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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SPRING
고색창연한 도시의 젊은 감성
경주가 그저 고풍스럽기만 한 도시는 아니다. 감성적인 카페와 소품 가게, 야경 명소 등을 비롯해 스릴을 즐길 수 있는 놀거리도 가득해 젊은 세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요즘 경주는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힙한’ 도시로 변신 중이다.
황리단길은 경주의 고풍스러운 정취와 트렌디한 감성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장소로, 경주 여행 코스의 메카로 불린다.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해 주말이면 젊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국관광공사
경주 구도심 남쪽에 위치한 황남동은 무덤이 지천이다. 이곳은 경주역사유적지구 중 신라 왕과 왕비, 귀족들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는 대릉원지구에 속한다. 주변에는 계림과 월성 같은 유적지를 비롯해 한옥마을이 인접해 있다. 그런 까닭에 황남동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각종 건축 행위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오랫동안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황남동이 지금은 ‘황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적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경주시가 올해 2월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설 명절 기간 경주의 주요 관광지를 방문한 관광객은 약 54만 명이다. 여러 관광지 중 가장 방문율이 높은 곳은 약 35만 명이 찾은 황리단길이었다. 불국사 9만 7,621명, 대릉원 5만 3,881명, 첨성대 2만 6,953명, 봉황대 1만 1,422명 등과 비교해 볼 때 황리단길의 인기는 압도적이다.
월성 지구는 신라의 역대 왕들이 거주하던 궁궐이 있었던 자리이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터만 남아 있다. 봄이면 유채꽃이 만발해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다. ⓒ경주시, 사진 박수용
최신 트렌드의 집합소
황리단길은 경주의 최신 트렌드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황리단길은 공식 명칭이 아니다. 내남사거리부터 황남초등학교 사거리까지 700미터 남짓 이어지는 이 길의 정식 명칭은 ‘포석로’이다. 포석로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황리단길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황리단길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중후반 무렵이다. 상권 활성화를 위한 상인들의 부단한 노력과 경주시의 지원에 힘입어 개성 있는 가게들이 하나둘 들어섰는데, 기존에 있던 1960~70년대의 낡은 건물들과 어우러져 독특한 경관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서울 이태원의 소문난 명소 ‘경리단길’을 빗대 황리단길이라는 별칭이 생겨났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과거와 현대의 절묘한 하이브리드다. 한옥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만 놓고 보면 전주 한옥마을과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천천히 걷다 보면 맛이 다르다. 경주만의 DNA가 느껴진다. 황리단길의 상점 거리는 500번 버스가 지나는 도로가 중심이다. 대릉원 담벼락을 돌아 제과점과 기념품숍이 보이기 시작하면 딱 거기가 시작점이다. 한옥 호텔 황남관까지 이르는 길에는 주전부리를 파는 가게, 개성 있는 카페와 빵집, 기념품이나 신기한 물건을 파는 잡화점, 사진관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메인 도로 옆으로는 군데군데 좁은 골목이 가지처럼 뻗어 있다. 골목 안에는 술집과 레스토랑, 사주 카페, 한옥 게스트하우스, 서점 등이 빼곡하게 포진해 있다. 혈관처럼 고불고불 뻗은 샛길을 탐험하는 맛이 끝내준다. 마치 일본 규슈의 유후인 마을이나 동유럽 옛 도시의 플라자마켓 거리를 빼닮았다. 황리단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즐기는 방식도 다르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그냥 마시는 법이 없다. 인증샷이 필수라서 사진 먼저 찍는다. 마시고 먹는 건 그다음이다. 톡톡 튀면서 앙증맞은 가게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황리단길 투어를 한층 재미있게 해주는 요소는 주전부리다. 경주의 트렌디한 간식거리가 이곳에 다 모여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건 십원빵이다. 불국사 다보탑이 그려진 십 원짜리 동전을 재현한 빵으로, 크기는 손바닥만 하다. 경주의 문화유산을 모티프로 한 도굴빵도 인기다. 이 외에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이색적인 디저트가 많다.
작지만 강력한 페스티벌
황리단길에서는 무려 15만 명이 모이는 축제 ‘황금 카니발’도 벌어진다. 이 행사는 2022년 ‘황남동 카니발’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2024년 황리단길 인근 지역까지 장소를 확장하면서 명칭을 바꾸었다. ‘우리 동네 작은 페스티벌’을 표방하는 이 축제는 지역 내 노포들이 주요 무대이다. 카페, 식당, 게스트하우스, 미용실, 주차장 등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소규모 공간에서 진행하다 보니 코앞에서 뮤지션들의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다.
황금카니발은 황남동 일대에서 진행되는 소규모 음악 페스티벌로 국내 최고의 인디 밴드들과 뮤지션들이 공연을 펼친다. 2024년 3회를 맞이한 이 행사는 도심 상권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황금카니발
무대는 작지만 출연하는 뮤지션들은 국내 정상급 밴드들이다. 지난해에는 김창완밴드, 잠비나이, 추다혜차지스 등이 멋진 공연을 펼쳤다. 고즈넉한 한옥 북카페를 록음악으로 물들인 크라잉넛과 갤럭시익스프레스의 무대도 방문객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다.
황금 카니발은 공연뿐 아니라 대중음악사를 주제로 한 토크쇼, 플리마켓, 전국 유명 브루어리의 수제 맥주 시음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곁들여졌다. 고도(古都)로만 알려진 경주에서 ‘현재 시제’를 만날 수 있어 흥미로웠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황금 카니발은 동시대 음악이 지역의 역사와 만나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스릴 만점의 놀이기구
경주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경주월드도 있다. 이곳의 연간 방문객은 110만 명으로,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와 경기도 용인의 에버랜드에 이어 국내 3대 테마파크로 꼽힌다.
경주월드는 보문관광단지에 있다. 1970~8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이곳에서 젊은 시절 오리배를 타고 놀며 데이트를 즐겼다. 지금의 20~30대 연인들은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특히 경주월드의 대표적 어트랙션인 드라켄은 압권이다. 63미터에 달하는 이 기구는 고층 빌딩 21층에 해당되는 높이에서 수직 하강한다. 높이로는 국내 놀이기구 중 원톱이다. 드라켄을 타보기 위해 전국에서 찾아올 정도로 인기 있다. 최고 순간 시속은 117km/h, 경사각은 90도에 달한다. 운행 시간 2분 동안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전 세계 롤러코스터의 랭킹을 집계하는 데이터베이스닷컴이 조사한 2022년 랭킹에는 세계 11위에 올라 있다.
보문관광단지에 위치한 경주월드는 1985년 국내에서 두 번째로 개장한 놀이공원이다. 이곳을 대표하는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는 드라켄이다. 63m 높이에서 90도로 수직 하강한다. ⓒ경주월드
파에톤도 무시무시하다. 온라인 패널 서비스 패널나우가 2023년 10월 3일부터 10월 8일까지 전국 3만 2,2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내에서 가장 무서운 놀이기구 톱10’ 조사 결과 5위에 올랐다. 에버랜드의 T익스프레스, 롯데월드의 자이로스윙과 어깨를 견준다.
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들이 더 있다. 360도로 회전하다가 거꾸로 매달리는 크라크도 그중 하나다. 최소한 40분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타야 하는 명물이다. 급격한 각도 변화와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토네이도도 있다. 비교적 최근에 설치된 스콜&하티는 아시아 최초의 싱글 레일 롤러코스터이다. 타고 있으면 숨이 멎는 느낌이다.
보문관광단지에서 자동차로 약 15분 거리에는 야경 명소가 있다. 신라 시대 천문대인 첨성대, 그리고 동궁과 월지이다. 야경을 즐기며 사진을 찍으려는 젊은이들로 언제나 북적거리는 곳들이다.
아름다운 현대 건축물들
경주엑스포대공원은 최근 들어 유명해진 핫플레이스다. 1988년 국제박람회를 계기로 조성된 이곳은 현재 전시·체험·공연 등 다양한 경험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젊은 세대가 이곳에 열광하는 이유는 공원의 상징인 경주타워의 독특한 외관 때문이다. 82미터의 아찔한 높이를 자랑하는 타워는 중심부가 뻥 뚫려 있는 파격적인 설계를 보여준다.
타워의 중심부는 7세기 건립되었던 황룡사 구층 목탑의 실루엣을 음각으로 디자인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주타워를 “탑을 품은 건물”로 부른다. 이 아이디어를 낸 이는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이다. 사라져 버린 황룡사 구층 목탑을 현대식 건물에서 되살리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담겼다. 꼭대기 층인 전망대에서는 보문호를 중심으로 자리한 보문관광단지, 경주월드 등 주변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 쿠마 켄고가 설계한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기념관도 놓칠 수 없다. 현무암을 이어 붙이듯 쌓아 올린 독특한 외관은 주상절리의 형상이다. 건물 전체를 덮고 있는 황금빛 격자와 3개의 언덕 형상은 각각 신라 금관과 고분을 상징한다. 경주엑스포대공원의 백미는 솔거미술관이다. BTS 리더 RM이 방문해 화제가 됐던 곳으로, 아미들의 성지 중 하나다. 현대적인 수묵화로 널리 알려진 박대성 화백의 작품 830여 점이 이곳에 소장돼 있다.
한편 따뜻한 봄날에는 자전거 공원 펌프트랙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젊은이들을 목격할 수 있다. 이곳은 통상적인 자전거 공원이 아니다. 면적 7,800㎡ 규모로 전국 최대이며, 난이도별로 코스가 갖춰져 있다. 다양한 형태의 요철을 통과하면서 기술 연마와 더불어 스릴을 즐길 수 있다. 최고의 매력은 무료라는 점이다.
경주엑스포대공원은 1998년 국제박람회 행사장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미술관, 박물관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원으로 자리 잡았다. 경주엑스포대공원 내에 자리한 경주타워는 신라 시대 목조 건축물인 황룡사 구층 목탑을 형상화한 건물이다. ⓒ경주시, 사진 유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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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SPRING
왕실 제사상에서 길거리 음식까지
한 나라의 음식 문화는 수도를 중심으로 꽃핀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다채로운 음식 문화를 만들어 냈다. 이런 동력은 근현대에도 이어져 경주만의 풍요로운 먹거리 문화를 창출했다. 경주 여행에서 미식이 필수인 이유이다.
하우스오브초이는 경주의 명문가 최부자댁의 후손이 설립한 라이프스타일 플랫폼으로, 한식 파인 다이닝 ‘요석궁1779’를 운영하고 있다. 이 가문의 내림 음식을 재해석한 정갈하고 품격 있는 한식을 선보인다. ⓒ 하우스오브초이
대릉원지구에 있는 신라 왕족 무덤 중 하나인 서봉총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때는 1920년대이다. 일제강점기였던 이 시기에는 유물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서봉총의 학술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2016년부터 이듬해까지 2년간 이 무덤의 재발굴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로 2020년 < 서봉총 재발굴의 성과: 영원불멸의 성찬 >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500년 전 신라 왕족의 제사 음식이었다. 서봉총에서 돌고래 뼈와 복어 뼈, 성게, 민어 등이 발견되면서 제사 음식으로 사용되었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제사 음식을 담았던 사각형 합(盒)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아하고 세련된 모양새였다.
교촌마을은 신라 최초의 국립대학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최부자 고택을 비롯해 조선 시대의 전통 한옥이 많이 남아 있어 고즈적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 한국관광공사
양반가 내림 음식
정성을 다해 차리는 제사상에 귀한 식재료가 올라갔다면, 평상시 왕실 밥상은 쌀과 나물, 고기나 생선 등으로 구성된 균형 잡힌 소박한 식단이었다. 왕실 밥상인데도 지천으로 흔한 나물이 빠지지 않은 데엔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불교의 영향이 컸다. 스님들의 일상식인 사찰 음식은 그저 허기를 채우는 용도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는 수행식이다. 육식을 금한 사찰 음식의 주재료는 나물이었다. 그러한 영향으로 지금도 경주의 여러 한식당들은 나물 위주로 맵고 짜지 않은 담백한 음식을 내놓는다.
조선 시대 지배 계급인 양반가의 음식도 경주의 식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반가 음식은 같은 식재료를 사용해도 지역별로 조리법이 달랐다. 예컨대 닭고기 요리라도 전라도 양반가와 경상도 양반가의 맛이 달랐다. 가풍이 맛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 양반가 음식은 종가를 중심으로 후대로 이어졌다.
교동법주는 최부자댁에서 대대로 빚어 온 전통 술이다. 토종 찹쌀과 누룩으로 만드는 이 술은 밝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곡주 특유의 향기가 난다. 맛은 단맛과 약간의 신맛이 난다. ⓒ 국가유산청
경주를 대표하는 최고 양반가는 이른바 ‘경주 최부자댁’으로 불리는 가문이다. 조선 시대부터 12대에 걸쳐 부를 축적한 이 집안은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을 하며 자금도 지원했다. 12대 후손 최준(1884~1970)은 가문의 모든 재산을 대학 설립에 바쳤다. 그래서 경주 최부잣집에는 항상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칭송이 따라다닌다.
후손 최재량 씨는 2024년 집안 음식을 정리한 책 『경주 최부자 종가 충의당의 음식』을 며느리인 이영주 씨와 함께 펴냈다. 충의당은 이 가문의 출발점이 된 조선 시대 무신 최진립(1568~1636)이 거주했던 가옥의 이름이다. 책에는 이 댁 제사 음식부터 내림 음식까지 자세하게 기술돼 있다. 제사상에는 가로세로 길이까지 정확하게 재서 정갈하게 조리한 문어, 조기, 쇠고기 등의 요리가 올랐다. 나물 요리도 재료가 콩나물,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 등 다양했다. 한식의 기본인 장도 정월 장, 보리쌀 된장, 찹쌀고추장 등 여러 가지였다.
계절의 변화에 조응해 만든 음식은 더없이 근사한 건강식이었다. 봄 내림 음식엔 고사리 보리밥, 가자미 미역국, 쑥버무리, 완두콩죽 등이 있다. 여름엔 보리 열무김치, 청각 홍합 냉국, 오리 백숙 등이 있다. 가을엔 녹두전과 버섯전골 등이, 겨울엔 갈치식해와 생대구탕 등이 내림 음식이다. 하나같이 품격 넘치는 음식들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한식의 진수가 이 댁 밥상에 있다.
음식의 품격
경주 교동엔 한정식 레스토랑 ‘요석궁 1779’가 있다. 한정식은 한식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음식을 내는 정식을 말한다. 한국의 전통 밥상이다. ‘요석궁’은 신라 시대 사람인 요석공주가 살던 궁터에 최준의 첫째 동생인 최윤이 분가하여 지은 집 이름이다. 지금 그 후손들이 최씨 가문의 내림 음식을 기본으로 한 한식을 이 레스토랑을 통해 선보이고 있다. 한국 전통 가옥에서 맛보는 한정식이다. 운치가 미식의 반일 정도로 근사하고 격조가 높다.
그런가 하면 경주를 대표하는 술도 경주 최부자댁과 관련 있다. 명주로 알려진 교동법주는 최씨 가문의 3대손인 최국선이 조선 숙종 때 낙향해 처음 빚은 술이다. 그는 궁중음식을 관장하는 기관 사옹원의 관리였다. 당시 이 집 마당 우물물이 쓰였다는데, 물의 온도가 사계절 변함없이 같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주재료는 토종 찹쌀이다. 교동법주는 최씨 가문의 가양주다. 가양주란 집에서 만든 술을 말하는데, 양반가는 집마다 술을 빚었다. 그 맛도 다 달랐다. 집마다 레시피가 달랐다는 소리다. 소중한 자산이었던 레시피는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교동법주는 300년 넘는 역사와 뛰어난 맛 등을 인정받아 1986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나라의 크고 작은 행사에 만찬주로 자주 오르는 술이다. 현재 이 가문의 일원인 최경 씨가 교동법주 기능보유자로 맥을 잇고 있다. 교동법주 체험 행사나 시음회마다 내국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도 몰린다.
경주에는 신선한 제철 식재료를 전통 조리법대로 만들어 내놓는 한정식 가게가 많다. 보통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를 시작으로 활어회, 갈비찜, 보리굴비 구이 등의 요리에 각종 밑반찬이 딸려 나온다. ⓒ 경주시
다채로운 길거리 음식
경주에 고급 한식당만 있는 건 아니다. 경주 별미 중에는 회국수가 있다. 말 그대로 국수에 회가 들어간 음식이다. 다른 말로 놋전국수라고 한다. 고급 식기인 놋그릇이 많이 생산되던 동네의 주민들이 먹던 음식이다.
회국수는 경주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 중 하나다. 삶은 소면에 채 썬 채소와 김 가루, 참가자미 회를 올린 후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 국수다. 사진 가운데가 회국수이다. ⓒ Ya Happy Project
경주를 대표하는 국수엔 밀면도 있다. 서울에 평양냉면이 있다면 경주엔 밀면이 있다. 평양냉면이 메밀가루로 면을 만든다면, 밀면은 그보다 저렴한 밀가루로 제면한다. 밀가루가 재료라면 일반 국수와 뭐가 다른지 의문을 표할 이들도 많겠지만, 면만 다를 뿐 맛이 평양냉면집과 비슷하다. 평양냉면에서 면만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명성이 높은 곳은 1998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밀면 전문점 ‘현대밀면’이다. 한국판 미쉐린 가이드로 불리는 식당 평가서 ‘블루리본 서베이’에 10년 연속 맛집으로 선정됐다. 쫄면 명가도 빼놓을 수가 없다. 분식점 대표 메뉴인 쫄면은 탱탱한 면과 달고 매운 양념이 버무려져 혀를 달구는 음식이다. 몇 젓가락만 집어먹어도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다. 요리 방송에도 소개된 바 있는 ‘경주명동쫄면’이 유명하다.
한편 어느 지역이나 그렇듯 경주에도 오래된 가게들이 있다. 특히 황오동 해장국 골목에 역사가 오래된 해장국 노포들이 줄지어 있다. 이 거리에서 대표 식당은 ‘팔우정해장국’이다. 실내는 소박하고 음식은 푸짐한 정겨운 식당이다.
채소에 밥과 고기 등을 싸먹는 쌈밥은 한식의 매력을 한껏 드러내는 음식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사람들만 오랫동안 즐겨온 독특한 먹거리다. 경주에도 맛깔난 쌈밥 전문점이 있다. 그중 ‘별채반교동쌈밥’은 경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 음식을 만든다. 10가지가 넘는 반찬이 나온다. 전국적인 유명세로 여행객이 많이 몰린다. ‘이풍녀 구로쌈밥’도 가볼 만하다. 생선구이, 잡채 등 15가지가 넘는 반찬과 다양한 종류의 쌈 채소가 나온다.
그런가 하면 이른바 황리단길로 불리는 황남동과 인근 골목엔 향긋한 음료와 달콤한 디저트 등을 파는 세련된 공간이 많다. 이곳에는 경주를 찾은 여행객들 대부분이 구입하는 황남빵이 있다. 1939년 황남동에서 만들기 시작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빵의 겉을 만들고, 삶아서 으깬 팥으로 속을 채우는데 달지 않고 담백하다. 이른 아침 찌자마자 판매하는 따끈한 빵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 별미다. 경주의 기념품 같은 빵이다.
경주 향토 음식의 대명사가 된 황남빵은 여행자들이 반드시 사가는 간식거리이다. 1939년 황남동의 한 빵집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1994년 경주의 향토 전통 음식으로 지정되었다. ⓒ 황남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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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자연 환경을 품은 도시
경주 여행 하면 흔히 유적지를 돌아보는 역사 기행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곳은 수려한 자연 경관으로도 유명하다. 산과 바다, 호수와 평야가 두루 어우러져 그 자체로 매력이 넘친다.
경주시 남쪽에 자리한 남산은 해발 468m와 494m 두 개의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6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들로 이루어진 산이다. 우리나라에서 불교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며, 자연 경관도 빼어나다. ⓒ 경주시, 사진 박영희
“남산을 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경주 시내 남쪽에 있는 남산은 ‘신라의 정신’이라고 할 만한 상징적인 산이다. 신라인들에게 신앙의 대상이었기에 천년 역사 동안 이곳에는 무수한 절들이 세워졌다.
신라가 존속했던 시간만큼 긴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이 산의 범상하지 않은 기상(氣像)은 여전하다. 수많았던 절들은 사라졌지만, 당대인들이 바위에 새긴 부처의 형상과 층층이 쌓아 올린 석탑들은 바위와 나무처럼 산의 일부가 되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깨지고 닳았지만, 그래서 인위적이지 않고 더 자연스럽다. 등산로를 걸으며 만나는 숱한 석불과 석탑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돌이지만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신라인들이 정성을 다해 어루만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솔숲의 싱그러움
남산은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 두 봉우리에서 뻗어 내려오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기암괴석이 웅장하고 구석구석 볼거리가 많아 등산로만 수십 코스에 달한다.
남산 서쪽 기슭의 삼릉숲은 왕릉 3기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숲이다. 이곳은 휘어진 노송들이 신비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 독특한 정취를 담으려는 사진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게티이미지
남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빠르지 않다.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산 앞에서 자주 멈추고, 오랫동안 응시한다. 그들의 목표는 정상에 닿는 것이 아니라, 남산이라는 ‘노천 박물관’ 관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분포된 유적과 유물은 약 700점에 이른다. 그중에는 13기의 신라 시대 왕릉도 포함된다. 그 왕릉들을 수만 그루의 소나무들이 수호한다. 남산의 숲을 이루는 수종의 80%는 소나무다. 그래서 남산은 한겨울에도 내내 푸르다.
남산의 솔숲은 강운구(Kang Woon-gu)나 배병우(Bae Bien-u) 같은 국내 대표적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그들의 앵글로 찍힌 솔숲은 붓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그린 수묵화 같다. 곡선과 직선으로 뻗은 나무 기둥들이 조화롭게 얽혀 있고, 그 사이로 온화한 햇빛이 쏟아지거나 어슴푸레한 안개가 감돈다.
특히 삼릉숲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솔숲으로 꼽힌다. 남산 서쪽 기슭에 3기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삼릉(三陵)’이라 불리는 구역의 숲이다. 하늘을 향해 뻗은 소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반원 형태의 커다란 무덤들은 죽은 이의 공간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언덕처럼 푸근해 보인다.
많은 이들이 이른 아침에 삼릉숲을 찾는다. 새벽안개가 채 걷히지 않아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아침의 신선한 솔향이 깊은숨을 쉬게 하기 때문이다. 삼릉숲에선 소나무 아래 앉거나 나무 기둥을 안고 오랫동안 명상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상적인 산책
봄에 경주를 찾는 여행자들은 보문호로 간다. 경주를 대표하는 벚꽃 명소이기 때문이다. 수령 50년의 1만 5천여 그루 벚나무가 호수를 둘러싸고 있다. 벚나무들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면 주변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다. 이때만큼은 보문호가 경주의 수많은 천년 유적지들을 압도한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꽃잎들이 수면과 사람들 어깨로 내려앉는다. 호숫가를 걷기만 해도 황홀하다.
호수의 역사는 60년이 조금 넘었다. 보문호는 원래 홍수와 가뭄을 대비해 1963년에 축조한 대규모 저수지였다. 그런데 정부의 ‘경주 종합 개발 계획’에 의해 1979년 보문 관광 단지가 개장하면서 쓰임이 달라졌다. 보문호는 보문 관광 단지의 중심축으로 오랜 시간 시민들과 여행자들의 쉼터 역할을 해 왔다. 경주의 다른 명소들과 견주어 역사는 매우 짧지만, 경주가 관광 도시로 거듭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호숫가에는 전망 좋은 호텔과 리조트, 카페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들을 잇는 산책로는 약 8km에 이른다. 벚꽃이 피는 봄뿐만 아니라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눈으로 감상하며 걷거나 자전거 타기에 좋은 길이다. 호숫가에는 1991년 설립된 우양미술관도 있다. 현대 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국내외 원로 및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또한 유럽과 미국의 현대 예술 작품과 197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대표작까지 두루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은 미스 반 데어 로에를 사사한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김종성(Kim Jong Soung, 金鍾星)이 설계했다. 한국 전통 건축의 구조와 중정의 개념을 빌려온 건축물로 정확한 비례와 섬세한 화강암 마감이 돋보인다. 수변 길을 따라 산책하고 미술관에 들러 전시회 관람까지 하면 호숫가에서 누리는 하루가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해진다.
보문호는 야경도 아름답다. 해가 지면 산책로와 그 주변에 조명이 켜져서 낭만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보문호는 ‘역사의 도시’ 경주가 아닌 온전히 쉬고 즐기는 ‘휴양지’ 경주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1970년대 말 개장한 보문관광단지는 인공 호수 보문호를 중심으로 240만여 평의 면적에 특급 호텔과 레저 시설, 미술관 등이 들어서 있다. 벚나무가 가로수로 식재되어 봄이면 만개한 벚꽃이 흩날리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 경주시, 사진 박춘엽
경주 바다의 숨은 보석
경주는 바다와 접한 고장이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 유명한 사적을 둘러보느라 바다까지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자들이 많지 않은 까닭이다. 경주의 해안선은 30km에 이른다. 경주 바다에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있던 한반도를 통일한 문무왕(재위 661~681)이 용으로 환생해 나라를 지키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경주시 양남면의 주상절리군은 규모와 형태에 있어 다른 지역의 주상절리와 뚜렷한 차별성을 지닌다. 10m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들이 1.7㎞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주름치마, 부채꼴, 꽃봉오리 등 다양한 형태의 주상절리가 대규모로 발달해 있다. ⓒ 경주시, 사진 이정희
해안선의 대부분은 트레킹 코스로 연결되어 있는데,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구간은 1.7km에 걸쳐 이어진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이다. 이 길은 군사 지역이어서 오랫동안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베일에 싸여 있다가 2012년 공개되었다. 길이 개방되자 경주의 ‘숨은 보석’ 양남 주상절리군이 드러났고, 중요성을 인정받아 그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빠르게 냉각되어 만들어진 오각형, 육각형의 돌덩이다.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은 무려 2,000만 년 전인 신생대 3기에 형성되었다. 각진 돌덩이는 성냥개비처럼 균일하게 쌓여 부채꼴, 주름치마, 꽃봉오리 등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주상절리는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해안가에 만들어져 매 순간 파도와 만난다. 파도가 주상절리를 덮치며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모습은 눈을 떼기 어려운 절경이다.
유서 깊은 씨족 마을
경주 북쪽 끝 낮은 구릉과 골짜기에 조성된 양동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씨족 마을이다.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가문이 15세기부터 자리 잡기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6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큰 변화 없이 주민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경주 양동마을은 조선 시대 초기에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입향해 대를 이어 살아온 마을이다. 한국의 씨족 마을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며, 주민들이 오늘날까지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을 지키고 있어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경주시
양동마을의 가치는 자연에 어우러져 전통 문화를 보존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한국인의 지혜에 있다. 마을을 처음 방문한 이방인들은 언덕과 골짜기를 따라 집들이 들어선 입체적인 풍경에 감탄한다. 본래의 지형을 따라 세워졌기 때문에 같은 층위의 집들이 없다. 한 집이 다른 집을 가리는 경우도 없어서 어느 곳이나 햇볕이 잘 들어온다. 또 어떤 집에서나 마을을 감싼 산을 바라볼 수 있다. 구릉 위로 난 마을 길을 따라 오르면 서로 다른 구조와 디자인으로 지은 개개의 고택들을 만날 수 있다.
양동마을에는 조선 초기에 지은 기와집이 원형 그대로 네 채나 남아 있다. 마을의 역사를 함께한 수령 500년을 넘긴 나무도 여러 그루다. 마을 길은 구릉을 넘어 골짜기 아래로 이어진다. 골짜기에는 또 다른 집들이 외지인을 반긴다.
마을의 가장 높은 지대에 서면 경주를 관통하는 형산강의 지류와 드넓게 펼쳐진 평야, 그리고 그 주변의 수려한 산세를 조망할 수 있다. 발아래로는 올망졸망 자리 잡은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보인다.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시야를 가리는 것,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게 하는 풍경이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경주의 자연 경관은 유구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이곳을 특별한 도시로 만든다. 경주는 사계절 내내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하며, 여행자들에게 잊지 못할 최고의 순간을 제공한다.
Features
2025 SPRING
세계 문명과의 교류로 이루어 낸 신라의 황금 문화
경주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 그중 화려한 금관을 비롯한 황금 유물들은 매우 아름답다. 단순히 황금으로 만들어져서가 아니다. 동시대 유라시아 초원에 살았던 민족들과 교류했던 신라가 그들의 문명을 내재화해 독자적 문화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의 황금 유물들은 보편적이면서도 독창적이다.
2023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 천마, 다시 만나다 > 전시 모습. 이 전시회에는 사진작가 구본창의 천마총 출토 황금 유물과 유리잔 촬영 작품 11점이 소개되었다. 구본창은 한국인의 미의식이 담긴 백자, 탈, 꼭두, 단청 등을 비롯해 일상적인 오브제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작가다. 최근에는 황금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연작을 선보인다. 구본창은 한국 현대 사진의 예술성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황금은 신대륙과 구대륙, 아프리카를 통틀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대표적인 귀금속이다. 우리나라에 황금이 유입된 시기는 매우 늦었다. 한반도에서는 약 2천여 년 전 평양 근처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삼국 시대(B.C 1세기~7세기)에는 직접 제조하지 않고 주변 국가에서 수입했다. 중국의 역사책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2천 년 전 한국에 대한 이런 기록이 있다.
“마한(한반도 남서부에 존재했던 정치 연맹체) 사람들은 금은보화와 비단, 융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직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의 장식으로 삼거나 목이나 귀에 건다.”
여기서 말하는 구슬은 옥(玉)을 가리킨다. 옥과 관련된 속담도 많고, 지금도 옥 사우나나 옥 장판이 인기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인들은 옥을 좋아한다. 옥에 대한 선호는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고, 3천 년 전부터 만들었던 고인돌에서도 청동기 대신 옥이 더 많이 발견될 정도로 역사가 깊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황금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이 바로 서기 4세기 경주였다.
< Gold (KR 043-1) >. 구본창. 2023. Archival Pigment Print. 58 × 45.5 ㎝. 작가 및 국제갤러리 제공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금관 안쪽에 착용했다. 사진은 금관총에서 발견된 관모이다.
금관 발굴의 역사
고고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이집트를 떠올린다. 여기에는 1922년 발굴된 투탄카멘 미라의 영향이 크다. 신라 금관은 그보다 한 해 앞선 1921년 세상에 알려졌다. 민가 증축 과정에서 우연히 신라 시대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이 무덤에서 수많은 황금 유물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특히 금관이 처음으로 발굴되었기에 이 무덤의 이름은 ‘금관총(金冠塚)’으로 명명되었다.
< Gold (KR 052) >. 구본창. 2023. Archival Pigment Print. 58 × 45.5 ㎝. 작가 및 국제갤러리 제공 사진은 금관총에서 출토한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원형 머리띠 정면에 3단의 ‘출(出)’자 모양 장식 3개가 있으며,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 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이는 신라 금관의 전형적 형태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 이 무덤은 전문 지식을 갖춘 고고학자가 아닌, 경주에 거주하던 일본인 비전문가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파헤쳐졌다. 발굴자들이 유물 수습에만 관심을 둔 탓에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는 물론 자료 하나 남은 게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발굴로 얼마나 많은 황금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발견된 화려한 금관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동아시아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 한국의 황금 문화가 주목받게 되었다.
1926년에는 스웨덴의 황태자였던 구스타프 6세 부부의 방문에 맞춰 또 다른 무덤의 발굴이 진행됐다. 이때는 고고학이 취미인 구스타프 6세도 작업에 참여했다. 그래서 이 무덤은 스웨덴을 의미하는 한자 ‘서(瑞)’와 금관에 달린 봉황 장식을 의미하는 ‘봉’을 합쳐 ‘서봉총(瑞鳳塚)’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왕위에 오른 구스타프 6세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대규모 의료 지원단을 파견했다. 1500년 전 찬란한 황금 문화에서 이어진 소중한 인연이다.
한국전쟁 이후 신라 금관은 세계 곳곳에서 전시되면서 한국의 고대 문화를 알리는 문화 사절단 역할을 했다. 이후 1970년대에는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이 발굴되었다. 신라 금관은 단순한 금공(金工) 장신구를 넘어 식민지 역사의 아픔을 딛고 문화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의 현대사를 상징하기도 하는 셈이다.
문화적 유사성
신라 금관은 신라와 유라시아 초원의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이기도 하다. 서기 1~5세기 동안 유라시아 각지에서 일어난 민족 대이동 시기, 흑해 크림반도의 호흘라치 스키타이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이나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의 금관 등은 신라 금관과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이들은 흉노에서 시작된 황금 예술을 공유하면서 스스로를 흉노의 후예로 자처하는 등 공통점이 있다.
신라 금관은 유라시아 곳곳에서 목도되는 샤먼의 관(冠)과 비슷하다. 하늘의 대리인인 샤먼의 의식에 사용되는 관은 황금이 아니라 철이나 동으로 만들어졌지만, 사슴과 나무를 모티프로 해 많이 닮았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사슴뿔과 나무를 형상화한 관이 유럽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광활한 유라시아 지역에서 공통으로 사용된 셈이다. 사슴뿔은 매년 자라는 것이니 그 자체로 무한한 생명력을 뜻한다. 또 하늘로 뻗은 아름드리나무는 하늘과 이어지는 통로를 연상케 한다. 지금도 유라시아 곳곳의 샤먼들은 신성한 나무 밑에서 하늘과 소통하는 의식을 치른다. 만주족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신라 금관과 비슷한 관을 쓰고 신성하게 모시는 자작나무 앞에서 샤먼이 주도하는 제사를 모셨다. 샤먼의 관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역할을 의미했다. 시베리아의 암각화에는 마치 와이파이 수신기처럼 관을 쓰고 하늘과 연결되려는 샤먼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 Gold (KR 50) >. 구본창. 2023. Archival Pigment Print. 64 × 140 ㎝. 작가 및 국제갤러리 제공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관 드리개이다. 금관 좌우에 매달아 늘어뜨리는 장식이며, 나뭇잎 모양의 정교한 조각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하게 연결했다.
한편 금관에는 권력의 독점이라는 의미도 내재해 있다.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견되고 3년이 지난 해에 또 다른 무덤의 발굴 작업이 시행되었다. 이 무덤은 부장품 중 특이한 금방울이 들어 있어 ‘금령총(金鈴塚)’으로 불리게 되었다. 금령총에서는 기마 인물형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자세히 보면 말을 탄 인물의 머리가 뾰족하다. 이를 편두(扁頭)라 하는데, 갓난아이의 머리에 나무 같은 단단한 물체를 대고 헝겊으로 감아서 형태를 변형시키는 고대의 풍습이다. 편두를 했다는 것은 화려한 금관과 황금 장식으로 치장할 수 있는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 Gold (KR 48) >. 구본창. 2023. Archival Pigment Print. 58 × 45.5 ㎝. 작가 및 국제갤러리 제공 신라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귀걸이를 즐겨 착용했다. 천마총에서 발굴된 귀걸이는 무덤 주인이 착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리와 샛장식, 하트 형태의 드림이 연결되어 있다. 총길이 6.2cm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신라만의 일이 아니었다. 유라시아 곳곳에서 신라 금관과 비슷한 관을 썼던 사람들 모두 편두 머리를 했다. 흉노가 유라시아 초원을 지배한 직후 세계 곳곳에 금관과 편두 풍습이 결합되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유라시아 곳곳에서 신라와 비슷한 금관이 발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황금과 샤머니즘을 받아들인 동서양의 여러 지역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금관을 재창조했다.
지금도 금관의 비밀은 다 밝혀지지 않았다. 서양에 ‘다빈치 코드’가 있다면 한국에는 ‘금관 코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은 금관총 재발굴 작업을 통해 유물을 다시 조사해서 그 무덤과 금관의 주인공이 ‘이사지(尒斯智)’라는 이름의 왕이었음을 밝혀냈다.
국력의 상징
신라 금관에는 다른 나라의 금관에는 없는 특별한 장식이 있다. 바로 반달 모양의 옥 장식인 곡옥(曲玉)이다. 쉽게 지나치기 쉬운 이 장식에는 신라만의 지혜가 숨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신라에 황금이 도입되기 이전에 한국에서는 옥을 더 좋아했다. 황금 같은 금속과 달리 옥은 가공 시 뜨거운 도가니의 제련 기술이 필요 없다. 대신에 돌을 갈아내야 하는 도구와 노동력이 필요하다. 황금이 도입된 후 신라인들은 기존에 애용하던 옥을 버리는 대신 황금과 결합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한국의 옥과 유라시아의 황금이 한데 모여 신라만의 독특한 황금 문화가 창조된 것이다. 즉 신라 금관은 곡옥이라는 동아시아의 전통 위에 유라시아의 황금 제작 기술과 샤머니즘를 조화시켜 새로운 미적 경지를 연 사례라 할 수 있다.
< 천마, 다시 만나다 > 전시 전경. 천마총에서 발굴된 관모, 금관, 금제 관식 등을 촬영한 구본창의 사진 작품들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에서 신라는 가장 늦게 나라를 발전시켰다. 신라는 원래 박, 석, 김 씨의 세 왕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다가 서기 4세기경 내물왕 시절부터 김 씨가 단독으로 왕위를 계승하기 시작했다. 황금을 뜻하는 ‘김(金)’ 씨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지 이때부터 신라는 본격적으로 화려한 황금 문화를 발전시켰다. 황금은 단순한 보물이 아니었다. 세계 문명과 활발히 교류하며 성장했던 신라의 국력이 황금이라는 아름다운 유물에 응축된 것이다. 유라시아를 넘어 유럽 문명까지 받아들였던 적극성과 개방성이 있었기에 신라가 천년을 이어가며 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 가장 외진 동남쪽에서 유라시아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적극적으로 나라를 발전시킨 신라의 모습은 21세기 한국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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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SPRING
신라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도시
세계 곳곳에는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적들이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경주는 특별하다.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한옥으로 만들어진 게스트하우스에서 문을 열면 바로 앞에 거대한 고대 무덤인 대릉원이 보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신라로 여행을 간 듯하다. 경주가 한국인의 사랑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진은 경주역사유적지구 중 대릉원 지구이다. 이곳에는 신라의 왕과 왕비, 귀족들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192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굴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으며, 금관과 장신구를 비롯해 당대의 생활용품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 한국관광공사
경주는 과거 한반도의 고대 왕조 신라(B.C 57~A.D 935)의 고도(古都)였다. 삼국시대(B.C 1세기~7세기)를 거쳐 통일신라(676~935)에 이르기까지 고대 한반도에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경주역사유적지구는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개 지구에 52개에 이르는 지정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어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이 원형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어 이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도시 전체가 역사지구로 세계유산이 된 사례는 터키 이스탄불이나 오스트리아 비엔나 등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적으로 흔치 않다.
동궁과 월지는 왕자가 거처했던 공간이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외국에서 귀한 손님이 왔을 때는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신라 시대의 정원과 연못 조경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지이다. ⓒ 게티이미지
천년 왕조의 궁궐터
경주역사유적지구 중 신라의 왕실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은 월성 지구와 대릉원 지구이다. 월성 지구의 주요 기념물은 월성 옛터, 흔히‘안압지’로 알려져 있는 동궁과 월지, 현존 최고(最古) 천문대로 일컬어지는 첨성대, 그리고 경주 김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서린 계림이 대표적이다.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을 말한다. 동서로 890m, 남북으로 260m 길이의 반달 모양 토성이고 둘레는 2,340m이다. 문무왕(재위 661~681) 때 인근 안압지, 임해전, 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규모가 확장되었다. 신라의 성장과 번영,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동궁과 월지는 별궁이 자리했던 궁궐터이다. 왕자가 거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면서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역사적 자료와 연구를 통해 여러 전각을 복원하고 아름다운 야경을 조성해 관광객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다. 1970년대 이루어진 월지 발굴에서는 호수 밑바닥 진흙 속에 묻힌 3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그중 1,100여 점을 엄선하고 주제별로 나누어 상설 전시 중이다. 용면문와(龍面文瓦), 금동판 불상, 금동 초심지 가위 등에서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대릉원 지구는 세 그룹의 왕실 무덤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에서 화려한 금제 부장품과 유리 제품, 도자기들이 발굴되었다. 그중 천마총은 자작나무 껍질에 날개 달린 말을 그린 천마도가 발굴된 고분이다. 그 상상의 동물이 지켰던 무덤의 주인이 궁금해진다. 한편 산성 지구에는 명활성이 있다.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6㎞의 산성인데, 주로 왜구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외적(外敵)에 대항해 경주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방어 시설이다.
고대 불교 예술의 정수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527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했다. 이후 기존의 여러 토착 신앙이 행해지던 남산이 불교 성산(聖山)이 되어 순례지로 탈바꿈했으며, 당대 최고 건축가들과 장인들이 이곳에 사찰과 암자를 지었다. 수십 기의 석탑과 석불이 남아 있는 남산 지구는 우리나라에서 불교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신라 왕실은 불교를 사회 통합에 적극 활용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지만, 대표적 호국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구층목탑(80m가량)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대 발굴에서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13세기 몽골 제국 침공 때 목탑을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들이 불타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황룡사 터는 맞은편에 위치한 분황사지와 함께 신라 불교의 정수가 담긴 황룡사 지구를 이룬다.
그런가 하면 경주 동남쪽의 토함산에 위치한 석굴암과 불국사에서는 통일신라의 불교 미술과 만날 수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된 두 유산은 최고의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774년 완공된 석굴암은 지금까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비도(扉道)를 지나 돔 형태의 주실(主室)로 이어지는 공간마다 사천왕상과 여러 보살들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주실에는 3.45m 높이의 석가여래좌상이 연꽃 위에 앉아 있다.
용의 얼굴을 조각한 용면문와는 건물 지붕을 장식하는 건축 부재이며, 물의 신(神)인 용(龍)이 목조 건축물을 화재로부터 막아주기를 바라는 벽사의 의미도 있었다. 이 장식 기와는 삼국 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통일신라에 이르러 제작 기술이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사진은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길이 18.5cm의 용면문와. ⓒ 국립경주박물관
정신없이 신라 불교 예술의 정수를 감상하다 보면 왜 이곳이 세계유산에 드물게 적용되는 등재 기준 1번, 즉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으로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조각에 주로 쓰이는 대리석과 달리 까다롭다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기에 당대의 기술적 수준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한편 불국사에는 불교의 이상향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호국 사찰이지만,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깨끗한 세상인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이루겠다는 신라의 야심찬 꿈을 보여준다. 신라인들은 신라가 바로 부처의 나라라고 믿었기에 불국사는 부처님 나라의 사찰로서 곧 현세의 낙원을 의미한다. 8세기 건축 당시 모습 그대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청운교와 백운교를 지나 예배 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올라갈 수 있다.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신라 시대의 우수한 석공 기술을 엿볼 수 있는데, 대웅전 앞 완벽한 비례와 직선미를 보여주는 석가탑과 자유분방하면서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다보탑이 대비된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수난을 여실히 겪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의 일본이 조선(1392~1910)을 침략하면서 발발한 임진왜란(1592~1598) 시기 불국사의 목조 건축물은 방화로 모두 불타고 파괴되었다. 현재 모습은 1960~70년대에 석조물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한 것이다. 석굴암의 경우 일제강점기(1910~1945)에 대대적인 해체와 복원을 거치면서 오히려 훼손의 위기에 놓였다. 근대에 와서야 전면적인 수리를 거쳤는데, 여기에 국제 사회의 도움이 있었다. 1960년 당시 한국은 석굴암에서 원인 모를 누수가 계속되자 유네스코한국위원회를 통해 국제적 전문가를 초빙했고, 유네스코의 기술 자문과 재정 지원을 통해 긴급 보수를 마칠 수 있었다. 프로젝트를 총괄한 헤럴드 J. 플렌더라이스(H.J. Plenderleith) 박사는 석굴암이 당시 완전히 원형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세계인의 도움으로 되살아난 석굴암이 한국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것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진다.
전 세계인의 핫플레이스
경주는 중장년층과 노년 세대에게 수학여행의 인기 명소였다. 인근 도시에서 소풍을 온 초등학생부터 전국 각지에서 온 중고등학생들까지 관광 버스로 항상 붐비는 곳이었다. 2박 3일 일정으로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이동해도 볼 것이 가득하니, 토함산의 구불구불한 길에 느끼는 멀미도 참을 만했을 것이다. 신라 귀족들이 술잔을 띄워 놀았다는 포석정에는 그를 따라해 보는 학생들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가득하곤 했다.
첨성대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 시대의 천문 관측대로, 선덕여왕 때 축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시대의 과학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 높이는 9.51m이다. ⓒ 한국관광공사
지금 경주는 20~30대 젊은 세대의 핫플레이스로 거듭났다. 경주는 우스갯소리로 아무 땅이나 파도 유물이 나오는 곳이라, 일대의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법과 정책이 강력한 편이다. 한때 개발 바람이 불며 지나친 규제라는 반발도 있었지만, 지금은 지역 주민이 발 벗고 나서 마을과 문화유산을 지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덕분에 고층 건물의 방해 없이 신라 시대 고분을 볼 수 있고, 월지 전각에 올라 주변 경치를 둘러볼 수도 있다.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야경은 덤이다. 밤늦게까지 밝히는 조명 덕분에 안전하게 주요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으니 젊은 세대들의 인증샷이 끊이지 않는다. 기성 세대가 간직한 수학 여행의 추억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경주는 지금도 변하고 있다. 끊임없이 출토되는 유물과 함께 이미 발굴된 문화유산도 단장을 쉬지 않는다. 덩달아 거리 모습도 시대에 따라 빠르게 바뀌고 있다. 최고의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대릉원 옆 한옥 거리를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카페와 음식점, 게스트하우스 등이 들어서 있어 이채로운 풍경을 선사한다. 과히 수천 년 전 시간과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다.
나아가 미래도 이야기된다. 2025년 10월 말 경주 개최로 예정된 제3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그것이다. 과거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속에서 미래를 보고 싶어 하는 전 세계 손님들로 경주는 더욱 바빠질 것 같다. 가급적이면 빨리 경주를 만나길, 그리고 미리미리 방문지 목록도 만들라고 당부하고 싶다. 경주에 담긴 천년을 만나는 데 시간은 항상 부족할 테니.
8세기에 완공된 석굴암은 경주 토함산 중턱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굴 사원이다. 내부에는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주위 벽면에 총 40구의 불상이 조각되었으나, 현재는 38구만이 남아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게티이미지
김지현(KIM Jihon)유네스코한국위원회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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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WINTER
서촌의 공공 한옥들
서촌은 북촌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한옥 마을로 꼽히는 지역이다. 그중 서울시와 종로구가 운영하는 서촌 내 공공 한옥들은 전통 주거 문화 체험은 물론 다채로운 문화 예술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어 서촌을 대표하는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중이다.
서촌라운지의 안마당 전경. 2층 구조의 한옥을 개조한 서촌라운지는 아파트 등 현대식 라이프스타일에 익숙해진 시민들에게 한옥의 주거문화를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 서울시청
서촌의 한옥들은 대부분 근대기에 양산된 ‘도시형 한옥’이다. 1920~30년대 주로 지어진 도시형 한옥은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인구 과밀 현상을 겪고 있던 경성(京城, 현재의 서울)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났다. 당시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토지를 매입해 필지를 잘게 쪼갠 뒤 소형 한옥을 지어 대량 공급했다.
도시형 한옥은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대문과 방들이 ㅁ자 형태로 연결된 구조이다. 전통 한옥에 비해 규모나 구조가 간소화된 대신 장식적인 요소가 많아지고, 재료에서도 유리나 벽돌 등 근대적인 소재가 사용되었다. 또한 점차 달라지는 생활 양식을 반영해 부엌과 화장실을 신식으로 고치는 등 개량되었다.
하지만 도시형 한옥에도 한옥 특유의 정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많은 이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하룻밤이라도 특별함을 누리고자 한옥 스테이를 찾는 이유다. 그러나 한옥 스테이는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부담이 큰 게 사실이다. 이에 서울시와 종로구에서는 공공 자금으로 한옥을 매입해 일반에 개방하고,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서촌에도 상촌재(Sangchonjae, 上村齋), 홍건익 가옥(Hong Geon-ik House, 洪建翊 家屋), 서촌라운지(Seochon Lounge) 같은 공공 한옥이 있어 지역 주민들과 서촌 방문객들이 즐겨 찾고 있다. 이들 공공 한옥에서는 전통 주거 문화를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예 체험이나 미술 작품 전시 등 색다른 문화 예술 프로그램도 즐길 수 있다.
서촌에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도시형 한옥이 밀집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전통 한옥과 유사해 보이지만 형태와 재료, 구축 방식 등에서 차이가 난다. 유리와 벽돌, 타일, 함석 등 근대적 재료를 사용하는 한편 장식적 측면이 매우 강화되었다는 점이 도시형 한옥의 특징이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전통 한옥의 미
상촌재는 오랫동안 방치된 경찰청 소유의 폐가를 종로구가 2013년에 매입해 복원한 후 2017년부터 일반에 개방한 공간이다. 19세기 말 전통 한옥 방식으로 조성된 이곳은 온돌 문화를 비롯해 한국 전통 가옥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장으로 활용된다. 안마당과 사랑마당이 지형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위계를 지니며, 이들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상촌재는 한옥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2017년에 국토교통부의 <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을, 2018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을 받았다.
상촌재는 장기간 방치된 한옥 폐가를 19세기 말 한옥 양식으로 복원한 공간이다. 전통 한옥 미학을 되살린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받으며, 서촌의 대표적 공공 건물로 자리 잡고 있다. ⓒ 종로문화재단(Jongno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상촌재의 매력은 건축물뿐 아니라 풍성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에도 있다. 이곳은 한옥·한복·전통 공예·세시 풍속과 관련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한다. 일회성 체험 행사뿐 아니라 전문 교육 프로그램도 탄탄하게 갖추고 있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해 주기적으로 전시회도 개최한다. 상촌재는 시민들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기 때문에 연간 평균 약 2만 명이 방문하는 서촌의 인기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서촌의 공공 한옥 중 하나인 상촌재에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운영한다. 사진은 그중 하나인 ‘전통 의식주 교육’ 현장으로, 한복을 갖춰 입은 어린이들이 예절 교육을 받고 있다. ⓒ 종로문화재단(Jongno Foundation for Arts & Culture)
근대적 절충 양식
1930년대 지어진 홍건익 가옥은 전통 방식과 근대적 양식이 절충된 민가 건축물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한옥 중 우물과 빙고(氷庫)까지 갖춘 몇 안 되는 집이다. 홍건익은 상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얕은 구릉 위에 지어진 이 집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 각 건물을 독립적으로 배치했는데, 이러한 구조는 전통 한옥 양식의 전형적 특징이다. 반면에 대청에 설치한 유리문과 처마의 차양은 근대기 한옥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홍건익 가옥은 2011년 서울시가 매입해 보수 공사를 진행하였고, 2017년 공공 한옥으로 개방되었다. 이곳에서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도슨트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중 서촌을 산책하며 곳곳에 자리한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을 듣는 프로그램이 인기다. 조선 시대의 화가 정선(Jeong Seon)이 남긴 화첩 < 장동팔경첩(Album of Eight Scenic Sites of Jang-dong in Seoul) >의 배경을 방문해 과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홍건익 가옥의 또 다른 매력은 시즌별 문화 행사다. 여름밤에는 전통차를 즐기는 다회를, 추석에는 송편을 빚는 행사를 운영하는 등 계절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침선, 옻칠, 도예 등 공예 프로그램은 지역 예술가나 크리에이터들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2022년 12월부터 2023년 1월까지 진행된 홍건익 가옥 특별전 < 집의 사물들 - 삶의 품행 > 전시 모습. 오우르(OUWR) 등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예가들의 다양한 작업을 소개한 전시다. ⓒ 홍건익 가옥, 오우르(OUWR)
전통과 현대의 연결
서촌라운지는 서울시가 추진 중인 한옥 정책의 일환으로 2023년 10월 오픈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한옥 내부를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한 이곳은 기획 전시가 열리는 1층과 방문자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촌라운지는 회화, 공예, 건축 등 여러 분야의 창작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서촌 지역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콘텐츠를 주로 제공한다. 특히 국가와 세대를 초월한 라이프스타일 콘텐츠에 초점을 두고 있다. 개관 기념 전시 < 독일 바우하우스×전통 공예, 음미하는 서재(Bauhaus×Korea Craft Design) >는 바우하우스 양식을 대표하는 가구와 국내 공예가들의 작품이 어우러진 전시로, 이 공간의 성격과 지향점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올해에도 스위스 로잔예술대학 산업디자인과 학생들과 국내 조명 브랜드 아고(AGO)의 협업 전시가 열리는 등 국내와 해외, 전통과 현대를 연결하는 프로그램이 꾸준히 개최되었다.
서촌라운지는 전시 프로그램 외에도 티 소믈리에와 함께하는‘계절 차[茶]회(Global Seasonal Tea-Talk)’가 유명하다. 우리나라 차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전통 차를 마시며 비교해 보는 시간도 있어, 예약이 금세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한옥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조와 형태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만,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는 여전하다. 현대인의 삶과 문화에도 영감을 준다. 서촌의 공공 한옥들이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은 서촌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다.
서촌라운지의 인기 프로그램인 계절 차회에서 한 참가자가 차를 음미하고 있다. 티 소믈리에의 설명을 들으며 차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이 프로그램은 외국인을 위한 차 모임이 따로 운영된다. ⓒ 서촌라운지
Features
2024 WINTER
느리고 소박하며 자연스러운 삶
2015년부터 ‘가정식 패브릭(Gajungsic Fabric)’이라는 의류 브랜드를 운영해 온 김우정(Kim Woo-Jung, 金佑定) 대표는 소박하고 편안한 옷을 짓는다. 서울 여러 동네를 떠돌다가 5년 전 서촌에 정착해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가 만든 옷을 ‘서촌스럽다’고 말한다.
경상남도 마산이 고향인 김우정(Kim Woo-Jung, 金佑定) 씨는 스무 살이 되면서 서울에 살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스무 번 가까이 이사를 다녔다. 의류 디자이너인 그녀는 5년 전 서촌에 작업실을 마련하면서 이 동네와 인연을 맺었고, 지난해에는 인왕산이 보이는 집으로 이사해 서촌살이를 만끽하고 있다.
밥도 ‘짓고’, 옷도 ‘짓고’, 집도 ‘짓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의식주에 대해 한국어는 같은 동사를 사용한다. 건강을 생각하고 편안함을 중히 여기는 그 마음이 같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밥 먹고 건강하길, 이 옷 입고 편안하길, 이 집에서 행복하길. 가정식 패브릭의 김우정 대표가 옷 짓는 마음이 딱 그렇다. 식당 앞에 붙은 ‘가정식 백반’이라는 문구가 엄마의 손맛 같은 집밥을 생각나게 하듯 ‘가정식 패브릭’이란 이름에서는 마치 가족을 위해 만든 옷 같다는 느낌이 든다.
“집밥은 속이 편하잖아요. 인공 조미료 덜 쓰고 좋은 재료로 만드는 집밥처럼 천연 소재로 오래 두고 입어도 안 질리고 예쁜 옷들을 만듭니다. 옷에 대해 오래 공부했고, 의류 회사에 근무하며 합성 섬유부터 온갖 종류의 소재를 다 써봤더니, 결국 자연에서 나는 소재가 제일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좋은 소재
어려서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던 김 대표는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한 후 아동복과 여성복을 제작하는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10년간 근무했다. 치열하게 산 만큼 꽤 지쳐 있었다. 잠시 쉬어 보자며 떠난 3개월 장기 여행에서 돌아온 후 퇴사를 결심했다. 잊고 지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빠듯한 회사 생활이 지겨울 때면 이따금 손수 옷을 지어 입곤 했다. 회사를 그만두니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2015년, 가정식 패브릭은 이렇게 탄생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너무나 많이 만들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조금은 느리게, 조금 더 정성스럽게 시간을 들여 옷을 짓고 싶었어요. 의류 회사에서는 정상 판매율이나 재고 관리에 신경 써야 했고 그런 비용이 옷 가격에 포함됩니다. 좀 더 값싼 재료로 더 많이 만들어 큰 수익을 거두는 게 목표죠. 저는 천천히 다가가 오래 머무르고, 적은 수의 사람들일지라도 깊이 있게 교감하고 싶었어요. 어떤 사람이 얼마만큼 정성을 담아 만들었는지를 상상하며 옷을 고르면, 그 태도가 그 옷 입을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믿거든요.”
김 대표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옷 만드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공예품을 만들 듯 가정식 패브릭을 꾸려왔다. 그래서 소재에 들이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음식의 재료가 중요하듯 옷도 소재가 핵심이다. 그녀는 리넨과 코튼을 특히 좋아한다. 봄·여름 옷감으로 리넨을 추천하는 그녀는 일 년의 절반 이상 리넨 원피스를 입고 지낸다. “입으면 입을수록 몸에 맞춰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느슨함의 멋”을 만드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좋은 소재를 구하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비며 출장비를 지불한다.
얼마 전 서울 정동에 있는 신아기념관에 마련한 가정식 패브릭의 쇼룸 전경. 김우정 씨는 옷이 체온뿐 아니라 마음의 온도까지 높여 준다고 생각하고, 정성 들여 지은 옷들이 고객들의 일상에 여유를 만들며 오랫동안 함께하기를 바란다.
“양털에서 채취하는 울은 오랜 역사를 가진 영국에서 주로 구해옵니다. 리넨도 리투아니아, 벨기에 산(産)이 유명해요. 질 좋고 가격 좋은 캐시미어를 찾아 몽골의 농장들을 뒤지기도 하고, 현지에서 직접 소재를 받아 니트웨어를 만들어요. 실과 원단을 만드는 기술력도 중요해서, 원단 가공 기술을 오랫동안 발전시켜 온 이탈리아를 누비기도 했어요. 오래된 방직기를 지금도 사용하는 일본에서는 손으로 짠 듯한 성근 느낌의 소재를 구할 수 있죠. 인도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직접 베틀로 실을 짭니다. 그렇게 만든 카디(khadi) 소재로 올봄 몇 벌의 옷을 만들었는데 얼마나 부드러운지 몰라요. 인도의 목화 중에는 척박한 환경에서 굳이 물을 많이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오가닉 코튼이 있는데, 조금 거친 듯한 그 질감이 매력적인 옷을 만듭니다. 환경 문제와 지속가능성까지 생각하니 더 좋잖아요.”
회사원으로 출장을 다닐 때는 유행을 파악하고 효율성만 따졌다. 얼른 만들어 빨리 팔고 금방 잊혀도 상관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혼자 만들어서 느리고, 어렵게 구한 좋은 재료라 적게 만들 수밖에 없다. “좋은 소재와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이 만나면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이 만들어진다”고 자신하는 그녀는 “조금 모자란 듯 만들어서 남기지 않고 다 파는” 자신의 경영 철학에 더없이 만족한다.
쇼룸 선반 위에 공예 작품들이 놓여 있다. 김우정 씨는 유리, 도자, 금속, 가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공예가들과 협업하여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연다. 그들 중 상당수가 서촌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다.
서촌살이
손님은 대부분 오래된 단골이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조용한 사람들이 많다. 엄마가 입던 옷을 딸이 물려받아 엄마와 딸 모두가 고객이 된 경우도 잦다. 김 대표는 “유행을 타지 않아 서로 다른 세대가 모두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기쁨”이라 말한다. 오래 운영해 온 블로그와 홈페이지에서 옷을 보고 택배 주문하는 이들이 많지만, 직접 와서 옷을 느껴보고 싶어 하는 손님들이 늘어나 얼마 전 정동(貞洞)에 쇼룸을 열었다.
알음알음 이름을 알려온 가정식 패브릭은 “서촌스럽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서촌스러운 옷은 대체 뭘까?
“자연스러운 옷이요. 입고 동네를 거닐 수도 있고, 그 옷차림으로 미술관도 갈 수 있는 옷인 것 같아요. 화려하지 않지만, 결코 남루하지도 않죠. 나를 감싸는 가장 가까운 사물이 옷이니까 정서적으로 따스한 느낌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편안하고 단정하면서도 따스한 온기를 가진 옷을 서촌스럽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누구보다도 서촌을 잘 알지만, 그녀는 서촌 토박이는 아니다. 경상남도 마산(馬山)이 고향인 그녀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에 살기 시작했다. 용산구에서 시작해 종로구까지 서울 지역 10여 개 구(區)에서 살아봤다. 서촌에는 5년 전쯤 왔다. 서울 곳곳에서 다 살아 본 뜨내기가 “살아보니까 여기 서촌이 좋더라”면서 눌러앉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서울살이 18번째 집이요, 결혼 후 세 번째 집이다. 대로변 상가주택의 3층과 4층을 쓰는 복층집이다. 문 열자마자 보이는 큰 창 너머 인왕산 풍경과 사방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반해 단번에 이 집을 선택했다.
“여기 서촌에는 오래된 옛날과 최신의 오늘이 뒤섞여 있어요. 조금만 나가면 도심의 높은 빌딩들이 보이지만, 동네 안쪽에는 어릴 적 뛰놀던 고향처럼 정감 있는 골목들이 빼곡하죠. 골목 안쪽에는 한옥과 현대식 주택들이 공존합니다. 볕 좋은 길가에서 고추 말리는 할머니와 유행을 좇는 힙한 젊은이들이 함께 머무는 곳이 바로 서촌이에요. 명동이나 강남 같은 상업 지역과 다르게 사람 사는 느낌이 있다는 게 서촌의 매력이죠. ”
인왕산이 보이는 옥상에는 가드닝을 좋아하는 남편이 정성 들여 가꾸고 있는 갖가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김우정 씨는 해가 저물 무렵 이곳에서 서촌의 노을을 만끽하곤 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일상
시간의 흔적과 사람 냄새, 오래됨과 느림의 미덕을 간직한 곳. 낡음과 늙음이 흠이 되지 않는 동네가 바로 서촌이다. 자연이 가까이 있기에 얻을 수 있는 회복력도 큰 선물이다.
“높은 건물 없이 나지막한 동네라 저 너머 인왕산까지 보이죠. 서촌이 사대문 안 도심이지만, 여기서 조금만 가면 수성동 계곡이 있고 서울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도 있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등바등 힘들게 일하던 도시인의 삶을 순식간에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친 마음이 회복되고 충전되는 느낌이 들죠. 그래서 서촌을 좋아해요.”
동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거실의 널따란 창문 앞 은행나무로 까치가 날아들었다.
“올봄 저 나무에 집을 지은 까치들이에요. 둘이 합심해서 끊임없이 잔가지를 물어다 나르는데, 대체 어디서 구해왔을까요? 둥지를 짓다 떨어뜨리기도 해서 이 나무 아래에만 잔가지가 소복했어요.”
김우정 부부가 집을 고치고 꾸미는 과정도 새들과 다를 바 없었다. 광고·마케팅 전문가로 잘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 인생을 준비 중인 남편 정영민(鄭詠珉) 씨가 구석구석을 손봤다. 벽을 페인트칠 했고, 문과 붙박이장의 색을 고르고 바꿨다. 조명, 문고리, 손잡이를 교체하는 데는 그녀가 유럽 출장 때마다 사서 싸들고 온 수집품들이 요긴하게 쓰였다. 카펫을 깔고 빈티지숍에서 함께 고른 가구들을 배치했다. 작은 옥상 정원에는 서리 내릴 때까지 꽃을 피우는 아네모네, 잎을 만지면 향이 올라오는 애플민트, 키 큰 수크령을 비롯해 은쑥과 야생 안개꽃 같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이사한 후 일 년 가까이, 느리더라도 하나하나 직접 고치고 키워낸 집 가꾸기의 과정은 그녀가 옷을 만드는 모습과 똑 닮았다.
살림집 2층 다락방 풍경. 남편 정영민(鄭詠珉) 씨가 벽면을 직접 페인팅하고 가구도 만들었다. 구석구석에는 부부가 오랫동안 수집해 온 빈티지 소품들을 놓아 장식했다. 부부는 이곳을 이웃들과 함께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한다.
그녀는 거실 창문 앞에 오수(Sue Oh) 작가의 < 인왕산의 돌들 >이란 작은 그림을 놓았다. 버터옐로우 컬러로 칠한 따뜻한 느낌의 거실 벽에는 고지영(KO Jiyoung) 작가의 그림을 걸었다. 그 아래 수납장에 놓인 인형은 손뜨개 작가 강보송(Bosong Kang)의 작품이다. 이들은 모두 비슷한 취향으로 알게 된 서촌의 예술가들이다.
“예전부터 흠모해 온 유리 공예가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서촌에 사시더라고요. 혼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꾸리는 사람들이 서촌에 많이 삽니다. 취향이 비슷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내가 만든 옷과도 잘 어울려서 쇼룸 한쪽에서 전시도 열곤 해요. 우쿨렐레 연주와 목공일을 좋아하는 남편이 꾸민 4층 다락방에서는 북토크나 소규모 문화 모임도 열어요. 마치 음식을 나눠 먹듯 동네 지인들과 문화와 경험을 나누며 삽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서로를 보듬고, 때로는 자연을 통해 위로받는 일상. 서촌에서 살기에 가능한 일이다.
Features
2024 WINTER
인왕산, 서촌을 품다
서촌의 랜드마크인 인왕산은 경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이곳을 그린 산수화가 많았다. 조선 시대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였고, 현재는 시민들이 즐겨 찾는 등산 명소이자 동네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인왕산에서 내려다본 서울 도심.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수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산인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의 능선을 연결해 성곽을 쌓았다. 서울 한양 도성은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른다. ⓒ 한국관광공사(Korea Tourism Organization)
매일 집을 나서며 마주하는 골목 풍경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싸전이 오락실로 바뀌고, 철물점이 레스토랑으로 바뀌는 것이다. 방진 가림막에 싸여 정체가 모호했던 곳들이 하나둘 상가로 변했다. 저녁 무렵 귀갓길, 광화문 어깨너머 인왕산과 북악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놓인다. 마을 어귀 경복궁역 사거리에 서면 쭉 뻗은 자하문로 저 멀리 북한산 능선이 날개를 펼친 새의 모습으로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보현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나를 기다렸다 두 팔 벌려 말하는 것 같다.
웅장한 산세
인왕산은 창의문에 이르는 서촌 일대와 서대문구 무악동과 홍제동에 걸쳐 있다. 높이는 338.2메돌(m)이라 들머리를 어디로 하든지 산 정상까지 대략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화강암질의 바위산은 높이에 비해 그 웅자와 기세가 등등하고 골이 깊어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 왕족의 집단 주거지였던 서촌은 후기에 이르러 권문세족들이 청풍계곡, 옥류계곡 주변에 터를 잡았다. 임진왜란 이후, 남부인 사직단 위쪽에 대규모로 들어섰던 인경궁을 철거하면서 군인과 평민들이 대거 정착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실 기관에 소속된 하급 관리, 궁궐의 잡일을 하는 하인, 권문세가에서 대소사를 맡아보는 하인 등 다양한 계층이 혼재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내내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던 왕족, 권문세족의 집들은 대부분 일제 시대에 용도 변경되거나 철거되어 역사의 흔적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 장동팔경첩(Album of Eight Scenic Sites of Jang-dong in Seoul, 壯洞八景帖). 정선(Jeong Seon, 鄭敾). 1750년대. 종이에 담채. 33.4 × 29.7 ㎝. 서촌에 살았던 화가 정선은 이 지역에서 경치가 빼어난 여덟 군데를 골라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은 그중 인왕산 기슭의 골짜기를 그린 작품으로, 70대 노년기의 무르익은 필치가 드러난다.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한양천도 이후 역사의 중심에 자리해온 서촌 지역에서 시간은 길로 연결된다. 옛 지명은 실록과 승정원일기 같은 국가 문서나 고서화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책들은 입이 무겁다. 묵직한 입을 열도록 대화를 청해야 한다. 서촌에서 객관적 역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달리하는 선인들과 소통하고픈 소망이 우리를 길로 나서게 한다.
변화의 한복판에서 서촌은 직선보다 곡선이 아직 살아 있는 곳이다. 사람들을 빠르게 다른 장소로 보내주는 직선도로에서 건물은 평평한 면이 된다. 물결치는 기와집이 점처럼 박힌 골목은 ㄱㄴㄷㄹ 한글처럼 이어진다. 그곳에서 문패에 적힌 그림 같은 문자들을 읽거나 문고리 혹은 쇠살 문양에 미혹되어 길을 잃는다. 길이 때로는 ㅁㅂ자로 나타날 때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촌 안에 공공도서관 4개와 20개나 되는 작은 서점들이 있어 글 읽는 마을 ‘서촌(書村)’이라 부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꽃놀이 명소
한양 도성 사람들은 봄꽃놀이 명소로 인왕산 자락 좌우에 있는 필운대와 세심대를 첫손에 꼽았다. 남쪽 자락의 필운대는 서대(西臺), 북악에 가까운 세심대는 동대(東臺)로도 불렸다. 조선 시대 세시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3월이 되면 살구꽃이 지천인 필운대와 복사꽃 가득한 세심대를 찾는 상춘객이 “구름처럼 모이고 안개처럼 밀려들어 줄지 않는다.”고 했다. 평소 시를 즐겨 짓지 않던 연암 박지원은 『연암집』 4권에 두 차례에 걸쳐 필운대를 시제로 삼을 정도였다. 당시의 모습은 18세기 문인 윤기의 『무명자집(無名子集)』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다. “서대(西臺)가 솟아 있어 바위는 넓고 평평한데 / 화창한 볕 푸른 봄이 도성에 가득” 한 흥취를 느낄 수 있다.(시고 제4책)
“바위의 대는 높아 활쏘기 좋고 군기가 엄하여 군마가 고요하네 / 천관의 위치엔 푸른 버들 늘어서 있고 / 백보의 정원엔 붉은 과녁 설치되었네”(시고 제3책)
세심대는 왕실에서도 자주 찾는 곳으로 신하들과 올라 활도 쏘고 시를 주고받았던 상춘대임을 알 수 있다. 바위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각각 배화여고와 신교동 농학교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어 뭇사람의 발길을 에두르게 한다.
수성동 계곡
처서가 지나도록 무더위가 가시질 않더니 며칠 장대비가 내렸다. 어둠 속에 잠긴 수성동 계곡은 빗소리로 가득하다. 물소리로 이름을 얻은 수성동(水聲洞) 기린교 앞에 서자, 한낮의 수선함에 묻혔던 물소리가 주절거림을 들려준다. 비 온 뒤 우레 같은 물소리는 정악(正樂)처럼 힘차고 곧은 소리로 말미암아 산심을 숙연케 한다며 추사 김정희가 시로서 입을 떼었다(수성동 우중관폭[水聲洞雨中觀瀑]). 더구나 ‘층층이 기와 덮인 듯한 솔숲이 대낮에 걸어가는데도 밤인 것 같다.’고 하는 뜻은 어둠 속에서 오히려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산에서 내달려온 물줄기가 기린교를 향해 치달리다 너럭바위를 타고 힘차게 내리 꽂히며 튀는 소리는 장쾌하고 서늘하다. 억센 빗줄기에 소나무 가지들이 채찍처럼 흔들리며 공기를 가른다. 대지를 두드리고 바위틈을 구르는 그 모든 것이 뒤섞인 가운데 소리가 심장을 뒤흔든다.
수성동 계곡은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명승지이다. 길이 3.8m의 장대석 두 개를 붙여 만든 기린교는 한양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형대로 보존된 돌다리여서 역사적으로 가치가 크다. ⓒ 셔터스톡(Shutterstock)
서울 전경
산허리를 베어 만든 인왕 북악 스카이웨이는 1968년 1월 21일 31명의 북한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청와대 경비 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도로이다. 사직동에서 시작하여 북악산 능선을 따라 아리랑 고개까지 대략 10km이다. 도로에 올라서서 창의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무무대(無無帶)에 이른다. 시야에 거칠 것 없는 전망대는 날이 좋으면 북악에 들어 앉은 청와대로부터 경복궁, 랜드마크인 롯데월드타워와 남산서울타워를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가깝게는 동네 개 짖는 소리, 수성동을 향해 달리는 마을버스와 자전거가 빤히 보인다.
이곳에서 도성에 이르는 최단 코스는 초소책방 건너편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최근에 설치한 계단을 따라 어둠 속에 둥둥 떠있는 노란 불빛은 입산객의 안전을 호시탐탐 엿보는 호랑이 눈처럼 빛나고 있다. 나무 계단이 끝나는 곳에 눈썹돌[屋蓋石]을 얹은 여장(女墻)이 등줄기처럼 나타난다. 도성 안팎으로 뻗은 산세를 흘낏흘낏 살피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두 다리를 버티고 선 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분이다. 도성 밖 홍제원 또는 세검정 방향은 기차바위로 내려서야 한다.
인왕산은 30여 개의 군 초소가 있어 오랫동안 시민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2018년 인왕산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대부분의 군 초소가 철거되었는데, 일부는 시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은 그중 하나인 ‘숲속쉼터’이며 초병들의 거주 공간을 레노베이션하여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 스튜디오 켄(Studio Kenn)
유럽에 로마로 이르는 길이 있다면 조선에는 중국 대륙과 연결되는 지름길이 의주대로였다. 현재는 통일 염원을 담아 통일로로 바뀌어 서울역에 이른다. 중국 사신은 의주를 지나 평양과 개성을 거쳐 한양으로 들어온다. 서대문 밖 홍제원은 사신들이 유숙하는 여관으로 마지막 의관을 정제하여 무악재를 넘었다.
“임진강 건너 한양을 바라보매 팔짱을 끼고서 성 밖을 겹으로 둘러싼 산들이 마치 봉새가 빛을 발하듯 환하다.”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조선부(朝鮮賦)』에 기록한 내용은 지금도 변함없이 마을 어귀에서 바라본 느낌과 같다. “홍제원(洪濟院)에서 동쪽으로 몇 리 가지 않아서 하늘이 만든 관애(關隘) 즉 좁은 길목이 하나 있는데 남쪽과 북쪽이 안산과 인왕산으로 막혀 있고 가운데로 말 한 필 겨우 통과할 정도이니 더할 수 없이 험한” 지세는 여전하다.
등줄기를 중심으로 ㅈ 자처럼 좌우로 뻗어내린 산세는 정상에 점 하나를 더 얹었다. 마치 한 계단 더 올라 시야를 넓혀 배움을 더하라는 듯 바위가 솟아 있다. 밝은 날 그곳에 서면 도성을 둘러싼 내사산과 외사산이 ㅅㅅㅅ으로 다가온다. 불 꺼진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는 한 일(ㅡ) 자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전각들의 규모와 배치로서 조선 시대의 위계질서와 덕목, 사상과 이념을 전한다.
우중에 오른 인왕산은 모든 것을 공(空)의 상태로 보여주었다. 가늘어진 빗발 속에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안산과 북악, 남산이 언뜻 언뜻 머리를 드러냈다. 문득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산에 올라 보았던 한양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왕산이 경복궁의 우백호를 담당하는 까닭에 지역의 변천사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터이다. 켜켜이 쌓인 이야기 속에 과거를 불러들이는 흔적들이 제자리에 있도록 꼭 눌러 둬야 한다. 대화를 위해 그나마 펼쳤던 책이 입을 다물지 않도록 인왕산은 역사의 문진(文鎭)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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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WINTER
서촌의 다채로운 전시 공간들
경복궁 서문(西門)인 영추문(迎秋門) 인근 통의동(通義洞)과 창성동(昌成洞)을 비롯해 서촌 전역에는 다양한 전시 공간들이 자리한다. 이곳에는 대안적인 비영리 공간부터 동시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상업 갤러리까지 두루 포진해 있다.
보안1942의 2022년도 하반기 기획 전시 < 워키토키쉐이킹(Walkie-talkie-shaking) >. 워키토키의 특성에서 모티프를 얻어 소통의 본질을 탐구한 전시다. 보안1942는 2007년부터 예술 공간으로 운영되어 왔으며 사진, 회화,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 고정균(Goh Jeongkyun, 高政均)
청와대와 바로 인접한 효자동(孝子洞) 한적한 골목에는 주황색 벽돌 건물이 파란 하늘과 감각적인 대비를 이루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은 사진집 전문 출판사 이안북스(IANNBOOKS)의 김정은(KIM Jeong Eun, 金廷恩) 대표가 설립한 복합문화공간 더레퍼런스(The Reference)다. ‘예술과 전시가 있는 서점’을 모토로 하는 더레퍼런스는 말 그대로 서점과 전시 공간이 결합한 형태다. 지하층과 1층의 윈도 공간은 갤러리로, 2층은 아트북 서점으로 기능한다.
김정은 대표가 더레퍼런스를 시작한 건 2018년이지만, 그녀는 2007년부터 이안북스를 운영하며 서촌에 다양한 정체성으로 미술 생태계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공간들이 생겨나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10년 만에 효자동에 공간을 마련했어요. 그간 많은 변화가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서촌은 거주자 중심의 마을이라는 느낌이 확연해요. 굽이굽이 이어지는 골목마다 건축가 혹은 디자이너의 사무실, 이머징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전시 공간, 미술가의 집 등이 숨어 있으니까요. 창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커뮤니티 같은 곳이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김 대표의 말처럼 서촌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곳곳에서 활동하는 지역이다. 그러한 자양분 덕분에 예술적 인프라가 잘 갖춰진 지역이 될 수 있었다.
복합문화공간 더레퍼런스 2층에 자리한 서점은 책을 매개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플랫폼을 지향한다. 국내외 사진가들의 작품집과 사진 관련 도서가 망라되어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대표적 터줏대감
“땅의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2007년, 마치 약속한 듯 비슷한 시기에 서촌을 대표하는 공간들이 통의동과 창성동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당시 전시 공간을 찾고 있던 저 역시 보안여관을 발견하게 됐고요. 운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보안1942(Boan1942) 최성우(Choi Sung-woo, 崔盛宇) 대표의 말이다. 처음 보안여관과 주변 건물을 매입했을 땐 새 건물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비가 하도 새서 천장을 뜯어보니 ‘소화(昭和) 17년(1942년) 5월 3일’이라고 적힌 상량문과 함께 박공지붕이 드러났다. 시인 서정주(徐廷柱)의 자서전 『천지유정(天地有情)』을 통해 젊은 날의 서정주가 기거하며 다른 문인들과 함께 전설적인 시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 창간호를 만든 장소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관의 수명을 다한 보안여관은 ‘보안1942’라는 이름을 달고 20년 가까이 다종다양한 문화 행사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큐레이터 팀의 기획으로 시각예술 전시를 선보일 뿐 아니라 2013년부터 청년 예술인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두럭(DoLUCK)’을 지속해 오고 있고, 차 문화의 동시대적 가치를 되새기는
을 개최하는가 하면, 아트 페어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의 필름 섹션을 선보이는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이다.
다채롭고 유연한 활동
2002년 팔판동(八判洞)에 개관한 팩토리는 2005년 서촌으로 이전했다. 2017년 15주년을 맞은 후 두 번째 시즌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팩토리2(Factory 2)로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구성원 각자가 몰두하는 주제에서 출발하여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 기획자, 음악가 등과 협업의 지점을 만들어 전시를 비롯한 출판, 퍼포먼스, 워크숍 등을 진행한다. 그래서 팩토리2는 예술 기획을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가 되기도 하고, 다양한 장르의 창작자들이 제작한 에디션 작품을 판매하는 숍이 되기도 하며,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열람실로 변모하는 등 매번 새롭게 변신한다. 감상과 경험의 경계 없는 교감을 추구하는 팩토리2의 다채롭고 유연한 활동은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스스로를 쇄신하고 있다.
2023년 4월부터 6월까지 열린 < 내 책상 위의 천사(An Angel at My Table) >전을 보기 위해 팩토리2에 모여든 관람객들. 2005년 서촌에 자리 잡은 팩토리2는 디자이너, 건축가, 음악가, 무용가 등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하여 틀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형태의 전시를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팩토리2 제공, 사진 김다인(Dain Kim, 金多仁)
1999년 인사동에 문을 연 대안공간의 원조, 사루비아 다방이 서촌으로 온 건 2011년이다. 이후 미술인 회원들의 순수 기부로 운영하는 회원제로 운영 방식을 바꾸고, 이름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Project Space SARUBIA)’로 변경하는 등 변화를 단행했다.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실험적인 예술을 지원하는 비영리 전시 공간으로서 미술계의 지형을 다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독립 큐레이터 추성아(Sungah Serena Choo, 秋成妸)는 사루비아가 “전시를 통해 미술가가 한 단계 도약할 기회를 제공하는 소중한 독립 예술 공간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1999년 첫 전시로 유머러스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조각 작품을 선보이는 함진(Ham Jin, 咸進) 작가의 개인전을 선보인 이래 박미나(MeeNa Park, 朴美娜), 손동현(Donghyun Son, 孫東鉉), 우한나(Hannah Woo, 禹한나), 전소정(Sojung Jun, 全昭侹) 등 오늘날 중요하게 호명되는 작가들의 초창기 작업을 사루비아에서 소개한 경우가 정말 많아요. 특히 회화 등 전통적인 매체를 다루는 작가들의 예술 세계를 어떻게 전시로 풀어낼 것인가에 대해 사려 깊게 접근하는 시도가 좋습니다.”
갤러리 워크
‘화랑가 1번지’로 통하는 삼청동(三淸洞)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촌에는 상업 갤러리도 다수 자리한다. 미술관이나 비영리 전시 공간과 달리 갤러리는 동시대 작가들이 펼쳐내는 현재진행형의 예술 세계를 함께 구축해 나가고, 이를 전시라는 특별한 결과물로 소개하며 작품을 판매해 작가의 활동이 지속 가능하도록 돕는다.
그중 리안갤러리(Leeahn Gallery)는 일찌감치 서촌에 자리를 잡은 갤러리 중 하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아트 컬렉션을 해온 안혜령(Hyeryung Ahn, 安惠玲) 대표는 2007년, 근대 미술의 요람으로 불리는 대구에서 앤디 워홀 타계 20주년을 기념한 전시를 열며 갤러리의 출발을 알렸다. 2013년에는 서울 창성동에 지점을 내면서 지역 화랑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갤러리로 성장했다. 이 갤러리는 알렉스 카츠, 데미안 허스트, 엘리자베스 페이튼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개인전을 여는 한편 백남준(Nam June Paik, 白南準), 이강소(Lee Kang-So, 李康昭), 이건용(Lee Kun-Yong, 李健鏞) 등 한국 대표 작가들을 대변하며 자신감 넘치는 행보를 보여 왔다.
리안갤러리가 2020년 12월부터 2021년 1월까지 개최한 백남준(Nam June Paik, 白南準) 전시는 작가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이곳은 국내외 저명한 작가들의 전시회를 꾸준히 개최함으로써 관람객들이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리안갤러리 제공, 사진 이시우(Si Woo Lee, 李始雨)
2012년 개관 후 2019년 창성동으로 이전한 스페이스 윌링앤딜링(Space Willing N Dealing)의 김인선(Kim Inseon, 金仁宣) 대표는 지리적인 이유로 서촌을 선택했다.
“기존 방배동에 있을 때는 주변에 갤러리가 많지 않아서 전시 오프닝이나 퍼포먼스 등 특정 행사를 할 때만 관객이 몰리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런데 서촌은 경복궁, 삼청동과 가깝고 주변에 비슷한 규모의 갤러리도 많아서 평소에도 워크인 관람객이 많은 편이에요. 작가들의 예술 세계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더 부합한다고 할 수 있죠.”
김인선 대표는 2022년부터 상업 화랑으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서 남진우(Jinu Nam, 南眞優), 이세준(Lee Sejun, 李世準), 장성은(Chang SungEun, 張晟銀) 등 촉망받는 젊은 아티스트들을 전속으로 대변하고 있다. 6차선 도로변 건물 2층에 자리한 갤러리에서는 일 년 내내 다양한 장르와 경력의 미술가들이 지닌 문제의식을 실험적으로 담아낸 10여 개의 개인전과 그룹전이 쉼 없이 이어진다. 전시마다 작가에게 직접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아티스트 토크를 마련하고, 전시 기획과 실무를 소개하는 커리큘럼을 선보이는 등 다각적 시도를 펼치고 있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올해 3월 열린 권혜성(Kwon HyeSeong, 權惠星) 작가의 개인전 < 우산 없는 사람들(People without Umbrellas) > 전시 전경. 동양화와 서양화의 융합을 보여 준 전시이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은 촉망받는 국내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는 한편 다층적 프로그램들을 통해 이들을 지원한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제공, 사진 한황수(Han Hwangsu, 韓黃水)
2019년 용산에서 시작해 2022년 서촌 누하동(樓下洞)으로 이전한 드로잉룸(drawingRoom)의 김희정(Kim Heejung, 金希貞) 대표도 서촌을 이상적인 지역으로 꼽았다.
“드로잉룸(drawing room)은 저택에서 응접실을 뜻해요. 그 이름처럼 예술과 일상이 공존하는 공간을 추구하는데요, 자연과 일상이 만나 예술적 삶을 영위하는 서촌의 고즈넉함이 저희 갤러리의 지향점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서촌에 개성과 소신이 있는 작은 상점들이 모여들고 오래 자리하는 데도 같은 마음이 작동한다고 봐요.”
“신진 작가를 발굴하여 첫 개인전을 개최하고, 미술 시장에 발을 내딛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는 김희정 대표는 개관부터 지속해 온 신진 작가 지원 프로그램에 열과 성을 다한다. 이러한 미술 공간들의 노력 덕분에 서촌은 한국 미술계의 지형을 다변화하는 중요한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창성동 실험실(Changseong-dong Laboratory)은 다양한 관점으로 문화적 실험을 모색하는 갤러리이다. 물리학자인 서강대학교 이기진(Kiejin Lee, 李基鎭) 교수가 운영한다. 그는 4인조 걸그룹 투애니원(2NE1)의 리더 씨엘(CL)의 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안동선(An Dong-sun, 安姛宣) 미술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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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핫플레이스
경복궁 서쪽 마을인 서촌(西村)은 매우 유서 깊은 지역이다. 조선 시대(1392~1910)에는 왕족이나 사대부 등 권력자들이 거주했고, 중인들의 문화 활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서촌에 발자취를 남겼다.
사진은 경복궁 서쪽 담장이다. 이 담장은 지하철 경복궁역에서부터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의 발자취와 한국 전통 문화를 소개하는 청와대 사랑채까지 800미터가량 이어진다. 담장 가운데에 경복궁 서쪽문인 영추문(迎秋門)이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서촌은 한국의 전통 지리학(풍수지리)상 좋은 터이며, 경관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북쪽에 백악(白岳, 북악), 서쪽에 인왕산(仁王山)이 있으며, 동쪽은 경복궁(景福宮), 남쪽은 사직단(社稷壇)의 앞길이 경계가 된다. 또 서촌의 한가운데엔 인왕산과 백악의 여러 계곡 물을 아우른 백운동천이 남북으로 흐른다. 백운동천은 옛 서울의 중심 하천인 청계천의 제1 상류다. 인왕산 쪽엔 수성동(水聲洞)과 옥류동(玉流洞), 청풍계(淸風溪), 백운동(白雲洞) 등 아름다운 계곡이 많다.
서촌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가운데 하나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는 세 곳인데, 서촌과 북촌(北村), 향교동(鄕校洞, 현재의 종로 3가 일대)이다. 고려(高麗) 때인 1068년 현재의 경복궁 북쪽 부분과 청와대(靑瓦臺) 일대에 고려 남경(南京, 남쪽 수도)의 행궁(임시 궁궐)이 지어졌다. 서촌과 북촌은 행궁의 바로 옆이므로 고려 때부터 동네가 형성됐을 것이다.
서촌이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경복궁이 지어지면서부터다. 이성계(李成桂)는 1392년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朝鮮)을 세웠다. 그리고 1395년 수도를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開城)에서 현재의 서울로 옮겼다. 이성계가 서울로 수도를 옮길 때 처음 지어진 궁궐이 경복궁이었고, 경복궁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궁궐이었다. 경복궁이 지어지자 자연스럽게 경복궁의 동쪽과 서쪽, 남쪽에 관련 국가기관과 민간 주거지가 형성됐다.
전통 문화유산을 가꾸고 지키는 비영리 문화재단, 아름지기재단 사옥에서 보이는 영추문 담장. 아름지기재단을 비롯해 이 길에 접한 건물들에서는 대부분 건너편 궁궐 담장을 볼 수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왕들의 탄생지
조선 초기에 서촌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는 3대 왕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의 집이었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鐘路區) 통인동(通仁洞) 일대에 있던 이방원의 사저에선 4명의 왕이 나왔다. 태종 이방원이 이곳에 집을 지었고, 그곳에서 아들 세종(世宗)과 손자 문종(文宗), 세조(世祖)가 태어났다. 왕세자는 궁궐에 살므로 사저가 있을 수 없다. 태종과 그 아들, 손자들이 사저에 살았던 것은 애초 그들이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이 여기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가 왕이 되면서 그 아들과 손자들이 모두 왕이 될 수 있었다. 특히 태종의 아들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세종은 한글을 만들었고, 영토를 넓혔으며,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 태종의 집은 세종 이후 사라졌는데, 대체로 시민단체 참여연대(參與連帶)에서 통인시장(通仁市場)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 서촌은 경복궁 바로 옆이어서 태종과 세종뿐 아니라, 많은 왕족이 살았다. 태종의 형 정종(定宗)과 태종의 배다른 동생 이방번(李芳蕃), 세종의 형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모두 서촌에 살았다. 특히 안평대군의 집에선 조선 전기에 가장 유명한 풍경화인
가 그려졌다. 안평대군이 꾼 꿈을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安堅)이 그렸다. 이 그림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약탈돼 현재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学)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1951년 문을 연 대오서점(Daeo Bookstore, 大五書店)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카페를 겸한 문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 서촌의 대표적인 핫플레이스이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장동 김씨 세거지
조선 때 서촌에선 가장 유명한 사대부(士大夫, 학자 정치인)는 김상헌(金尙憲)이다. 그 자신이 성공한 사대부였을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에 최대의 권력 가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집안은 바로 ‘장동 김씨(壯洞 金氏)’인데, 김상헌과 김상용(金尙容) 형제가 장동(현재의 서촌)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 집안은 조선 후기에 가장 강력했던 당파인 서인과 그 주류인 노론의 핵심이었다. 조선 후기 이 집안에서 15명의 정승과 35명의 판서가 나왔다.
김상헌은 그의 정치적 영향력뿐 아니라, 그가 쓴 여러 시와 글로 서촌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는 「근가십영(近家十詠)」에서 서촌의 명승지인 백악과 인왕산, 청풍계, 백운동, 대은암(大隱巖), 회맹단(會盟壇), 세심대(洗心臺) 등을 노래했다. 또 인왕산에 대한 답사기를 썼고, 청나라에 잡혀가 있던 시절에 서촌의 집을 그리워하는 시도 썼다.
서촌의 대로변에는 큰 빌딩들이 들어서 있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옛 정취를 자아내는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정치 권력을 쥔 장동 김씨들은 문화도 주도했다. 김상헌의 증손자인 김창업(金昌業)과 김창흡(金昌翕)은 조선 후기 최고의 풍경화가인 정선(鄭敾)을 후원했다. 서촌에 살았던 정선은 그 보답으로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의 집을 그린 < 청풍계 >라는 작품을 7점이나 남겼다. 또 장동 김씨의 터전이었던 장동 일대를 그린 <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을 2벌이나 남겼다. 정선은 말년에 조선 후기에 가장 유명한 풍경화이자 서촌을 대표하는 그림인 <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를 그렸다.
조선 후기에 가장 뛰어난 왕이었던 영조(英祖)는 왕이 되기 전 서촌 남부의 창의궁(彰義宮)에서 살았다. 그는 왕이 된 뒤에도 이곳을 자주 방문했으며, 창의궁 시절에 대한 8편의 시를 썼다. 또 신분이 낮았던 자신의 어머니를 모신 사당 육상궁(毓祥宮, 현재의 칠궁)을 역시 서촌 북부에 마련해 자주 방문했다. 조선 후기에 가장 유명한 사대부 예술가였던 김정희(金正喜)도 서촌 남부의 월성위궁(月城尉宮)에 살았다. 그의 증조부가 영조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여기서 자라 조선 최고의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 후기엔 상업의 발달, 계급의 완화에 따라 서촌의 중남부에 살던 하급 관리 중인(中人)들의 문학 활동도 활발해졌다. 중인들은 여러 시모임을 만들어 장동 김씨와 사대부들이 터를 잡고 있던 옥류동 일대에서 함께 문학 활동을 벌였다. 중인들끼리 만든 시모임도 있었고, 사대부와 함께 만든 시모임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시모임은 천수경(千壽慶)과 장혼(張混)이 이끌었고, 이들은 여러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조선이 망한 뒤 일제 강점기엔 대표적 매국노인 이완용(李完用)과 윤덕영(尹德榮), 고영희(高永喜) 등이 서촌에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특히 윤덕영은 옥류동의 2만여평 터에 건축 면적 800평의 서양식 주택을 지었는데, 이 집은 당시 조선의 개인 집 가운데 가장 컸다. 해방과 화재 등으로 인해 윤덕영의 대규모 서양식 주택과 대규모 전통 주택(한옥) 본채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딸과 사위가 살던 서양식 집(현재 박노수미술관)과 그의 첩이 살던 한옥은 아직 남아 있다.
근대의 흔적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서촌엔 작가와 화가들이 많이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에 서촌에 살았던 대표적인 작가는 전위적인 시와 산문을 쓴 이상, 항일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윤동주와 이육사, 친일 활동을 했던 소설가 이광수와 시인 노천명, 해방 뒤엔 소설가 박완서와 김훈, 미술사학자 유홍준 등이 있다. 화가로는 좌파 화가였던 이여성-이쾌대 형제, 이중섭, 이상의 친구 구본웅, 친일 한국화가 이상범, 박노수, 천경자 등이 활동했다.
한국 근현대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자 소설가, 건축가였던 이상(李箱, 1910~1937)이 20여 년간 살았던 집이다. 한때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문화유산국민신탁이 2009년 시민 모금과 기업 후원을 통해 매입하여 관리하고 있다. 내부에는 그의 작품을 연대별로 정리한 아카이브가 한쪽 벽면에 설치되어 있다. ⓒ 한국문화원연합회
해방 뒤 서촌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60년 4.19 시민혁명이다. 당시 부정 선거를 항의하려고 이승만(李承晩)이 있던 경무대(景武臺, 현재의 청와대)로 몰려든 학생과 시민에게 경찰이 총을 쏘면서 혁명에 불이 붙었다. 시민들이 경찰의 총에 쓰러진 곳이 현재의 효자로(孝子路)와 청와대 분수대 광장 일대였다. 또 군사 정부의 독재자 박정희(朴正熙)는 1979년 10월26일 현재의 무궁화 동산에 있던 보안 가옥(안가)에서 측근이었던 김재규(金載圭)의 총에 맞아 숨졌다. 서촌에 살았던 대표적 정치인은 2대 국회의장과 대통령 후보를 지낸 신익희(申翼熙)이며, 기업인으로는 현대의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살았다.
조선 때부터 북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좋은 주거지였던 서촌은 박정희 군사 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점점 쇠퇴했다. 청와대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면서 서촌 일대에 대한 통제가 심했기 때문이다. 또 1970년대 서울의 강남(江南)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가장 좋은 주거지가 서촌과 북촌 등 강북에서 강남 쪽으로 옮겨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서촌에 대한 여러 규제가 완화되고 2010년 전통 주택에 대한 지원이 시작되면서 서촌은 자연과 역사, 문화가 잘 갖춰진 서울의 인기 방문지 중의 하나가 됐다.
1920~30년대 지어진 개량 한옥과 현대적 건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서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저 멀리 서촌의 랜드마크인 인왕산이 보인다. ⓒ 최태원(Choi Tae-won, 崔兌原)
김규원(KIM Kyuwon, 金圭元) 한겨레21 선임기자
Features
2024 AUTUMN
시간에 닳지 않는 홍대의 아이콘들
홍대 앞은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번화가이자 관광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급속한 상업화로 홍대 지역이 변화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홍대 앞 명소들은 저마다의 개성으로 홍대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홍대 앞 초입(홍익로3길)에 자리한 호미화방은 50년 역사를 자랑한다. 1987년부터는 창업자의 아들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는 손자까지 힘을 보태고 있다. 호미화방의 로고는 1970년대 후반, 단골이었던 홍익대학교 대학원생이 ‘미술은 영원하다’는 의미를 담아 디자인해 주었다.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일대는 법정동인 서교동보다 ‘홍대 앞’이라는 단어로 더 익숙하게 불리는 곳이다. 1990년대 이후 서울의 핫플레이스로 이 지역이 각광받게 된 데에는 인디 뮤지션들의 역할이 컸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홍대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디 문화의 부흥과 더불어 골목 구석구석 들어선 카페와 클럽, 문화 공간들은 홍대 앞을 수십 년간 인디 문화와 젊은 감각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일조했다.
그러나 여타 지역이 그랬던 것처럼 홍대 앞도 임대료 인상과 그에 따른 여파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상권이 활성화되고 거대 자본이 유입되면서 홍대 앞의 개성을 만들어 온 많은 예술가와 공간들이 주변 지역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대형 프랜차이즈 상점이 들어섰다.
그래서 혹자에게 홍대 앞은 이제 상업적인 분위기만 풍기는 번화가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홍대 앞 곳곳에는 여전히 고유의 개성과 정체성을 지닌 공간들이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지역 문화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홍대 앞 터줏대감 중 하나인 수(秀)노래방 전경. 1999년 오픈한 이곳은 기존 노래방들과는 다른 고급화 전략을 내세우며 성장했다. 2005년 MBC가 방영한 인기 TV 드라마
에서 주인공 남녀가 노래를 부른 장소로 알려지며 더욱 유명해졌다.
예술인들의 사랑방
1990년대 이후 홍대 앞이 인디 문화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전부터 형성된 이 지역 특유의 예술적인 환경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의 중심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이 있었다. 홍익대학교 미대생들과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교류하며 만들어 낸 독특한 문화가 인디 밴드와 클럽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1975년 개업한 호미화방(Homi Art Shop)도 홍대 앞 미술 문화의 산증인으로 현재까지 홍익대학교 인근에서 영업하고 있다. 호미화방은 반세기 동안 다양하고 질 좋은 미술 재료를 공급하며 한국 미술이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난 2020년에는 서울미래유산(Seoul Future Heritage)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호미화방이 단순히 화방으로서의 가치만 지니는 것은 아니다. “호미화방에 가면 인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교류할 수 있다”라는 예술인들의 인식이 이곳을 홍대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동력이었을 것이다.
신천지를 펼친 LP 바
1990년대 홍대 앞을 추억하는 뮤지션들과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장소가 하나 있다. 바로 블루스 하우스(Blues House)다. 홍대 앞에 인디 문화가 태동한 시기에 이곳도 문을 열었다. 블루스 하우스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세련된 공간 구성과 음악 선곡으로 금세 홍대를 대표하는 바(bar)로 자리매김했다. 오로지 이곳에 가기 위해 홍대 앞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당시 주목받던 한 소설가의 장편소설 배경이 되기도 했다.
20년간 같은 자리를 지키며 뮤지션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블루스 하우스. 그러나 지난 2016년 임대료 상승과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아야만 했다. 추억의 이름이 될 뻔만 이곳이 2020년 다시 문을 열며 역사는 현재진행형이 됐다. 오랫동안 영업한 서교동을 떠나, 망원동에 새로 둥지를 튼 것이다. 예전과 동일한 서체의 간판과 빼곡한 음반, 변함없는 분위기가 오랜 단골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 세대를 반기고 있다.
ⓒ NAVER Blog Jinnie
음악 문화의 계승
최근 젊은 층들 사이에서 레트로 열풍이 거세다. 먹거리부터 패션, 음악 등 삶 전반에서 과거의 유행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레트로 바람을 타고 추억 속 제품들도 다시 각광받는다.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던 바이닐(vinyl), 레코드판도 그 바람을 타고 힙한 굿즈로 관심을 끈다.
올해로 개업 11주년을 맞은 김밥레코즈(Gimbab Records)도 홍대 앞 명소로 젊은이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있다. 연남동 골목의 작은 공간에서 2013년 문을 연 김밥레코즈는 오프라인 음반 매장을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 음반을 직접 고르고 구매할 수 있는 드문 장소였다. 김밥레코즈의 탄생은 인디 뮤지션과 클럽으로 자생한 홍대 앞 음악 문화 계승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곳을 필두로 인근에 여러 레코드숍이 생기며, 자연스럽게 관련 공연과 문화 행사들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 열리고 있는 마포 바이닐 페스타(Mapo Vinyl Festa)도 그중 하나다.
홍대 앞에 탄탄한 바이닐 문화가 형성되면서 김밥레코즈도 2년 전 동교동의 더 넓은 공간으로 이전했다. 김밥레코즈는 이곳에서 음반 판매뿐만 아니라, 해외 음반 수입, 소규모 레이블 공연 기획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홍대 앞 음악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김밥레코즈는 2013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바이닐 레코드 매장으로, 국내외 뮤지션들의 공연도 기획해 진행한다. 10년 넘게 서울레코드페어(Seoul Record Fair)도 주최하고 있어 국내 바이닐 레코드 시장의 저변 확대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논텍스트(NONTEXT), 사진 김동규(Kimdonggyu)
소극장 문화의 산실
소극장 산울림(Sanwoollim)은 올 초 타계한 원로 연출가 임영웅(林英雄)이 극단 산울림의 전용 극장으로 1985년 개관한 100석 규모의 소극장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 고도를 기다리며 >를 한국에서 초연하며 이름을 알린 극단 산울림과 소극장 산울림은 여성의 삶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올리며 전성기를 맞았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 위기의 여자 >, 드니즈 살렘(Denise Chalem)의 <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 등의 공연은 그때까지 문화예술계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중장년층 여성들을 극장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90년대에 이어진 소극장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이곳은 여전히 젊은 연출가들의 실험적인 무대를 지원하는 연극계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랜드마크로 홍대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1985년 개관한 소극장 산울림은 고전 작품의 깊이 있는 해석, 젊은 연출가들의 실험적인무대를 보여 주며 홍대 앞에 또 하나의 랜드마크를 추가했다. 최근에는 건물 1~2층에 갤러리와 아트숍을 마련해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대표적 약속 장소
1990~2000년대 인디 문화가 한창이던 시절, 홍대 앞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일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반면 최근의 홍대 앞은 주변의 상수동, 연남동, 망원동까지 훨씬 더 넓은 권역을 의미하게 됐다. 높아진 임대료 탓에 여러 상점과 공간들이 인근 지역으로 밀려난 탓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덕에 홍대 앞은 특정 대학가의 상권 자체를 지칭하기보다 더 넓은 지역과 그곳에서 공유되는 특유의 정서를 상징하는 말이 될 수 있었다.
리치몬드과자점(Richemont Patisserie)은 한때 홍대 앞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홍대 앞을 지키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범홍대권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로 불린다. 1979년 문을 연 성산동 본점에 이어 1983년 홍대점을 오픈한 리치몬드과자점은 지난 2012년 임대료 상승과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의 인기에 밀려 30년간 이어온 홍대점 영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4~5년 전 동네 빵집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성산동 본점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서울 3대 빵집’으로 불리며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밤식빵과 슈크림빵으로 대표되는 변치 않는 메뉴에도 있지만, 서교동 시절부터 켜켜이 쌓아온 홍대 앞의 추억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Features
2024 AUTUMN
트렌드를 만들어 내는 힘
홍대 앞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지닌 지역이다. 하지만 그 모든 특성을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이 있다. 당대의 문화를 선도한다는 점이다. 홍대 앞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문화는 새로운 트렌드가 되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곤 했다. 이 점에서 홍대 앞은 일반적인 대학가와 뚜렷이 구별된다.
사진은 홍익문화공원(Hongik Cultural Park) 맞은편에 위치한 벽화 거리의 초입. 홍익대학교의 지하 캠퍼스 건설로 인해 홍익대 담장에 그려진 벽화들은 최근 사라졌지만, 나머지 한쪽인 주택가 담벼락의 벽화들은 아직 남아 있다. 이 벽화들은 거리미술전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전형적인 주거 지역이었던 홍대 앞은 1955년 홍익대학교가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변화의 물꼬가 트였다. 1961년 미술대학(Hongik Art College), 1972년 산업미술대학원(Graduate School of Industrial Art)이 건립되면서 학교 주변에 미대생들의 작업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작업실들은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됨으로써 사적인 공간을 넘어 정형화되지 않은 일종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했다.
예컨대 문화예술 작품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자발적 토론이 이루어졌고, 때로는 기성 문화를 비판하는 퍼포먼스가 벌어지기도 했다. 어떤 곳은 갤러리로, 또 다른 곳은 카페로 변모하기도 했으며, 밤에는 클럽이 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작업실은 그 어떤 제약 없이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홍대 앞 작업실 문화는 예술가, 기획자, 지식인들을 모여들게 만들었으며 대안 문화의 토대를 서서히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분위기가 1990년대 중후반 홍대 앞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홍대 앞을 구성하는 공간과 사람, 이들의 교류와 소통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환경과 맞물려 문화적 트렌드를 이끌게 되었다.
2007년 개관한 KT&G 상상마당 홍대(KT&G SangSang Madang Hongdae, 想像广場)는 영화관, 공연장, 갤러리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예술가들에게는 창작 활동 지원을, 일반인들에게는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한다. 홍대 앞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다.
라이카시네마(Laika Cinema)는 2021년 문을 연 연희동 최초의 예술영화관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에릭 로메르 등 거장들의 대표작을 비롯해 대형 영화관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작품성 높은 영화들을 상영한다.
거리의 예술화
1990년대 홍대 앞은 상반된 모습을 띠는 지역이었다. 대안 문화의 중심지이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명 피카소 거리를 중심으로 소비문화가 확산됐다. 피카소 거리는 홍익대학교 정문 왼쪽에서 극동방송 건물 뒤편까지 이어지는 약 400미터 길이의 골목길을 말한다. 이곳은 당시 고급스러운 카페와 패션 브랜드 숍들이 즐비했던 압구정동(狎鷗亭洞) 로데오 거리에 빗대 피카소 거리로 불렸다. 카페와 유흥 업소들이 피카소 거리를 장악하면서 기존 홍대 앞의 문화적∙예술적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었고, 이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에 따라 홍대 앞 고유의 문화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촉발됐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홍익대학교 미대생들을 중심으로 한 거리미술전(Street Art Exhibition)이다.
1993년부터 시작된 거리미술전은 학교 밖을 벗어나 홍대 지역 곳곳에서 주민들과 함께 진행하는 미술 행사이다. 거리미술전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 바로 벽화 거리이다. 거리에 예술적 색채가 덧입혀지면서 홍대 지역은 머물고 싶은 곳으로 변화했다. 또한 벽화 작업에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지역 공동체 회복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를 모범 사례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지역 정체성을 쇄신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벽화 조성 작업이 확산되었다.
대안 문화 공간
국내 대안 공간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인 속에서 1990년대 후반 태동되었다. 우선적으로 국제 외환 위기의 영향이 컸는데, 미술 시장이 불황을 겪으면서 젊은 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또한 다원화된 문화예술 환경 변화의 요인도 컸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이 활발히 등장했지만, 기존 공간들은 이러한 작품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자생적으로 대안 공간이 형성되었고, 1999년 홍대 앞에 한국 최초의 대안 공간인 대안공간 루프(Alternative Space LOOP)가 들어섰다. 젊은 작가들의 새롭고 실험적인 작품을 발굴 및 지원하고, 국외 작가와의 교류와 연계를 모색하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 이곳을 시작으로 여러 대안 공간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대안공간 루프의 탄생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1990년대 홍대 앞을 관통하는 대안 문화의 깊이와 저변을 확장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예술 작품을 소수의 소유물로 바라보지 않고, 시민 모두가 공유하는 공공적이며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예술가들이 제안하는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이슈들을 관람객들과 공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한마디로 예술의 경계와 벽을 허물었던 것이다.
2023년 대안공간 루프의 작가 공모전에 선정된 정찬민(Chanmin Jeong, 鄭讚珉)의 개인전 < 행동 부피(Mass Action) > 전시장 모습. 1999년 국내 최초의 대안 공간으로 출발한 대안공간 루프(Alternative Space LOOP)는 매년 동시대 이슈를 독창적 시각으로 선보이는 실험적인 예술가들을 선정해 기획 전시를 열고 있다. ⓒ 대안공간 루프
2018년 개관한 복합문화공간 연남장(Yeonnamjang, 延南㙊)은 연희동 일대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을 위한 작업실이자 쇼케이스 공간이다. 콘텐츠에 따라 1층 카페 공간을 뮤지컬 무대, 전시장 등 다목적으로 활용한다.
최초의 아트 마켓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열렸던 2002년 FIFA 월드컵은 다양한 문화 행사와 축제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홍대 앞에서도 지역 내 장소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그즈음 서울시와 마포구가 홍대 앞 일정 구역을 ‘걷고싶은거리(Hongdae Culture Street, 弘大文化街)’로 지정했는데, 그 길 중심에 위치한 장소가 흔히 ‘홍대 놀이터’라 부르는 홍익대학교 건너편 어린이 공원이었다.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기획자들이 주축이 되고, 문화예술 분야의 작가들이 모여 이 공간의 발전적인 활용 방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이곳에는 2002년 5월 국내 최초의 수공예품 시장인 희망시장(Rainbow Art Market)이 열리게 되었다. 소수의 인원만 이용하던 놀이터가 아트 마켓의 거점이 됨으로써 해당 공간은 활성화될 수 있었다.
희망시장은 그동안 홍대 앞 여러 공간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벼룩시장을 정기적인 문화예술 행사로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러한 아트 마켓을 좀처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입소문이 났고, 시장이 열리는 매주 일요일 오후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희망시장은 일상적인 장소가 창작과 유통의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희망시장은 이후 아트 마켓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는 홍대 앞 놀이터가 아닌 실내 한 스튜디오로 장소를 옮겼지만, 예술의 생산과 소비를 직접 연결하는 장으로서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살롱 문화 트렌드
2000년대 접어들어 홍대 지역에는 카페 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홍대 앞 카페 문화는 다른 지역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단순히 음료를 마시고 여가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아니라 유사 분야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 문화예술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살롱 문화가 이미 이 시기 홍대 앞에 형성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대개의 카페 내부에는 큰 테이블이 있었고, 언제든지 즉흥 공연 무대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악기와 소품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또한 문화예술 분야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다양한 리플릿들이 항시 놓여 있었고, 종종 소규모의 프리마켓이 열리기도 했다. 이러한 홍대 앞 살롱 문화의 대표적인 공간은 2004년 문을 연 이리(Yri)카페이다. “음악, 미술, 글쓰기, 영화 등 우리는 가리지 않고 존중합니다”라는 모토를 내건 이리카페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향한다. 전시와 낭독회, 공연, 세미나 등의 프로그램들을 통해 살롱문화를 확장하고 있다. SNS 발달과 함께 다양한 취향이 세분화되는 현 시점에서 살롱 문화를 지향하는 공간의 힘을 홍대 앞 카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리카페(Yri Cafe)는 홍대 지역에 거주하는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출발했으며 낭독회, 전시회, 연주회 등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2004년 서교동에서 문을 열었고, 2009년 상수동 현재 위치로 이전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