍼봇들은 이젠 단종이 된 탓에 고장 난 부품이나 소모품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매일 반복되는 비슷비슷한 일상 속 어느 날, 주인공인 5세대 헬퍼봇 올리버에게 이웃에 사는 6세대 헬퍼봇 클레어가 방문한다. 고장 난 충전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두 헬퍼봇들은 인간들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관계’를 형성하며,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두 헬퍼봇들은 결국 결별을 선택하게 되고, 열린 결말의 마지막 순간을 대면한다. N차 관람 이끈 팬덤 문화 한국의 뮤지컬 시장에서는 두세 달 공연 후 다음 시즌에 앙코르 무대가 꾸며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뮤지컬 환경에서 은 10년 동안 무려 여섯 차례나 앙코르 공연 시즌을 거듭하며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심지어 그 과정 중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다. 뮤지컬의 본고장인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도 그 시기 셧다운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국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은 효과적인 감염 확산 대응으로 총체적 셧다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래서 해외 유수의 언론에서는 한국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령’이 살아남은 나라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리지널 내한 공연이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완벽한 방역 통제 아래 막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물리적으로 혹독한 제한이 공연장에 적용되던 시절, 옆 좌석을 비우고 한 자리씩 떨어져 앉은 관객들은 응원이라도 하듯 뜨거운 눈빛으로 무대를 응시했고, 마지막 커튼콜에 등장한 배우들은 감동에 겨워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의 인기는 같은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는 ‘N차 관람’으로 확인됐다. N차 관객들은 공연을 보러가기 전,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2020년 첫 공연을 펼친 는 실존 인물인 폴란드의 과학자 마리 퀴리의 삶에 상상력을 더해 구성한 작품이다. 2024년, 한국 뮤지컬 최초로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현지 프로덕션으로 장기 공연을 올렸다. 라이브 제공 차이점과 공통점 은 한국과 브로드웨이 버전에 몇 가지 차이가 있다. 두 작품은 막을 올린 환경에 맞춰 각각 진화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언어다. 한국어가 영어로 바뀌며 크고 작은 변화가 더해졌다.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뮤지컬 넘버 는 브로드웨이 버전에서는 지워졌다. 개발 초기부터 관객들의 정서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해 영어 버전과 한국어 버전이 각기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후문도 있는데, 덕분에 더욱 효과적으로 객석에서 공감을 이끌어내고 소구할 수 있는 매력이 완성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극장 규모도 다르다. 한국에서는 300석 남짓한 소극장 뮤지컬로 인기를 누렸지만, 브로드웨이는 1,000석 규모의 벨라스코 극장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브로드웨이 관객들은 소극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아기자기한 맛 대신 대극장의 시원시원하고 생동감 넘치는 스케일을 통해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버전은 몇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서 화분은 무대의 오브제이자 두 헬퍼봇의 관계와 감정을 상징하는 캐릭터 역할도 맡고 있는데, 이러한 장치와 메시지를 살리기 위해 영어 단어 ‘플랜트’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어 단어 ‘화분’을 그대로 사용했다. 두 주인공이 제주도 여행에서 경험한 반딧불이 서사도 그대로 유지됐다. 숲속을 가득 채운 반짝이는 반딧불이는 두 헬퍼봇의 아름다운 한때와 소중한 추억을 상징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브로드웨이에서도 N차 관람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사실이다. N차 관람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현상인데, 이들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관람하는 자신들을 ‘반딧불이’라고 부른다. 극단 연우무대의 창작 뮤지컬 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가상의 섬에서 벌어지는 군인들의 이야기를 뭉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2011년 신인 창작자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CJ문화재단 크리에이티브 마인즈에서 처음 선보였고, 2013년 초연 후 한국뮤지컬대상에서 극본상을 받았다. 연우무대 제공 한국 창작 뮤지컬의 미래 의 성과로 인해 이제 한국 뮤지컬은 제2, 제3의 ‘해피 엔딩’을 꿈꾸는 시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원소 라듐을 발견해 남편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마리 퀴리의 일생에 상상을 더한 팩션 뮤지컬 는 그녀의 고국인 폴란드 무대로 진출할 예정이며, 푸치니의 오페라를 한국식으로 각색한 뮤지컬 는 슬로바키아로 악보와 대본이 팔려나갔다. 또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외딴 무인도에 남겨진 한국군과 북한 포로들의 해프닝을 그린 도 영미권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고, 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쇼케이스 무대를 선보이며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국 뮤지컬의 엔딩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까? 희망 섞인 미소로 대답해 본다. “어쩌면.”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를 국가 이념으로 설정하는 등 참신한 스토리와 뛰어난 연출로 2019년 초연 이래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국악 장단에 현대 음악을 결합한 뮤지컬 넘버와 화려한 안무도 압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PL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봉지의 감성

Arts & Culture 2025 AUTUMN

한 봉지의 감성 커피믹스는 뜨거운 물만 부으면 간편히 마실 수 있는 음료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대중화됐고, 현재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들이 시장에 나와 있다. 사람들의 입맛과 인식이 변화하면서 2010년대 이후 소비량이 줄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커피믹스는 인스턴트커피와 설탕, 크림을 일정 비율로 한 봉지에 넣은 제품이다. 1976년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커피믹스를 개발한 이래 현재는 맛과 건강을 고려한 다양한 종류의 커피믹스가 출시되고 있다. © 뉴믹스커피 믹스 커피는 인스턴트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넣어 조제해 먹는 방식의 커피이다. 믹스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취향의 표현이고, 또 누군가에겐 위로의 언어이다. 한때는 서열과 관계를 상징했으며, 여성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기도 했다. 그 믹스 커피를 한 봉지에 담아낸 제품, 커피믹스가 탄생했다. 모두가 표준화된 맛을 즐기게 된 순간,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커피믹스는 단지 빠르고 간편한 커피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로 감정을 포장한, 한국식 커뮤니케이션이다.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물 속에서 퍼지는 그 맛은 어떤 시대의 감성을 품고 있다. 우수한 발명품 2020년 개봉한 영화 에는 유니폼을 맞춰 입은 여직원들이 누가 먼저 믹스 커피를 타는지 속도를 겨루는 장면이 등장한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여성 사원들은 저마다 커리어 우먼을 꿈꾸지만, 8년을 일했음에도 여전히 믹스 커피 타는 일이 주요 업무이다. 영화는 코믹한 장면 뒤에 시대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런가 하면 인스턴트커피와 크림, 설탕의 비율로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은 커피 취향이 곧 정체성이던 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정체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7년 외환 위기가 닥치며 수많은 고졸 여성들이 가장 먼저 정리 해고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여성이고 고졸이라는 이유로 저부가가치 인력으로 분류된 그들이 사라지자, 믹스 커피를 타고 회의실을 정리하며 일상의 틈을 메우던 손길 또한 함께 없어졌다. 남은 직원들은 곧 그 공백을 체감했다. 특히 믹스 커피를 직접 타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바로 그 시점에 커피믹스가 해결사처럼 등장했다. 봉지를 뜯어 컵에 넣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누구나 일정한 맛을 낼 수 있는 이 표준화된 취향의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효율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그 상징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2017년 특허청이 설문 조사한 ‘한국을 빛낸 발명품 10선’에서 커피믹스가 5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보다 앞선 순위가 훈민정음, 거북선, 금속활자, 온돌 같은 역사적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작은 봉지가 지닌 사회적 파급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웃도어 아이템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왕실을 비롯한 일부 고위층만 즐기던 사치품이었다. 커피가 대중적인 기호 음료로 정착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다. 미군 보급품을 통해 인스턴트커피가 암암리에 유통되고, 다방에서도 믹스 커피를 팔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퍼졌다.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커피를 물에 타 마시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1970년에는 식품 제조 기업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인스턴트커피를 선보였다. 그리고 6년 뒤인 1976년, 세계 최초로 커피, 크림, 설탕을 한 봉지에 담은 커피믹스를 출시했다. 낱개 포장된 이 발명품은 과거 ‘빨리빨리’ 문화로 상징되던 산업화 시대 한국의 성장 속도와 정서를 담은 생활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초창기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가정과 사무실에는 각각의 유리병에 담긴 ‘커피 삼총사(커피, 크림, 설탕)’가 갖춰져 있었고, 커피를 개인의 취향에 맞춰 타 줄 인력과 사회적 여유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커피믹스는 오히려 아웃도어 아이템이었다. 사람들은 믹스 커피를 만들어 먹기 어려운 야외에서 레저 활동 중 커피믹스를 마시며 당분을 충전했다. 1980년대 들어 등산과 낚시, 야유회 문화가 확산되면서 커피믹스 소비량도 점점 증가했다. 커피믹스가 그 편리성 덕분에 인기를 얻자, 이후 여러 기업들이 커피믹스를 생산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고, 전체 커피 시장에서 커피믹스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게 됐다. 상징의 스펙트럼 커피믹스가 야외에서 실내로 들어온 건 1997년 이후였다. 잉여 인력의 부재, 급박한 노동 환경, 그리고 정수기의 대중화는 커피믹스가 업무의 기본 세팅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예전처럼 누군가의 취향을 일일이 기억해 커피를 내어줄 필요 없이, 모두가 같은 봉지로 만족할 수 있었다. 이로써 커피는 더 이상 서열과 기호의 상징이 아니라, 생존과 자기 위로의 도구가 되었다. 해외에서의 인식 변화도 흥미롭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커피믹스는 한국만의 이상한 문화였다. 에스프레소, 블랙커피, 캔 커피 중심의 시장에서 커피믹스는 지나치게 달고, 아무런 감각도 감정도 없어 보였다. 커피는 예나 지금이나 취향의 영역이고 감성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 모든 걸 생략한 듯한 커피믹스가 환영받을 리 없었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믹스커피에 우유, 시나몬 가루, 바나나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제조하여 마시는 트렌드가 불고 있다. ‘달고나 커피’가 대표적이다. 그릇에 꿀을 넣고 색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거품기로 젓다가 커피믹스를 넣고 걸쭉해질 때까지 계속 저은 다음 우유에 부어서 마신다. © 한국관광공사 하지만 2010년대 들어 한국 드라마를 비롯한 K-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외국인들은 커피믹스를 감성적인 음료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매개로 나누는 대화가 그들의 감성을 건드린 것이다. 지금은 러시아, 동유럽, 인도네시아, 베트남, 대만 등지에서 박스째 수입하는 K-푸드가 되었다. 2016년 국내 한 여행사가 외국인 관광객 약 천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과반이 넘는(53%) 외국인들이 커피믹스를 ‘가장 맛있는 한국 차’로 뽑기도 했다. 믹스 커피를 한국의 차로 보는 시선이 흥미롭다. 한편 커피믹스는 생존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2022년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한 광산이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당시 무너진 갱도에 고립된 광부들이 221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이 바로 커피믹스였다. 이들은 커피믹스를 식사 대용으로 조금씩 나눠 먹으며 생명을 이어갔고, 구조 후 스스로 걸어 나올 만큼 건강했다. 커피믹스에 함유된 당분과 열량, 카페인의 각성 효과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유용했는지를 보여준 극적인 사례다. 젊은 세대의 변화 최근 커피믹스는 다시 한번 새로운 얼굴로 나타났다. 배달 서비스 플랫폼 배달의민족 창업자로 유명한 김봉진 그란데클립 대표가 선보인 ‘뉴믹스커피’는 커피믹스를 시대감각에 맞게 재해석한 브랜드다. “커피는 원래 타 먹는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다방과 사무실을 오가던 옛 감성을 다시 불러냈다. 서울 성수동과 북촌의 쇼룸형 매장은 그 자체로 커피 문화의 회고적 감성을 재현한 공간이다. 이 브랜드의 등장은 단지 레트로 감성 때문만이 아니다. 원두커피가 처음 보편화됐을 때 사람들은 그 쓴맛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카페모카, 프라푸치노 같은 달콤한 음료가 인기를 끌었다. 이후 아메리카노의 깔끔한 쓴맛으로 점점 입맛이 이동했지만, 최근 들어 다시 달고 진한 커피가 돌아오고 있다. 크림 라테, 아인슈페너, 비엔나 라테 같은 음료의 유행은 젊은 세대의 기호 변화를 잘 보여준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뉴믹스커피 성수동 매장 앞에서 제품을 시음해 보고 있다. 2024년 론칭한 뉴믹스커피는 ‘기념품 커피’, ‘디저트 커피’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브랜드이다. 군밤 맛, 시나몬 약과 맛, 팥빙수 맛 등 획일화되었던 기존 커피믹스의 맛을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커피믹스 문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 뉴믹스커피 이러한 흐름 속에서 커피믹스는 다시 새로운 것이 되었다. 뉴믹스커피 매장을 찾는 외국인 비율이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SNS와 드라마에서 본 한국식 커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그들을 뉴믹스커피로 이끈다. 발상의 전환 측면에서는 이보다 신선할 수 없는 뉴믹스커피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커피 한 잔조차 부담스러운 요즘 젊은 세대에게 커피믹스는 새로운 감정의 언어일 수 있다. 최근에는 커피믹스를 활용한 다양한 영상 콘텐츠도 활발히 유통된다. 커피믹스로 카페라테, 칼루아, 크림커피 등을 만드는 레시피 영상이 유튜브에 쏟아진다. 커피믹스 시장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진화하고 있다. 건강과 다이어트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당분이 거의 없는 제로 슈거, 고단백, 무지방 제품 등 기능성을 더한 제품들이 등장하면서, 기존 원두커피와 스페셜티 시장 사이에서 꾸준한 수요를 견인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통계에 의하면 2022년 기준, 국내 커피 시장에서 액상 커피 판매 비중이 35.6%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커피믹스 판매량도 24.8%를 기록해 아직도 믹스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2024년에는 커피믹스 판매량이 10년 만에 증가세로 전환됐다. 2024년 기준, 동서식품이 출시하는 커피믹스의 대명사 ‘맥심 모카골드’는 연간 약 57억 개가 팔렸다. 초당 약 180개가 팔린 셈이다. 이처럼 커피믹스는 여전히 한국인의 일상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효율과 위로의 상징이던 커피믹스는 다시 한번 새로운 세대에 의해 감정의 매개체로 재해석되고 있다. 취향의 서열을 해체하고, 감정을 연결하는 한국식 커피. 그 중심에서 커피믹스는 여전히 한 모금의 여유를 내어준다.

K-팝의 최전선, 팝업 스토어

Arts & Culture 2025 AUTUMN

K-팝의 최전선, 팝업 스토어 K-팝 신에서 팝업 스토어가 성행 중이다. 기존에는 앨범 발매를 홍보하기 위한 단순한 이벤트 성격이 짙었지만, 최근에는 유수의 브랜드들과 협업해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거나 뮤지션의 세계관을 스토리텔링해 전달하는 등 콘텐츠가 창조적으로 진화하면서 팬덤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 aespa WEEK – #Whiplash_mood 〉는 에스파의 미니 5집 앨범 < Whiplash > 발매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팝업 스토어이다. 에스파의 세계관 및 앨범 콘셉트를 키네틱 아트로 재해석했으며, 공간 전체가 살아 숨 쉬는 듯한 공감각적 연출로 팬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2024년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서울 성수동에서 열렸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제 팝업 스토어가 없는 K-팝은 허전하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었다. 불과 4~5년 사이 일어난 일이다. 단기 운영되는 임시 매장으로, 상업 브랜드와 좋은 상성을 보이며 빠르게 성장한 이 새로운 마케팅 방식은 K-팝과도 궁합이 꽤 좋았다. 새것이라면 뭐든 반가운 K-팝 업계 특유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자연스럽다. 자리를 잡아도 너무 잘 잡아 이제는 “잘 만든 팝업 스토어 하나가 웬만한 타이틀곡이나 뮤직비디오보다 낫다”는 소리가 팬들 사이에서 종종 들려올 정도다. 안정감과 소속감 어느새 K-팝의 필수 요소가 되어 버린 팝업 스토어는 지난 몇 년간 K-팝을 산업으로 보는 시각 아래 활발하게 호명되었다. 특히 지금까지 없던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K-팝 산업 속에서 비즈니스 확장이나 수익 구조 다각화를 가능케 해 가치를 인정받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가수와 팬이 직접 만날 수 없었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팝업 스토어가 부쩍 성장한 점만 봐도 그렇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서는 안 되는 인류 초유의 사태 속에서, 팝업 스토어는 K-팝 팬덤이 ‘우리’로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K-팝 팝업 스토어와 일반 팝업 스토어의 차이가 생긴다. 후자가 팝업 대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그로 인해 형성된 잠재 고객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전자는 이미 탄탄하게 구성된 팬덤과의 깊이 있는 교류를 핵심으로 한다. 예를 들어 신상품을 알리기 위한 팝업 스토어를 생각해 보자. 일반 팝업 스토어는 제품의 호감도와 인지도를 높여 궁극적으로 해당 제품의 판매량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반면 K-팝 팝업 스토어는 새롭게 발매된 앨범을 통해 팬덤을 한자리에 모으고,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강한 소속감과 몰입감을 느끼게 하는 데 집중한다. 수익화는 대부분 현장 머천다이즈 판매로 이뤄진다. 2025년 3월 더현대서울에서 열린 < G-DRAGON Media Exhibition: Übermensch >는 지드래곤의 정규 3집 < 위버멘쉬(Übermensch) > 발매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미디어아트 전시다. VR, AI 기반의 음성 인터랙션, 홀로그램, 초대형 미디어 파사드 등 신기술을 기반으로 기획된 이 전시는 팬들에게 새로운 예술적 경험을 제공했다. 또한 지드래곤의 오랜 상징인 데이지꽃 조형물을 곳곳에 설치해 일관된 디자인을 완성했다. ⓒ 셔터스톡 요컨대 K-팝 팝업 스토어는 직접 만지고 경험하는 팬 행위의 가장 진보적인 형태이다. 지금껏 대표적인 K-팝 오프라인 콘텐츠로 군림해 온 콘서트와 팬 사인회 그 어떤 것도 가수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가수, 즉 IP의 힘이 유난히 강한 K-팝 산업에서 직접적인 IP 노출 없이도 이 정도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팝업 스토어가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다. 그런 점에서 K-팝 팝업 스토어는 좋아하는 뮤지션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팬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이벤트들과 비슷한 속성을 지닌다. K-팝 팝업 스토어의 서막 그동안 K-팝이 강력한 IP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펼쳐온 만큼 팝업 스토어의 원조를 찾기는 쉽지 않다. 전시와 체험, 교류와 제품 판매가 모두 이루어지는 K-팝 팝업 스토어의 속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다만 ‘오프라인에서 가수 없이 색다른 방식으로 콘텐츠를 즐기는 공간’이라는 특성을 생각하면, 2015년 서울 이태원 드로잉 블라인드에서 열린 f(x)의 정규 4집 <4 Walls> 앨범 발매 기념 전시회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당시만 해도 K-팝과 전시회를 연결한다는 게 상당히 생소했는데, 앨범 발매 전 빔프로젝터를 통해 천장을 포함한 사방 벽면에 멤버들의 티저 사진과 영상을 공개하며 화제를 모았다. K-팝의 기본적 홍보 방식인 티저 프로모션과 전시 형태를 융합한 이 행사는, 지금은 한없이 체급을 불린 K-팝 팝업 스토어의 체험판이자 프로토타입이라 할 만하다. 흥미로운 건 당시 f(x)의 전반적 아트 디렉팅을 진행한 인물이 이후 그룹 뉴진스를 만든 민희진이라는 점이다. 뉴진스는 여러 면에서 2020년대 K-팝의 변화를 주도한 아이콘으로 불리는데, 그중 브랜드와 협업해 이를 효과적으로 풀어낸 팝업 스토어의 흥행도 빼놓을 수 없다. 2022년 8월, 더현대 서울에서 열린 뉴진스의 데뷔 기념 팝업 스토어는 현재 나타나고 있는 K-팝 팝업 스토어 전쟁의 서막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어마어마한 대기 줄을 비롯해 상투적인 K-팝 머천다이즈 형태에서 벗어난 패셔너블한 디자인과 구성으로 분야를 막론한 각계각층의 큰 관심을 모았다. 뉴진스는 이후에도 디저트 브랜드 누데이크, 애니메이션 등 대중의 예상을 뛰어넘는 창조적인 협업으로 끝없이 뉴진스 붐을 이어 나갔다. 2023년 발매한 EP 발매 프로모션 관련 팝업 스토어에는 10만 명이 넘는 누적 관객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팝업’의 재정의 팝업 스토어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K-팝 그룹을 보유한 크고 작은 기획사들 모두가 분주해졌다. 가수의 사진만 활용하거나 머천다이즈 판매에만 눈에 불을 켠 팝업 스토어는 설 자리가 없어진 지 오래다. 보다 적극적으로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일례로 최근 SM엔터테인먼트와 산리오코리아가 협업한 ‘Where is KEY? with HELLO KITTY’가 눈에 띈다. 샤이니 키의 시그니처 캐릭터 복실이와 산리오 캐릭터 헬로키티가 등장해 동화 같은 스토리라인을 펼쳐낸 이 팝업 스토어는 2D와 3D라는 다른 차원의 두 콘텐츠가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뉴진스의 미니 2집 < Get Up > 발매 기념으로 열린 < 버니랜드 >는 글로벌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와 디지털 IP 플랫폼 기업 IPX가 협업해 선보인 팝업 스토어다. 2023년 7월부터 8월 말까지 서울 낙원동, 홍대, 강남 등지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됐으며 뉴진스의 정체성을 담은 특색 있는 공간 연출과 체험형 콘텐츠로 큰 화제를 일으켰다. 사진은 낙원동 악기 상가에 마련된 체험 공간. 아트포인트(Artpoint) 제공 그뿐만이 아니다. K-팝 팝업 스토어는 이제 공간도, 차원도 넘어선 곳으로 개념을 넓혀 나가고 있다. 세븐틴의 대표적인 오프라인 이벤트 ‘SEVENTEEN STREET’는 제한된 실내 공간을 넘어 한강 세빛섬이나 성수동, 압구정동 일대를 무대로 삼은, 천장 없는 거대한 팝업 스토어라 할 수 있다. 2025년 상반기 큰 화제 속에서 마무리된 플레이브의 2주년 기념 팝업 스토어 ‘Happy Plave Day’는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그룹의 특징을 십분 발휘했다. ‘직접’ 만날 수 없는 가수와 팬 사이의 한계는 팝업 스토어라는 물리적 공간과 데뷔 2주년이라는 기념일을 통해 흥미롭게 극복되었다. 멤버들의 필체가 담긴 축하 리플릿과 손 편지, 직접 그린 그림을 실물로 완성한 축하 케이크, 독자적 기술을 활용해 멤버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운영한 라이브 포토존 등 팬과 가수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로 꼼꼼하고 세심한 기획력이 돋보였다. 그렇다. K-팝 팝업 스토어의 핵심은 ‘함께’다.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시공간을 통해 가수와 팬, 팬과 가수, 팬과 팬 모두가 ‘우리는 하나’라는 인식을 더 공고히 다진다.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한 팀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유대감과 커뮤니티의 현신 앞에서 ‘팝업’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가 재정의되고 있다.

낯선 것에 쫓기다

Arts & Culture 2025 AUTUMN

낯선 것에 쫓기다 『절망의 구』 김이환 작, 숀 린 할버트 역 서펜츠 테일, 2024 368쪽, 14.99파운드 낯선 것에 쫓기다 서울의 무더운 어느 일요일 저녁, 정수는 담배를 피우러 집을 나선다. 모든 것이 평범해 보이던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의 구가 나타나 사람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지르던 이들은 순식간에 새까만 덩어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도시는 공포에 휩싸이고, 구는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사람들을 쫓아다닌다. 그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두려움은 극에 달한다. 정수는 부모님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서둘러 나서지만, 곧 자신 또한 끝없이 위협하는 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도망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는 과연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굴복하고 절망에 빠지게 될까? 이것이 바로 김이환의 『절망의 구』 속 주인공이 처한 위기다. 이 작품은 2009년 처음 출간되었으나 최근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10년이 훌쩍 지난 작품이지만, 마치 코로나19 팬데믹을 배경으로 한 것처럼 여전히 시의성을 지닌다. 좀비 영화에 익숙한 독자라면 좀비 영화와의 유사점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좀비처럼 구 또한 아무것도 개의치 않으며 거침없이, 살아 있는 자들을 집어삼키려 한다. 느리게 움직여 달아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공포는 그 압도적인 규모와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위기가 확산되고 두려움이 고조되면, 좀비 영화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류 사회의 근간이라 믿었던 문명성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남는 것은 결국 각자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뿐이다. 더 나아가 『절망의 구』에서는 좀비 영화의 공통된 주제이기도 한 미디어의 불신 문제가 드러나며, 어떤 정보가 진실인지 가려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공포와 고통은 더욱 극대화된다 한편, 구는 좀비와 다르다. 인간과 괴물 사이 어디쯤에도 속하지 않는다. 또한 좀비로 인한 세상의 종말이 흔히 바이러스의 발병이나 초자연적 현상으로 설명되는 것과 달리, 구는 완전히 미스터리다. 그 어떤 논리나 동기로도 설명할 수 없는, 철저히 낯설고 불가해한 존재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무섭고, 현대 사회의 막연한 불안과 절망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저자가 말하듯, “무언가로부터 도망치지만 정작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 바로 그러한 상태다. 『절망의 구』는 뛰어난 과학소설이 대개 그러하듯,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성찰과 비판을 담고 있다. 한국 작가가 한국을 배경으로 집필한 만큼, 의무 군복무 제도나 그로 인해 형성된 부정적 남성성 같은 한국 특유의 문화적 맥락도 담고 있다. 그러나 작품이 던지는 물음은 궁극적으로 인류 전체를 향한다. 위기 속에서 우리는 누구를 믿을 것인가? 모든 것이 붕괴되는 순간에도 우리는 품위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가? 놀라운 결말과 함께 『절망의 구』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되돌아보게 하며, 스스로에게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 『한옥, 오늘』 박나니 저, 사진 이종근 한림출판사, 2023 280 쪽, 35,000원 과거의 건축, 현재에 다시 살아나다 박나니의 『한옥, 오늘』은 한옥, 즉 한국의 전통 가옥에 대한 저자의 애정 어린 시선을 한층 더 확장한 책이다. 첫 번째 책이 주거 공간으로서의 한옥을 다루었다면, 이번 책은 공공 및 상업 공간으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가 직접 한옥을 찾아가 주인들과 나눈 대화에서 얻은 통찰은, 이종근 사진작가가 담아낸 예술적 건축 사진과 어우러져 한층 더 깊이 있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이 책에 담긴 한옥들은 휴가용 숙소나 호텔, 미술관과 전시장, 바와 레스토랑 등 다양한 공공·상업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중에는 스위스 대사관, 테스트 키친, 예술가의 작업실과 쇼룸처럼 다소 특별한 용례도 눈에 띈다. 소개된 한옥들은 전통 건축을 레노베이션한 경우도 있고, 새로 지어진 건물도 있으며, 때로는 한국적 건축 요소와 서구적 감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경우도 있다. 각 건축물을 들여다볼수록 분명해지는 사실은, 한옥이 한국 전통의 중요한 일부분이면서도 결코 과거에 묶여 있는 화석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한옥은 한국적 정신이 살아 숨 쉬는 형태로 지금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소유자들은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문화적 책임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전통을 오늘의 삶 속에 되살리려 애쓴다. 『한옥, 오늘』은 오래된 건축이 품은 새로운 가능성을 통해 독자의 눈을 열어줄 것이다. 단편선 순간들, 오소리웍스, 미러볼뮤직, 2024 기이하고 아름다운 실험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데뷔 앨범 는 올해 2월,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음반’ 부문을 수상했다. 한국대중음악상은 한국의 그래미 어워즈를 표방하며 2004년 탄생한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상이다. 음악을 면밀히 살펴보는 깐깐한 전문가들에게 최고의 음악적 평가를 받은 것이다. 리더인 단편선(본명 박종윤)은 21세기 한국 인디음악을 이해할 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키워드다. 대학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한 그는 미학과 철학에도 심취한 바 있는데,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들을 좋아해서 예명을 ‘단편선’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음악은 문학적이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음악 비평 커뮤니티에서 논객으로 활약하던 그는 2012년 첫 번째 정규 음반을 발표했다. 이후 2013년에는 4인조 밴드 ‘단편선과 선원들 ’을 결성해 ‘어쿠스틱 호러 판타지 하드록’이라 불릴 만큼 아방가르드 색채가 물씬한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고, 2017년 밴드 해체 후 최근 몇 년 동안은 독보적인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는 뮤지션으로서 그의 복귀작이다. 그가 여러 명의 연주자들과 결성한 새로운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정규 1집이기도 하다. 록, 재즈, 클래식 등이 뒤섞인 이 음반은 그동안 그의 음악이 ‘뒤틀린 아름다움’을 지향했던 것과 달리 ‘아름다운 뒤틀림’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첫인상이 뒤틀림이었다면 후자의 방점은 이제 아름다움에 있다. 그래서인지 발라드곡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친절한 느낌의 곡들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하지만 적당한 불친절이 없다면 단편선이 아니다. 몇몇 곡들은 편안하게 감상하기 어려운 긴장감을 조성한다. 타이틀곡 ‘음악만세’는 연주곡에 가깝지만, 중반부에 등장하는 연설이 뜻밖의 감정적 진폭을 만들어낸다. 그는 한 노동 운동가의 연설을 삽입해 기막힌 콜라주 같은 음악적 연출을 선보였다. 찰스 라 슈어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임희윤 음악평론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Arts & Culture 2025 AUTUMN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서도호는 자신이 거주했던 집의 표면을 재구성한 직물 조각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집, 물리적 공간, 감정의 전이, 기억, 개인성 및 집합성의 문제를 조각, 드로잉, 영상 작업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풀어낸다. Do Ho Suh, “Rubbing/Loving Project: Seoul Home,” 2013-2022. Installation view, The Genesis Exhibition: Do Ho Suh: Walk the House.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and Victoria Miro. Repurposing supported by Genesis © Do Ho Suh. Photo © Tate (Jai Monaghan) ‘집’이란 무엇인가? 설치미술가 서도호의 작품은 이처럼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동양화를 전공한 뒤 1990년대 초반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래로, 작가는 독일, 영국 등 여러 나라로 거점을 옮기며 작품 활동을 지속해 왔다. 그에게 이주는 그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감각과 존재 방식의 전환이었다. 이에 집이라는 공간은 정체성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문화적 충돌과 경계의 문제를 탐색하는 조형 실험의 장이 되었다. 그간 작가가 세계 곳곳에서 머물렀던 집이 어떻게 해체되고 재구성되었는지 그 여정을 따라가 보자. 기억의 재창조 서도호는 언제나 ‘집’의 개념을 조각처럼 다루어 왔다. 그러나 그의 집은 하나의 단단한 형태로 고정된다기보다 유동적인 존재로서 등장한다. 작업 초기 탄생한 작품 (1999)은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서울의 전통 한옥을 옥색 한복 천으로 정교하게 재현한 결과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업이 휴대 가능한 형태로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목 역시 전시 장소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전시가 열릴 때마다 작품에는 새로운 도시의 이름이 덧씌워졌는데, 이로 인해 현재는 제목에 뉴욕, 볼티모어, 런던, 시애틀 등의 지명이 추가되어 있다. 동일한 구조물이 각기 다른 지역의 빛, 공기, 시간과 접촉하며 여러 층위를 얻게 된 것이다. 결국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집에 대한 기억 역시 끊임없이 번역되고 재창조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장소성과 정체성의 관계를 복합적으로 조망하는 서도호 특유의 방법론이자, 그가 구축해 온 노마드적 삶의 기반이기도 하다. Do Ho Suh, “My Homes.” 2010.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Victoria Miro and STPI - Creative Workshop & Gallery © Do Ho Suh Photo by Hyunsoo Kim 이러한 방향성은 미술관 내부에서 외부로도 확장되었다. 2018년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런던 리버풀 스트리트역 인근에 설치되었던 은 고가도로 위에 마치 추락한 듯 보이는 한옥과 대나무 정원으로 시민들의 이목을 끌었다. 낯선 문화와 환경이 조우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시각화함으로써, 작가는 해외 생활 중 경험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등의 대립을 직관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이질적 공간에 불시착한 집의 모습은 이후 작업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이 시대의 모든 이주자들이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즉, 서도호의 손끝은 개인의 기억을 짓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집’이라는 은유를 통해 문화적 틈새를 가로지르기에 이른다. Do Ho Suh, “Nest/s.” 2024. Installation view, The Genesis Exhibition: Do Ho Suh: Walk the House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and Victoria Miro. Creation supported by Genesis © Do Ho Suh. Photo © Tate (Sonal Bakrania) 행위와 감정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10월 26일까지 진행하는 개인전 는 앞서 살펴본 그의 시선이 더욱 명확히 펼쳐지는 장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 ‘집을 걷다’는 한국 전통 가옥을 짓는 대목장이 해체 가능한 구조물을 다른 장소로 옮길 때 사용하는 표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전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유년기의 경험에 기반을 둔다. ‘수묵 추상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서세옥 화백은 서울 성북동에 창덕궁 건물 중 하나를 모델로 한 한옥을 지어 거주했다. 아버지가 대목장과 함께 목재를 짜맞춰 세운 이 집은 자연스럽게 아들 서도호의 추억이 깊이 뿌리내린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걷는 집’의 개념은 시각적 재현을 넘어 촉각적 기록의 방식으로도 나아간다. 대형 설치 작품 (2013~2022)에서 서도호는 자신이 살던 성북동 집의 표면을 더듬으며 오랜 시간 축적된 기억의 결을 종이에 옮겼다. 이 작업은 한옥의 외벽을 닥종이로 감싼 뒤, 흑연을 문질러 질감과 구조를 천천히 드러내 완성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작가와 장소 간 정서적 관계가 되살아나는 과정은 작품 제목에도 묻어나 있다. 제목에서 반복되는 ‘러빙’은 한국어 자음 ‘ㄹ’의 발음에서 착안해 문지르기(rubbing)와 사랑하기(loving)라는 두 단어를 포갠 것으로, 행위와 감정을 나란히 호출한다. 또한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작가가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의 공간은 종종 다른 공간의 기억을 함께 품는다. 이는 물리적 장소가 과거의 삶과 감각을 저장하고, 그것이 또 다른 장소로 옮겨질 수 있다는 믿음과도 맞닿는다. 테이트 모던의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2024)는 그러한 인식을 구현한 작품이다. 작가가 머물렀던 여러 도시의 방 구조가 얇은 직물로 봉합된 이 설치물은 관객의 이동을 전제로 완성된다. 안팎의 경계를 흐리는 이 통로를 직접 걸어서 지나가며, 관객은 아득한 한때의 시간을 통과한다. 비슷한 관점에서 (2024)은 작가 가족의 현재 런던 자택을 큰 틀로 두되, 이전 집의 공간 구성을 내부에 병치한다. 조명 스위치나 수도꼭지처럼 사소한 사물의 위치는 실제 쓰였던 높이와 장소를 충실히 따르며, 색상은 각 도시의 기억을 구획 짓는 시각적 기호가 된다. 와 마찬가지로 관람객들은 작품 안을 거닐며 작은 요소들을 하나씩 되짚어보게 되는데, 마치 일기장을 천천히 넘기듯이 한 가족의 삶을 구성해 온 궤적을 조용히 따라간다. 런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서도호. 그는 뉴욕과 런던,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설치미술가이며 동시대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작가 중 하나다. 고정된 공간 개념을 초월하여, 시공의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는 노마드적 공간 개념을 탐구한다. © Gautier Deblonde, DACS 2025 다시, 집 이제 처음의 질문을 다시 꺼내어 본다. 서도호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인가? 국경을 넘어 이어진 여정 속에서, 작가는 익숙해진 집을 분해하고 그 집을 낯선 땅에 다시금 내려놓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실과 천, 종이로 지어진 그의 집은 언제나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 내부에는 시대와 세계, 나아가 이동의 순간이 응축되어 있다. 반복되는 이주 속에서도 자신만의 집을 되살리는 행위는 작가에게 있어 장소를 기억하는 하나의 의례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조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접히고 옮겨지는 각각의 작품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집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집이란 정해진 목적지가 아니라 계속해서 탐구해야 할 기나긴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어떤 이야기를 품은 채 어디로 향하게 될까? Do Ho Suh, “Perfect Home: London, Horsham, New York, Berlin, Providence, Seoul” (detail). 2024. Polyester, stainless steel. 455 x 575 x 1237 cm.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and Victoria Miro. Photo by Jeon Taeg Su © Do Ho Suh Do Ho Suh, “Home within Home.” 2019. Polyester fabric, stainless steel. 744 x 827 x 805 cm. Installation view, Incheon International Airport, Seoul, Korea. 2020. © Do Ho Suh. Courtesy of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Photo by Jeon Taeg 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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