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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여성 예능 바람이 분다

Culture 2022 SPRING 560

여성 예능 바람이 분다 남성 중심의 방송 환경과 낮은 시청률로 인해 부진하던 여성 예능이 최근 들어 한국의 TV 예능 편성에 주요 키워드로 떠올랐다. 여성들 간의 유대와 공감 속에 펼쳐지는 도전과 상호 존중의 서사가 시청자들의 마음에 큰 여운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가수들의 뒤에서 무대를 지켜왔던 무명의 댄서들을 조망한 케이블 TV Mnet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는 2021년 8월 방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사진 속 그룹은 격전 끝에 최종 우승을 차지한 홀리뱅이다. ©Mnet 2021년 한국 TV에서 가장 뜨거웠던 콘텐츠 가운데 Mnet의 (街頭女戰士, Street Woman Fighter) 가 있다. 흔히 가수 뒤의‘백댄서’로 호명되던 여성 댄스 크루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경연을 펼친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8월 24일 첫 방영부터 화제를 모았다. 방영 기간 동안 꾸준히 비드라마 화제성 1위를 기록했고, 10월 26일 종영 이후에는 주요 참가자들이 다른 인기 예능 프로그램들에 게스트로 초청받는가 하면, 여러 패션잡지의 연말 결산에서도 일제히 다뤄졌다.   의 무대는 한 명의 MC와 세 명의 심사위원을 중심으로 대결을 앞둔 양 크루가 바라보는 사각형 구조다. 그 주위로 나머지 크루 멤버들이 자리 잡고 응원과 호응을 해준다. ©Mnet 프라우드먼의 리더 모니카(왼쪽)와 코카N버터의 리더 리헤이. 예고편은 ‘쎈 여자들’의 다툼이고 아찔한 갈등의 연속이었으나 본방에서 보여준 출연자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아름답게 인정하는 멋진 모습이었다. ©Mnet 라치카(La Chica)는 애초에 한 가수의 안무를 짜기 위해 모인 일시적 모임이었는데, 작업량이 많아지고 다른 가수들의 안무도 담당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팀이 됐다. 원래 세 명이 팀원이지만 스우파 출연을 위해 피넛(왼쪽에서 두번째)과 에이치원(맨 오른쪽)이 객원 맴버로 참석했다. ©Mnet 새로운 트렌드 2010년 Mnet의 (Superstar K) 시즌 2와 2020년 TV조선에서 방영한 (Mr. Trot, 明天是)이 그러했듯, 는 단순한 인기 프로그램을 너머 하나의 신드롬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케이블 종합편성채널 역대 시청률을 갱신했던 두 프로그램과 달리 의 시청률은 가장 높았을 때도 3%를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프로그램은 불특정 다수 시청자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인터넷 커뮤니티, 뉴스 포털 등 TV 바깥에서 커다란 화제를 만들며 팬덤을 이뤘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따져보려면 시청률이라는 지표에서 인상적인 기록을 남긴 다른 예능 프로그램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코미디언, 패션 모델, 배우 등 여성 유명인들이 2002년 월드컵 대표 선수들을 감독으로 축구팀을 만들어 경쟁한 SBS (Kick A Goal, 踢球的她们)이다. 2021년 6월 이후 계속 방영 중인 이 프로그램의 평균 시청률은 6~8%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다. 같은 해 신작 예능 프로그램 중에서 눈에 띄게 높은 수준이다. 최근 조작 논란이 있긴 했지만, 침체에 빠져 있었던 지상파 예능의 희망 역할을 톡톡히 해준 것이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 만들어낸 신드롬과 의 안정적인 높은 시청률이 지난 해 한국 여성 예능의 부흥을 이끈 두 가지‘사건’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클리셰에 맞서다 두 프로그램에는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경쟁을 통해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형식을 갖췄으면서 동시에 여성 서바이벌 예능의 거의 모든 클리셰를 배신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TV 여성 서바이벌 예능에서 보여온 구도는 경쟁 자체보다는, 경쟁 과정에서 격화되는 감정싸움을 구경하거나 ‘여성 치고 잘하는’ 모습을 기특해하는 방식으로 소비되어 왔다. 는 다른 여성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이 그래왔듯, 강렬한 비주얼의 여성끼리 벌이는 ‘캣파이트’를 노골적으로 의도한 프로그램이다. ‘2021년 여름, 춤으로 패는 여자들이 온다!’는 방영 전 홍보 문구나 예고편도 여지없이 캣파이트를 연상시켰다. 또한 만만한 상대로 지목된 댄서가 옷에‘No Respect’ 스티커를 붙이고 배틀을 벌이는 첫 미션에서 연이어 아이돌 출신 댄서를 제압하는 모습은 마치 하이에나 무리가 손쉬운 먹잇감을 사냥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드롬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계급 미션’에서도 댄스 크루 웨이비의 리더 노제(No:ze, 盧智慧)가 만든 안무를 채택한 뒤 그 안무를 더 잘 소화해 메인 댄서가 되려는 다른 크루 리더들의 치열한 역공의 과정이 부각되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프로그램 속에는 단순한 싸움이 아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존감 높은 출연자들의 진짜 모습이 있었다. 아이돌 출신 댄서가 탈락하게 되는 마지막까지 모든 출연자들은 그에게 한없는 애정과 존중을 표시했다. 또한 노제가 만든 안무를 두고 한 출연자가 “저건 내가 좀 갖고 놀 수 있겠다. 외우기만 하면” 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그 춤이 쉽고 만만하다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본인의 춤에 대한 강한 프라이드가 내비쳤다. 출연자들 간의 경쟁을 감정적 캣파이트로 묘사하려는 편집에도 불구하고 춤을 향한 그들의 진지한 태도는 감춰지지 않았고, 바로 이 점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탈락해야 했던 노제는 “항상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게 춤을 췄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담담하게 춤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떠났다. 바로 이때부터 모든 참가자에게는 승패 보다는 프로로서 얼마나 후회 없이 전문성을 증명하고 가느냐가 중요하게 됐다.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프라우드먼이 3차 미션에서 떨어졌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그들의 패배가 아니었다.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되느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종전의 어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파일럿 프로그램이 10%의 높은 시청률을 올리자 정규 편성에 들어갔던 역시 마찬가지다. 연예인들이 모여 스포츠 경기를 벌이는 경우 종전에는 으레 출연자들의 부족한 실력과 실수가 주는 웃음에 초점을 맞췄던 것에 반해, 이 프로그램은 그러한 기대를 보기 좋게 배신했다. 파일럿 방송에서 우승했던 중년 스타 팀 FC 불나방은 정규 방송에서도 다시 리그와 토너먼트를 거치며 우승했지만, 여기서도 역시 중요한 건 승패가 아니었다. 평균 키가 월등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파일럿 단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배했던 모델 팀이 정규프로에서 가까스로 4강전에 올라 FC 불나방과의 결승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끈질긴 시도로 득점에 성공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YG엔터테인먼트 산하의 댄스 레이블 YGX는 주로 YG 소속 가수의 공연이나 연습생 트레이너로 활동하다 에 합류했다. 참가 그룹 중 가장 어리고 톡톡 튀는 이미지로 Z세대 여성의 상징이 되었고, 실제로 주 고객층이 Z세대 여성들인 유명 패션 플랫폼의 모델로 발탁되기도 했다. ©Mnet 유대와 공감 남성 중심의 방송 환경에서 여성 예능이 하나의 큰 흐름으로 떠오르게 된 배경에는 싸움에서 승리하는 또 다른 방법, 즉 진정성에서 우러나오는 성실과 끈기, 그리고 상호 존중의 태도가 있었다. 의 최고 명대사로 꼽히는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는 감히 남자들은 끼어들 수 없는 강한 여성들의 도도한 세계를 상징하는 말이 됐다. 이러한 한국 여성 예능의 부상이 있기 까지는 2020년 방영이 시작된 E채널의 (Sporty Sisters, 愛玩的姐姐)나 2016년 7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방영된 MBC everyone의 처럼 선구적 역할을 담당해온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2021년에 시즌 2로 이어진 에서는 LPGA 명예의 전당에 오른 박세리(Pak Se-ri, 朴世莉)를 비롯해 전‧현직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출연해 새로운 운동 종목이나 취미를 경험한다. 막강한 근육과 넓은 어깨로 화제가 됐던 수영선수 정유인(Jung You-in, 鄭唯仁)처럼 그 동안의 TV 속 젠더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 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크다. 에서 코미디언 김민경(Kim Min-Kyoung, 金敏璟)이 큰 체구로 수비수를 튕겨낼 정도의 저돌적인 드리블을 하는 통쾌한 장면도 서로 일맥상통한다. 최근까지 남성 진행자들만 있었던 MBC의 인기 토크쇼 의 마이너 버전 정도로 만들어졌던 (Video Star)의 존재도 중요하다. 이 쇼가 5년 동안 장수하는 동안 MC를 맡았던 박나래(Park Na-rae, 朴娜勑)와 김숙(Kim Sook, 金淑)은 각각 2019년 MBC 방송연예대상, 2020년 KBS 연예대상을 수상했다. 남성에 비해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 방송인들이 진행자로서 자리를 지키고 성장해 최고의 예능인으로 인정받게 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방송에서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관점에서 그려졌고 주변부로 밀려나기 일수였다. 그런 속에서도 새롭게 자신들의 영역을 개발해온 여성 연예인들이 있고, 또한 그들과 일체감을 느끼며 응원하고 지지하는 여성 시청자들이 있어 왔다. 이들은 서로 비슷한 싸움을 해온 유대감을 공유하며 또 한 번의 전진을 위해 투쟁을 각오한다. 이들의 성취는 아직 결말이 아닌 과정이다. 2022년에도 그들은 새로 보여줄 것들이 많아 보인다.

겨울이 남긴 풍미, 시래기

Culture 2022 SPRING 1079

겨울이 남긴 풍미, 시래기 늦가을과 겨울의 추운 날씨를 버텨내고 단맛을 끌어올린 시래기를 봄에 먹으면 마치 계절이 주는 선물이 입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든다. 입문이 쉽지는 않지만 한번 맛을 알게 되면 그 매력에서 빠져나오기도 힘든 음식이다. 무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채소 중 하나로 김치 뿐만 아니라 나물, 국 조림 등 여러 음식의 재료로 사용된다. 부위에 따라 각기 다른 쓰임새를 가졌고, 계절에 따라서 다른 맛을 내기도 하여 매력적인 식재료다. 특히 겨울철 노지재배로 수확한 무의 푸른 무청을 떼어 내 엮은 뒤 겨우내 햇볕과 바람으로 말린 시래기는 구수한 맛과 부드러운 촉감으로 봄철 식탁을 풍성하게 해준다. 시래기는 최소 3번 정도 얼고 녹기를 반복해야 맛있어진다. 건조과정에서 두 배 이상 늘어난 시래기의 식이섬유는 포만감을 더해주고 몸의 노폐물 배출을 돕는다. 지금은 별미로 여겨지는 음식이라도 그 출발은 때로 하잘것없어 보일 수 있다. 무청이나 배추의 겉잎을 햇볕과 바람에 말린 시래기가 그렇다. 한반도에서는 예로부터 늦가을이면 겨울에 먹을 김치를 담가왔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올라있는 ‘김장문화’이다. 이때 배추와 무에 파, 마늘, 고추가루 등 여러 양념을 섞어 김치를 담그고 나면 무청과 배추 겉잎이 남는다. 이를 날 것 그대로 말리거나 또는 삶아서 말리면 시래기가 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푸성귀를 다듬을 때 골라 놓은 겉대를 우거지, 무청이나 배추의 잎을 말린 것을 시래기로 정의하고 있다. 초라한 모양이 때로는‘잔뜩 찌푸린 얼굴 표정’에도 비유되는 우거지도 정성껏 말리면 좋은 식재료가 되는 것이다. 배추와 같은 채소의 겉잎은 자라는 동안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된다. 속잎에 비해 거칠고 손상되어 품질이 낮아 보이기 마련이다. 누렇게 시들거나 풀이 죽기도 한다. 그런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목숨을 이어가던 시절에는 그것 마저 버릴 수 없었다. 채소 꺼풀을 주워 모아 그늘에 말려두었다가 잘게 썰어 한 줌의 쌀이나 두부비지, 밀기울을 넣어 죽으로 끓여 먹었다. 그조차도 세 끼를 먹기에 모자랐다. 한 끼 또는 두 끼만 먹으면서 간신히 버티는 사람이 많았다. 춘궁기면 시래기죽이라도 배불리 먹고 싶다는 농민들의 호소가 신문 기사로 실리곤 했다. 적응이 필요한 음식 시래기는 여러 번 먹어야 비로소 맛을 알게 되는 음식이다. 추운 겨울 시골집 마당에서 시래기를 삶는 냄새는 별로 향기롭지 않다. 뜨거운 김이 집안까지 데워 주는 느낌은 좋은데 냄새는 싫다. 배추나 무청을 삶으면 생겨나는 황화합물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삶는 과정에서 알싸한 매운맛이 줄어들고 부드럽고 순한 맛이 된다. 배추에는 감칠맛을 내는 유리 글루탐산이 많이 들어있다. 무청에는 뿌리인 무보다 더 많은 글루탐산이 들어있다. 황화합물과 글루탐산은 본래 육류에 많이 들어 있어서 고기 맛을 내는 성분이다. 배추와 무청을 말려 만든 시래기가 의외로 고기와 잘 어울리는 것은 이 풍미 물질 덕분이다. 고추장, 된장을 풀고 마늘을 넣어 시래기 찌개나 국을 끓여 먹으면 고기를 넣지 않아도 고기 맛이 난다. 멸치 육수를 더하면 풍미가 더 좋다. 음식 맛이 유명한 항구 도시 통영에서는 멸치 대신 장어 뼈로 국물을 낸 시래깃국이 전해 내려온다. 사실 처음부터 누구나 좋아할 맛은 아니다. 어린아이가 생소한 음식을 받아들여 좋아하게 되려면 최소 8회에서 15회까지 그 음식을 경험해봐야 한다. 시래깃국은 이런 설명에 딱 맞는 음식이다. 나 역시 맨 처음 시래깃국을 맛본 게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동안 거들떠보지 않았던 음식이었다는 기억만큼은 분명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느 날부터 시래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일단 좋아하게 되니 시래기로 만든 대부분의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들깨를 넣어 무친 시래기 무침, 된장과 갖은양념을 넣어 졸인 시래기 지짐, 사골 육수에 끓인 사골시래깃국까지 시래기가 들어간 요리면 구미가 당긴다. 정월 대보름은 음력 명절이다. 2022년 정월 대보름은 양력으로 2월 15일이다. 이날은 오곡밥에 묵나물을 많이 먹는다. 묵나물은 ‘묵은 나물’로 박, 오이, 버섯, 호박, 순무, 고사리, 취나물, 오이꼭지, 가지껍질 등을 말려서 겨우내 저장해둔 채소를 삶아서 무친 것을 말한다. 묵나물엔 시래기도 포함된다. 시래기는 자주 얼고 녹으며 완전히 말라야 하는 만큼 일교차가 크게 벌어지는 장소가 적합하다. 해발 300~500m 위치의 산간 지대로 일교차가 20도 이상 벌어지는 강원도 양구 해안분지, 일명 펀치볼에서 생산한 시래기가 유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펀치볼’은 한국전쟁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이 곳의 지형이 화채 그릇을 닮았다고 하여 한 미국인 종군 기자가 시용하며 알려진 이름이다. ©shutterstock 조선 후기의 학자 홍석모(洪錫謨 1781~1857)는 자신의 책 (東國歲時記 1849)에서 정월 대보름에 묵나물을 먹으면 다가올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그의 설명에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시래기를 비롯한 묵나물의 영양학적 가치는 충분하다. 채소를 삶고 말리면 엽록소의 색이 초록색에서 황록색으로 다소 칙칙하게 변하지만, 엽록소 자체는 애초에 사람의 체내로 흡수되어 이용되는 영양성분이 아니다. 비타민B군, 비타민C와 같은 수용성 비타민은 일부 손실되지만 지용성 비타민과 미네랄은 대부분 그대로 남는다. 농촌진흥청 식품성분표에 따르면 데친 무시래기 100g에는 단백질 4g, 탄수화물 9.8g, 지방 0.3g, 식이섬유는 무려 10.3g이 들어있다. 시래기 두 접시만 먹어도 일반적으로 권장하는 식이섬유 섭취량 25g의 절반 이상을 먹게 되는 셈이다. 그 효과가 여름까지 가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변비인 사람의 봄철 식탁에 시래기가 자주 놓이는 건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   오래 푹 삶은 다음 찬물에 담가 놓아 부드러워진 시래기는 다양한 요리에 쓰인다.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곱게 다져 넣고 갖은 양념을 하여 기름에 볶은 시래기나물은 정월대보름 식탁에 빠지지 않는 별식이다. ©Getty Images Korea 추위가 남기고 간 선물 요즘 시래기는 예전 시래기와 다르다. 과거에는 무로 김치를 담그고 남은 무청을 알뜰살뜰 말려 시래기를 만들었다. 이제는 시래기에 적합한 품종을 개발하여 따로 심는다. 시래기 전용 무 종자를 재배하여 얻는 시래기는 일반 무로 수확한 시래기보다 잎이 더 연하고 부드러운 특징이 있다. 식감이 부드러워 껍질을 벗기고 요리하는 게 번거로운 사람이 바로 조리해 먹어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잎 수가 더 많고 잘 자라는 품종을 서로 충분한 거리를 두고 심어 무청이 충분히 자라면 잘라내어 시래기를 만들고 무를 남긴다. 파종하고 45일에서 60일 사이에 수확하여 작은 무는 노지에 그냥 버려두기도 한다. 2021년 11월 29일 의 기사 제목처럼 밭에 남겨진 무가 “시래기가 미워요”라고 외칠만하다. 기사에 따르면 시래기 전용 무는 맛이 약간 맵고 일반 무에 비해 물러서 김치를 담그기에 적당치 않다. 그래서 동치미를 담그거나 채 썰어 말린 후 볶아 차로 만들거나 또는 무장아찌를 담그는 데 활용된다고 한다. 시래기는 전국 어디서나 수확해 먹지만 강원도 양구가 산지로 가장 유명하다. 산간지역인 양구군의 해안분지는 ‘펀치볼’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 종군기자가 붙인 이름이다. 음료를 담는 둥근 그릇처럼 움푹 패인 침식 분지의 지형을 가리키는 영어단어가 지역의 이름으로 아직 남아있는 것은 이곳이 그만큼 격전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 막바지까지도 펀치볼 전투는 치열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양구 펀치볼하면 시래기를 떠올리는 사람이 더 많다. 양구라는 이름처럼 햇볕이 유난히 환한 이곳의 시래기는 맛이 좋기로 유명한데 추운 날씨가 무의 맛을 달고 순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채소가 추위에도 얼지 않으려면 잎과 줄기, 뿌리 속의 수분은 줄고 당분과 단맛 유리 아미노산 함량이 높아진다. 춥고 햇빛이 흐려지는 가을, 겨울에는 매운맛을 내는 풍미 물질이 더 적게 만들어진다. 겨울 배추와 무로 김장을 담그면 맛이 좋은 이유이다. 요즘이야 사시사철 시래기를 먹을 수 있지만, 시래기는 추울 때 먹어야 제맛이라고 느끼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향긋한 시래기는 알리오 올리오나 크림 파스타와도 어울린다. 시래기와 궁합이 잘 맞는 들기름 한 스푼을 넣으면 더 고소하게 즐길 수 있다. 작게 자른 시래기는 아삭하게 씹는 맛을 더해준다. ©blog.naver.com/catseyesung 부드러운 식감과 맛 일단 독특한 그 맛을 알고 나면 시래기와 안 어울리는 음식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물, 죽, 찌개, 된장국처럼 흔한 가정식 요리에 더해 밥에도 넣으면 훌륭한 별미가 된다. 시래기를 2~3cm 길이로 썰어 들기름에 무쳐 쌀 위에 얹어 밥을 지은 다음 파, 마늘, 고춧가루를 넣어 만든 양념장을 얹어 비벼 먹으면 구수한 향기가 입속에 가득 채워진다. 저탄고지나 키토제닉 다이어트가 유행하면서 곡물 중심의 식단이 마치 건강을 위협하는 악당인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도 제법 많다. 하지만 농사를 짓고 곡물 위에 문명을 세운 인간이 이제 와서 곡물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건 부당하다. 지구상 여러 지역에서 밀, 쌀, 감자, 카사바 같은 복합 탄수화물 위주의 식품을 주식으로 하고 밋밋한 맛의 주식을 더 먹을 수 있도록 부식을 곁들이는 식문화는 농경 사회의 공통적 특징이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다. 시래기밥을 한입 먹는 순간 탄성이 나온다. 마치 밥에 숨어있었다는 듯이 감칠맛과 풍미를 뽑아내는 시래기의 맛. 말랑한 밥알과 함께 아작아작 씹히는 시래기의 대비되는 식감이 혀끝에 전달해 주는 재미. 한 숟갈 넘길 때마다 긴 여운이 느껴진다. 밋밋한 맛이었던 밥이 시래기를 만나 은은한 풍미를 주는 음식으로 변모한다. 시래기밥으로 소박한 한 끼를 맛보면 곡물 음식에 대한 잘못된 공격을 당장 멈추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바닥에 무를 깔고 만든 시래기 고등어찜은 또 어떤가. 비슷한 풍미 성분을 공유하는 식재료를 함께 요리하면 잘 어울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헤어졌던 시래기와 무가 다시 만나 이뤄내는 풍미 조합이라니.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돼지고기 김치찜에 시래기를 더해서 시래기 김치찜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일반 김치찜보다 맛이 덜 자극적이다. 생으로 먹는 채소 샐러드와 달리 따뜻한 시래기는 많이 먹어도 속이 편안하다. 이렇게 맛 좋은 시래기를 한국인만 먹을 리 없다. 이탈리아 풀리아 사람들도 순무 줄기와 잎을 귀 모양의 파스타(orecchiette)에 넣어 오일에 볶아 먹는다. 무의 줄기와 잎을 잘 씻어서 생것 그대로 파르메산 치즈, 마늘, 올리브유, 잣과 함께 갈아 무청 페스토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익히지 않고 무청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톡 쏘는 맛이 있다. 견과류를 조금 더하면 맛이 약간 부드러워진다. 먹을 수 있는 한 식재료를 버리지 않고 아껴 쓴다는 건 예로부터 세계 공통의 법칙이었을 것이다. 과거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던 시래기가 이제는 모두가 즐기는 별미로 자리 잡으면서 원래보다 더 부드러운 식감과 맛으로 재탄생했다. 16세기 가난한 이탈리아 농민이 먹을 것이 없어서 만들어 먹은 옥수수죽 폴렌타(polenta)가 현대에 와서는 미식가가 즐기는 요리가 된 것과 유사하다. 이제 한층 부드럽고 맛있어진 시래기를 더욱 즐기면서도 이 독특한 식재료의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한국어 기원 단어들

Culture 2022 SPRING 1001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한국어 기원 단어들 영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전 중 하나로 인정받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지난 2021년 9월, 한국어 기원 단어 26개가 표제어로 새롭게 추가되었다. 고려대학교 신지영 교수가 이번 등재 과정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경험과 의견을 들려준다. 2021년 9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한국어 기원 단어 26개가 표제어로 새롭게 추가되었다. 1928년 초판 간행 이후 이번 업데이트 전까지 등재된 한국어 기원 단어는 총 24개에 불과해 최근 한국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크게 높아진 결과로 해석된다. © 셔터스톡 2021년 5월 어느 날, 옥스퍼드대학의 조지은(Jieun Kiaer 趙知恩) 교수에게서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거의 매주 스카이프로 연구 회의를 하고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 그의 이메일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 담겨 있었다. 그는 4월 초,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로부터 자문 요청을 받았는데 함께할 의향이 없는지 내게 물었다. OED에 새로 등재될 한국어 기원 단어를 검토하고 자문하는 일이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함께하고 싶다고 답장을 보냈다. 조지은 교수는 내 답장을 받고 OED의 월드 잉글리시 담당 편집자인 다니카 살라자르 박사(Dr. Danica Salazar)에게 이메일을 보내 필자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할 것을 권고했다. 살라자르 박사는 이어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감사하다는 메일을 내게 보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신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두 개의 PDF 파일 자문을 수락한 후 질문이 담긴 두 개의 PDF 파일을 전달받았다. 살라자르 박사가 작성한 첫 번째 파일은 2021년 9월 업데이트에 때 포함될 한국어 기원 단어가 두 개의 표로 정리되어 있는 2쪽 분량의 문서였다. 두 개의 표 중 하나에는 새로 등재될 표제어의 목록과 의문 사항이, 다른 하나에는 이미 등재되어 있는 표제어 중에서 수정이 필요한 표제어의 목록과 이에 대한 질문이 내용이 담겨 있었다. 두 번째 파일은 어원 담당자 카트린 디어(Katrin Their)가 보낸 6쪽 분량의 문서였다. 옥스퍼드 사전은 학술 사전의 성격이 강해서 표제어에 대한 어원 정보부터 방대한 예문은 물론 다양한 언어학적 정보를 다층적으로 담고 있다. 따라서 해당 언어를 알지 못하고 영어로 된 문서만을 기초로 외국어 기원 단어의 어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어원은 해당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전문가의 자문이 꼭 필요한 영역이다. 어원 담당자의 질문은 매우 구체적이었고, 확인하고자 하는 바도 명료했다.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자료를 기반으로 판단한 내용이 맞는지 틀렸는지, 틀렸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어떻게 틀렸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어원을 알기 어려운 경우와 그와 관련하여 궁금한 사항들을 조밀하게 물었다. 한국어를 모르면서 어떻게 이렇게 추론해 낼 수 있었을까 놀라웠다. 엉뚱하게 추론한 경우도 있었는데, 자문위원으로서 보완해 줄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 이 파일들을 열어보고 가장 놀랍고 반가웠던 것은 등재 예정 표제어의 규모였다. 무려 26개나 되는 표제어가 새로 등재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사전에 한꺼번에 이처럼 많은 한국어 기원 단어가 올라가게 된 것은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려 60만 개가 넘는 표제어 가운데 겨우 26개로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142년에 걸친 이 사전의 간행 역사에서 한국어 기원 단어가 이제까지 언제 얼마나 등재되었는지 돌아본다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aegyo, n. and adj. A. n. Cuteness or charm, esp. of a sort considered characteristic of Korean popular culture. Also: behaviour regarded as cute, charming, or adorable. Cf. KAWAII n. B. adj. Characterized by ‘aegyo’, cute, charming, adorable. banchan, n. In Korean cookery: a small side dish of vegetables, etc., served along with rice as part of a typical Korean meal. bulgogi, n. In Korean cookery: a dish of thin slices of beef or pork which are marinated then grilled or stir-fried. chimaek, n. In South Korea and Korean-style restaurants: fried chicken served with beer. Popularized outside South Korea by the Korean television drama My Love from the Star (2014). daebak, n., int., and adj. A. n. Something lucrative or desirable, esp. when acquired or found by chance; a windfall, a jackpot. B. int. Expressing enthusiastic approval: ‘fantastic!’, ‘amazing!’ C. adj. As a general term of approval: excellent, fantastic, great fighting, int. Esp. in Korea and Korean contexts: expressing encouragement, incitement, or support: ‘Go on!’ ‘Go for it!’ hallyu, n. The increase in international interest in South Korea and its popular culture, esp. as represented by the global success of South Korean music, film, television, fashion, and food. Also: South Korean popular culture and entertainment itself. Frequently as a modifier, as inhallyu craze, hallyu fan, hallyu star, etc. Cf. K-, comb. form Forming nouns relating to South Korea and its (popular) culture, as K-beauty, K-culture, K-food, K-style, etc.Recorded earliest in K-POP n. See also K-DRAMA n. K-drama, n. A television series in the Korean language and produced in South Korea. Also: such series collectively. kimbap, n. A Korean dish consisting of cooked rice and other ingredients wrapped in a sheet of seaweed and cut into bite-sized slices. Konglish, n. and adj. A. n. A mixture of Korean and English, esp. an informal hybrid language spoken by Koreans, incorporating elements of Korean and English.In early use frequently depreciative. B. adj. Combining elements of Korean and English; of, relating to, or expressed in Konglish.In early use frequently depreciative. Korean wave, n. The rise of international interest in South Korea and its popular culture which took place in the late 20th and 21st centuries, esp. as represented by the global success of Korean music, film, television, fashion, and food ;= HALLYU n.; Cf. K- comb. form. manhwa, n. A Korean genre of cartoons and comic books, often influenced by Japanese manga. Also: a cartoon or comic book in this genre. Cf. MANGA n.2Occasionally also applied to animated film. mukbang, n. A video, esp. one that is livestreamed, that features a person eating a large quantity of food and talking to the audience. Also: such videos collectively or as a phenomenon. noona, n. In Korean-speaking contexts: a boy’s or man’s elder sister. Also as a respectful form of address or term of endearment, and in extended use with reference to an older female friend. oppa, n. 1.In Korean-speaking contexts: a girl’s or woman’s elder brother. Also as a respectful form of address or term of endearment, and in extended use with reference to an older male friend or boyfriend. 2.An attractive South Korean man, esp. a famous or popular actor or singer. samgyeopsal, n. A Korean dish of thinly sliced pork belly, usually served raw to be cooked by the diner on a tabletop grill. skinship, n. Esp. in Japanese and Korean contexts: touching or close physical contact between parent and child or (esp. in later use) between lovers or friends, used to express affection or strengthen an emotional bond. trot, n. A genre of Korean popular music characterized by repetitive rhythms and emotional lyrics, combining a traditional Korean singing style with influences from Japanese, European, and American popular music. Also (and in earliest use) as a modifier,as in trot music, trot song, etc.This genre of music originated in the early 1900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unni, n. In Korean-speaking contexts: a girl’s or woman’s elder sister. Also as a respectful form of address or term of endearment, and in extended use with reference to an older female friend or an admired actress or singer. 그야말로 대박! 옥스퍼드 사전의 첫 번째 완결본이 나온 시기는 본격적으로 사전을 만들기 시작하고 49년이 지난 뒤였다. 1928년 간행된 12권 분량의 초판에는 약 41만 4천 8백 개의 표제어와 182만 개 이상의 보기 인용문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 사전에는 한국어 관련 표제어는 하나도 없었다. 한국과 관련 지을 수 있는 표제어가 이 사전에 처음 등재된 것은 초판의 추가본이 출간된 1933년이었다. ‘Korean’과 ‘Koreanize’가 그것이다. 이후의 추가본에도 몇 개의 단어가 더 등재되었다. 1976년에는 ‘gisaeng(궁중이나 지방 관청에 소속되어 노래와 춤 등 연희를 담당하던 여성)’, ‘Hangul(한국의 고유 문자)’, ‘kimchi(배추에 여러 가지 양념을 섞어 발효시킨 음식)’, ‘Kono(한국의 보드 게임)’, ‘myon(면: 행정구역 단위)’, ‘makkoli(전통주의 한 종류)’ 등 6개가, 1982년에는 ‘sijo(전통 성악 형식 또는 3행으로 이루어진 정형시)’, ‘taekwondo(전통 무술의 한 가지)’, ‘won(화폐 단위)’, ‘yangban(전통 사회의 지배 계층)’, ‘ri(행정구역 단위)’, ‘onmun(한글을 낮춰 부른 이름)’, ‘ondol(전통 가옥의 바닥 난방 시설)’ 등 7개가 올랐다. 그 결과 1989년에 간행된 2판에는 총 15개의 한국어 기원 단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한국어 기원 단어가 다시 등재된 것은 21년이 지난 2003년이었다. 이때 포함된 단어는 ‘hapkido(근대 무술)’였다.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2011년에는 ‘bibimbap(밥에 여러 가지 채소, 고기를 섞어 비벼 먹는 음식), 2015년에는 ‘soju(증류주의 일종)’와 ‘webtoon(플랫폼 매체에 연재되는 만화)’, 2016년에는 ‘doenjang(된장)’, ‘gochujang(고추장)’, ‘K-pop’, 2017년에는 ‘chaebol(재벌)’, 그리고 2019년에는 북한의 통치 이념인‘Juche(주체)’가 올라갔다. 이처럼 2021년 9월 업데이트 이전까지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한국어 기원 단어는 모두 24개에 불과했다. 그러니 한꺼번에 26개나 올라가게 된 것은 살라자르 박사의 표현대로 “Daebak(대박)!”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이번에 새로 등재된 표제어 가운데 ‘daebak’이 포함되어 있다. ‘뜻밖에 얻은횡재’또는 ‘대단히 멋진 일’ 같은 의미를 지닌 이 말이 그만큼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hallyu’ 및 그와 같은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 ‘Korean wave’가 동시에 채택되었고, ‘K-drama’, ‘mukbang’, ‘oppa’ 같은 단어들의 등재도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음을 확실히 보여 준다. 또한 재미있는 사실은 이제까지 한국식 영어로 비하되었던 ‘fighting’이나 ‘skinship’ 같은 단어들이 ‘Konglish’와 함께 등재되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질문 옥스퍼드 측에서 자문을 얻고자 하는 내용은 다양했다. 새로 등재될 단어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이미 등재되어 있는 단어 중에서 수정이 필요한 12개 단어에 대한 자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976년 추가본에 등재된 ‘gisaeng’의 음절 경계(syllable boundary) 정보를 요청하거나 ‘kimchi’의 어원을 물었다. 가장 많은 질문은 단어의 구조에 대한 것이었다. ‘반찬’의 ‘반’과 ‘김밥’의 ‘밥’이 서로 관계가 있는 말인지에 대한 질문처럼 단어가 어떤 의미 조각으로 나누어지는지, 또한 각 의미 조각의 어종(origin)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또한 등재 예정 단어에 대한 자신의 분석 내용이 맞는지 검토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고, 일부 단어의 경우는 한국어에서의 용법을 묻기도 했고, 남북한의 차이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또한‘오빠’가 남자 친구를 의미하는 것처럼 ‘누나’도 여자 친구를 의미하는가와 같은 재미있는 질문도 있었다. 자문 과정에서 내가 새롭게 알게 된 정보도 있었다. ‘PC방’ 관련 질문 중 그곳에서 음식을 파는지 궁금해했다. PC방에서 컵라면 정도 파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나는 컵라면을 음식이라 할 수 있을까 내심 고민하면서 검색을 해 보았다. 그 결과 요즘 PC방에서는 ‘피시토랑(PC+restaurant)’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음식을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검색한 이미지를 갈무리한 후 주석을 달아 보내 주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블로그 글에서부터 논문까지 다양한 자료를 두루 참고했다. 자문위원으로서 질문을 받지 않았다면 그냥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많은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에는 조지은 교수와 조율하여 최종 답변을 만들었다. 그리고 담당자에게 우리의 답을 전달했다. 몇 가지 추가 질문이 오간 후에 자문은 마무리되었다.   dongchimi, n. In Korean cuisine: a type of kimchi made with radish and typically also containing napa cabbage, spring onions, green chilli, and pear, traditionally eaten during winter. Cf. KIMCHI n.     galbi, n. In Korean cookery: a dish of beef short ribs, usually marinated in soy sauce, garlic, and sugar, and sometimes cooked on a grill at the table.     hanbok, n. A traditional Korean costume consisting of a long-sleeved jacket or blouse and a long, high-waisted skirt for women or loose-fitting trousers for men, typically worn on formal or ceremonial occasions. © MBC     japchae, n. A Korean dish consisting of cellophane noodles made from sweet potato starch, stir-fried with vegetables and other ingredients, and typically seasoned with soy sauce and sesame oil. Cf. cellophane noodle n.     PC bang, n. In South Korea: an establishment with multiple computer terminals providing access to the internet for a fee, usually for gaming.     tang soo do, n. A Korean martial art using the hands and feet to deliver and block blows, similar to karate. © 국제당수도연맹   표제어의 조건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그간 한국어 기원 단어가 옥스퍼드 사전에 별로 없었을까? 그런데 왜 이번에 기존의 단어 수보다 더 많은 단어들이 한꺼번에 올라가게 되었을까? 사전에 올릴 단어는 누가 어떻게 결정할까? 이렇게 많은 단어가 올라간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 그럼 앞으로는 어떨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번에 등재된 단어들은 한류의 세계적인 영향력을 그대로 보여 준다. K-pop팬들이 인기 아이돌 그룹 멤버를 부르는 호칭어로 사용하면서 알려지게 된 ‘오빠, 언니, 누나’와 팬들이 아이돌에게 요구하는 ‘애교’는 다국적 팬들 사이에서 공통어가 되었고 이 말들이 범위를 넓혀 사용되다가 사전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한국 드라마와 먹방 콘텐츠, 그리고 한국 대중 가요가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되면서 ‘K-드라마’와 ‘먹방’, ‘트로트’가 영어에 편입되었고, 2015년에 등재된 ‘웹툰’과는 별도로 ‘만화’도 올라가게 되었다. 또한 비속어로 치부되어 국내에서는 사전에도 오르지 못한 ‘먹방’과 ‘치맥’이 옥스퍼드 사전에 먼저 오르는 신기한 일도 목격하게 되었다. 한류가 일기 전, 60만 개의 표제어를 가진 옥스퍼드 사전에 단지 24개의 표제어만이 한국과 관련된 단어였다는 사실은 영어권에서 한국 문화의 영향력이 미약했고, 영어 문헌에 한국어 기원 단어가 그다지 등장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과소 대표된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등재어가 되려면 편집자의 눈에 자주 띄어야 하고, 문헌에서 일정 기간 이상 꾸준히 확인되어야 하며, 그 단어가 기대되는 맥락에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떨까? 사실 26개 표제어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 단어들이 등재된 것은 그 이전 최소 15~20년 이상 꾸준히 사용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문화의 영향력은 이번 등재 단어들이 관찰되기 시작하였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다. 특히 최근 의 경우와 같이 글로벌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확산되는 한국 문화 콘텐츠는 세계인의 귀에 곧바로 한국어를 들려주고 있다. 그렇게 한국어는 더욱 널리 퍼져 나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필자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다.

사유의 시공간에 이르는 여정

Culture 2022 SPRING 1013

사유의 시공간에 이르는 여정   © 지안 입구는 좁고 통로는 어둡다. 어둠 속에서 스며 나오는 빛은 좀처럼 조도를 높이지 않는다. 시간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왼쪽 벽에서 희뿌연 빛이 기척을 보낸다. 광대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누워 있다. 거대한 돌, 혹은 얼음이 아주 느린 속도로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물이 되고, 물은 더욱 느리게 수증기로 피어올라 온 세상이 되었다가 다시 돌로 굳어진다. 장 쥘리엥 푸스(Jean-Julien Pous)의 비디오 작품이 환기시키는 완만한 우주적 순환의 ‘세례’를 거쳐 우리는 마침내 ‘사유의 방’에 들어선다. 오감이 깨어난다. 전신의 모공이 조금씩 열리고 내면의 공간이 무한대로 넓어진다. 깨어남과 고요함이 하나가 되는 시간, 부지불식간에 바닥이 조금씩 높아지며 저 어둠과 밝음이 만나는 타원형 지평에 신비스러운 두 존재가 떠오른다. 그들 사이의 가까우면서도 먼 공간 속으로 사유의 여정이 시작된다. 서로 닮았으면서도 서로 다른 두 반가사유상이 교환하는 신비의 미소가 거기 있다. 남산을 등지고 한강을 앞에 눕힌 용산 공원 숲속에 자리한 국립중앙박물관이 건축가 최욱(Choi Wook 崔旭)과 브랜드 스토리 전문팀에 의뢰하여 야심차게 기획하여 2021년 11월 일반에 개방한 공간이 바로 이 방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이 우선 머리에 떠올리는 상징이 라면 이제 서울의 국립박물관을 찾는 이들은 ‘사유의 방’과 그 안에서 만나는 두 구의 금동반가사유상을 가장 먼저 연상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여인의 초상화(77 × 53 ㎝)는 16세기 초의 그림이지만, 둘 다 높이 1m가 채 되지 않는 국보 78호, 83호 금동 조각상은 그보다 1000년 가까이 앞선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신라 불교 미술의 절정이다. 이 걸작들은 이름이 함축한 두 가지 특징을 지녔다. 첫째, 서거나 앉거나 누워 있는 다른 불상들과 달리 둥근 의자에 걸터앉아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 위에 얹고, 앉음과 일어섬 사이의 독특한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오른쪽 손을 들어서 검지와 중지의 끝을 가볍게 턱에 댄 자세로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여 준다. 로댕의 보다 1300년 전부터 이 미륵보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불교에서는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불상도 오랜 세월이 지나 미술관에 들어오면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진정한 사유는 나를 버리는 것인 동시에 나를 찾는 길이다. 이 두 반가상은 그 버림과 찾음의 사이의 미세한 진동을 신비로운 미소로 비추며 넓고 깊은 사유의 시공간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주, 세상의 끝과 시작

Culture 2022 SPRING 1046

영주, 세상의 끝과 시작 두 개의 큰 강의 발원지이자, 두 국가의 시작과 끝을 기억하는 땅 영주에는 헤어지는 시간을 늦추는 굽고 낮은 다리와 신비한 전설을 간직한 뜬 바위가 있다. 천혜의 자연 속에 숨겨진 깊은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보물 같은 공간이 말을 걸어온다. 경상북도 영주 무섬마을은 태백산에서 흘러내려온 두 개의 맑은 시내가 합쳐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다. 1979년 현대식 다리가 놓이기 전 이 긴 외나무다리가 물길이 동네를 휘감아 돌아 섬이 되어버린 마을과 외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어쩌면 옛날 영주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곳이 세상의 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주시는 한반도의 동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경상북도의 가장 위쪽에 있다. 강원도와 맞닿아 있는 북동쪽으로는 태백산이, 서쪽 경계선을 길게 공유하고 있는 충청북도 쪽으로는 소백산이 우뚝 솟아 있다. 영주 사람들은 북쪽을 가로막은 저 높은 산들의 건너편이 궁금했을 것이다. 저 남쪽 바닷가에서부터 세계의 넓이가 궁금한 타지 사람들도 끊임없이 모여들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서로의 상상과 경험을 나누었으리라. 남쪽에서부터 영주로 모여든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을 물길을 생각해봤다. 남한에서 가장 긴 낙동강이다. 나는 영주에 반드시 그 발원지가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정보를 찾아봤다. 짐작대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1454)에 “낙동강의 근원은 태백산 황지, 문경 초점, 순흥 소백산이며, 그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 기사에서 ‘순흥’이 바로 영주 일대의 옛 이름이다. 그뿐 아니라 놀라운 정보를 하나 더 얻었다. 영주에는 낙동강뿐 아니라 한강의 여러 작은 발원지들 가운데 하나도 있었다.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강이라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뜻밖의 정보였다. 한반도 남쪽의 중요한 두 강이 모두 이 곳에서 흘러나왔으니 영주는 세상의 시작이기도 한 셈이었다.오후 늦게 서울을 벗어나 두 시간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저 멀리 죽령터널 입구가 보였다. 죽령터널은 소백산 아래를 뚫어 충북과 경북을 이은 4,600미터짜리 긴 관문이다. 터널 저쪽이 바로 영주라는 걸 알고 있어 다른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게 실감났다. 17세기 중엽 비옥한 토지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조성된 무섬마을에는 현재 40여 호의 고가옥이 남아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로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외나무다리가 굽은 이유 나는 영주 남쪽의 무섬마을로 향했다. 강물이 크게 굽어지는 안쪽, 마치 강줄기를 밀어내며 혹처럼 툭 불거진 육지에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 이런 지형에 형성된 마을을 물돌이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앞과 양옆은 물길이 감싼 채 휘돌고 뒤로는 산이 막고 있어 그야말로 섬이나 다름없다. 완벽히 고립된 곳에 마을이 형성된 이유는 이런 지형이 거주민들에게 좋은 기운을 준다는 풍수학적 믿음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자급하며 살 수 있을 만큼 넓고 기름진 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이 마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건 강을 가로질러 놓인 외나무다리다. 강은 여름 장마철만 아니면 두 발로 건너다닐 수 있을 만큼 얕은데, 그렇다고 옷을 적실 수는 없으니 간단하게나마 다리를 놓은 것이다. 모래톱과 얕은 물에서 고작 1미터나 떠 있을까? 외나무다리의 폭은 남자 어른 손으로 두 뼘이 될까 말까 했다. 희한하게도 다리는 강을 직선으로 가로지르지 않고 커다란 S자 형태로 늘어져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알 길이 없었으나 보기에는 무척 아름다웠다. 사진에 담아두고 오래 추억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 남녀노소에게 인기이고, 드라마나 방송에도 소개되어 끊임없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호젓하게 즐길 생각으로 일찍 도착했다. 나처럼 서둘러 움직이는 사람이 없진 않았다. 외나무다리 위에 앞뒤로 서서 느릿느릿 건너는 한 커플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카메라 앵글에서 빠져나가길 기다리며 다리를 굽이지게 설치한 이유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장마 때문에 물살이 거세지면 쉽게 무너진다고 했다. 지금이야 북쪽으로 멀지 않은 위치에 차량이 다닐 수 있을 만큼 큰 다리가 놓여 있으나 그것이 없던 시절에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한번 물살에 휩쓸려버리면 다시 설치하기가 무척 번거로울 게 뻔하고 불어난 강의 물살을 이겨내도록 단단하게 놓을 기술도 없었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자주 다시 놓지 않으려면 재료도 아낄 겸 직선으로 놓는 게 아무래도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고택과 정자로 가득한 무섬마을의 가옥 중 16동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잘 보존돼있다. 아직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아 옛 선비 고을의 고요한 정취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혹시나 그저 미관상의 이유 때문이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리를 건너봤다. 한 가닥 외나무다리에는 곳곳에 다리의 폭만큼 짤막하게 옆으로 덧대 놓아 두 가닥이 되는 곳이 있었다. ‘비껴다리’라고 불리는 구조물이었다. 어쩌다 사람과 마주치게 되면 잠시 비켜서서 양보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사려 깊고 합리적인 사고에 감탄하는 한편으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S자로 길게 구부려 놓은 비효율적 형상이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마을로 들어서자 잘 보존된 전통 가옥들이 한눈에 가득 담겼다. 19세기 말까지도 120여 가구에 500여 명이 살았을 만큼 큰 마을이었다. 마을을 대표하는 몇몇 기와집들의 크기와 모양만 봐도 그저 잠시 사람들이 거주했던 섬이 아니라 하나의 이상적인 소도시쯤으로 봐야 할 것 같았다. 이곳에서 수많은 학자와 선비가 배출되었고 독립유공자만도 다섯 명이라니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의 안목과 뜻이 새삼 가슴 깊이 다가왔다. 돌담과 흙길을 따라 걷다가 무섬마을 자료 전시관에 들어섰다. 마당에 한 시인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조지훈(Cho Chi-hun 趙芝薰 1920~1968). 학창시절 교과서를 펼치고 그의 시 「승무(僧舞 The Nun's Dance)」를 소리 내어 읊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섬은 그의 처가였고 그가 이곳에서 남긴 시 「별리(別離)」가 커다란 바위에 아내이자 서예가인 김난희(金蘭姬 1922~)의 필치로 깊게 새겨져 기념되고 있었다. 남편이 집을 나서 어디론가 떠나는 상황을 새색시의 눈으로 그린 시였다. 아내는 남편의 뒷모습을 마루의 큰 기둥 뒤에서 몰래 지켜보며 눈물로 옷고름을 적신다. 아마 이 여인의 남편도 외나무다리로 강을 건넜으리라.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문득 외나무다리의 S자 모양이 이해되는 듯했다. 가족을 남겨두고 마을을 나서던 무수한 사람들은 쉽게 발길을 뗄 수 없었다. 돌아올 기약 없이 떠나 가야만 하는 마음이 무거워 차마 강을 훌쩍 건너버리지 못했고, 한 번쯤은 돌아보고 싶어도 남아서 그 모습을 볼 이의 가슴이 더 미어질 것을 염려해 눈물을 삼키며 걸었다. 보내는 이도 기둥 뒤에 몸을 숨겨 떠나는 이의 마음에 짐이 되지 않으려 애썼다. 그나마 길게 굽이져 놓인 다리가 강을 건너는 시간을 늦춰주니 서로 위안으로 삼았다. 나는 시 속의 남편이 한 걸음 한 걸음 아껴 디디며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머리 위로 흰 구름이 무심히 피었다 지고, 아득히 멀리서 떠내려온 작은 잎사귀는 발 아래 잠시 머물지도 않고 스쳐 흘러가버린다. 열린 왕조와 닫힌 왕조 시내로 돌아와 영주의 중심가를 돌아봤다. 도심 인근에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고향집이 있었다. 정도전은 조선왕조 창업의 기틀을 설계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한 국가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 큰 강들의 발원지를 품은 영주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의 고향집은 세 명의 판서를 배출했다 해서 ‘삼판서 고택’이라고 불렸다. 비록 원래 있던 자리에서 수해를 당해 무너진 것을 옮겨다 복원해놓았다 해도 한 국가의 통치 이념을 성립하고 대를 이어 고위 관리를 배출해 낸 가문의 위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천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바위벽의 마애여래삼존불상은 통일신라시대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 발견 당시 불상 세 구의 양 눈이 모두 정으로 쪼아 파져 있었지만, 큼직한 코나 꾹 다문 입, 둥글고 살찐 얼굴에 힘찬 기상이 배어 있다. 시내 중심가로 들어가 영주 근대문화거리를 둘러보다가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 숭은전에 이르렀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그가 고려에 항복하러 개성으로 가던 길에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이어진 것이라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방금 하나의 왕조를 열었던 혁명적 사상가를 만나고 온 길이었고 이제는 천 년을 이어 오다 멸망한 자신의 나라를 새로운 왕조에 바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임금을 만나는 중이었다. 국운이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백성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었다고 한다. 영주는 경순왕의 그런 애민정신을 기리며 그를 신으로 모시고 있었다. 숭은전 앞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용이 이 자리에 떨구었을 눈물을 생각하는 중에 겨울 해는 또 빠르게 기울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인데도 부석사에 오르는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부석사는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통도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긴 오르막길과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감상하던 중에 이마에 땀이 맺히고 숨이 차올랐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 앞뒤에서 걷고 있는 관광객들은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공중에 떠다니며 도적떼를 물리치고 내려앉았다는 바위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잠시의 불편쯤이야 전설이 깃든 신비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기꺼이 치를 수 있는 대가인 셈이었다. 그 전설적 바위 곁에 부석사가 지어지던 676년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할 만큼 강성하던 때다. 불교가 국교로 그만큼 큰 지원을 받던 시기였기에 부석사의 규모나 위상은 특별했다. 그런 나라가 약 250년 뒤에는 남의 손에 넘어갔다. 복잡한 생각에 잠겨 드디어 108개의 계단을 모두 지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무량수전 앞에 섰을 때, 내 머릿속에서 왕조의 흥망성쇠 따위는 어느새 하얗게 지워지고 없었다. 무량수전을 마주하고 왼쪽에 바로 그 뜬 돌, ‘부석’이 있었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인문지리서 『택리지』(擇里志 1751)에는 바위 아래로 밧줄을 밀어넣고 훑어도 걸리는 데가 없다고 적혀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부석사 뒤편의 화강암 일부가 판상절리에 의해 떨어져 나와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다가 잔돌들 위에 얹혀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눈에는 어른 스무 명쯤 둘러앉을 수 있을 크기의 테이블 같았다. 속세의 잣대로 절의 창건설화를 재고 있자니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부석과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경계심 없이 느리고 게으른 걸음걸이에서 일종의 핀잔이 읽혔다. 고양이가 나타났던 방향의 반대편으로 사라지고서야 나는 무심결에 도서관 책벌레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고 하던데 내게 깨우침을 준 고양이에게서 혹시 부처를 만난 건 아닐까. 부석사 범종루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진 절의 전경과 그 너머 소백산맥이 구비구비 절경을 이룬다. 부석사는 676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창건된 이래 이제까지 법등이 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의 대표적 불교 사찰이다. 2018년 다른 여섯 개 사찰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범종루는 안양루와 함께 부석사에 있는 2개의 오래 된 누각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범종루는 사찰 마당 가장자리에 자리하지만, 이곳의 범종루는 경내 중심축에 당당히 위치하고 있다. 사물이 배치되어 하루 두 번 이들을 두드리며 중생의 평안을 비는 예식의 장소이기도 하다. 순환을 포용하는 공간 오후에는 강원도 방향으로 난 고개, 마구령을 넘어 남대리의 산간마을을 다녀왔고 다시 부석사 아래로 돌아와 소수서원을 둘러봤다. 남대리는 조선의 6대 왕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이 삼촌인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의 손에 폐위되어 유배길에 올랐을 때 머물렀던 곳이며, 바로 거기에 한강의 영남 발원지가 있다. 소수서원은 학자를 양성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지방 사립 교육기관인데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아홉 곳 중 하나다. 최초로 임금이 그 이름을 내려준 서원이며 한반도에 처음 성리학을 전파한 안향(安珦 1243~1306)을 비롯해 많은 유학의 거목들을 모시고 있다. 소수서원 주위의 둘레길은 자연과 어우러진 오래 된 서원의 경관을 풍취를 즐기기에 좋은 산책코스다. 수령이 300년에서 많게는 1000년에 이르는 소나무를 포함해 적송 수백 그루가 자라고 있다. 1542년 설립된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서원으로 2019년 다른 여덟 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용한 산사 성혈사에는 아름다운 건물 나한전이 있다. 단청을 입히지 않아 단아하면서도 더욱 그윽한 품위를 느끼게 하는 나한전의 세 칸 연꽃과 연잎, 두루미, 개구리, 물고기 등 상징적 문양이 정교한 솜씨로 새겨져 있다. 영주의 곳곳을 다녀 볼수록 그 독특한 면모가 감탄스러웠다. 한 국가의 설계자가 난 곳이면서 사라진 왕조의 마지막 임금을 기리고 있는가 하면, 서원을 통해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한 곳인데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어린 왕의 여린 발자국이 남은 곳이기도 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순환을 반복해서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영주가 자랑하는 인물인 송상도(宋相燾 1871~1946) 선생을 통해 발원과 회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호를 붙여 엮은 저서 『기려수필』(騎驢隨筆 1955)에는 식민지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한국인들의 이모저모가 아주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선생은 봄에 영주를 떠났다가 겨울이면 한껏 초췌해진 몰골로 돌아왔다고 한다. 식민지 주민으로 점령국에 맞서는 일에 대해 캐고 다니는 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들은 얘기들을 깨알 같은 글씨로 종이에 기록하고 그 종이를 새끼처럼 꼬아 봇짐의 멜빵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검문을 당하더라도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1910년 이후 수십 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애국지사들의 유가족을 만났고 사건 당시의 신문기사와 같은 객관적 자료를 조금씩 수집했다. 송상도 선생의 사례에 이르러 나는 뜻을 품고 바깥 세계로 나갈 때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를 되새기게 되었다. 무섬마을에 가족을 남겨두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사람들의 단단한 각오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포용과 포섭이었다. 세상 모든 것의 발원지인 동시에 그 어떤 것도 회귀할 수 있는 피안의 공간이고자 하는 것이 영주에 깃들어 있는 정신이었다. 마지막 날 아침, 나는 서울로 돌아올 채비를 할 때까지도 평생을 바쳐 나라를 다시 일으킬 불씨를 모으던 어느 선비의 행로를 생각했다.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지는 못할지언정 고속도로를 타고 휑하니 돌아가는 건 어딘가 송구했다. 나는 옛 죽령 고갯길로 방향을 잡았다. 가파르고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 도로를 운전하는 동안 이 험한 고개를 두 발로 넘어 영주를 떠나던 선비의 단단하고도 거대한 기개(氣槪)를 느껴보고 싶었다. 고갯마루에 올랐을 때, 나는 지금 서울로 돌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영주에서 나서는 것인가 자문했다. 영주에서의 경험을 자랑할 것 같고 여러 번 다시 올 것이므로 출발로 여기기로 했다.

고립과 자유, 세상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Culture 2022 SPRING 994

고립과 자유, 세상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이름과 실제가 정반대인 비무장지대(DMZ)는 군사분계선 기준 남북 양방향 각 2km 폭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고 있는‘모순의 땅’ 이다. 남측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역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두 예술가에 의해 묵직한 시대적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으로 재해석되어 주목을 끌었다. 한국 작가들에게 ‘분단’은 피하고 싶은 주제일 수도 있다. 너무 뻔하거나, 혹은 너무 거창하기 때문일 것이다. 분단국가의 시민이라는 태생적 조건을 예술 작업으로 끌어왔을 때 딜레마에 빠지기도 쉽다. 다른 나라 작가들이 말하기 힘든 주제인 만큼 해외에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목하지만, 국내에선 “쉬운 길을 택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분단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경원(Moon Kyung-won 文敬媛) 과 전준호(Jeon Joon-ho 全浚晧)는 이 양날의 검을 호기롭고 영리하게 빼 들었다. 2021년 9월 3일 시작해 2022년 2월 2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MMCA 현대차 시리즈 2021: 문경원·전준호 – 미지에서 온 소식, 자유의 마을’(MMCA Hyundai Motor Series 2021: News from Nowhere – Freedom Village) 전시에서 이들은 분단이라는 이슈를 홈그라운드에 과감히 펼쳐 보였다. 두 작가는 한국 미술계에서 보기 드문 아티스트 듀오다. 이들은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데 이화여대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문경원은 서울에서, 전준호는 고향이자 작업 기반인 부산의 영도에서 각자의 개인 작업과 공동 프로젝트를 병행한다. 두 사람이 처음 의기투합한 2009년 이후 자본주의의 모순, 역사의 수레바퀴에 가려 희생된 개인, 기후 변화 등 여러 사회 담론과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다루며 예술의 역할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왔다. 두 작가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돼 전시를 선보이면서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문경원(왼쪽)과 전준호 작가가 자신들이 협업한 이 전시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1’ 로 채택된 이 작품은 영상, 설치, 아카이브, 사진, 대형 회화 그리고 연계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모바일 플랫폼으로 구성되었다. 비무장지대(DMZ) 안 대성동 마을을 주제로 하여“인류의 대립과 갈등으로 탄생한 기형적 세계를 조망하고, 팬데믹으로 단절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현재를 성찰했다”고 작가들은 설명한다. 미래에서 관찰한 현재 이번 전시 제목인 ‘미지에서 온 소식’은 이들이 공동으로 펼쳐온 장기 프로젝트이자, 다른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벌이는 협업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을 통해 두 작가는 영상, 설치, 아카이브, 출판물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통섭의 연작 전시를 진행해 왔다. 전시 제목은 19세기 후반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을 이끈 사상가이자 시인, 소설가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가 1890년 쓴 동명 소설에서 따왔다. 그는 꿈에서 200여 년 후의 런던을 닷새간 여행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당대의 현실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문경원과 전준호는 이 소설에서 제목뿐만 아니라 미래에 시선을 던져 놓고 그 시점에서 현재를 깊숙이 관찰하는 형식 또한 빌려왔다. 두 작가는 “우리의 미래 지향적인 설정은 미래를 진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아젠다를 논의하기 위한 설정”이라고 설명했다. 2012년 독일 카셀 지역에서 열린 5년제 현대 미술 미술 행사 ‘도쿠멘타(documenta 13)’에서 ‘세상의 저편’(The End of the World) 라는 부제로 처음 선보인 이 작품으로 두 작가는 그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2’ 최종 수상 작가로 선정됐다. 이후 미국 시카고 예술대학 설리번 갤러리(2013), 스위스 미그로스 현대미술관(2015), 영국 테이트 리버풀(2018) 등 여러 도시에서 각기 다른 부제로 전시를 열어 화제를 모았다. 2021년 초 두 사람이 ‘MMCA 현대차 시리즈 2021’ 작가로 선정되면서 마침내 이 작품이 한국에서 대규모로 펼쳐지게 됐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2014년부터 매년 한국을 대표하는 중진 작가한 사람을 초청해 개인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2020년 양혜규에 이어 문경원·전준호 작가는 여덟 번째 주인공이 됐다. “이 프로젝트는 국가와 도시를 옮겨 다닐 때마다 그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 현안을 담아 왔어요. 한국이 무대가 되니 고민이 커졌습니다. 분단국가라는 클리셰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그것은 한국 작가라면 꼭 다뤄야 하는 사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만 머물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역사를 끌어내는 체험으로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분단을 주제로 다루게 된 배경을 전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2021, 2채널 HD 영상설치, 컬러, 사운드, 14분 35초.서로 등을 맞댄 대형 화면 2개가 각기 다른 영상을 보여준다. 작품은 전시공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영상의 흐름에 따라 조명이 점멸하거나 음향이 흘러나오는 등의 연출이 관람객의 몰입을 돕는다. 화면 속 자유를 갈망하는 남자 A(배우 박정민)가 산을 다니며 채집할 자생 식물을 찾고 있다. 갈등이 만든 기형적 공간 작품의 배경으로 선택한 곳은 남측 비무장지대(DMZ) 내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인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었다. 한국의 마을 이름은 대부분 지형이나 그 마을에 깃든 전설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마을은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A는 바깥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대신, 식물을 채집해서 연구하고 표본을 만든다. 이 표본에 풍선을 달아 하늘로 날려보내면 반대편 화면의 ‘B’가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바깥 세상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비게이션에서조차 표시되지 않는 이 마을은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로 70년 가까이 바깥 세계와 단절된 채 시간이 멈춰 있는 곳이다. 1951년 시작된 정전 회담에서 남측의 대성동 마을과 북측의 기정동 마을은 각각 DMZ 내 위치한 양측의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로 남도록 인정받았다. 이후 대성동은 ‘자유의 마을’, 기정동은 ‘평화의 마을’이란 이름으로 냉전시대 남북한 사이 치열한 체제 경쟁을 위한 프로파간다의 무대가 되었다. 대성동엔 현재 49가구 약 200명이 살고 있다. 한국 영토 안에 있지만 한국 정부가 아닌 UN의 통제를 받으며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 마을 여성이 외부 남자와 결혼하면 마을을 떠나야 하지만, 외부 여성이 이 마을 남자와 결혼하면 거주권이 인정된다.두 작가는 이 마을을 한반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상황이 빚어낸 독특한 장소로 한정하지 않고, 인류사 전반에서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탄생한 기형적 세계를 상징하는 곳으로 확장한다. “처음에는 좀 더 우리의 정체성이 담긴 도시를 배경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대성동‘자유의 마을’은 우리 자신에게조차 너무 비현실적인 공간이었기에 예술의 키워드가 될 수 있었습니다.”문 작가의 말에 전 작가가 동의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어쩌면 이 마을 사람들은 현재 팬데믹 상황에 있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재난적 상황에서 고립되어 70년을 살아왔습니다. 인류가 바이러스와 2년 넘게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 이 마을의 고립은 평소와 달리 보편적인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키워드인 동시에 우리의 삶을 성찰하기 좋은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 전시는 영상, 설치, 아카이브, 사진, 대형 회화 그리고 연계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모바일 플랫폼으로 구성됐다. 전시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서로 등을 마주한 두 개의 대형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이다. 한쪽 면에선 영화배우 박정민(朴正民)이 서른두 살의 남성 A로 등장한다. A는 자유의 마을에서 태어나 한 번도 바깥세상에 나간 본 적이 없는 인물로, 비무장지대에 자생하는 식물을 연구하는 아마추어 식물학자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외부 세계에 알리고 싶어 연구한 내용으로 식물도감을 만든 뒤 비닐 풍선에 넣어 날려 보낸다. 풍선은 시공을 뛰어넘어 반대편 스크린 속 20대 초반의 남자 B에게 전달된다. 아이돌 그룹 갓세븐 멤버 진영(珍荣)이 연기하는 B 역시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 채 평생 감옥처럼 좁은 공간에 갇혀 살고 있다. 우주선을 닮은 공간에 고립된 B의 유일한 낙은 가끔 창밖을 내다보는 것뿐이다. 어느 날 어디선가 날아온 비닐 풍선은 B의 일상을 뒤흔든다. 깊은 혼란에 빠져 며칠 동안 그저 쳐다보기만 하던 B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내용물을 꺼내 본다. 이후 B는 계속 A로부터 풍선을 받는다. 무한대의 타임 루프처럼 A와 B의 이야기가 순환된다. 이 영상들을 지나면 자유의 마을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작가들이 국가기록원에서 사용 허가를 받은 이미지를 포토샵으로 가공했다. 문 작가는 사진들을 바라보며 작업을 회상했다. “이미지 사용 허가는 받았지만 사진 속 인물들의 익명성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거나 여러 이미지를 조합해 만든 전혀 다른 얼굴을 입히기도 했어요. 또는 포토샵으로 사진 속 인물들에게 마스크를 씌우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지금의 팬데믹 상황을 상징이라도 하는 듯, 절묘한 결과물이 나왔지요.” 이 곳을 지나 마지막 전시실로 가면, A가 식물을 찾아 헤매던 눈 덮인 숲이 거대한 캔버스 위에 펼쳐진다. 문 작가가 6개월에 걸쳐 완성한 가로 4.25m 세로 2.92m 대형 풍경화다. 얼핏 보기에 사진처럼 보일 만큼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이 그림은 스크린과 현실을 이어주며 가상과 실재가 뒤섞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전시장 밖 오픈 스페이스인 서울 박스에 설치된 모바일 아고라는 이 프로젝트의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고대 그리스 시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던 광장 아고라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확장해 다양한 분야의 다중 지성들이 모여 대담을 나누면서 연대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이번 전시에선 접으면 컨테이너 박스 형태가 되는 이동식 철 구조물로 제작됐다. 이곳에서 전시 기간 중 매달 한 차례 열린 대담에 배우 박정민을 비롯해 건축가 유현준(兪炫準), 생태학자 최재천(崔在天), 뇌과학자 정재승(鄭在勝) 등이 참여했다. 전시장을 나서기 직전 관객은 벽면에 적힌 영국의 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의 말을 만났다. “풍경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라기보다는 그들의 고투와 성취와 사건들을 가리는 커튼처럼 느껴진다. 커튼에 가려진 이들에게 두드러진 지표는 그저 지리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기적이고 개인적이기도 하다(Sometimes a landscape seems to be less a setting for the life of its inhabitants than a curtain behind which their struggles, achievements and accidents take place. For those who are behind the curtain, landmarks are no longer only geographic but also biographical and personal).”전쟁의 끝에 70년간 고립되어 살아온 한 마을의 비극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자, 2022년 팬데믹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두 작가가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였다. 전시장 옆 야외에 설치되었던 ‘모바일 아고라’는 조립과 변동, 이동이 가능한 큐브형 스테인리스 스틸 설치 구조물이다. 각 196 x 259 x 320 cm. 이 곳에서 전시 기간 중 매달 한 번씩 건축, 과학, 디자인, 인문학 등 분야별 전문가들이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문경원 작가가 6개월에 걸쳐 완성한 대형 회화 ‘풍경’이 영상에서 남자 ‘A’가 헤매던 어느 산속 배경을 재현했다.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유채, 292 x 425cm. 영상의 배경은 국가기록원이 제공한 자유의 마을 사진과 비슷한 풍경을 지닌 DMZ에 접경한 경기도 파주의 어느 지역이다.

겨울 바다의 선물, 청어

Culture 2021 WINTER 1377

겨울 바다의 선물, 청어 청어는 오랫동안 세계인의 주식이 되어온 생선이다. 요즘 한국에선 청어를 해풍에 말려 김과 미역, 마늘 등 채소와 함께 싸먹는 과메기가 대표적인 요리지만, 전통적으로 다양한 요리법이 전해 내려온다. 쫀득한 식감과 기름진 고소함이 겨울철 별미로 꼽혀 왔다. 청어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생선이다. 몸의 폭이 좁고 높이가 높은데, 등쪽은 암청색, 중앙부터 배쪽까지는 은백색인 등푸른 생선의 한 종류이다. 수온 2∼10℃, 수심 0∼150m의 한류가 흐르는 연안에서 무리를 이루어 서식한다. 한반도 연안의 청어 수확량은 매우 불규칙한데, 올 겨울에는 풍어를 기록하고 있다. “맛 좋기로는 청어, 많이 먹기로는 명태” 라는 말이 전해온다. 한국인의 밥상에 오르는 대표적인 생선 세 가지 — 대구, 명태, 청어 —중 맛으로는 청어가 으뜸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몸이 푸른 물고기’라는 뜻의 청어는 여러 종이 거대한 무리를 지어 바다 곳곳을 다닌다. 북유럽에서 즐겨 먹는 청어는 북대서양 청어(Clupea harengus)이고, 동북아시아와 북미에서는 태평양 청어(Clupea pallasii)를 잡는다. 흰 살 생선인 대구나 명태는 지방이 적지만 청어 살의 지방은 많게는 20퍼센트에 달할 만큼 기름지다. 냉수성 어종으로 겨울부터 봄이 산란기이고 늦가을부터 기름기가 차오른다. 그 밖에도 글리신, 알라닌처럼 단맛을 내는 유리 아미노산이 많이 들어있다. 1803년 김려(金鑢 1766~1821)가 쓴 한국 최초의 어보 (牛海異魚譜, Rare Fish in the Jinhae Sea)에는 청어의 맛이 “달고 연하며, 구워 먹으면 아주 맛있다”라고 했다. 요리사이자 작가인 박찬일(朴贊日 1965~)이 경험한 청어 맛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책 에서 속초 바닷가의 막횟집에서 친구와 먹은 청어구이에 대해 “바람이 사나운 겨울날 굵은 소금을 뿌려 숯불 위에 구운 청어 살은 부드럽고 달았다”고 회상했다. 요리법 청어를 먹는 방법은 다양하다. 주산지인 동해안에서는 날것 그대로 회나 회무침으로 먹는데, 때로는 끓인 청어살을 체로 걸러 멥쌀을 넣고 죽을 쑤기도 하고 밀가루와 달걀을 씌워 지진 뒤 장국에 끓여 찜으로 먹기도 한다. 동남 해안을 낀 경상도 지방에서는 찌개로 끓여 먹기도 한다. 서남쪽 전라도 지방에서는 많은 양의 청어를 조리할 때 가마에 물을 붓고 끓여 수증기로 쪄서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청어는 구워 먹을 때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굵은 소금을 뿌려 노릇하게 구우면 부드럽고 달며 고소하다. 박찬일 요리사는 “기름이 많은 생선이라 구우면 자글자글하게 기름이 배어 맛이 기가 막히다”고 설명했다. 바닷물고기에는 바닷물과 체내 염도의 균형을 유지해 주는 비단백질 질소 화합물인 트라이메틸아민옥사이드(TAMO: trimethylamine oxide)가 들어있다. 이 화합물이 미생물에 의해 트리메틸아민(TMA: trimethylamine)으로 분해되면 비린내를 풍긴다. 겨울철 기름기가 그득한 청어에는 다가불포화지방산(polyhydric fatty acid)이 많이 들어있어 쉽게 산패된다. 이로 인해 비린내가 더 강해지는데, 청어로 찌개를 끓일 때 된장을 풀거나 구울 때 된장을 바르면 비린내가 줄어든다. 된장 속 향기 물질이 비린내가 덜 느껴지도록 하고 된장의 주성분인 단백질이 비린내 성분과 결합하여 휘발을 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청어의 다양한 조리법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실제로 1996년 1월 27일 동아일보에는 “청어 지짐이, 청어 조림, 청어젓, 청어백숙 같은 경기도식 요리를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다”는 기사가 실렸다. 다양한 청어 요리를 맛보기 어려워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청어가 있다가 없다가 한다는 것이다. 청어 수확량은 오래 전부터 들쭉날쭉했다. 찬물을 따라 떼로 몰려다니는 청어는 잡힐 때는 최다 어획류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그러다가 잡히지 않을 때는 10여 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기도 했다. 임진왜란을 회고한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懲毖錄, A Record of Penitence and Warning)에는 전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일어난 기이한 일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해의 물고기가 서해에서 나고 점차 한강까지 이르렀으며, 원래 해주에서 나던 청어가 최근 10년이 넘도록 전혀 나지 않고 요동 바다(遼海)로 이동하여 나니 요동사람들이 이를 신어(新魚)라고 일컬었다.” 비슷한 시기인 1614년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이 쓴 백과사전적 저서 (芝峰類說, Topical Discussions of Jibong)에도 비슷한 설명이 나온다. 봄철 서남해에서 항상 많이 잡히던 청어가 무려 40여 년 동안 전혀 산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의 (亂中日記, War Diary)에는 청어를 잡아 군량미와 바꾸었다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4)은 자신의 책 (星湖僿說, Miscellaneous Explanations of Seongho)에서 류성룡의 을 인용하면서 이후 상황을 설명한다. 유성룡이 을 쓴 당시에는 오직 황해도 해주에만 청어가 있었지만 이제는 조선 바다 전역에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청어가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함경도에서 생산”되고 “봄이 되면 차츰 전라도와 충청도로 옮겨 간다. 봄과 여름 사이에는 황해도에서 생산되는데, 차츰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점점 잘아지고 흔해지기 때문에 사람마다 먹지 않는 이가 없다”고 기록했다. 청어를 겨울 바닷바람에 말린 과메기는 쫀득한 식감과 입 안 가득 퍼지는 어유(魚油)의 고소함이 일품으로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잘 말린 청어를 잘게 잘라 마늘, 고추, 마늘쫑 등을 채 썰어 미역이나 김에 싸 먹는다. ©GETTY IMAGES 겨울로 접어들면 경북 영덕을 비롯한 동해연안의 해촌에선 청어를 말리느라 분주하다. 대가리를 잘라내고 겨울철 해풍에 얼렸다 녹혔다를 반복하면 비리지 않고 고소한 과메기가 된다. ©전재호 과메기 이익은 시대별로 어획량이 크게 변하고 잡히는 지역조차 달라진 것은 청어가 변화하는 풍토와 기후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250여 년 전 이야기이지만 그의 추측은 옳았다. 국립수산과학원이 1970년부터 2019년 사이 한반도 연안의 청어 어획량을 분석한 결과 동해에서는 수온이 오를수록 어획량이 증가한 반면, 서해의 어획량은 수온이 오를수록 감소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지난 50년 동안 청어의 어획량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5천 톤 내외로 잡히다가 중반 들어 1천 톤 밑으로 떨어졌다. 1980년대 말부터 다시 증가하면서 1999년에 정점으로 2만 톤을 찍고는 다시 2002년에 2천 톤 아래로 내려갔다. 2000년대 중반 다시 어획량이 급증해서 2008년에는 무려 4만 5천 톤이 잡혔다. 이듬해에도 청어 대풍은 이어졌다. 2009년 12월 20일 KBS 뉴스는 사라진 청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류성 어종인 청어가 동해뿐만 아니라 물이 따뜻한 동남해와 남해안 일대에서도 많이 잡히면서 경북 영덕에서 청어 과메기를 다시 만들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1960년대 이후 청어가 잘 잡히지 않으면서 주로 경북 해안 지방에서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게 되었지만 원래 과메기는 청어를 말려 만들었다. 어류학자 정문기(鄭文基 1898~1995)가 1939년 5월 9일 동아일보에 쓴 칼럼에 보면 “청어 다산지인 경상북도에서는 소건한 청어를 ‘과미기’라고 칭하고, 지방특산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수산물”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처럼 1930년대만 해도 경상북도 해안은 청어의 주산지였다. 요즘에는 과메기를 배추 같은 채소나 김, 미역, 다시마 같은 해초로 쌈을 싸먹는 경우가 많지만 과거에는 불에 구워먹기도 했고 쑥국을 끓여 먹기도 했다. 과메기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는가는 분명치 않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 (徐有榘 1764~1845)는 자신의 책 (佃漁志, Record of Hunting and Fishing)에서 당시 조선의 건조 청어는 등을 갈라 열지 않고 통째로 볏짚 새끼줄로 엮어서 햇볕에 건조하여 만든다고 설명한다. 서유구는 두 눈이 투명하여 새끼줄로 관통해 꿸 수 있어 이를 ‘관목’이라 부른다고 주장했다. 이 말이 변하여 지금의 ‘과메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청어를 통째로 말리는 ‘통마리 방식’의 과메기는 소수이긴 하지만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주류는 배를 따고 반으로 갈라 내장과 뼈를 제거하여 해풍에 단기간 건조하는 ‘배지기 방식’이다. 통마리 방식으로 만드는 과메기는 건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게다가 청어는 꽁치보다 더 기름지고 몸통 너비도 커서 말리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꽁치 통마리가 보름이 걸린다면 청어 통마리는 한 달 이상 말려야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말린 만큼 맛이 더 진하고 한겨울 통마리 청어 과메기에는 알이 들어있어서 더욱 맛이 좋다. 청어는 구워 먹을 때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굵은 소금을 뿌려 노릇하게 구우면 부드럽고 달며 고소하다. 깨끗이 씻은 청어의 비늘을 벗겨낸 뒤 칼집을 넣고 소금을 뿌려 구우면 살이 노릇노릇해지며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된다. 기름진 청어는 구웠을 때 담백함이 증폭되면서도 살이 부드러워 입 안에서 녹는다. 반면 가시가 꽤 많아 번거롭기도 하다. ©SHUTTERSTOCK 돌아온 청어 청어가 다시 돌아왔다. 올해도 청어가 많이 잡히고 있다. 강원도 삼척에서는 청어 소비를 늘리기 위해 어묵, 조림, 튀김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공하는 방법도 고려 중이다. 국립수산과학원 연구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청어 어획량이 늘어난 것은 주로 동해의 수온이 따뜻하게 변화하여 청어의 개체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이런 연구 결과가 청어를 마구 잡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덧붙인다. 북대서양에서 남획으로 인해 청어의 어획량이 급감했던 전례를 볼 때 어린 청어를 잡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970년 노르웨이에서는 남획으로 청어 어획량이 0톤까지 급감했다가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는 데 무려 20년이 걸렸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청어가 정확히 어떻게 무리지어 이동하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모르는 게 많다. 청어가 동해로 돌아오긴 했지만 인근의 중국 황해와 일본 북해도에서는 여전히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잘 모른다. 무분별한 포획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청어를, 그리고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념을 넘어 지켜야 했던 것

Culture 2021 WINTER 961

이념을 넘어 지켜야 했던 것 영화 는 30년 전 소말리아 내전에서 함께 살아남은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의 실화를 생생하게 엮었다. 이념과 체제가 생존의 본능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류승완식 휴머니즘이 파헤친다. 2021년 7월 개봉한 는 1990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힘을 합쳐 혼란의 도시를 함께 탈출한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이다. “자동차 한 대가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사막을 질주하는 이미지에서 출발했다”는 류승완 감독의 말처럼 4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탄 양측 외교관과 그 가족들의 긴박한 탈출 장면이 영화의 백미이다. 소말리아와 풍경이 비슷한 모로코 에사우이라에서 거의 모든 장면을 CG 없이 실제로 촬영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미라클 작전도 영화로 만들 준비를 해야 하나.” 얼마 전 ‘미라클 작전’을 지켜보다가 촬영이 한창이 류승완(Ryoo Seung-wan 柳昇完) 감독에게 관련 기사를 보냈더니 ‘미소’이모진을 덧붙여 돌아온 대답이다. 지난 8월 미군 철수와 탈레반의 재점령으로 아수라장이 된 카불에서 그 동안 한국 정부에 협력한 아프간 민간인과 그들의 가족을 탈출시킨 정부의 결정과 실행은 국제사회에서의 연대감과 책임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 작전을 지켜보면서 코로나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상황 속에서도 극장 관객 300만을 기록하며 장기 상영에 들어 간 류승완 감독의 영화 (逃出摩加迪休, Escape from Mogadishu; 2021)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운명 같은 인연 “자동차 한 대가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사막을 질주하는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2년 전, 류 감독이 속한 제작사 외유내강(內柔外剛 Filmmaker R&K)이 제작한 재난 영화 (極限逃生, EXIT; 2019)의 시사회에서 잠깐 만났을 때 류 감독이 던진 말이다. 전작 (軍艦島, The Battleship Island; 2017) 이후 와신상담하던 그가 자신의 열한 번째 장편영화로 를 막 결정했던 즈음이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이라 그는 말을 아꼈지만 그 날의 짧은 대화에서 그가 어떤 배경과 분위기의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 두 가지를 얻었다. 그것은 실화를 재구성한다는 것과 남북한 인물들이 총알 세례를 뚫고 함께 사막을 질주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일까 무척 궁금했었고, 극장 객석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얻기까지 2년이 걸렸다. 의 배경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에 기반한다. 1990년 12월 30일 소말리아의 수도인 모가디슈에서 바레 장군의 장기 독재를 거부하는 시위가 쿠데타를 불러 일으키며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 당시 남북한 대사관이 동시에 주재하며 상호 비난과 공작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모가디슈에서 두 대사관 직원들이 힘을 모아 함께 혼란의 도시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류 감독이 대한민국 외교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던 이 사건을 스크린에 펼쳐내야겠다고 판단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서로 대치 중이던 남북한의 외교관들이 제3국에서, 그것도 머나 먼 아프리카 대륙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나란히 분투한 사건에서 단순한 흥미 이상의 어떤 감동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류 감독은 어느 날 자신의 사무실에 놀러온 후배로부터 1991년 동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있었던 이 사건에 대해 우연히 듣게 되었다. (與神同行, Along with the Gods: The Two Worlds) 시리즈를 제작한 덱스터 스튜디오가 영화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辣手警探, Veteran; 2015)의 후반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두어 해가 지난 뒤 덱스터 스튜디오가 그에게 연출 제안을 해 왔다. 류 감독은 “실화가 궁금해 당시 언론 보도와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너무 극적인 이야기라 누가 됐든 잘 만들면 좋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감독과 영화는 그렇게 ‘운명처럼’ 만났다. 그가 이 사건에 매료된 건 무엇보다도 ‘함께 탈출한 남북한 외교관들이 특수 부대원이나 첩보 요원이 아닌 민간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극적인 상황을 겪으면서 발생하는 서스펜스가 흥미진진했고, 종전에 영화를 만들던 방식과 다른 시도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것이 나를 움직인 원동력이었다”는 게 류 감독의 설명이다. 그는 실화를 다시 취재해 영화로 재구성했다. 모가디슈가 무장 군인과 반란군의 총격전으로 아수라장이 되기 전 남북한 외교관들은 각기 자국의 UN 가입에 소말리아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남한 대사 역의 김윤식(전면 왼쪽)과 북한 대사 역의 허준호가 긴장된 관계를 보여준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냉전 속 뜨거운 감동 영화는 1990년 12월 초부터 내전이 시작된 12월 30일을 거쳐 남과 북의 외교관들이 모가디슈를 벗어나는 1991년 1월 12일까지 약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다룬다. 류 감독은 역사적 사실의 배경과 진전, 그리고 결말을 충실히 끌어오되 캐릭터와 사건의 디테일을 영화적으로 새롭게 구성했다. 그것은 그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작업이기도 하다. 류 감독은 “그 기간은 소말리아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급변하던 시기라 이 격동적 변화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대한한국 대사관 관저에서 12일을 함께 보냈는데 그 기간 그들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채워넣는 게 관건”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영화에서는 크게 두 개의 전쟁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교차하며 전개된다. 장중한 아프리카풍 음악을 배경으로 바다에서 바라보는 모가디슈 풍경— 이제껏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오프닝 시퀀스에 이어지는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남북간의 외교전이 펼쳐진다. 남북한 대사들은 앞다퉈 대통령, 장관 등 소말리아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며 치열하게 로비를 벌인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고, 나라에 국격이 있듯이 외교에도 격조가 있다” 지만, 각기 유엔 가입을 위한 회원국의 표만 끌어올 수 있다면 아슬아슬한 공작도 서슴지 않는다. 당시 냉전 말기에 힘의 우위에 있었던 건 영화 속 북한 대사의 말처럼 “남조선보다 20년이나 앞서서 아프리카에 기반을 닦은”북한이다. 남한 대사는 북한 대사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어 번번이 허탕을 친다. 영화의 전반부는 주요 캐릭터들을 꼼꼼하게 구축하는 동시에 소말리아 내전이 진행되는 과정을 공들여 보여준다. 그 의도를 류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관객이 인물에 몰입하고 그들과 함께 내전 상황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내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는지 사실적으로 잘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지 조마조마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너무나 잘 알지만 관객에게는 그것이 첫 경험이다. 그러니 익숙하지 않은 역사적 배경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봐 걱정됐다. 다행스럽게도 관객이 영화 속 내전 상황을 무리 없이 잘 이해한 것 같다.” 북한으로 기울었던 균형추는 반군이 진짜 전쟁을 일으키는 중반부부터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어 나간다.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동요하며, 군부가 모가디슈로 진입해 국가를 장악하는 쿠데타 과정이 세세하게 그려진다. 그러면서 서사는 남과 북의 외교전에서 모가디슈 탈주극으로 전환된다. 긴박한 상황 속에 남한 대사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받아들이면서 남과 북은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남한으로의 전향이나 북한 사람과의 접촉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위반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목표는 탈출해 살아남는 것,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다. 탈주극은 류 감독이 처음 시도한 장르가 아니다. 의 후반부에서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탈주한다. 하지만 그 탈출 신이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판타지라면, 의 그것은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비슷한 시기의 소말리아를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영화 (黑鷹計劃, Black Hawk Down; 2001)이나 미국 CIA 요원이 이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주이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탈출시키는 (逃离德黑兰, Argo; 2012) 역시 실화를 기반으로 한 탈주극이지만, 한 국가가 자국민을 구출하는 작전을 그려낸 앞의 두 영화와 달리 는 내전으로 인해 치안이 파괴되고 통신이 두절된 주재국 수도를 냉전 속에 대치 중인 적대국의 외교관들이 국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힘을 합쳐 탈출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긴박한 상황 속에 남한 대사가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북한 대사관 직원들을 받아들이면서 남과 북은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들에게는 남한으로의 전향이나 북한 사람과의 접촉으로 인한 국가보안법 위반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류승완 감독은 로 11월 10일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주는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같은 시상식에서 촬영상, 음악상, 남우조연상도 받아 4관왕의 영예를 누렸다. 또한 내년 3월 개최되는 제94회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 부문 출품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류승완식 휴머니즘 남북한 대사관 직원 20여명이 자동차 4대에 나눠 탄 채 화염병과 총알 세례를 뚫고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질주하는 후반부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류승완식 휴머니즘이 고스란히 반영된 명장면이다. 포드 머스탱이 서울 명동 거리를 질주했던 류 감독의 전작 과 달리 이 영화 속 자동차들은 ‘모래주머니와 책을 매달아’ 속도를 내지 못해 아슬아슬한 묘미가 있다. 그런데도 서스펜스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 관객이 함께 타고 있는 느낌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류 감독은 “진짜 같아야 한다는 원칙 안에서 신경 썼던 건 ‘스펙터클해서는 안된다’ 였다. 쏟아지는 총알과 화염병 속에 질주하는 인물들의 절박감이 전달되려면 스펙터클보다는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게 중요”했다며 “카메라가 자동차 외관보다는 차 내부 상황을 중점적으로 담아낸 것도 그래서다. 무엇보다 관객이 차 안에 타고 있는 것 같은 몰입감을 느끼게 하려면 사운드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게 필요했다. 사운드팀이 녹음실에서 차 소리와 총격 소리를 사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4대가 사람을 가득 태워 느린 속도로 반군의 추격을 따돌리는 숨막히는 광경을 그 흔한 인물의 클로즈업숏이나 눈물샘을 자극하는 오케스트라 음악 없이 카메라에 담아낸 것이 인상적이다. 또한 소말리아를 탈출한 비행기 안에서 남북한 인물들이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장면도 정갈하고 담백하게 묘사되었다. 류 감독은 “비행기 안에서 그 장면을 찍을 때 배우들이 많이 울었다. 촬영 후반부라 감정적으로 고조된 상태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긴 시간 동안 얼마나 긴장된 상태로 함께 지냈겠나”라며 “그 장면이 과거에서 종결되는 이야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힘을 가지려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여운을 남기는 게 중요하다고 보았다. 모두가 그 상황이 어떤 감정과 의미를 담아야 하는지 다 알고 있었으니까”라고 말했다.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처음으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영화의 중반부에서 남한 대사의 부인이 깻잎을 떼어내지 못하자 북한 대사의 부인이 자신의 젓가락으로 도와주는 장면이 뭉클했던 것도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연대를 보여준 덕분일 것이다. 아마 이 대목에서 박찬욱 감독의 (JSA安全地帶, Joint Security Area; 2000)에서 남북한 병사들이 초코파이 하나로 우정을 나누던 장면이 절로 떠오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삶의 의지, 또한 체제와 이념보다 인간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는 휴머니즘 — 류 감독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메시지다.

섞인 시간의 단맛

Culture 2021 WINTER 1276

섞인 시간의 단맛 전라북도 군산은 주변에 드넓은 평야가 펼쳐 있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곡식을 실어 나르던 곳이다. 부흥과 약탈의 허브가 됐던 이 항구 도시에는 역사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수많은 사연들이 지금도 유효한 듯한 군산의 생경한 이미지는 쉽게 변하고 달라지는 현대 도시의 속도감에 뭉근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1900년대 개항초기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문물이 군산항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됐다. 때문에 군산에는 지금도 생동감 넘치는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도시지만, 요즘은 인기 높은 관광 명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든다. 우리는 뭔가 섞여 있는 걸 보면 흔히‘짬뽕 같다’라고 표현한다. 채소와 해산물, 육류 등을 잘 섞으며 볶다 육수와 함께 끓여낸 빨간 짬뽕 한 그릇에는 중국, 일본, 한국이 어우러져 있다. 짬뽕으로 유명한 군산에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도 짬뽕처럼 잘 어울려 섞여 있다. 군산으로 떠나는 길에 뜨끈한 짬뽕이 생각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고속열차를 타고 익산역에 내려 다시 군산행 완행열차로 갈아탔을 때 나는 묘한 냄새를 맡았다. 외관 도장이 벗겨질 만큼 오래된 기차였는데 마치 시간이 섞인 냄새라고 해야 할까. 삐걱거리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객차 내부에선 상상했던 타임머신을 실제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1909년 일본인 승려가 창건한 동국사는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불교 사찰이다. 당시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가져다 지었는데, 현재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마다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외관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1908년부터 1993년까지 85년간 군산세관 본관으로 사용됐던 이 건물은 지금은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국내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국가 지정 ‘근대문화유산’이다. 시간여행 그래선지 군산에서는 경암동 철길마을에 가장 먼저 들르고 싶었다. 이젠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 주변으로 시간이 박제된 곳이다. 마을 한복판을 오가던 기차는 군산역에서 어느 제지공장까지 나무와 종이를 천천히 싣고 다녔다. 오래 전 운행이 멈추며 마을 곳곳엔 당시의 시간도 멈춰 있었다. 60~70년대식 학교 교복이며 과거의 군것질거리와 잡화들까지 여전히 남아있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져 한적한 분위기지만, 나는 과거 속으로 이토록 쉽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 신기해 철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휘발되는 시간의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했다. 그것은 녹슨 철길에 남은 목재나 종이 냄새와 비슷했다. 철길마을에서 빠져나온 나는 본격적인 군산 탐닉에 앞서 짬뽕부터 먹으러 나섰다. 군산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짬뽕집이 여럿 있다. 내가 찾아간 짬뽕 가게는 ‘빈해원’이었다. 건물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칠십 년 전통을 가진 이곳의 ‘청탕면’은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사람에게도 부담 없는 짬뽕이다. 한입 맛을 보자 신선한 해물이 진득하게 우러난 국물 안에서 일종의 위로가 느껴졌다. 시간이 농축된 맛이란 이런 것이구나. 장소가 주는 예스러움이 분위기를 더하고 음식은 깊은 위로가 된다. 군산에서 느낀 켜켜이 쌓인 첫 시간의 냄새가 종이었다면, 두 번째는 짬뽕이다. 군산은 오래 전부터 전국에서 곡식이 가장 많이 생산되며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다. 배가 든든해진 나는 근대 건축물들을 한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근대화 거리를 찾아가 그 에너지의 과거 버전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근대 건축관과 근대 미술관, 근대 역사박물관을 하나씩 둘러보며 나는 그 생기가 아직도 여전한 게 신기했고 역사와 세월이 남긴 것에는 고유한 작품성까지 깃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시간에 닳고 퇴색된 것들이 아직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 풍경을 현재가 공유하는 광경은 여러 개의 차원과 시간이 섞인 시공간의 모형과 같았다. 시간을 견딘 이 거리의 빈티지한 변화에선 일말의 건축미까지 읽을 수 있었다. 기능만을 중시하지 않고 미를 추구했던 흔적을 아스라이 엿보았다. 가장 아담한 건축미를 보이는 건 옛 군산세관 건물이었다. 군산에는 바다와 연결되는 금강이 흐르는데, 주변에는 배로 실어나를 곡식을 모아두던 ‘조창’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조창은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 그야말로 세곡 납부용 물류센터로 이용됐다. 당시 일제의 곡물 선적 전용 창구였을 이 건물 앞에 서자 마음이 복잡했다. 독일인이 설계하고 일본인이 건축했으며 벨기에산 붉은 벽돌을 썼고 창은 로마네스크식, 현관은 영국식인데 지붕은 일본식으로 덮었다. 과연 군산의 대표적인 짬뽕 스타일 건축물이다. 군산지역에서 포목점을 경영해 큰돈을 벌어들인 뒤 부의회 의원을 지낸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부로가 살았던 집이다. 1920년대에 지은 전형적 일본식 무가의 가옥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커다란 정원과 웅장한 외관이 당시 부유한 일본 상류층의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이질적 조화로움 근대화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국사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절인데 현재는 한국 사찰로 사용된다. 한눈에 봐도 무척 일본풍인 이 조그만 절은 느낌이 낯설었다. 일본식 미니멀리즘이 반영된 듯 액세서리 없이 댄디한 대웅전의 옷차림에, 월명산 자락의 백 년 된 대나무숲 헤어스타일이 잘 어울려 패션 감각이 있어 보였다. 동시에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며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절의 뜰에는 일제가 한국인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갔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한 ‘소녀상’이 서 있었다. 당시 일본인 지주들은 쌀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군산의 소작농들을 착취했었다. 핍박당한 소작농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항거하며 거세게 봉기했었다. 그러나 거친 역사를 통과해 온 종교시설의 호젓한 경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과거의 원한마저 부질없이 휘발되고 해탈에 이른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이 절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들이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조화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이상 기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경암동 철길마을 주변에는 옛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재미있는 먹거리와 놀거리가 많다. 요즘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에 나온 달고나의 인기가 군산에서도 폭발적이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마주했다. 부유한 일본인이 살던 가정집일 뿐이지만, 시간의 풍파를 견딘 매력적인 장소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정원과 넓은 창을 가진 안채들이 아름다움을 좇는 인간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었다. 근처 월명동 골목의 오래된 벽들, 좁은 골목들, 녹슨 철제 대문들이 주는 느낌도 아스라했다. 역사의 격동기를 지나온 채 아직도 존재하는 흔적들을 보며 오랫동안 그대로 남는 것의 의미를 생각했다. 우주가 빛의 속도보다 빨리 팽창하며 변해가고 있는데 변하지 않는 것들의 묵묵함을 보는 건 참 안심되는 일이다. 시간여행의 현란함에 취한 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으로 향했다. 이 곳은 서구의 빵 맛을 먼저 본 일본인을 상대로 영업하던 빵집이었는데, 일제의 패망 이후 한국인이 명맥을 이어받아 현재의 빵집으로 운영 중이다. 이 가게에서 유명한 단팥빵과 야채빵을 직접 먹어보니 과거의 맛과 현재의 맛이 혓바닥 위에서 짬뽕되었다. 흔한 빵마저 시간여행의 매개물이 되는 곳이 군산이다. 빵을 즐기지 않는 나도 그 자리에서 몇 개나 먹어버렸다. 군산 구석구석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섞여 있었다. 망해버린 나라와, 일제 식민지였던 시절과 독립 후의 근대, 그리고 산업화로 바빴던 현대. 그 시간의 흔적들이 오래된 옛 도시에 고스란히 섞여 있는 모습이 독특한 감명을 주고 있었다. 문학의 기록 “나라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거야? 나라가 내게 뭘 해준 게 있다고, 일본인이 내놓고 가는 내 땅을 쟤들이 왜 팔아먹으려고 해? 이게 나라냐?” “기다리면 나라에서 억울하지 않게 처리하겠죠.” “됐고, 난 오늘부터 도로 나라 없는 백성이야. 제길. 나라가 백성한테 고마운 짓을 해 줘야 백성도 믿고 마음을 붙이며 살지, 독립됐다면서 고작 백성의 땅 뺏어 팔아먹는 게 나라냐?” 채만식(蔡萬植 1902 ~ 1950)의 소설 (1946)의 마지막 장면을 현대어로 바꾼 것이다. 채만식 문학관 앞에서 작가의 많은 작품 중 이 구절이 문득 떠오른 것은 도착부터 나를 따라다닌 군산이 가진 특별한 역사성 때문이었다. 채만식 문학관에는 30여년 동안 소설, 희곡, 평론, 수필 등 그가 집필한 200여편의 많은 작품을 모아둬 작가의 작품세계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군산 출신인 채만식 작가는 해방 전후 세태를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스킬을 가졌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는 한반도가 조선 땅이었던 시절, 행정기관에서 주인공 집안에 동학운동(東學運動 1894)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씌워 ‘처벌 받을래? 아니면 논을 내놓을래?’ 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선대의 피땀 흘린 노력으로 조금씩 사서 모은 자기 논을 절반 이상 빼앗긴 주인공은 상심이 컸다. 일제가 한반도를 점령했을 때 소작농 생활로 어렵게 살다 지쳐 일본인에게 남은 땅을 팔게 된다. 어차피 일제가 망하면 다시 자기 땅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일제의 재산을 환수한 독립 정부가 땅을 다시 빼앗아 가 팔아치우면서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생애 내내 자기 것을 빼앗기기만 했던 운명으로 살아간 소설 속 주인공에게 독립의 기쁨은 없었다. 나라다운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이 인물을 통해 한 국가가 멸망할 무렵 과도기적 혼돈과 그 속에서 사는 사람이 느꼈을 억울함과 회의감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채만식 작가가 남긴 작품들이 군산의 또 다른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는 점도 이처럼 뛰어난 작품성 때문이다. 또한 채만식 작가는 일제의 힘에 동조했던 문학가 중에서 제대로 ‘반성’을 한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해방 후에 소설 (民族-罪人 1948~1949)을 발표하며 반성의 의지를 작품으로 극명히 보여줬다. 그런 일단락 때문에 그의 문학 작품은 군산의 근대유산들과 함께 버려지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 군산 구석구석에는 여러 층위의 시간이 섞여 있었다. 망해버린 나라와, 일제 식민지였던 시절과 독립 후의 근대, 그리고 산업화로 바빴던 현대. 그 시간의 흔적들이 오래된 옛 도시에 고스란히 섞여 있는 모습이 독특한 감명을 주고 있었다. 군산역으로 돌아가기 전 무려 칠십 년 동안 호떡을 팔고 있다는 중동호떡에 들렀다. 청나라에서 넘어온 호떡은 얇은 밀반죽 빵 속에 시럽을 넣어 구은 음식이다. 보통은 기름에 굽지만 여긴 화덕에 구운 것을 팔았다. 나는 호떡의 느끼하지 않은 단맛에 기분 좋게 취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철길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역사 속에 남겨진 깔끔한 단맛. 그 맛이 꼭 군산 같았다. 과거와 현재가 철길을 따라 이어지는 광경은 쉽사리 현실감을 아련하게 흐려버린다. 약 2.5km의 철길 양쪽으로 낡은 집들과 옛 모습의 가게들이 즐비하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예전 학창 시절의 교복을 빌려 입고 철길을 따라 걸으며 추억을 되새긴다. 도시를 구경하다 보면 아름다운 색감의 서정적인 벽화와 종종 마주친다. 유명 관광지에 화려한 포토존을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좁은 골목길의 소박한 벽화도 많다. 20세기 전반 한국문학을 대표했던 작가 중 한 사람인 채만식의 삶과 작품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채만식문학관에는 전시실, 자료실, 시청각실과 함께 문학 산책로, 공원도 갖추어져 있다. 2018년 국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빈해원은 짬뽕으로 유명한 중국음식점이다. 옛스러운 정취의 독특한 건물로 을 비롯한 영화 촬영 장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기름에 지지지 않고 않고 오븐에 굽는 중동호떡에는 군산을 대표하는 흰찰쌀보리와 함께 검은콩, 검은쌀, 검은깨를 넣은 플랙푸드 선식이 시럽으로 들어가 고소하고 담백하다.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

Culture 2021 WINTER 1305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 남북한 주민의 가교 역할을 자처하는 ‘사부작’은 대학생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이다. 익명으로 출연하는 라디오 방송이라는 매체의 특성이 탈북민 게스트들의 경계심을 낮추어 보다 솔직한 대화로 남한 사회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실 저는 북한에서 왔어요.”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이 이 말을 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남한 사회에는 아직 대한 편견과 차별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북한이탈주민 신변보호제도 개선방안 실태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탈북민이라는 신분이 노출됐을 때 남한 주민이 경계심을 보이거나, 차별적으로 대하는 경험을 했다’고 답했다. ‘사부작’은 이런 편견과 차별을 깨기 위해 3년 전 남한의 대학생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 라디오 방송이다. 이 흔치 않은 방송 이름은 ‘사이좋게 북한친구와 함께 만드는 작은 수다’를 의미하는 한국어의 줄임말이다. 사부작에 출연하는 대부분의 게스트가 익명을 원하지만, 간혹 신분이나 얼굴을 공개하기도 한다.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박예영 이사장은 ‘김책 털게’라는 닉네임으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3부로 나뉘어 출연했다. 왼쪽부터 사부작 스탭 박세아, 안혜수, 게스트 박예영 이사장. © 사부작 재미있는 닉네임 북한 출신 게스트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 팟캐스트 방송은 탈북민들의 삶을 ‘조미료 섞지 않고 담백하게’ 들려주는 것이 모토다. 솔직한 대화를 통해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남북한 주민들 간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목표다. “나 북한에서 왔어”라고 말하면 “그래? 난 대구에서 왔는데”라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이 방송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 걱정 때문에 미디어 노출을 꺼리는 출연자들에게 별명을 만들어준다. 이를테면 ‘경성 송이버섯’, ‘혜산 감자밥’같은 이름인데, 전자는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 고향의 송이 버섯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감자밥을 즐겨 먹었던 양강도 혜산 출신이라는 뜻이다. 진행자 역시 ‘부산 돼지국밥’처럼 자신의 출신 지역과 좋아하는 음식의 이름을 붙여 만든 닉네임을 사용한다. 이는 게스트가 자신의 고향을 자연스럽게 밝히면서 보다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 이 같은 배려는 게스트 섭외에도 도움이 된다. 탈북민들은 대부분 출연 전에는 자신의 고향을 밝히길 꺼리지만,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어느 덧 고향을 떠올리며 행복해한다. 뿐만 아니라 출연을 계기로 남한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자신감을 얻고, 이후 자연스럽게 출신 배경을 밝힐 수 있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녹음이 끝나면 게스트들이 ‘지금까지 북한에서의 기억을 잊고 부정하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오늘 이야기하며 그 시절의 나를 좀 더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씀하세요. 그럴 때면 우리 방송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해집니다.”스태프 박세아(朴細我) 씨의 말이다. 그는 연세대 교육학과 3학년 학생으로 고등학생 시절 탈북민 자녀를 멘토링한 이후 탈북민 문제에 관심을 가지다가 이 방송에 지원하게 됐다. 이 방송의 또 다른 목적은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게스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다. 사회의 조명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더 나아가 북한 사회의 구성원들 역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것이다. 대화의 주제는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때때로 게스트가 원할 경우 가볍게 다루기도 한다. 이 방송을 처음 시작한 것은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이던 박병선(朴炳宣) 씨다. 그는 현재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으로 방송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탈북민들의 얘기를 팟캐스트로 들려주면 남한 사람들이 이들을 친숙하게 대할 수 있게 되고 서로 거리를 느끼지 않고 어울려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탈북민들이 차별과 편견을 받는 것을 알고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들의 얘기를 가감없이 진솔하게 들려주는 방송을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부작’은 인액터스(Enactus) 소속 연세대 동아리 프로젝트 ‘지음’(知音)이 다섯 달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8년 8월에 첫 방송을 내보냈다. 인액터스는 1975년 미국 리더십 연구소(National Leadership Institute)가 설립한 글로벌 비영리단체이고, ‘지음’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2020년 8월부터 참여 범위를 넓혀서 현재는 연세대뿐 아니라 가톨릭대, 서강대, 서울대, 성신여대, 이화여대, 중앙대생들이 함께하는 대학생 연합동아리로 운영한다. 이 팟캐스트 방송은 탈북민들의 삶을 ‘조미료 섞지 않고 담백하게’ 들려주는 것이 모토다. 솔직한 대화를 통해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남북한 주민들 간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특별한 게스트들 현재 스태프는 총 9명으로 3명씩 팀을 이뤄 번갈아 방송을 진행한다. 팀원은 역할 구분 없이 섭외, MC, 편집, PD 업무 등을 두루 맡고, 녹음은 홍대 부근에 있는 ‘스튜디오 봄볕’에서 한다. 방학을 제외하고 거의 매주 한 명씩 게스트를 초청해서 팟캐스트를 제작하는데, 한 게스트의 얘기를 3회로 나눠 편집해 올린다. 첫날 방송에서는 고향 음식·북한에서의 삶, 둘째 날은 탈북 과정, 셋째 날은 남한 정착기와 생활 얘기를 듣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탈북민들의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를 전하는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우리 공동체 이야기’를 전하고자 노력한다. 게스트가 정해지면 사전 인터뷰로 방송 흐름을 미리 설계하지만, 원고를 준비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위해 온라인 화상 채팅을 통해 게스트와 미리 친해지는 기간을 갖기도 한다. 초기 게스트는 주로 대학생들이었다. 제작진과 동년배로 섭외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게스트가 지인들에게 출연을 권하고 입소문도 나면서 다양한 연령층의 출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중 한 사업가 출연자가 스태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북한에서 15살 때부터 탈북 브로커 활동을 하다가 국가보위부의 전국수배를 받게 된 인물이었는데, 얼굴이 안 보이는 팟캐스트의 특성상 흥미로운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또 다른 인상적인 게스트는 고등학생이던 ‘길주 완자’다. 풍계리 핵실험장이 있는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나고 자란 그는 14살 때인 2013년 북한을 탈출해 이듬해 한국에 들어왔다. 드물지만 실명을 밝히고 출연한 게스트들도 있었다. 북한 여군장교 출신 김정아(함경북도 청진 출신) 씨가 첫 번째 경우였다. 그는 양부모와의 갈등 끝에 꽃제비(일정한 거주지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북한 어린아이를 지칭하는 말)로 지내다가 숨진 오빠 얘기를 하면서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 유럽에서 외화벌이 해외파견 근로자로 일하다가 한국에 입국한 나민희 씨도 드문 일화를 지닌 게스트였다. 그는 출신 성분이 아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했던 평양 상류층 자녀였다. 서울에 정착해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는 주성하 씨가 출연한 적도 있다. ‘김책 털게’라는 별명과 함께 실명을 밝힌 박예영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대표도 특별한 게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작진의 일원인 안혜수(安慧洙) 씨는 “박 대표가 남한 대학생들이 한민족과 통일에 관심을 갖고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고 말해줘서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가 북한 황해도 출신인 안 씨는 성신여대 법학부 4학년 학생으로 이 방송의 소문을 듣고 팀원으로 자원했다. 2019년 9월에 시작된 시즌 3부터는 탈북민 출신 학생들도 스태프로 참여하고 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재학중인 안성혁(安成奕) 씨와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2학년 학생인 박범활(朴汎豁) 씨의 경우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살다가 부모님과 함께 탈북해 2011년 12월 한국에 들어온 안 씨는 현재 이 방송의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친구가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하여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게스트들이 바쁜 일상 때문에 떠나온 고향 생각을 자주 못 하는데, 우리 방송에 출연해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고 말할 때 가장 뿌듯해요.” 대학생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라디오 방송 사부작은 북한이탈주민들 각자의 삶에 담긴 특별한 이야기들을 자극적으로 과장하거나 획일화 시키지 않고 진솔하게 소개하려 노력한다. 주로 사전 녹음 방송을 하는데, 녹음은 홍대 부근의 ‘스튜디어 봄볕’에서 한다. 왼쪽부터 사부작 스탭 안성혁, 안혜수, 박세아. 생각의 변화를 위하여 2021년 8월부터는 시즌 7이 진행되고 있다. 시즌은 대학의 한 학기 기준이다. 우양재단, 남북통합문화센터, 연세대 고등교육혁신원 등의 기관으로부터 녹음실 대여비나 공개방송비용 등을 지원받고 있는데 그동안은 게스트에게 출연료를 주지 못했지만, 지원 덕분에 최근 들어 작은 액수의 사례비도 줄 수 있게 됐다. 탈북민들 사이에서 친숙하게 자리를 잡은 이 팟캐스트는 2021년 9월 기준으로 누적 조회 수가 20만 명에 이른다. 청취자들은 댓글로 피드백을 주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으로 DM을 보내기도 한다. 많은 격려와 응원 덕분에 대가 없이 봉사하는 제작진이 열정과 용기를 얻는다. 이 팟캐스트 방송의 가장 중요한 소통 창구는 댓글이다. 인스타그램에는 매주 방송내용을 정리한 카드뉴스를 올리기도 한다. © 사부작 ‘사부작’은 지금까지 130여 명의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눴다. 2021년 2월에는시즌 1과 시즌 2 게스트 중에서 12명의 이야기를 골라 담은 에세이집 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탈북 계기, 탈북 이후 남한 정착 과정, 이후 어려웠던 이야기가 담겼다. 책을 통해 그동안 정형화되었던 북한에 대한 정보 외에도 북한사람들의 실제 정서, 문화와 먹거리, 탈북민들의 고민, 북한에서의 다양한 추억과 세시풍속, 한국과 비슷하면서 다른 점들을 보다 깊이 파악할 수 있다. ‘사부작’ 제작진은 게스트들과 대화를 나누며 남한 사람들이 탈북민을 일반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자신들 마저도 처음에는 ‘탈북민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지내겠지’, ‘그들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반면, 게스트들은 진행자들을 남한 사람이라고 일반화하지 않았다. 각자 개성과 특징을 지닌 개인으로 보았다. 제작진은 오히려 자신들이 다양한 게스트를 만나며 서서히 변화했고, 지금은 탈북민을 특정한 이미지가 아닌 개인으로서 표현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학교에서 남북통일에 관한 토론 수업을 할 때면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죠. 젊은 세대가 서로를 적이라고 부를 때 가장 가슴이 아파요. 우리 방송이 남북한 주민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더 오래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안성혁 대표의 말이다. 에세이집 에는 이색적인 북한음식이 삽화를 곁들인 레시피로 소개되는데, 책 속 12명의 게스트들은 각자 고향의 음식들을 소개하며 이와 관련된 경험, 추억을 이야기한다 © 프로젝트 지음

영원히 지지 않는 꽃

Culture 2021 WINTER 1195

영원히 지지 않는 꽃 한지를 천연염료로 염색해 만드는 지화(紙花)는 제작에 드는 비용과 시간 때문에 생화가 점차 그 용도를 대신하게 되면서, 오늘날 간신히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 전승 공예 중 하나다. 1980년대 초 지화 공예에 입문한 석용(石龍) 스님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었던 전통 지화를 복원하며 꾸준히 지화를 널리 알리는 데 힘써 왔다. 한지를 쑥으로 염색한 뒤 살접기 기법으로 만든 연꽃 봉오리들. 전통 지화는 한지를 천연 염료로 물들이고 적당한 습기를 먹인 다음 살접기, 접기, 말기, 끌기와 같은 4가지 기법으로 만든다. 이 중 예리한 칼을 사용해 정교하게 주름을 잡는 살접기가 가장 까다롭다. 지화는 불교 및 무속의 제반 의식에서 널리 활용되어 왔으며, 궁중 의례에서도 태평성대에 대한 바람을 담아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가에서도 혼례나 상례 같은 중요한 의례에 두루 사용되었다. 한겨울에도 비닐하우스에서 꽃을 대량 재배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과거 지화가 차지하던 자리를 생화가 대신하고 있지만, 불가에서는 대규모 의식에 여전히 지화를 사용한다. 이는 불교에서 꽃이 종교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석가모니는 연꽃 한 송이를 들어 가섭존자에게 불법을 전했고, 다수의 불교 경전들이 꽃을 깨달음의 경지로 비유하고 있다. 한국어 단어 ‘장엄(莊嚴)’은 웅장하고 엄숙하다는 의미인데, 불교에서는 이 단어가 부처를 공양하기 위해 도량을 꽃으로 장식하는 일을 가리킨다. 사찰에서 지화를 만들게 된 것도 꽃을 꺾는 것을 살생으로 여겼던 전통에서 기인한다. 이 ‘웅장하고 엄숙한’ 일을 40년 동안 수행 삼아 해 온 승려가 있다. 2008년 첫 전시회 이후 꾸준히 지화 공예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석용스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뛰어난 솜씨와 노력을 인정받아 201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천연염색 지화를 처음 접한 이들의 입에서는 하나같이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오묘한 색깔은 물론 섬세함이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으로 그런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된 노동과 기나긴 인내가 필요하다. 석용 스님이 지화를 수행의 과정으로 여기는 것은 재료 준비부터 시작해 꽃 한 송이를 완성하는 데 1년이 걸릴 정도로 그 제작 과정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지를 갖가지 천연염료로 물들인 후 꽃잎의 주름을 잡고 형태를 만든 뒤 대나무살로 꽃대를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석용(石龍) 스님이 살목단을 만들고 있다. 40년간 전통 지화 복원과 제작에 힘써 온 그는 뛰어난 솜씨와 노력을 인정받아 201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접착할 때 사용하는 풀만 하더라도 만드는 데 6개월 이상이 걸린다. 통밀이나 찹쌀 같은 재료를 물에 담갔다가 거품이 끓어오르면 그 물을 버리고 새 물에 담그는 과정을 3~6개월 동안 반복해 곡류의 성분이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풀기만 남을 때까지 삭힌다. 이 과정을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얻게 된 풀을 사용해야 종이에 좀이 쓸지 않는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된 영산재는 보통 3~5일 동안 치러지는데, 저는 1년 반 전부터 지화를 준비합니다. 재를 지낸 후 소지되는 지화를 보면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안 한다 마음을 먹지만 어느새 다음 재를 준비하게 되더군요.” 지화를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첫 작업은 염색이다. 꽃잎에 색을 내기 위해 스님은 한 해 전부터 원료를 채취해 건조시킨다. 파랑은 쪽, 빨강은 소목(蘇木), 노랑은 치자 열매, 녹색은 쑥, 그리고 보라색은 머루와 지초(芝草)에서 얻는다. 이 외에도 양파에서 옅은 노란색을, 홍화에서 선홍색을 추출해 쓴다.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재료는 쪽과 홍화이다. 쪽 염색은 별도로 중요무형문화재가 있을 만큼 쪽풀을 발효시켜 색을 얻는 과정이 복잡하고, 홍화 또한 다루기 어려운 재료다. 무엇을 사용하든 원하는 색감을 얻기 위해서는 염료에 종이를 담갔다가 꺼내 말리고 다시 적시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 이러한 수고 끝에 생화처럼 보이는 지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 “다른 계절에도 필요에 따라 하긴 하지만, 염색 작업은 주로 봄철에 합니다. 3~4월에 종이가 아주 잘 마르거든요.” 습 먹이기와 살접기 지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스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꽃잎을 만들기 전 종이 상태를 조절하는 것이다. 종이가 건조하면 꽃잎의 주름이 금세 펴지고, 눅눅하면 주름 자체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님이 ‘습(濕) 먹이기’라 부르는 이 과정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손끝의 감각이 필요하다. 수건을 물에 적셔 꼭 짠 후 펼쳐 놓고 종이를 얹는다. 그 위에 다시 수건을 올리고 종이를 놓아 겹겹히 쌓은 후 비닐로 싸매 따뜻한 방에 한두 시간 정도 둔다. 그러고 나서 손으로 만져 보면 주름을 접어도 되는 상태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다. 이렇게 적절한 수분을 머금고 있는 종이로 꽃을 만들어야 10년이고 20년이고 세월이 지나도 형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비 오는 날에는 꽃을 접지 못해요.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방에 불을 때 습도를 낮춰야 하지요. 더운 여름날에는 종이가 마를까 봐 선풍기도 함부로 틀지 못해요. 한지가 워낙 습도에 민감하기 때문이지요. 만졌을 때 약간 빠닥빠닥한 느낌이드는 것이 알맞은 상태입니다.” 그가 가장 많이 만드는 꽃은 불단을 장엄하는 모란, 작약, 국화, 연꽃이다. 민간에서 모란과 작약은 부귀영화를 뜻하지만 불교에서는 불심을 상징하며 이 꽃들은 상단에 놓인다. 중단에는 국화와 다리화를, 하단에는 주로 연꽃으로 장엄한다. 꽃잎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종이를 접어 주름을 잡아야 한다. 이때 살접기, 접기, 말기, 끌기 크게 4가지 기법이 쓰인다. 이 중 예리한 칼로 한지를 꾹꾹 눌러 정교한 주름을 만드는 살접기가 가장 어렵다. 손에 힘이 조금만 더 실려도 종이가 베어지기 때문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다. “한번은 전시회를 구경하던 관람객 한 분이 저렇게 주름 잡힌 종이는 어디에서 파는지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편한 방법으로 작업하면 결코 자연 속 꽃의 느낌을 연출할 수 없어요. 살접기를 오래 하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지만, 수행하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공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화 작업에 쓰이는 다양한 종류의 칼과 송곳, 망치들. 망치와 물고기 칼은 꽃대의 재료인 대나무와 싸리나무를 다듬을 때 사용하며, 송곳은 주로 국화를 만들 때 꽃잎을 고정하는 데 쓴다. 지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스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꽃잎을 만들기 전 종이 상태를 조절하는 것이다. 종이가 건조하면 꽃잎의 주름이 금세 펴지고, 눅눅하면 주름 자체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통 지화의 복원 보존된다면 천년이 간다고 하지만, 지화가 유물로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의식이 끝나면 사용한 지화는 태워버리기 때문에 전통 지화의 실물은 문헌과 그림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더군다나 제작 방법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1980년대 초반 석용 스님은 천태종 총본산인 충북 단양 구인사(救仁寺)에 계시던 춘광(春光) 스님으로부터 사찰을 통해 근근히 명맥이 유지되어 온 지화 몇 종류의 제작법을 사사받았다. 이렇게 지화 공예에 입문하게 된 스님은 사라진 전통 지화의 원형을 재현하고자 전국에 몇 명 남아 있지 않은 장인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의 사료에 나오는 지화들을 참고했다. 지화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그림은 불화로 그중 지옥에 떨어진 영혼의 극락왕생을 비는 감로탱화(甘露幀畵)에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어 이를 토대로 한 지화를 여럿 복원했다. 그는 “전하는 이야기로 약 60종의 전통 지화가 있었다”며 지금까지 복원한 것이 25종 정도 되니 나머지를 찾아내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말했다. 100여 년 전의 시대상을 담은 책 한 권도 스님이 보물처럼 아끼는 귀한 자료다. 책에 실려 있는 한 장의 흑백 사진 때문이다. 불국토를 상징하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표현한 작품이다. 석용 스님은 연꽃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3박 4일에 걸쳐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관찰했다. . 220 × 180 ㎝. 부채난등은 지화를 장엄하는 형태 중 하나로 아래에서 위로 꽃송이가 점차 늘어나게 만든다. 꽃 모양이 부처의 머리처럼 곱슬곱슬한 불두화는 사찰에서 정원수로 많이 심는 꽃이다. “제가 2000년대 중반 덴마크 코펜하겐의 천태종 사찰 고광사 주지로 있을 때 스웨덴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곳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아손 그렙스트(W. A:son Grebst) 기자가 쓴 조선 방문기 『I.KOREA』(Elanders Boktryckeri Aktiebolag 출판사, 1912)를 발견했는데, 사진 한 장에서 살모란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스님은 전통 지화를 해외에도 알리기 위해 덴마크, 캐나다, 일본, 벨기에,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특히 2014년 6월 미국 메릴랜드 찰스 카운티에서 열린 제22회 찰스 카운티 문화 축전에서는 제작 체험 부스를 운영해 현지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2017년 7월에는 한미문화예술재단이 주최하는 제12회 워싱턴 한미문화축전 행사에서 3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2미터 높이에 달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부채난등(부채 형태의 꽃꽂이)과 250여 송이 꽃으로 연출한 팽이난등(팽이 모양의 꽃꽂이)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그때 찰스 카운티의 피터 머피 커미셔너 의장이 저에게 다가와 감동적이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옷깃에 꽂고 있던 카운티 배지를 제 도포에 꽂아 주었습니다. 행사장에 있던 기자들이 무척 놀라워했어요.” 현재 스님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한 건물을 임대해 작업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화재 지정을 받은 덕분에 제자를 키워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은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척박한 환경 속에 놓여 있다. 그는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지화 기법을 전수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이 마련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비쳤다. . 200 × 85 ㎝. 살접기 기법으로 만든 모란을 화병에 팽이 모양으로 꽃꽂이했다. 일본 효고현 약선사(藥仙寺 Yakusenji Temple) 소장 감로탱화 속 지화를 재현한 작품이다. 이 탱화는 조선 중기 1589년도에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감로탱화이다.

베일을 벗고 대중에게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

Culture 2021 WINTER 1073

베일을 벗고 대중에게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 삼성그룹 고 이건희(Lee Kun-hee 李健煕) 회장 타계 후 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국보급 문화재들을 비롯해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근현대 미술 작품들 2만 3천여 점이 사회에 환원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기증받은 작품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일반에 공개했으며, 이 특별전들은 대중적 관심 속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 정선(鄭敾 1676~1759). 1751. 종이에 먹. 79.2 × 138 ㎝. 비가 그친 후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서울 인왕산의 여름 풍경을 그린 작품으로 조선 후기 화가 정선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인왕산 자락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이 산의 모습을 자신감 있는 필치로 담아냈다. 전통적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실제 경치를 직접 보고 그리는 실경 산수의 화풍을 크게 발전시켰던 그의 말기 작품이다. 2020년 10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코마 상태에 빠졌던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대중들은 그가 남긴 소장 미술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창업주인 그의 부친 이병철(李秉喆) 회장 때부터 시작된 삼성가의 미술품 수집은 유명했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작품들에 더해 이건희 회장 부부가 그 규모를 획기적으로 늘린 컬렉션 중 일부는 그동안 삼성그룹의 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호암미술관이나 리움미술관을 통해 전시된 적이 있었지만, 전체 규모나 세부 목록은 공개된 바 없었기 때문에 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은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이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들보다 문화적 가치가 더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으며, 재산적 가치가 수조 원이 넘는다고 추정하는 시각도 있었다. 2021년 4월 삼성가는 이 회장의 개인 소장 문화재와 미술품 2만 3천여 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고미술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국내외 거장들의 미술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7월 21일부터 9월 26일까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특별전을 개최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또한 7월 21일부터 내년 3월까지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을 열고 있다. (왼쪽). 14세기. 비단에 채색. 83.4 × 35.7 ㎝. ‘수월관음’은 관음보살의 또 다른 이름으로 하늘의 달이 여러 곳의 맑은 물에 비치듯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뜻을 지닌다. 관음보살이 걸친 투명한 옷 아래 비치는 문양과 은은한 색채의 조화에서 고려 불화 특유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오른쪽). 14세기. 비단에 채색. 93.8 × 51.2 ㎝. 천수관음보살은 무수히 많은 손과 눈으로 중생을 구원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 불교는 천수관음보살 신앙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림으로 전하는 천수관음보살도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이 그림의 천수관음보살은 11면의 얼굴과 44개의 손을 지닌 모습으로 각각의 손에 좋은 의미를 가진 물건을 들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 이건희 컬렉션은 국가 기증에 앞서 작품의 성격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의 미술관에도 일부 기증되었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 출신의 화가 김환기(1913~1974 金煥基)와 천경자(1924~2015 千鏡子)의 작품들은 전남도립미술관에, 경상북도 대구 출신의 화가 이인성(1912~1950 李仁星)과 서동진(1900~1970 徐東辰)의 작품들은 대구미술관에, 강원도 양구 출신인 박수근(1914~1965 朴壽根)의 작품은 양구 군립 박수근미술관에 각각 수십 점씩 전달되었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기증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간 유물들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작품들일 것이다. 국보급 문화재들을 비롯해 한국 미술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토기, 도자기, 조각, 서화, 목가구 등 방대한 유물 2만 1,600여 점이 기증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그중 당대 최고의 미감과 빼어난 기술을 보여 주는 명품 77점이 선별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전시작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정선(1676~1759 鄭敾)이 1751년 그린 와 국보급 금동불상들, 그리고 미려(美麗)한 보살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 고려 불화 를 들 수 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연코 이다. 이 작품은 경복궁 좌측에 자리 잡고 있는 인왕산에 비가 내린 직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시기적으로 유럽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는 그랜드 투어가 유행하면서 점차 관심을 끌게 된 풍경화들과 동시대에 제작되었다. 이 그림은 영국의 풍경화가 리차드 윌슨(Richard Wilson)이 1750년 이탈리아를 방문하면서 그렸던 작품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먹과 유화 물감이라는 재료의 차이가 있지만, 윌슨의 작품이 사실적 색채 묘사에 입각하여 목가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충실하였다면, 는 붓의 다양한 놀림과 먹의 농담에 의해 생겨나는 미묘한 차이를 이용하여 비가 개인 직후 안개가 걷혀 가는 인왕산의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했다는 점이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 김환기(Kim Whanki 金煥基 1913~1974).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281.5 × 567 ㎝. 그림에 등장하는 반라의 여인들과 백자 항아리, 학, 사슴 등은 김환기가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까지 즐겨 다루었던 모티브들이다. 대형 벽화 용도로 제작된 작품으로 파스텔 톤의 색면 배경 위에 양식화된 인물과 사물, 동물 등이 정면 또는 정측면으로 배열되어 고답적인 장식성을 띤다. © 환기재단·환기미술관(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미술사적 가치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증받은 이건희 컬렉션은 1,488점이다. 규모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상 최대 기증이지만, 20세기 초의 희귀하고 중요한 작품들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곳에서 현재 전시되고 있는 58점의 근현대 미술 작품들은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형성하는 작가들의 대표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20세기 전반기에 식민 통치와 민족 분단에 이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혼란과 파괴의 시기를 겪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를 전후로 한 미술품들의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분실되어 미술사 연구의 자료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따라서 고난과 결핍을 이겨내며 어렵게 제작된 작품들 중 적지 않은 수량이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오른쪽). 백남순(Baik Nam-soon 白南舜 1904~1994). 1936년경. 캔버스에 유채. 8폭 병풍. 173 × 372 ㎝. 도쿄와 파리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한국의 1세대 여류 화가 백남순의 대형 작품으로 서양의 아르카디아와 동양의 무릉도원이 동시에 연상되어 동서양의 이상향이 결합된 듯한 느낌을 준다. 동서양 회화의 소재와 기법을 어떻게 융합하고 변형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화가였던 남편 임용련(任用璉 1901~?)이 한국전쟁 중 실종된 후 1964년 자녀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 이후의 작품 활동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장욱진(Chang Ucchin 張旭鎭 1917~1990). 1938. 캔버스에 유채. 65 × 80.5 ㎝.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장욱진은 집, 나무, 새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소재들을 단순화시켜 동화적으로 표현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 작품은 양정고보 재학 중 조선일보가 주최한 공모전에 출품하여 최고상을 받은 것으로 그의 대표적인 초기작이다. 세밀한 묘사는 생략되었지만 화면 구성이 잘 짜여 있다. 널리 알려진 그의 독특한 화풍이 시작되기 이전의 작품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출품작 가운데에는 백남순(1904~1994 白南舜)의 과 장욱진(1917~1990 張旭鎭)의 , 그리고 김환기의 등이 주목된다. 은 한국의 전통적 8폭 병풍 형식의 화면에 유화로 그린 작품으로 동서양 미술의 형식적 만남을 보여 주며, 현재까지 발견된 백남순 작가의 거의 유일한 대형 작품이다. 단순하고 천진한 작품을 주로 그렸던 장욱진이 20살에 신문사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한 는 작가의 전성기 작품들과 달리 사실주의적인 풍속화 형식의 묘사를 보여 준 귀중한 초기작으로서 주목된다. 1963년부터 1974년 사망할 때까지 뉴욕에서 작업을 한 김환기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73년에 제작한 점화(點畵) 은 최근 국내뿐 아니라 뉴욕과 홍콩 등의 경매에서도 수백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하면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의 전성기 대작 가운데 하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증받은 이건희 컬렉션은 1,488점이다. 규모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상 최대 기증이지만, 20세기 초의 희귀하고 중요한 작품들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 이응노(Lee Ungno 李應魯 1904~1989). 1971. 천에 채색. 230 × 145 ㎝. 이응노는 장르와 소재를 넘나드는 끊임없는 실험으로 한국 미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작가이다. 1960년대 초부터 제작한 ‘문자 추상’ 시리즈 또한 그의 조형적 실험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 작품은 서정적 경향이 나타나는 초기작과 달리 문자가 더욱 입체적, 추상적으로 조합되어 있다. . 유영국(Yoo Young-kuk 劉永國 1916~2002). 1974. 캔버스에 유채. 136 × 136.5 ㎝. 유영국은 1960년대 초부터 일관되게 ‘산’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에게 산은 자연의 신비와 숭고함을 담은 아름다움의 원형이었으며, 동시에 형태와 색감 같은 회화적 요소를 실험하기 위한 매개체였다. 그의 회화적 여정에서 전환점이 되는 시기에 그려진 이 그림은 기존의 절대 추상에서 형태와 색감이 보다 자유로운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전시 관람 열기 이건희 회장의 유족들이 기증한 이번 작품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두 전시에 대한 관람 열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최고 부자가 소유한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에 더하여 최근 국민 소득 증가에 따른 문화 소비의 활성화가 맞물려서 그야말로 예술계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평소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았던 일반 시민들, 특히 젊은 층들이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향했는데 여기에는 평소 전시장을 자주 찾는 것으로 알려진 그룹 BTS의 리더 RM뿐 아니라 젊은 층들에게 인기 있는 유명 연예인들의 행보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양 전시는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하여 사전 예약으로 제한된 인원만 관람이 가능한데, 그 때문에 입장권 예약 경쟁이 뜨거워지고 한때 암표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미술관 관람 문화는 유럽의 살롱전 형식과 유사한 조선미술전람회가 1922년 창설되면서 일반 관람이 시작되어 이제 겨우 한 세기를 지나고 있다. 그동안 전시 관람은 높은 문화적 소양을 요구하는 특별한 행위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최근 이러한 사회적 인식에 점차 변화가 생겨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전시 관람과 전시장에 인접한 편의시설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을 일상의 중요한 활동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때마침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들이 공개되면서 그 열기가 더욱 확산되어 가고 있다. . 천경자(Chun Kyung-ja 千鏡子 1924~2015). 1983. 종이에 채색. 96.7 × 76 ㎝.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린 천경자는 동양의 전통 안료와 종이의 성질을 이용한 기법을 통해 화면에 몽환적인 느낌을 담아냈다. 자신의 큰며느리를 모델로 한 이 그림 역시 아름다운 색감과 문학적 서정을 토대로 독자적 양식을 완성한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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