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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AUTUMN

기획특집

한국의 주방: 화덕부터 가상현실까지 기획특집 2 중국, 일본과 견주어 본 한국의 옛 부엌

중국 대륙에서 발원하여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동아시아의 부엌 문화. 한민족의 전통적 부엌 문화는 다시 각 지역의 기후와 쓰임새에 따라 독특한 구조로 발달했다. 현대식 주방은 조리와 식사를 겸하는 공간에 불과하지만, 전통 부엌은 가정의 안녕과 번영을 빌던 주부의 신앙 공간이기도 했다.

한국의 전통 부엌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을 피해 남향집 서쪽에 배치했다. 방과 이어진 벽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해 난방과 취사가 동시에 가능하도록 했으며, 한쪽에는 땔감으로 사용할 장작을 쌓아 놓았다.

한국의 부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진나라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에서 발견된다. 비록 “조왕을 모실 때에 공손함이 있으며 모두 문의 서쪽에 있다(祠祭鬼神 有巽施竈 皆在戶西)”는 한마디뿐이지만, 이는 부엌의 위치를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한국 부엌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도 말해 준다. ‘집 서쪽’은 남향집을 전제한 것이며, 실제로 한국은 99% 이상의 살림집에서 부엌을 서쪽에 두어 왔다. 만약 부엌을 동쪽에 배치했다면, 아궁이의 불길과 연기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거센 편서풍 탓에 굴뚝으로 빠지기 어려웠을 것이란 점에서 매우 과학적인 배치다. 옛 기록에 나타난 부엌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는 부엌의 배치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없다. 부뚜막에 구들을 놓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앞의 책에서 “부엌이 모두 서쪽에 있다”고 따로 언급한 까닭을 알 만하다.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4세기 때 무덤 안악 3호 벽화에 보이는 부엌도 중요한 자료이다. 무덤의 주인이 고국원왕(故國原王)으로 알려졌으나,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란 설도 있으며, 336년에 고구려에 와서 357년에 죽은 전연의 장수 동수(冬壽)라는 얘기도 있다. 안악 3호 벽화에 그려진 부엌은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은 독채 부엌이다.
예부터 궁궐이나 부잣집에서는 부엌을 안채 뒤에 따로 짓고 이를 ‘반빗간’이라 불렀다. 『조선왕조실록』(현종 7년인 1666년 1월 1일) 에서는 부엌 여종을 ‘반비(飯婢)’라 일렀다. 그러나 2015년 경복궁에 복원된 부엌 두 채는 이름이 소주방(燒廚房)으로 바뀌었다. 이 말이 『승정원일기』(인조 10년인 1632년 11월 9일)에 등장한 것을 보면, 17세기에는 반빗간과 소주방이라는 말을 같이 썼음을 알 수 있다. 민가에서는 반빗간을 ‘한뎃부엌’이라고 부른다. 반빗간은 순조 때 창덕궁에 지은 연경당 안채 뒤에 한 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처럼 부엌을 본채와 따로 둔 것은 화재가 본채로 번지는 것을 막고, 음식 냄새가 배어들지 않게 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차려야 할 일이 잦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반 가정에서도 부엌 부근에 한뎃부엌을 마련해 사용하였다.
반빗간은 중국에서 들어왔다. 한대(漢代) 무덤에서 발견된 화상석(畵像石) 그림 22점 가운데, 산동의 것만 10점에 이른다. 따라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 벽화가 그곳의 것을 빼닮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용마루의 까마귀도 태양신으로 받든 중국 민속을 받아들인 때문이다. 이는 백제도 따랐으며,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왕이 된 연오랑(延烏郎)과 아내 세오녀(細烏女) 이름에 까마귀 오(烏)자가 들어간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일본왕의 공식 복장 어깨에 수놓은 까마귀도 이와 연관이 깊다.
이밖에 디딜방아간, 마구간, 우물, 집짐승을 줄줄이 꿴 푸줏간도 중국식이다. 이러한 점에서 앞서 얘기한 안악 3호의 주인이 동수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조왕신의 신체(神體)는 부뚜막 뒷벽의 턱이나 가마솥 뒤에 올려 놓은 ‘종지의 물’을 가리킨다. 주부는 매일 아침 종지에 담겨 있던 물을 부뚜막, 아궁이, 소댕, 물두멍 따위에 조금씩 따라 버린 후 새로 길은 물을 담아 넣으며 그날 하루 온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빌었다.

지역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화로가 주된 난방 방식이었던 중국에서는 부엌 아궁이를 방과 인접해 설치할 필요가 없었으며 본채 옆에 독립적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부엌을 반빗간이라 하며 한국에도 유입되었다.

‘부엌’이란 말의 언어적 배경
오늘날 한국어에 ‘부엌’과 ‘정지’라는 말이 있다. 둘 다 같은 공간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지역에 따라 다르게 사용한다. ‘부엌’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비롯하여 경기도∙충청도∙ 전라도 등지의 서부 및 제주도에서 주로 쓰인다. ‘정지’는 함경도와 강원도를 중심으로 충청도∙경상도∙전라도 등지의 동부에 퍼져 있다. 이는 부엌에 북방과 남방 두 계열이 있음을 의미한다.
‘부엌’은 1481년에 나온 『두시언해』(杜詩諺解)에서 현존하는 고전으로는 처음 나타난다. 부엌의 ‘부’는 ‘불’에서 왔으며, ‘엌’은 장소를 가리키는 접미사이다. 당시에는 ‘부석’에 가까운 발음이었는데 현재 제주도 말 ‘부섭’을 연상시키는 것은 흥미롭다.
함경도 겹집은 혹독한 추위를 막기 위해 방을 앞뒤로 배치해 ‘전(田)’자 꼴이 되는 게 특징인데, 정지는 이러한 함경도 겹집의 중심 공간에서 온 말이다. 함경도와 가까운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서북 산악 지대의 오로촌족(Oroqen 卾倫春族)은 주거 공간인 천막 입구에서 마주보이는 화덕 뒤를 ‘말로’ 또는 ‘말루’라 이르고, 오른쪽의 아낙네 자리를 ‘정지뒤(Jungidui)’라고 부른다. 한국어 ‘마루’가 저들의 ‘말로’에서 왔다고 하므로, ‘정지’도 연관이 없지 않을 터이다. 흑룡강성 일대가 옛 고구려 땅이었던 점도 정지가 정지뒤에서 유래했다는 증거의 하나이다.
한편 부엌의 중국말 ‘주(廚)’는 절인 채소를 담는 그릇을 든 형상이라는 본래 의미에서 음식을 익히는 부엌의 뜻으로 바뀌었다. 요리사를 ‘주인(廚人)’ 또는 ‘포인(庖人)’이라 부르는 까닭이 이것이다.
일본에서는 부엌을 ‘다이도코로(台所)’ 또는 ‘갓테(カッテ)’라고 한다. 일본어 사전인 『소학관고어사전』(小學館古語辭典)에 보면, 다이도코로는 헤이안 시대에 궁중이나 귀족 집에서 사용하던 음식을 올려 놓는 발 달린 기구를 가리킨다. 갓테는 활을 당기는 오른손을 가리키며, 오른손이 왼손보다 쓰기 쉽다는 뜻에서 ‘생계’의 의미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부엌의 의미로 다시 바뀌었다.

신(神)을 모시던 공간
글머리에 언급한 『삼국지』에 “지기(地祇)를 받드는 방법은 다르지만 문 서쪽 부뚜막에 모신다”는 언급이 있다. 지기는 서울∙충청남도∙경상도 등지의 ‘조왕(竈王)’ 계열과 충청도∙전라북도∙제주 등지의 ‘화덕(火德)’ 계열로 나뉜다. 조왕도 조왕각씨∙조왕할망∙조왕대감 따위로 갈리지만, 주인이 아낙인 점에서 지기가 여성인 것은 당연하다. 조왕이 중국말인 것을 생각하면, 화덕이 우리 정서에 훨씬 가깝다. 조왕은 관념에 지나지 않는 반면, 화덕은 늘 쓰는 불과 연관이 깊은 까닭이다.
조왕신의 신체(神體)는 부뚜막 뒷벽의 턱이나 가마솥 뒤에 올려 놓은 ‘종지의 물’을 가리킨다. 주부는 매일 아침 종지에 담겨 있던 물을 부뚜막, 아궁이, 소댕, 물두멍 따위에 조금씩 따라 버린 후 새로 길은 물을 담아 넣으며 그날 하루 온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빌었다.
이와 달리 부뚜막이 없었던 제주도에서는 솟덕을 조왕으로 여겨, 솥을 괴는 돌 세 개를 ‘삼덕’으로 받들고 제물도 각기 차렸다. 이사를 갈 때도 이것만은 꼭 가져가는데 먼저 살던 집에서 누리던 복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는 중국의 사천, 운남, 귀주성 등지의 소수 민족 사이에서 행해지던 관습을 연상시킨다. 여하간 한국에서는 물을 지기의 신체로 첫손에 꼽았다. 물은 부정을 씻어서 행운을 불러들이는 선신(善神)일 뿐 아니라, 새 생명을 잉태시키는 산신(産神)이자 불길을 잡아 주는 보호신인 까닭이다.

한국의 전통 부엌은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을 피해 남향집 서쪽에 배치했다. 방과 이어진 벽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해 난방과 취사가 동시에 가능하도록 했으며, 한쪽에는 땔감으로 사용할 장작을 쌓아 놓았다.

중국의 경우 조왕의 신체가 물이 아니라 그림인 점은 우리와 다르다. 종이에 그린 그림을 시장에서 사거나 직접 그리기도 하며, 나무쪽에 쓴 신위로도 대신한다. 한국의 큰 절집에서 공양간에 조왕신상을 걸어 놓고, 공양을 짓고 나서 「반야심경」을 읊조리는 것도 중국의 영향이다. 중국에서는 조왕이 하늘의 옥황상제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피라고 보낸 심부름꾼으로 등장하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성이다. 한편 일본 동북 지방에서는 표정이 험상궂은 나무 탈을 조왕으로 받들며, 이를 화남(火男) 이라 부른다.
조왕은 대체로 해마다 섣달 그믐날 세상에 내려와서 두루 살펴본 각 가정의 일을 상제에게 알리며, 상제는 덕을 쌓은 집에는 복을, 악행을 저지른 집에는 벌을 준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각 집에서는 그때가 되면 아궁이에 엿이나 술지게미를 붙였다. 아궁이는 입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조왕의 입이 붙어서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떡이나 과일을 차리는 것은 물론 심지어 타고 갈 말까지 마련해서 환심을 사려 들었다.

부엌 기둥을 받친 초석 위에 자리를 만들어 물 그릇을 올려 두었다. 이 물은 조왕신의 신체(神體)로, 그 집의 주부는 매일 아침 물을 갈아 담으며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일본에 건너간 한국의 부뚜막과 굴뚝
일본의 산업 디자이너 에쿠안 겐지(Kenji Ekuan 榮久庵憲司, 1929–2015)는 『부엌 도구의 역사』(台所道具の歷史)라는 책에서 “카마도(かまど 부뚜막)가 한국에서 들어오기까지 일본에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 덕분에 열효율이 높아진 것은 물론 굴뚝까지 생겨서 사람들이 연기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했다.
‘칸(韓) 카마도’ 또는 ‘카라(韓) 카마도’로 불리는 부뚜막은 지금도 일본의 여러 한조신사(韓竈神社)에서 신령스런 기물로 받든다. 우리처럼 정월 대보름 무렵에 부잣집 흙을 가져다가 덧바르면서 행운이 깃들기를 바란다.
부뚜막을 따라 솥이 들어간 것은 당연하다. 에도 시대의 학자인 아라이 하쿠세키(Hakyuseki Arai 新井白石, 1657–1725)가 “옛적에는 부뚜막을 ‘카마(釜)’라 부르다가 뒤에 솥도 같이 가리키게 되었으며 이는 한어(韓語)의 사투리에서 왔다. 지금도 조선에서는 솥 이름으로 쓴다”고 적은 그대로이다. ‘한어 사투리’인 가마는 부뚜막의 북한말로, 함경도 지방의 겹집이 일본 동북 지방으로 들어간 것과 연관이 깊다. 1990년에 발행된 『암파고어사전』(岩波古語辭典)에도 “조선어 가마(kama 釜)와 뿌리가 깊다”는 설명이 있다. 이 말은 8세기의 『만엽집』(萬葉集)과 10세기의 『왜명류취소』(倭名類聚抄)에도 보인다.
한반도에서 전해진 솥을 처음 본 일본인들이 얼마나 신기해했는지는 현재도 시마네현(島根縣) 이즈모(出雲) 한조신사에서 솥을 신체(神體)로 섬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부뚜막과 한 몸을 이루는 것 가운데 굴뚝을 뺄 수 없다. 나카타 가오루(Kaoru Nakata 中田薰, 1877–1967)는 1906년에 발표한 논문「일한양국어의 비교연구」(日韓兩國語の比較硏究)에서 “오늘날에는 부뚜막을 구도라고 부르지만 이는 말뜻이 바뀐 결과로, 옛적에는 굴뚝을 일렀다. 한어의 비슷한 낱말인 ‘굴뚝’이 바로 그것이다. (…) 이러한 관계는 고대에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실제로 우리도 17세기에 굴뚝을 ‘굴똑’이라 불렀고 지금도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는 이 말을 쓰고 있으니 받침을 쓰지 않는 일본말에서‘구도’로 바뀐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한편 나라현(柰良縣) 오지정(王寺町)의 구도신사(久度神社)에서는 오래전부터 백제 사람을 주신(主神)으로 받들면서 솥을 지기로 삼고 있다. 솥 옆구리에 보이는 ‘경안(慶安) 원년(元年 1648) 8월에 바쳤다’는 명문(銘文)은 이때 새 것으로 바꿨음을 알려 준다. 그나마 필자가 2000년대 초에 갔을 때는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한국에서 부뚜막이 전래되기 전까지 일본의 부엌에서는 취사에 화로를 사용했다. 한국의 부뚜막에 감탄한 일본에서는 지금도 여러 한조신사에서 이것을 신령스럽게 받들고 있다.

신사 주변인 히라군(平郡)과 이코마(生駒) 일대는 옛적 백제 주민의 거주지였다.
또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홍윤기(洪潤基) 교수가 2007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홍윤기의 역사 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36」, 세계일보, 2007. 5. 2.)에 의하면 동양사학자 나이토 고난(Konan Naito 內藤湖南, 1866–1934)은 “이마키(今木)신은 외국의 신이며 구도신은 백제 성명왕(聖明王)의 선조 구태왕(仇台王)이고, 후루아키신의 ‘후루(古)’는 비류왕(比流王)이며, ‘아키(開)’는 초고왕(肖古王)이다”라고 말했다. 동아시아의 부엌 문화를 나무에 견주면 중국은 뿌리, 한국은 둥치, 일본은 가지이다. 그러나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세 나라 부엌의 모습이 다른 것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다양성을 지니게 된 결과이다. 꽃이 나뭇가지에서 피듯이 동아시아 부엌 문화도 일본에서 활짝 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광언(Kim Kwang-on, 金光彦) 인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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