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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18 WINTER

기획특집

K-뷰티: 세계 여성을 사로잡는 한국 화장품,
그리고 한국인의 미의식
기획특집 2 옛 그림 속 여성들의 미의식

얼핏 생각하면 K-뷰티는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이나 미적 형식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이 한복 차림으로 고궁 나들이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전통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고구려(37 BC~AD 668) 고분 벽화와 조선(1392~1910) 후기 풍속화는 한국 여성들의 전통적 미의식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단서이다.

중국 동북부 지린성 퉁거우 지역에 있는 5세기 고구려 시대 고분인 무용총 벽화의 일부분이다. 상차림을 준비하는 두 여인은 키가 크지 않고 턱이 둥근 얼굴형인데, 순박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이태호 제공

4~6세기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많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묘사된 여성들은 왕비와 귀족을 비롯해 무용수, 악사, 시녀 등 신분이 다양하다. 이들 여성 중 북한 황해남도 소재 안악 3호분의 왕비와 궁중 여인을 제외하고는 뚱뚱한 사람이 드물다. 벽화 속 여인들은 대체로 키가 크지 않고 체형이 아담하며, 턱이 둥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벽화에 등장하는 상류층 여인들이 비록 당당한 자태에 호사스런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그리 멋지게 그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벽화를 그렸던 화공들은 오히려 서민층 여성이나 어린 소녀들을 더 돋보이게 묘사했다. 그리고 이들의 이미지를 모티브 삼아 하늘의 비천상이나 일월상에 고구려인의 이상적 여성미를 표현해 놓았다.

미스 고구려
이 여인상들 가운데‘미스 고구려’의 으뜸은 중국 동북부 지린성 퉁거우 지역의 5세기 고분인 무용총 벽화에서 만날 수 있다. 찻상과 음식상을 들고 부엌문을 나서는 두 여인이 그 주인공들이다. 앞쪽 여인은 다리가 달린 소반을, 뒤쪽 여인은 평반을 들고 뒤따른다. 겉옷은 검은 물방울무늬가 찍혀 있는 흰색과 붉은색의 두루마기 형태이다. 그 밑으로 흰 주름치마와 붉은색 바지가 살짝 드러나고, 버선 같은 모양새의 신발을 신었다. 맵시 있는 차림새이다. 두 여인은 하체가 튼실하고 키가 작으며, 둥글납작한 얼굴에는 순박한 표정이 어려 있다. 머리를 뒤로 묶거나 올린 매무새로 보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이 여성들은 건강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나는 2006년 5월 남북한 공동 고분 벽화 학술 조사에 참여했을 때 평양 지역의 수산리 고분 벽화에서 청순한 고구려 소녀를 만난 적이 있다. 무덤 주인 부부가 가족과 함께 교예를 구경하는 장면 가운데 부인의 양산을 받쳐든 시녀가 바로 그 소녀다. 벽화가 심하게 손상되어 분명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달걀형의 갸름한 소녀 얼굴은 오늘날의 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치 달밤에 활짝 핀 하얀 박꽃처럼 아리따운 미모였다. 그 소녀를 통해 나는 당시 고구려인들이 여리고 참한 소녀의 모습을 기준으로 여성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추구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북아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 남자들의 기백은 사실 여성이 키웠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고구려에는 강한 여성들이 많았는데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어머니 유화, 주몽의 부인 소서노, 서민 출신 온달을 남편으로 삼은 평강공주, 당나라와의 전쟁에 참여하여 기상을 떨친 연개소문 장군의 여동생들인 연개소영과 연개소진 등이 유명하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 여인들은 억셀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이와 달리 벽화 속 여인들은 섬세하고 유연한 선묘법과 색감을 통해 단아하게 묘사되고 있다.

<단오풍정>, 신윤복(1758~c. 1814), 18세기 후반, 지본채색, 28.2 × 35.6 cm. 조선 후기 관료이자 도화서 화원 신윤복이 그린 풍속화이다. 음력 5월 5일 단오를 맞아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 여인들의 모습을 유려한 솜씨로 아름답게 표현했다. 국보 제135호. Ⓒ 간송미술관

5세기 후반 고구려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 지역의 수산리 고분 벽화 중 일부이다. 여주인에게 양산을 받쳐 주고 있는 어린 시녀의 얼굴이 매우 아름답고 청순하다. 이태호 제공

투피스 차림의 여인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건립된 평안남도 남포시 소재 쌍영총과 강서군의수산리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전반적으로 이전 시기보다 훨씬 선묘가 가늘어지고 부드러워졌다. 이보다 앞선 퉁거우 지방의 여성들보다 한층 장식성이 두드러지고 세련된 모습이다. 이런 변화는 의상에서도 확인된다. 이들이 입은 주름치마는 겉옷 두루마기와 마찬가지로 아래로 넓게 퍼진 사다리꼴의 전형적 A라인 스타일로 직선적 단순미가 돋보인다.
고구려 시대의 의상은 간편함이 돋보인다. 특히 서민 여성들의 옷은 질박하면서도 우아한 맵시로 일상복의 멋을 한껏 뽐낸다. 저고리나 두루마기의 깃과 소매, 도련은 검은색 또는 옷과 다른 색띠를 둘러서 변화를 주었고, 허리는 띠로 묶었다. 너른 색면의 귀부인용 색동치마도 있지만, 주름치마는 대부분 잔주름이 풍성한 흰색이다. 밑자락을 색띠로 마무리한 사례도 있다.
고구려인의 복장은 남녀 모두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삼았는데, 여성들은 바지 위에 주름치마를 걸친 차림이 많고 저고리는 엉덩이를 덮을 정도로 길다. 바지저고리, 즉 ‘투피스’는 세계 복식사에서 최선의 일상복이자 현대에 가장 보편화된 패션이다. 서양에서 들어온 탓에 투피스 패션을 ‘양복’이라 일컫지만, 실제로는 세계 미술사에서 4세기 고구려 고분 벽화에 가장 먼저 등장한다. 그러니 투피스 패션의 기원은 말을 타던 고구려인이 원조라고 할 만하다.
고구려의 투피스는 상하 색을 달리한 콤비 패션이다. 흰 치마에 와인색이나 분홍색 저고리 혹은 짙은 보라색 저고리를 받쳐 입어 대담하면서 세련된 색채 조합을 보여 준다. 위아래 색깔을 달리한 전통은 색채 감각을 키우는 동시에 염색과 직조 기술을 발달시키는 동인이 되기도 했을 법하다. 퉁거우 오회분 4호묘의 일월상을 보면, 갈색 날개옷 저고리에 노란 치마를 입은 해신에 비해 달신은 빨간색 날개옷 저고리와 초록색 치마를 입어 차림새가 무척 화려하다. 이런 적록의 보색 대비 조합은 고구려 후기 사신도 벽화에 흔히 활용되고 있으며, 한국인의 색채 감각을 대표한다고 할 만하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복식은 조선 후기에 완성되어 현재까지 전해 오는 ‘한복’의 원형을 보여 준다. 신라(37 BC~AD 935)와 고려(918~1392)의 복식 유물이나 그림이 드물어 고구려 이후 변화 과정을 자세히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조선 시대에도 치마저고리 투피스를 기본 구성으로 하여 색 배합을 달리한 점은 고구려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큰 변화가 있다면 조선 후기에 들어 저고리 길이가 눈에 띄게 짧아진 점이다. 또한 옷감 색의 경우 적록의 화려한 의상은 예복으로 입고, 일상복 색채로는 쪽물 염색의 청색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이 다르다.

신윤복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당대 패션을 이끈 ‘신세대’였을 것이다. 19세기 초반 이들이 유행시킨 남치마와 흰 저고리의 형태 및 색채 배합은 동시대 파리 여성들의 세련된 의상미와 유사하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능
조선 후기 풍속화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18세기의 풍속화가 농업 사회의 노동을 중심으로 한 양태를 보였다면 19세기 초반에는 도시의 유흥 풍속이 담겨 뚜렷한 변화와 대조를 보인다. 노동 중심의 풍속화에는 경제 활동에 나서거나 가사 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주로 등장하는 데 비해 유흥을 다룬 풍속화에는 나들이나 놀이를 즐기는 여성들이 중심을 이룬다. 전자를 대변하는 김홍도(1745~?)의 <풍속화첩>이나 후자를 대표하는 신윤복(1758~?)의 <미인도>와 <풍속도 화첩> 속의 그림들은 복식 사전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사실적이다. 시기별 의상 형태의 변화, 착용 상태와 계층 구분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속화들 중 특히 조선조 숙종(재위 1674~1720)에서 순조(재위1800~1834) 대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가부장제에 예속되어 마냥 조신할 것만 같은 조선의 여성상과 달리 생활 속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발견하려고 애썼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여성 미의식은 당대 사대부 중심의 사회가 추구한 성리학의 법도나 예절과 상충한다. 치마를 걷어 올려 허리에 묶고 흰 속바지를 드러내고 나다니는 일도 당시 여성들에게 강요되었던 정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또 계층별 차별 제도를 무시한 차림을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가체를 금지한 어명을 따르지 않기도 했다.
더 나아가 일부 그림 속의 여성들은 꽉 끼는 저고리로 상체 라인을 한껏 표출시켰던 반면에 하체는 여러 겹씩 거추장스레 부풀린 치마로 가렸다. 가녀린 상체에 풍만한 하반신의 몸매를 강조한 스타일을 즐긴 것이다. 이는 마치 조선 후기 백자 달항아리의 형태미를 연상시킨다. 상체는 조이고 하반신은 풍성하게 강조한 이런 형태미가 같은 시기 유럽에서 유행한 여성들의 의상과도 유사하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런가 하면 조선 후기 여성들이 즐긴 일상복의 기본색은 푸른색이었다. 의상의 형태는 계층 간 차이를 보이지만, 색은 계층을 불문하고 옅은 옥색부터 진한 남색까지 쪽물 염색이 압도적이었다. 이는 신윤복의 <풍속도 화첩> 30점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의상에서도 확인된다. 이 화첩에 등장하는 여성의 옷 색깔을 분석한 결과 전체 여성 70명 중 52명이 푸른색 계통의 쪽물 염색 옷을 입어 74%를 차지했다.
이들이 즐겨 입던 흰 저고리와 쪽색 남치마의 조화는 생활 속의 미의식을 잘 보여 준다. 청백의 배색은 흰색 바탕에 코발트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의 유행과 동시대성을 지닌다. 그것은 흰 구름이 흐르는 투명한 가을 하늘을 사랑했던 조선인들의 심성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이 외에 드물기는 해도 노란 저고리와 빨간 치마, 남치마에 분홍 저고리나 연두색 저고리, 보랏빛 저고리 등 여러 색의 개성적 조합도 눈에 띈다.

<미인도>, 신윤복, 조선 후기, 견본채색, 114 × 45.5 cm. 신윤복의 사실주의적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그림으로 가녀린 상체에 풍만한 하반신과 살포시 숙인 얼굴에 교태가 어려 있다. 그림 속 여인은 조선 시대 상류 사회 복식을 하고 있으며, 한국의 전통적인 미인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물 제1973호. Ⓒ 간송미술관

단순함 속에 돋보이는 개성
조선의 양반가 부인들은 흰 저고리에 깃과 소매, 그리고 옆구리에 색띠로 변화를 주었다. 이를 ‘삼회장저고리’라 불렀고, 깃과 소매에만 색띠를 댄 경우는 ‘반회장저고리’, 장식이 없으면 ‘민저고리’라 했다. 청백의 한색(寒色) 색띠를 덧붙여 산뜻하게 조화시킨 저고리는 단순함 속에 개성을 추구한 색과 구성이 돋보인다. 여기에 노리개나 뒤꽂이, 떨잠, 비녀, 신발 등의 치레 거리 장식은 치마저고리에 우아함을 보탰다.
삼회장저고리는 상류층 여성들의 옷이었던 만큼 풍속화에서는 사례가 드물다. 신윤복의 화첩에서 확실한 삼회장저고리를 입은 여성은 단 3명뿐이다. 이들은 양반가 여성이고, 나머지 반회장저고리나 민저고리 차림의 여성들은 대부분 기생이나 서민층 여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 후기 상류층 여성의 미모를 뽐내고 있어 근대 이전 한국의 여인을 대표할 만하다. 이 그림 속 주인공을 기생으로 해석하는 견해들이 많았으나, 삼회장저고리를 입었으니 사대부가의 여인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20대를 벗어나지 않은 듯 보이는 이 여인은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 알맞은 크기의 가체를 덧대 땋아 올린 스타일을 하고 있다. 특히 쪽물 들인 밝은 남치마에 받쳐 입은 남자주색 삼회장 흰 저고리는 단출한 듯하면서도 호사스럽다. 자주색 댕기와 옆구리의 붉은 색 띠는 여인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여기에 다리를 살짝 벌려 풍성한 배추형 치마 밖으로 흰 버선발 하나를 살짝 내민 맵시와 고개를 약간 숙인 표정에 교태가 배어난다.
신윤복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당대 패션을 이끈 ‘신세대’였을 것이다. 19세기 초반 이들이 유행시킨 남치마와 흰 저고리의 형태 및 색채 배합은 동시대 파리 여성들의 세련된 의상미와 유사하다.
이후 100년은 한국인들에게 어려운 시기였다. 20세기 전반 식민지 시절 일본을 통해 서양 문화를 수용한 모던 걸과 그 이후의 여인들은 전통미를 잊고 남을 따라 배우느라 자기 개성을 뚜렷하게 가꾸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 100년 뒤인 21세기 전반, 그 여인들의 후손이 창조한 K-뷰티가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신세대는 앞 시기와 크게 다른, 어쩌면 한국 문화사에 큰 지각 변동을 일으키며 새로운 페이지를 쓰고 있는‘신인류’인지도 모르겠다.

도심 속 화장박물관에서 천연의 아름다움을 만나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은 국내에서 유일한 화장 문화 전문 박물관이다. K-팝의 중심지에서 한국 화장의 오랜 역사와 K-뷰티의 근원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17세기 초 의학서 『동의보감』에는 조선 시대 여인들이 녹두, 콩, 팥 등 곡물을 갈아 세안제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외 쌀, 분꽃 씨, 황토, 홍화 꽃잎 같은 천연 재료들은 분과 색조 화장품의 재료로 널리 활용되었다. 코리아나화장박물관

한국 문화에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함께 어우러지고자 하는 미의식이 담겨 있다. 건축이나 복식, 음식 문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특징은 화장 문화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의 화장 문화는 고분 벽화 속 인물들과 전래하는 유물들을 통해 기원전 1세기에도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세기 고려 시대(918–1392)에는 조형미가 우수한 화장 용기와 청동 거울이 제작되면서 화려한 화장 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후 조선 시대(1392–1910)는 천연 재료로 만든 화장품으로 담박한 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 시기였다. 이처럼 한국의 화장 문화는 꾸준한 발전을 거듭했고, 현대의 기술력은 전통 화장품에 쓰였던 천연 재료들의 효능을 극대화하여 현대인의 아름다움에 일조하고 있다.

<청자상감국화문모자합>(靑磁象嵌菊花紋母子盒), 고려 시대, 모합 지름 11.4 cm, 자합 지름 3.6 ㎝. 뚜껑 전체에 국화문이 상감된 청자모자합으로 내부에 4개의 자합이 들어 있다. 모자합은 큰 합인 모합 속에 작은 자합 여러 개를 넣는 화장 용기로 분, 연지, 눈썹먹 등을 담는 데 사용됐다.

K-팝과 K-뷰티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은 코리아나 화장품의 창업자인 유상옥(Yu Sang-ok 兪相玉) 회장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2003년 설립되었다. 유 회장은 사업상 외국 화장품 회사 관계자들과 만날 때마다 한국의 우수한 화장 문화가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회사 경영과 함께 전통 문화 공부에 더욱 매진하는 한편 틈틈이 수집하던 유물의 범위도 넓혀갔다.
유 회장은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설립을 추진하면서 ‘생태 건축가’로 불리던 정기용(Chung Gu-yon 鄭奇鎔 1945~2011)에게 건축 디자인을 온전히 맡겼다. 자연을 통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화장품 회사 CEO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했던 건축가는 박물관을 도심 속 정원 같은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두 사람의 염원이 이루어져 강남 지역은 이제 K-팝뿐 아니라 K-뷰티를 이끄는 다이내믹한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천연 화장 재료
박물관에 들어서면 옛사람들이 사용했던 화장 재료가 가장 먼저 시선을 끈다. 옛날 화장 재료는 지금과 다를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곡물과 자연 재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 재료들은 허준(1539∼1615)이 지은 『동의보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이 책은 각종 질병에 대한 처방전을 상세히 기록한 조선 시대 의학서이다. 질병 치료 이외에도 화장과 관련하여 영양 공급, 미백, 노화 방지 등 피부 관리법을 비롯해 분독, 뾰루지 등의 치료법도 기록되어 있다. 옛사람들의 피부 고민이 현대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 놀라게 된다.
박물관에는 녹두, 콩, 팥 등을 갈아 만든 세정제와 쌀, 분꽃 씨, 황토를 곱게 갈아 만든 분이 소개되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옛사람들이 분을 사용할 때 무턱대고 그냥 바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얼굴색에 맞는 천연 재료를 찾고, 그것을 흰 분에 섞어 색분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 색분은 첨가한 재료에 따라 은은한 복숭아색부터 진줏빛을 띠는 분까지 다양했다. 아울러 옛 여인이 분 화장과 더불어 많은 공을 들였던 눈썹 화장 재료, 홍화 꽃잎으로 만든 색조 화장 재료인 연지 등을 옛날 방식 그대로 재현해 놓아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10세기 고려 시대(918–1392)에는 조형미가 우수한 화장 용기와 청동 거울이 제작되면서 화려한 화장 문화가 꽃을 피웠다.

<나전칠경대>, 조선 시대, 가로 18.6 ㎝, 세로 25.5 ㎝, 높이 15.6 ㎝.정면은 귀갑문으로, 좌우 옆면은 산수문으로 장식한 경대이다. 거울을 세워서 볼 수 있도록 지지대를 받쳤으며, 평소에는 접어서 보관하게 되어 있다. 하단에는 화장 도구를 넣을 수 있는 서랍이 달려 있다. 경대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사용하였는데 여성용은 화각, 나전칠 등 색채가 풍부하고 화려한 장식을 많이 썼으며, 쓰임새가 많아 남성용보다 크다.

<보상화문경>(寶相華紋鏡), 고려 시대, 지름 18.9 ㎝. 뒷면에 원형의 테두리를 두르고 보상화 세 송이와 줄기를 표현한 구리 거울이다. 보상화 잎은 난형(卵形)으로 끝이 뾰족하고 하나의 줄기에 십여 개가 달려 있으며, 잎 사이에 둥근 열매가 있다. 이러한 모양의 보상화 모티브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어 고려만의 특색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화장 용기
천연 화장 재료가 주로 여성을 위한 것이었다면, 향은 남녀 모두 애용하던 화장 재료였다. 한국 전통 사회에서 향의 사용은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향은 몸에서 나는 악취를 없애는 것은 물론 해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도 사용했는데, 향기가 오랫동안 은은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장신구에 달거나 옷장에 넣어 두었다. 박물관에는 전통 향의 냄새를 직접 맡아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전통 천연 화장 재료들은 대부분 개인이 직접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양을 만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변질되기 쉬워 보관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화장 재료는 작은 도자기 용기에 보관했다. 도자기는 금속과 달리 숨을 쉴 수 있는 재료로 천연 화장품의 변질을 막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박물관에는 통일신라 시대(676–935) 토기에서부터 고려 시대 청자, 조선 시대 분청과 청화백자까지 시대별로 화장 용기가 전시되어 있다. 색과 문양뿐만 아니라 그 종류도 유병, 분 항아리, 분합, 분 접시 등 다양하여 이 용기들을 통해 한국의 수준 높은 도자기 제작 기술과 더불어 발달한 화장 문화도 함께 엿볼 수 있다.

<보석삼작노리개>(寶石三作佩飾), 조선 시대, 길이 38 ㎝. 노리개는 조선 시대 여성들의 대표적인 의복 장신구로 궁중에서는 물론 일반 서민들도 애용했다. 삼작(三作)노리개는 각기 다른 장식의 노리개 세 벌을 한데 묶은 가장 화려한 형식으로 보통 호박, 비취, 옥 등의 보석으로 꾸몄다.

<옥투각비녀>, 조선 시대, (위로부터) 길이 24 ㎝, 37.4 ㎝, 25.2 ㎝, 20 ㎝. 비녀는 쪽진 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쪽머리에 가로질러 꽂던 대표적인 머리 장신구로 신분, 용도, 계절에 따라 달리 사용하였다. 옥비녀는 주로 여름에 꽂았다.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
오랜 기간 도자기에 담아 쓰던 천연 화장 재료는 근대 서양 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점차 바뀌게 된다. 박물관에는 한국 근대 화장품의 효시인 박가분(Parkabun 朴家粉)을 비롯하여 한국 근대 화장사를 살필 수 있는 화장품들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빗, 거울 등의 화장 도구들과 비녀, 노리개 등의 장신구들처럼 생활 문화에 관련된 유물들도 상설 전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문화 교류가 빈번하였던 중국과 일본의 화장 문화도 함께 소개하여, 동북아시아 지역의 화장 문화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코리아나 화장박물관은 한국의 화장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해외 여러 나라에서 전시를 개최하는가 하면 어린이, 청소년, 일반인, 외국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이런 프로그램들을 통해 전통 화장품 만들기, 전통 향 체험, DIY 화장품 만들기 같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이태호(Lee Tae-ho 李泰浩)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서울산수연구소장
이지선(Lee Ji-sun 李知宣)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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