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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SUMMER

기획특집

돌의 섬 제주 이야기 기획특집 1 역사가 된 돌들의 형태

제주의 돌들은 제주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돌담 안에 물고기를 가두었다가 잡는 어로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농업과 목축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고, 외부 세력의 침략과 약탈을 막는 긴요한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제주 곳곳에 산재한 여러 형태의 돌담은 곧 이곳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다.

조선시대에 말을 원활히 방목하고 관리하기 위해 국영 목장의 울타리를 돌담으로 쌓았는데 이것이 ‘잣성’이다. 산 아래쪽에 위치한 잣성은 개발이나 훼손으로 흔적만 남은 경우가 많지만, 중산간 지대의 잣성들은 아직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것들이 있어 제주 목축 문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돌은 시간을 이긴다. 이 영원성의 매혹이 사람들로 하여금 커다란 돌을 세워 영웅적인 일들을 기념하고, 차곡차곡 쌓아 공간의 경계로 삼게 한다. 제주는 어디를 파든 돌이 나온다. 제주 사람들은 이 돌로 삼가야 할 곳과 침범하지 말아야 할 곳을 구분하고, 물길을 막고, 바람 길을 돌리고, 말을 가둔다. 이것이 바다 한가운데 솟은 화산섬에 대대로 정착해 온 사람들이 터득한 삶의 양식이다. 그 점에서 제주의 돌들은 덧없는 시간과 변화무쌍한 자연의 과잉을 통제하는 매혹의 규범 안에 있다. 그 규범의 본질은 노동이다. 그걸 모른대서야 1,950m의 한라산을 거대한 늙은 여인이 치마에 흙을 퍼 날라 만들었다는 고난의 창조 신화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을 이긴 돌들은 푸른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닳고 닳은 침묵에 잠겨 있다. 피부는 거칠고 색깔은 검다.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는 늘어진 곡선과 난폭한 구멍들, 누군가의 손가락을 밟으며 켜켜이 올라선 돌담, 어깨를 파묻고 부둥켜안고 있는 돌무더기들, 뒹구는 돌들의 부드러운 가장자리, 문신 같은 청동의 이끼들. 그리고 이 검은 알몸의 아랫부분을 가리고 돌아서 있는 어린 누이 같은 은빛 억새 들판과 한 무더기의 노란 유채꽃.
우리가 할 일은 많지 않다. 고작해야 얼마 안되는 자료를 뒤적거리거나 아니면 돌들의 몸에 남은 상처인지 우정인지 모를 흔적을 살피다 잠시 먼 데를 보는 일뿐. 그러면서도 내심 돌 속에 스민 누군가의 온기와 시대의 목격자로서 퉁명스럽게 내뱉었을 걸쭉한 삶의 언어들을 다시금 느끼고 싶은 것이다.

풍요로웠던 돌 그물의 한철
제주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돌담은 ‘원(垣 stone weir)’이다. 시기적으로 고기잡이가 현생 인류의 출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원담 혹은 갯담으로도 불리는 원은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닷가 연안에 1m 안팎의 높이로 돌을 쌓아 만든 느슨한 둑을 말한다. 그러니까 밀물을 따라 연안으로 나온 물고기 떼가 돌담 안에 머물다가 썰물 때 물이 빠지면 물고기들만 돌담 안의 얕은 물속에 가두는 장치다.
제주 바다의 특징 중 하나는 바닷가와 펄 사이에 용암 지대인 돌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뿜어져 나온 용암이 바다로 흘러들면서 생긴 특이한 지형이다. 바닷가에서부터 바다 속으로 길게는 2km까지 흘러간 곳도 있다. 제주 사람들은 이 바다를 ‘걸바당’이라 한다. 이런 환경에서 한반도의 리아스식 침강 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원이라는 독특한 어로 문화가 생긴 것이다.
원을 만들 때는 대개 바닷가의 자연 지형을 이용한다. 뭍 쪽으로 활처럼 휘어 만을 이룬 곳이면 양쪽 곶을 이어 돌담을 쌓거나 바위가 섬처럼 솟아 있는 곳에서는 그 암반에 의지해 양 옆에 돌담을 쌓기도 한다. 밑바닥이 움푹하게 꺼져 썰물 때도 물이 고이는 지형은 그 둘레에 야트막한 돌담만 쌓아도 널찍하고 훌륭한 돌 그물이 된다. 이런 원을 마을마다 적게는 10여 개에서 많게는 20여 개씩 가지고 있다.
제주 사람들이 철마다 고대하는 물고기는 크기가 10~20cm 정도 되는 멸치다. 제주말로 ‘멜’이라 부르는데, 이 멜 떼가 원 안까지 회유하는 8월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뜰채나 바가지로 멜을 건진다. 원은 마을의 공동 소유이므로 잡은 멜은 참여한 사람 모두에게 고루 나누어 준다. 당연히 원을 쌓고 보수하는 일도 함께 한다. 잡은 멜은 각종 양념을 넣고 조려 먹거나 기름에 튀겨 먹는다. 제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멜국’이다. 갓 잡은 멜에 배추와 붉은 고추를 넣고 끓인 ‘멜국’은 담백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남은 멜은 말리거나 소금에 절인 뒤 양념이나 밑반찬으로 쓴다.
해안 도로를 만들면서 원이 많이 훼손된 데다가 배 위에서 건조 가공까지 하는 멸치잡이 배들이 늘면서 원에서의 고기잡이는 한가로운 노인들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썰물 때면 하얀 파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굽이굽이 이어진 검은 돌담 풍경은 한철의 풍요에 들썩이던 그 시절의 마을 정경을 떠올리게 한다.

제주의 전통 어로 시설인 원담은 해안의 자연 지형과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돌을 쌓아 만들었다. 과거에는 해안가를 따라 수백 곳에 산재해 있었지만, 지금은 원형이 제대로 보존된 곳이 많지 않다.

비바람을 이긴 농업 유산
제주에는 삼성혈이란 제법 엄숙한 관광지가 있다. 세 성 씨가 솟아 나온 구멍이란 뜻의 삼성혈 신화의 핵심은 이들에 의해 ‘오곡의 씨’가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시기를 가늠하긴 어려우나 어느 날 앞선 농업 기술을 가진 세력이 들어와 탐라라 불리던 이 섬의 지배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으리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우호적인 주변 세력으로 고려에 조공을 하며 통제와 감시를 받던 탐라는 결국 1105년 ‘탐라군’이란 읍호를 얻어 고려에 편입되는 길을 택한다.
이 시기에 흥미로운 사연 하나는 고려 때 제주 판관이던 김구(金坵 1211~1278)가 제주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돌담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제주 밭이 예전에는 경계의 둑이 없어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 들어 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김구가 판관이 되어 주민의 고통을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주민에게 편한 점이 많았다.” - 『동문감』(東文鑑)
인구가 늘면서 농지는 낮은 평지에서 중산간 지대로 점차 확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간할 땅이란 바위와 돌투성이고 그 사이에 덮인 흙은 대부분 화산회토(volcanic ash soil)라 강수량은 많아도 내리는 대로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게다가 고려 시대의 농법은 휴한 농법(休閑農法 naked-fallow cropping)이다. 한 해 농사를 짓고 나면 땅의 거름기가 떨어져 지력을 회복하기 위해 한 해나 두 해를 쉬었는데, 이 기간에 농토가 풀로 뒤덮이고 또 폭우로 지형이 바뀌면 아마 이웃 밭과 경계를 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로 인해 토지 분쟁이 일어나고 또 이를 빌미로 지방 세력가들이 약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는 일마저 생기자 판관 김구가 토지 소유의 경계에 밭을 일구면서 나온 크고 작은 돌로 일정한 높이의 담을 쌓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의 재임 기간은 1234년부터 1239년까지다. 이 기록은 제주에서 밭담이 성행한 시기를 가늠하는 근거가 되었다.

2014년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지정된 제주 밭담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생긴 농업 유산이다. 제주 사람들은 밭에서 골라낸 현무암으로 담을 쌓아 강한 바람과 토양 유실을 막았다. 섬 전역에 분포해 있는 밭담의 전체 길이는 2만2,108㎞에 달한다.

밭담을 쌓은 뒤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토지 경계를 다투는 일은 물론이고 방목하던 소와 말에 의한 농작물 피해도 줄었다. 밭담은 폭우에 의한 토양의 유실을 방지하고, 거센 바람을 막아 땅의 습도를 유지해 작물이 성장하는 데에도 유리했다. 농사일은 줄고 수확량은 늘자 돌 많고 척박한 고지대가 식구들이 기대어 살 만한 농토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의 제주도는 국내 다른 지역에 견주어 농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으며, 그 대부분이 밭농사이다. 대표 작물로 감귤이 유명하지만 겨울 채소인 무와 당근, 브로콜리, 양배추도 빼놓을 수 없다. 제주 당근과 브로콜리는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무와 양배추, 가을감자는 40%를 오르내린다. 자연의 악조건을 이겨 낸 제주도의 밭담 농경지는 2014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의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제주 월정리에서는 해마다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리는 ‘밭담 축제’를 열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저마다의 방식으로 쌓기 시작한 밭담의 총 길이는 2만 2,000km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안가에서 중산간 지대까지 제주를 거미줄처럼 엮어 놓은 밭담은 이제 농업적 가치나 빼어난 경관을 넘어 제주의 소중한 문화 유산으로 인식된다.

밭담이 낮은 곳에서는 감자나 당근처럼 키가 작은 식물을 재배하고, 높은 곳에서는 조와 보리 같은 곡식을 키운다.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것 같아 보이지만, ‘돌챙이’라는 전문 석공들이 공들여 쌓은 담이다.

밭담에서 군사용 돌담으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틈틈이 거칠고 좁은 밭의 경계를 놓고 이웃과 실랑이를 하며 살던 제주사람들이 격변의 세계사 속에 등장한 시기는 13세기 후반 몽골과의 만남 이후다. 그러니까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중국을 정복하고 원나라를 세운 직후였다. 이 무렵 강화의 임시 수도를 거점으로 한 몽골과의 오랜 전쟁에 지친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를 하며 친몽 정책으로 돌아서자 반몽 세력의 주축이던 고려의 정예 부대인 삼별초는 이에 불복하고 서남해안 진도를 거점으로 저항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1270년 9월, 고려 정부는 삼별초의 퇴로로 예상되는 제주에 군사를 보내 해안가에 이들의 상륙을 저지할 돌담을 쌓도록 지시했다. 해안가에는 오래전부터 파도를 막고 정박에 용이하도록 쌓아 놓은 돌담들이 있었을 터이고, 이에 잇대거나 보강함으로써 처음으로 군사적 목적의 돌담을 구축한 것이다. 파도에 시달린 해안가의 돌은 둥글다. 그러다 보니 밭담처럼 외줄 쌓기가 어렵고 또 방어용이란 목적 때문에 쉽게 넘지 못하도록 여러 겹으로 높이 쌓았다. 물론 그 고된 노역은 제주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야심찬 계획은 그로부터 3개월 뒤에 상륙한 삼별초군의 역습을 막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갔다. 삼별초와 고려 사이에서 관망하던 제주 사람들이 그동안 강제 노역과 착취를 서슴지 않던 고려 정부보다는 삼별초에 더 호의적이었던 것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삼별초군의 방어용 진지로 바뀌어 재구축된 돌담 역시 몽골에 맞설 만큼 견고하지는 못했다. 이듬해 진도에서 대패한 삼별초는 제주에 재결집해 항거하지만, 1273년 2월 여몽연합군의 대대적인 협공에 패하고 만다.
그 뒤 이 해안 돌담은 원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한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가 끝날 때까지 수백 년 동안 물과 식량을 약탈하는 왜구들의 침략을 막는 방어용 진지로 바뀌었다. 잦은 왜구들의 발호에 맞서기 위해 조선 시대 제주 목사들은 대부분 무관 출신이 임명되었다. 19세기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교류와 약탈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이양선의 출몰을 지켜보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환해장성(環海長城)’이라 불리는 이 해안 돌담은 제주 올레길을 걷다보면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무너지고 훼손되어 그 거창한 이름의 위용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올레 18코스에 있는 화북(禾北) 지역 별도연대(別刀煙臺) 위에서 내려다보는 해안 돌담은 물러설 곳이 없었던 제주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한 조사에 의하면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저마다의 방식으로 쌓기 시작한 밭담의 총 길이는 2만 2,000km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안가에서 중산간 지대까지 제주를 거미줄처럼 엮어 놓은 밭담은 이제 농업적 가치나 빼어난 경관을 넘어 제주의 소중한 문화 유산으로 인식된다.

애월읍에 위치한 항파두성(缸坡頭城)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몽골과 맞서 싸우던 마지막 격전지로 1271년 이들이 제주로 거점을 옮기고 나서부터 축성되었다. 외성은 아래에 납작한 돌을 깔아 기초를 다진 후 흙으로 축조된 길이 6㎞의 토성이며, 내성은 중심부에 돌을 쌓아 만든 둘레 약 800m의 석성이다. 당시 쌓았던 토성 일부가 남아 있다.

바다로 침입해 들어오는 외적을 막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가며 쌓은 돌담이 ‘환해장성’이다. 제주에는 19개 해안마을에 환해장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중 동북쪽 해안의 화북동 구간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 현재 620여 미터가 남아 있으며, 이 중 절반가량이 최근 보수되었다. 성의 높이는 약 2.5m이다.

유목과 농업의 울타리가 되다
제주와 몽골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대립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100년 남짓 동안의 인적 물적 교류는 제주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하나가 목축 문화의 유입이다. 마을 주변의 초지에 소나 말을 방목하는 일은 농업만큼 오래된 일이지만, 제주에 본격적인 말 목장이 만들어진 것은 삼별초를 제압한 원나라가 제주를 직할지로 삼은 직후인 1276년 160필의 말과 목축 전문가인 목호(牧胡)들을 불러들여 성산 일대에 ‘탐라 목장’을 설치하면서부터다. 이것이 오늘날 제주 말 산업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공간을 유랑하는 유목민과 공간의 지배권을 확보해야 하는 정착민과의 근원적인 마찰은 원나라가 물러나고 새로 조선이 건국되면서 날로 더해졌다. 방목하던 말들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늘고 해안 지역에서는 부족한 목초를 두고 다툼이 커지자 1429년 제주 출신 관리 고득종(高得宗 1388~1452)이 세종에게 안정적으로 목마장을 운영하기 위한 대책을 건의했다. 한라산 둘레 중산간 지역을 10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각각에 국영 목마장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 핵심은 해안 지역의 농경지와 중산간 지대의 방목지 사이에 말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돌담을 쌓는 것이었다. 높이 1.2~1.5m의 돌담이 섬 전체에 둘러쳐졌다. 이것이 ‘잣’ 또는 ‘잣성’이다. 이렇게 조성된 목마장에서 국가 소유인 말과 개인 소유의 말을 공동으로 방목했다.
이 정책으로 제주의 목축업은 크게 번성했고, 여기서 길러진 말들은 대부분 군마로 쓰이거나 왕실에 진상되었다. 제주 동부 지역 산간에는 김만일(金萬鎰)이란 목축인이 수천 필의 말을 키우는 개인 목마장도 있었는데 그는 임진왜란 때 개인 말 500필을 나라에 헌납하고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전란이 있을 때마다 수백 필의 말을 바쳐 선조로부터 종1품의 헌마공신(獻馬功臣)이란 칭호를 받기도 했다.
잣에 대한 보완도 꾸준히 이뤄졌다. 말들이 더 깊은 삼림으로 들어가 길을 잃거나 동사하지 않도록 고산 지대에 ‘상잣’을 쌓았으며, 중간 지대에는 ‘중잣’을 쌓아 해를 걸러 농사와 방목을 번갈아 하게 함으로써 농토를 넓히는 효과도 누렸다. 이렇게 유지되어 오던 국영 목장은 일제 강점기에는 마을 공동 목장으로 변신해 명맥을 이었다. 소똥과 말똥을 주워 연료로 사용하는 제주의 풍습은 오랜 목축 문화의 산물이다. 겹겹으로 한라산을 에워싸던 잣은 개발과 방치로 훼손되고 유실되어 지금은 60㎞ 정도가 남아 있다.
눈여겨보면 제주의 돌담은 예전과 다르다. 생활과 환경의 변화로 존재 방식과 형태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밭담은 더 높아지고, 늘어나는 자동차 도로 양옆에는 방호벽처럼 획일적으로 돌담이 들어서고 있다. 돌담을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철망 안에 넣거나 돌 사이에 시멘트를 채워 넣기도 한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하다. 자기 안에 옛날의 가치를 지키려는 마음과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충돌하는 복잡한 심사가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중의 욕망도 제주의 오랜 유산이다.

이창기 (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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