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한 미국인이 한국 여행 길에 책거리 그림이 그려진 병풍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그 그림들의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거의 반세기에 걸친 케이 블랙(Kay E. Black)의 열정과 노력을 지난 6월 서울의 한 출판사가 훌륭한 한 권의 책에 담아 세상에 내놓았다.
지난 7월, 신문사 내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도착했다. 미술 담당 기자여서 종종 관련 분야 신간을 받아 보지만, 이번 책은 어딘가 좀 달랐다. 영어로 출간된 그 책의 제목은 『Ch’aekkori Painting: A Korean Jigsaw Puzzle』, 저자는 Kay E. Black이었다.
호기심에 책을 열자 아름다운 도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수록 탄성이 절로 나왔다. 조선 시대 이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한국인도 적지 않은데, 외국인이, 그것도 1970년대에 그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을 평생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눈에 빠지다
저자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던 나는 뜻밖의 소식을 접해야 했다. 그가 최근 미국에서 별세했다는 것이다. 담당 편집자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책이 인쇄되자마자 미국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저자께서 병상에서 책을 받고 무척 기뻐하셨다고 해요. 그리고 책을 받고 얼마 후에 돌아가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 책은 가로 225㎜ 세로 300㎜의 판형에 330쪽이 넘는 학술서다. 6월 말 한국에서 인쇄된 책을 국제특급 배송으로 전달받은 저자는 책을 받은 지 열흘 만인 7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92세였다.
책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안휘준(安輝濬) 서울대 명예교수의 서문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저자를 내게 친절하게 소개해 줬다. “케이 E. 블랙을 만난 것은 내가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낸 1996년 가을이었습니다(It was in the fall of 1996 that I first met Kay E. Black while I spent a sabbatical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안 교수는 이어 “그의 한국 미술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한국 책거리 공부에 대한 열렬한 헌신에 감명을 받았다(In meeting with Kay Black, I was impressed by her genuine love for Korean art and ardent dedication to studying Korean ch’aekkŏri.)”고 했다.
이후 여러 채널을 통해 취재한 바에 따르면, 케이 블랙은 콜로라도 덴버에 살던 주부였으며 1973년 지역의 미술 애호가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한국 민화를 소개하는 에밀레박물관을 찾았던 그는 책거리 그림이 그려진 병풍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여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가족들에게 “책거리 그림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겠다"고 선언하고 덴버대 대학원 아시아학과에 등록했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 늦깎이 공부가 시작됐다.
공동 작업
알려져 있듯이, 책거리 그림은 병풍 형식의 화면에 책과 책장을 중심으로 도자기, 문방구, 향로 등의 기물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책가도(冊架圖)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은 18세기 무렵 궁중 회화로 유행했으며 19세기 이후에는 민화로 확산됐다. 지난 10여 년간 국내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가 열리며 그 가치가 재평가되기 시작했지만, 1970년대에 책거리 그림은 연구의 불모지였다.
그런 그림을 한 외국인 여행자가 1970년대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케이 블랙은 198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 등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작품을 조사하며 주요 작품을 직접 촬영했다. 그는 몇 년 후 하버드대 한국학과 고 에드워드 W. 바그너 교수와도 협업했다. 바그너 교수는 조선 시대 족보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블랙이 책가도 화가들의 복잡한 계보를 확인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1990년대에는 여러 편의 논문을 함께 발표했다.
안 교수는 “그동안 책거리 그림은 보통 민중의 취향을 반영하는 익명 화가들의 작품으로 이해됐으나, 그는 에드워드 교수의 도움으로 다수의 궁중 화가들이 그림 작업을 했고, 그 그림들이 지배 엘리트들과 심지어 왕족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파악해 냈다(Thus, they had been commonly understood as works by anonymous painters that reflect the folk taste. However, the author broke the old preconception, with the help of Edward Wagner, by discovering the facts that a number of court painters worked on the paintings, and that the paintings were extensively favored by the ruling elite and even royalty.)”고 평가했다. 블랙은 다양한 책거리 작품들을 3대 유형으로 분류해 소개했는데, 안 교수는 “케이 블랙 여사와 에드워드 교수의 글들이 출간된 이후, 보다 광범위한 문헌 자료를 근거로 이 주제를 다루는 한국 학자들의 연구가 다수 등장하고 이들이 제시했던 분석은 때때로 수정되고 반박되기도 했지만, 그들의 주요 논점 중 많은 것들은 여전히 가치 있는 것으로 남아 있다(Since the publication of the earlier articles by Kay Black and Edward Wagner, a number of studies by Korean scholars, which treat the subject based on a better command of more extensive literary materials, have appeared. Although the ideas presented by Black and Wagner were sometimes corrected and refuted, many of their major points still remain valuable.)”고 말했다.
케이 블랙은 책의 서문에서 “책은 하버드대 한국학 창시자인 와그너 교수와 함께한 12년간의 공동 작업의 성과(I was privileged to have worked with the late Edward W. Wagner (1924–2001), professor and founder of Korean Studies at Harvard University, for twelve years on the project.)”였다고 말했다. 또한 매우 유용한 시점에 자신을 와그너 교수에게 소개했던 컬럼비아대학교 게리 레드야드(Gari Ledyard) 세종석좌교수의 도움도 컸으며 자신이 개척한 “책거리 그림 연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이 주제가 안고 있는 퍼즐을 완성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It has been a pioneer effort, and I hope it inspires others to pursue the subject and complete the puzzle.)”고 말했다.
용기와 집념
이 특별한 저자에 대한 정보를 더 얻기 위해 MIT에서 건축을 공부했다는 그의 딸 케이트 블랙(미 피드몬트시 도시계획국장•64)의 이메일 주소를 수소문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경황이 없을 시점이라 조심스럽게 질문서를 보냈는데 그로부터 감동적인 답장이 도착했다.
그는 “이 책은 진정으로 어머니 일생일대의 책(It was truly her life's work)”이라며 “어머니는 제게 훌륭한 롤모델이었다”고 했다. 또한“어머니로부터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면서 “어머니는 언니들과 내가 대학에 들어간 후 47년 동안 한국 문화 탐험을 하며 책거리 그림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용기와 집념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책을 덮으며 케이 블랙이 책거리 그림을 보며 파고든 그 숱한 시간에 대해 생각해 봤다. 우리가 그 그림에서 알아보지 못한 단서와 퍼즐 조각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는 우리에게 책거리 그림을 통해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찾아보라고, 우리가 가진 매혹과 경이의 유산을 다시 한번 돌아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