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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18 AUTUMN

기획특집

평화의 전주곡:
대중문화로 다가서는 두 한국
기획특집 3 새로운 전기 맞은 남북 스포츠 교류

역사적으로 스포츠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나 첨예한 정치적 갈등 해소에 종종 활용되어 왔다. 휴전 상태인 한반도에서도 그동안 여러 차례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해 세계대회에 출전하거나 올림픽 공동 입장 등 스포츠 이벤트를 통해 평화 분위기를 조성해 왔다. 최근에는 남북 간 평화 체제 구축이 진행되면서 스포츠 교류 역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1991년 4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한의 현정화와 북한의 리분희가 한 팀을 이뤄 중국을 3:2로 꺾고 여자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분단 이후 남북한 단일팀이 참가한 첫 국제 스포츠 대회였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나 가슴에 일본제국의 국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은 북한의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여섯 살에 중국 단둥(丹東)에 있는 회사에 다녔는데,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단둥에 이르는 20여 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근했다. 그런가 하면 뛰어난 축구 선수이자 감독, 국가대표팀 단장을 지낸 남한 축구의 거목 김용식(金容植 1910~1985)도 지금은 북한 땅이 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서울에 와서 비슷한 시기에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다녔다.
스포츠 영웅의 상징인 두 사람의 이력만으로도 최소한 70여 년 전에는 한반도 안에서 남과 북 사이의 왕래가 버밍엄 사람이 런던에 가고 시카고 사람이 뉴욕에 가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풍경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과 그 후의 분단 체제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다.

전쟁과 분단
20세기 초 한반도는 서구 문명과 일제 강점이라는 외적 압력 속에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표적 항만이자 공업 도시였던 원산에는 1897년에 이미 6홀 규모의 골프장이 들어섰고, 각 공장을 중심으로 축구팀이 결성되었다. 역시 항만 도시였던 인천도 근대적 산업 도시로 성장하면서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 클럽이 생겨났다.
이런 도시들 중에서도 최고의 경기력을 지닌 팀과 팬을 가진 곳은 평양과 경성(서울의 옛 이름)이었다. 중국을 통해 일찌감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대륙 기질의 평양과 한반도의 중심 거점 도시로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진 경성은 특히 축구에 있어서 강렬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였다. 그래서 당시 경성의 앞 글자와 평양의 앞 글자를 딴 라이벌전인 ‘경평전’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더비 매치는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라이벌 도시 간의 흥미로운 스포츠 이벤트였다.
경평전은 현대적 방식인 ‘홈 앤드 어웨이’와 ‘정기전’으로 해방 직후인 1946년까지 개최되었다. 앞서 언급한 경성의 프랜차이즈 스타 김용식이 1940년대에 라이벌인 평양팀으로 이적하기도 했을 정도로 두 팀 간 교류가 활발했다. 만약 전쟁과 분단이 아니었다면, 서울 팀에서 뛰다가 평양 팀으로 이적하고, 또 평양의 열성 팬들이 열차를 타고 서울로 원정 응원을 오는 풍경이 펼쳐졌을 테지만 지난 70여 년 동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018년 7월 4일 ‘남북통일농구경기’에 참가하는 남북의 감독과 선수들이 류경 정주영체육관에 들어서고 있다. 이틀 동안 총 4차례 시합을 벌였는데, 남북이 농구를 통해 화합의 장을 마련하기는 2003년 이후 15년 만이다.

분단 이후, 첨예한 정치∙군사적 긴장 속에서 남북한의 스포츠를 통한 교류와 협력은 더러 중단되기는 했어도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남북한이 스포츠를 통해 교류하게 된 것은 1964년이 시작이었다. IOC가 도쿄에서 개최되는 하계 올림픽에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여 출전할 것을 요청하면서 회담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고, 1980년대 말까지 13차례나 스포츠 회담이 열렸지만 결실은 없었다.

2002년 9월 7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대회’가 끝난 후 남북 선수들이 대형 한반도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 이 대회는 1990년 이후 12년 만에 열린 친선 축구 경기였으며, 시합은 0:0 무승부로 끝났다.

대결과 교류
그보다는 오히려 체제 경쟁적 차원의 스포츠 경기가 몇 차례 열렸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싸우면서 탐색하고 긴장하면서 대화하는 방식의 교류였다. 예컨대 1966년 잉글랜드에서 치러진 제8회 피파 월드컵에서 천리마축구단을 주축으로 한 북한 대표팀은 강호들을 제치고 8강에 진출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스포츠도 체제 경쟁의 일환으로 인식했던 그 당시 북한의 선전에 자극을 받은 남한의 정보기관 중앙정보부는 1967년 양지(陽地) 축구단을 창단했다. 이 축구단의 목표는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우승이 아니라 오로지 북한을 상대로 이기는 것이었다. 당시 뛰어난 선수들 대다수가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보부는 힘들이지 않고 해병대, 육군, 공군 소속의 선수들을 양지축구단으로 끌어모을 수 있었다. 지원 또한 파격적이었다. 1969년 한 해에만 무려 105일 동안 유럽 전지 훈련을 시킬 정도였으니, 스포츠를 통한 체제 경쟁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파격적인 전지 훈련의 감독은 앞서 얘기한 실향민 김용식이었으며, 가장 나이 어린 공격수는 장차 1990년 제14회 이탈리아 월드컵 한국 대표팀 감독이 되는 이회택(李會澤)이었다.

1990년 10월 11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대회의 남측 선수단 고문으로 방북했던 이회택은 특별한 일화를 남겼다. 이회택은 각종 국제 대회를 통해 인연을 쌓아 왔던 잉글랜드 월드컵 8강 신화의 주역이자 북한 축구 영웅인 박두익(朴斗翼)의 주선으로 북에 있던 아버지를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회택의 아버지는 1950년 전쟁 당시 네 살 된 아들을 두고 월북했다. 무려 40년 만에 부자가 상봉한 다음 날은 마침 이회택의 생일이었고, 아들이 아버지가 차려준 생일상을 받는 드라마가 연출됐다.
남북 간 강력한 체제 경쟁의 상징적 대결로 벌어진 수많은 대회에서 이렇게 분단의 설움과 눈물이 뒤범벅된 일들은 수차례 일어났다. 여자 육상 400m, 800m 세계 기록 보유자였던 북한의 신금단(辛今丹) 선수는 한국전쟁 당시 홀로 월남한 부친 신문준(辛文濬) 씨를 1964년 하계 올림픽이 열린 도쿄에서 14년 만에 만날 수 있었다. 불과 몇 분 동안 이뤄진 이산가족의 애통한 상봉은 <눈물의 신금단>이란 제목의 대중가요로 만들어질 만큼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1978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남북의 축구 대표팀이 오랜만에 대결했다. 결승전에서 맞붙은 두 팀은 연장 접전까지 펼친 결과 0:0 무승부로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시상식에서 분단 체제의 씁쓸한 에피소드가 발생한다. 남한팀 주장 김호곤(金鎬坤)이 북한 주장 김종민(金鍾珉)에게 시상대를 먼저 양보한 후 올라서려 하자 김종민이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았던 것이다. 김호곤이 억지로 비집고 시상대에 오르려고 하자 북한 골키퍼 김광일이 밀치는 바람에 떨어진 뒤 어렵사리 다시 시상대에 올라야 했다. 분단 체제의 우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1960~70년대가 스포츠뿐 아니라 남북 문제 제반을 통치권 강화와 집권 연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던 시기였다면, 1980년대는 남과 북 모두가 적대적 힘의 우위를 과시하는 시대였기에 스포츠 교류 또한 남북 정권의 대내외적 정통성 강조와 국제적 이미지 제고의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분단 이후, 첨예한 정치∙군사적 긴장 속에서 남북한의 스포츠를 통한 교류와 협력은 더러 중단되기는 했어도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 2018년 7월 4일, 남북의 농구 선수들이 평양에서 친선 대회를 가졌으며, 경평전 축구 경기 부활 및 남북한의 주요 도시 대항 교류전 등이 모색되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에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이 출전하여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외신들도 “단일팀이 남북한을 위한 역사를 만들었다”, “경기는 졌지만 평화는 이겼다”고 보도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정치와 스포츠
남북의 스포츠 교류가 실질적 성과를 거두며 전개된 것은 1990년부터의 일이다. 남한의 노태우 정부는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따라 ‘북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북 간 교류, 특히 스포츠에 역점을 두었다. 이는 1990년 10월 평양과 서울에서 두 차례 펼쳐진 ‘남북통일축구대회’로 현실화되었다. 이 대회 때 평양의 능라도 5.1경기장에서 뛴 남한의 김주성(金鑄城) 선수는 한 인터뷰를 통해 “평양 주민들이 순안공항에서부터 남측 선수들을 무등 태워 1㎞ 정도 이동했던 기억이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감동적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 바 있다.
이러한 스포츠 교류는 남북 관계에 일정 정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남북은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에 사인하게 되었고, 이 합의서는 현재까지도 남북 간 대화와 협상에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역사적 문서가 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대화 무드를 기점으로 1991년 4월 일본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이 단일팀으로 출전할 수 있었다. 남한의 현정화(玄靜和)와 북한의 리분희(李粉姬)가 한 팀을 이뤄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덩야핑이 이끄는 중국을 3:2로 꺾고 여자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훗날 영화 <코리아>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6월에는 남북 단일팀이 포르투갈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해 8강까지 올라가는 성과도 거뒀다.
이처럼 본격화되는가 싶었던 남북 스포츠 교류는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북한의 극심한 경제난에 따라 한동안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남북의 스포츠 교류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것은 2000년 6월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 회담을 갖고 ‘6.15 공동선언문’을 채택한 이후부터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사상 첫 남북한 공동 입장이 성사됐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003년 아오모리동계아시안게임,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2004년 아테나올림픽까지 남북한 공동 입장이 이뤄졌다.

그리고 2002년 9월에는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통일축구경기’가 열렸는데, 이때 남한의 최태욱(崔兌旭) 선수와 북한의 리강인 선수는 유니폼은 물론 신고 있던 축구화까지 벗어 서로 교환하는 감동적 장면을 연출했다. FIFA가 위생 문제를 이유로 들어 경기 직후 유니폼 바꿔 입기를 자제해 달라고 권고했지만, 최태욱과 리강인은 축구화까지 바꿔 신으면서 한 민족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줬다.

2018년 2월 9일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남북한 선수단과 관계자들이 한반도기를 들고 함께 입장하고 있다. 주최국 한국은 15개 종목 145명이 참가했으며, 북한은 5개 종목 22명이 출전했다.

다시 찾아 온 평화의 전기
북한은 2011년부터 ‘축구 강국, 체육 강국’을 주창하고 나섰다. 문화와 스포츠를 정책의 우선 순위로 두고, 이른바 ‘사회주의 문명국’으로 나가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2015년, 김정은 위원장은 동아시아 축구연맹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북한 여자 축구 선수들을 공항까지 직접 마중 나가 격려하였으며, 능라도와 양각도 경기장, 평양 골프장, 마식령과 삼지연의 스키장 등의 시설을 의욕적으로 확충하고 있다. 아울러 2013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아시아클럽 대항 역도선수권대회에서는 최초로 남한의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애국가가 연주되기도 했다.
김정은 체제 이후 변화하고 있는 북한의 정책에 따라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 북한의 권력 수뇌부들이 방남하였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이 전격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특히 평창동계올림픽에서는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이 구성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018년 7월 4일, 남북의 농구 선수들이 평양에서 친선 대회를 가졌으며, 경평전 축구 경기 부활 및 남북한의 주요 도시 대항 교류전 등이 모색되고 있다. 이렇듯 한반도에 평화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진행되면서 남북 스포츠 교류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다!”

지난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는 북한 응원단 229명이 참가했다. 남북한 양측 선수단을 모두 응원했던 이들의 규모는 북한 선수단 22명의 열 배에 달했다. 동시에 북한은 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정예 연주가, 가수, 무용수 140여 명으로 구성된 예술단을 파견해 강릉과 서울에서 두 차례 공연을 열기도 했다.

올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북한 응원단을 남한 관람객들이 환영하고 있다. 북한 응원단은 경기장 안에서뿐만 아니라 인근 관광지에서도 인파를 불러 모으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북한 응원단은 한반도 정세와 북한 체제의 특수성뿐 아니라 여성 단원들의 뛰어난 미모로 세계적 주목을 받는다. 이들의 등장은 긴장을 완화시키고 화해 분위기를 대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 남북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특히 국제 스포츠 대회를 주최하는 남한의 입장에서는 분단 국가에서의 안전 문제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각국 선수단과 정부를 안심시킬 수 있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대규모 북한 응원단은 예상대로 남한 국민들뿐만이 아니라 국제 사회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경기장 안에서는 물론 인근 관광지에서도 수많은 인파를 불러 모아 대회 기간 내내 어디를 가나 언론의 취재 대상이 되었다.

네 번째 방문
북한은 그동안 아시아 지역에서 열리는 국제 스포츠 대회에 종종 응원단을 파견해 왔는데, 남한에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2005년 인천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 방문이었다.
응원단 파견은 북한 내부에서도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인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응원단원들에게는 흔치 않은 해외 여행 기회가 주어지고, 경우에 따라서 향후 신분 상승 기회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응원단 입단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응원단은 주로 평양의 예술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용모와 출신 성분, 충성심 등 엄격한 기준에 의해 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응원단 파견이 무산된 이유가 입단을 위한 과열 경쟁 때문이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있다.
우리 사회에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설 중에 ‘남남북녀’ 라는 말이 있다. “남자는 남쪽 사람들이 더 잘나고, 여자는 북쪽 사람들이 더 곱다”는 뜻이다. 이 때문인지 북한 응원단에 쏟아지는 뜨거운 관심이 깜짝 스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2002년 응원단장 리유경과 최연소 단원 채봉이는 남한에 인터넷 팬클럽이 만들어질 만큼 커다란 인기를 누렸고, 조명애는 가수 이효리(李孝利)와 광고를 찍기도 했다.
북한의 퍼스트 레이디 리설주는 역대 응원단원 중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2003년 남북청소년적십자 행사를 위해 처음 남한을 방문했을 때부터 빼어난 미모로 시선을 끌었다. 이에 북한 측은 그를 2004년 금강산 남북교사회담과 2005년 인천아시아육상선수권 응원단에도 포함시켰다. 당시 리설주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앞으로 예술단에서 활동하는 게 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모란봉중창단 단원을 거쳐 2011~2012년경 김정은 위원장과 결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북한 응원단이 언제나 좋은 화제만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한 예로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참가를 위해 방문했을 때는 응원단보다 소위‘김정일 현수막 사건’이 더 화제가 됐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응원단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얼굴이 담긴 현수막이 장대비를 맞으며 길가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우리 장군님 초상화 젖는다. 그냥 갈 수 없다”며 다 같이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이에 현수막을 황급히 철거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북한 응원단이 여자 쇼트트랙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응원을 펼치고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 남한을 방문했던 북한 응원단은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에서도 229명이 특유의 일사불란한 동작과 구호로 시선을 끌었다.

인기, 그리고 화제
평창동계올림픽에서는 초반에‘김일성 가면 논란’이 뜻하지 않게 터져 나왔다. 응원단이 북한 가요 <휘파람>을 부를 때 꺼내 쓴 가면에 대해 “김일성의 젊은 시절 모습을 연상시키는 가면을 통해 북한을 찬양했다”는 주장이 남측 일각에서 제기된 것이다. 우리 정부와 북한 측은 “북한 유명 배우의 얼굴을 본딴 미남 가면일 뿐 정치적 의미는 없다”면서 “김일성의 얼굴에 구멍을 뚫는 행위를 할 리 없다”고 해명했다.
이보다 앞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평가전에는 이른바 ‘독도 한반도기’가 등장했다. 이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일본 정부의 항의가 예기치 못한 문제를 불러올 것을 우려해 한반도기에서 독도를 삭제할 것을 권했다. 한국은 이를 받아들였고, 남북한이 동시 입장한 개회식 때도 독도 없는 한반도기를 사용했다. 그러나 북한 측은 “통일기에 우리 민족 고유의 영토를 표기하는 것일 뿐”이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고, 북한 응원단은 대회 기간 동안 일관되게 인공기와 더불어 독도 한반도기를 흔들며 응원을 펼쳤다.

과거 북한 응원단은 존재 자체로 화제가 되었다. 첫 방문인 2002년 당시 숙소로 사용된 만경봉호가 정박한 항구에는 이들을 보기 위해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북한 특유의 ‘딱따기 응원’과 단체 율동에 큰 호응이 있었고, 이들의 응원을 따라하며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2005년 인천에서 개최된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이후 13년 만에 평창에서 다시 만난 북한 응원단은 여전히 활기찬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들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우리는 하나다!”, “우리 선수 잘한다”, “우리 민족끼리” 등의 구호를 외쳤고, <고향의 봄>, <설날> 등 남북한 국민들이 다 함께 익숙한 노래를 합창하며 특유의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이들은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남한의 음악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국가들의 경기에는 철저히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고, 남북한 선수단의 경기가 끝나면 곧장 자리를 뜨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북한 응원단의 모습을 지켜본 일부 시민들은 “고립된 섬 같다”, “그들만의 세계에 갇힌 느낌이다”, “기계나 꼭두각시 같다”는 등 과거와는 다소 다른 반응을 보였다. 최근 계속되었던 북한 측의 핵무기 도발과 성급하게 구성되었던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 등이 여론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정윤수(Jeong Yoon-soo 鄭允洙) 스포츠 평론가,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김영록(Kim Young-rok 金泳錄) 스포츠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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