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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16 SUMMER

SPECIAL FEATURE

신안의 섬 : 깨끗한 자연과의 대화 특집 3 신안의 소금밭들

바닷물과 햇빛과 갯바람, 그리고 사람의 긴 노동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천일염은 신안의 일등 특산품이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의 약 70퍼센트 가량이 이곳에서 나온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신안의 염전들 — 독특한 경관 속에 섬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얼마 전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봄비 내리는 날이었다. 선착장에 바투 붙어 있는 숙소 지붕 위로 밤새 비가 내렸다. 바닷가에 붙다시피 지어져 있어서 밤은 더디고 길 줄 알았다. 걱정과는 달리, 바람 소리도 파도 소리도 없어서 길손이 이룬 잠은 깊고도 달콤했다. 해안의 들고 낢이 심한 신안군에는 500개가 넘는 해수욕장이 있다는데, 동네 주민들만 알고 찾는 곳은 따로 또 있다고 했다.

봄마다 깨어나는 염전
신의도, 증도, 비금도, 도초도 등, 신안군에 속한 여러 섬에 넓게 자리잡은 염전들은 10월부터 겨울잠에 들어가면 이듬해 3월 말에서 4월 초가 되어야 깨어난다. 겨울 동안에는 염전도 고단한 몸을 뻘에 부리고 쉰다. 그 동안 염전 사람들은 소금기가 진한 바닷물에 삭은 시설을 정비하고, 둑을 손 보고 소금밭을 깨끗이 청소한다.
4월부터 10월까지가 소금을 내는 기간이다. 그 중에서도 5월부터 9월까지 가장 활발하게 거두어진다. 신안의 염전들은 3월 28일에 일제히 일을 시작한다. 2008년 3월 28일, 오랫동안 ‘광물’로 분류되어 왔던 천일염이 ‘식품’으로 새로 정의된 날을 기리는 뜻에서이다.
한국의 서해안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갯벌의 44퍼센트를 차지하는 신안군의 갯벌에서 나는 소금은 특히 미네랄 함량이 높고 풍미가 뛰어나다. 이 지역 갯벌의 지형적 특성이 갯벌 퇴적물의 양을 높여 주어 소금이 유기물을 많이 품게 되기 때문이다. 암반 위에 조성된 두터운 갯벌 층에는 이곳 사람들이 ‘갯골’이라 부르는 물길이 실핏줄처럼 퍼져 흐른다. 신안 갯벌의 풍경을 완성시켜 주는 이 갯골은 자정 기능과 정화 기능을 갖춘 갯벌의 허파이다.

신안 염전의 시작
한국의 전통적 소금 생산 방식은 바닷물을 솥에 넣고 불을 때서 졸이는 것이었다. 햇빛과 바람의 힘으로 소금을 얻는 천일 염전 방식은 일본이 강제합병 전 1907년에 인천 주안에서 시험 염전을 운영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안군에 처음 염전이 조성된 것은 해방 직후인 1946년이었다.

“도초에는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소금은 부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금 철에는 새벽 두어 시에 집에서 나와 아침 일고여덟 시까지 염전에 머물러요. 그러면 낮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지요. “ 박성창 씨
도초도 성창염전
도초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성창염전을 운영하는 박성창(Park Seong-chang朴聲彰, 65)씨는 남보다 염전 일을 늦게 시작했다. 오랫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2007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이 꾸려가고 있던 염전 일을 물려받은 것이다 염전을 물려받았다. 남보다 늦은 만큼, 그는 무엇보다 질도 좋고 맛도 있는, 그래서 사람들이 믿고 찾는 소금을 만드는 일에 남다른 열정과 집념은 쏟아 부어 왔다. 시작점이 가장 중요했다.

그가 물려받은 염전은 소금의 원재료가 될 바닷물을 보관하는 저수지의 위치가 높아 바닷물을 끌어들이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소금 생산을 못할 때도 많았다. 그는 다섯 해 겨울 동안, 품을 사거나 포크레인 장비 등을 써서 하루에 두 번씩 저수지로 물이 들고 나도록 수로를 새로 냈다. 그런 노력의 결과, 한번 물이 많이 들면 가둬놓고 오래 쓰는 다른 염전들과 달리 그의 염전은 언제나 살아 있는 물을 쓴다.
소금 생산을 쉬는 겨울 동안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여럿 있다. 우선 한 해 동안 소금을 거두어 낸 염전의 바닥을 10cm 넘는 깊이로 갈아엎어 ‘늣’이라 부르는 막을 제거하는 한편 공기 소통율을 높여 준다. 그래도 소금 소출이 시원찮으면 몇 년 만에 한번씩 포크레인을 써서 더 깊이 갈아엎는다. 이런 일은 소금밭 주인마다 알맞다고 생각하는 때가 조금씩 다르다. 소금 생산이 끝난 11월에 이 일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는 1월 말, 또는 2월 초에 해준다. 본격적으로 소금을 내기 전에 비가 내리면 끼기 시작하는 늣의 양을 최대한 줄여 주려는 뜻에서이다.
총 면적 4ha에 이르는 그의 염전 한 옆에 있는330m2남짓한 소금 건조장에는 12,00kg들이 자루가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그는 팔레트라 부르는 구멍 뚫린 납작한 상자에 소금 자루를 담아 간수를 빼는 대신에 매다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특수 재질로 만든 자루에 매달아 두면 일단 닷새 만에 간수가 다 빠진다 했다. 2011년산이라 적힌 자루도 눈에 띄었다. 그 소금은 수분이 충분히 빠져 무게가 650~750kg쯤 된다고 한다. 소금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채렴의 과정보다 숙성을 위한 보관 과정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성창염전은 한국품질인증표준원의 식품안정경영시스템 인증인 ISO 22000 인증을 받았고, 그는 정부에서 “가진 지식을 활용하여 부가 가치를 만들어내고, 생각의 틀을 벗어나 일하는 방식을 새롭게 바꾼 사람”에게 주는 ‘신지식인’ 표장을 받았다. 첫 번째 신지식인 소금쟁이라는 자부심이 그를 더욱 채찍질하는 듯 싶었다.

“처음에는 농협에서 일했어요. 염전 가까이 살다 보니 멀리 출근하는 것보다 염전에서 일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오래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는데 어언40년이 넘었습니다. 소금 일은 조용하고 변하지 않는 일이라…” 이문석 씨
증도 태평염전
“아침 7시쯤 출근했다가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문석 씨는 여든 살을 넘기고서도 허리가 꼿꼿하고 눈빛이 맑았다. 요즘도 그는 아침마다 출근하여 회사에서 운영하는 염생식물원을 돌아보거나, 염전 관련 일을 거들며 지낸다.
증도에서 나서 줄곧 그 곳에서 살아 온 그는 함수의 염도를 잴 때 혀로 간을 가늠하거나, 또는 속을 파내고 송진을 이겨 넣은 팥이나 콩을 띄워 갈아 앉는 정도로 짐작했다는 이야기도 동네 어른들에게서 전해 들었거니와, 이제 그 일은 ‘뽀매’라 불리는 염도계가 대신하는 시절에 와있다.

‘무자위’라 불리는 수차로 바닷물을 자아 올리던 때도 지나고, 그 일은 이제 양수기가 대신한다. 소금을 실어 나르던 외발 수레는 레일 위를 달리는 끌차가 대신하고 소금을 담아 옮기던 짚으로 짠 가마니도 사라졌다. 들것 속에 소금을 부삽으로 퍼담는 대신에 콘베이어 벨트 위로 던져 올리기만 하면 소금은 저절로 끌차에 담긴다.
그는 곤고한 시절을 고스란히 겪고도 후배들에게 일러줄 말이 따로 없다 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것은 평소에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이지요.”
자신이 한 답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던지 그이는 한 마디 덧붙였다. “기상청에서는 몰라도” 느닷없이 내리기 시작하는 비의 기미는 안다 했다. 그의 얼굴에 희미하나마 분명한 득의의 미소가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에서 갯내가 나면 비가 온다고 하면서. 이런 것이 어떻게 말이나 글로 전해질 것이겠는가.
그는 남은 생을 소금처럼 살고 싶다 했다. 물체의 수분을 줄어들게 할지언정 그것의 제됨을 바꾸지는 않는 소금처럼.

“오랜 세월 섬을 지켜온 마을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도 그 섬이 지닌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 예로부터 마을에 전해지고 있는 문화를 되살리고 이어가는 일이 바로 염전의 지속적인 번영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비금도 사람인 박삼만(朴三萬) 씨가 강제 징집을 당하여 평안남도에 있는 염전에서 일하다가, 해방이 되자 돌아와 그 곳에서 익힌 기술로 고향 사람들과 함께 염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호남의 시조 염전’이라 불리는 이 구림염전에 이어 그들의 도움으로 인근에 여러 염전이 생겨나게 되었다. 1948년에는 비금도에서 450세대가 참여하는 조합이 결성되어 100ha가 넘는 대동염전이 만들어졌다. 신안군청의 자료에 따르면 비금도에서만 현재 226개의 염전에서 연 100억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1953년, 한국전쟁 직후 증도에서는 피난민 구제 사업 차원에서 전증도와 후증도 사이 수로를 메우는 대규모 간척사업이 이뤄졌다. 전쟁 때 섬에 들어와 미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타지 사람들까지 힘을 합해 변변한 장비도 없이 섬 사이 갯벌에 둑을 쌓아 염전을 일구어냈다. 그렇게 시작된 염전이 오늘날 태평염전의 전신인 대평염전이다. 현재 면적이 약 300ha로 단일 염전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며 한 해 생산량이 대략 16,000 톤으로 국내 소금 생산량의 6퍼센트 가량 된다.

바닷물에서 소금이 되기까지
염전은 바닷물을 졸이되, 해와 바람의 힘을 빌어 졸여내는 곳이다. 바닷물을 저수지에 보관하여 불순물 따위를 1차로 가라앉힌 다음 적게는 10단계에서 많게는 20단계에 이르는 증발지를 거치며 염도를 높인다. 증발지는 한 단계마다 약 5cm 가량 높이가 달라진다. 염도가 3도 가량 되었던 저수지의 바닷물은 소금이 만들어지는 결정지에 이르면 25도까지 올라간다. 제1증발지에서 결정지에 이르러 소금이 되기까지는 대강 20일이 걸린다. 소금은 결정지에서 얇은 막 같은 형상으로 생기기 시작한다. 소금의 씨앗이라 할 만한 ‘소금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금꽃은 점점 자라다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기후에 따라 다르지만 한 여름 폭양 아래에서는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이 빈 육면체 형상의 소금 입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속과 안이 점점 채워진다. 소금은 그렇게 안팎으로 자라나되, 입자 안에 품은 공간이 남아 있어야 질 좋은 소금으로 친다. ‘공극(孔隙, air gap)’이라 불리는 이 공간은 공기 중에서 습도를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뱉는 순환과정을 되풀이하게 한다. 공극이 없으면 물에 녹을지언정 순환할 줄 모르는 유리알과도 같은 입자가 되어버린다.
소금이 자라는 동안 습도가 높은 남풍이나 남동풍이 불기도 하고, 건조한 북풍이나 남서풍이 불기도 한다. 습한 바람은 생산량을 늘려주기는 하지만 소금의 질은 떨어뜨린다. 이 과정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증발지의 바닷물을 서둘러 저장소로 옮겨야 한다. 염부들이 한 순간도 염전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염전에서 거두어진 소금은 일정 기간 동안 창고에 방치하여 간수가 빠져 나가게 한다. 이런 자연 탈수 과정이 길수록 소금의 맛이 깊어진다.

“천일염에 대해 배울 만한 데가 있다면 무조건 달려가요. 게랑드도 두 번이나 다녀왔고 시칠리아, 베트남 염전도 가봤습니다. 한가지 분명하게 터득하고 온 게 있습니다. 똑 같은 천일염인데 그들은 2차 가공에 능해요. 우리는 응용할 줄 몰라요.” 최향순 씨
비금도 남일염전
1948년 즈음 비금도에 대동염전이 조성될 때 지금의 비금초등학교에는 ‘천일염전 기술자 양성소’가 설치되어 인근 섬에 조달할 염전 일손을 교육하기도 했다. 염전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재정적으로 큰 힘을 보탰던 사람 중에 당시 선주이던 명만술 씨가 있다. 그는 1960년대 대동염전을 인수했다.
최향순 씨는 1981년, 명만술 씨의 둘째아들인 명오동 씨와 혼인하고 지금은 남편과 함께 남일염전을 운영하고 있다. 시집 온 뒤 본가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시절 시아버지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제는 거의 다 세상을 떠났지만, 가을이면 본가에 모이곤 했던 어른들 중에는, 소금을 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바닷물을 길어 올리는 수리차를 만드는 사람, 소금을 담는 가마니를 짜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당시 시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 가운데 지금도 최향순 씨를 뜨겁게 만드는 것이 있다. 시아버지 명만술 씨는 염전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개인의 자산이 아니라, 실제 생산자인 지역민의 것이라고 생각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개인에게 염전을 팔아 넘기지 않고, 쪼개어 주민들에게 소유권을 넘겼다. 주민들이 공동으로 힘을 모아 조성한 대동염전이 다른 염전들과는 달리 소유권이 외부인에게 넘어가지 않고 지금껏 지역 주민의 후손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는 속내이다. 대동염전은 2007년에 “인문적 경관 가치가 뛰어난, 살아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비금도 지당리에 있는 본가에는 명만술 씨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염막을 지으려고 육지에서 들여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은 네모 반듯한 석재들도 있었는데 후에 집의 담장과 창고를 짓는 데 쓰였다. 그리고 그 집을 오래 지켜오시던 시어머니도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염전이 소금을 빗자루로 쓸어 담기만 하면 되는 곳인 줄 알고” 남편을 따라 비금도로 들어왔던 최향순 씨. 그는 남다른 의욕과 실천으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미쳤다’는 소리를 듣곤 하는 남편과 함께 지난해에는 20kg들이 만 자루 정도의 소금을 생산했다. 염전은 끊임없이 시설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다. 지친 마음 가누기도 이젠 좀 수굿해진 최향순 씨는 천일염 교육장이라면 나라 안팎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드나들고 있다. 소금 공부와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한 고민에 관한 한, 어쩌면 남편보다 더 열정적이어서 남편을 내조하기보다는 ‘외조’를 받는 편이라고 했다. 비금도 최초의 여성 이장이었던 최향순 씨는 현재 지당리 다섯 개 마을을 아우르는 천일염 권역 추진 위원장이다.

염전문화의 전승을 위하여
우루과이 라운드 협약으로 1997년 소금 시장이 개방되면서 한때 신안 천일염 산업은 미래 경쟁력을 의심받았고 실제로 문을 닫는 염전들도 생겼다. 그러나 김치나 간장 등, 한국 사람들의 전통 식생활에 필수적인 발효 식품에서 가장 요긴한 몫을 해 온 천일염의 가치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암염이나 정제염과 천일염을 성분 분석 수치로 비교할 때에 간과하게 되는 것은 천일염이 품고 있는,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몸을 지탱시켜 주었을 토착 미생물의 존재이다. 또한 우리 해안 염전에서 거둔 천일염에서 다섯 가지 맛이 난다는 사실도 문화 취향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요즘 ‘슬로 시티’ 증도의 가장 중요한 관광자원은 태평염전이다. 이 염전을 찾아온 여행자들은 염전 들머리에 지어진 소금 박물관에서 수차를 돌려보고 소금 체험장에서 소금 만드는 일을 체험해 볼 수 있다. 함초, 띠풀, 칠면초가 자라는 염생식물원도 좋은 구경거리이고 소금동굴 힐링 센터에서는 색다른 휴식의 시간을 누릴 수도 있다.
“태평염전은 이제 소금 생산이라는 1차 산업, 소금 가공이라는 2차 산업, 박물관과 체험공간 운영이라는 3차 산업을 통합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소금의 증산과 부가가치를 높이는 일만큼이나 섬 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생산노동인구의 연령은 점점 높아지고 공동체 의식은 점점 옅어지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섬을 지켜온 마을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도 섬이 지닌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 예로부터 마을에 전해지고 있는 문화를 되살리고 이어가는 일이 바로 염전의 지속적인 번영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태평염전의 조재우 이사는 힘주어 말했다.

김영옥 (Kim Young-ock, 金永玉)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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