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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SPRING

기획특집

꿈과 욕망의 둥지, 우리 시대의 집 기획특집 2 아파트, 그리고 중산층의 등장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말이 된 ‘아파트 공화국’은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 (Valérie Gelézeau) 교수가 2003년도에 펴낸 책 제목이다. 한국학 전공자이기도 한 이방인의 눈에 한국의 도심 풍경을 이루고 있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 및 가치관은 낯설고도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는 아파트를 한국의‘압축된 근대화’와 ‘정부-재벌-중산층의 삼각 특혜 동맹’의 상징으로 설명하며 주목을 끌었다. 비판과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기도 한 이 획일적 주거 형태를 들여다본다.

<압구정동>, 전민조(Jun Min-cho 田敏照), 1978.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 서울 압구정동의 모습이다. 논밭과 과수원, 야산이었던 서울 강남 지역에 정부의 주택 보급 정책에 따라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후 불과 10년 만에 일대가 아파트 숲으로 탈바꿈했다. ⓒ 전민조

30평형대 아파트와 중형 승용차를 배경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한때 건설회사의 광고 포스터 속에 흔히 등장하던 이미지였다. 고도성장이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를 가감 없이 보여 줬던 이 이미지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 중후반 서울의 한강 이남 지역으로 시선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이전까지 농지였던 이 지역은 격자형 구조의 현대적 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그 위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세워지고 있었다. 이 아파트들에는 당시 빠른 속도로 성장하던 새로운 계층이 입주했다. 해방 전후인 1940년대에 태어난 대졸 화이트칼라 계층이 그들이었다. 유소년기에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바 있는 그들은 1960년대에 대학 교육을 받았고, 1970년대에는 산업화의 실무자로 성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30대 중반의 연령대를 지나던 1970년대 중후반에 강남 지역에서 아파트 건설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중산층의 출현
이 집단의 구성원 대다수는 지방에서 서울로 입성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그들의 상당수가 안정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며 가족을 꾸리고, 이제 막 내 집 마련에 나서던 때와 겹친다. 이들은 정부의 주택 공급 정책이 제공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족을 이끌고 강남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 새로운 형태의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누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들에게는 ‘중산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77년에 정부가 처음 도입한 분양가 상한제는 이 집단이 강남 이주와 함께 중산층으로 발돋움하는 데 있어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제도는 이후 수차에 걸쳐 상황에 따라 해제와 도입을 반복했는데 당시에는 낮은 주택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아파트를 대량으로 싸게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 덕분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추첨을 통해 분양권을 얻어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들은 시세보다 낮은 금액으로 자기 집을 구매할 수 있었고, 도시 개발로 인해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그 차익으로 아파트의 평수를 늘리고 소비 활동의 폭도 넓혀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중산층 성장 신화’는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를 지탱했던 중요한 버팀목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정부 정책은 건설사들이 새로 아파트를 지을 때 별다른 변화 없이 기존 아파트들의 평면 계획을 답습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부가 정해준 가격으로 분양해야 하는 데다가 짓기도 전에 불티나게 팔리는 까닭에 굳이 변화를 시도할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1980년대 서울의 신시가지를 비롯해 1990년대 분당, 일산, 평촌 등 수도권 신도시에 건설된 대규모 단지들의 아파트 실내 모습은 1970년대에 한국주택공사와 민간 건설사가 실험하고 강남 거주민들이 검증한 평면 계획을 소폭 수정하여 대량 복제해 냈다. 결국 전국 각지의 아파트 거주자들은 지역 특성과는 무관하게 강남 아파트의 평면 계획을 원형으로 삼는 실내 공간에서 일상을 영위해 나가게 된 것이다.

입식 문화의 확산
한편 유사한 평면 구조를 지닌 아파트의 보급은 입식 문화의 확산을 가져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따뜻한 온돌 바닥에 요를 깔고 잤고, 낮에는 요를 걷어 낸 바닥에 앉아 생활했다. 부엌과 화장실이 실내에 배치된 서양식 단독주택에 거주하던 이들조차 안방에서 전통식 낮은 밥상을 받아 바닥에 앉아 식사했고, 아랫목에 앉거나 누워서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각 가정의 방을 ‘안방극장’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 같은 좌식 문화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서울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 덕분에 입식 문화로의 이행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 소파와 탁자, 식탁 세트, 침대 등이 제각각 거실, 주방, 침실로 침투해 옛 가구들과 격전을 벌인 결과였다.

아파트가 가져온 입식 문화의 확산은 당연히 실내의 사물 배치 방식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일반적으로 좌식 문화에서는 손이 닿는 거리 안에 일상 사물을 배치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상(床)은 거주자가 필요에 따라 자신이 앉은 자리로 물건을 옮겨 놓는 데 매우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하지만 입식 실내 공간에서는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사물을 배치해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의자나 소파에 앉았다가 곧바로 일어나 몇 걸음 이동한 후 다시 돌아오는 것이 용이했고, 따라서 앉은 자리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사물을 배치해도 별로 불편할 게 없었다. 입식 공간에서는 손에 닿는 거리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아파트 거주자들은 사물을 배치하는 데 이전보다 좀 더 면밀하게 시각적 질서를 고려하게 되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질서를 조율하는 눈높이도 이전과 달라졌다. 이제 사물은 방바닥에 앉아 올려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의자나 소파에 앉아 수평으로 응시하거나 바로 선 자세에서 내려다보는 시선과 균형을 맞춰야만 했다.

1978년 입주가 시작된 서울 서초동 삼호아파트의 거실. TV, 소파, 탁자 및 그림 액자가 당시 아파트의 전형적인 실내 풍경을 보여 준다. ⓒ 서울역사박물관

현대식 빌트인 가구가 설치된 최근의 아파트 내부. 1990년대 말 시행된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정책은 건설사들 간에 경쟁을 일으켰고, 그 결과 아파트가 고급화되기 시작했다. ⓒ 나인필(NINEFEEL)

달라진 생활 환경
1970~80년대 서울 신시가지의 아파트들이 입식 문화의 보급을 통해 실내 공간을 새롭게 재편했다면, 1990년대 수도권 신도시 아파트들은 대형 마트를 중심으로 쇼핑 문화를 바꾸어 놓았다. 예전 같았으면 하루에 한 번, 오후 나들이 삼아서 동네 재래시장이나 아파트 단지의 상가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주부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반면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신도시는 이와 다른 쇼핑 스타일을 제시했다. 주말이면 가족이 함께 대형 할인매장을 방문해 진열대 사이를 누비면서 다량의 상품을 값싸게 구매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카트를 밀면서 쇼핑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미리 해결해야 할 몇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일단 120리터 용량의 카트를 가득 채웠던 상품들을 바구니나 가방에 나누어 담아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자가용이 없으면 사실상 운반이 불가능했다. 집에 도착한 후에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갖가지 식자재와 냉동 식품, 과일, 음료수를 보관하려면 좀 더 큰 냉장고가 필요했다. 이처럼 새로운 쇼핑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자가용과 대용량 냉장고가 필수적이었고, 이는 자동차 업계와 가전제품 업계의 호황으로 이어졌다.

경기도 일산 신도시에 위치한 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 내 정원이다. 연못과 석가산, 값비싼 조형물 등을 이용한 조경 시설이 최근 아파트를 고급화, 차별화하는 핵심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 청람조경

고급 아파트의 출현
아파트를 매개체로 삼은 현대적 일상 생활의 확산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근본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 신호탄은 분양가 상한제의 폐지였다. 경제 불황으로 위기에 빠진 건설업을 구제하고자 정부는 분양가 상한제를 폐지하고 분양가 자율화 정책을 시행했고, 민간 건설사들은 이와 보조를 맞춰 아파트의 형질 전환을 시도하면서 대형화·고급화의 실험을 거듭했다. 용인 등 수도권 외곽 신도시에서 시작된 이 실험은 서울 대치동과 분당 정자동의 주상복합 아파트로, 그리고 강남 지역 대규모 재건축 단지로 옮겨가면서 ‘포스트 강남’이라고 불릴 만한 일련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

이 과정에서 자산 시장의 구조 변동과 함께 빠른 속도로 상승하던 평당 분양가는 아파트 실내 공간을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우선 신축 아파트의 거실과 주방이 계속 커졌고, 빌트인 가구가 보편화되었으며, 인테리어 마감재가 고급화되었다. 건설 자재의 유해 화학물질로 인해 아토피 피부염 같은 새집증후군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지만, 대세를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양문형 냉장고, 김치냉장고, 유럽형 드럼 세탁기, 아일랜드형 부엌 등이 한층 넓어진 주방에 들어섰고, 출처가 불분명한 유럽풍 앤티크 가구나 젊은 아티스트들의 회화 작품이 거실 구석이나 현관 복도 한 곳을 차지했다. 거실이 커진 만큼 텔레비전 화면 크기 역시 커졌다. 청소는 혼자 알아서 움직이는 로봇 청소기의 몫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정점은 프리미엄 냉장고의 출현이었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1935~2010)이 디자인한 우아하고 로맨틱한 분위기의 문양을 제품의 표면에 적용해서 큰 성공을 거둔 이후 가전업체들은 ‘아트 가전’이나 ‘패션 가전’을 표방하며 갖가지 문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보석이나 인조 가죽이 동원되기도 했고, 이탈리아의 아방가르드 디자이너와 협업을 하기도 했다. 이런 변화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유명한 모던 디자인의 명제를 “형태는 평당 분양가를 따른다.”로 대치하기에 충분했다.

호화로운 조경 시설
200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실내 공간에만 집중되었던 변화의 흐름은 강남 아파트 재건축을 계기로 단지 내 야외 공간으로 향했다. 이전까지 지상 공간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던 주차장은 지하로 내려갔고, 지상에는 화려한 조경이 갖춰진 공원이 들어섰다. 생태 연못과 구름다리, 석가산과 실개천, 야외 쉼터와 어린이용 카약장, 수천 그루의 관상수로 치장된 산책로 등이 꾸며졌다. 외부와 분리된 이 아파트 단지 야외 공간은 건설사들이 리조트를 구성하는 탈일상적 조경 시설물들을 단지 내에 적용한 결과였다.

21세기 첫 10년의 자산 시장 열풍과 소득 양극화는 분양가 자율화 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견인해 낸 핵심 동력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중저가 해외 가구 브랜드들이나 인테리어 용품 브랜드들이 국내 시장에 상륙해 아직 자신의 집을 구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것도 주목할 만하다.

아파트와 승용차로 상징되던 한국 중산층의 20세기는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난 세기에 정부가 추진한 아파트 공급 정책의 성과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현재 전체 주택 중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60%를 넘어섰으니 말이다.

정부 정책은 건설사들이 새로 아파트를 지을 때 별다른 변화 없이 기존 아파트들의 평면 계획을 답습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부가 정해준 가격으로 분양해야 하는 데다가 짓기도 전에 불티나게 팔리는 까닭에 굳이 변화를 시도할 필요도 없었다.

행정 중심 복합 도시로 2010년부터 민간 기관과 정부 부처가 이전을 시작한 세종특별자치시에 고층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2016년 전국의 주택 중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60%를 넘겼고, 아직도 해마다 신축 아파트 공급량이 늘고 있다. ⓒ imagetoday

하나의 아파트, 32개의 거실

박해천(Park Hae-cheon 朴海天) 동양대 디자인학부 교수

정연두(Jung Yeon-doo 鄭然斗) 작가의 가족사진 연작 <상록타워>(2001)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32세대 가족들을 소재로 한다. 동일한 구조의 공간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보았는가.

작품의 무대가 된 상록타워는 1996년 서울 광장동에 완공된 아파트로, 포스코의 직원용 임대 아파트 용도로 지어졌다. 준공 당시 기존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와는 달리 국내 최초로 건물 뼈대를 철골로 구성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건설 기술이 적용된 알루미늄 커튼월 외벽의 25층짜리 고층 아파트였지만, 사진 속에 등장하는 거실 구조는 기존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록타워>, 정연두(Jung Yeon-doo 鄭然斗), 2001 슬라이드 32장 중에서 6장면.

평면적 질서
일단 눈에 띄는 것은 거실 인테리어가 임대용 아파트의 속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32가구 모두 천장 조명이 동일하고, 벽지까지 똑같다. 아마도 완공 당시의 인테리어에 입주자들이 손을 대지 않은 모양이다. 차이는 등장인물과 가구, 그리고 가재도구에서 시작된다.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동일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만 천차만별이다. 여기에서 아파트 임차인들의 특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집 주인이 되지 못한 이들이 실내를 꾸밀 수 있는 대상은 움직일 수 있는 세간살이에만 국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세간들로만 차별화된 사진 속 모습들은 은연중에 한국 아파트가 공유한 매우 중요한 질서를 내비친다. 그것은 바로 ‘거실의 시각적 질서’이다.

여기서 1970년대 후반 문학평론가 김현(金炫 1942~1990)이 쓴 에세이 『우리 시대의 문학/두꺼운 삶과 얇은 삶』의 한 대목을 돌이켜 보자. 거기에서 그는 한강변에 건설된 초창기 단지형 아파트에 거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아파트 실내 공간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물은 아파트에서 그 부피를 잃고 평면 위에 선으로 존재하는 그림과 같이 되어 버린다. 모든 것은 한 평면 위에 나열되어 있다. 그래서 한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아파트에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같이 자신을 숨길 데가 없다. 모든 것이 열려 있다. 그러나 그 열림은 깊이 있는 열림이 아니라 표피적인 열림이다.”

즉, 아파트의 실내 공간에서 사물들은 자신을 숨길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숨을 곳이 없으니 모든 걸 내보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시선은 전지전능한 힘을 발휘하는데, 그 힘이 최고조로 표출되는 공간이 바로 거실이다. 거실의 사물들은 현관에 들어선 사람의 시선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무장 해제를 당하고, “평면 위에 선으로 존재하는 그림”처럼 정체를 드러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거실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베란다 창의 역할이다. 거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동적으로 베란다 창을 향하게 되는데, 베란다 창이 시선의 맞은편에 자리한 데다가 실내를 비추는 채광 기능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창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거실을 한눈에 드러나게 만드는 일종의 ‘소실면’의 역할도 해낸다. 베란다 창의 네 꼭짓점에서 뻗어 나온 직선들이 구석의 모서리를 따라 움직이면서 거실을 응시하는 시선을 투시도적 질서로 구획한다. 그런데 그 질서는 깊이가 없고 표피적이다. 소실점이 아니라 소실면이 작용한 결과다.

그러나 저마다 다른 삶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축된 거실의 시각적 질서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한 차례 큰 변화를 겪었다. 거실이 텔레비전 전용 극장과 같은 모양새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단독주택에서 텔레비전은 주로 안방에 놓였다. 하지만 입식 문화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텔레비전은 안방이 아니라 거실에 놓이는 사물로, 방바닥이 아니라 소파에 앉아서 보는 제품으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아파트에서 텔레비전은 베란다 창과 직각으로 교차되는 거실의 한쪽 벽면에, 그리고 소파는 그 맞은편 벽면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정연두 작가는 사진의 프레임 안에 바로 이런 진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아파트 거실의 독특한 질서를 담아낸다. 천장 조명과 벽지로 구성된 동일한 배경의 레이어와 텔레비전 극장의 형식으로 배치된 사물들의 레이어, 이 두 개를 기본으로 하되 그 위에 제각각 포즈를 취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연출한 가족들의 레이어를 배치한다. 그리고 세 겹의 레이어를 팝업 북의 그림처럼 펼쳐 보인다.

그리하여 세 개의 레이어는 ‘원래의 부피를 잃은 채로’ 납작하게 나열된다. 김현은 아파트야말로 한국 중산층의 사고방식 그 자체라고 말한 바 있다. 정연두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한 가지 명제를 보탠다. 한국인들에게 아파트는 남들과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리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연출하는 스위트홈의 무대이자 행복의 미장센이라고 말이다.

추억을 기록하다

이인규(Lee In-kyu 李仁圭) 『안녕, 둔촌 주공아파트』(Hi-Bye, Dunchon Apartments) 편집장

서울의 동남쪽 끝자락에 위치했던 둔촌 주공아파트에서 태어나 17년간 살았던 한 ‘아파트 키드’가 있었다. 그는 재건축으로 인해 사라지게 될 자신의 고향을 추억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2013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6년 동안 네 권의 책이 되었다. 그리고 이 아파트는 2019년 12월 지상에서 영영 모습을 감추었다.

1980년에 완공된 둔촌 주공아파트는 당시 정부가 추진한 대규모 주택 공급 정책의 일환으로 탄생했다. 18만 평이 넘는 광활한 부지 위에 10층 이하의 낮은 아파트가 줄지어 있어 ‘성냥갑 아파트’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곳은 참 아름다웠다.

건물이 들어선 면적보다도 더 넓은 잔디밭과 언덕이 아파트 사이사이에 펼쳐졌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숲속을 산책하는 듯했다. 아파트 앞에 놓인 의자나 놀이터 벤치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나와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유롭고 평온한 동네였다.

1980년에 완공된 서울 둔촌주공아파트에서는 약 18만 평 부지에 143개동 총 5,930세대가 살았다. 2017년 재건축이 확정되어 2019년 말에 철거가 완료되었고, 현재 이곳에는 2022년 완공 예정으로 총 10,032세대의 ‘미니 신도시’가 들어서고 있다. ⓒ 라야(Raya)

나의 고향
나는 작고 동글동글한 발바닥으로 잘 넘어지던 어린 시절부터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렸다. 집 근처 놀이터에서 친구 사귀는 법을 배웠고, 그 친구들과 함께 단지 안에 있던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하굣길엔 집에 가방을 던져놓고 빨리 다시 나와서 놀 궁리만 했고, 엄마가 7층에서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저녁밥을 먹으라며 부르기 전까지 집 근처 잔디밭과 놀이터를 쏘다녔다.

때론 우리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동에 사는 친구들 집에 놀러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거실 밖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매번 새로웠다. 이 거대한 단지는 아무리 다녀도 새로운 길이 계속 나타났던 커다란 놀이터였다.

동네 풍경은 계절이 바뀔 때에도 매번 달라졌다. 봄이면 집 뒤편 언덕에 노란 산수유 꽃이 제일 먼저 피었고, 이어서 새하얀 목련과 벚꽃이 차례로 만발했다. 조금 지나면 엄마와 잔디밭에 쪼그려 앉아 쑥을 캤고, 캐낸 쑥을 동네 방앗간에 가져가 떡을 만들어 이웃과 나눠 먹었다. 얇은 외투만 입어도 춥지 않을 정도가 되면 라일락과 아까시나무 꽃이 피어나 온 동네에 짙은 향기가 가득했다. 그즈음부터 저 멀리서 개구리 소리가 들리다가 한여름 매미 소리를 지나 가을이 오면 계절의 음향은 귀뚜라미 소리로 이어졌다. 그렇게 반복되는 계절의 순서를 배우며 자라는 동안, 작고 앙상했던 나무들도 나이테를 더하며 우리와 함께 자라났다. 고등학교 때 이사를 간 후 서른 살이 넘어 동네를 다시 찾았을 때 그 나무들은 5층 아파트를 훌쩍 넘는 거목으로 자라나 있었다.

1. 봄 기운이 무르익은 둔촌아파트 마당에 박태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웠다. ⓒ 류준열(Ryu Jun-yeol)
2,3,4. 둔촌아파트는 계절마다 갖가지 나무와 꽃들로 새로운 풍경을 선사했다. 맨 아래 사진 눈 덮인 놀이터에서 이 글의 필자 이인규 씨(배경의 빨간 옷차림)가 어린 시절 오빠와 함께 놀고 있다. ⓒ 이인규(Lee In-kyu)

거주성과 사업성
둔촌 주공아파트 단지 안에서 숲이 커지는 동안 단지 밖에는 건물들이 빈틈없이 빡빡하게 자라났다. 서울이 가득 차 버리자 주위에 신도시를 만들며 바깥으로 영역을 확장했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것들이 수도권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다가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은 후 신자유주의에 휩쓸린 한국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사람들은 손쉽게 돈을 벌어들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갖고 싶어 했고, 아파트 재건축은 그 꿈을 이루어 주는 마법의 열쇠였다. 낮고 오래된 아파트를 부수고 더 높은 아파트를 만들면 세대 수가 늘어난 만큼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고향도 그런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지어진 지 20년이 조금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재건축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2003년에 재건축추진위윈회가 설립되었다. ‘거주성’의 관점에서 보면 넓은 부지 위에 충분한 간격을 유지하며 낮게 지어진 이 아파트 단지는 살기에 매우 쾌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사업성’이라는 관점으로 재건축을 추진하는 이들에겐 다르게 읽혔다.

서울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낮은 밀도로 지어진 이 아파트 단지는 재건축을 했을 때 그만큼 수익성이 큰 땅이었던 것이다. 재건축 조합이 설립된 이후 아파트 단지는 빠르게 늙어갔다. 재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라도 낡아 보여야 했고, 사람들은 자신의 집과 동네를 돌보던 손길을 점점 내려놓았다. 재건축은 엄청 느리지만 착실하게 한 단계씩 진행되어 갔다.

프로젝트의 시작
둔촌 주공아파트의 재건축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성장기의 모든 기억이 담긴 나의 고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그곳에 살았던 수많은 이들이 함께한 시간, 추억, 관계마저도 함께 증발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작은 기록이라도 남겨 놓고 싶었다. 그래서 2013년, 나는 작은 독립 출판물과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 ‘안녕, 둔촌 주공아파트’라는 이름의 일을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나는 “이 아파트 단지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며, 사랑하는 이곳을 떠나보내는 것이 아쉽고 슬프다.”라는 이야기를 처음 꺼냈는데 예상 외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한 번도 입을 모아 함께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을 뿐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아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질 동네를 기록하는 작업은 계속 이어져서 지금까지 4권의 책이 만들어졌고, '집의 시간들(A Long Farewell)'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되었다.

둔촌 주공아파트의 상징과도 같았던 거대한 미끄럼틀이 사라지기 전날 밤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불꽃놀이를 하며, 그동안의 고마움을 서로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이주가 얼추 끝나가던 2017년 가을, 철거가 시작될 즈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로부터 2년여 후 이 거대한 아파트 단지는 멸종된 공룡처럼 사라졌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박해천(Park Hae-cheon 朴海天) 동양대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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