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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SUMMER

기획특집

한국전쟁과 대중음악: 끝나지 않은 노래 기획특집 1 상실의 시대가 만든 노래들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한반도 전체가 초토화되었던 한국전쟁(1950~1953)은 냉전 시대 최초의 대규모 전쟁이었다. 총 63개국이 군사를 파견하거나 물질적, 재정적 도움으로 참가했고 16개국의 수십만 병사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한국인들에게 이 전쟁은 동족상쟁의 처참한 경험이었고, 그 고통과 상처가 대중가요 속에 녹아들었다.

중국인민군의 연이은 공세에 밀려 철수하던 유엔군은 서울 북방에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1951년 1월 1일부터 1월 4일까지 의정부 협곡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이 전투로 인해 주민들이 몇 가지 살림살이만 챙겨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고 있는 모습이다. 피난민의 애환은 당시 대중가요의 주된 소재였다. ⓒ gettyimages; Photo by Joe Scherschel

한국의 현대 대중가요는 일제 식민 통치가 본격화되었던 1910년대부터 맹아가 싹트기 시작했다. 계급과 지역에 따라 음악의 향유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전근대 환경에서 벗어나 이즈음부터 일본을 통해 도입된 서양 음악의 영향 아래 대다수 민중의 감성과 취향을 반영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노래들이 등장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음반이나 방송 같은 근대 매체와 보다 긴밀하게 결합되면서 사회적 영향력이 더욱 커졌고, 대중문화의 중요한 일부로서 그 위상이 확고해졌다.

시대가 던진 문제에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하고 반응했던 대중가요는 1945년 해방 이전에는 주로 비유를 통해 민족주의를 우회적으로 표출했으며, 일제의 검열 압박 아래 군국가요도 제작, 유포되었다. 20세기 초 외국 자본의 주도 아래 시작되었던 음반 생산 시스템은 일본 본사와 한국 지점으로 역할이 나뉘어졌다.

음반 산업
해방에 이어 민족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 한반도 전체가 매우 혼란스러웠던 1940년대 후반, 남한의 대중가요계가 당면했던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새로운 음반 생산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방송이나 공연은 기반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일본 자본이나 인력이 철수한 후에도 운영 주체를 바꾸어 어느 정도 지속해 나갈 수 있었으나, 음반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기획과 유통, 그리고 부분적인 녹음은 식민지 시기 서울 지점에서도 가능했지만, 음반을 찍어 내는 생산 설비는 일본 본사들만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해방 직후에는 극장 공연이 대중가요 확산의 주요 경로가 되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온전히 한국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진 음반이 첫선을 보인 때는 1947년 8월이었고, 최초의 음반 회사는 고려(Korea)레코드였다. 이 회사가 처음 제작한 음반이 <애국가>였고, 그 후 첫 번째로 내놓은 대중가요 음반이 <가거라 삼팔선> 이었다. 당시 음반 산업의 주목할 만한 움직임 가운데 하나는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도 음반 제작사들이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1948년 부산에서는 코로나(Corona)레코드가 문을 열었고, 1949년 대구에서는 오리엔트(Orient)레코드가 음반 발매를 시작했다. 서울보다 전쟁의 피해가 훨씬 덜했던 지방 주요 도시에 음반 회사들이 있었기에 전쟁 중에도 새로운 노래들이 계속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미 1948년부터 내전에 대한 우려와 공포는 확산되고 있었다. 남북이 각각 미국과 구 소련의 지원 아래 독자 정부를 수립했고 양측 군대의 소규모 충돌이 전쟁 전에도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표된 <가거라 삼팔선>은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던 불안을 가장 잘 대변한 곡이었다. 남북한을 갈라 놓은 북위 38도선의 냉전 장벽이 사라지기를 기원하는 이 노래는 당시 대중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어 분단 현실을 반영한 많은 노래들이 발표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정치적 이슈를 직접 다룬 노래가 많이 만들어졌던 1940년대 후반 한국 대중가요의 특징은 분열의 시대상과 그에 따른 대중의 복잡한 정서에 반응한 결과였다.

1. 1954년 스타레코드가 발매한 유성기 음반 <슈샨보이>. 생활고에 내몰려 구두닦이로 근근이 살아가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담아냈다. ⓒ 네이버 지식백과
2. 오리엔트레코드의 1952년 유성기 음반 <전선야곡(Frontline Nocturne)>. 이 노래는 생사를 오가는 전선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군인의 심정을 묘사했다. ⓒ 이준희(李埈熙)
3. <가거라 삼팔선(Begone, 38th Parallel)>은 해방 이후 한국 자본과 기술로 처음 만들어진 대중가요 음반이다. 1948년 고려레코드에서 발매했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쟁의 전조
음반업계뿐만 아니라 공연 현장에서도 전쟁 조짐은 짙어지고 있었다. 1949년 38선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남북의 소규모 전투에서 희생된 남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대형 뮤지컬 <육탄 십용사(肉彈 十勇士)>가 정책적 지원으로 만들어져 남한 전역 주요 도시를 돌며 상연되었다. 또 이후 전쟁 시기에 대중음악가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는 군예대, 즉 군대 내부의 위문 공연 조직도 1949년에 설립되었다.

전쟁은 일요일 아침에 시작되었고 서울 시민 대다수는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다. 빠르게 진격해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한강 다리들이 남한군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석 달 동안 서울은 북한군 통치 아래 놓였다. <가거라 삼팔선>과 <육탄 십용사>를 만든 작곡가 박시춘(朴是春)도 그 기간 동안 꼼짝없이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에게 체포될 경우 이후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실제 그의 동료이자 라이벌이기도 했던 작곡가 김해송(金海松)은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후퇴 길에 북으로 끌려가면서 죽음을 맞기도 했다.

1950년 9월 남한군과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했고, 기세를 몰아 북한 지역으로 진군했다. 이 상황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노래가 박시춘이 작곡한 <전우야 잘 자라>였다. 군가이면서 동시에 대중가요였던 이 노래는 아이들까지도 모두 따라 불렀을 만큼 큰 인기를 누렸고, 지금까지 전시 대중가요의 대표곡으로 손꼽히고 있다.

연합군이 북한 수도 평양을 점령하고 중국과의 경계인 압록강까지 진격하면서 어쩌면 전쟁이 남쪽의 승리로 연내에 끝날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1950년 10월 중국의 참전은 전세를 급속히 역전시켜 버렸다. 1951년 1월 서울이 재차 함락되었을 때에는 일반 시민은 물론 대중음악가들도 모두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어떤 이들은 바다 건너 제주도로 가서 군예대에 자리를 잡았고, 어떤 이들은 부산과 대구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심지어 밀항으로 일본에 건너간 이들까지 있었다. 이렇게 많은 대중음악가들이 서울을 떠난 뒤, 1951년 하반기부터는 임시 수도 부산과 대구에서 본격적인 전시 대중가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전방으로부터 격전의 뉴스가 전해지던 시기에 만들어진 노래들이었던 만큼 대다수가 전쟁 상황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당연했는데, 그 표현 방식과 영역은 매우 다채로웠다. 예를 들어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전선의 상황과 군인의 심리를 묘사한 <전선 야곡>이 큰 인기를 끌었고, 전선으로 남편을 보내는 여인의 애달픈 마음을 담은 <아내의 노래>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전쟁으로 가족과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비극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 <굳세어라 금순(今順)아>도 전시 대중가요 중 빠뜨릴 수 없는 걸작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전쟁 상황을 사실적으로 진지하게 표현한 곡들이 대거 발표되는 가운데, 조금 다른 각도와 방식으로 시대와 대중의 감성을 담아낸 노래들도 있었다. 생존을 위해 거리로 나선 구두닦이 소년의 시각으로 전시 후방의 일상을 묘사한 <슈샨 보이(Shoeshine Boy)>는 코믹한 기법을 택했고, 전쟁으로 삭막해진 세태의 피로감을 달래기 위한 노래로는 전원 풍경을 그린 <물방아 도는 내력> 같은 곡이 만들어졌다.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싶어 하는 대중의 심리에 좀 더 적극적으로 반응한 작가와 가수들은 아예 비현실적인 이국 분위기를 강조한 <인도의 향불> 같은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일상의 위로
1953년 7월 정전협정으로 포성은 멎었으나 전쟁을 주제로 하는 대중가요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그만큼 당시 대중의 삶이 전쟁의 충격과 피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시 수도 부산을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은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대변했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북한 출신 피난민들의 절망감은 <꿈에 본 내 고향>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런가 하면 전쟁 통에 어디론가 끌려간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참담함은 개인 차원을 넘어 민족의 한이 되었기에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만인의 애창곡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대중가요는 1950년대 내내 전쟁의 아픔을 돌이켰다. 목숨이든 신체 일부이든, 가족이든 고향이든, 그도 아니면 집이든 돈이든, 모두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거대한 상실의 시대가 낳은 슬픈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노래들은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사람들에게 작은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대중가요에 끼친 영향은 이처럼 많은 전시 가요들이 만들어진 것에 그치지 않았다. 전쟁 중은 물론 그 이후로도 수만 명의 미군이 남한에 계속 주둔했기에 이들을 위한 ‘미8군 쇼’가 시작되었고, 여기서 활동한 음악가들과 그들이 받아들인 미국의 대중음악은 1960년대 이후 한국 대중가요의 판도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월북 혹은 납북 음악가들의 수많은 작품들이 금지곡이 되었는데 동서간 냉전 체제가 해체된 19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대중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의 기억이 멀어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전시 대중가요들은 많은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추억의 노래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과 대중가요의 관계는 사실 아직 완전히 규정되지 못한,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역사로 봐야 할 것이다. 초토화된 국토의 참혹한 빈곤은 극복되었지만, 민족의 분단은 지금도 평화를 위협하는 엄혹한 현실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전선의 상황과 군인의 심리를 묘사한 <전선 야곡>이 큰 인기를 끌었고, 전선으로 남편을 보내는 여인의 애달픈 마음을 담은 <아내의 노래>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1950년, 평양에서 철수하는 유엔군이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38선이 상징하는 분단의 상처는 휴전 이후에도 대중가요에 자주 등장한다. ⓒ gettyimages; Photo courtesy by Interim Archives

가거라 삼팔선

작사 이부풍(李扶風)
작곡 박시춘(朴是春)
노래 Nam In-su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련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 리 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탄한다

아~ 꽃 필 때나 오시려느냐
아~ 눈 올 때나 오시려느냐
보따리 등에 메고 넘던 고갯길
산새도 나와 함께 울고 넘었지
자유여 너를 위해 자유여 너를 위해
이 목숨을 바친다

아~ 어느 때나 터지려느냐
아~ 어느 때나 없어지려느냐
삼팔선 세 글자를 누가 지어서
이다지 고개마다 눈물이던가
손 모아 비나이다 손 모아 비나이다
삼팔선아 가거라

https://youtu.be/jqkh26uaMAU

전선야곡

작사 유호(兪湖)
작곡 박시춘(朴是春)
노래 신세영(申世影)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들려오는 종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한수 떠 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

https://youtu.be/ZjjqCRGZXgI

굳세어라 금순아

작사 강사랑
작곡 박시춘(朴是春)
노래 현인(玄仁)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주: 1.4 후퇴를 말함)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天地間)의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춰보자

https://youtu.be/KQazL-qi2_Y

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

작사 반야월(半夜月)
작곡 이재호(李在鎬)
노래 이해연(李海燕)

미아리 눈물 고개 임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세요
어린 용구는 오늘 밤도 아빠를 그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계세요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부디 살아만 돌아오세요, 네?
여보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 년이 가고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한 많은 미아리 고개

https://youtu.be/2Zz77mDiA-U

이준희(Lee Jun-hue 李埈熙) 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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