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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16 SUMMER

SPECIAL FEATURE

신안의 섬 : 깨끗한 자연과의 대화 특집 4 비금의 기억

어린 시절 7년을 비금에서 자랐으니 내 생애 10분의 1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그러나 비금에서 보낸 시간 전체가 내 기억의 밑바닥에 깔려 있고 그 시절 익힌 풍요로운 비금 말의 음조가 문학비평가로서 글을 쓰는 내 몸 속에 녹아 있다.

내 고향은 전라남도 서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 비금도이다. 사람들이 낙도라고 부르는 그런 섬 가운데 하나인데, 나는 대학을 마칠 때까지도 내가 자란 섬이 낙도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고, 그렇게 불러야 할 섬들이 어디에 따로 있는 줄로만 알았다. 멀리 떨어진 섬이라니, 어디서 멀리 떨어졌다는 말인가.

비금의 산, 백사장, 그리고 언어
내가 비금에 살았던 기간은 길지 않다. 우리 집안은 19세기가 저물어갈 무렵 개항으로 목포에 근대도시가 세워질 때 비금에서 육지로 옮겨가 살다가 1950년 6.25동란을 맞아 비금으로 피난을 갔다. 어린 나는 가족들의 등에 업혀 들어갔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다시 목포로 나왔으니, 그 기간은 고작 7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7년의 기간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매우 깊어서, 고희가 넘은 지금까지 세상을 헤아리는 나의 모든 잣대가 여전히 비금에 있다. 이를테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약400킬로미터 다시 말해 천 리인데, 그 거리를 가늠해 보려면 나는 관청 부두에서 내가 살던 자항까지 거리가 십 리이니 그 백 배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산의 높이도 선왕산의 몇 배인지를 짚어서 가늠하고, 어디서 노거수를 보아도 서산의 팽나무보다 더 큰지 작은지를 먼저 따진다. 내가 어린 시절 비금에서 본 풍경들은 다른 모든 풍경들의 원형이며, 내 조그만 삶을 구성하고 있던 물건들은 다른 모든 사물의 원형이다. 나에게 백사장은 원평의 백사장이며, 나에게 바다는 하누넘 해수욕장 근처의 용머리에서 바라본 바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금의 언어가 있다. 나에게 한국어는 전라도 방언이며, 전라도 방언 가운데서도 비금도에서 쓰던 말이다. 점잖고 표현력이 풍부한 비금 말은 잽싸고 앙칼진 목포 말과 다르며, 같은 신안군에서도 느릿한 흑산도 말과 다르다. 비금 사람이 서울에 와서 표준말을 사용해도, 나는 그 말씨를 듣고 비금 사람인 것을 금방 알아챈다. 언젠가 한 번은 집에 붙박이 옷장을 마련하려는데, 집에 찾아온 설비전문가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전라도 신안군이란다. 나도 신안군인데, 신안군 어디냐고 물었더니 비금이란다. 그 사람이 바로 비금초등학교 후배인 서산 사람 김 아무개 기사이다. 우리 집은 그 후에도 김 기사의 신세를 많이 졌다.

섬의 삶을 함축한 속담들
문학비평가로서 글을 쓰면서 내가 까다로운 이론적 글 속에 어떤 정서적 음영을 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어린 시절에 익힌 풍요로운 비금 말의 음조가 내 몸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 음조를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비금 말에 담긴 고유한 언어적 재능을 짐작하기 위해서는 오직 비금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속담 또는 표현법 몇 개를 살펴보면 충분하다. 내 세대 이후로는 그 속담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기에 몇 개 적어본다.
“노대 도둑 노대에 있다.” 어떤 나쁜 일이 벌어졌을 때, 특히 물건이 없어졌을 때, 그것이 내부자의 (또는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의) 소행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할 때 쓰는 말이다. 노대는 비금 사람이면 누구나 알다시피 가산리 뒤쪽에 있는 작은 섬이다. 어렸을 때 듣기로 노대에는 집이 두 채밖에 없었다고 하니, 이 말의 연원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주로 “노대 도둑 노대에 있지, 수치 사치에 있을까” 이런 식으로 쓰였다.
“낫도 칼도 다 틀렸다.” 일이 낭패하여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바로 잡을 수 없을 때 이 속담을 사용한다. 비금의 어느 어른이 설사가 나서 측간에 들어갔는데, 핫바지의 허리띠가 풀리지 않았다. 일이 급한지라, 허리띠를 잘라야겠다는 생각에서, 아들에게 칼을 가져오라고 소리 질렀다. 아들이 칼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그럼 낫을 가져 오라고 소리 질렀다. 아들이 한참 만에 낫을 찾아 가져갔더니, 아버지가 하는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그 후 이 말이 속담이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저 돈 7백 냥이 내려오면.” 돈이 없을 때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다리라는 뜻으로, 또는 그런 어림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뜻으로 농담 비슷하게 사용했다. 원래 원평도 파시에서 뱃사람들이 술집 색시들과 수작할 때 쓰는 말이었다고 들었다. 색시들이 아양을 떨며 값진 것을 사달라고 할 때 선원들이 이 말로 대꾸를 하였다고 하니, “인천 앞바다에 배만 들어오면”이라는 말과 거의 같은 뜻의 말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 비금에서 본 풍경들은 다른 모든 풍경들의 원형이며, 그 때 내 조그만 삶을 구성하고 있던 물건들은 다른 모든 사물의 원형이다. 나에게 백사장은 원평의 백사장이며, 나에게 바다는 하누넘 해수욕장 근처의 용머리에서 바라본 바다다.

비금의 소금
비금도는 한국 중부 이남에서 최초로 천일염을 구워냈을 뿐만 아니라 단위 지역으로는 한때 가장 많은 소금을 생산했다. 그 염전의 대부분이 논과 밭으로 바뀐 지금도 시장에서 가장 질이 좋다고 평가되는 소금이 비금에서 나온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 몇 분의 지도 아래 5학년 학생들이 천일염의 제조 과정을 연구하여 전국청소년과학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 소년 과학자들에 나도 들어 있었다. 내가 했던 일은 물론 미미하다. 선생님들이 종이풀로 염전의 모형을 만들 때 그 종이풀을 이겼으며, 석 달에 걸쳐 염전 관찰일기라는 것을 쓴 정도다.

그러나 그 덕택에 지금도 누가 염전에서 소금 굽는 방법과 절차를 말하라고 하면, 두어 시간 혼자 떠들 자신이 있다.
같은 천일염이라도 질이 다 다르고 맛이 다 다르다. 우리 섬의 어른들은 소금 그 자체의 맛에 너나없이 귀신들이었다. 소금 한 알갱이를 입에 넣으면, 섬의 동쪽 염전 소금인지 서쪽 염전 소금인지, 초여름 소금인지 늦가을 소금인지, 어김없이 알아맞혔다

내 기억의 밑바닥에 깔린 시간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여름에 나는 섬의 북서쪽 포구 원평에 놀러 가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그 곳 친구들이 나를 파시로 데려 갔는데, 황새기 철이 이미 끝나 파시의 장사꾼들이 대부분 뒷설거지를 하고 떠난 다음이어서 뱃사람들에게 술을 팔던 가건물 가게 몇 곳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친구들은 집에서 퍼온 보리쌀을 들고 그 가게들을 차례차례 뒤졌지만 내게 사 줄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집에 가서야 겨우 구석에 처박아둔 사이다 한 상자를 발견했다. 한 사람에게 두 병 꼴로 사이다가 돌아갔고, 손님이었던 내가 아마도 한 병쯤 더 마셨던 것 같다.
사이다도 사람을 취하게 한다.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울렁거려 나는 모래 위에 누었다. 해는 지고 하늘에는 별이 돋아 있었다. 달이 밝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옆에서 부르는 친구들의 합창이 마치 먼 나라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처럼 아득하였다. 그리고 더 먼 곳에서 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의 모든 별들이 긴 꼬리를 끌고 서서히 돌고 있었다. 모래에는 낮의 온기가 남아 있어 그것이 내 몸을 따뜻하게 덥혀 주었다. 내가 어떤 커다란 손바닥 위에 누워 있고 그 손이 나를 끝없이 흔들어 주는 것 같았다. 또는 내 몸이 모두 삭아내려 모래알처럼 작아진 내가 다른 모래알들 속에 묻혀 바람 따라 살랑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자정이 지났는데, 친구들이 나를 둘러싸고 앉아 걱정스러운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체험은 글 쓰는 사람인 내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 있다. 그때 나는 다른 시간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다른 시간을 ‘밑바닥에 깔린 시간’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나에게는 비금에서 보낸 시간 전체가 내 기억의 밑바닥에 깔린 시간일 수밖에 없다.

황현산 (Hwang Hieon-san, 黃鉉産)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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