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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18 AUTUMN

기획특집

평화의 전주곡:
대중문화로 다가서는 두 한국
기획특집 1 영화가 말하는 남북 관계와 대중 정서

분단과 전쟁을 겪은 후 65년, 아직도 냉전이 계속되는 한반도에서 북한에 대한 남한 국민의 인식은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대중문화, 그중에서도 영화만큼 그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야도 없다. 2000년 역사적인 첫 남북 정상 회담 무렵부터 현재까지 상영된 북한 소재 영화들을 살펴보면 남한 사회가 북한 및 남북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시각의 변화를 되짚어 볼 수 있다.

<쉬리>(Shiri), 1999, 강제규(姜帝圭)
© 강제규필름(Kang Je-gyu Films)

<은밀하게 위대하게>(Secretly Greatly), 2013, 장철수(張哲秀)
© 엠씨엠씨(MCMC)

<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 2000, 박찬욱(朴贊郁)
© 명필름(Myung Films)

<태극기 휘날리며>(Taegukgi: The Brotherhood of War), 2004, 강제규
© 강제규필름(Kang Je-gyu Films)

<웰컴 투 동막골>(Welcome to Dongmakgol>, 2005, 박광현(朴光賢)
© 필름있수다(Film It Suda)

<베를린>(The Berlin File), 2012, 류승완(柳昇完)
© 외유내강(Filmmaker R & K), 씨제이이앤엠(CJ ENM)

<강철비>(Steel Rain), 2017, 양우석(楊宇錫)
남과 북을 대표하는 두 인물이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어 핵전쟁을 함께 막으려는 노력을 긴박감 있게 다룬다.

“한국 영화의 역사는 <쉬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99년 개봉한 강제규(姜帝圭) 감독의 <쉬리>는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서울에서만 약 245만 명, 전국 582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수치와 무관하지 않다.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을 기준으로 했을 때 100만 관객을 넘긴 영화는 1993년 개봉한 임권택(林權澤) 감독의 판소리 소재 작품 <서편제>가 유일했다.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한 외화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당시, 한국 영화들은 스크린쿼터제 속에서 간신히 버텨 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쉬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줬다. 제작비도 당시로서는 최고액이라고 할 수 있는 31억 원이 투자되었는데,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은 향후 한국 영화의 블록버스터화를 가속시키며 문화 산업으로서 한국 영화가 성장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쉬리>의 어떤 점이 그런 대중적 성공을 가능하게 했는가 하는 점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변화하고 있던 남북 관계를 과감하게 영화 속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주제, 새로운 시각
<쉬리>는 북한의 강경 세력이 남한과의 화해 무드를 깨뜨리기 위해 일으키려는 테러를 막으려는 사투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클라이맥스에 북한의 공작원들과 남한의 기관원들이 서로 대치하게 되는 경기장은 마치 당대의 남북 관계를 그대로 묘사한 듯한 풍경을 만들어 냈다. 남북한 지도자가 함께 관람하는 남북 친선 축구 대회가 남북 간 화해 분위기를 담아 냈다면, 이를 반대하는 강경 세력의 등장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던 긴장과 적대감을 표현했다. 그런데 관객들은 남녀 주인공들이 이념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 속에서도 사랑을 확인하는 이야기에 공감했다. 북한을 더 이상 반공 시절의 ‘적’이 아닌, 같은 민족으로 바라보려는 당시 대중의 달라진 정서를 영화가 잘 반영했던 것이다.
냉전의 종식에 대한 열망은 이듬해인 2000년 6월 13일 분단 이후 55년 만에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손을 맞잡는 장면으로 실현되었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이루어진 당시의 정상 회담은 한반도 정세에 획기적 변화를 예고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해 9월 개봉한 박찬욱(朴贊郁)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에 서울에서만 251만여 관객이 열광한 것은 이 역사적 만남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았다. 판문점이라는 긴장감이 넘치는 특수 공간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을 추리해 가는 이 영화는 긴장과 대립의 이면에서 남북 병사들이 은밀하게 소통하며 우정을 나누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당시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분위기가 형성되고 1993년에는 문민 정부가 들어서기도 했지만, 북한에 대한 보수 세력의 만만찮은 반발이여전했고 실제로 국가보안법이 많은 예술 작품들의 자기 검열을 만들어 내던 시대였다. <쉬리>는 액션 첩보물이라는 장르적 특징에 사랑 이야기를 더하는 우회적 방법을 썼지만,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 병사들의 우정을 직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당시 박찬욱 감독은 “이 작품으로 구속까지도 각오하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바로 직전 남북 정상 회담이 극적으로 이뤄지면서 오히려 더 큰 열광으로 이어졌다.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 2016, 이재한(李宰漢)
1950년 9월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실미도>(Silmido), 2003, 강우석(康祐碩)
북한 잠입을 목적으로 맹훈련을 받았던 특수 부대의 실화에 근거한 영화로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장르의 확장
<쉬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성공 가능성을 확실히 찾아낸 강제규 감독은 2004년 보다 커진 스케일의 <태극기 휘날리며>를 들고 다시 화려하게 등장한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는 화해를 추구하는 대북 관계의 기조를 계속 이어갔다. 이제 남북 관계를 담는 영화들은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았고, 과거 반공 시절 다뤄졌던 것과는 사뭇 다른 관점들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닌 그 안의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관점이었다.
2003년 대북 공작을 위해 지옥 훈련을 받는 특수 부대 요원들을 통해 분단 상황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다룬 강우석(康祐碩) 감독의 <실미도>가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리고 이듬해 <태극기 휘날리며>가 두 번째로 천만 관객의 고지를 점령했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의 비극 속에서 한 가족이 철저히 파괴되는 과정을 형제애의 시각으로 그렸다. 어쩌다 징병된 동생 때문에 함께 참전하게 됐지만, 전투 속에서 피폐해진 형이 결국 북한군에 가담하게 됨으로써 형과 동생이 서로 총을 겨누는 비극적 상황을 담았다. 반공 시절 ‘빨갱이’라 치부됐던 북한 군인들 역시 남한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고, 나아가 ‘형제’였다는 메시지가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2005년 상영된 박광현(朴光賢)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은 전쟁과 맞서는 휴머니즘을 내세움으로써 640여 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영화는 전쟁이 비껴간 동막골이라는 산골 마을에 한국군, 인민군, 미군이 함께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길을 잃고 동막골에 들어오게 된 그들은 한 공간에서 지내며 정을 쌓아가고, 아군과 적군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만들어 간다. 결국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적이 아닌 전쟁 그 자체와 싸우는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반전(反戰)의 목소리가 커진 당시 대중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았다. 또한 이 작품이 파격적이고 독특했던 것은 한국전쟁이라는 트라우마적 소재를 재기 발랄한 판타지와 코미디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남북 관계를 담는 영화들이 보다 다양한 형식으로 관객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일종의 장르적 금기가 깨진 것이다.

이제 남북 관계를 담는 영화들은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았고, 과거 반공 시절 다뤄졌던 것과는 사뭇 다른 관점들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닌 그 안의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관점이었다.

상업화의 급물결
이즈음 남북 관계를 다루는 영화들도 상업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2010년에 상영됐던 송해성(宋海成) 감독의 <무적자>는 탈북자가 등장하지만 <영웅본색>류의 느와르 형식을 시도했다. ‘당할 적이 없는 자’이면서 ‘국적이 없는 자’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이 작품은 ‘탈북자는 살인 무기’라는 막연한 선입견과 환상에 기대어 느와르 액션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북한 사람은 어딘가 다르고, 거친 삶을 살아왔으리라는 막연한 추측에 근거한다. 그래서 남한의 조직 폭력배 정도는 벌벌 떨게 만드는 탈북자 캐릭터를 통해 거의 전쟁에 가까운 비현실적 액션들이 만들어진다.
당시 남북 관계 소재 영화들이 본격적인 상업화의 물결을 타고 있었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 준 작품은 2010년 개봉작인 이재한(李載漢) 감독의 <포화 속으로>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낙동강 전투는 한국전쟁의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의 하나로 과거 반공 영화 소재로도 여러 차례 다루어진 바 있다. 이 영화는 그런 부류의 반공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전 영화도 아닌 지극히 상업적인 전쟁 스펙터클을 그려 냈다.
이러한 상업화의 물결은 ‘경제 대통령’을 자임하며 2008년 당선된 이명박 정부 시절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경제’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2013년까지 이어진 이명박 정부 시절 남북 관계를 담은 영화 중 그나마 진지함을 유지한 작품은 장훈(張熏) 감독의 <고지전>이 거의 유일했다. 고지 하나를 두고 남과 북이 번갈아가며 점령하는 과정을 통해 전쟁의 무모함과 무익함을 드러낸 작품이었다.
상업화의 경향이 결실을 맺었던 작품이 2012년 나란히 등장했던 류승완(柳昇完) 감독의 <베를린>과 장철수(張哲秀) 감독의 <은밀하게 위대하게>이다. 각각 약 720만 관객과 약 696만 관객을 기록한 이 두 작품은 모두 북한을 소재로 다루고는 있지만, 장르물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는 상업 영화로서 성공했다. <베를린>은 2002년 시작되어 2016년 <제이슨 본>까지 이어진 이른바 ‘본 시리즈’가 갖는 스파이 액션이라는 장르적 특징을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북한 스파이와 국정원 요원들의 대결 구도로 풀어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꽃미남 간첩단’이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조합을 경쾌한 접근 방식으로 선보였다. 북으로부터 버려진 간첩단이 남한에서 사실상 슈퍼히어로 역할을 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웹툰 원작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영화로도 성공했으며, 젊은 세대들이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주었다. 기성 세대들에게 간첩은 김신조 같은 실제 남파됐던 무장 간첩을 떠올리게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남파 간첩을 심지어 ‘꽃미남’으로 상상할 만큼 발랄해졌다는 인식의 변화를 드러냈다.
한국 영화에서 다루는 남북 관계는 이후에도 상업화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해 코미디나 형사물, 스릴러 장르의 문법을 따라갔다. 그리고 이들 작품 속에 그려진 북한군의 이미지는 ‘살인 무기’로 캐릭터화되어 소비되었다. 그런 와중에 눈여겨볼 대목은 반공 영화는 아니지만 보수적 관점을 드러내는 영화들이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 작품이 2015년 작 <연평해전>과 2016년 작 <인천상륙작전>이다. 600만 관객을 모은 <연평해전>은 2002년 6월 실제로 서해상에서 벌어졌던 남북 간 교전을 소재로 했던 만큼 제작 전부터 관제 영화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념적 측면에서 보수적으로 치우친 영화가 아니냐는 의구심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이념 또한 상업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군인들의 단체 관람이 이어졌고, 첫날 667개였던 스크린 수가 5일 후 1,013개까지 늘어나면서 스크린 독점 논란도 불거졌다.

<고지전>(The Front Line), 2011, 장훈(張熏)
전쟁의 무모함과 허무함이 주제인 이 영화는 이명박 대통령의 보수 정부 시절 남북 관계를 소재로 제작된 영화 중 비교적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 준다.

<연평해전>(Northern Limit Line), 2015, 김학순(金學詢)
2002년 6월 연평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실제 남북한 간의 무력 충돌을 소재로 한 영화로 보수적 관점을 보여 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인천상륙작전> 역시 보수와 진보의 대결 구도를 활용한 상업 영화였다. 제작사 대표가 “정신 무장을 하고 안보 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들었다”고 말했던 만큼 이념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형적인 전쟁 스펙터클로 풀어냈을 뿐이었다. ‘이념은 피보다 강하다’며 이념이 다른 가족에게 총을 겨누는 북한군 장교를 절대적인 악으로 세우고, 맥아더 장군을 신적인 존재로 그려 냄으로써 전쟁의 참상보다는 승자의 카타르시스를 강조했던 것이다. 전쟁의 스펙터클과 이념의 상업화를 통해 이 영화는 7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적 상상력과 현실
2017년 상영된 황동혁(黄東赫) 감독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소재로 한 영화였지만, 당시 고조되었던 북핵 위기와 맞물리면서 남북 관계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들이 부딪친 영화이기도 했다. 조선의 조정이 청의 대군에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당시 척화파였던 김상헌(1570~1652 金尙憲)과 주화파였던 최명길(1586~1647 崔鳴吉)이 치열하게 벌인 역사적 논쟁을 담고 있었지만, 그것이 당시 남북 관계에 대한 보수와 진보 사이의 서로 다른 관점을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치욕적인 삶은 살지 말아야 한다”며 응전을 주장하는 예조판서 김상헌과 “살아야 비로소 대의도, 명분도 있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의 주장은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보수의 주장과 외교적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진보의 주장을 상기시켰다. 실제로 정치권의 진영 대결로까지 이어진 이 영화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북핵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차가 얼마나 뜨거운 이슈였던가를 잘 드러낸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시점에 극장에 걸린 양우석(楊宇錫) 감독의 <강철비>는 다시 해빙기를 앞둔 남북 관계에 대한 기대와 함께 445만여 관객이 극장을 찾게 만들었다. 가상 핵전쟁 시나리오를 담은 이 영화는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강철비’ 같은 살상 무기에 의해 순식간에 지옥도가 되어 버리는 장면의 끔찍함을 보여 준다. 하지만 그런 비극이 적국의 위협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분단을 이용해 권력을 쥐려는 이들의 욕망에 의해 발생한 일이라는 데 공감하는 남북 양쪽의 요원을 등장시킨다. 그래서 그들이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어 핵전쟁을 막으려 공조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그들은 자신들이 싸워야 할 적이 남도 북도 아닌, 분단을 이용하려는 권력자들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관객들은 이 영화가 보여 주는 스펙터클보다 남과 북을 대변하는 두 인물이 핵보다 뜨거운 휴머니즘으로 핵전쟁이라는 비극에 맞서 싸우는 모습에 힘찬 박수를 보냈다.
남북 관계를 담은 한국 영화의 변화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당시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와 맞물려 있다는 흥미로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만큼 정부의 의지가 대북 관계를 바라보는 대중의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한국 영화 속에 나타나는 남북 관계 변화의 흐름은 분명히 대결 구도에서 화해와 소통의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자주 꾸는 꿈은 현실이 되기도 한다던가. 영화가 먼저 꾸었던 꿈들은 믿기 힘든 현실이 되기도 한다.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 단 둘이 햇빛 환한 숲속의 다리를 거닐며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말이다.



독립영화들이 탈북자를 보는 시선

독립영화의 주된 덕목은 상업성에 가려져 소외된 소재들을 정직하게 다루는 것이다.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몇 편의 독립영화들은 이들이 남한의 자본사회에서 겪는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여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이라는 스스로의 존재 근거를 증명하고 있다.

<련희와 연희>(The Namesake), 2017, 최종구, 손병조
탈북민이 처한 현실과 남한의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을 병치시킨 작품이다.

2017년 말 개봉된 독립영화 <련희와 연희>에는 실제 이름은 같지만 각기 남북한 식의 다른 발음으로 불리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련희는 탈북 과정에서 잃은 딸에 대한 상처를 안은 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고, 연희는 그 편의점에서 유통 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훔치다가 들켜 련희와 인연을 맺게 된다.
련희나 연희 모두에게 남한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편의점 손님들이나 다른 아르바이트생까지도 탈북민인 련희를 은근히 무시한다. 힘든 사정은 연희도 마찬가지다. 난폭한 아버지 때문에 집 밖으로 ‘탈출’하긴 했지만, 세상은 차갑기만 하다. 누가 아빠인지조차 알 수 없는 아이를 가진 연희는 심지어 공원에서 성추행을 당할 뻔한다.
이 영화는 ‘집에서 탈출한 여자, 조국에서 탈출한 여자’라는 포스터 문구에서도 드러나듯 탈북민이 처한 현실과 남한의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을 병치시켰다. 살기 힘들어 내려온 남한이 결코 살기 쉬운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련희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집 나와 출산을 앞둔 연희를 끌어안는다. 탈북 과정에서 잃은 딸 때문에 고통 받던 련희는 연희의 출산과 함께 비로소 그 깊은 악몽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난다.
이 영화는 ‘탈북민’과 ‘여성’이라는 소재가 소외된 지점에서 만나 연대를 통해 문제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동시에 영화는 두 여성의 만남을 통해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화두로 부각되고 있는 젠더 문제를 탈북민 문제와 중첩시킨다.

2014년 미장센 단편영화제에 출품되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명희>는 다큐멘터리적 접근 방식으로 지극히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탈북민을 다룬 여타의 영화들과는 사뭇 다르다. 보통 탈북민을 다룬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탈북 과정의 험난함과 끔찍함 같은 것이지만, 이 작품은 그렇게 탈북해 온 명희가 남한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는 모습만을 그려 내고 있다.
영화는 기체조를 배우는 수련원 같은 일상 공간에서부터 시작한다. 친구에게 이끌려 그곳에 가게 된 명희는 수진 언니와 미정을 만나 친해지게 된다. 별로 특별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영화는 털털한 성격의 수진 언니와 금세 친해진 명희가 그 언니네 옷가게에 매일 나가 무보수로 일을 도와 주면서 불거지는 의외의 갈등으로 긴장 구도를 만든다. “북한에서는 한겨울에도 밖에 나가 돌을 깨야 한다”며 무보수로 도와 주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명희에게는 아무런 경제 관념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친한 언니의 일이니 당연히 도와 주는 게 인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다르다.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남한에서 노동에 대한 보수는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친구들이 “네가 수진 언니의 머슴이냐?”고 묻는 말에 명희는 흔들리게 된다.
일상적 만남과 우정으로 시작됐지만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와 다를 수밖에 없는 경제 관념과 사고 방식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 상황은 <명희>가 탈북민을 다루는 방식이다. 탈북민을 타자의 시선으로 다루던 여타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함께 살아가는 친구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백미는 그런 이야기를 꺼낸 친구에게 명희가 속내를 드러내며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이다. “목숨 걸고 넘어왔는데, 너희들한테 이런 대접 받으려고 넘어온 거 아니다”라는 명희의 당당한 발언은 남한 사회가 은연중에 탈북민들에 대해 갖고 있는 무시나 동정의 시선을 아프게 꼬집는다.

<명희>(Myung-hee), 2014, 김태훈
이 영화는 서로 다른 사고 방식과 경제 관념으로 인해 벌어지는 탈북 정착민과 주변 사람들의 갈등 상황을 다뤘다.

<무산일기>(The Journals of Musan), 2010, 박정범(朴庭凡)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네오 리얼리즘적 시선으로 탈북민의 현실을 조명한다

한편 <무산일기>는 독립영화이면서도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타이거상 및 국제비평가협회상, 러시아 타르코프스키영화제 대상 등 무려 16개의 트로피를 수상했다. 토론토 릴아시안 국제영화제 측은 이 영화에 대상을 수여하면서 “어떤 탈북자의 투박하고 거칠지만 감동적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한 인간의 숭고한 투쟁을 발견하게 된다. 주인공이 보여 주는 진솔하고 강렬한 생존에 대한 집념을 기리며 심사위원은 만장일치로 이 영화를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는 심사평을 내놓았다.
<무산일기>가 이처럼 해외에서까지 호평을 이끌어 냈던 것은 이 영화가 가진 네오 리얼리즘적 시선 덕분이다. 영화는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승철이 버텨 내는 하루하루를 담아내지만, 그 기록이 비추는 것은 탈북민의 현실만이 아니다. 그것은 남한의 가난하고 소외된 ‘무산자(無産者)들’의 힘겨운 삶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리얼리티를 담고 있는 이 영화에는 탈북민에 대한 편견과 그들이 생존해야 하는 차가운 현실이 등장한다. 전단지 붙이는 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승철의 삶은 결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욕설과 폭력이 일상화된 이곳에서 그의 삶은 여전히 생존을 위한 험난한 과정 그 자체다. 그나마 그를 끌어안아 주는 것은 모두를 신의 자식으로 여기는 교회와 버려진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되며 묵묵한 위로가 되어 주는 강아지가 전부다.
1987년 쪽배를 타고 북한을 탈출해 온 김만철(金萬鐵) 가족은 기자 회견에서 남한을‘따뜻한 남쪽 나라’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무산일기>의 탈북민 승철에게 ‘따뜻한 남쪽 나라’는 없었다. 영화는 엄혹한 생존 경쟁의 현실만이 놓여 있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정덕현(Jung Duk-hyun 鄭德賢)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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