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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2018 SPRING

생활

길 위에서 의주로, 500년간 세계와 통한 길

“도란 여기서부터 저기로 이르는 길이다.”(道者自此之被之路也)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중용자잠』(中庸自箴)에서 내린 정의이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의 사유에서 이렇게 평범한 정의가 나온 까닭이 궁금해진다면 당신은 그때의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자리에 근접한 셈이다.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그의 아쉬움과 괴로움의 탄식이 들릴 법하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는 높이가 17.4m에 이르는 소박한 모습의 마애이불입상이 산중턱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보물 제93호인 이 쌍미륵은 11세기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멀리서도 잘 보여 옛날 의주로를 오고 가는 길손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했다.

‘도(道)’와 ‘도로(道路)’
유교의 경전에서는 도(道)를 인간의 본성을 따르거나(率性之謂道, 『중용』) 삶에 내재한 궁극의 이치를 밝힌다(大學之道在明明德, 『대학』)는 중의적 의미로 썼다. 주자(1130~1200)는 도를 “마땅히 행해져야 할 이치”(當行之理)로 정의했다. 그러니까 주자학이 밝히고자 한 것은 인간과 사물에 내재해 있는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원리였다.
이를 통치 철학으로 삼아 세운 나라가 조선(1392~1910)이다. 그러나 조선의 유가들은 패도 정치를 막지 못했고, 엄격한 신분 질서는 사회의 불균형과 불평등을 키웠다. 두 차례 외세의 침입에 국가는 더 무력했다. 18~19세기를 산 정약용은 형이상학적 원리에 치우쳤던 도를 실천의 범주, 곧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을 영위하는 과정 또는 사회적 발전 과정으로 바꾸어 읽음으로써 지배층의 각성과 절박한 현실 개혁의 의지를 토로한 것이다.
자기 수양이라는 틀에 갇힌 유학에서 벗어나 나라의 근간인 농민들의 생활 안정과 토지 개혁을 주창하고, 상업과 유통을 새로운 활로로 제시한 이들은 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이른바 실학자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영∙정조라는 탁월한 군주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조선에 일단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흐름에 걸맞게 다양한 저서들과 정책 제안서들이 쏟아졌는데, 그중 덜 알려진 독특한 인문지리서가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1770년 펴낸 『도로고』(道路考)이다.
이 책은 조선의 육로와 해로는 물론 국경과 왕의 행차로에 이르기까지 온갖 교통 정보를 담았음에도 성이 안 찼는지 당시 국경 무역이 이루어지던 ‘개시(開市)’라는 공식 시장까지 부록에 담았다. 저자는 서문에서 시장이 크게 번창해 도로의 이용자가 늘고 그 부류도 상인과 평민층으로 확대되자, 그들을 위해 도로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나라가 할 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글머리에 “길이란 것은 주인이 없으며 오로지 길 위에 있는 사람이 주인”(路者無主而惟在上之人主之)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신경준은 도로를 자주적이고 민본적인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적인 수단이자 궁극의 목표로 여긴 것이다. 미루어 보건대 자본의 수탈을 막고 유통을 터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도로(道路)’, 곧 ‘도(道)의 길’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큰 길가에 있는 독립문은 1897년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자는 국민의 뜻이 모아져 모금 행사를 통해 건립되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조선 시대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이 있었으나 사대 사상의 상징이라 하여 독립협회에서 헐고 이 문을 세웠다.

혜음원(惠蔭院)은 고려 시대 이후 개성과 서울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던 혜음령을 지나는 관료들의 편의를 위해 나라에서 지은 숙박 시설이다. 1999년 파주 광탄면에서 ‘혜음원’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암막새가 발견됨으로써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연행 길 따라잡기
신경준은 이 책에서 조선 도로의 근간을 6대로(六大路)로 나누었는데 그중 제일로(第一路)가 의주로다. 한양(서울)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개성-황주-평양-안주-정주를 지나 압록강변의 의주로 이어지는 이 길을 첫 번째로 꼽은 까닭은 한양과 평안도 감영을 잇는 관로(官路)로서의 기능과 역할에 더해 중국과 교류하던 길이란 점에 의미를 둔 듯하다. 큰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 이웃 나라와는 화평하게 지낸다는 조선의 정책에 따른 중국과의 조공과 책봉의 관계는 개국 초부터 1894년까지 약 500년간 이어졌다. 의주로는 그 교류의 유일한 육로였다.
이 길은 근대화를 위해 힘겨운 첫걸음을 내디뎠던 구한말을 지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신작로로 대체되다 남북 분단이 고착되면서 의주로가 지나는 대부분의 도시는 북한 지역이 되었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총 거리는 1,080리, 약 424㎞이지만 현재 서울에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까지 여행자들이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최단거리 45㎞에 택시비는 4만 원 정도다. 물론 이마저도 옛길 그대로는 아니다.

45㎞ 정도라면 조선 시대 연행사(燕行使)들의 걸음으로는 사흘 거리고,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왜군이 중부 내륙 지방의 충주성을 넘었다는 보고에 놀라 한양을 버리고 달아나던 선조의 다급한 걸음으로는 하루면 족하다.

임진강가 절벽 위에 자리 잡은 화석정은 조선 시대의 대학자였던 율곡 이이의 5대 조부 이명신(李明晨)이 1443년 처음 지었으며, 이이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여생을 보냈다. 화석정 아래에 있는 임진나루 뱃길은 남북 분단 이후 철조망으로 가로막혔으나, 과거에는 북쪽으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첫째 날, 돈의문에서 벽제관까지
“아침을 먹은 뒤 가친을 모시고 홍제원에 이르니, 송별하는 사람이 상하 수십 명이 나와 있었다. 임금께서 특별히 음식을 내어 주시어 송별회를 가졌다. 날이 저물어 가친께 하직하고 고양(高陽)으로 향했다. 늦은 저녁에 고양에 이르러 잤다.”- 홍대용 『연기』(燕記) 의주로는 돈의문에서 시작한다. 서대문이라 불리던 이 문은 1915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서울의 구도심 서쪽 경희궁 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어디쯤으로 짐작한다. 겸재 정선(1676~1759)이 1731년 그린 「서교전의도」(西郊餞依圖)에는 돈의문 밖 모화관에서 전별연을 마친 중국 사신의 행렬이 영은문을 지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개화 운동을 주도했던 서재필은 청일전쟁 직후 청과의 관계를 끊고 서구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며 모금 운동을 벌였고, 1897년 11월 중국 사신을 맞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홍대용(1731~1783)이 1766년 쓴 청나라 여행기 『연기』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호기와 부끄러움이다. 당시 중국은 건륭 시대로 이른바 강건성세의 마지막 치세를 누린 시기였다. 조선이 청에 굴복한 지 100년이 훨씬 넘었건만 조선에서는 개방을 통해 세계적인 제국으로 부상한 청을 외면한 채 여전히 반청(反淸), 화이론(華夷論)에 집착하고 있었다. 북학파로 불리는 홍대용을 비롯한 일군의 선비들은 이를 의심했고, 직접 그 실상을 살필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고대했다. 북경의 천주교회당에서 처음 파이프 오르간을 접하고는 곧바로 자신의 거문고 곡을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해 보일 만큼 호기를 부리기도 했지만, 그는 연행 길 내내 무엇이 진정한 부끄러움인지, 또한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되물었다.
의주대로의 첫 번째 원(院,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국립 여관)인 홍제원으로 가려면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험한 무악재를 넘어야 했다. 지금이야 산을 깎고 넓혀 완만한 경사의 대로가 되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겨우 말 한 필이 지나갈 정도의 길이었다고 한다. 전략적인 판단도 있었겠으나, 주요 도시들이 강과 바다로 이어진 잘 발달된 수로를 끼고 있던 탓이 크다.
홍제원 일대는 울창한 소나무와 홍제천 계곡이 절경을 이루어 사행단을 위한 전별연을 열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공식 사신단은 30명 안팎으로 마부와 하인, 공물을 운반하는 일꾼 들을 더하면 총원은 적을 때는 300여 명, 많을 때는 500여 명이 넘었다. 여기에 전별을 나온 수십 명의 가족 친지들과 구경꾼까지 치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파로 북적였을 것이다. 지금의 인왕 시장은 그때 떡을 팔던 병전거리(餠廛巨里)가 진화한 결과로 보인다.
임금이 내려 주신 음식과 술로 거나해지면 부채와 붓, 촛대, 갈모(비가 올 때 갓 위에 쓰는 우장) 따위를 전별 선물로 주고받았다. 해지기 전에 첫 숙소인 벽제관까지 가려면 여흥을 자제해야 한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총거리는 1,080리, 약 424㎞이지만 현재 서울에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까지 여행자들이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최단거리 45㎞에 택시비는 4만 원 정도다. 물론 이마저도 옛길 그대로는 아니다.

임진강 상류에 있는 두지나루에서는 황포돛배가 사람들을 싣고 고랑포 여울까지 왕복 6㎞를 오고 간다. 조선 시대 황포돛배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 2004년 3월부터 운항을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전쟁 휴전 이후 50년 동안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던 임진강에 관광객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둘째 날, 벽제관에서 파주 관아까지
“수행원 둘과 함께 혜음현을 넘어 12시쯤 파주에 이르렀다. 우계 성혼(成渾) 선생께서 먼저 편지를 보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으나 찾아오지는 말라고 권유하셨다. 나는 바로 사람을 보내 감사 편지를 드리고 가르침을 구했다.” - 조헌(趙憲) 『조천일기』(朝天日記)

벽제관을 출발하여 지금의 78번 국도를 따라 가면 굽고 비탈진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곳이 고양에서 파주로 넘어가는 혜음령이다. 고려 때부터 서울과 개성을 잇는 지름길로 이용되던 혜음령은 길이 험해 혜음원이란 숙박 시설과 사찰을 두어 관리했다. 지금은 터만 남은 혜음원지에서 파주 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거대한 자연 암벽을 조각해 만든 두 개의 석불 입상이 보인다. 이 석불 앞으로 필시 힘없는 백성들이 도적을 피해 무리지어 오가던 길이 있었을 것이다. 떠나는 이는 이 석불 앞에서 무사귀환을 빌었을 것이고, 돌아오는 이는 멀리서 이 석불을 보고 안도했으리라. 소박한 석불의 시선이 지금은 맞은편 산자락의 공동묘지에 머물고 있다.

그 왼쪽으로 아스라이 서울의 북한산 자락이 보인다.
조헌(1544~1592)은 명나라 황제 만력제(萬曆帝)의 생일 축하 사절의 일원이었다. 사행 길에 인근에 있는 조상의 묘에 참배하거나 이름 높은 선비를 찾아 문안을 드리고 가르침을 구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파주에는 이름난 유학자인 성혼(1535~1598)과 이이(1536~1584)가 친구로 지내며 소여울[牛溪]과 밤골[栗谷]에 살았는데, 가까운 김포에서 나고 자란 조헌은 이 두 사람의 문인이었다. 뒷날 조헌은 이이의 학문을 계승했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평생 직언으로 일관했다. 임진왜란이 나던 해 의병 700명을 이끌고 왜군과 싸우다 금산에서 전사했다.
석불 입상을 지나면 성혼 선생 묘와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옛 파주 관아가 있던 자리에는 파주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지난해에는 혜음령 고개를 관통하는 터널이 완공되었다.

셋째 날, 파주 관아에서 개성까지
“이른 아침에 파주를 떠나 율곡에 이르러 이숙헌(李叔獻)을 방문했다. 숙헌은 병으로 아직 일어나지 못하였다. 오래 기다리니 숙헌이 나왔는데 매우 피로해 보였다. 그와 마주 앉아 시사(時事)에 한탄하고 인심과 도심(道心), 이기일원론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 허봉(許篈) 『조천기』(朝天記)

허봉(1551~1588)은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오빠이자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형이다. 숙헌은 율곡 이이의 자(字)다. 인사를 마친 허봉은 율곡이 드나들던 화석정에 오른다. 집은 새로 지었으나 아직 칸막이를 하지 않았고 지세는 가파르다. 율곡은 이 마을에서 온 집안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기를 바랐다.

그 마음을 아는 허봉은 불과 석 달 전에 승지에서 물러난 대유학자의 빈한한 가세에 연민을 느끼며 굽이굽이 흐르는 임진강과 강 건너 늘어선 산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바로 그 이듬해 정치 개혁의 방향을 놓고 사림이 분열되자 허봉은 그토록 존경과 연민의 눈길로 섬기던 이이와 대립하다 마침내 1583년 직무상의 과실을 이유로 이이를 탄핵한다. 이 일로 병조판서에서 물러난 이이는 지병이 악화되어 별세한다.

고구려 때 지어진 호로고루는 현무암 대지 위에 구축된 삼각형 모양의 성벽으로 현재 남아 있는 전체 유적의 둘레는 약 400여 미터이다.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은 6세기 중엽 이후 약 200여 년 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역할을 했으며, 이곳에서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가 남긴 재산은 서재에 가득한 책과 부싯돌 몇 개였다. 허봉 역시 이 일로 유배를 간 뒤 정계로 돌아오지 않고 떠돌다 38세의 나이로 객사했다. 화석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율곡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과 율곡 기념관이 있다.
임진나루는 화석정 왼쪽 수풀에 가려진 강변에 있다. 의주로가 임진나루에서 강 건너 동파(東坡)까지 뱃길로 이어진 이유는 이곳의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기 때문이다. 자연히 임진나루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였고, 사실상 관리나 사신들이 이용하던 관로였던 셈이다. 상인이나 평범한 여행자들은 북쪽에 있는 고랑포까지 올라가야 했다. 고랑포는 서해안의 해산물과 육지의 농산물이 교역을 하던 임진강 북쪽의 마지막 포구다. 이 고랑포구 상류에 바짓단만 걷어 올리면 언제든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는 넓은 여울이 있다. 이 여울로 임진왜란 때는 왜병이 건너가고,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의 탱크가 내려왔다. 가까이에 호로고루(瓠蘆古壘)라는 고구려 요새가 있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이 있는 걸 보면 삼국시대에도 이 길은 요긴한 길목이었던 모양이다.
이 일대가 군사 지역이긴 하지만 임진강 상류의 두지리 선착장에서는 황포돛배가 유람객들을 싣고 고랑포 여울 부근까지 오르내리고, 임진나루는 생태 관찰을 허용해 탐방로를 부정기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이곳에서 비무장지대 너머 개성까지는 40리, 약 15km 남짓한 거리이다.

임진강 북쪽의 마지막 포구인 고랑포는 뱃길을 통해 농산물을 운반하던 시절 서해안으로부터 들어오는 해산물과 교역하는 나루터 역할을 했다. 이 포구 상류에는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이 있어 옛날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넷째 날, 아직은 꿈속의 길
선인들의 연행록을 읽는 밤이면 번번이 꿈에 길을 잃었다. 수레는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밤새 허둥댔다. 그런 새벽녘에 마주한 글 한 구절을 위안 삼아 적는다. “완전한 사회란 없다. 각 사회는 그것이 주장하는 규범들과 양립할 수 없는 어떤 불순물을 그 자체 내에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 불순물은 구체적으로는 숱한 양의 잔인, 부정, 그리고 무감각으로서 표현된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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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기(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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