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Features

2017 WINTER

기획특집

강원도: 산의 나라, 신화와 기억 기획특집 5 속초 바닷가 실향민 마을의 가슴 아린 향수

휴전선 아래 설악산을 뒤로 하고 동해를 바라보는 속초시는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며 그어진 38선 이북의 땅이었다. 1953년 한국전쟁 휴전 당시 군사분계선 남쪽에 위치하여 남한 땅이 되었고, 이곳에는 아직도 전쟁 중 북한을 떠나온 실향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한국전쟁 중 북한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로 형성된 속초 바닷가 아바이마을은 주민들이 귀향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살아오며, 주거 환경과 교통 수단이 많이 달라지고 생업도 변화하고 있다.

속초지구 신포읍민회 김의준(金義俊) 회장은 고향 얘기만 나오면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지난 9월 초 어느 날 저녁, 함경도 토속 음식으로 이름난 신다신식당 테라스에서 만난 그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고 활력이 넘쳤다.
김 회장은 “불과 다섯 살 때여서 어렴풋한 기억만 나지만, 그날 상황만은 또렷하다” 면서 전쟁 당시의 일들을 돌이켰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 형제 7남 1녀가 몽땅 월남에 성공했다. 흥남철수 후 1년 남짓한 1952년 1월의 일이었다. 신포를 출발한 배 세 척이 함께 남하했다고 한다. 한 척에 80여 명 씩, 세 척이니 250여 명쯤이 마양도 앞바다를 헤치고 나왔다. 불행히도 한 척은 인민군의 포격으로 침몰했다. 여기까지 얘기한 김 회장의 말꼬리가 떨리는 목소리에 묻혔다.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은 엄동설한까지 겹쳐 아마 모두 희생되었을 겁니다. 나머지는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이곳 아바이마을로 들어왔는데, 어언 65년이란 세월이 흘렀어요.”
아바이는 ‘아버지’ 또는 ‘어르신’을 뜻하는 함경도 방언이다. 아바이마을이라는 이름에는 북에서 대충 바닷일을 하며 살던 남정네들이 전쟁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절박하게 일군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바이마을 주민들이 즐겨 먹는 함경도 고향 음식이 유명해지자 전문 음식점들이 하나둘 생겨나 전국의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식당 골목을 형성하게 되었다.

마음속에 새긴 북녘의 고향 주소
지금은 북한 땅인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읍에서 할아버지가 커다란 통조림 공장을 한 덕분에 김의준 회장의 집안은 비교적 부유했다. 그러나 인민군에게 유산계급은 숙청의 대상이었다. 그의 가족이 월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손에 꼭 쥐어 준 약도가 한 장 있다. 그가 지갑에서 주섬주섬 빛바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고향집 동네가 상세하게 그려진 종이였다. 신포 2구 항구여관 맞은편, 어업조합 오른쪽에 ‘우리 집’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큰길 건너 신포 3구엔 인민군 중대본부가 있다. 종이 한쪽엔 ‘咸鏡南道 北靑郡 新浦邑 二區 七二七 番地 전화 331번’ 이라고 적힌 정갈한 한자 글씨가 아직도 명료하다. 아마도 지금은 쓰지 않을 주소와 전화번호임이 분명하지만, 그는 언제나 지갑 속에 이 종이를 넣고 다닌다.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이 종이를 들고 고향집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

강원도 양양군에 속해 있던 속초는 1942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인구라야 고작 4,000~5,000명. 1950년 겨울, 흥남철수 길에 남으로 내려갔다 올라온 피난민들을 비롯해 휴전선으로 갈라지기 전 육로로 남하한 고성, 통천 지역의 북부 강원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밀고 밀리는 악전고투 속에 38선 이북으로 불쑥 치고 올라간 전황이었으니, 수산업이 제법 활발한 속초 바닷가로 피난민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중 상당수가 함경남도 사람들이었다.
처음 이들은 미군이 주둔하던 공유지에 게딱지 같은 판잣집을 얼기설기 이어 지은 토굴집에 자리를 잡았다. 허리춤 정도 땅을 파고 비바람을 겨우 피하는 루핑(roofing)막사도 있었다. 두세 달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니, 잠시 그저 비바람이나 피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모여든 인구가 2,000여 세대에 달했다. 아바이들은 멍텅구리 전마선에 올라탔고, 아낙들은 포구 바닥에 퍼질러 앉아 그물에서 고기를 떼내 연명하던 먹먹한 사연이 깃든 시절이었다.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읍이 고향인 김의준 씨가 갯배를 끌고 있다. 갯배는 아바이마을과 속초 시내를 이어주던 교통 수단이었으나, 다리가 건설된 후에는 주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물이 되었다.

인기 드라마의 무대
동해와 만나는 청초호의 한귀퉁이 모래톱마을이었던 아바이마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속초항을 준설하면서 물길이 생긴 것이다. 그때 등장한 것이 갯배다. 갯배는 속초 중앙시장에 봉투나 새끼를 꼬아 납품해서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했던 아바이마을 사람들의 생명줄이 됐다.
그러던 중 아바이마을의 이색적인 함경도 음식이 서서히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때마침 이 마을을 배경으로 한 TV 드라마 「가을동화」가 큰 인기를 끌었고, 덕분에 예전 함경도에서 마을 잔치 때나 만들어 먹던 아바이순대, 가자미회 냉면, 명태회 냉면 등이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마을 아낙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오던 함경도 음식을 파는 식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돼지대창에 무청 시래기와 다진 돼지고기, 선지, 마늘, 된장 등을 넣고 버무린 아바이 순대는 단번에 도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속초 앞바다에서 명태가 많이 잡힐 때는 제철 명태가 돼지대창을 대신할 만큼 인기가 있었지만, 이젠 명태가 자취를 감췄으니 옛날 이야기가 됐다. 함경도 음식은 달콤짭짤하다. 도시의 젊은 청춘들은 자극적인 맛을 탐한다. 게다가 여행이 갖는 들뜬 감성은 달고 짠 맛과 찰떡궁합이다. 그것이 북양태건 원양 오징어건 열정의 미감은 원산지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아바이마을의 생명줄은 갯배에서 다리로 바뀌었다. 아바이마을 위를 가로지르는 설악대교, 금강대교는 밤이면 멋진 야경을 연출한다. 이제 갯배는 미어터지는 관광객들을 수용하기 위해 좀 더 크고 편리한 배로 대체된다고 한다. 뗏목처럼 넓고 평평한 갯배는 승객 스스로 철끈을 당겨 건너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관광객들은 오히려 흥이 난다. 아바이마을의 변화는 이뿐만 아니다. 요즘 속초 중앙시장은 생뚱맞게 닭강정 가게가 불야성이다. 아바이순대보다 더 자극적인 닭강정 포장마차가 장관을 이룬다. 곧 아바이순대를 밀어낼 기세다.
‘속초 4구’였던 아바이마을은 이제 청호동이라는 번듯한 이름을 가졌다. 그러나 상주 인구는 많이 줄어서 겨우 240여 가구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세대 아바이들은 60여 명만이 생존하고 있고, 2~3세대가 제2의 고향 속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속초 인구의 1할 정도인 8,000여 명이 함경도 출신인 셈이다.
봄마다 열리는 ‘실향민문화축제’ 는 주제가 애잔하다.
“시간도 지우지 못한 고향의 봄.”
명절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향 생각도 이제 관성적인 되새김질 속에 그냥 그리워하다 이내 사그라진다는 실향민들. 어쩌면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체념을 강요당하고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명절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향 생각도 이제 관성적인 되새김질 속에 그냥 그리워하다 이내 사그라진다는 실향민들. 어쩌면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체념을 강요당하고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추억, 꿈, 그리고 희망
필자의 고교 시절 국어를 가르치셨던 ‘동해안 시인’ 황금찬(黃錦燦, 1918~2017) 선생님의 고향이 속초였다. 선생님은 짜여진 교과보다는 되도록 인문적 감성을 심어 주려 애쓰셨다. 당신의 고향 속초 앞바다의 시정을 언뜻언뜻 얘기해 주셨다. 해방 전 도쿄 유학에서 돌아와 함경북도 성진에서 한때 지내셨으니, 함경도 사투리가 섞인 바다 이야기는 10대의 내 여린 귀에 시낭송처럼 정겹게 다가왔다. 당시 고전문학 시간에 배웠던 정철의 「관동별곡」은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청간정의 빼어난 경치를 노래했으니 시공을 뛰어넘어 신비감은 더해만 갔다. 그러나 당시 속초와 설악산은 내게 ‘피안의 세계’였다. 태백준령 넘어 아득히 먼 땅이었다.
1970년대 초반 대학 시절,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봄날이었다. 속초가 고향인 친구를 따라 정오쯤 동마장 터미널에서 속초행 버스에 올랐다. 한계령을 굽이굽이 돌아 속초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해도 뉘엿뉘엿 미시령을 넘어가고 있었다.

속초시 서북쪽에 위치한 영랑호는 신라 시대 무술을 연마하던 네 명의 화랑이 경치를 즐겼던 데서 이름이 유래했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다.

반나절을 꼬박 달려왔으니 버스도, 우리 일행도 곤죽이 된 상태였다. 이미 사위는 어둑어둑해져 영금정 등대에 불빛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거기서 다시 간성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교암리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해변도, 포구도 온통 어둠에 잠겼다. 절벽 위의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해풍 소리만 들려왔다.
내게 바다라고는 교련복 걸치고 몇 차례 보았던 인천 앞바다가 고작이었던 때다. 바다의 이미지는 찝찌름한 냄새로 뒤섞인 암갈색조가 전부였었다. 어쩌다 햇빛에 기대어 잠깐 반짝이는 푸르스름한 물빛만 기억에 남았다. 실제 서해를 황해(黃海)라고 배웠다. TV도, 교복도 흑백이었던 모노톤의 시대였다. 그래서인지 이튿날 새벽, 가파른 절벽 위 천학정(天鶴亭) 팔작지붕과 낙락장송 사이로 들어오는 파랑의 온갖 스펙트럼은 감동 그 자체였다. 미술 시간에 배웠던 단조로운 ‘블루’는 어디에도 없었다. 동해 먼 바다 너머 남태평양, 대서양, 아니 지중해는 어떤 색깔일까. 20대 초반 나의 상상력은 자유분방했고 이미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동해안 최북단 고성 비무장지대 바로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DMZ박물관에서는 평화와 생태를 주제로 한 전시물을 항상 볼 수 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다분히 근대문학적인 풍경의 연속이었다. 서울 가는 버스래야 고작 하루 두세 차례, 북으로 뻗은 자갈길 신작로는 앞차가 일으키는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며 간성 쪽으로 덜컹거리며 달렸다. 변변한 포구 하나 보이지 않는 일망무제의 모래해변을 오른쪽으로 끼고 계속 달렸다. 설악산과 금강산 사이의 바닷가는 밋밋해 천하절경 사이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형상이었다. 진부령을 넘어 서울로 오는 길은 반나절이 아니라 한나절로 이어졌다. 엉덩이가 얼얼할 만큼 온몸이 율동을 거듭했고, 콧속은 매캐했다. 원래 진부령 너머 속초, 고성 땅은 쉽게 갈 수 없는 38선 이북의 땅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타의에 의해 덜컥 그어진 38선이 한국전쟁으로 휴전선이 되어 양양까지 내려왔으니, 이미 이곳 사람들은 이산의 설움을 전주곡처럼 품었던 것이다. 실향민의 도시 속초는 백두대간 곳곳을 터널로 뚫어 만든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큰맘 먹고 찾아가야 하는 생경한 땅이었다.

30대 중반, 일찌감치 내 차를 장만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동해안을 따라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7번 국도를 달렸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에게 분단의 현실을 보여주고 싶어도 당시엔 어림없었다. 휴전선에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외금강과 삼일포의 풍광은 세월이 꽤 흐른 후에야 일반인들에게 허용되었다. 최북단 마을 명파리에서 감자전을 곁들인 막국수로 점심을 먹고, 대진을 지나 거진을 향해 남쪽으로 차를 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분단의 애환을 보여주기에 화진포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파도가 몰려와 모래톱이 쌓여 호수가 된 석호의 표본이니 현장 학습에도 제격이었다. 게다가 남북 현대사의 갈등이 응축된 이승만(李承晩)과 김일성(金日成)의 별장이 근거리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수복 지구인 데다가 휴전선이 북쪽으로 깊숙이 치고 올라간 지형으로 인해 극도의 긴장 국면이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왔던 곳이다. 모 여대의 하기 휴양소가 있어 엄혹함 속에서도 젊은 군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곳. 화진포는 이율배반의 바닷가, 극단이 혼재하는 해변이었다.

이제야 가까워진 속초
울산바위의 숨막히는 풍광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미시령 굽이굽이 가파른 옛길 밑으로 터널이 뚫리면서 속초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중년에 접어들어 찾는 설악은 계곡과 봉우리마다 친숙한 정겨움이 가슴 가득 채워지는 곳이다. 미시령 들입에 자리한 화암사(禾岩寺)를 찾았다. 어라! 설악산 화암사가 아니고 금강산 화암사란다. 얼마 전에 찾은 고성의 건봉사(乾鳳寺)도 금강산 건봉사라 한다. 건봉사야 금강산이 지척이고 한때는 금강산과 설악산의 모든 말사들을 거느렸던 거찰이라서 그렇다치지만, 미시령 바로 옆 사찰까지 금강산 줄기를 선언하니 설악과 금강은 한통속인 것이 분명하다.
설화도 얽혀 있다. 최근 들어 자주 찾았던 영랑호만 해도 외금강의 삼일포와 이야기가 얽혀 있다. 신라 시대 사선(四仙)으로 불렸던 네 명의 화랑이 금강산에서 수련을 마치고 서라벌에서 있을 무예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영랑(永郞), 안상(安詳), 남랑(南郞), 술랑(述郞)이었다. 그중 영랑이 이곳 호숫가의 범바위 옆, 바람 한 점 없는 수면에 비치는 울산바위의 모습에 그만 정신을 빼앗겼다. 그래서 무술 대회고 뭐고 까마득히 잊은 채 이곳에 주저앉아 풍류를 즐겼다는 데서 ‘영랑호(永郞湖)’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북쪽의 고성 삼일포도 이들 네 명의 화랑이 그곳 풍광에 빠져 사흘 동안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화진포 성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북한 지도자 김일성이 가족과 함께 여름 휴양지로 이용했던 곳이라 ‘김일성 별장’이라 불린다. 전쟁 중 파손된 건물을 후에 재건축하여 지금은 북한 관련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둘레가 7.8km인 영랑호반을 걷는다. 봄날 벚꽃 흐드러진 산책로를 홀로 아무 생각 없이 걸어도 좋고, 초여름 녹음 우거진 느티나무 아래 범바위 모퉁이를 따뜻한 사람과 소곤대며 걸어도 좋은 곳이다. 그러다가 해질녘 호반에 실루엣으로 드리운 울산바위를 보게 되면 마치 선경에 빠져든 느낌을 맛볼 수도 있다. 천년 전 영랑도 그 비경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하긴 울산바위에 새끼줄을 동여매 어디론가 가져가고 싶은 상상에서 속초라는 지명이 생겼다니 울산바위는 속초의 근원인가 보다.
이제 다시 청초호로 돌아와 보자. 청초호는 휘황찬란하다. 번화가가 에워싸고 있으니 차도 배도 사람도 간판도 요란하고, 밤늦도록 왁자한 모습이 이어진다. 삐까번쩍한 소란함과 온갖 먹거리를 찾고 싶다면 청초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좋다. 청초호반의 코마린요트에서 출발, 물목을 빠져나가 앞바다의 조도를 돌아오는 한 시간 요트투어도 즐길 만하다. 청초호에서 엑스포타워 넘어 드리워진 설악 능선은 스마트폰으로 대충 눌러대도 작품이다. 아바이마을에서 설악대교 넘어 창공에 떠 있는 대청봉은 감탄사만 잘 곁들이면 그대로 멋진 시가 된다. 그것이 구름 한 점 없는 찬 겨울날 눈 덮인 설악이라면 시릴 만큼 압도적일 것이다.

송영만(Song Yeong-man 宋永萬) 도서출판 효형 대표
안홍범(Ahn Hong-beom 安洪範) 사진가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