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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18 AUTUMN

기획특집

평화의 전주곡:
대중문화로 다가서는 두 한국
기획특집 4 다른 방식으로 만나게 될 북녘의 산하

한국인들이 백두산과 금강산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이유는 단지 그 빼어난 경치에 이끌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두 산은 그들에게 역사∙문화∙예술적으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남한 사람들에게 이 산들은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대상이다.

백두산 천지에 오른 남한 관광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북한 양강도와 중국 지린성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곳에서부터 1,400㎞에 이르는 백두대간이 뻗어내리며 한국의 기본 산줄기를 이룬다. 현재 남한 사람들은 중국을 경유해야 이곳에 갈 수 있다.

나는 분단 국가의 남쪽에서 태어나 철저한 반공 교육 속에서 성장했다. 내가 배운 북한은 괴뢰 정권과 강제 노동과 빈곤의 나라였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말처럼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천리마 운동’, 다섯 가구마다 공산당원을 한 명씩 배치해서 일상생활을 감시하는 ‘5호 담당제’는 사회 시험에 자주 출제되던 문제였다. 신문에는 수시로 무장 공비 침투 뉴스가 실렸고, 학생들은 그들이 지녔던 수류탄과 단검 등을 보기 위해 ‘반공 전시회’를 단체로 관람하곤 했다.
하지만 음악 시간에 우리는 “금강산 찾아가자 일 만 이 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를 노래했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금강산 여행기 「산정무한」(山情無限)을 통해서는 그곳의 숲과 폭포, 구름, 안개, 바위 따위의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었다. 금강산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완전히 다른 풍경이 되기 때문에 이름도 네 개를 갖고 있다. 금강산은 봄 이름인데, 1만 2천 개의 봉우리가 온통 새싹과 꽃에 뒤덮여 다이아몬드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한국 속담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 해도 배가 부른 뒤에야 비로소 즐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속담에서마저 금강산은 아름다운 경치의 대명사를 맡고 있다. 그뿐 아니다. 한국인이 즐겨 부르고 좋아하는 가곡을 꼽자면 최영섭(崔永燮) 작곡의 <그리운 금강산>을 빼놓을 수 없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이라는 첫 소절을 듣는 순간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금강산은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 얼마나 아름답기에 분단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 중에 가장 아쉽고 그리운 것으로 손꼽히는 것일까.
백두산에 대한 관심도 그에 못지 않다. 무엇보다 백두산은 대한민국 애국가의 시작 부분에 등장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 가사의 뜻을 오늘날 분단의 상황에서 풀어 보면, 남한에 있는 동해의 바닷물이 말라버리고 북한에 자리한 백두산의 봉우리가 닳아 없어지는 무한의 시간이 될 때까지 초자연의 힘이 우리나라를 보호하고 도와주리라는 의미이다.
백두산은 높고 넓은 개마고원을 치마폭처럼 펼치고 앉아 원시 대삼림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고, 그 이름은 산 꼭대기가 흰색의 부석으로 덮여 마치 흰 머리 같다 해서 붙여졌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에서 부르는 백두산의 이름 역시 흰 백자가 들어간 장백산(長白山)이다. 웅장한 자태의 백두산과 세계에서 가장 깊은 화산 호수라는 천지의 모습은 비록 지금은 두 동강이 나 버렸지만, 한때 대륙으로 뻗어 나갔던 한민족의 기상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밟아볼 수 없는 땅이라는 안타까움까지 더해져 백두산은 언제까지나 ‘민족의 영산’이라는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듯했다.
그러나 역사는 앞으로 나아갔다. 2002년 나는 드디어 기암괴석이 솟아 있는 금강산의 계곡 안에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서서 푸른 물이 넘실대는 천지를 굽어보고 있었다.

낯설지만 오래 찾아왔던 아름다움
그 역사의 시작은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자의 ‘소떼 방북’일 것이다. 그는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으로 17세 때 아버지가 소를 판 돈을 훔쳐서 남쪽으로 내려온 뒤 오늘날의 대기업을 일구었다. 1998년 83세가 된 그는 북쪽과 협상을 벌여 평화를 위한 고향 방문을 연출했다. 소 한 마리의 빚을 갚는다는 의미로 500마리의 소를 몰고 CNN이 생중계하는 가운데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넘어간 것이다.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이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평한 그 사건이다. 그리고 그해 말부터 현대그룹이 주도하는 한국 민간인의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나 ‘6∙15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은 계속해서 남북 사이를 가로막는 해묵은 얼음을 녹여갔다. 그중 하나가 2002년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응원단과 함께 참가하기로 한 일이었다. 분단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해는 마침 월드컵 축구 경기가 열리는 해이기도 했다. 문화∙예술∙체육계 인사들이 금강산에서 ‘월드컵 및 아시안게임 성공 기원을 위한 해맞이 행사’를 열기로 했다. 나는 학창 시절에 신물이 나도록 각종 행사에 단체로 동원되었던 세대였다. 관이 주도하는 행사라면 일단 거부감부터 들었다. 하지만 다름아닌 금강산을 간다는데! 솔직히 말해, 그 행사에 초청받았을 때 진심으로 작가가 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경치가 빼어나고 철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는 금강산은 남북 분단 이후 1998년 9월부터 바닷길을 돌아가는 해로 관광이 시작되었으나 2004년 중단되었고, 육로 관광이 2003년 9월에 시작되었다가 2008년 중단되었다.

북한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느꼈던 작은 전율은 무엇이었을까. 북한 사람과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의 어색한 감동은 또 무엇이었을까.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 금강산 계곡을 끼고 걸을 때 나를 휘감던 아득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기운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등산을 좋아하여 한국의 여러 산에 올라가 보았다. 그런 내 눈에도 금강산은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낯설지만 오래 찾아 왔던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내 안에 들어 있던 아름다움의 목록에 한 가지 풍경이 더해짐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 하나가 더 생긴 기분이었다.
일행 중 누군가는 군데군데 바위에 새겨진 체제 선전 문구가 풍경을 해친다고 불평했다. 우리를 대하는 북한 사람들의 경직된 태도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뽀얗게 김이 올라오는 밤의 야외 온천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봉우리들, 해금강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해안선들이 그 모든 것을 잊게 해 주었다. 거기에다 농담을 좋아하는 북한 사람들의 거침없는 웃음 소리와 맛좋은 들쭉술, 대동강 맥주까지도.
3년 뒤인 2005년 북한을 방문할 두 번째 기회가 왔다. 백두산에서 ‘한민족 작가 대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해방 후 남과 북, 해외로 흩어져 있던 한국 작가 200여 명이 60년 만에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역사적 행사였다. 준비 과정에서부터 험난한 여정이 예고돼 있었지만, 같은 민족끼리 교류하고자 하는 간절함을 막지는 못했다. 주최측이 권한 대로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동네 약국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한꺼번에 많은 상비약을 사는 나에게 약사가 이유를 물었다. 북한에 가져갈 선물이라는 걸 알고는 약사는 몇 배의 약을 건넸고 돈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모두 건강하게 지내다가 언젠가 꼭 만났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했다.
고려항공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떠난 지 채 1시간도 안돼 북한의 순안 공항에 내렸다. 해로로 금강산에 갈 때 밤새 뱃멀미를 했던 걸 떠올리면 허망할 정도였다. ‘평양’이라는 붉은 글씨와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좌우로 걸려 있는 공항 입구에서 마중 나온 북쪽 사람들이 환영의 박수를 쳤다.
창작자들이란 각자의 개성적 세계를 갖고 있어 통제된 단체 활동이 쉽지 않다. 게다가 오랫동안 다른 정치 체제 아래에서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작가들의 만남이었다. 사연도 많고, 사건도 많았다. 서로 보여 주려 하는 것과 보려고 하는 것이 달랐다. 무엇보다 서로 가치를 두는 것이 다르다 보니 긴장과 갈등이 빚어지고, 오해도 생겨났다. 한 예로 남쪽은 1970년대를 연상시키는 시골 풍경에 대한 향수로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그것은 체제 우월성에 자존심을 걸고 있는 북쪽에게는 큰 결례였다. 한민족이라는 유대감 안에서, 무엇보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로 양보하고 조정해 나가는 걸 잊지 말아야 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평양의 고려호텔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옥류관에서 젓가락으로 냉면발을 들어올리며, 묘향산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서로 ‘이게 꿈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교환했던 눈빛이므로.
동일성을 확인하는 순간은 자주 있었다. 같은 식탁에 앉은 북쪽 작가가 상추를 ‘부루’라고 부르자 제주 출신 작가가 반색을 했다. 제주도에서만 쓰는 사투리인 줄 알았는데 북한의 표준어라니 반가울 수밖에 없잖은가. 그러자 화제는 남북한 언어의 동일성으로 이어졌다. 60년 동안 갈라져 살았지만 남북 언어는 외국어의 영향을 받은 어휘들을 빼면 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다. 그것은 남북 모두 1933년에 발표된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무렵 한국에서 출판된 북한 작가 홍석중(洪錫中)의 소설 『황진이』를 통해서도 증명되었다. 그 소설은 널리 읽혔고, 한국의 이름 있는 문학상까지 받았다.

여명 속에서 깨어나는 백두산
한민족 작가 대회 행사는 백두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바라보며 열리기로 예정돼 있었다. 남북 작가들을 태운 버스가 캄캄한 새벽에 백두산 중턱의 숙소를 출발했다. 마지막 밤이라서 늦도록 우정의 술판을 벌인 탓에 차에 탄 대부분의 작가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깨어 있는 사람은 그 행사의 사회를 맡아 잔뜩 긴장해 있는 나 혼자인 듯했다. 그 덕분에 나는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을 보았다. 여명 속에 잠에서 깨어나는 원시림의 아름다움. 하얀 자작나무 숲의 구비를 돌아가면 이깔나무 비늘로 뒤덮인 사이로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소나무, 잣나무, 가문비나무, 버드나무, 그리고 온갖 꽃들. 물은 투명했고 검은 바위는 여기저기 기묘한 실루엣을 만들었다. 백두산에 산다는 흰 호랑이나 검은 곰이나 사향노루가 튀어나와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도착해 장군봉 위에 올라섰을 때 천지를 뚫고 장엄한 해가 솟아올랐다. 한 북한 작가가 우리에게 말했다.
“정말 좋은 날이네요. 백두산은 고산이라 기후 변화가 심해요. 저는 다섯 번을 올라왔지만 일출은 처음 봅니다.”
그곳에서 남북 작가들은 시를 낭송하고 함께 구호를 외치고 어깨동무를 한 채 사진을 찍었다. 그날을 기억하는 어떤 글에 의하면 남쪽의 한 작가가 ‘못난 가시 철망 조용히 걷어 내라’고 하자 북쪽 작가가 ‘사람이 마음을 모으면 하늘을 이긴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록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치긴 하겠지만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다음 해인 2006년에는 ‘남북 6∙15 민족문학인 협회’를 만들기로 하고 그 결성식을 금강산에서 가졌다. 남과 북의 작가들이 한데 어울리는 ‘금강산 문학의 밤’도 열렸다. 육로 관광이 시작된 뒤라서 이번에는 뱃멀미에 시달릴 필요 없이 버스를 이용했다. 강원도에서 북한 땅으로 곧바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또다시 북한에서 난 곡식과 채소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다. 통일이 되면 우리 가운데 누구의 책이 북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것인지 점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소수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작가로서 통일은 독자를 늘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서로를 격려하기도 했다.

1998년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은 2차에 걸쳐 총 1,001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여 남북 민간 교류와 경제 협력의 물꼬를 텄다.

2005년 북한에서 열린 ‘한민족 작가 대회’에 참가한 남한 문인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 행사는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에서 발표한 6·15 공동 선언의 화해 기류를 타고 마련되었다.

2008년 남북한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실린 잡지가 발간되었다. ‘6∙15 민족문학인 협회 기관지’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난 『통일문학』이다. 소설과 시, 수필, 평론 등 33편이 실렸다. 운 좋게도 거기에 내 단편 소설도 끼어 있었던 덕분에 나는 그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세상에 나온 그 책을 나는 소중하게 책꽂이에 꽂아 놓았다. 평양에서 선물받은 북한 시인의 시집 옆자리였다. 내 작품이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덕분에 나는 도서전과 문학 행사에서 종종 외국 독자들을 만나 왔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이 내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하자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오랜 반공 교육의 굴레에서 벗어나 서툴게나마 손을 내미는 기분이었다.

북한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느꼈던 작은 전율은 무엇이었을까. 북한 사람과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의 어색한 감동은 또 무엇이었을까.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 금강산 계곡을 끼고 걸을 때 나를 휘감던 아득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기운은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그해에 남북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금강산 관광객이 사고를 당한 것도 한 계기일 것이다. 새벽 산책을 나갔던 한 관광객이 철조망을 넘어 군사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북한군의 총에 맞았다. 그 결과, 해마다 이용객이 늘어났고 2005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했던 금강산 관광이 곧바로 중단되었다.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가 미국인이 가기 힘든 절경지 1위로 선정했던 금강산이 이제 한국인에게는 완전히 문이 닫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10년 동안 한국 정부는 북한과 대화하지 않았다. 그런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금강산 관광은 그 수익으로 적성국을 이롭게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문은 다시 열렸다.
지난 4월 남북 정상 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도보다리 산책 후 난간 앞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은 30분이 넘게 단 둘이 대화했다. 그동안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새소리뿐이었다. 다음날 어떤 언론은 구순술을 동원해 정상들의 밀담을 엿들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새소리의 주인공들을 찾아내 그 지역의 생태계를 알려준 기사였다. 그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평화를 가져오는 소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새소리만이 들려오는 30분 동안 나는 금강과 백두를 떠올렸다. 그곳을 다녀온 뒤 나는 여러 산을 여행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 갔고, 마추픽추로 향하는 잉카 트레일을 걸었고, 로키 산맥에서 캠핑을 하기도 했다. 레이니어 산이 보이는 미국 서부 도시에서 2년을 사는 동안 워싱턴주 주변의 산은 물론 옐로스톤과 그랜드 캐니언 등지를 여행하며 경이로움 속에 빠져 보았다. 그러나 백두산과 금강산을 볼 때처럼 마음에 안기는 풍경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분단 이후 역사에 대한 이해
내 책꽂이에는 백두산과 금강산을 찍은 두 권의 각기 다른 사진집이 꽂혀 있다. 하나는 매그넘의 대표 사진 작가 중 하나인 구보타 히로지(Hiroji Kubota)의 『북녘의 산하』이다. 그 사진들을 찍은 것은 1979년 일본의 잡지 『세계』에 싣기 위해서였다. 일본인으로서 북한의 등반 허락을 받은 사람은 그가 네 번째라고 한다. 책의 말미에 그는 이렇게 썼다.
“웅대한 대륙적인 산의 전형이라고 할 백두산, 마치 동양 그 자체라는 느낌을 주는 금강산. 나는 두 산의 호기롭고 장엄한 대자연의 박력에 압도되었다.”
이 사진집은 30년 전인 1988년 시민 모금으로 출발한 한겨레신문사가 펴냈다. 당시는 문민정부 출범 전이었고, 남북 관계가 얼어붙어 있을 때라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 책의 발간 소식을 들은 독자들은 그만큼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책값 3만 원은 당시로는 라면 300개를 살 수 있는 적지 않은 지출이었지만, 나 역시 망설이지 않고 그 책을 샀다. ‘초여름에도 얼음이 떠 있는 천지’, ‘계곡의 단풍’, ‘원시림과 나무 얼음’ 등 사진 속 풍경은 당연히 멋지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 마음을 더욱 뛰게 만든 것은 이제는 갈 수 없는 북쪽 땅 백두산과 금강산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진집 뒤에 붙은 글들도 풍경의 아름다움과 그곳에 서려 있는 어릴 때의 추억과 그리움, 민족의 정기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다른 하나의 사진집은 1982년 평양의 조선화보사에서 발간한 『백두산』이다. 내가 한민족 작가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갔을 때 사온 책이다. 제한된 시간에 허가를 받고 촬영을 해야 하는 구보타의 사진과 달리 사계절을 마음껏 담고 있으며, 디테일이 풍부한 그 사진들은 한층 친근하고 다양하다. 사진의 퀄리티는 비교할 수 없지만, 자연뿐 아니라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애틋함을 더한다.
가장 다른 것은 그 산에 접근하는 시각이다. 이 화보집의 첫 장은 백두산도, 금강산도 아닌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다음 장을 펼치면 항일혁명투쟁의 역사로서 백두산이 등장한다. 그러고 나서야 백두와 금강의 아름다운 산천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북한에서 백두산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기도 하지만, 항일투쟁 유적지로서의 가치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백두산은 조선인민혁명군의 밀영이 있었던 장소인 만큼 곳곳에 동상과 기념탑,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유격 대원들의 살림집과 야영지도 보존돼 있다. 우리와 단절된 이후에 그 땅은 북쪽 사람들의 영역으로 자리 잡고 변화해 왔다. 우리와 다른 역사를 담고 있으며, 분단 이후 그들의 현대사를 담고 있는 영토인 것이다. 거기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는 아직 우리는 그 땅을 디딜 준비가 되지 않은 게 아닐까.
요즘 나는 친구들과 여행 약속을 많이 한다. 한국에서 출발한 철로가 북으로, 러시아로, 유럽으로 이어지면 그 순서대로 평양과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 파리에 함께 가자는 약속들이다. 기차 여행을 할 수 있는데 뭐하러 비행기를 타, 이렇게 말하면서. 그리고 백두산에도 꼭 다시 가 보고 싶다. 중국을 거치지 않고 철길로 직접. 물론 오래 끊겼던 길을 이으려면 많은 시간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화해와 평화를 위한 여행

비무장지대(DMZ)는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155마일 군사분계선 양방향 각 2km 폭으로 뻗어 있다.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일단락되며 당시의 전선이 그대로 반영되었고, 휴전 회담이 개최되었던 판문점은 공동경비구역이자 유일한 통로로 남았다. 판문점 및 접경 지대 분단 관련 시설들이 국내외에서 연간 300만에 달하는 방문객을 불러모으는 인기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남북한을 가르는 비무장지대의 유일한 통로인 판문점을 북한 측 방문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남측에서는 ‘안보 관광’이라 불리는 판문점 방문을 위해서 국가정보원에 최소 60일 전에 신청해야 하며, 단체만 가능하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페렌바흐(Theodore R. Fehrenbach)는 한국전쟁을 기록한 저서 『This Kind of War』에서 1953년 7월 27일 DMZ가 태어나던 판문점 정전협정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At 1001 they signed the first of eighteen documents prepared by each side. It took them twelve minutes to sign them all. Then, each man got up and left the building, without speaking.”
지구상에 남아 있는 냉전의 최후 전선으로 불리는 DMZ — 분단의 영원한 상징으로 남을 것 같았던 이 비극의 땅이 불현듯 평화를 말하기 시작했다. 휴전과 함께 분단이 고착되었던 판문점에서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지난 4월‘4.27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고 평화의 시대를 향해 함께 나아갈 것을 약속했다. 65년 전, 전쟁의 포화 속에서 적과 적이 마주 앉았다가 12분 만에 말 한마디 없이 등을 돌렸던 바로 그곳에서 두 사람은 악수하고, 포옹하고, 함께 걸었다.
판문점 도보다리(Foot Bridge) 위에서 벌어진 남북 정상 회담의 이 극적인 장면은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날 푸른색 도보다리는 연녹색 숲을 배경으로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다정히 걷다가 마침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대화 내용도, 배경 음악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곳의 일상이 늘 그렇다는 듯이 지빠귀가 청아한 울음을 터뜨리고, 맞은편에서 청딱따구리가 목청을 한껏 높여 화답했을 뿐이다.

네 개의 키워드
DMZ는 크게 네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이곳은 냉전이 만들어 준 자연 생태계의 보고다. 자연은 결코 교과서대로, 인간의 의도대로 천이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 옛날 논과 밭은 습지가 되고, 그 습지에는 세계적으로 희귀종이 된 고라니 떼가 몰려와 살고 있다. 혹독한 전쟁, 그리고 오랜 군사적 대치를 거치며 뜻밖에 자연이 스스로 생존의 터전을 이룬 것이다.
2018년 6월 국립생태원의 통계에 따르면 DMZ에는 멸종 위기 101종을 포함해 야생 생물 5,929종이 살고 있다. 치열한 전쟁터가 건강한 숲으로 복원되는 동안 인간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철책선을 치고, 지뢰를 묻고, 심지어 고엽제를 뿌리는 등 자연이 가는 길을 적극적으로 방해했을 뿐이다. 그러니 DMZ를 감히 ‘신의 정원’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DMZ는 살아 있는 전쟁 박물관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영국 군인들은 “숲이 움직이면 전쟁을 준비할 때”라는 『맥베스』의 한 구절을 뼈에 사무치게 경험했다. 임진강 건너 벌판이 움직이자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됐던 것이다. DMZ는 63개국이 참여한 ‘인류의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의 기억이 담긴 서사적 다큐멘터리이다.
DMZ는 접경지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DMZ에 인접한 민통선 북쪽 마을들은 철새에게 먹이를 주고, 철새로부터 관광 혜택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실현되는 ‘도덕 사회’이다. 이곳에서도 노인은 죽고, 젊은이는 사랑하며, 아이는 태어난다. 어디 그뿐인가. 이곳은 한국사의 몇몇 중요한 시기와도 맞물려 있다. 신라 말기 궁예(?~918)가 세웠던 나라 태봉의 도읍 터가 바로 DMZ 내 철원에 있다. 곧 이어 고려가 이곳에서 건국해 개성으로 천도했으며, 그로부터 약 400년 후 조선은 개성에서 건국해 지금의 서울로 천도했다.

비무장지대 인근은 자연 생태계의 보고이면서 한국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는 장소이다. 이 때문에 연간 300만에 달하는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판문점의 다리들
판문점을 이해하는 네 번째 중요한 키워드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정전협정 직후 중립국 감독위원회는 회의장 동선을 단축하기 위해 판문점 동쪽 군사분계선상에 있는 습지에 목조 다리를 놓았다. 사람만 왕래할 수 있는 좁은 다리여서 ‘Foot Bridge’라고 불린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던 이 냉전의 부산물이 평화의 상징으로 부활했다. ‘4.27 판문점 선언’에는 DMZ를 ‘평화 지대’로 만들자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는데, 도보다리 위의 산책은 그 약속을 실천하는 첫걸음처럼 보인다.
판문점과 다리의 운명적 관계는 이미 400여 년 전에 예고되어 있었다. 1592년 조선의 임금 선조는 남해안을 거쳐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는 왜군에게 쫓겨 황급히 북쪽으로 피신하고 있었다. 왕이 빗속에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범람해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널문(대문짝)을 떼어 다리를 놓아 주었다. 이후 이 마을은 널문리로 불리게 되었다. 널문리는 한국전쟁 휴전 회담 당시 중국군의 주장으로 ‘판문점(板門店)’이라는 한자 명칭으로 바뀌었다.

평화를 향한 발길
판문점 군사분계선 위에는 ‘상징적 다리’가 놓인 적도 있다. 1984년 11월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관광 안내원으로 일하던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Vasiliy Yakovlevich Matujok)가 망명 의사를 밝히고는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 건물 사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왔다. 군사분계선 ‘도하’는 2017년 11월에도 있었다. 한 북한군 병사가 총상을 무릅쓰고 뛰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그런가 하면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제1차 북핵 위기의 중재를 위해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했다. 분단 후 판문점에 놓인 가장 스펙터클한 ‘평화의 가교’ 는 1998년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의 ‘1001 마리 소떼 방북’이었다. 정 회장은 그해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500마리씩의 소를 트럭에 싣고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경제 협력의 물꼬를 텄다. 그리고 그 해 11월 남한의 금강산 관광객을 실은 배가 처음으로 동해항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최근 판문점과 DMZ 인접 지역을 찾아‘안보 관광’에 나서는 내외국인들이 부쩍 늘었다. 그러나 판문점은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조건 없이 방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정한 심사를 거쳐 출입 승인을 받아야 하고, 낮 시간 동안에만 방문이 가능하며, 가이드의 인솔로 정해진 루트로만 이동할 수 있다.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허락 없이는 카메라 셔터에 손가락을 올려 놓아서도 안 된다. 여러 가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판문점으로 향하는 이유는 그곳이 전 세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냉전의 현장이자 유적, 그 의미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은희경(Eun Hee-kyung 殷熙耕) 소설가
함광복(Ham Gwang-bok 咸光福) 한국DMZ연구소(Korea DMZ Institute)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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