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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0 SUMMER

기획특집

한국전쟁과 대중음악: 끝나지 않은 노래 기획특집 4 록의 전설 신중현에서 인디까지

록이 한국에서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시련이 요구되었다. 초기의 하드 랜딩에 뒤를 이은 정치적 탄압 등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실력과 개성을 겸비한 수많은 밴드들이 시대 정신을 나타내는 명곡을 쏟아내며 강한 생명력으로 성장해 왔다.

한국 록의 전설적인 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 신중현(申重鉉)이 유명기타 제조사 펜더(Fender)가 헌정한 특제 기타를 들고 있다. 펜더는 그동안 에릭 클랩턴, 제프 벡 등 세기의 기타리스트들에게 자사의 기타를 헌정해 왔는데, 신중현은 2009년 역사상 여섯 번째로 이 기타를 받았다. ⓒ권혁재(Kwon Hyouk-jae 權赫才)

1964년 영국 록 밴드 비틀즈가 미국의 인기 TV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면서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신화를 쓰고 있었다. 반면 한국에선 젊은 록 밴드의야심만만한 첫 도전이 냉담한대중 앞에서 좌절되었다. 오늘날 ‘한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신중현(申重鉉)이 ‘애드 훠(The Add4)’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국내 최초의 록 음반을 발표했을 때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어린 시절 독학으로 기타를 공부하고 1955년 미8군 클럽 쇼를 통해 데뷔한 이래 유명세를 떨쳤던신중현의 이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가 리드 보컬 서정길(徐正吉)과 함께 이 음반을 다시 냈을 때도 대중은 그들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음반에수록된 <비 속의 여인>이나 <내 속을 태우는구려>가 한국 대중음악의 새 시대를 열어 준 명곡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의록 음악은 실패에서 시작했다.

신중현이 결성한 록 밴드 애드훠(The Add4)가 1964년 국내 최초로 선보인 록 음반 <비 속의 여인(Woman in the Rain)>.

한국화된 록
당시 한국에서 록 음악을 수용하는 공간은미8군 클럽 무대나 소수의 한국인들이 찾는 음악 감상실뿐이었다. 방송과 음반 산업에서는 록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고, 록 사운드를 제대로 담아낼 기술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차라리 베트남 군예대에나 가겠다고 결심했던 신중현이 만약 ‘펄 시스터즈’의 음반을 만들지 않았고, 또 그 음반이 히트하지 못했다면 ‘한국 록의 전설’이라는 월계관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1967년 서울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에서 국내 최초로 보컬 그룹 경연 대회가 열렸다. 한국 최초의 팝음악 전문지 『팝스 코리아나』가 주최한 행사였다. 이어서 1969년부터 1971년까지 플레이보이 프로덕션이 주최한 ‘플레이보이컵 쟁탈 전국 보컬 그룹 경연 대회’가 서울 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의 전신)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17개 밴드가 출전했고, 4만 명의 관객이찾아올 정도로 호응이 뜨거웠다. 불과 3년 만에 분위기가 완전히달라진 것이다. 이 시기 주최된 여러 경연 대회들은 미8군 클럽 무대에서 실력을키운 음악인들이 일반 무대에 진출할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록 밴드들도 차츰 생존력을 갖추게되었다.

1974년 신중현이 새로 결성한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은 이듬해 봄에 한국 록 음악의 고전이라 불리는 <미인>을 발표했다. 단순하고 쉬운 가사와짧지만 중독성이 있는 멜로디가 특징인 이 앨범은 당시 불황의 음반 시장에서 10만 장 판매를 기록하며 기염을 토했다. 이런 폭발적분위기를 이은 것은 밴드 ‘검은 나비’의 <당신은몰라>였다. 이 음반은 발매 후 5만 장 이상 팔리며 10년 만에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낸 한국 록의 위상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실 신중현이 1970년 새로 꾸린 밴드 ‘퀘스천스(Questions)’ 공연에서 아이언버터플라이의 를 리메이크했을 때나, 1972년 조합한세션 밴드 ‘더 멘(The Men)’이 선보였던 사이키델릭한 연주는서구 유명 밴드들의 실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수준이었다. 비단 신중현의 밴드뿐 아니라 비슷한시기 활동했던 수많은 록 밴드들역시 전 세계를 강타한 록의 다양한 자장을 흡수하고 체화했으며, 서구 록 음악과 구별되는 한국화된 록을 창조해 내는 수준에 도달했다. 한마디로 1970년대 초중반 한국의 록 음악은물이 올라 있었다.

암흑기와 여명
승승장구하던 록 음악은 안타깝게도 1975년 박정희 정부의‘공연물및 가요 정화 대책’과 대마초를 피운 연예인들에 대한 처벌 때문에 강제로 맥이 끊겼다. 신중현은 대마초 혐의로 구속되었고 그의 노래 다수가 금지곡이 되었으며, 그의 모든 활동이 한동안 금지되었다. 피해는 신중현 혼자만 겪은 것이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는 록 음악의암흑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고단한 시기였다. 이후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했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록커들이 낙담하고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다가 대학생 대상 경연 대회에출전한 밴드들이 기성 밴드 뮤지션들과는 다른 수수하고 솔직한음악을 연주해 이목을 끌었는데, 대표적인 밴드가1977년 등장한 ‘산울림’이었다. 김창완(金昌完기타, 보컬), 김창훈(金昌勳 베이스기타, 보컬), 김창익(金昌翼 드럼) 3형제가 결성한 이 밴드는순수한 정서와 사이키델릭한 세계를아우르며 파란을 일으켰고, 록 음악의 암흑기에 여명을 열어주었다. 이들의 첫 음반이 20일 만에 40만 장이나 팔리고, 1979년 2월 고별 공연을 찾은 청중들이 공연장 주변으로 500m나 줄을 서기도 했다. 한편 ‘사랑과평화’는 1970년대 말 한국 밴드 연주자들의 최고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뽑을 때 이들의 1978년 데뷔 음반 <한동안 뜸했었지>를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1970년대의 한국 록 음악은 중반 이후 황폐함을 겪기도 했지만, 다음 세대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주며 1980년대의밴드 음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씨앗을 남겼다.

1979년, MBC 방송국이 청평유원지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개최한 <강변축제>. 창작 가요 경연을 통해 가요계의 등용문 역할을 하며 수많은 스타 뮤지션을 배출했다. ⓒ 김형찬

다양성과 완성도
뉴웨이브, 펑크, 퓨전, 하드록, 헤비메탈이 전 세계를 강타한 1980년대에 국내 록 뮤지션들은 그 흐름에 최선을 다해 응답했다. 그중 ‘송골매’는 한국적인 질감과 팝의 감각을 갖춘 곡들을 발표하며 널리 사랑을 받았는데 이들은 방송을 기반으로 활동해 록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밴드‘들국화’는 방송 밖에서 1980년대의 상징이 되었다. 이들은 소극장 라이브를 중심으로 공연을 펼치며 팬들을 매료시켰다. 그들의 매력은 록, 블루스, 팝, 포크를 거뜬히 소화하고 버무리며 좋은 곡을 써내는 재능만이 아니었다. 심장을 파고드는 보컬, 클래시컬하면서 서정적인 피아노, 육중한 드럼으로 직조한 사운드는 정치적으로 억압되어 우울했던 시대를 향해 날리는 화염병처럼 뜨거워 당대의 젊은 심장들을 불살랐다. 들국화가 1985년에 내놓은 1집 <행진>은 여러 매체에서 뽑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순위에서 가장 오래 1위를 차지했다.

들국화 곁에서는 팝에 록의 프로그레시브 사운드를 결합하거나 퓨전재즈 스타일과 한국적 블루스를 선보이는 등 개성과 실력으로 무장한 다양한 밴드들이 시대를 함께 달렸다. 이들이 있었기에 1980년대 한국 록은 다양성과 완성도를 동시에 성취할 수 있었다.

1990년대에는 공동체적 태도를 견지한 포크록을 비롯해 새로운 세대의 개인주의와 비판 정신을 대변하는 음악 등 이전 시대의 경향을 계승한 이들과 전혀 다른 스타일을 내세운 이들이 동시에 등장했다.

2016년 10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펼쳐진 서울아리랑페스티벌에서 록 가수전인권(全仁權 1954~)이 아리랑을 편곡해 부르고 있다. 록 밴드 들국화(Wild Chrysantheumums 1985~1995 활동)의 리드 싱어였던 전인권은 특유의 거친 샤우팅 창법으로 1980년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들국화 1집은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자생적 인디 문화
서울 홍익대학교 부근은 수많은 미술학원과 공방, 갤러리가 밀집해 있어 문화적으로 특화된 공간이었다. 1984년 이곳에 지하철역이 개통되자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문화예술인들과 젊은 층이 모여들게 되었고, 홍익대학교의 약어 ‘홍대’라는 별명을 얻으며 문화적 핫스팟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에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 덕분에 라이브 클럽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이 클럽들을 중심으로 펑크와 모던록 등 진화한 음악적 테크놀로지가 펼쳐졌다. 대형 연예기획사의 제작 시스템을 거부하고, 자립적인 소규모 제작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서 지속가능한 음악 생활을 이어가려는 뮤지션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든 결과였다. 이들이 한국 대중음악의 지형을 1990년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지각 변동을 불러왔다.

인디(indie)를 자처했던 이 젊은이들은 당시 확산되고 있던 인터넷의 영향도받았다. 예를 들어 모던록에 바탕을 두고 실험적인 음악을 시도한 ‘델리스파이스’는 PC통신 하이텔 동아리에 모인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결성한밴드이다. 이들의 1집 앨범에실린 곡 <챠우챠우(Chau Cahu)>와 펑크록 밴드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는 홍대 앞을 근거지로 한 새로운 음악 공동체의 출현을 선포했으며, 한국 인디 음악의 탄생과 봉기를 주도했다.

이후 개러지, 모던 록, 하드코어를 비롯해 제각각 다양한 특색을내세운 밴드 음악들은 인디 음악에서 록의 주도권을 분명히 하며 2000년대의음악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 결과 한동안 인디 음악은 인디 밴드 음악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이들 중에서도 수많은스타들이 떠올랐다. 2000년대가 끝나기전에 등장한 ‘검정치마’, ‘브로콜리너마저’, ‘장기하와 얼굴들’은 한국 인디 음악의끓는점이었다. 2010년대의 끝 무렵에는 ‘잔나비,’ ‘혁오’ 같은 밴드들이 축적된 제작 시스템을 기반으로 주류와 인디를 넘나들게 되었다. 이제 국내 인디 밴드들이 동남아시아의 밴드들과 교류하고 구미 지역으로 진출하는 일이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되었다.

인디 음악과 주류 음악은 서로에게 자극받고 배운다. 아쉽게도 현재 록 밴드들이 더 이상 대중음악의 중심축에 서 있지는 않지만, 한국 록은 여전히 진화 중이고, 2020년대의 역사는 아직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2009년 3월, 서울 홍대 앞 KT&G 상상마당 라이브홀에서 인디 록 밴드 장기하(張基河)와 얼굴들(Kiha & The Faces 2008~2018 활동)이 공연하고 있다. 이 그룹은 혁신적인 가사와 멜로디, 말하는 듯한 창법을 선보여 한국의 2세대 인디 음악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코러스를 맡았던 미미시스터즈는 2011년 독립하여 독자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 ⓒ 뉴스뱅크

아쉽게도 현재 록 밴드들이 더 이상 대중음악의 중심축에 서 있지는 않지만, 한국 록은 여전히 진화 중이고, 2020년대의 역사는 아직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한국 흑인 음악의 뿌리

김작가(Kim Zak-ka 金作家) 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캘리포니아 콤프턴과 뉴욕 브롱크스 지역 아프리칸-아메리칸 청년들의 하위문화였던 힙합이 1990년대에 들어 잇단 스타들을 배출하며 R&B가 주도하던 흑인 음악계에서 대세를 차지했다. 이런 흐름은 동시대 한국의 젊은 세대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현재 흑인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클럽 문나이트에서 춤꾼들이 댄스 배틀을 벌이고 있다. 이곳은 1990년대 국내 댄스 가수 1세대를 배출하며 댄스 음악의 태동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 Gramho

문나이트의 로고.

힙합
1980년대 후반, 국내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록이 주류 장르로 득세하며 대표적인 청년 문화로 자리를 잡아갈 무렵 일각에서는 ‘흑인 음악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최신 서구 댄스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이태원의 클럽 문나이트(Moon Night)가 그 발원지였다. 주한 미군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던 이 클럽이 수년 전부터 내국인의 출입도 허용하면서 이곳을 드나들던 젊은 춤꾼들이 디스코, 펑크 같은 정통 흑인 댄스 음악뿐만 아니라 힙합, 뉴잭스윙 등 최신 경향까지 접할 수 있었다.

1990년대를 주름잡았던 방송가의 댄스 가수들이 바로 여기에서 탄생했다. 이 클럽에서 ‘놀던’ 서태지(徐太志)와 아이들은 우리말로도 자연스러운 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한편 전례 없이 역동적인 춤을 선보였다. 이 3인조 댄스 그룹으로 인해 국내 대중음악의 판도가 댄스 음악으로 바뀌게 되자 연예 기획사들은 문나이트에서 이름을 날리는 춤꾼들을 싹쓸이하다시피 해서 데뷔시켰다. 이후 갱스터 랩을 표방하며 만들어진 서태지와 아이들의 4집 음반 수록곡 (1995)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힙합이 본격적으로 한국 가요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PC통신 하이텔의 흑인 음악 동호회 ‘블렉스(Black Loud EXploders)’는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산실 역할을 했다. 그들은 스스로 만든 비트에 랩을 입혀 믹스테이프를 만들고, 일명 ‘삐삐’라 불리던 무선호출기 연결음에 프리스타일 랩을 담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며 함께 즐겼다. 또한 음악 생산뿐 아니라 해외의 힙합 자료를 취합하고 비평하며 국내의 힙합 문화가 성숙해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홍대 앞 라이브 클럽 중 하나인 마스터플랜은 힙합 뮤지션들에게 정기적으로 무대를 제공하며 힙합의 수요 창출에 기여했다.

음악 전문 채널 엠넷(Mnet)이 방영하는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의 한 장면. 2012년 첫 번째 시즌을 시작한 이후 힙합의 인기에 힘입어 매년 방송되고 있다. ⓒ <쇼 미 더 머니> 시즌 8 최종회 장면 캡처

박정현(Lena Park 朴正炫 1976~)은 그룹 솔리드와 함께 1990년대 후반 국내 R&B 열풍을 이끈 주역이다. ⓒ KBS 뉴스 캡처

R&B
힙합이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것과 달리 R&B는 재미교포 출신들의 힘을 빌려야 했다. 작곡가 유영진(劉英振)이 만들고 직접 부른 <그대의 향기>처럼 기억에 남는 내국인의 시도도 있었지만, 초기에 정통 R&B 보컬을 한국어로 소화한 이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자라 한국에서 데뷔한 뮤지션들이었다. 김조한(George Han Kim 金朝翰)을 비롯해 3명의 재미교포로 구성된 솔리드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2집 앨범에 실린 <이 밤의 끝을 잡고>(1995)가 크게 히트하며 정통 R&B가 국내에 안착되었다.

뒤를 이어 역시 재미교포 출신인 박정현(Lena Hyun Park 朴正炫)이 (1998)로 성공적 데뷔를 했고, 그의 활약은 발라드의 중심이 R&B 스타일로 넘어가는 전기를 마련했다. 국내에는 아직 체계적인 대중음악 교육 시스템이 없었기에 바이브레이션을 비롯한 흑인 음악 스타일의 보컬을 국내에서 습득하기는 어려웠다. 반면에 미국에서 성장하며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서구식R&B 창법에 익숙해진 교포들이 보다 정통에 가까운 보컬을 들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브라운 아이즈의 메가 히트 넘버인 <벌써 1년>, 아소토 유니온의 를 통해 흑인 음악은 주류 대중음악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어서 해외 스타일의 모방을 넘어 한국적 정서를 적극적으로 R&B와 결합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미디엄 템포 발라드’라는 이름으로 2000년대 중반 가요계의 대세가 되었다.

마이클 잭슨
아프리칸-아메리칸 음악 스타일을 차용해 멜로디보다는 리듬 중심의 프로듀싱에 치중하는 작곡가들의 시장 진입, 그리고 미디 프로그램의 발달 덕분에 실제 연주로는 커버할 수 없는 사운드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점도 흑인 음악이 국내에 정착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힙합은 EDM(Electronic Dance Music)과 더불어 요즘 K-pop 아이돌의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또한 2010년대 중반부터 힙합 붐을 견인한 TV 오디션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의 인기에 힘입어 힙합 뮤지션들은 음원 차트와 대학 축제의 주인공이 됐다. ‘연탄 음악’이라 불리며 배척받았던 1990년대 이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만 그때도 예외는 있었다. 바로 마이클 잭슨이었다.

돌이켜 보면 마이클 잭슨은 당시 젊은이들의 해방구 이태원의 문나이트에서 바닥이 쓸려나갈 정도로 밤새 춤을 추었던 끼 많은 연예인 지망생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들을 댄스 가수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마이클 잭슨은 한국 대중음악의 지형도에서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서정민갑(SeoJeong Min-gap 徐鄭珉甲) 대중음악 의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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