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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SUMMER

기획특집

백제, 잃어버린 왕국의 자취를 찾아서 기획특집 2 빌딩과 아파트 숲 사이에서 사라진 왕도 찾기

백제는 삼국시대 때 가장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한강 유역에 가장 먼저 터를 잡은 나라다.
그 백제가 지배 체제를 갖추고 건립한 도성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다. 이제 먼 옛날 백제인들이 수백 년에 걸쳐 지혜와 노동으로 세웠던 도시는 사라지고 그 주변에는 올림픽 경기장이 들어서고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그 빌딩과 아파트 숲 사이 공터에 경계를 세우고 고개를 숙인 채 흙 바닥을 긁고 있는 이들이 있다.
사라진 왕도와 그곳을 활보했던 옛 사람들의 삶을 되살려보려는 그 마음으로 서울을 걷는다.

기단식 돌무덤인 석촌동 3호 고분은 백제를 강국으로 일으킨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구려 고분의 형식을 닮아 백제와 고구려 지배계층의 깊은 연관을 보여준다.

남한의 전체 인구 5000만 중 대략 2000만 명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살고 있다. 기원 전 한반도의 심장부를 왕도로 삼아 건국한 백제로부터 21세기 ‘강남스타일’까지 2000여 년에 걸친 다양한 문화가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 깊은 도시가 서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깊이와 넓이를 온전하게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이 서울이기도 하다.
고려시대(918-1392)에 잇따른 거란(契丹)과 몽골(蒙古)의 침략, 조선시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으로 이 나라의 많은 문화유산이 불타 없어졌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식민통치에 이어 한국전쟁으로 또 다시 전국이 초토화되었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문화유산의 상당 부분도 산업화와 개발의 거센 바람 속에 많이 유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들이 점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 점들을 선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로 면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로 재구성하여야 서울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온전하게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강 유역에 세운 최초의 국가
동양에서는 모든 생명의 삶을 하늘과 땅과 사람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인식해왔다.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과 강으로 이루어졌는데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맞물린 역상(逆像) 관계이며 상생 관계이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땅을 따라 흘러가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그 물길 주변에서 삶의 터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몽촌토성의 북쪽에는 성벽의 방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세웠던 목책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고대 3국이 길항하던 시대에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한 삼국의 쟁패에 앞서 가장 먼저 한강 유역에 터를 잡은 나라가 백제이다. 백제의 건국을 두고는 몇몇 이설이 존재하나 골자만 간추리자면 그 시조는 만주 일대의 부여(夫餘)로부터 떨쳐 나와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남하한 비류(沸流)와 온조(溫祖) 형제다. 그들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아들로 동생인 온조는 한강유역에, 형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이라고 불리었던 지금의 인천에 자리 잡았다. 온조는 자신을 도운 10명의 신하를 내세워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다가 미추홀의 형이 죽고 그의 백성들이 자신의 치하로 오자 이들을 받아들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이들은 더 남쪽으로 나아가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자리 잡은 마한연맹체(馬韓聯盟體) 54국 중 맹주인 목지국(目支國)으로부터 100리(40km)의 땅을 할양 받아 지역연맹체를 형성하고 그 세력을 키운 뒤 목지국을 병합했다. 마한연맹체의 새로운 맹주가 되어 마침내 국가의 기틀을 세운 것이다. 초기에는 5부 체제로 왕은 왕성(王城)이 있는 직할지만을 통치하고 나머지 지역은 5부장(部長)을 통해 간접 통치하였으나 곧 고대국가의 지배체제를 갖추었고, 늘어나는 인구도 수용하고 방어체제도 강화하기 위해 도성을 쌓았다.
이렇게 해서 건립된 것이 풍납토성(風納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이다. 지형상으로 풍납토성은 평상시에 주거하는 평지성이고 몽촌토성은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비상시에 대비한 산성이며 방위상으로 왕궁을 기준으로 풍납토성은 북쪽에 있어 북성(北城), 몽촌토성은 남쪽에 있어 남성(南城)이라 하였다. 지금의 만주에 터를 잡았던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산성(丸都山城) 같은 남북 이성체제(二城體制)를 갖춘 것이다.

몽촌토성의 해자는 지금은 연못으로 가꾸어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들이 점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잦은 외침과 개발 정책 때문이다. 그 점들을 선으로 잇고, 그 선들로 면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로 재구성해야 서울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온전하게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은”
풍납토성은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토성이다. 전체의 둘레가 3470m, 높이는 6m에서 13.3m, 성벽의 넓이는 30m에서 70m에 이르고 성 밖에는 물길을 내어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는 넓은 해자(垓字)가 둘러쳐져 있다.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며 동벽 1500m, 남벽 200m, 북벽 300m 정도이며 서벽은 1925년 을축대홍수(乙丑大洪水)로 유실되었으나 지금은 복원되어 있다. 성은 네 곳이 끊겨 있기 때문에 당시 성으로 통하는 문이 4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성백제박물관 로비에 복원 전시된 풍납토성 성벽 단면은 백제인이 켜켜이 쌓은 흙 단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성안에는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표현에 따르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은” 많은 건물들이 세워졌을 터이다.
발굴조사 결과, 집단취락시설의 주변과 성곽 둘레에 도랑을 파고 물을 가두어 두는 환호(環濠)가 3겹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각종 생활유물들도 원형을 유지한 채 발견되었다. 도로의 유구(遺構)와 수혈(竪穴) 등이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왕궁 내에 많은 국가시설물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풍납토성에서 남동쪽으로 약 700m 거리에 있는 몽촌토성은 주변의 높은 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의 지형을 이용해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축조한 독특한 토성이다.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고 필요에 따라 경사면을 급하게 깎는 등 인공을 가하기도 하였다.
북쪽으로는 목책(木柵)을 세웠으며 그 외곽에 해자를 둘렀는데 이 해자는 현재는 연못으로 가꾸어져 있다. 성벽의 총길이는 성벽 정상부를 기준으로 총 2285m 이고, 동북쪽 외곽에는 외성(外城)이 약 270m의 직선형태로 자리 잡고 있으며 높이는 대체로 30m 안팎이다.
북측의 외곽경사면과 외성지의 정상부에는 목책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고 동측의 외곽 경사면은 깎아내어 경사를 급하게 만들고 해자를 설치하였던 점으로 보아 북쪽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한 기지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저장혈(貯藏穴)의 유구와 망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판축성토대지(版築盛土臺地)와 같은 군사시설들이 발굴되어 이곳이 왕성이 아니라 비상 시기에 대피하는 국방의 최후 보루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최근에는 몽촌토성의 발굴조사과정에서 백제에 이어 고구려 시대까지 사용된 폭 18.6m의 2차선 도로가 발견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확인된 백제시대 도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이자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2차선 도로로서 몽촌토성 안쪽에서 북문을 지나 바깥으로 연결되는데,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잇는 대로(大路)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남쪽으로 수도를 옮긴 후 고구려 영토가 된 후 세 차례에 걸쳐 수리와 증축을 거치면서 발굴 당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돌, 풍화토, 점토 등을 섞어 포장한 이 도로는 워낙 단단하여 수레바퀴 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이곳에서 발굴된 또 다른 중요한 유물로는 관청을 뜻하는 ‘관(官)’자가 새겨져 있는, 목이 짧고 입이 곧은 백제 항아리 조각이 있다. 백제시대 유적에서 이런 글씨가 새겨진 토기가 발견된 것은 처음으로, 몽촌토성이 단순한 방어성이 아니라 도성을 겸하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무덤의 양식으로 시기와 신분을 살피다
2개의 도성 남쪽으로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일대에는 당시 지배층의 묘역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 제 3권에는 이 지역에 지상에서 그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는 분묘가 흙무지[토축(土築)]로 된 것이 23기, 돌무지[적석(積石)]로 된 것이 66기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대형 돌무지무덤 7기와 함께 널무덤[토광묘(土壙墓)], 독무덤[옹관묘(甕棺墓)] 등 30여 기가 남아 있다.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무덤이 이곳에 산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지역에는 또한 소형의 널무덤과 같은 평민이나 일반 관리의 무덤도 섞여 있고 서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중복된 것도 있다.
석촌동 일대에는 대체로 3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다양한 계급의 묘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 고분군에서 제일 큰 3호분은 긴 변 45.5m, 짧은 변 43.7m, 높이 4.5m규모의 사각형 기단식돌무덤[기단식적석총(基壇式積石塚)]으로, 기단은 3단까지 남아 있으며 3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시대 백제를 강력한 고대국가로 일으켜 세운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의 무덤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5세기 후반 공주(公州) 천도 이후 지배세력의 무덤은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로 바뀐다. 1971년에 극적으로 발굴된 무령왕릉(武寧王陵)이 바로 최초의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이며 이 즈음부터 삼국의 보편적인 왕실 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올림픽공원 안에 위치한 한성백제박물관은 백제인이 한강 유역에 터를 잡기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백제에 이어 한강 유역을 차지한 고구려와 신라 시대까지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서울 속 백제 유적 둘러보기
백제고분군-한성백제박물관-몽촌역사관-풍납토성

잠실에 있는 대형 레저쇼핑타운 롯데월드를 감싸고 있는 석촌호수는 본디 한강의 물줄기였으나 1970년대에 홍수에 대비하여 물줄기를 곧게 바꾸는 바람에 호수가 되었다. 동호와 서호로 나뉜 이 호수의 서호 언덕에 병자호란(1636–1637)의 상흔 삼전도비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를 출발점으로 삼아 서호를 반 바퀴쯤 돌아 나와 남쪽으로 밀집된 주거지역 사이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백제고분군이 나온다. 여기서 적석총을 비롯한 다양한 한성백제의 무덤양식을 둘러보고 올림픽공원으로 이동한다.
올림픽공원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주변에 주요 실내경기장들을 건설하면서 몽촌토성을 공원으로 가꾼 곳이다. 이곳에서 한성백제박물관과 그 앞뜰에 전시되어 있는 세계적인 거장들의 조각 작품들을 둘러본 뒤, 도심 속 트레킹 코스처럼 완만한 언덕을 이루고 있는 몽촌토성을 걷는다. 청소년 대상의 백제 역사 현장체험 박물관인 몽촌역사관에 들를 수도 있다.
올림픽 공원 북1문으로 나와 강동구청을 지나 큰길을 건너면 영파여자고등학교가 나온다. 학교 담벼락을 따라 주거지역으로 조금 들어가면 풍납토성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거대한 토성으로 우뚝 서 있다.
위의 순서로 한성 도읍기(기원전 18–475) 백제의 문화 유적을 걸어서 둘러보려면 꼬박 하루를 잡아야 한다. 조금은 고된 하루가 될지 모르나 현대와 고대가 극적으로 교차하는 이 지역을 음미하기엔 걷기가 최고의 방법이다.

몽촌토성은 1980년대에 여섯 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진 역사유적지이자 서울시민의 쉼터다.

사라진 역사의 빈칸을 찾아서
1970년대에 잠실지구 종합개발이 시작되면서 백제의 타임캡슐이라 할 이 지역은 개발과 보존 논리가 혼재하는 격변기를 거쳐야 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이 지역이 1988년 서울올림픽 경기장 부지로 선정돼 주경기장을 비롯한 각종 경기장과 부대시설들이 세워졌다. 그리하여 2천 년 전 역사문화의 숨결이 스며들어 있는 백제의 옛 도읍 터에서 20세기의 지구촌 축제인 올림픽이 열린 것이다.
먼 옛날 수백 년에 걸쳐 백제인들의 지혜와 노동력으로 세워졌던 도시는 사라지고 오늘날 그 주변에는 서울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드는 고층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다. 아파트 재건축, 도로 건설, 올림픽 시설 건축과 같은 적극적인 개발과 도시 정비가 지하 유적 발굴의 계기로 작용한 긍정적 측면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라진 왕도와 그곳에서 살았던 옛 사람들의 모습을 점에서 선으로, 다시 선에서 입체로 복원해내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연 지리학자, 인문학습원 서울학교 교장
안홍범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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