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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2016 SUMMER

LIFE

길 위에서 목포, 생이 뮤즈로 다가오는 공간

목포는 식민지 거점도시로서 아픈 근대사를 지닌 항구도시다. 이 도시에 대해 한국인이 지닌 감정은 특별한 것이다. 그림 같은 기암괴석이 병풍을 이루는 해발 228m의 유달산에 오르면 옛 정취가 아련한 도심과 그 너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밤기차는 목포를 향해 달린다.
창 밖으로 밤의 마을들이 스쳐 지나간다. 빗방울을 머금은 마을의 불빛들이 푸른색의 꽃처럼 보인다. 마을의 불빛만큼 슬프고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밤 기차 속에서
나는 여덟 살 때 최초의 여행을 했다. 마을의 불빛이 얼마나 따스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표시하는지 이 짧은 여행이 내게 일러 주었으니, 뒷날 내가 세상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닐 수 있었던 힘도 이 불빛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을 떠돌며 살았던 아버지는 한 철에 한번쯤 집에 들르곤 했다. 나는 내심 아버지의 귀가가 싫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사 들고 오는 선물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18가지 색상의 크레파스를 사오기도 했고 동화책을 사오기도 했으며 사탕이 담긴 상자를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에 들르는 날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움을 하는 날이기도 했다.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은 격렬했고 나는 집을 떠나 걷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스며들 무렵 한 마을에 이르렀을 때 집들의 불빛이 반짝반짝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불빛들을 바라보는 동안 내 어린 마음 안의 따뜻한 물 같은 것이 몸 밖으로 스며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어디서 왔니?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아저씨였다. 그날 나는 그 아저씨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방 안에는 놀랍게도 동화책이 가득 쌓여 있었다. 몇 권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 아저씨의 집을 볼 수 있었다. 기와집이었고 마당에 꽃밭이 있었다. 담장을 따라 딸기 넝쿨이 자라고 있었다. 아저씨가 물뿌리개로 꽃밭에 물을 주자 국수가닥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에 작은 무지개가 일었다.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한반도 남서쪽 끝에 자리한 인구 24만 명의 항구도시다. 1897년 개항 즈음에 이 항구의 가치를 눈 여겨 본 것은 일본이었다. 목포는 외부에서 한국 최대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진입하는 최적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한 1910년 이래 목포는 한국의 철도와 도로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남에서 북으로 목포에서 서울을 거쳐 신의주에 이르는 국도 1호선이, 서에서 동으로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국도 2호선이 닦이자, 이 두 도로와 철도를 통해 한국의 물자가 일본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므로 목포는 식민지 시절 수탈의 역사 한 가운데 자리한 항구였던 것이다. 시인 김선우는 목포의 역사적 상처를 이렇게 노래했다.

가슴팍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 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게 되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
--시 <목포항> 부분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아픈” 역사가 식민지 시절 목포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노래는 이런 비극적 삶을 동무로 태어나기 마련이다. 목포에는 목포의 영혼을 담은 노래와 가수가 있다. 목포에서 태어난 가수 이난영(李蘭影1916~1965)은 1935년 <목포의 눈물> 이라는 노래를 발표하며 데뷔한다. 나라 잃은 설움과 슬픔을 달래주는 그의 노래는 당시 한국 사람들의 가슴을 깊게 휘저어 놓았다.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흐느끼는 비음으로 노래한 이 노래에서 당대의 사람들은 한국의 슬픈 운명과 그 역사의 춤을 보았다. 19세 처녀의 이 절창에서 사람들은 한국의 전통 소리인 판소리 가락의 유구한 한과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의 숨결을 느꼈던 것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져진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목포의 눈물 1절>

“열렬히 사랑하다 죽어도 좋을” 현실이 망국민에게는 없다. 꿈꿀 수 없는 생의 목적지. 부두의 아가씨는 이별이 한없이 서럽고 아프다. 언제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은 요원하고 옷자락은 눈물에 젖는다.
목포 사람들은 이난영을 이야기할 때면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를 즐겨 떠올린다. 에디트 피아프와 이난영은 동시대의 삶을 살았고 데뷔 시기가 같았을 뿐 아니라 민족의 삶에 무한한 위로와 영감을 준 공통점이 있다. 에디트 피아프에게 <장미빛 인생>과 <사랑의 찬가>가 있다면 이난영에게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다>와 같은 노래가 있었다. 목포 시내를 내려다보는 유달산 기슭에는 이난영을 기리는 노래비가 서 있다.

평화광장의 여름 밤
모든 항구가 육지의 끝에 자리한다는 사실은 어떤 이에게는 그곳이 새로운 출발의 자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는 한과 수탈의 거점이었던 목포에 새로운 꿈 하나를 제시한다
김대중(1924~2009). 그의 이름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목포 앞바다 하의도의 후광리 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투옥 6년 망명 10년 가택연금 55회라는, 지난 세기 지구상에서 최고의 정치적 탄압을 받은 인물 중 한 사람이다. 1980년 신군부정권이 사형 선고를 내린 뒤 협조할 경우 살려주겠다고 회유했을 때 그는 “나도 죽는 것이 두렵지만, 지금 내가 살기 위해 타협하면 역사와 국민으로부터 영원히 죽게 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죽어도 역사와 국민 속에 영원히 살 것이다” 라고 진술했다. 죽음 앞에서 한없이 당당했던 이 진술은 오늘날 한국인들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다. 1997년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0년 남북한 화해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옛 삼학도 자리에 자리한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에는 인간 김대중의 고난과 영광의 자취가 한 자리에 모여 있다.
하당 평화광장의 여름 밤은 싱싱하기 이를 데 없다. 장난감 자동차를 모는 아이들, 자기들 얼굴을 카메라에 담기 바쁜 연인들, 색색의 솜사탕을 만들어 파는 상인들, 스낵바 앞에 줄을 선 사람들, 꽃 장수들, 그냥 걷거나 방파제에 걸터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 파도소리를 들으며 낚시를 하는 사람들. 목포 시민이 모두 이 바닷가에 쏟아져 나온 것 같다. 번쩍 빛들이 쏟아지며 음악이 들려온다. 춤추는 바다분수다. 바다 가운데서 색색의 거대한 물줄기들이 음악과 함께 쏟아진다. 당신이 문득 생의 외로움을 느낄 때 밤기차를 타고 목포역에 내린다면 평화광장의 북적이는 인파 속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지. 인간의 냄새가 배인 어떤 소음들은 외로움을 씻어내는 따뜻한 약이 될 수 있다.

밤의 북적이는 평화광장을 걸으며 나는 이난영과 김대중의 시대를 생각한다. 나라를 잃고 정처 없이 방황했던 사람들이 꿈꾸었던 시간들이 지금 이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광장에 펼쳐지고 있다. 죽음 앞에서도 한없이 의젓했던 정치가가 끝내 만나고 싶었던 평화가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극한의 절망과 방황, 고통을 이겨내고 자신의 꿈과 싸운 인간의 향기. 항구도시 목포의 여름 밤에 별들이 쏟아진다.

당신이 문득 생의 외로움을 느낄 때 밤기차를 타고 목포역에 내린다면 평화광장의 북적이는 인파 속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지. 인간의 냄새가 배인 어떤 소음들은 외로움을 씻어내는 따뜻한 약이 될 수 있다.

갓바위 문화타운 역사 산책
갓바위 문화타운은 목포를 처음 찾는 여행자에게 도보여행의 참 멋을 느끼게 하는 장소이다. 복합 문화예술 단지인 이곳에는 박물관과 기념관, 갤러리들이 모여 있다. 목포자연사박물관, 목포생활도자박물관, 해양유물전시관이 딸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목포문학관, 남농기념관, 목포문예회관, 중요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한 사흘쯤 천천히 파도소리를 들으며 이 문화타운을 답사하는 것만으로 이 도시의 역사와 함께 깊어지는 당신 생의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남농기념관은 19세기에서 20세기 후반에 이르는 한국의 남종 문인화를 체계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이다. 남농 허건(許楗1908~1987)은 추사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으로 최고의 기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남종화의 대가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의 손자로서 선조의 화풍을 이어 받았다. 이 미술관에는 허련과 부친인 미산(米山) 허형(許瀅)의 작품들, 제자들의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나는 그 중 남농의 아우 허림(許林 1917 ~1942)의 작품을 제일 좋아한다. 스물다섯의 나이로 요절한 그는 이곳에 <닭 파는 노인>(1940)과 <맥구(麥邱)>(1941) 두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식민지 시절 한국의 보통 사람들의 삶과 산하가 따사로운 빛과 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 예술가의 작품은 그가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에 따라 그 기품이 결정된다. 이 두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목포 여행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 시간이 내게 있었다. 근대 서양화의 기법과 조선 문인화의 정신이 함께 빚어낸 전환기 한국화의 한 절정이라 할 것이다.
모험과 여행을 좋아하는 이라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전시관에 꼭 들러야 한다. 제2전시실에는 1323년 목포 앞 신안 바다에 좌초된 중국 원나라 무역선(신안선이라 부른다)의 인양 당시 모습이 보존되어 있고 그 시대 뱃사람들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출토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그 옆 제3전시실에서는 세계의 배 진화 과정을 돌아볼 수 있다. 15세기 대항해시대 여행자들의 자취를 살필 수 있는 것도 큰 기쁨이다.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1360-1424) 시절의 대항해가인 정화(鄭和)는 62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세계 원정을 했다. 그는 1405년부터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이르렀으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지속하다 항해 중 사망했다. 가히 대항해가 다운 죽음이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인생이라는 이름의 그물을 하나씩 들고 있다. 거대하고 신비한, 아무도 이른 적 없는 바다에 그 그물을 던지고 싶은 모험가의 꿈은 어느 시절에도 존중 받아 마땅한 것이다

목포가 낳은 네 문인
생활도자박물관을 지나 걸음을 목포문학관으로 옮긴다. 목포는 한국이 자랑할 만한 문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목포문학관에서는 소설가 박화성(1904-1988), 희곡작가 차범석(1924-2006)과 김우진(1897-1926),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 이 네 문인의 삶의 행적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문학관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나는 김현의 전시관을 배회했다. 김현은 생전에 240여 편에 달하는 평론과 저술을 남겼는데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닌 평론가의 글을 한국인이 사랑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텍스트를 열렬히 사랑한 평론가였다. 텍스트를 분석의 대상이 아닌 지고한 열애의 대상으로 대했다. 자신의 방대한 독서량 속으로 텍스트를 이끌고 들어가 그 텍스트가 꾸는 꿈이 무엇인가 밝혀내는 데 그의 진정성이 있었다.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질수록 자기에게로 가까이 간다. 그 모순이야말로 인간존재의 비밀을 쥐고 있다.” (˂김현 예술기행˃, 1975)
“잘못 읽는다는 것은 다른 원칙에 의해서 그것을 읽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것을 구축케 하는 독법이다.” (˂인간의 고향을 찾아서˃, 1975)
“또 다시 좋은 세상이 오고 있다고 풍문은 전하고 있다 과연 좋은 세상이 올 것인가? 그것은 헛된 바람이 아닐까? 나는 주저하며 세계를 분석하고 해석한다.” (˂분석과 해석˃, 1988)

역사가 숨 쉬는 공간을 배회하는 것은 여행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가끔은 생이 뮤즈로 다가올 때가 있다. 목포는 내게 그런 공간이다.

곽재구 (Gwak Jae-gu, 郭在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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