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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PRING

기획특집

근대로 가는길: 20세기 여명 속의 한국 기획특집 3 근대의 문을 열고 나온 여성들

남녀의 사회적 역할을 구분하고 차별했던 유교적 금기와 속박에서 벗어나 서양식 교육을 받은 소수의 신여성들은 근대를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간 시대의 상징이었다. 이들은 옷차림과 머리 모양으로 새로운 풍속을 이끌었고, 남성과 대등한 권리를 누리며 자신이 선택한 남성과 사랑하고 결혼할 수 있는 자유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모험은 흔히 비극적 운명을 맞기도 했다.

외출하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근대’는 교육의 기회와 함께 자신의 의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지만, 그러한 권리를 마냥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사상으로 삶의 변화를 추구했던 신여성들에게는 대개 비난과 좌절이 잇따랐다.

근대 한국의 대표적 풍자 소설가 채만식(1902~1950)은 기차 안에서 있었던 한 여성과의 만남을 묘사한 단편으로 문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1924년 주요 문예지에 「세 길로」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이 소설은 별다른 스토리 없이 오직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보얗게 선선하게 차린 여학생’과 자주 눈이 마주친, 요즘의 시각에서는 사건이랄 것도 없는 상황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젊은 남성이 생면부지의 여성과 가까이 앉아 긴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런 경험을 제공하는 기차라는 근대적 공간은 소설의 소재가 될 만큼 아주 특별했다. 게다가 그 여성은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소위 ‘신여성’이었다.

주인공 청년은 이 여성을 “적삼도 희고 치마도 희고 속옷도 희고 무릎까지 올라온 양말도 희고 분 바른 얼굴도 희고, 다만 뾰족한 뒷굽 높은 구두와 맵시 있게 늘쩡늘쩡 땋아 내린 탐스러운 머리채만 새까맸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당시 사회에서 극소수 그룹에 속했던 여학생과 가까운 거리에서 두어 차례 눈길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던 청년의 심경 묘사에 당대 문단은 ‘등단’이라는 영예를 안겨 주었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학생과의 접촉은 이처럼 희귀하고도 특별한 ‘사건’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개화기 조선을 무대로 한 최근의 인기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양반집 딸인 주인공이 장옷을 벗어 던지고 서양 여교사의 학당에서 영어를 배우지만, 191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 여성이 학교에 다니는 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다.

1926에 발행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이팔청춘』은 대성서림(大成書林) 발행인이자 편집자였던 강은형(姜殷馨) 의 연애 소설이다. 이 시기에는 자유 연애 사상이 새로운 풍속으로 확산되면서 연애를 주제로 한 소설들이 널리 유통되었다. © 올댓북

기차에서 만난 여학생
1886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여성 교육 기관인 이화학당이 서울 정동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1910년대까지도 학생 모집은 쉽지 않았다. 교사들이 집집마다 찾아가서 “제발 따님이나 누이가 있으면 학교로 보내 주십시오. 돈 한 푼 아니 받고 공부시켜 드립니다”라고 애원하며 학생을 모집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1919년 3.1독립운동에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 가담한 사실이 알려진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크게 늘어 이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여학생 수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1923년 중등학교 여학생은 공사립 도합 7개교를 통틀어 1,370명이었다. 이는 전체 여성 인구의 0.6% 정도였고,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는 여학생은 이보다도 훨씬 적은 0.03%에 불과했다.

이처럼 극소수에 불과했던 여학생들은 세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이들은‘신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여성은 무엇보다 외양에서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짧은 치마와 굽이 높은 구두, 검정 우산과 유행에 따라 바뀌는 헤어스타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위생과 활동성을 위해 한복 치마 길이를 종아리 정도까지 줄인 검정 통치마와 흰 저고리는 이화학당과 정신여학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복으로 채택하여 당시 여학생의 상징이 되었다. 검정 우산은 종래의 쓰개치마 대용으로 얼굴을 가리는 데 쓰였는데, 점차 밝은 색 양산으로 바뀌면서 장신구가 되었다. 양산뿐 아니라 구두, 양말, 허리띠, 목도리, 손수건, 안경 등의 소품들이 유행에 따라 바뀌며 신여성들의 사회적 신분과 위상을 나타냈다.

특히 헤어스타일은 신여성을 규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머리 둘레를 부풀린 다음 뒤통수에 동그랗게 쇠똥처럼 묶었다 하여 일명 ‘쇠똥머리’라 불렸던 일본식 히사시가미와 이를 개량한 트레머리, 그리고 1920년대 중반에 다시 유행했던 한국식 전통 댕기머리, 다리꼭지라는 이름의 가짜 머리 등 머리 모양의 변화도 다양했다.

여기에 더욱 과감한 단발을 여성 해방의 신호로 받아들인 여성들도 나타났다. 단발은 경제적, 시간적, 위생적인 편의로 인해 신여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머리가 생명인 여자의 아름다움을 앗았다”는 이유로 질색하는 남성들도 많았다.

이처럼 신여성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또 타인에게도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살고자 함으로써 스스로를 ‘구(舊)’와 구분되는 ‘신(新)’으로 확립하고자 했다. 통치마와 뾰족 구두는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연애를 하고, 피아노를 갖춘 문화 주택에서 신식 가정을 꾸려 남편과 대등한 권리를 나누고, 새로운 사상으로 미래 세대를 교육하고자 했던 신여성들의 소망을 담은 문화적 표상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이들의 소망을 쉽게 긍정하고 수용했던 것은 아니다. 여학생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신여성의 차림이 화제가 되면서 비난의 목소리 또한 높아졌다. 당시 신문과 잡지는 이들의 ‘사치와 허영’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 시절 구두 한 켤레 값이 쌀 두 가마 값에 가까웠다고 하니, 외양을 꾸미는 데 드는 비용이 실제로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봄의 가락>, 김인승, 캔버스에 유채, 147.2 × 207 ㎝.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김인승의 대표작이다. 두 폭의 대형 캔버스에 첼로 연주를 감상하는 신여성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 한국은행

동경과 비난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학교뿐만 아니라 거리, 음악회, 강연회, 극장, 공원 등 공적 공간으로 여성들이 진입하게 되었다. 이처럼 여성들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자 학교 측은 엄격한 규율로 여학생들을 통제하고자 했다. 허가 없이 활동사진을 보러 극장에 가거나 음악회에 가는 일을 금지했다. 외출할 때는 가족이나 다른 학생과 동행해야 했고, 교과서를 제외한 잡지나 서적을 소지할 때는 학교에 신고를 해야 했다. 또한 하숙은 문란하다 하여 기숙사 생활을 강력히 권고했고, 심지어 편지 왕래도 엄격하게 제한했다.

‘풍기 문란’이라는 모호한 용어가 유행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즈음이다. ‘바람의 기운’을 의미하는 풍기라는 말이 묘하게 쓰였다. 사치스런 옷차림을 하거나 카페, 요리점에 드나드는 행위도 풍기 문란이었고, 수업을 빼먹고 영화를 보러 가는 일도 여기에 속했다. 가장 위험한 풍기 문란 행위는 남녀 교제였다. 부모의 허락 없이 남학생을 만나고 교제하는 일은 퇴학에 해당하는 ‘악행’으로 규정되었다. 여학생들은 정신적으로 취약하고 미숙한 존재들이니, 충동과 유혹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 모든 규율의 토대였고, 이 같은 생각의 근저에는 여성을 성적 순결이 중요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남성 중심적 관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통치마와 뾰족 구두는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연애를 하고, 피아노를 갖춘 문화 주택에서 신식 가정을 꾸려 남편과 대등한 권리를 나누고, 새로운 사상으로 미래 세대를 교육하고자 했던 신여성들의 소망을 담은 문화적 표상이었다.

여학생을 엄격한 규율로 통제하려 했던 이유는 신여성이 표상했던 근대가 상대적으로 화려하고 가시적인 것이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1920~3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 국가를 이루는데 실패하고 식민지적 근대화에 복속되어 굴절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신여성들이 지향하는 이상과 삶은 암울한 주변의 현실과 크게 달라 보였다. 여학생들을 향한 동경과 비난의 이중성 속에는 근대 국가 건설의 당당한 주체가 되지 못했던 지식인 남성들의 양가적 감정이 숨어 있었다. 그들에게 여학생은 근대성의 상징인 동시에 ‘방종하고 천박한 가짜 근대’의 위험하고 불순한 표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3.1운동으로 투옥되었던 수피아여학교(Jennie Speer Memorial School for Girls) 학생들 중 일부가 출옥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수피아여학교는 여학생들의 근대화된 교육을 위해 1908년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이 전라남도 광주에 설립한 학교이다. 전국적으로 여학생 수는 많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여학생이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 수피아여고

연애와 자살
근대 이전의 조선 사회에서는 결혼이 전적으로 부모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고, 개인이 자유 의사에 따라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영어 ‘love’의 번역어로 일본에서 유입된 신조어 ‘연애’는 당사자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서양의 결혼 방식을 전파하는 어휘로서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연애는 부모가 중개하는 결혼을 거부하고 자유 의지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새로운 풍속으로 일종의 사회적 붐을 일으켰다. 그것은 빈부, 귀천, 학식의 차이를 초월하는 고귀한 감정으로 간주되었으며, 청년들이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관념적 기제가 되었다. 따라서 연애의 실천이 계몽적 삶의 실천과 동일시되는 독특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연애라는 ‘신사상’을 접하게 될 무렵에 많은 청년 지식인들은 이미 과거의 관습에 따라 부모가 정해 준 여성과 혼인을 한 상태였다. 이들은 부모가 정해 준 아내와의 혼인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여성과 살기를 원했다. 급기야 학교 내에 ‘이혼 동맹회’ 같은 동아리가 결성되고 혼인 무효화 운동까지 일어났다.

원하는 대로 이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스스로 선택한 여성과 동거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연애와 자유 혼인이 계몽적 삶을 실천하는 하나의 길이라는 신념이 자리 잡은 이상, 그들에게 조강지처를 버리거나 마음에 드는 여성과 동거를 하는 일은 너무도 정당한 사회적 실천이었다. 혼인하지 않고 동거하는 여성들은 ‘제2 부인’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런 풍조는 신여성이나 구여성들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

현실과 이상의 현격한 불일치 앞에서 청년들은 더욱더 강렬한 열정으로 자아의 순수성을 확인하려 했다. 격앙된 기대와 격정은 종종 자살이라는 과격한 행동으로 치달았다. 1920년대 중반부터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정사(情死)’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맥락이 숨어 있었다. 1923년 쥐 잡는 약을 먹고 사랑하는 남자의 무릎 위에서 숨을 거둔 23세 여성 강명화 사건이 신문과 잡지에 대서특필되었다. 기생이었던 강명화가 부호의 아들 장병천과 사랑에 빠졌으나 그의 가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장병천은 한때 그녀를 데리고 일본으로 도피하기도 했으나 동료 유학생들 사이에서 조선인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질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뒤를 이어 장병천도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등진 이후 강명화의 이름은 연애의 순결한 정신을 칭송하는 대명사로 대중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었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여러 편의 소설로 쓰여지고 노래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26년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배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함께 세상을 떠난 김우진과 윤심덕의 경우는 강명화 사건보다도 더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두 사람은 모두 29세로 같은 나이였는데, 김우진은 도쿄에서 예술을 공부하던 조선 유학생들이 1920년 조직한 극예술협회 발족에 참여했던 근대 연극의 선구자였으며, 윤심덕은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 이름이 높았던 당대 명사였다. 이미 여러 염문을 뿌리고 있었던 음악계의 스타와 처자식을 둔 유망 작가의 동반 자살에는 사회적 지탄이 퍼부어졌다. 기생 신분이었던 강명화와 달리 윤심덕에 대해서는 대중의 시선이 너그럽지 않았다.

안타까움과 동경의 시선을 받든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되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젊은 남녀들의 이어지는 자살 사건은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192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면 때로 하루에 서너 건씩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다. 이는 감정의 자유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망이 열악한 환경에 부딪히면서 빚어낸 비극적 결과였다. 연애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며 크게 확산되었던 초창기 한국 근대 소설들은 이 시기 젊은 남녀들의 죽음을 다양한 양상으로 보여 주었다. 이를테면 이광수(1892~1950)의 「윤광호」(1918)에서는 보답받지 못하는 감정 때문에 죽고, 나도향(1902~1926)의 『환희』(1923)에서는 잘못된 선택을 속죄하기 위해 죽고, 방정환(1899~1931)의 「그날 밤」(1921)에서는 애인의 배신 때문에 죽었다.

죽음은 연애라는 이상 앞에 자아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방법인 한편 역으로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에 항거하는 강력한 저항의 표출이기도 했다. 완전한 사랑에 대한 믿음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현실의 여러 문제들과 부딪히면서 청춘들은 죽음이라는 왜곡된 형식으로 주체성의 절정을 맞았던 것이다.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김우진은 대학 시절부터 희곡을 쓰고 연극을 연출했다. 1926년 자살한 해에 쓴 「난파」는 유교적인 가족 구조 속에서 서구 사상을 습득한 젊은 시인이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작품이다.

윤심덕은 한국 최초로 서양 음악을 전공한 여성 성악가이자 배우이다. 경성에서 열리는 많은 음악회에 출연 초청을 받을 만큼 스타였다. 히트곡 <사의 찬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한 그녀가 죽음을 결심하고 직접 가사를 썼다고 전해진다. © 중앙일보사

미완성의 꿈
박완서(1931~2011)의 자전적 소설인 「엄마의 말뚝」(1979)에서 어린 ‘나’는 신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열망과 강제에 시달린다. “신여성이 뭔데?”라는 나의 질문에 엄마가 들려주는 첫 대답은 외양에 대한 묘사였다. 즉, 신여성은 ‘머리를 쪽을 찌는 대신 히사시가미로 빗어야 하고, 옷도 종아리가 나오는 까만 통치마를 입고, 뾰족 구두 신고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여성’이라는 것이다. 다홍 댕기에 노랑 치마를 두르고 꽃신을 신고 싶었던 어린 딸에게는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는 차림이었다. 딸은 다시 묻는다.

“신여성은 뭐하는 건데?”

이번에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보이던 어머니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란다.”

식민지 말기, 바느질 솜씨 하나에 의지하여 오직 자식을 교육시키겠다는 열성 하나만으로 시골에서 서울로 이주한 어머니가 꿈꾸었던 딸의 미래는 그런 것이었다. 우리 사회가 근대라는 이름의 서양 문물을 처음 접하고 생활과 인식의 격변을 겪었던 시절, 오랜 관습을 뒤로 하고 규방을 나섰던 여성들이 희망하고 꿈꾸었던 미래도 그러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드디어 해방을 맞고 전쟁의 참화를 거쳐 눈부신 경제 성장과 사회적 발전을 이룩한 오늘날, 여성들의 현재는 그 어머니들의 꿈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간 것일까.

김지영(Kim Chi-young 金芝英) 대구가톨릭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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