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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 & Culture

마음을 잇는 음식, 잔치국수

Arts & Culture 2025 SPRING

마음을 잇는 음식, 잔치국수 한국의 식문화에서 국수를 이용한 음식은 일상식이 아니었다. 외국 사신에게 예우를 갖추기 위해 대접하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잔치에서 유래하여 이름을 얻은 잔치국수다. 과거의 잔치국수는 재료와 제조법이 현재와 상이하지만, 축원의 의미를 담은 음식이라는 점은 여전하다. 잔치국수는 한국의 대표적인 국수 요리이다. 삶은 소면 위에 각종 고명을 얹고, 진하게 끓여낸 멸치 육수를 부어 먹는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밀이 매우 귀한 식재료였다. 한반도의 기후 환경이 밀 재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918~1392)에는 밀을 중국에서 수입해 먹었고, 조선 시대(1392~1910) 에는 상대적으로 기후가 서늘하고 건조한 북쪽 지방에서 늦가을에 파종해 초여름에 수확하는 겨울밀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 수량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전에는 주로 메밀이나 녹두, 콩 같은 곡물을 곱게 갈아 면을 뽑았다. 그런데 이런 재료들로 면을 만들면 찰기가 없이 뚝뚝 끊어진다. 식감도 거칠고 색도 거무튀튀하다. 이에 비해 밀은 글루텐 함량이 높아 길고 가늘게 면을 만들 수 있다. 색도 뽀얗고 표면도 매끈하다. 색감과 형태가 말끔하고 세련되니, 옛날 사람들은 밀가루 국수에서 순결하다는 인상까지 받았다. 지금이야 밀국수가 흔하디흔하지만, 그것을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매료될 수밖에 없는 등장이자 존재였을 것이다. 국수 건조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자연 건조 시 온도와 습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진은 경주의 대표적 로컬 브랜드인 아화전통국수의 소면 건조 장면. ⓒ 아화전통국수 아화전통국수의 김영철 대표가 건조된 소면을 알맞은 길이로 재단하고 있는 모습. 아화전통국수는 2010년대 말 현대식 제면 기계를 도입했지만, 아직까지도 90% 이상은 예전과 같은 전통적인 수작업으로 국수를 만든다. ⓒ 아화전통국수 잔치의 주인공 고려 시대,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가 작성한 견문록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사신이 경내에 들어오면 10여 종의 음식을 제공하는데, 면식(麵食)을 우선하였다”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조선 시대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불교 행사 때 주요 손님들에게 유과, 두부탕, 과일 등과 함께 국수를 대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세조(재위1455~1468) 때는 명나라 사신에게 접대하는 면을 여러 고을에서 장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언급도 있다. 선조(재위 1567~1608) 때는 국수를 장만하기 쉽지 않으니, 사신에게 주는 음식으로 국수 대신 밥을 대접하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이처럼 국수는 사신이 오거나 나라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상에 올리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민가에서는 혼례나 회갑연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나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잔치의 주인공들이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축복해 주러 온 손님들이 다 같이 국수를 나누어 먹었다. ‘잔치국수’라는 명칭은 이러한 풍속에서 유래한다. 오늘날 미혼 남녀에게 주변에서 “언제 국수 먹게 해줄래?”라고 묻는 것은 언제 결혼하느냐는 의미의 우회적 표현이다. 기계화된 제면법 잔치국수의 사전적 정의는 “따뜻한 맑은장국에 국수를 말고 갖은 고명을 얹은 음식”이다. 더 정확히 정의하자면, 멸치를 넣고 장시간 끓여낸 육수에 밀가루로 만든 가늘고 긴 국수인 소면(素麵)을 넣은 음식을 지칭한다. 한마디로 멸치 육수와 소면의 조합이 잔치국수의 핵심이다. 잔치국수가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현재의 제조법대로 잔치국수를 먹게 된 것은 불과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전통 국수 요리에서 면은 재료나 형태가 오늘날처럼 단 몇 가지로 제한되지 않았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재료는 메밀 가루였고, 채소나 고기를 채썰어 가루를 묻힌 후 익혀서 면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때로는 꽃잎을 면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면은 언제부터 먹었을까? 19세기 초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생활백과사전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왜면(倭麵)’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는 국수형 화채의 일종으로, 더운 여름철 소면을 삶아 오미자 우린 국물에 말아 시원하게 먹었던 계절 음식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이 편찬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왜면을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밀가루를 기름과 소금으로 반죽해 실처럼 늘어뜨려 말렸는데, 이 제조법은 현재의 소면과 유사하다. ‘왜(倭)’는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소면은 조선 후기 일본에서 유입된 식재료일 가능성이 높다. 1930년대 신문 기사에도 ‘일본 국수 소면’이라는 표현이 등장해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국내에서 소면을 대중적으로 만들어 먹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 강점기로 추정된다. 제아무리 글루텐 함량이 높다고 한들 면발을 손으로 길고 가늘게 뽑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소면은 고도화된 제면기의 등장과 함께 발전했다. 1920년대 신문에는 ‘최신형 제면기 특가 판매’ 같은 광고가 자주 실렸는데, 이를 통해 그 당시 제면기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40년 조선일보 5월 8일자 기사에는 쌀 배급이 불안정해지자 대용식을 장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고, 이에 따라 소면이 인기를 얻어 주문이 쇄도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눈치 빠른 상인들이 쌀 장사를 접고 밀가루와 국수 장사에 대대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언급도 있다. 이후 제분기와 제면기 등 설비를 갖춘 국수 공장들이 전국 곳곳에 생겨났고, 기계화된 제면법이 활성화되었다. 1930년대 초반 출발한 식품 제조 회사 풍국면(豊國麵)은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국수 공장이라는 명예를 지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국내 최대 규모의 기업 삼성이 1938년 창업된 삼성상회(三星商會)와 이곳의 대표 상품 ‘별표 국수’에서 비롯됐다는 유래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지금과 같은 잔치국수의 전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피난민들이 멸치 어업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몰렸으며, 미국으로부터 잉여 농산물인 밀을 대량으로 원조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밀가루로 뽑은 면을 뿌연 멸치 국물에 말아 한 끼 식사를 해결했다. 마음을 위로하는 음식 오늘날 잔치국수는 더 이상 특별한 날에만 먹는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니다. 가정에서는 한 끼를 간단히 때우기 위해 끓여 먹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은 분식집이나 포장마차에서 저렴한 잔치국수를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곤 한다.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서양식 뷔페에 밀려 겨우 구색을 갖추는 정도로 퇴색했다. 그럼에도 정성껏 끓여낸 멸치 육수에, 찬물에 힘껏 빨아 전분기 없이 뽀얀 소면이 담긴 잔치국수가 목전에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한국인은 없을 터이다. 잔치국수의 입지는 예전만 못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인생의 어느 순간 잔치국수로 인해 위로를 받은 기억이 하나쯤 있으리라. 뜨끈한 국물이 대접 가득 낙낙히 담겨 있다. 똬리를 튼 국수를 젓가락으로 살살 풀어 입에 넣으면 면발이 미끄러지듯 입안으로 빨려든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국수에 구수한 멸치 향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흡사 갯가에 나와 있는 듯하다. 눈앞에 푸르른 바다가 펼쳐진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잔치국수는 지금은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혼례나 회갑연 같은 잔칫날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이런 풍속에서 ‘잔치국수’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 셔터스톡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

Arts & Culture 2025 SPRING

단아하고 소박한 아름다움 ‘나주반’은 전라남도 나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반이다. 김춘식은 1940년대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춘 나주식 소반의 명맥을 이은 장인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우연한 기회에 나주반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지금까지 약 70년 동안 나주반을 지키고 있다. 국가무형유산 소반장 기능보유자인 김춘식 장인은 맥이 끊어져 사라질 뻔한 나주 소반의 명맥을 잇고 발전시켰다. 그는 수백 개의 헌 상을 해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이를 통해 나주 소반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소반(小盤)은 나무로 만든 작은 밥상을 말한다. 좌식(坐式) 주거 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식생활부터 각종 의례에 이르기까지 여러 용도로 음식을 담아 운반하던 부엌 가구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소반을 사용해 왔다. 5~6세기경 제작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여러 유형의 소반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으며, 신라(B.C 57~A.D 935)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도 타원형 소반이 있다. 조선 시대(1392~1910)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면 국가에 소속되어 상을 만드는 별도의 기관이 있었고, 제작 과정이 분업화되어 다양한 형태로 생산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반의 종류는 산지, 형태, 용도에 따라 약 60여 종으로 분류된다. 특히 생산지에 따라 지역색이 뚜렷해 황해도의 해주반(海州盤), 전라도의 나주반(羅州盤), 경상도의 통영반(統營盤) 등으로도 구분한다. 해주반과 통영반은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성이 뛰어난 반면, 나주반은 소박한 짜임새로 견고함과 간결함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상은 우리 문화의 근간이 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어머니들은 상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아이의 탄생을 기원했고, 삼신상을 차려 안전한 출산을 빌었다. 출생 후 백일에는 백일상, 돌에는 돌상을 차려 아이의 건강과 행복을 염원했다. 자라면서는 생일상, 결혼 때는 혼례상을 거쳐 나이 육십에 이르러 환갑상을 받고, 죽은 후에도 오래도록 제사상을 받는다. 이처럼 상은 출생 이전부터 죽음 이후까지 삶을 관장하고 이어주는 도구였다. 원형 호족반. 소나무. 36 × 36 × 26 cm. 소반은 생산지, 형태, 용도, 재료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사진은 상판이 둥그런 호족반이다. 호족반의 다리는 위는 굵고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다가 끝부분이 위로 살짝 올라간 형태이다. 호족반의 재료는 주로 느티나무, 소나무, 은행나무를 사용한다. 솔루나리빙 제공 앉아서 받는 밥상 소반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술을 지닌 장인을 소반장(小盤匠)이라고 한다. 김춘식(Kim Chun-sik, 金春植) 장인은 일제강점기 이후 거의 사라진 전통 나주반을 복원해 냈다. 재료로는, 주로 여자들이 음식상을 차려서 운반한다는 점을 배려해 무늬는 아름다우나 무거운 느티나무보다는 가볍고 단단한 은행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목공예의 기본은 소반이지요. 임금님도 소반에 먹고, 양반이나 서민도 소반을 사용했습니다. 머슴에게도 개다리소반에 밥을 차려주었죠. 거지가 밥 빌러 와도 소반에 차려내는 것이 우리의 인심이었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단아한 소반에 오르면 초라해 보이지 않습니다.” 김 장인은 소반의 아름다움 이전에 소반에 담긴 문화를 강조한다. 서양식 식탁은 음식을 먹기 위해 사람이 식탁으로 가야 하지만, 소반은 앉아서 기다리면 음식이 사람에게 온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한 사람으로서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존중의 의미이다. “식탁에 다 같이 둘러앉아 밥 먹는 것도 좋지만, 늦게 들어온 식구에게 밥상을 차려 들여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넓은 식탁에서 혼자 먹는 것과 일인용 소반을 받아서 먹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지요.” 반월반. 은행나무. 43 × 31 × 28 cm. 반달 모양의 상판에 세 개의 평평하고 넓적한 다리가 달린 소반이 반월반이다. 다른 상과 합체하여 쓰거나 벽면에 붙여 장식용으로 사용하곤 했다. 나주반전수교육관 제공 당초문 나주반. 은행나무. 50 × 36 × 29 cm. 나주반은 대개 간결하게 제작하지만, 더러는 운각에 문양을 넣기도 했다. 짜임새가 견고해 상판이 휘거나 갈라지는 일이 거의 없어 상대적으로 큰 소반이 많은 편이다. 상판이 널찍해서 책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나주반전수교육관 제공 헌 상을 스승으로 김 장인이 소반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다소 의외다. 1936년생인 그는 같은 연배의 장인들이 10대에 도제(徒弟)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순전히 먹고 살기 위해 20대 초반 나주 영산포에 공방부터 냈다. 누구 밑에 들어가 기술부터 배운 게 아니라, 기술자를 고용해 소반을 만들어 팔았던 것이다. “목수 일을 하던 팔촌 형님이 연장을 물려주며 ‘상을 만들면 먹고 살만은 하다’고 해서 무작정 공방부터 열었어요. 그때만 해도 잘살든 못살든 어느 집이나 장롱은 없어도 상 없는 집은 없었으니까요.” 당시 솜씨 좋은 목수들은 전국을 떠돌며 더 나은 조건의 공방에 머물며 일하곤 했다. 그는 그런 기술자들을 채용해 곁에서 배워가며 상을 만들었다. 단순한 목물상(木物商)이던 그가 맥이 끊긴 나주반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공방을 차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받은 특별한 주문 때문이었다. “한번은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왔어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제사상을 사정상 잃게 됐는데, 그게 나주에서 만든 상이라는 거예요. 그것과 똑같이 만들어 달라며 자세한 그림과 함께 선금까지 내고, 얼마가 걸리든 부탁한다고 했어요.” 아직 기술을 갖추지 못한 그는 나주반의 마지막 장인으로 알려진 이운연(李雲衍 1895~1972) 선생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하지만 선생은 고령으로 이미 손을 놓은 상태였다. 이운연은 일제강점기 조선 예술에 매료됐던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과 그 예술』(1922)에서 극찬했던 소반장 이석규(李錫奎 1866~1940)의 아들이다. 결국 그는 서울 손님이 부탁한 숙제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참에 전통 나주반의 원형을 알아보기로 하고, 꾀를 내서 헌 상을 수리한다고 알리고 다녔다. 이윽고 집집마다 창고에 묵혀둔 오래된 상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방에서는 기술자들이 막상을 만들고, 정작 사장인 그는 공방 옆 헛간을 빌려 헌 상을 해체하고 보수하고 조립하는 일에 매달렸다. “웬만큼 먹고사는 집에 한두 개쯤은 있었던 옛날 상들이 엄청 들어왔어요. 그것들을 받아 연구해가며 고치기를 십여 년 하다 보니 나주반을 직접 짤 수 있게 된 거죠. 내 스승은 바로 그 헌 상들입니다.” 배움의 한을 풀다 전통 소목이 그렇듯이 소반도 모든 이음 부분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는다. 먼저 나무판에 본을 대고 밑그림을 그린 후 재단해 상판을 만들어 대패질한다. 김 장인은 대패질이야말로 상의 품질을 가름할 첫 단추라고 강조한다. 그다음 상의 테두리 부분인 변죽을 만드는데, 이는 상판의 휘어짐과 갈라짐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준다. 해주반과 통영반이 상판을 파내서 변죽을 만드는 반면, 나주반은 변죽을 따로 만들어 상판에 홈을 파서 끼운다. 변죽을 돌려서 끼운 다음 상판과 다리를 연결하는 운각(雲脚)을 조각해 상판에 고정시키는데, 이때 접착제 외에 대나무못을 따로 만들어 박아서 고정하는 것도 견고함을 자랑하는 나주반만의 특징이다. 나주반의 운각은 보통 구름 문양이나 당초문이 많이 쓰인다. 상다리를 만들어 운각에 끼운 다음 다리와 다리 사이의 수평을 잡아줄 족대(足臺)를 연결하고 중간 가락지(中帶)를 만들어 다리 사이에 둘러준다. 상판을 대패질하고 있는 김춘식 소반장. 재단한 부재를 대패질한 다음 사포로 문질러 결을 다듬으면 상판이 완성된다. 대나무로 만든 못은 상판에 운각을 고정시킬 때 사용한다. 하나의 운각에 보통 4개의 대나무 못이 쓰인다. 백골 상태의 소반이 완성되면, 옻칠을 하고 말려서 사포로 문지르기를 7~8회 반복한다. 김 장인은 특히 옻칠에 자부심을 내비친다. 옻칠은 습기에 강해 나무를 보호하는 기능적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은은하고 아름다운 광채가 돌게 해준다. 이렇게 상 하나를 완성하는 데 40~60일 걸린다고 한다. 그는 재현해 낸 전통 나주반 70점을 모아 1977년 광주학생회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일반에 공개했다. 이 전시는 당시 방송 뉴스에 소개될 만큼 화제가 되었고, 나주반을 세상에 알린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공방은 존폐 위기에 내몰리기 일쑤였다. 전통 공예 장인들 다수가 그렇듯이 옛것은 지키기가 더 어렵다. 한때 직원이 열여덟이던 공방은 차압을 당하거나 작품이 경매에 넘어가기도 했다. “좋은 나무가 나오면 빚을 내서라도 무조건 사놔야 하는데, 그 나무들은 십 년 이상 묵혀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쌓인 나무만큼 빚인 거죠.” 그는 1986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유산 나주반장으로 지정되면서 공방을 접었고, 이후로는 전수 교육과 제작에만 힘을 쏟고 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소학교만 겨우 마친 그는 나주반을 만나면서 배움의 한을 풀었다고 한다. 2011년엔 오랜 염원이던 작품 전시실과 공방을 갖춘 나주반전수교육관이 세워졌고, 마침내 2014년 국가무형유산 소반장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전승에 대한 고민도 일찌감치 해결했다. 4남 1녀 중 막내아들인 김영민(Kim Young-min, 金鈴民)이 국가무형유산 전승교육사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그에게 소회를 묻자 눈시울이 붉어지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일등 공신은 제 아내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어요. 진짜 소중한 보물은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가 봅니다.” 2024년 12월 9일, 그와 62년을 해로한 이상순(李相順) 씨가 세상을 떠났다. 다양한 형태로 조각된 운각들이 벽에 걸려 있다. 나주반의 운각은 구름 문양과 당초 문양이 가장 많이 쓰인다. 상판의 형태와 상관없이 운각은 보통 두 쌍이 들어간다.

한강의 ‘질문하는’ 소설들

Arts & Culture 2025 SPRING

한강의 ‘질문하는’ 소설들 한강(Han Kang)은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Red Anchor)」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묵직한 주제 의식으로 국내 내로라하는 문학상을 수차례 받으며 주목받아 온 이 작가는 매 작품마다 인간의 폭력성과 존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녀는 한국 문학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는 대표적 작가로 자리매김했으며, 2024년 한국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2024년 12월 10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메달과 증서를 받고 있다. 한강은 비극적 상황과 마주한 인간의 고투와 존엄을 유려하고 시적인 문장으로 그려내는 작가다. ⓒ 연합뉴스 노벨상은 세계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기에 자국민의 수상을 바라기는 어느 나라 사람들이든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 상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착은 별스러운 구석이 있다. 유난한 교육열과 성취욕으로 유명한 한국인들은 어쩌면 그 연장선에서 노벨상 수상을 염원하며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노벨상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가장 지명도가 높고 대중적 관심이 쏠리는 평화상과 문학상에 대한 열망이 특히 높다.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갈증은 가셨지만, 한국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노벨 문학상을 다음 목표로 삼아 왔다.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가 각각 1968년과 1994년에 이 상을 수상하고, 중국 작가 모옌이 2012년 수상자가 되면서 노벨 문학상을 향한 한국인들의 기대 심리는 한층 커졌다. 한반도와 근접한 두 국가의 작가들이 이 상을 품에 안게 되자 어쩐지 노벨상이 가시권에 들어온 듯한 느낌과 더불어 가까운 이웃 국가들의 문학적 성취에 부러움과 질투가 뒤따랐다. 노벨상으로 상징되는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민간 기관인 대산문화재단과 국가 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이 오랫동안 한국 문학 작품의 번역과 해외 출간을 지원해 온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다. 역사적 트라우마 마침내 2024년 노벨 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이 한국 작가 한강을 호명했다. 오랜 기다림의 끝이요 숙원의 달성이었다. 한국인들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을 원어로 읽는다”는 말로써 한국 문학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기쁨을 표현했다. 한강의 노벨상 선정 발표 시점에 그녀의 소설들은 28개 언어권에 걸쳐 82권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 통계는 앞서 언급한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학번역원의 노력을 보여주는 지표인 셈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 이것은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사유다. 이 기관이 한강의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덧붙인 자료에는 이렇게 좀 더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한강의 작품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동양적 사유와 긴밀하게 연결한다. 한강은 역사적 상처들과 보이지 않는 제약들에 작품으로 맞서며 매 작품마다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한강은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지니고 있다.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한강은 현대 산문의 혁신자가 되었다.” 이 글에서 밝힌 것처럼 역사적 트라우마를 상대로 한 고투는 한강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다. 특히 두 장편 『소년이 온다(Human Acts)』(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I Do Not Bid Farewell)』(2021)는 각각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Gwangju Uprising)과 1948년 제주 4․3 사건(Jeju uprising)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 그 사건들이 개인에게 가한 폭력과 상처를 특유의 시적인 문체에 담은 작품들이다. 2024년 노벨상 시상식 부대 행사의 일환으로, 한강 작가가 스톡홀름 외곽에 위치한 린케비(Rinkeby) 지역의 다문화학교에 방문해 아이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 Nobel Prize Outreach, Photography by Nanaka Adachi 한강은 등단 초기에는 주로 개인의 슬픔과 실존적 고통을 즐겨 다루었고, 2007년에 낸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에서는 육식 문화와 가부장제 같은 사회적 차원의 억압과 폭력을 문학적 도전 대상으로 삼았다. 이 작품은 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주인공 영혜를 둘러싸고 영혜의 남편과 아버지, 형부 등이 가하는 유무형의 폭력, 그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사코 육식을 거부한 채 차라리 나무가 되기를 꿈꾸는 영혜의 모습을 통해 폭력의 본질과 위험성을 환상적 필치로 그렸다. 데버라 스미스가 번역한 이 소설의 영어판이 2016년 세계적 권위를 지닌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하면서 한강은 일약 글로벌 작가로 떠올랐다. 이어서 영어로 번역된 소설 『흰(The White Book)』이 2018년 다시 한번 같은 상의 최종 후보에 오르고, 2023년에는 『작별하지 않는다』가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강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은 한층 높아졌다. 근원적 질문 한강의 주제 의식은 개인의 아픔에서 사회적 억압 쪽으로 나아갔으며, 여기에서 다시 역사적 차원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증언이 있다. 문학평론가인 정과리(Jeong Gwa-ri)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강의 노벨상 수상 결정 이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2010년 무렵 대학원 제자였던 한강이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이러했다. “앞으로 다큐멘터리 쪽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이러한 발언 이후에 쓰였다는 점에서 정 교수의 증언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물론 두 작품이 비록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기는 했지만, 과거에 벌어졌던 사건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와는 거리가 멀고, 어디까지나 문학적 가공과 형상화를 거친 작품들이기는 하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의 문학적 승화의 바탕에는 아무래도 해당 사건을 기억하고, 유예된 애도를 이어 가려는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 해야 할 것이다. 『소년이 온다』의 중심 인물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학살에 희생된 열다섯 살 소년 동호와 그의 친구 정대, 그 누나 정미이다. 그런데 동호와 정대의 주변 인물 중 살아남은 이들이 화자가 되어 당시 상황과 이후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은 이 작품의 일차적 동기가 기억과 애도라는 것을 알게 한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라는 작품 속 유명한 문장에 그 동기는 시적으로 압축되어 있다. 이 문장의 일인칭 대명사는 일차적으로는 동호와 함께 도청 상무관에서 시체 수습 일을 했던 은숙을 가리키지만, 그녀 말고도 사태에서 살아남은 다른 이들, 더 나아가서는 소설을 읽는 모든 독자들 역시 그 범주에 포함될 만큼 보편성을 지닌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군사 쿠데타와 폭력 사태를 경험한 튀르키예나 아랍 독자들이 이 소설을 자신들의 이야기로 읽었다는 독후감이 그 점을 확인시킨다. 『소년이 온다』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폭력과 저항, 희생과 기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어 세계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이 소설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고 그것이 이 작품의 가치와 의미를 더 높인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설에 삽입된 이 문장은 광주 5․18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한 대목에서 출발해 스페인 내전과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학살 등 인류사의 비슷한 경험들을 관통하는 근원적인 질문이라 하겠다. 한강은 자신의 소설을 가리켜 ‘질문의 소설’이라고 했는데, 『소년이 온다』를 읽는 일은 독자들이 소설 속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2021년 문학동네에서 발간한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 2023년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이다.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하며 한국 문학의 입지를 한 단계 확장한 소설 『채식주의자』. 2024년 출판사 창비가 출간 15년 만에 새로운 장정으로 선보였다. 2014년 작 『소년이 온다』는 전 세계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었고, 2017년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았다. 공감과 실천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도에서 벌어진 군경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루었다. 작품 앞부분에서 소설가로 등장하는 경하는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뒤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소설은 경하와 시각 예술가 인선의 우정에서 출발해 인선의 어머니 강정심의 투쟁으로 무게중심이 옮겨 간다. 강정심은 제주 4․3 당시 잡혀가 실종된 오빠의 행방을 찾고자 평생을 분투했는데, 독자들은 그 과정에서 연약한 한 여성이 강인한 역사적 주체로 부각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이 세 작품과 함께 2011년 작 『희랍어 시간(Greek Lessons)』이 비교적 여러 나라에 소개되어 있는데, 힘든 일을 겪으며 말하는 기능을 상실한 여성과 점차 시력을 잃어 가는 남성이 서로의 취약점을 알아보고 위안과 힘을 주고받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 소설 역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실천이라는 한강 문학의 큰 주제를 다루었다 하겠다.

전쟁이 남긴 푸짐한 맛, 부대찌개

Arts & Culture 2024 WINTER

전쟁이 남긴 푸짐한 맛, 부대찌개 부대찌개는 한국전쟁 이후 생겨난 음식이다. 전쟁 이후 세 끼는 고사하고 한 끼도 제대로 먹기도 힘든 가난했던 시절 등장한 부대찌개는 푸짐한 양으로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선사했다. 양만이 아니었다. 서양의 식재료를 한국인의 손맛으로 풀어낸 맛도 일품이었다. 김치, 고추장 등의 한국 식재료와 햄과 소세지, 베이크드빈 등의 서양 식재료를 더해 만든 부대찌개는 동서양의 식문화 조합이 돋보이는 음식이다. 한 국가의 식문화가 고유성을 확립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동한다. 기후, 토질 등이 선천적 요소라면,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재해 등은 후천적 요소다.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엔 전쟁이 있다. 전쟁이 전 세계 식문화를 바꾼 사례는 넘치고도 남는다. 끓는 물에 각종 채소와 소고기, 양고기 등을 넣어 살짝 익혀 먹는 샤브샤브는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가 세계 정복에 나서면서 퍼진 음식이다. 나폴레옹이 질 좋은 식량 보급품 마련을 위해 개발을 독려해 태어난 게 통조림이다. ‘부대’에서 시작한 맛 한국에도 이와 유사한 음식이 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 생긴 부대찌개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커다란 상흔을 남겼다.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체제가 공존하는 땅이 됐다. 남한엔 종전 후에도 미군이 의정부, 파주, 평택(송탄) 등 여러 지역에 주둔하게 된다. 부대찌개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바로 이 미군 부대와 관련이 있다. 부대찌개는 육수에 햄, 소시지, 베이컨, 베이크드 빈스, 다진 고기, 김치 등을 넣고 고추장으로 맛을 낸 매콤한 양념을 섞어 끓인 음식이다. 여기에 라면까지 넣으면 감칠맛이 두 배가 된다. 조선시대엔 없었던 부대찌개는 어떻게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 되었을까. 부대찌개 원조집 중 하나로 알려진 의정부 오뎅식당의 역사를 들추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오뎅식당의 창업주는 1960년부터 포장마차에서 부대찌개를 팔았다. 창업 초창기부터 부대찌개란 메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뎅식당 누리집에 있는 기록을 보면, 당시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던 이가 가져다준 햄과 소시지, 베이컨으로 볶음 요리를 만들어 팔았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단골들은 밥과 함께 먹을 만한 국물 요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주인장은 고민 끝에, 기존에 팔던 볶음 요리에 물을 붓고 김치와 고추장 등을 넣어 찌개를 만들었다. 부대찌개가 탄생한 것이다. 고기 맛과 진배없는 소시지나 햄, 베이컨은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매콤한 국물은 밥을 말아 먹기에 충분했다. 단박에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들이 몰렸다. 오뎅식당이 인기를 끌자, 인근에 부대찌개 식당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의정부 부대찌개 골목’이 생겨난 사연이다. 2009년, 이 지역은 ‘의정부 부대찌개 거리’로 지정됐다. 부대찌개 명가들이 몰려있는 지역 대부분은 미군 부대 인근이다. 경기도 의정부, 동두천, 평택(송탄), 전북 군산, 서울 용산 등에는 맛이 조금씩 차이 나는 부대찌개 식당들이 즐비했다. 한편, ‘존슨탕’이라고도 불렸다. 1966년 방한한 미국 대통령 린든 베인스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1973) 의 이름을 땄다는 설이 유력하다. 부대찌개가 처음 만들어진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부대찌개 거리. 매년 이 거리에서 부대찌개 축제가 열린다. ⓒ 의정부시 상권활성화재단 맛을 완성하는 재료 서양에선 소시지나 햄을 구워 먹거나 빵 사이에 넣어 먹는다. 이걸 국물에 넣어 익혀 국물과 함께 먹는 일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한국인에게 국물 요리는 식사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부대찌개의 넉넉한 국물 안에서 익은 소시지나 햄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럽다. 또 소시지나 햄 특유의 기름진 맛이 국물에 스며든다. 여기에 베이크드 빈즈와 김치야말로 부대찌개의 간판 얼굴이다. 풍미를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시지와 햄의 쫀득한 식감에 지칠 때쯤 만나는 푹 익은 콩 요리는 혀의 쉼터가 되어줬다. 보드라운 질감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맛이다. 푹 익은 매콤한 김치는 부대찌개의 맛을 진두지휘는 장군 역할을 한다. 김치가 맛이 없으면 제아무리 다른 재료가 좋아도 부대찌개 특유의 맛이 안 난다. 식당에 따라선 라면이나 두부를 넣기도 한다. 치즈가 올라가는 식당도 있다. 라면은 탄수화물만이 줄 수 있는 넉넉한 포만감을 제공한다. 숟가락으로 들어 올릴 때마다 쭉쭉 늘어지는 치즈는 별미다. 치즈를 넣어 독특한 맛을 내는 한식이 부대찌개뿐이겠는가. 닭갈비, 등갈비 요리, 떡볶이 등 우리 전통 한식에 색다른 맛을 내려고 할 때 종종 출동하는 게 치즈다. 푸짐한 양과 다채로운 토핑, 감칠맛이 일품인 부대찌개는 김치찌개, 된장찌개 못지 않은 인기 메뉴이다. ⓒ 셔터스톡 특색 있는 부대찌개 노포 한국에서 부대찌개 명가는 어디일까. 부대찌개 식당은 동네마다 3~4개 이상 있을 정도로 많다. 프랜차이즈 부대찌개 식당도 전국에 퍼져있고 편의점에만 가도 시판 부대찌개 제품이 있다. 하지만 탄생 역사를 새기며 먹을 만한 곳은 역시 노포다. 더구나 부대찌개는 지역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 ‘OOO파’ 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선 ‘의정부파’부터 살펴보자. 이 파의 수장은 3대째 맛을 이어오고 있는 오뎅식당이다. 양념이 이미 진하게 배여 있는 볶음 요리에서 출발한 찌개다.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베이크드 빈스가 들어가지 않는 게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담백한 맛이 장점으로 꼽힌다. 의정부 부대찌개에 견줄만한 상대는 ‘송탄파’다. 그런데 현재 ‘송탄’은 행정구역상 없는 지역이다. 1995년 평택시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송탄식 부대찌개의 가장 큰 특징은 육수를 사골로 우린다는 점이다. 사골 육수라서 전체적으로 맛이 진하고 걸쭉하다. 치즈도 올라간다. 소고기 다짐육과 대파 등 고기와 채소가 한데 어우러져 풍미를 그윽하게 한다. ‘최네집 부대찌개’와 ‘김네집’, ‘황소집’, ‘땡집’ 등이 이 지역 부대찌개 노포로 알려져 있다. ‘최네집 부대찌개’는 1969년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당시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던 주인장에게 권유해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가네’는 주문 시 이 가게만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소시지와 햄 추가는 첫 번째 주문에서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이미 졸아든 육수에 추가한 소시지와 햄이 짠맛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라면을 넣는 시간도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반쯤 끓었을 때 넣어 먹어야 면의 익힘과 맛이 가장 좋다고 한다. ‘황소집’도 한우 사골로 육수를 우린다. 다른 송탄파 부대찌개에 견줘 덜 맵다는 평이다. ‘파주파’는 부대찌개 양대 산맥인 ‘의정부파’와 ‘송탄파’에 견줘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지만, 채소가 다른 지역 부대찌개에 비해 많이 들어가 팬층을 확보했다. 쑥갓이 푸짐하게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사골 육수가 아니라서 국물이 상대적으로 담백한 편이다. ‘원조 삼거리부대찌개’가 이 지역 대표 노포다. 5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1990년대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정미식당 부대찌개’도 이 지역 부대찌개 강자다. ‘군산파’는 소고기로 육수를 내는 게 특징이다. 마치 평양냉면집처럼 얇게 썬 소고기가 올라간다. 1984년 문 연 ‘비행장정문부대찌개’가 이 지역 부대찌개 노포다. 독특하게 햄버거도 판다. 부대찌개와 햄버거를 함께 먹는 여행자가 많다. 서울은 부대찌개 강자가 많은데, 그중에서 용산 이태원에 있는 ‘바다식당’을 으뜸으로 친다. 이곳은 1970년대부터 영업해온 곳으로, 메뉴판에 부대찌개 대신 ‘존슨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부대찌개는 한국인의 창의력이 반영된 한식이다. 시대의 참혹한 현실에 조응해 탄생한 부대찌개. 사람들은 여전히 이 얼큰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으로 과거 역사의 상처를, 오늘날 고단한 삶을 위로받고 있다. 박미향(Park Mee-hyang, 朴美香) 음식 저널리스트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임영웅과 영웅시대

Arts & Culture 2024 WINTER

임영웅과 영웅시대 임영웅(林英雄 Lim Young-woong)의 서사는 단순한 성공의 이야기를 넘어섰다. 그의 노래는 음률을 넘어 대중의 삶에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으며, 팬덤은 그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퍼뜨리는 등불이 되어주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따뜻한 공동체는 우리에게 진정한 영웅이 무엇인지 새삼 일깨운다. 임영웅의 팬은 대부분 중장년 층이다. 이들은 팬덤 활동을 통해 공동체를 만들어가며, 봉사와 기부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한다. ⓒ 물고기뮤직, CJ ENM 일본에서 새롭게 형성된 대중음악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국의 ‘트로트’는 임(사모하는 사람)과 고향을 잃은 아픔과 그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 당대인의 큰 호응을 얻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트로트가 한국 대중음악의 한 장르이면서 한국 전통 창법과 일본, 유럽,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결합한 장르로 소개되었다. 부침을 겪으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은 트로트는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 장르로 자리하고 있다. 영웅의 탄생 요즘 국내 트로트의 대세는 단연코 임영웅이다. 그는 2016년 디지털 싱글 < 미워요 >로 데뷔한 그는 2017년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 아침마당 >의 ‘도전 꿈의 무대’에서 5연승을 하며 이름을 알리더니, 2020년 TV조선의 트로트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본격적인 전성기의 문을 열었다. 이후 이듬해 발매한 <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My Starry Love, 我如同星光般的爱) >가 MBC 음악 프로그램 < 쇼! 음악중심(Show! Music Core, Show! 音乐中心) >에서 1위를 차지함으로써 독보적인 인기를 입증했다. 트로트 곡이 음악 프로그램에서 정상에 오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한국 최대 음원 플랫폼인 멜론에서 누적 스트리밍 100억 회를 달성했는데, 이는 BTS에 이어 두 번째이고, 솔로 가수로는 최초다. 그의 공연 실황을 담은 영화 <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은 지난 2024년 8월 28일 개봉한 이후 357,858명의 관객수를 기록했다. 창간 20주년을 맞이한 스타뉴스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과 함께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그는 ‘21세기 가장 사랑받은 트로트 가수’ 1위에 올랐다. 막강한 팬덤을 거느리며 이른바 ‘임영웅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여타 트로트 가수들과 차별화된다. 콘서트 공연 실황을 영화로 담은 < 임영웅 |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 > 포스터 ⓒ 물고기뮤직, CJ ENM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국민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할 당시 임영웅의 감미롭고도 부드러운 노래는 불안한 많은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 내일은 미스터트롯 > 방송 당시 실시간 국민 투표 7,731,781표에서 전체 득표수의 25%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이루어낸 성과이니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때의 유행인가 했는데 그 인기가 벌써 몇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데다 오히려 날로 높아가니 일시적인 신드롬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영웅의 일대기를 닮은 삶 임영웅의 출현은 이름 그대로 영웅의 탄생이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그의 개인 서사는 많은 사람에게 연민과 공감의 감정을 불러왔다. 임영웅의 서사는 영웅의 일대기 구조와도 닮아있다. 영웅의 일대기를 비범한 탄생, 고난과 성장, 조력자의 도움, 위기 극복 후 승리자가 되는 것으로 볼 때,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임영웅의 개인 서사를 설명하는 데 이러한 영웅의 일대기가 유효하다. 모든 영웅의 서사에서 나타나는 고난과 역경을 임영웅의 성장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일차적 고난은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임영웅의 나이 5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임영웅의 가족은 큰 시련을 겪었다. 경연 당시 임영웅은 아버지가 잘 불렀다는 배호(裵湖 Bae Ho)의 1969년 리메이크곡 로 대중의 큰 공감을 받았는데, 노래에 개인적인 서사가 더해져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더해 그는 긴 무명 시절이라는 고난을 겪었다. 가요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음식점 서빙부터 공장, 마트, 편의점 등에서 일하며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는데도 한 달 수입이 30만 원이었고, 데뷔 이후에도 겨울에 군고구마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고난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었는데, 발라드에서 트로트로 주 장르를 바꾸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그에겐 모험이면서 동시에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거라는 말을 증명하듯, 그는 오디션을 통해 실력은 물론이고 성실함과 겸손함까지 보여주며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인 고전적 영웅과 달리 현대의 영웅은 꾸준한 노력과 인내를 통해 성공을 이룬다. 오디션이라는 경쟁적 시스템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임영웅은 노력과 열정으로 성공을 이루어낸 현대의 영웅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해야 할 게 있다. 바로 임영웅이 영웅으로 우뚝 서는 데 도움을 준 조력자다. 그가 영웅이 될 수 있던 건 조력자 덕분인데, 그 조력자가 바로 임영웅의 팬이라 할 수 있다. 중장년층의 버팀목이 되다 현재 그의 공식적인 팬카페 ‘영웅시대’의 회원 수는 20만 명을 넘었다. 임영웅의 팬은 아이돌의 팬 못지않게 충성도가 높다. 임영웅 팬의 특징은 여타 트로트 가수들의 팬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전 세대에 걸쳐 다양한 연령대가 고루 분포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역시 주축은 50대와 60대의 중장년층 여성들이다. 중장년층의 여성들은 중년 이후에 찾아오는 갱년기나 자녀가 독립하여 집을 떠난 후 양육자가 느끼는 슬픔이나 외로움을 뜻하는 ‘빈 둥지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임영웅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텅 빈 가슴에 어느 날 들어온 임영웅은 그들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버팀목이 되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실제로 임영웅의 팬 중 많은 이들이 소위 ‘팬질’을 시작하면서 우울증과 불면증이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아무 의미와 즐거움을 찾을 수 없던 그들은 팬 활동을 하며 존재 이유를 찾고 자신처럼 고립된 여성들과 연대하며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고립에서 연대로, 소외에서 공감으로 나아가며 ‘다시’ 살기를 시작한 셈이다. 중장년층 여성들의 정신 건강을 책임지고 모든 가정의 화목과 평화에 이바지하였으니, 그의 업적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하다. 2024년 5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콘서트 현장. 이 날 콘서트에는 그의 팬인 ‘영웅시대’ 약 10만 명이 함께 했다. ⓒ 물고기뮤직, CJ ENM 물론 이는 단지 임영웅의 팬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다른 가수의 공연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중장년층의 여성들은 자신의 스타를 위해 연계하고 연대한다. 그런데 임영웅의 팬이 여타 팬들과 다른 점은 일단 그 규모 면에서 우리나라 1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다른 가수가 아닌 임영웅을 선택하였을까? 임영웅의 개인적인 서사가 지닌 힘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그가 보여주는 노래와 태도가 팬들의 공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기존 트로트와 비교할 때 그는 비장하거나 비극적인 걸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몸짓이나 과잉된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창법에서 그는 담담과 덤덤 사이를 오가며 말하듯이 노래한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대중에게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2020)나 (2021) 같은 노래에는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으며 허세를 부리는 남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노래, 창법, 태도 등에서 ‘부드러운 남성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주효하였다. 또한 임영웅의 팬은 기부와 봉사 활동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부의 형태도 다양하여 청소년 자립 지원 기부, 장애인 가정에 기부, 소아암 환아를 위한 기부 선행을 이어가며 팬덤의 선한 영향력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임영웅의 인성과 실력,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팬들이 만드는 수많은 미담은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그래서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결국 임영웅이란 이름은 한 개인의 성공을 넘어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희망이 되어 가고 있다.

석탄산업이 진 자리에 눈꽃여행을 피운 정선

Arts & Culture 2024 WINTER

석탄산업이 진 자리에 눈꽃여행을 피운 정선 정선은 사계절 모두 매력이 넘치는 고장이지만, 그중에서도 겨울 여행에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검디검은 저탄장(貯炭場)과 대비되는 순백색의 눈, 그리고 구름까지 벗 삼아 걷는 트레킹, 거기에 전국 최대 규모의 정선 오일장 등 토속적이면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산촌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강원도 정선군(旌善郡)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57년 3월 9일 열린 함백역(咸白驛) 개통식 때였다. 한국 정부를 대표해 이종림(李鍾林) 교통부장관과 김일환(金一煥) 상공부장관이 참석했다. 그런데 손님이 더 있었다. 월터 다울링(Walter C. Dowling) 주한미국대사와 왕둥위안(王東原) 주한자유중국대사가 그들이었다. 궁벽한 오지에 위치한 역 개통식에 주한 외국 대사들까지 참석했다. 그 이유는 함백역의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석탄산업의 중심지 함백역은 물론 당시 이 지역을 관통했던 함백선(咸白線) 철도는 주민 이동을 돕는 교통수단이기도 했으나, 주된 용도는 석탄 운반용이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석탄은 전기를 만들고, 공장을 돌리고, 학교를 운영하고,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난방에 필수 불가결인 에너지원이었다. 정선은 지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No. 1’ 에너지의 공급처였다. 정선이 있었기에 지금의 발전이 가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정선은 민영 탄광의 중심지였다. 한국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東原炭座) 사북(舍北)광업소를 비롯해 삼척탄좌(三陟炭座) 정암(淨岩)광업소, 자미원(紫味院)탄광, 묵산(墨山)탄광 등 한창 때는 36개에 달하는 탄광들이 오랜 기간 활황을 이어왔다. 전국적인 엄청난 석탄 수요는 전에 없던 호황을 가져오기도 했다. 전국 택시 최고의 황금 노선이 정선 사북에 있다는 말이 돌았고, 한때 한 전자제품 대리점 기준 가장 많은 판매량을 자랑했던 곳도 이곳이었다. 심지어 “지나다니는 개도 1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던 곳이 정선이다. 구공탄 시장의 이름은 구멍이 9개인 연탄에서 유래했다. 시장 곳곳에서 구공탄과 광부를 테마로 한 다양한 예술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980년대 중후반 들어서였다. 유가가 안정되는 데 반해 석탄 채굴 비용은 나날이 증가하고, 석탄 수요는 감소가 예상되는 시점이었다. 결국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이 도입되었다. 채산성이 맞지 않는 탄광은 폐광을 유도하는 조치였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347곳에 이르렀던 탄광 대부분이 1990년대를 지나며 문을 닫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태백(太白) 장성(長省)광업소가 2024년 9월 폐광됐고, 2025년에는 삼척(三陟) 도계(道溪)광업소가 문을 닫는다. 그 이후 한국 탄광은 민간이 운영하는 삼척 경동(慶東)탄광 단 한 곳만 남을 예정이다. 예술공간으로 되살아난 석탄 광산 그렇다고 광산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한국인 특유의 기질은 산업 대전환으로 버려진 공간마저도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켜 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삼탄아트마인(SAMTAN ART MINE)이 대표적인 사례다. 삼탄(三炭)은 삼척탄좌의 줄임말이고, 아트는 말 그대로 예술이다. 1964년부터 2001년까지 무려 38년 가까이 운영되다 문 닫은 삼척탄좌 정암광업소를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낸 것이다. 독특한 것은 옛 산업 흔적은 최대한 보존하면서 그 위에 예술을 덧입혔다는 점이다. 아트 마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이다. 삼탄아트마인은 1964년부터 2001년까지 운영됐던 삼척탄좌 시설을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국내 첫 예술광산 시설이다. 제일 먼저 돌아볼 곳은 삼척탄좌 시절 종합사무동으로 썼던 삼탄아트센터본관이다. 일단 공동 샤워실부터가 압도적이다. 1천 명이 넘는 광부들이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대형 샤워실이다. 천정에는 네 방향으로 한 번에 물을 뿜어낼 수 있는 샤워기가 붙어 있다. 그 아래로 다양한 현대미술과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최근까지 다른 광산에서 석탄을 캐내던 광부의 모습을 찍은 사진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다. 검게 변한 작업화를 씻던 세화장과 작업복을 빨던 세탁실, 전체적인 기계설비를 관장 운영했던 종합운전실 등도 갤러리로 변신했다. 옛것과 새것, 산업시설과 예술 작품이 한데 어우러지니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한쪽에는 삼척탄좌의 영화로웠던 과거를 실제 채굴 도구와 당시의 사진, 자료 등을 통해 보여주는 박물관도 있다. 본관 뒤쪽에 있는 건물에는 레일바이뮤지엄(Rail by Museum)이 있다. 삼탄아트마인 입구에서 보이는 53m 높이의 육중한 철탑이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이다. 그 안에는 2기의 수직 권양기(捲揚機)가 설치되어 있다. 권양기는 캐낸 석탄을 지상으로 끌어올리거나 광부들이 수직 갱도를 오르내릴 때 사용하던 일종의 산업용 엘리베이터로, 한 번에 광부 400명씩, 석탄은 4분마다 20톤을 운송할 수 있는 시설이다. 권양기 바로 아래에 있는 지름 6m의 수직갱도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깊이 가늠이 안 될 정도다. 큐레이터에 따르면 수직갱도의 깊이는 지표면에서 땅속으로 무려 653m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서울의 롯데월드타워 높이가 556m이다. 중국 상하이타워가 632m,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아브라즈 알 바이트가 601m, 프랑스 파리 에펠탑은 324m 라고 하니, 수직 갱도의 깊이가 그제야 가늠이 된다. 그 앞에 서 있자니 지금의 한국을 일궈낸 ‘땅 속의 산업 전사들’이 경험했을 엄청난 지열과 습도, 그리고 끝 모를 공포감이 느껴지는 듯 하다. 금방이라도 레일 위를 움직일 것 같은 광차(鑛車, mine tub)와 컨베이어, 수직 갱도의 철 구조물과 강철로프 등 유기적으로 움직이던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두었다. 삼척탄좌 장암광업소의 옛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이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 되어 커다란 감동을 준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와 비슷한 공간이 하나 더 탄생할 예정이다. 옛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 들어서는 사북탄광문화공원이 그것이다. 2025년 상반기 개관을 목표로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구름도 탄식하며 넘는 길 삼탄아트마인과 사북탄광문화공원이 역사 유산을 활용해 예술과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경험할 수 있는 곳도 있다. 과거 석탄을 운반하던 길인 ‘운탄고도(運炭高道)’이다. 겨울 눈꽃 산행으로 인기 있는 함백산을 오르고 있는 등산객 운탄고도는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뚫은 고지대 도로’라는 뜻으로, 실제로 길이 지나는 곳의 평균 해발고도가 546m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만항재의 해발고도 1,330m를 따 공식 명칭은 ‘운탄고도1330’이다. 운탄고도는 정선을 포함해 크게 4개 지자체를 지난다. 정선 서쪽의 영월에서 시작해 정선과 태백을 지나 동해변에 위치한 삼척으로 이어지는 장장 173km가 넘는 길이다. 전체 9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핵심은 정선을 지나는 4코스와 5코스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에 걸맞게 석탄을 운반하던 당시의 흔적이 잘 남아 있고, 석탄산업 합리화정책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자연 회복 속도도 빠른 곳이어서다. 먼저 4코스는 정선 예미역(禮美驛)에서 출발해 꽃꺼끼재(화절령 花絶嶺)까지 이어지는 28.76km 구간이다. ‘운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이지만, 지금은 천혜의 트레킹 코스라 해도 될 만큼 걷기 좋은 길이다. 특히 전지현(全智賢 Gianna Jun)과 차태현(車太鉉Cha Taehyun)이 주연한 영화 (2001)에 나오는 소나무가 있는 타임캡슐공원에서 새비재(鳥飛峙)를 오르다 보면 주변 풍광 덕에 트레킹의 묘미가 한껏 깊어진다. 평균 9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길로 403m에서1,197m로 고도가 꾸준히 높아진다. 함백산 만항재는 한국에서 차를 타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도로다. 덕분에 고생스럽게 산을 오르지 않아도 편하게 설국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5코스는 꽃꺼끼재에서 만항(晩項)재까지 이어진다. 꽃꺼끼재를 지나자마자 있는 도롱이(도룡뇽)연못은 1970년대 석탄 채취로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생겼다. 이후 광부 남편을 둔 아내들이 연못에 사는 도롱뇽에게 남편의 무사귀환을 빈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연못 물이 빠지면 갱도가 침수됐거나 무너졌다는 뜻일 테고, 그러면 도롱뇽은 물론 광부들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데서 유래한 이야기일 것이다. 5코스 길이는 15.7km로, 천천히 걸어도 6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해발고도 1,067m에서 한국에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 1,330m 만항재까지는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고도가 점점 높아진다. 꽤 힘이 들 것 같지만, 오른쪽 산 밑 경관을 바라보면서 힘든 줄도 모르고 걷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4코스든 5코스든 운탄고도는 공통점이 있다. 세계 여느 트레킹 코스와 다르게 경사가 완만하고 표면이 평탄하다는 점이다. 애초 트레킹 루트로 개발한 것이 아니라 석탄 운반을 위해 대형 트럭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길이다 보니 그렇다. 그래서 트레킹만이 아니라 마운틴 러닝이나 산악자전거(MTB) 등을 즐기는 이들에게도 더없이 훌륭한 여행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노르딕 스키는 물론 눈썰매를 갖고 와 즐기는 여행자들도 있다. 또 중간중간 넓은 대지가 있어 텐트와 침낭 등을 구비해 걷는 백패커들의 성지로도 이름이 높아지고 있다. 과거 맑은 날에는 흩날리는 석탄 가루로 하늘과 땅이 까맸고, 비가 오면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는 말 그대로 진창길로 변했던 곳이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석탄 나르던 운탄(運炭)고도에서 구름(雲)도 탄(歎)식하며 넘는 길, 즉 운탄고도(雲歎高道)로 위상이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겨울에 운탄고도를 걷고 있노라면 발 위에는 흰 구름이, 발 아래는 흰 눈이 소복하게 덮여 있어 온천지가 하얗게 빛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병방치 전망대에서는 한반도 모양을 한 섬 둘레를 동강 물줄기가 감싸 안고 흐르는 비경을 만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부활시킨 전통 명란젓의 맛

Arts & Culture 2024 WINTER

아버지와 아들이 부활시킨 전통 명란젓의 맛 부산의 로컬 기업 덕화푸드(Deokhwa Food)는 전통 방식의 명란젓을 되살려내, 명란 종주국의 위상을 되찾은 것으로 유명해졌다. 2011년 수산식품 분야에서 최초로 명장 칭호를 받은 창업주 장석준(Jang Sug Zuen, 蔣錫晙, 1945~2018) 회장의 뒤를 이어 현재는 아들 장종수(Jang Jong Su, 蔣宗洙) 대표가 2대째 덕화푸드를 이끌고 있다. 덕화푸드의 장종수 대표가 명란젓을 활용한 음식들로 상을 차리고 있는 모습. 그는 기업 부설 연구소 설립과 학문적 연구를 통해 명란의 역사와 가치를 조명하는 한편 현대적 레시피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특히 부친 장석준 회장과 함께 오랫동안 잊힌 전통 명란젓 제법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명태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생선이다. 명태의 알집을 명란이라고 한다. 명란에 소금을 뿌려 삭힌 것이 명란젓인데, 오랜 세월 한식 밥상에 한몫을 해온 전통 음식이다. 잘 삭힌 젓갈은 ‘밥도둑’이라고 했던가? 갓 지은 밥에 참기름으로 양념한 명란젓 한 토막을 올려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명란은 그 자체로도 맛있지만, 소금 역할을 해서 음식의 풍미를 높이기에 요리에도 활용된다. 주로 샌드위치, 파스타, 각종 안주류에 쓰이며 동서양의 경계 없이 맛의 세계를 증폭시킨다. 명란젓은 400여 년 전 조선에서 시작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으로 건너가 발전했다. 전 세계 명란 생산량의 80%를 일본이 소비하기 때문에 일본 음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원조는 한국이다. 명란젓이 일찍이 조선 시대 왕실과 민가에서 두루 즐기던 흔한 반찬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사료에도 나온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 승정원일기(Diaries of the Royal Secretariat, 承政院日記) >는 조선 시대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서 각종 행정 업무를 기록한 일지인데, 여기에 보면 1652년 강원도 진상품으로 명태란(明太卵)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명란에 대한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제조법에 대한 최초의 기록물로는, 1820년경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가 쓴 수산물 도감 < 난호어목지(Nanhoeomokji, 蘭湖魚牧志) >가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명태 산지인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가 북한에 편입되면서, 이후 무분별한 남획과 수온 상승 등으로 명란은 서서히 우리 밥상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일본식 명란젓이다. 전통 명란의 부활 이 땅에서 사라졌던 조선식 명란젓을 되살려낸 회사가 있다. 명란 전문 기업 덕화푸드는 1993년 부산에서 수산 가공 유통업으로 시작해 2000년도부터는 오로지 명란 한 품목만을 생산해 오고 있다. 창업주 장석준 회장은 1970년대 역수입된 일본식 명란의 제조법을 전수받은 초기 세대의 기술자이다. 그는 우리의 전통 제조법을 접목해 발전시킨 점을 인정받아, 2011년 고용노동부 수산 제조 부문에서 최초의 대한민국 명장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이 부문 유일한 명장이다. 장 명장은 식품 기준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일본에서도 실력을 입증해 일찍부터 일본 수출길을 열었다. 2008년 말부터는 7년간 편의점 브랜드 세븐일레븐으로 유명한 일본 최대 유통 기업 세븐앤아이홀딩스에 PB(자체 브랜드) 제품을 전량 수출했는데, 이는 세븐일레븐 그룹 역사상 명란 PB 제품의 제조를 해외에 의뢰한 첫 사례이다. 덕화푸드가 위치한 부산 감천항의 국제수산물도매시장(Busan International Fish Market)은 수산 물류 및 유통의 중심지로, 전 세계 명란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거래된다. 현재 국내산 명란은 사라졌지만, 러시아 어장에서 오는 배가 이곳을 수출 통로로 사용하는 덕분에 부산이 명란 산지와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 러시아산이 70%, 미국산이 30%인 냉동 명태알은 전량 일본과 한국이 수입한다. “최고의 명란젓 비결은 첫 번째가 우수한 품질의 원물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좋은 명란은 선홍빛을 띠고 알이 탱글탱글하죠. 2018년부터 전 세계에 유통되는 최상급 명태 알집은 저희가 전량 수매하고 있습니다. 선사(船社)들이 깜짝 놀랄 정도죠.” 부친에 이어 가업을 잇고 있는 장종수 대표의 말에서 제품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전통 방식의 조선 명란젓은 일반 명란젓에 비해 발효 기간이 더 길고 염도가 높으며 쫀득하다. 깊은 풍미를 내기 위해 품질 좋은 항아리에서 숙성시키는데, 잘 발효된 명란젓에서는 은은한 향이 풍긴다. 숙련된 기술자들 명란젓 제조 과정은 크게 해동, 염지(鹽漬), 숙성 단계로 구분한다. 냉동 상태의 알집은 적정 온도를 유지하도록 설계된 공간에서 해동을 거친 후 일정 농도의 소금을 뿌려 절인다. 원료 상태에 따라 소금과 물의 양을 조절하고 온도를 달리하는 염지 과정에는 숙련된 경험치와 과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소금물에 절인 알집은 숙성 과정을 거쳐 맛을 내는데, 이때 소금 외에 청주를 넣으면 백명란이 되고, 소금과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으로 조미하면 양념 명란이 된다. 염지와 숙성 과정을 거친 명란은 알의 성숙도, 입자, 색상, 형태 등을 살펴서 등급을 나누고 검품 후 상품화된다. “명란은 잘 삭은 해산물 향이 있어야 합니다. 싱싱한 비린내가 살짝 나면서 알알이 톡톡 터질 때 나는 풍미가 중요하지요. 이 같은 명란 입자는 염지 과정에서 결정됩니다.” 워낙 예민한 명란 특성상 덕화푸드의 깐깐한 위생 공정도 업계에서 인정받는 자랑거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내세우는 것은 숙련된 기술자 중심의 시스템이다. “일부 생산 라인은 기계로 자동화되었지만, 매일 원료에 따라 염지할 배합액을 조절하고, 명란의 등급을 나누는 후반 작업은 숙련된 안목이 아니면 안 됩니다. 20년 이상 숙련된 기술자들이야말로 저희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이죠.” 염지와 숙성 과정을 끝낸 명란은 등급을 나누는 선별 과정을 거쳐 상품화된다. 이 후반 공정은 언뜻 간단해 보이지만, 오랜 경험과 숙련된 안목이 필요하다. 덕화푸드에 10년, 20년 넘게 장기 근속한 기술자들이 많은 이유다. 명장 아버지와 명인 아들 장종수 대표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2006년 부친의 부름을 받고 덕화푸드에 합류했다. “한국환경공단에서 공적자금 운용 업무를 하면서 유학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어요. 평소 힘든 내색 한번 안 하셨던 아버님이 임대에서 벗어나 자가 공장을 세우고는 힘들어 하셨어요. ‘함께 해보자’는 말씀에 바로 내려왔습니다.” 부친이 그에게 주문한 과제는 당시 전적으로 일본 수출에만 의존하던 명란젓의 국내 시장 개척이었다. 그는 먼저 6개월간 일본의 앞선 생산 시스템을 배우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명란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식 명란젓은 소금을 적게 넣고 가쓰오다시와 맛술 등을 넣어 절입니다. 짜지 않은 대신 단맛이 많지요. 요즘 우리가 먹는 명란젓은 이러한 저염식 절임 제조법이 역수입돼 우리 입맛에 맞게 정착한 것입니다. 옛날 맛을 잊지 않은 아버님은 평소 전통 명란젓을 상품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하셨습니다.” 2009년 부자는 명란업계 최초로 기업부설연구소를 만들고 맛 개발에 집중했다. 전통 제조법에 대한 지속적 연구는 천연 발효 유산균을 만들어 내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색소나 방부제 없이 우리 입맛에 맞는 다양한 맛을 낼 수 있게 됐다. 2012년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화 환율 급락으로 관련 수출업체들이 줄도산했을 때 결국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국내 시장을 염두에 둔 준비 덕분이었다. 방대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거듭된 연구는 마침내 전통 방식의 ‘조선 명란젓’을 되살리는 결실로 이어졌다. “소금, 고춧가루, 마늘만으로 생선알을 약하게 삭히고 발효시키는 과정은 한반도만의 유일한 방식입니다. 우리 전통 방식으로 재배한 고추와 마늘을 써야 이 맛을 낼 수 있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죠.” 장 대표는 전통 명란젓 제조법을 계승해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2022년 해양수산부로부터 대한민국 수산식품 명인으로 지정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국가 공인 명장과 명인에 지정된 유일한 사례다. “일본식 명란의 염도가 4%라면, 조선 명란은 7% 정도 됩니다. 짠맛이 강하고 질감이 쫀득하죠. 짜지만 건강하게 발효된 전통 식자재는 맛의 깊이가 다릅니다.” 장 명인에게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자 망설임 없이 “세계 최고의 명란젓을 만드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가 지금도 명란 공부에 힘쓰는 이유다.

전설로 남은 이름 석 자

Arts & Culture 2024 WINTER

전설로 남은 이름 석 자 대학 시절 음악 활동을 시작한 김민기(Kim Min-ki, 金敏基)는 온 국민이 즐겨 부른 명곡들을 만들었고, 소극장 학전(Hakchon Theatre, 學田)을 개관해 기라성 같은 배우와 뮤지션들을 배출했다. 그가 연출한 록 뮤지컬 < 지하철 1호선(Line 1) >은 대한민국 공연 역사를 다시 쓴 작품으로 기록됐다. 2024년 여름, 유명을 달리한 김민기는 국내 음악 및 공연예술계에서 전설이 되었다. 뮤지컬 < 지하철 1호선 >의 2021년 공연 사진이다. 독일 그립스 극단(GRIPS Theater)의 동명 원작을 김민기가 각색하여 연출했고, 영화 < 기생충 >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 오징어 게임 >의 음악을 담당한 정재일(鄭在日)이 편곡했다. 이 작품은 한국 뮤지컬계의 교과서로 불리며, 1990년대 소극장 공연의 전성기를 열었다. 올해 7월 21일 김민기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수식어는 ‘한국의 밥 딜런’이다. 그는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특별한 음색으로 뭇사람의 귀를 파고들고, 시적인 가사로 가슴을 울린 싱어송라이터다. 그가 가수로 첫발을 뗀 1970년대는 군사독재 정권이 경제 개발을 국가의 제1 목표로 삼았던 시기이다. 청년들은 “나라의 역군이 돼라”, “열심히 공부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라”는 주문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그래서 당시 청년들에게 노래나 음악은 사치품처럼 느껴졌다. 그때 엄혹한 시대의 사슬을 뚫고 청년 김민기, 한대수(Hahn Dae Soo, 韓大洙), 양병집(Yang Byung Jip, 梁炳集) 등이 나타났다. 그들이 직접 쓴 노랫말에는 답답한 사회에 대한 직간접적 비판과 토로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게, 그러나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아로새겨 있었다. 그것은 바야흐로 대한민국 1세대 모던 포크 싱어송라이터 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김민기는 남달랐다. 늘 곁에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자연이나 동식물에서 그는 깊은 은유의 우물을 봤다. 그 심연으로 거침없이 노래의 두레박을 던졌다. 길어 올린 것은 그대로 사회를 투영하는 시가 되고 음악이 됐다. 그의 곡들은 가사와 멜로디가 어렵지 않고 수수하다. 하지만 듣는 이나 부르는 이 모두를 먹먹한 감동에 젖게 한다. 김민기(Kim Min-ki, 金敏基)는 한 시대를 이끈 가수이자 탁월한 기량의 예술가로 찬사받는 인물이다. 1970년대 그가 만든 명곡들은 지금도 널리 애창된다. 연출가로 전향한 후에는 소극장 공연 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헌신했다. ⓒ 학전(HAKCHON) 저항의 상징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만든 1987년 6.10 민주 항쟁(June Democratic Struggle)은 대학생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밝혀지면서 촉발되었다. 분노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김민기의 대표곡 중 하나인 < 아침 이슬(Morning Dew) >(1971)을 한목소리로 불렀다. 6월 항쟁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고, 한국은 진정한 민주화의 역사적인 첫걸음을 떼게 되었다. 이로써 이 노래는 한국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다. 1951년에 태어난 김민기는 원래 촉망받는 미술학도였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미술에 몰두했고,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친구와 즉흥 듀엣을 이뤄 공연한 것이 학내에서 바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에 김민기는 붓을 놓고 작곡가,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1971년 김민기는 유일한 정규 앨범이라고 할 수 있는 1집 < 김민기 >를 세상에 낸다. < 아침 이슬 >, < 친구 > 등 노래 10곡이 담긴 이 앨범은 대한민국의 현대적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연 기념비적 음반으로 꼽힌다. 그러나 1970년대에 그의 곡들이 지속적으로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불림에 따라 그는 당국에 소환돼 조사를 받고, 1집 음반은 판매 금지 조치를 받으며 거의 모든 곡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만다. 상심한 김민기는 학교와 무대를 떠나 농촌으로, 탄광으로, 공장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 그의 또 다른 명곡 < 상록수(Evergreen) >(1979)가 태어났다. 자신이 일하던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합동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들을 위한 축가로 만든 것이 이 노래였다.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로 마무리되는 이 노래 또한 집회 때마다 수도 없이 불렸다. 이 곡은 훗날 다시 한번 전 국민의 가슴에 뜨거운 눈물의 비를 내리게 한다. 1998년, 한국 국민들이 아시아 금융 위기로 경제적 고난에 처했을 때 한 공익 광고에서 프로 골퍼 박세리가 양말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스윙하는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것이다. 노래가 주는 메시지와 멜로디는 세월을 뛰어넘어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들에게 다시 한번 불굴의 의지를 상기시켰다. 무대 뒤의 삶 김민기는 평생 노래를 만들고 불러도 좋을 사람이었지만, 무대에 제2의 삶을 던지기로 한다. 그가 지향한 곳은 정확히 말하면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뒤였다. 1978년,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 노동자와 음악가들을 모았다. 그렇게 비밀리에 제작한 음악극 < 공장의 불빛(Light of a Factory) > 음반은 해적판 카세트테이프 형태로 유통되었다. 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탄압과 노동조합 결성, 투쟁으로 긴박하게 이어지는 스토리를 담았다. 포크, 재즈, 로큰롤, 국악 등 다양한 장르가 고루 사용되었고, 악기도 서양 악기와 국악기가 두루 쓰였다. 이 음악극의 짜임새를 보면, 영국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 The Wall >보다도 앞선 ‘콘셉트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김민기는 1991년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한다. 극장 운영자이자 공연 연출가로의 완벽한 변신이었다. 1990년대 홍대 앞 라이브 클럽에서 한국 인디 음악 1세대가 태동하기 전까지 학전은 라이브 공연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명곡을 남기고 요절한 싱어송라이터 김광석은 이곳에서 1,000회 공연의 신화를 썼다. <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1991)도 학전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특별히 정해진 형식 없이 초대 손님과 진솔한 대화를 이어가며 음악도 감상했던 이 콘서트는 인기에 힘입어 KBS TV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되기에 이른다. 이후 < 이소라의 프로포즈 >, < 윤도현의 러브레터 >, < 유희열의 스케치북 > 등 음악 토크쇼의 계보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편 록뮤지컬 < 지하철 1호선 >은 독일의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Volker Ludwig)의 원작을 김민기가 번안해 각색한 작품으로,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모습을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1994년 초연 이후 2008년까지 4,000회의 공연 횟수를 기록해 한국 뮤지컬계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훗날 한국 영화계의 거물이 된 김윤석, 설경구, 조승민, 황정민 같은 배우들을 배출한 것도 큰 화제가 됐다. 2012년 초연된 연극 < 더 복서(The Boxer) >는 복싱 세계 챔피언이었던 노인과 문제아로 낙인 찍힌 고등학생 소년의 만남을 통해 소통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독일 청소년 연극상(Deutscher Jugendtheaterpreis)을 수상한 루츠 휘브너(Lutz Hübner)의 1998년작 < 복서의 마음(Das Herz eines Boxers) >을 김민기가 번안해 연출했다. ⓒ 학전(HAKCHON) 조용하고 묵직한 발자취 김민기는 농촌과 노동 현장에 있을 때부터 어린이들에게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부터 어린이극을 집중적으로 제작해 무대에 올렸다. 그는 위암과 싸우면서도 학전의 마지막 작품이 된 어린이 뮤지컬 < 고추장 떡볶이 >에 큰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결국 김민기의 건강 악화와 극장 운영난으로 학전은 2024년 3월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약 넉 달 후 김민기는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뮤지컬 < 고추장 떡볶이 >의 한 장면. 천방지축인 초등학생 형제들의 성장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린 작품이다. 2008년 초연 이후 연극계에서 다수의 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한국 어린이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 학전(HAKCHON) 한국처럼 유교 문화권에 속했던 나라에서는 본명을 직접 부르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허물없이 쓰기 위한 용도로 호(號)를 지어 사용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풍속이 거의 사라졌지만, 시조 시인이나 동양화 작가들 중에는 여전히 호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김민기에게도 비공식적인 호가 있다. 그가 스스로 붙인 호는 ‘뒷것’이다. ‘뒤에 있는 하찮은 존재’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이 호는 그의 삶을 압축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서 묵묵하게 예술가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헌신했다. 노래와 연출로 역사를 보듬고 신념을 불태운 김민기는 무대 위의 거물이 되려 하지 않았다. 저마다 큰 별을 자처하는 세계, 휘황찬란한 빛을 선망하는 세상, 아주 어린 아이들마저 스타 유튜버나 아이돌을 꿈꾸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의 조용한 그림자가 더 크고 절실하게 느껴진다.

서울의 닭요리, 닭한마리

Arts & Culture 2024 AUTUMN

서울의 닭요리, 닭한마리 닭한마리는 서울에서 생겨난 요리다. 1960년대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투박한 양푼 냄비 안의 닭한마리는 맛과 재미로도 훌륭한 음식인 동시에 대도시 서울의 성장기에 시민들이 거친 노동을 견뎌야 했던 용광로 같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닭한마리는 이름 그대로 닭 한 마리를 다른 재료들과 함께 냄비에 넣고 끓인 뒤 양념을 찍어 먹는 서울 요리다. ⓒ게티이미지코리아 김치찌개, 소고기 잡채, 떡볶이처럼 한국의 요리는 대개 재료+조리법(또는 특별한 양념 이름)의 순서로 명명된다. 그런데 닭한마리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처음 수학을 배우기 시작할 때 수를 세던 방식에 머물러 있다. 그냥 ‘닭 한 마리’이다. 당신이 세 마리를 먹고 싶어 가게 직원에게 “닭 세 마리요!”라고 하면 식당 직원은 아마 당황할 것이다.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닭한마리 세 개요!”. 닭한마리가 갖는 의미 이렇게 단순하고 직선적인 이름이 붙은 과정이나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음식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일단, 닭한마리라는 요리가 생겨날 당시 닭은 귀중한 음식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당시에는 더 비쌌다. 비싼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먹는다니!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운 축복이었다. 마치 미국인들이 칠면조 한 마리를 놓고 추수감사절을 보내는 것이 깊은 의미를 담고 있듯이 말이다. “닭을 통째로 먹는다고?’” 그 이름만으로도 손님들은 흥분했다. 이 요리가 퍼져 나갈 무렵, 한국의 양계산업은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식용을 위한 닭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닭을 한 마리나! 제공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특히 한국인은 어떤 음식을 통째로 놓고 먹거나 제사상에 올려야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그런 전통이 닭한마리의 성공 요인에 투영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한국인은 프라이드치킨을 ‘통닭’이라고 부르는 문화가 있다. 만약에 그 닭이 조각조각 나뉘어 튀겨졌다고 해도 말이다. ‘통’은 원만하고 많은 것, 완벽한 것, 100퍼센트라는 의미가 있다. 더 좋은 대접, 만족감을 의미한다. 닭한마리라는 명명도 그런 의미를 같이 담고 있다. 닭 한 마리는 닭 반 마리의 두 배가 아니라 완전체를 상징한다. 서울의 역사가 담긴 맛 의류 상가가 즐비한 서울 동대문 뒷골목에는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30년 이상 된 닭한마리 골목이 있다. 이 골목에 간다면, 골목의 역사에 대해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본래 이 골목은 시장의 일부다. 서울은 조선시대에 수도가 되었는데, 광화문 앞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시장이 있었다. 또한 지금의 닭한마리 골목 주변은 서울의 서민적인 동네로 번성했고, 시장이 생겨났는데 한국전쟁 이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큰 시장으로 확장되었다. 동대문시장, 광장시장, 평화시장 등 서울의 주요한 시장이 자리 잡았다. 이 시장이 닭한마리의 인기에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은 시민들이 장을 보는 곳인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일터이기도 하다. 의류 제조 종사자들은 저렴하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하거나 일 끝난 후 소주 한잔을 나눌 수 있는 술집을 찾게 되었다. 저렴한 가격, 충분한 양, 맛있는 음식, 여기에 ‘고기’가 들어간다면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음식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닭백숙을 팔던 집에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칼국수와 떡, 야채 등의 사리를 제공하면서 닭 한 마리를 ‘풀 서비스로’ 즐길 수 있게 완성되었다는 설, 다른 하나는 닭칼국수를 팔던 집에서 저녁 술안주로 닭백숙을 제공하면서 자연스럽게 특별한 양념을 내어놓은 것이 지금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동대문 뒷골목 닭한마리 골목. 과거 시장 닭한마리를 먹기 위해 상인들과 직장인들이 모여들던 골목에는 최근 외국인도 모여들며 한국의 맛과 문화를 즐기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1970년부터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에는 시장의 상인들, 노동자들 외에 이른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도 늘어났다. 그들은 낮엔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면서 피로를 풀었다. 서울의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서 다니는 것은 당시의 새로운 문화였다. 그들은 저렴하면서 맛있는 술집을 넘어서는 어떤 재미를 갈구했는데, 닭한마리는 그런 니즈에 완벽한 메뉴나 다름없었다. 백숙이나 삼계탕처럼 닭을 삶아서 다른 그릇에 내는 게 아니라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찌그러진 양푼 냄비에 닭이 통째로 들어가고, 각자 입맛에 맞게 만든 양념에 닭고기를 찍어 먹으며 소주 한 잔 기울이는 행위는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점차 닭한마리 골목엔 직장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몰려드는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눈치 빠른 상인들은 서울의 다른 지역에도 닭한마리 가게를 열기 시작했다. 사실 이 음식을 잘 모르는 한국인도 상당히 많다. 집에서는 거의 먹지 않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활동을 해보지 않은 어린이나 학생들, 혹은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세월을 보낸 여자 노인들은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닭한마리 자체가 집밥의 카테고리에 속한 적이 없으며, 음식이 담겨 나오는 그릇도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육수나 양념장이 그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대체로 잘하는 가게에서 먹어야 맛있다는 인식이 강했으며, 드럼통 식탁에 빙 둘러앉아 팔팔 끓여가며 먹는 특유의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또 사회생활을 하는 임금 노동자들이 먹기 시작한 요리라는 점도 한몫했다. 필자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오랫동안 가족을 부양하고 80세가 넘었는데, 이 요리의 이름조차 모른다. 이 원고를 쓰면서 혹시 이름을 들어보았냐 물었더니 엉뚱한 대답만 돌아왔다. “왜 닭 한 마리를 굳이 돈 주고 가서 먹는다는 것이야? 그리고 두 마리를 먹으면 안돼?” 냄비에 담긴 즐거움 각종 채소와 집마다 비밀 레시피를 넣어 끓인 육수를 양푼 냄비에 담은 다음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넣는다. 닭은 어느 정도 익어 나오지만 떡, 대파, 감자, 버섯 등의 사리가 익을 때까지 펄펄 끓여야 한다. 닭에 알맞은 간이 배고 사리가 익을 때까지 사람들은 각자 입맛에 맞는 양념을 만든다. 양념은 간장, 식초, 겨자, 매운 다지기(여러 가지 재료를 다져서 만든 양념)를 섞어 만든다. 같은 재료인데도 맛은 천차만별이다. 닭이 익으면 양념장에 찍어 먹는다. 뻑뻑했던 양념장은 국물과 고기의 수분이 섞여 점차 묽게 변한다. 다 먹어갈 때쯤이면 칼국수 사리를 넣어 익힌 후 묽어진 양념장에 찍어 먹거나. 냄비에 양념과 김치를 넣어 얼큰 칼칼하게 끓여 먹어도 좋다. 닭고기를 먼저 건져 먹은 다음 남은 국물에 취향에 맞게 다지기와 칼국수 사리를 넣어 칼칼하게 즐길 수도 있다. ⓒ한국관광공사 뜨거운 냄비가 올려진 테이블에 둘러앉아 먹는 방식은 구성원들의 유대감을 높이고, 식당 직원들은 가능한 요리에 적게 개입하여 불필요한 인건비용을 줄이는 이중 효과가 발생한다. 한국 속담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러니까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소리다. 그래서 닭한마리는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요리는 조금은 거칠면서도 다정한 장소에서 먹어야 맛있다는 신념이 있어서다. 그리고 아마도 미쉐린 투스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닭한마리에 깃들어 있는 철학이자, 우리가 이 음식을 대하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오늘 중요한 거래처 접대가 있으니 닭한마리에 가자고!”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 닭한마리는 외국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맵지 않아서, 한국식 노포 감성을 느낄 수 있어서도 이유겠지만, 서울이 어떻게 성장했고, 서울시민이 거친 노동에 견디며 성장하던 시기의 용광로 같던 시대의 산물을 체험해 보는 상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닭한마리는 서울의 다양한 사람들, 연인들, 외국인들이 몰려드는 복잡한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서울의 사회적 문화재와 유산이 되었다. 어떤 음식이든 그 내부에는 역사적 나이테가 있게 마련이다. 아픈 기억과 즐거움이 공존한다. 그런 역사성을 우리가 알고 음식을 먹는다면 더 풍부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음식이란 결코 칼로리와 화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맛의 분자들, 물리적 촉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닭한마리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적절한 음식이다. 혼자서 이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친구들과 나누는 커다란 냄비 요리의 맛과 즐거움이 이 요리에 담겨 있다.

마니악한 장르를 대중적으로 만든 K-오컬트의 세계

Arts & Culture 2024 AUTUMN

마니악한 장르를 대중적으로 만든 K-오컬트의 세계 올해 개봉한 장재현(張在現 Jang Jae-hyun) 감독의 영화 < 파묘 (破墓 Exhuma) > (2024)는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최근 한국의 오컬트 영화는 공포적인 요소를 극대화하기보다,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여 대중이 즐길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오컬트가 마니악한 장르라는 편견을 깨고 있다. 수상한 묘를 이장한 풍수사와 장의사, 무속인들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담은 오컬트 영화 < 파묘 (破墓 Exhuma) >(2024). 오컬트 장르에 대중적이고 오락적인 재미요소를 더해 K-오컬트를 완성했다는 평이다. ⓒ 주식회사 쇼박스 과거 “뭣이 중한디”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었던 영화 < 곡성(哭聲, The Wailing) >(2016)은 680만 관객을 기록하며 K-오컬트가 거둘 수 있는 최대의 성공으로 여겨진 바 있다. < 곡성 > 개봉 1년 전에 개봉한 장재현 감독의 이 거둔 540만 관객 흥행을 넘어선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장 감독이 다시 들고 온 영화 < 파묘 >는 그 기록을 갈아치웠다. 1,190만 관객이 영화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컬트 장르를 고집해 온 장재현 감독만의 색깔이 분명히 느껴지는 대목이고, 그것이 이러한 놀라운 흥행을 가능하게 한 저력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건 바로 마니악한 장르로 여겨지던 오컬트를 대중적으로 해석해 낸 그만의 방식이다. 오컬트에 장르적 재미를 더하다 < 파묘 >는 무당(巫堂 한국에서 신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과 풍수사(風水師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좋은 터를 잡아 주는 사람) 그리고 장의사(葬儀師 장례 의식을 전문적으로 도맡아 하는 사람)가 등장하고 이들이 귀신 같은 존재들과 사투를 벌이는 내용으로 분명 오컬트 장르의 색깔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건, 오컬트 특유의 마니아적인 공포 속으로 관객들을 빠뜨리기보다는 훨씬 더 대중적이고 오락적인 장르물의 재미요소를 더했다는 점이다. 영화가 입소문을 탄 후 관객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MZ세대 무당 화림(김고은 金高銀 Kim Go-eun)과 봉길(이도현 李到晛 Lee Do-hyun), 어딘지 정감이 가는 꼰대 풍수사 상덕(최민식 崔岷植 Choi Min-sik), 감초 같은 해학이 묻어나는 장의사 영근(유해진 柳海真 Yoo Hai-jin)을 일컬어 ‘묘벤져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오컬트 특유의 공포물이 갖는 오싹함이 있지만, 이들 묘벤져스의 장르적인 재미를 따라가면 마치 저 귀신과 치고받고 싸우는 액션물 같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게다가 영화 후반부로 가면 묫자리를 잘못 써서 흉흉해진 집안 이야기를 넘어서 일제 잔재의 과거사를 파헤치는 이야기까지로 확장된다. 일제의 쇠말뚝에 의해 끊긴 민족정기를 잇기 위해 묘벤져스가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는 냉혹한 일본의 정령과 싸우는 민족적인 영웅처럼 그려진다. 이러한 장르적 재미를 더한 영화는 공포를 줄이는 대신 대결 구도를 선명히 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장르적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 됐다. 이것은 < 검은 사제들 >, < 사바하(Svaha: The Sixth Finger) >(2019)에 이어 < 파묘 >까지 이른바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3부작에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특징이다. 그리고 이건 최근 K-오컬트라는 지칭이 생길 정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한국적 오컬트의 특징이기도 하다. 범죄물과 결합한 K-오컬트 K-오컬트는 죽음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종종 범죄물과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곤 한다. SBS에서 방영된 김은희(金銀姬 Kim Eun-hee) 작가의 드라마 < 악귀(Revenant) >(2023)가 대표적인 사례다. 미스테리한 댕기를 만진 후 귀신이 든 주인공과 귀신을 보는 민속학자 그리고 강력범죄수사대 경위가 연달아 발생하는 의문의 죽음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뤘다. 여기서 악귀는 자신이 깃든 자의 욕망을 들어주면서 점점 존재가 커지고, 주인공이 가진 세상에 대한 욕망과 분노에 반응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만으로 실제 악귀가 그걸 실행해내는 걸 알게 된 주인공은 민속학자의 도움을 받아 악귀와 싸워나가게 된다. 이건 오컬트의 소재로 종종 등장하는 저주를 악귀라는 존재로 해석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범죄와 오컬트의 결합은 일찍이 김홍선 감독의 드라마 < 손 the guest >(2018)에서도 시도된 바 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귀신에 빙의된 자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막으려는 이들의 협업을 그렸던 작품이다. 이 두 드라마는 범죄물이 접목된 K-오컬트로서 도저히 인간이 저지른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잔혹한 범죄들에 대한 비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처럼 K-오컬트는 그저 자극적인 공포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의미까지 담아내기도 하는데, 보다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K-오컬트가 되기까지 오컬트라고 하면 악령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고 이에 맞서는 사제들의 구마 의식 같은 것을 소재로 하는 장르로 받아들여지곤 했지만, K-오컬트는 여기에 한국적인 토속적 색깔을 더해 넣는다. < 파묘 >에도 등장하지만, K-오컬트의 단골 소재처럼 나오는 무속인들의 굿 장면이 대표적이다. 고조되는 북소리와 흥분시키는 춤사위를 더해 강력한 에너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무속인들의 세계는 영화 < 곡성 >에서도 등장해 세계인들을 매료시킨 바 있다. 인간의 세계와 귀신의 세계 사이를 잇는 존재로서 무속인들이 보여주는 한국의 샤머니즘은 전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K-오컬트만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 파묘 >는 영화 스토리 뿐만 아니라 가죽 자켓, 실크 셔츠, 청바지, 컨버스 운동화 등 기존 무속인의 틀을 깨고 주인공 무속인 화림의 개성을 살린 스타일링도 관객의 주목을 받았다. ⓒ 주식회사 쇼박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오컬트라는 장르를 구마 의식이나 사제, 악령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칭한다면, 과거 1998년에 개봉한 < 퇴마록 >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는 3명의 퇴마사가 등장하는데, 여자의 혼이 봉인된 칼을 사용하는 무사, 기도로 악마와 싸우는 신부 그리고 부적술과 독심술을 사용하는 아이가 그들이다. 즉 서구의 신앙과 우리네 토속신앙을 접목하려는 K-오컬트의 노력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K-오컬트의 또 하나의 특징은 < 파묘 >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보다 대중적인 장르들을 결합해 B급 장르라는 한계를 넘어서려 한 점이다. < 퇴마록 >이 오컬트 장르가 아니라 판타지 액션 장르로 대중들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2015년 방영된 장재현 감독의 역시 사제복마저 멋진 수트처럼 소화해 낸 장르적인 해석으로 500만 관객을 넘기는 흥행을 기록했다. 악령이 든 소녀의 구마의식을 그린 오컬트 영화 < 검은사제들(The Priests) >(2015). ⓒ 영화사 집 K-오컬트는 토속신앙이나 민담, 설화 같은 고전에서 재해석해 낸 캐릭터들 같은 한국적인 색채를 더해 넣으면서, 동시에 마니악한 B급 장르가 아닌 보다 대중적인 장르로 접근하려는 특징을 보인다. 그래서 로컬 색깔이 갖는 차별성은 물론이고 글로벌하게 이해되는 장르의 보편성까지 아우르는 세계가 되었다. 이것은 현재의 글로벌 콘텐츠 시장이 요구하는 것으로서 K-오컬트가 왜 경쟁력을 갖게 됐는가를 설명해 준다.

노잼도시 대전의 재발견

Arts & Culture 2024 AUTUMN

노잼도시 대전의 재발견 한반도에서 대전광역시는 중심에 있다. 위에서 내려오거나 아래에서 올라가도 그렇다. 게다가 주요 고속도로와 철도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부터 지금까지 대전은 한반도 교통의 길목이자, 중심에 있다. ⓒ 대전관광공사 편리한 교통 입지는 이곳에 한국 최대의 과학연구단지가 자리잡는 계기로 작용했다. 인재를 모으는 데 유리하고, 여러 지역의 공업단지와 연계하기 좋으며, 근처 금강(錦江)에서 용수를 끌어다 쓰기에도 좋은 입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선 것이 1970년대 초반 첫 삽을 뜬 대덕(大德)연구단지, 지금의 대덕연구개발특구(INNOPOLIS DAEDEOK)다. 한국 최대 과학의 도시 1984년에 설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한국 과학 발전의 초석 역할을 해오고 있다. 또한 1993년에 개최된 대전엑스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대전하면 과학’을 떠올리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대전엑스포에는 세계 108개국, 33개 국제기구, 국내 200여 개 기업이 참가해 88서울올림픽만큼이나 성대하게 치뤄졌다. 당시 학생이었다면 학교단체여행으로 대전엑스포를 방문한 덕에 대전엑스포 ‘꿈돌이’는 한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대전 도심을 가로지르는 갑천 위의 엑스포다리는 당시의 추억을 여전히 전하고 있으며,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른 엑스포 과학공원은 대전시민들의 쉼터로, 엑스포 한빛탑은 야경 명소로 인기다. 대전엑스포93 기념관과 엑스포과학공원의 상징인 한빛탑, 물빛광장 음악분수 등이 있는 엑스포과학공원은 대전 시민의 휴식처이자 야경 명소가 되었다. ⓒ 신정식 2022년 12월말 기준, 현재 대덕에 위치한 연구기관 및 기업은 2,397개에 이르며, 국내외 특허 출원 건수만 119,683건에 달한다. 대덕연구개발특구는 한국 과학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구심점이자 이러한 과학 발전은 한국 경제를 성장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전에서 과학을 어렵지 않게 경험하고 싶다면 대덕연구개발특구 한복판에 자리한 국립중앙과학관을 방문하면 된다. 한국의 첫 우주발사체인 나로호를 실물 크기로 전시한 모형이 방문객들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고, 로봇으로 재탄생한 대전 과학 엑스포의 마스코트였던 꿈돌이를 만나볼 수 있는 등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과학이 즐거운 놀이가 되는 국립중앙과학관. 이곳에는 자연사, 인류, 천체, 과학기술,미래기술 등 과학을 흥미롭게 풀어낸 공간이 많다. 밀가루가 낳은 새로운 음식문화 대전의 음식문화는 밀가루와 함께 탄생하고 발전해왔다.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한국 기후의 한계 탓에 메밀가루나 칡전분만이 이 땅에서 면을 만들 수 있는 거의 유이(唯二)한 재료였다. 그런데 밀가루라는 새로운 식재료가 출현한 것이다.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전 국토가 파괴되어 주식인 쌀이 매우 부족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민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미국이 원조한 밀이나 옥수수 등으로 만든 식량을 섞는 혼분식(混粉食)을 장려했다. 애초 쌀로 만드는 음식일지라도 무조건 밀가루로 만든 재료를 섞도록 했다. 한국내 어느 식당에서든 설렁탕이나 돼지국밥 등을 주문하면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함께 말아져 나오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흔적이다. 대전이 예부터 밀가루와 관련된 음식이 발전한 것은 부산항이나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미국산 밀을 제분해 전국으로 배송할 때 중간보관소 및 분기점 역할을 했던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1960~1970년대 대전 서쪽의 서해안 간척사업 당시에는 노임을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로 지급했다. 그 밀가루를 현금으로 바꿔주던 교환장이 대전에 들어선 것도 한몫했다. 이처럼 풍성한 밀가루 공급으로 다채로운 음식문화를 꽃피웠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칼국수다. 칼국수는 익반죽해 썬 밀가루 면을 숙성 과정 없이 해산물, 또는 고기 육수를 베이스로, 채소와 함께 끓여 먹는 음식이다. 특히 육수와 고명, 면 굵기 등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칼국수가 최초로 탄생한 곳이 바로 대전이었다. 누가 최초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1960년대 들어 각종 미디어에 전국 최초로‘대전 칼국수’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명성을 뽐내듯 2023년 말 기준 대전에는 칼국수 전문점이 무려 727개에 달한다. 이는 인구 1만 명당 5개 꼴로,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많은 수치다. 이와 같은 대전의 칼국수 자부심은 2017년 이래 매년 10월마다 열리는 대전칼국수축제로 이어지고 있다. 칼국수가 최초로 탄생한 대전에는 다양한 칼국수 전문점이 있다. 사진은 사골과 멸치육수를 베이스로 한 칼국수이다. 대전을 대표하는 베이커리 대전을 대표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2023년 연매출만 1,243억에 순이익 315억 원으로, 단일 베이커리로는 세계 최상급 실적을 쌓아가고 있는 성심당(聖心堂)이다. 성심당이 문을 연 것 역시 미국으로부터 밀 원조가 들어오기 시작한 1956년이었다. 앞서 1950년 벌어진 한국전쟁 당시 극적으로 월남한 이들 중에는 지금의 성심당을 창업한 부부도 있었다. 부부는 훗날 대전에 정착했는데, 당시 가톨릭 신부로부터 밀가루 두 포대를 받아 찐빵을 만들어 판 것이 성심당의 출발이 되었다. 전쟁의 포연을 헤치고 창업한 빵집 답게 이들 눈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남달리 보였다 한다. 팔고 남은 빵을 빈곤에 허덕이던 이들에게 매일 같이 베풀기 시작했다. 창업 이래 7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남는 빵을 복지관에 기부하며, 기부할 빵이 부족하면 새로 만들기까지 할 정도다. 제품 개발에도 열심이다. 단팥빵의 달콤함과 소보로의 고소한 맛, 그리고 도너츠의 바삭한 느낌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튀김소보로 등 이전에 없던 제품들을 만들어냈다. 이 튀김소보로는 성심당을 대표하는 빵 중 하나로, 현재까지 무려 8천만 개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만약 대전 시내를 걷다가 수십 미터, 때로 수백 미터의 줄을 발견한다면 십중팔구 성심당 매장일 확률이 크다. 성심당 매장은 대전에만 있어 빵과 케이크를 맛보기 위해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무조건 대전으로 가야만 한다. 이 때문에 빵을 좋아하는 이른바 빵순이들의 퀵턴여행(바로 돌아오는 여행, 즉 짧은 당일치기 여행)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전국 최대의 칼국수 식당 수와 성심당 밖의 기나긴 대기 행렬은 절박했던 한국인들을 구제해낸 그 옛날의 밀가루가 이제는 ‘노맛 도시’ 대전을 ‘꿀맛 도시’로 재탄생시켰음을 증명하는 풍경이다. 오는 9월 28일부터 이틀 간 열릴 예정인 대전빵축제에서 대전 사람들의 이른바 ‘빵부심’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전의 명물인 성심당. 제철 과일이 산처럼 쌓인 시루케이크, 시그너처 빵 등을 구입하려 매일 인산인해를 이룬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이렇다 할 대표 관광지가 없어 그 동안 ‘노잼 도시’로 알려졌던 대전은 최근‘유잼 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부터 철도산업 종사자들이 모여 살았던 소제동 관사촌은 맛과 멋이 즐비한 거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물론 본래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은 아니었다. 전쟁과 신도시 개발로 소외된 이래 빈집만 2천 채가 넘는 곳이었다. 변화의 움직임은 2010년 한 예술가가 옛 철도원 관사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대전에서 유일하게 근대기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 지역의 가치에 주목한 것이다. 연극제와 노래자랑 등 예술 활동을 진행하면서 과거에 머물러 있던 관사들이 하나둘 갤러리나 카페, 레스토랑 등으로 바뀌어갔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겉모습은 언뜻 낡고 허술해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울창한 대숲을 대문으로 삼은 카페부터, 온천탕을 옮겨온 것 같은 정원이 인상적인 레스토랑까지, 독특한 아이디어와 현대적인 디자인이 더해져 다른 지역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낯선 경관이 펼쳐진다. 이와 비슷한 공간인 테미오래도 있다. 1930년대 대전 원도심에 만들어진 근대건축물을 리모델링한 곳으로, 옛 충남도지사 공간을 비롯한 9개 관사를 활용해 대전의 근대 역사와 문화, 예술 전시를 볼 수 있는 복합문화 예술공간이다. 소제동에 있는 옛 관사촌의 원형을 살려 만든 카페거리. 외관을 비롯해 지붕, 천장, 기둥 등 핵심 구조물은 그대로지만 각 스폿마다 색다른 개성과 취향으로 꾸며져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문화와 어우러진 대전 대전이 단순히 교통 요지이자 맛있는 먹거리만 많은 곳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문화적 향취와 자연의 깊이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곳이 대전이다. 먼저 대전 도심에 자리한 전국 최대의 도심 속 수목원인 한밭수목원을 빼놓을 수 없다. 방문객들은 울창한 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거나 산책을 즐기기도 한다. 수목원은 이응노(李應魯; LEE, Eung-no; 1904-1989) 미술관과 대전시립미술관과도 접해있다. 그 중에서도 이응노 미술관은 『문자추상(文字抽象)』과 『군상(群像)』 연작 등 한국화를 기반으로 서양의 추상화를 동양 서예로 녹여내며 독특한 미술세계를 만들어간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응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유독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그가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던 당시의 나이가 50대 중반이었다는 점이다. 명성과 부에 안주하며 살 수 있었음에도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스스로 나아갔다. 더욱이 1960년대 후반 한국내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음에도 그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대전교도소 등에 수감돼 있는 중에도 밥풀 등을 이용해 3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오히려 국경과 민족을 뛰어넘는 예술의 가치와 위대함을 찾아 더욱 열정적으로 그렸다. 그 중에서도 1970년대 후반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군상(群像)』 연작은 당시 한국은 물론 전세계 양심적인 시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자유분방한 개인들이 모여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그림에서 한국인들은 오늘의 민주화된 한국을 만들어낸 에너지를 읽어냈다. 시민을 위한 지역 대표 미술관이자 이응노(Lee Ungno) 화백의 예술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이응노 미술관 ⓒ ARCHFRAME.NET 시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인 개입과 노력 속에서 노맛에서 꿀맛, 노잼에서 유잼으로 이미지 자체가 바꾸어가고 있는 대전은 언뜻 보면 밋밋할 것 같지만 과학, 문화, 근현대, 예술, 자연 등 여행의 목적에 따라 스팟들이 즐비한 곳. 그렇기에 대전은 하루이틀만에 둘러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대전의 옛 지명이 크고 너른 평야를 뜻하는 ‘한밭’인 것처럼 대전을 여행한다면 그날의 여행 주제를 정하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대전을 여행할 수 있다. 장태산 자연휴양림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메타세쿼이아 숲이 울창하게 형성되어 있어 이국적인 경관 더불어 산림욕을 즐기기에 좋다. ⓒ 한국관광공사

그림이 된 말들

Arts & Culture 2024 AUTUMN

그림이 된 말들 홍인숙(Hong In-sook, 洪仁淑)은 글자와 그림을 넘나드는 독특한 화풍을 구사하는 작가이다. 그녀는 민화 장르 중 하나인 문자도(Munjado, 文字圖)를 현대적 어법으로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해석하는데, 작품의 소재는 대부분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다. 자신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홍인숙 작가. 2000년 인사동 경인(耕仁)미술관(Kyung-in Museum of Fine Art)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개성이 뚜렷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수시로 기록하고 곱씹은 뒤 그것을 이미지화한다. 지난 5월, 서울 회현동(會賢洞)에 자리한 모리함전시관(Moryham Exhibition Center, 慕里函)에서 홍인숙의 개인전 < 다시 뜬 달, 월인천강지곡(Re-rising moon, Worin cheongangjigok) >이 열렸다. 『월인천강지곡(Songs of the Moon’s Reflection on a Thousand Rivers, 月印千江之曲)』은 조선의 4대 국왕 세종(재위 1418~1450)이 세상을 떠난 아내 소헌(昭憲)왕후(1395-1446)의 공덕을 빌기 위해 지은 찬불가(讚佛歌)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심정을 달, 빛, 사랑 등의 글자와 그림을 통해 선보였다. 글자가 그림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림이 글자로 읽히기도 하는 작품들이다. 그녀는 글과 그림이 하나로 인식되는 전통 문자도를 자신만의 어법으로 표현하며, 우리 삶의 사라지지 않을 가치에 주목한다. < 한글자풍경 – 꽃 >. 2024.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40 × 118 cm. ⓒ 홍인숙 < 한글자풍경 – 빛 >. 2024.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40 × 118 cm. ⓒ 홍인숙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글자는 무엇일까?’에 대한 작가의 상념을 전통 문자도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올해 5월, 모리함 전시관에서 열린 < 다시 뜬 달, 월인천강지곡 >의 전시작들이다.   유년의 경험 문자도는 민화의 한 종류로, 글자의 의미와 관계있는 옛이야기를 한자(漢字) 획 속에 그려 넣어 구성한 그림을 말한다. 조선 시대 유교의 주요 덕목이었던 효(孝), 충(忠), 신(信) 같은 글자를 형상화한 교훈적인 내용과 부귀(富貴), 수복강녕(壽福康寧), 길상(吉祥)과 같이 복을 기원하는 기복(祈福) 신앙적 측면이 강조된 그림으로 나뉜다. “제 작품은 전통적인 문자도와 차이가 있어요. 작품 속 요소들이 저의 유년 시절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거든요. 시대적 가치관이나 기복과는 거리가 멀죠.”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한글자 풍경’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달, 집, 꽃, 밥, 빵 등 한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와 그에 맞게 형상화된 이미지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상상이 어우러져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 한글자풍경 – 안(安)>. 2020.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10 × 90 cm. ⓒ 홍인숙 < 한글자풍경 – 녕(寧)>. 2020. 한지에 종이 판화, 드로잉, 채색. 110 × 90 cm. ⓒ 홍인숙 2020년 교보(敎保)아트스페이스(Kyobo Artspace)에서 열린 < 안,녕 >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두가 큰 고통을 겪었던 시기, ‘안녕’의 의미와 소중함을 되새기는 전시였다. 판화 기법 서툰 연필화 같은 드로잉, 순정 만화에 나올 법한 소녀의 모습, 글자의 획이 된 담벼락…. 홍인숙의 그림은 재기발랄하면서 키치적인가 하면 소박한 전통 회화의 면모도 엿보인다. 그런데 나무, 꽃, 새, 사람 등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을 자세히 보면 어쩐지 공예적 느낌이 든다.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그렇다. “제가 대학에서는 서양화를, 대학원에선 판화를 전공했어요. 판화 작업이 제게 맞는다 생각했는데, 뭔가 만족스럽지 않은 거예요. 서양식 소재에 한계를 느끼던 중 우리 전통 한지와 섬세한 동양화법에서 길을 찾았죠.” 그림 속 영롱하면서도 선명한 색채는 정교한 판화 방식을 접목한 결과다. 우선 담고자 하는 조형적 요소들로 종이에 밑그림을 그린다. 한지 위에 먹지를 대고 밑그림을 옮긴 다음 판화적 기법이 필요한 부분에 맞도록 색판을 만든다. 색깔별로 종이를 오려서 판을 만든 다음 물감을 칠해서 압축기로 찍어낸다. 그림판의 위치를 바꿔가며 찍어내기를 반복해서 원하는 색감을 완성해 간다. “도장에 인주를 묻혀 찍듯이 간단할 것 같지만, 실은 찍어내는 과정 하나하나 엄청 집중해야 합니다. 컴퓨터의 포토샵 기능으로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하면 손쉽게 할 수도 있겠지만, 일일이 손으로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죠. 때론 조금 어긋나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죠. 그런 점이 그림의 생명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판화 기법을 이용한 그림은 붓에 물감을 묻혀 색칠하는 일반 회화와는 다른 독특한 색감을 보여 준다. 색깔별로 판을 자르고, 롤러로 색을 칠하고, 그 색판의 수만큼 프레스기를 돌리기 때문에 판화라고는 하지만 에디션 없는 그림이 되기도 한다. “제가 작업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미련하다 못해 신선하다고 할 정도예요. 드로잉처럼 빠르지도, 컴퓨터처럼 매끈하지도 않아요. 가장 나다운 것을 찾다가 고안한 방식이죠.” 작가가 판화 작업 시 사용하는 다양한 크기의 롤러들. 오랫동안 판화 장르를 탐구해 온 홍인숙은 물리적 감각의 완급과 강약 조절을 통해 섬세하고 간결한 화법(畫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글자가 이루는 풍경 홍인숙은 1973년 경기도 화성(華城)에서 헌신적인 부모님의 삼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또래 친구 하나 없이 놀잇감이라고는 나무, 꽃, 풀, 책이 전부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는데, 손때 묻은 책 속에 제가 어릴 때 낙서 삼아 그린 그림이 있었어요. 제가 즐겨 그리는 커다란 눈망울의 여자아이는 그 그림을 옮긴 거예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제 막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녀에게 크나큰 상실이었다. 든든한 울타리와 같던 아버지를 잃고 작가는 마치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지나간 사랑을 찾듯 작품들을 쏟아냈다. 판화와 회화가 공존하는 그녀의 그림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어딘가 중간 지점에 걸쳐 있는 듯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일러스트레이션이나 그래픽 디자인 같기도 하다. 혼성적 형식으로 담백한 느낌을 주는 그의 참신한 어법은 2003년 < 목단(牧丹) >, 2006년 < True Love, Always a Little Late > 등 초기 개인전에서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작가의 집이자 작업실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水原華城) 성곽길을 마주보고 있다. 오래된 양옥을 개조해 갤러리를 겸한 집은 판화를 배우려는 학생들, 전시 공간을 찾는 젊은 작가들을 위한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혼자만의 작업도 좋아하지만, 뜻이 맞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간도 소중하다”는 작가의 다음 글자 풍경이 궁금해진다. < 누이오래비생각(Realize) >. 2011. 광목천에 채색. 116 × 90 cm. ⓒ 홍인숙 작가는 여백, 시문(詩文), 낙관(落款) 등 전통 회화의 요소들을 자신의 어법으로 각색해 활용한다. 또한 뜻글자인 한자를 조합해 복합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이미지가 문학적, 서사적으로 전달된다.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 작가 이민희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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