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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WINTER

기획 특집

21세기 한국영화: 꿈과 역동성 기획 특집 6 희미한 옛날 극장의 추억

사회의 변화에 따라 영화관도 빠르게 바뀌어왔다. 동네 시장 어귀에서 나름대로 주민들의 문화공간 역할을 하던 동시상영관 대신 대자본의 투자로 멀티플렉스가 들어섰다. 단관 시대에서 어느 극장에 가든 한 공간에서 다양한 작품을 골라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1962년 9월 서울 도심 국제극장 앞 광경. 추석 연휴를 맞아 영화를 보러 나온 시민들로 가득하다. 이 극장은 1985년 폐관되었고 현재 이 자리에는 광화문빌딩이 들어서 있다.

기억이란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다 발견된 고대 그리스의 석상이나 중국의 갑골편처럼 일단 꺼내 놓는 순간 서러웠던 과거를 잊고 스스로 목 좋은 곳에 자리잡고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리고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서슴없이 그저 그런 삶의 편린들을 최선의 한 장면으로 꾸미고 편집해낸다. 이 놀라운 기억의 능력 덕에 우리는 저마다의 유년시절을 간직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만의 거룩한 신화를 갖는다. 발터 벤야민이 편지 이외에는 결코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미셀러니를 쓰고자 했다는 이야기는 이런 기억의 마술에서 벗어나고자 한 엄격하면서도 소심했던 한 문예학자의 이루지 못한 갈망을 말해준다. 그러나 나는 이제부터 특별하지도 않고 맥락도 없는 기억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할 것이다. 나의 의도는 핵심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 자체에 있다.

빛과 어둠
나는 어머니와 둘이서 처음으로 극장에 간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평소와는 달리 하늘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작은 양산을 들고 있었다. 우리는 동사무소가 있는 작은 언덕을 넘어 땡볕이 내리 쪼이는 수인선 협궤 철길을 따라 걸어갔다. 나는 들뜬 기분을 감추고 왠지 모를 미안함에 키가 큰 서른아홉 살의 어머니를 힐끔거리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1967년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 날 본 영화는 <홍길동>(한국에서는 로빈 후드와 같은 존재다)이라는 만화영화였다. 자료를 뒤져보니 그 해 1월에 개봉되어 3일 만에 10만 관객이 몰렸다는 기사가 보인다. 보나마나 설 연휴였을 것이다. 그리고 8월은 재개봉 기간이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머니를 얼마나 졸랐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 무렵 <소년조선일보>의 애독자였던 나는 이 신문에 연재되던 신동우의 <풍운아 홍길동>이 만화영화로 만들어졌다는 뉴스를 일찌감치 접했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의 내용은 기억에 없다. 하지만 극장에 대한 기억만은 아직 남아 있다. 극장 문을 열자 느닷없이 얼굴을 뒤덮던 두껍고 부드러운 장막, 깊은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땀과 곰팡이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온기로 뒤섞인 미지근한 공기. 나는 손을 더듬거려 벽을 짚고 발바닥을 끌며 천천히 한 발 한 발 어둠의 심연으로 들어갔다. 이 어둠의 공간은 바닥이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렴풋이 각 층계마다 나란히 놓인 긴 줄의 의자가 보였고, 그곳에 각각 사람의 머리가 놓여 있었다. 안전을 담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어머니는 어렵지 않게 나의 손을 잡아 끌어 빈자리에 주저앉혔다. 머리 위로 한줄기 빛이 지나갔고 그 푸른 빛 속에는 미세한 먼지들이 오르내렸다.
나는 지금도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올 때면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사나운 빛의 거리로 내팽개쳐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나의 어둡고 불규칙한 심장이 차분하고 낯선 거리와 동화되는 데에는 언제나 상당한 배회의 시간이 필요하다.

왕우와 리칭
이 화려한 외출을 신호탄으로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동네극장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극장은 대개 시장통 주변에 있었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이면서 또한 밀실이기도 한 극장에서는 언제나 대담하게 각종 범죄가 저질러지고, 남녀 간의 사랑과 배신 그리고 복수의 신파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칡뿌리나 캐고 달리는 기차 구경 따위에 한눈을 팔던 소년들에게 영화는 압도적이면서 위험한 위안거리였다. 껄렁껄렁한 기도들의 눈은 어떻게든 모면한다 하더라도 극장 양 옆에 놓여 있는, 일제 강점기 영화 검열을 나온 경찰의 좌석으로 만들어져 해방 후에도 장내 선도라는 명목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임검석(臨檢席)은 그 자체로 하나의 두렵고 의문스런 기호였다. 대체로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자리는 이 흥미로운 것들의 해방구가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 불온한 곳이라는 생각을 키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왕우(王羽)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에 열광했고 리칭(李菁)의 <스잔나>(1967)에 눈물을 쏟았다. 충격적인 실수로 오른팔을 잃고 왼손 검법을 익혀 고수가 된 주인공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스승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줄거리도 새로웠지만 주인공 역을 맡은 왕우의 우수에 찬 눈빛이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빛날 때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 영화를 본 소년이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른팔을 옷 속에 숨기고 왼손으로 칼을 들고 왕우의 칼솜씨를 흉내 내며 저마다의 적들을 물리쳐본 경험이 아마 있을 것이다.
왕우는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스타어워즈에서 남자배우상을 수상했다. 70세가 된 노배우는 수상 소감에서 “저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뒤이어 나온 부산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김지석이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잊겠습니까? 한국의 중년 남자들은 모두 당신을 기억하고 고마워하고 있을 거예요”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단언컨대, 이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해 질 무렵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뒷동산에 올라 “해는 서산에 지고 쌀쌀한 바람 부네”로 시작하는 <스잔나>의 주제가를 몇 번이고 하모니카로 불며 리칭의 따듯하고 가련한 눈매를 그리워했다.

벤처스와 스푸트닉스
그렇다고 흥행에 성공한 잘 만들어진 외화만 골라 본 것은 아니다. 싸구려 액션 영화와 질 낮은 희극 영화에 낄낄거리기도 했고,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건전한 계몽 영화를 눈치껏 박수를 치며 보기도 했다. 그 중에 기억나는 영화가 <팔도강산>(1967)이다. 서울 사는 노부부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출가한 딸 집을 방문한다는 줄거리이지만 전쟁과 가난을 극복하고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한국 경제의 발전상을 알리는데 중점을 둔 영화였다.
1970년에 들면서 어느덧 사춘기 중학생으로 변신한 소년의 눈에 이처럼 체제 홍보적인 영화나 빤한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하이틴 영화가 주류를 이룬 극장은 더 이상 흥미로운 공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무렵 텔레비전이 안방을 차지하면서 주말마다 외화를 틀어주던 <명화극장>이란 프로그램이 등장해 ‘볼 만한 영화’에 대한 갈증을 얼마간 채워주었다.
허름하긴 했어도 나름대로 시장 골목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던 동네 극장들도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상영 중에 필름이 끊어지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어둠에 파묻혀 어른들과 덩달아 휘파람을 불고 소리를 질러대던 소년도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벤처스(The Ventures)나 스푸트닉스(The spotnicks)의 연주곡을 들으면 언제든지 돼지 저금통을 깨서라도 기어코 극장으로 달려가곤 했던 그 근심이 가득한 눈에 비쩍 마른 소년을 본다. 영화 한 편이 끝나고 동시상영을 위해 영사 기사가 분주하게 또 다른 필름을 준비하는 동안 흘러나오던 스푸트니크의 “하늘로 가는 마지막 기차(Le Dernier Train De L'espace)”와 “자니 기타(Johnny Guitar).” 강렬하고 경쾌한 연주가 일품인 벤처스의 “뛰지 말고 걸어라( Walk, Don't Run)”도 좋지만 무엇보다 북유럽의 차갑고 시린 하늘같은 맑고, 게다가 청승맞기까지 한 스푸트닉스의 전자 기타 소리는 지금도 나를 지구 밖 어딘가로 데리고 간다. 아, 다시 듣고 싶은 “안개 낀 까렐리아 (Karelia)”!

국도&가람 예술관은 부산 남구 대연동 주택가에 자리잡은 143석짜리 작은영화관으로, 복합상영관 진입이 어려운 예술영화와 독립영화의 조용한 전진기지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영화보다는 음악에 관심이 더 많았던 모양이다. 왠지 모를 무력감에 빠져 지내던 청소년기에 보았던 영화들도 내게는 스토리나 장면보다는 모두 음악의 형식으로 저장되어 있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을 떠올리면 김정호의 우울하고 탁한 목소리가 들리고,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을 생각하면 강근식의 달콤 쌉쌀한 기타 연주가, <어제 내린 비>(1975)를 생각하면 미소가 예뻤던 주연 여배우보다는 정성조의 플루트 연주가 떠오르니 말이다.
이 영화들은 조금씩 각도는 다르지만 개발 독재로 요약되는 암울하던 1970년대 중반에 청바지와 통기타를 든 청춘들의 번민과 저항을 방황과 비통함으로 묘사했다. 이런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이 이른바 ‘호스티스 문학 영화’로 쏠려갈 즈음 나는 영화로부터 멀어졌다. 이제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볼거리는 영화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극장 출입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의 영화는 단지 오락이거나 하나의 문화 장르의 향유에 불과했다.
이 무렵부터 나의 관심은 시로 향했다. 내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순간에도 TV 드라마처럼/ 음악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시구를 첫 시집에 끼워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영화로부터 은밀하게 물려받은 유산에 속할 것이다. 입장권을 사기 위해 그늘 든 단성사 앞에 어깨를 움츠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긴 줄을 서서 본 영화는 아마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가 마지막이지 싶다.

허름하긴 했어도 나름대로 시장 골목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던 동네 극장들도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상영 중에 필름이 끊어지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어둠에 파묻혀 어른들과 덩달아 휘파람을 불고 소리를 질러대던 소년도 사라졌다.

영화관 속 아들과 나
나는 요즘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다닌다. 1998년부터 극장은 대자본의 투자로 멀티플렉스로 변하기 시작했다. 맞춤양복 같은 품위 있던 단관 시대에서 기성복처럼 어느 극장에 가든 한 공간에서 다양한 작품을 골라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로써 개봉관에서 재개봉관으로 다시 동시상영관으로 가던 필름의 일생에도 일대 변화가 왔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가 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경쟁한다는 뜻은 아니다. 흥행하는 작품에는 상영 횟수를 늘이기 위해 여러 상영관이 배정되지만 그렇지 못한 영화는 하루 두세 번, 그것도 애매한 시간에 상영되다 슬그머니 사라지곤 한다. 그 바람에 그 넓은 영화관에서 아들과 단 둘이 관람하는 호사를 누린 적도 있다. 문제라면 그 영화가 아들이 선택한 일본 공포물이었다는 것이지만.
한 카드회사 연구소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영화관에서 영화표를 한 장만 사는 사람이 4명 중 1명꼴이라고 한다. 이른바 혼자 영화를 본다는 ‘혼영족’이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이는 2015년 통계청이 발표한 1인 가구 비율 27.2%의 근사치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영화관의 풍속도도 빠르게 바뀌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혼자건 둘이건, 어떤 이유에서건 극장에 가는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집안에 가만히 눌러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의지가 그들을 어두컴컴한 영화관으로 향하게 하고 모르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정면을 응시하게 한다. 세상이 지루하고 그 너머가 궁금한 것이다. 이들이 환영(幻影)과 기만의 세계를 떠돌다 의기소침한 채 답답한 세상 속에 다시 내팽개쳐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창기 (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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