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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dinary Day

2018 AUTUMN

생활

이 사람의 일상 은퇴 후 삶을 개척하는 은발의 학생

국내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부터 1963년까지 태어난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베이비부머’ 세대라 부른다. 고도 성장기를 주도하며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 낸 베이비부머들이 어느덧 은퇴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어느 세대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그들은 은퇴 후에도 여전하다. 이찬웅(Lee Chan-woong 李燦雄) 씨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1951년생인 이찬웅 씨는 은행에서 34년 동안 근무한 후 2004년 퇴직했다. 그가 은퇴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문사 문화센터에서 수필 쓰는 법을 배운 것이었다.

여유 있는 은퇴 생활은 모두의 꿈이지만,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행운이다. 지난 5월 블룸버그통신은 「세계는 은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The World isn’t prepared for retirement)는 제목의 기사로 눈길을 끌었다. 이 기사는 15개국 1만 6천여 명의 노동자와 은퇴자를 대상으로 ‘은퇴’에 대해 조사했더니, “조사 대상 대다수가 은퇴 후 삶을 위한 기본적 금융 상식조차 없었다”고 전한다.
한국은 이 조사 대상국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은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어쩌면 가장 준비되지 않은 나라인지도 모른다.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OECD 회원국 중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데도 말이다. 연금 소득 대체 비율도 미국은 71.3%지만, 한국은 39.3%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소득이 줄어도 의료비 부담은 노화와 함께 계속 증가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60세 이상 한국인의 1인당 월평균 진료비는 전체 연령 평균의 2.3배에 이르고, 평생 쓰는 의료비의 절반은 65세 이후에 집중된다. 이런 상황이니 노인 자살률이 10만 명당 54.8명으로 OECD 평균의 세 배에 가깝고, 대다수 한국인들이 은퇴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결코 놀랍지 않다.
그런 점에서 1951년생 이찬웅 씨는 운 좋은 은퇴자에 속한다. 비록 몇 해 전 담낭 제거 수술을 받았고 시력과 청력이 감퇴하는 등 매일 건강 문제와 싸우고 있긴 해도, 노인 빈곤층으로 전락한 다른 베이비부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이찬웅 씨는 10년 동안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차곡차곡 적어 2013년 수필집 『나는 학생이다』를 출판했다.

버킷 리스트를 실행하다
이찬웅 씨는 외환은행에서 34년 동안 근무한 후 2004년 2월에 퇴직했다. 정년퇴직은 아니었지만 동기들 대부분이 이미 퇴직한 후라 큰 거부감 없이 떠날 수 있었다.
“그해 새해 첫날 북한산에서 해돋이를 본 후 ‘이제 나도 언제든 은행에서 나갈 수 있다. 뒷모습이 초라하지 않은 선배가 되고 싶다’라고 소감을 써 두었는데, 마치 예언처럼 한 달 후에 그만두게 됐지요.”
퇴직을 앞둔 시점에서 자산을 따져 보니 그런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단다. 자신 명의의 집도 있었고, 빚도 없었다. 당시엔 예금 금리도 높아 모아둔 자산이 줄어들 염려도 적었고, 두 아들 중 첫째가 대학 졸업반이라 지출도 곧 줄어들 터였다. 그는 퇴직 후 백수로 6개월쯤 지내다가 여동생 남편이 운영하는 수입 판매 업체에서 2년 반 동안 자금을 관리했다. 이후에는 모든 일을 접고, 드디어 본격적인 은퇴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퇴직 전부터 앞으로 해 보고 싶은 것들을 메모해 뒀는데, 첫째는 자전적 소설을 쓰는 거였어요. 소설을 쓰려면 글쓰기를 배워야 할 것 같아 신문사 문화센터에 갔어요. 소설 강의가 없어서 수필반에 다녔지요.”

그는 거의 10년 동안 수필을 공부하며 간간이 작품을 발표하다가 2013년 봄 수필집 『나는 학생이다』를 출판했다. 책 제목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중국 작가 왕멍(Wang Meng 王蒙)의 저서 『왕멍자술: 아적인생철학』(王蒙自述: 我的人生哲學)에서 따왔다.
“그때 샘에 고여 있던 물을 다 퍼낸 느낌이라, 요즘은 쓰지 않아요. 다시 샘에 물이 고일 때까지 기다려야죠. 하지만 글을 쓰면서 저 자신이 글쓰기에 그리 소질이 있는 편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어요. 수필 공부를 하며 저를 들여다보니 저는 소설보다 수필이 맞는 것 같긴 했지만.”
글쓰기 외에 은퇴 후 하려 했던 백두산 등반, 크루즈 여행, 장거리 도보 여행 등은 이미 해 보았고, 몇 가지는 아직 남아 있다. 어려서부터 궁금했던 아프리카에 꼭 한번 가고 싶고, 마술을 배워 남들을 즐겁게 하고 싶고, 지리산 깊은 곳이나 히말라야 오지에서 사계절을 살아 보고 싶다는 버킷 리스트는 아직 유효하다.
“언젠가 어떤 친구가 ‘다른 사람들은 궁금증만 갖고 사는데, 너는 궁금한 건 꼭 해 보려고 하더라’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궁금했던 아프리카에 꼭 한번 가고 싶고, 마술을 배워 남들을 즐겁게 하고 싶고, 지리산 깊은 곳이나 히말라야 오지에서 사계절을 살아 보고 싶다는 버킷 리스트는 아직 유효하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국선도 교실에 가서 단전호흡을 한다. 몇 년 전 국선도 유단자가 되었다.

인생과 신앙의 의미
그는 매일 아침 7시 반에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난다. 양배추 즙과 과일을 먹으며 신문에서 읽을거리를 골라둔 후 옆 아파트 단지에서 열리는 국선도 교실에 가서 한 시간 반 동안 단전호흡을 한다. 그는 검은 띠를 매는 국선도 유단자다. 집에 돌아오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내 구경빈(Ku Kyung-bin 丘瓊彬) 씨는 성당에 가고 없을 때가 많다.
아침에 골라 둔 신문 기사를 읽고 나선 부인의 이름을 따 만든 인터넷 카페에 접속한다. 카페 회원은 가족과 친척, 친구들이다. 전부 합치면 70명쯤 되지만, 매일 들르는 사람은 5명 안팎이다. 카페에서 접하는 가장 반가운 뉴스는 스페인에서 파견 근무 중인 둘째 아들네가 올리는 손녀 소식이다. 큰아들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이찬웅 씨에게는 유일한 손주다.
“자식과 손녀는 비교할 수가 없어요. 손녀는 끝없이 보고 싶은 꽃 같은 존재니까요.”
카페에 글과 사진을 올리고, 다른 회원들이 올린 게시물들을 읽다 보면 점심 무렵이 된다. 약속이 있을 때는 외출을 하고, 약속이 없으면 집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아내가 성당에서 돌아오면 함께, 오지 않으면 혼자서 식탁에 앉는다. 아내는 같은 지점에서 근무하다가 알게 돼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지난 4월 7일이 결혼 40주년 기념일이었다.
“집사람은 제가 가부장적이래요. 집안의 대소사를 제가 결정하기 때문인가 봐요.”
그는 첫 집을 구입할 때부터 방 네 개짜리를 고집했다. 홀로 되신 어머님을 모셔야 하는 데다가 제사 때 오는 형제들과 친척들이 자고 갈 수 있으려면 방이 여러 개 필요했다. 적은 돈으로 방 네 개짜리 집을 사려니 교통 여건이 좋지 않은 곳에 위치한 단독주택을 사야 했고, 나중에 아파트로 이사할 때도 방 네 개짜리를 사느라 큰 빚을 져서 그걸 갚느라 근 10년 동안 고생했단다.

그는 7남매 중 장남으로 누님이 셋, 여동생 하나에 남동생이 둘이다. 형제가 많은 것을 봐도 그는 전형적인 베이비부머 세대다. 그러나 아내의 불만이 그가 가부장적 기질의 장남이기 때문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집사람이 성당에서 있었던 일이나 이러쿵저러쿵 이웃들 얘기를 하면 그리 듣고 싶지 않아요. 사실 관심도 없고요. 아내와 40년을 함께 살았지만 지금도 아내를 잘 아는 것 같지 않아요. 그 사람이 성당이나 집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타인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아내는 모태신앙이지만 그는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아내의 세례명은 율리안나(Juliana), 그는 아오스딩(Augustinus)이다.
“저는 종교가 삶의 구성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 때문에 일상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보다는 선하게 사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내와 종교관이 다른 탓에 찬웅 씨는 종교와 인생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생각해 본 것 같았다. 오대산 월정사의 단기 출가학교에 들어가 20여 일을 보냈고, 충북 옥천의 메리워드 영신수련원(Mary Ward Retreat House)에서 열흘 동안 피정을 한 적도 있다.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마음의 고향 같아요. 그래서 절 생활은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하지 말라는 게 너무 많아서 놀랐어요.”
예수회 수련원에서는 침묵 속에서 생활하다 하루에 한 번 수녀님과 상담했는데, “수녀님은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욕심을 내려놓고 응답을 기다리라고 했지만, 저는 내려놓지 못했어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와야지 하고 나왔어요”라며 당시를 술회했다.

이찬웅 씨는 지난 9년 동안 비영리 민간단체 아름다운서당이 운영하는 영리더스아카데미에서 대학생들에게 경영학을 가르치는 자원 봉사 활동을 했다. 지난 6월 서울시립대학교의 한 강의실에서 그가 마지막 수업을 하고 있다.

큰 바위 얼굴처럼
그는 종교에 대한 생각처럼 은퇴 후 인생에 대한 생각도 일찌감치 정리한 편이다. 젊은 시절 자신의 롤 모델이었던,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의 주인공 어니스트처럼 ‘가족을 넘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2009년 어느 날 우연히 어떤 글에서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는가?(What do you want to be remembered for?) 나이 들어서도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잘못 산 것이다.(If you still can't answer it by the time you're 50, you'll have wasted your life.) 당신은 다른 사람이 변화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One does not make a difference unless it is a difference in the lives of people.)’라는 문장을 보았어요. 그 순간 어니스트가 떠올랐고, 남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때마침 한 시민단체에서 진행하던 은퇴자를 위한 프로그램에서 비영리 민간단체 아름다운서당(Beautiful Seodang)의 서재경(Suh Jae-kyoung 徐在景) 이사장을 만났고, 서 이사장의 권유로 그는 서당에서 운영하는 영리더스아카데미(YLA: Young Leaders’ Academy)의 교수가 되었다.

YLA는 인성, 능력, 봉사 정신을 갖춘 인재 육성을 목표로 하는 대학생 교육 프로그램인데 고전과 경영학 수업, 봉사 활동으로 이루어진 교육 과정을 무료로 제공한다. 교수진은 주로 언론계, 기업, 금융계 등에서 종사하던 은퇴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급료를 받기는커녕 자신의 돈을 써 가며 교육에 참여한다. 찬웅 씨는 만 9년 동안 교수로 봉사했는데, 얼마 전 학생들과 읽은 책에서 2009년 자신에게 어니스트를 상기시켰던 바로 그 질문을 발견했다.
“피터 드러커의 『프로페셔널의 조건』(The Essential Drucker)이었어요. 다시 생각해 보았지요.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는가? 그리고 답을 얻었어요. ‘어니스트를 닮으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한다는 것을요.”
학생들에 대한 사랑은 변함 없었지만, 찬웅 씨는 지난 6월 23일 수업을 마지막으로 강의를 접었다. 청력이 약해져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늘고, 언어 구사도 예전 같지 않은 데다가 인후염으로 인해 목소리가 자주 잠겨서 학생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아서였다.
“요즘 학생들은 꿈을 잃은 것 같아요. 졸업 후 취업 못하면 아르바이트뿐이라는 강박이 꿈을 앗아간 것 같아 안쓰러워요.”
학생들 곁을 떠났다고 봉사도 그만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덜 부담스러운 일을 하려고요. 어렵게 사는 이웃의 집을 청소하거나 수리하는 것처럼 단발적인 봉사를 해야겠어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상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은행에 취직해 야간 대학에 다니던 시절, 찬웅 씨는 어니스트를 롤 모델로 삼은 이유를 교지에 쓴 적이 있다.
“나는 그의 꿈이 소박해서 좋다. 그가 영리하지 않아서 좋다. 진실해서 좋다. 참으로 평범해서 좋다. 온후한 사상가라서 좋다.”
그의 수필집 『나는 학생이다』를 읽거나 그와 대화해 보면, 찬웅 씨는 ‘어니스트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니스트 그 자체’란 생각이 든다. 그 또한 소박한 꿈을 좇아 진실하게 사는 평범하고 온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별로 밑진 것도 없고, 이 상태로 마무리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는 이미 10여 년 전에 잘 죽는 길을 고민하며 유서를 써 두고 장기 기증 서약까지 했다. 그는 분명 ‘운 좋은 베이비부머’이지만, 그의 행운은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군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지 않고 늘 배우며 실천하는 ‘학생’의 삶을 추구해 온 찬웅 씨 같은 사람이 이 사회에 많았으면 좋겠다.

김흥숙(Kim Heung-sook 金興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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