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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16 SUMMER

SPECIAL FEATURE

신안의 섬 : 깨끗한 자연과의 대화 특집 2 ‘흑산’의 발견

흑산도는 한국인들에게 흔히 옛 왕조시대 유배의 땅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실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동북아지역 국제 해상 교통의 요지로 오랜 세월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국토의 서남단 변경이다.

1997년 6월 15일, ‘동아지중해호’로 명명된 소박한 대나무 뗏목 한 척이 남중국 저장성 해안가를 떠났다. 동국대학교 윤명철(Yoon Myung-chul 尹明喆) 교수의 주도로 한국과 중국의 해양학자들이 기획한 이 뗏목 탐험대의 목적은 고대인들이 이용했을 것으로 유추해온 이른바 ‘표류 항해’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육지를 떠난 뗏목은 해류와 남서풍을 타고 북동쪽으로 흘러갔다. 항해 중에 태풍을 만나기도 했다. 17일 만에 이들이 도착한 곳은 흑산도였다.

바람과 조류의 기착지
이 표류 탐험은 두 가지 고정 관념을 깨뜨렸다. 우선 현대 과학의 도움 없이 자연 조건만으로도 대륙과 반도 사이의 교류가 가능했다는 것을 실증했다. 이로써 동력선도 없고 항해술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고대인들이 과연 바다를 건너 다닐 수 있었을까 하는 현대인의 의구심을 잠재웠다. 또 하나는 대륙과의 교류가 위험한 바다보다는 안전한 육로를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막연한 대륙 중심의 사고를 뒤바꿔 놓았다. 이는 한국인의 선조인 동이족들이 반도와 대륙으로 둘러싸인 동아시아의 지중해를 누비며 중국, 일본, 남방과 교역을 하고 때로는 바다에서 전쟁을 벌이던 해양 문화 민족이었다는 주장에 큰 설득력을 주었다.
이 표류 탐험은 한 차례 더 시도되었다. 뗏목의 궤적은 10-14세기까지 고려와 송나라 사람들이 이용하던 남방 항로와 거의 일치했다. 필리핀 북부에서 발원해 북동진한 쿠로시오 해류의 한 지류는 대만을 거쳐 제주도로 북상하다 양쪽으로 갈라진다. 다시 그 한 지류는 한반도의 서해 연안을 따라 북상해 요동과 산동 반도를 돌아 남하하다가 항저우만 부근에서 다시 북동쪽으로 돌아 한반도 쪽으로 흐른다. 이들은 이 해류를 이용했으며, 늦봄부터 초여름까지는 남서풍을, 10월과 11월에는 북동풍의 계절풍을 기다려 대륙과 반도를 오가며 고기도 잡고, 장사도 했던 것이다.

<송사宋史> ‘고려전(高麗傳)’에는 이 이동 경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바람을 타고 3일 간 바다를 항해한 뒤 다시 5일 뒤 흑산에 도착, 고려 국경으로 들어갔다. 흑산에서 크고 작은 여러 섬들과 수많은 암초들 사이를 지난 뒤 배의 속도를 더 높여 7일 만에 예성강에 도달했다."
명주(明州)는 주산군도(舟山群島)를 거느린 양자강 하구에 자리 잡은 옛 도시로 지금의 닝보[寧波]다. 화북 쪽의 요나라(거란)와 금나라(여진)의 위세에 눌려 동아시아에서 종주국의 지위를 상실한 송나라가 대외 무역의 중심을 점차 동남 연해로 옮기면서 새로운 교역의 중심지가 된 곳이다.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신라 무역선을 타고 돌아온 일본의 승려 엔닌[圓仁]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9세기 중엽에 이미 흑산도에 300에서 400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전하니, 10세기 이후 남방 항로의 길목이자 중간 기착지로 변모한 뒤의 흑산도에는 훨씬 더 많은 규모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 후기 학자 이중환(1690-1756)의 <택리지>에는 영암 바닷가를 신라 때 당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배가 떠나던 곳으로 소개하면서, “이곳에서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거기서 또 하루 가면 홍도에 이르고, 다시 하루를 더 가면 가거도에 이르는데 여기서 북동풍을 만나 3일이면 중국 대주(台州) 영파부(寧波府) 정해(定海)에 도착한다”고 명주로 가는 뱃길을 상술하고 있다. 당나라에서 문명(文名)을 떨치던 신라인 최치원이 11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길도, <표해록(漂海錄)>(1488)을 남긴 조선인 최부(崔溥)가 42명의 일행과 함께 제주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명나라로 떠내려간 길도 바로 이 바닷길이다. ,
그러나 오랜 세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국제적인 해상 교통의 요지로 그 지위를 누려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마음속에 그리는 흑산도는 그다지 진취적이지도 않고 풍요롭지도 않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삼정의 문란’으로 요약되는 학정과 그 ‘꼬리 칸’에 실린 섬사람들의 거칠고 핍박한 삶, 그리고 그들과 어울려 유배 생활을 했던 올곧은 선비에 대한 존경과 연민의 마음이 한데 뒤엉켜 어둡고 음울한 흑산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검은 산’, ‘검은 바다’
많은 한국인들은 흑산도라는 지명을 들으면 먼저 유배지를 떠올린다. 송나라 사신 서긍도 『고려도경』에 “고려에서 큰 죄인이지만 죽음을 면한 사람 대부분은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고 적고 있으니 흑산도는 오래 전부터 꽤나 알려진 유배지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 적어도 수적인 면에서는 제주도나 거제도가 앞섰다. 게다가 조선 초기 벼슬아치 4명 가운데 1명이 유배를 당했다는 통계도 있는 걸 보면 아마 유배지로 쓰였다는 사실이 섬에 오점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어쨌거나 흑산도를 세상에 알리는 데 이바지한 이는 19세기 초 이곳에 유배를 온 정약전(1758-1816)이다.
정약전과 약종, 약용 형제는 총명하고 재능이 많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리로 출세했다. 특히 이들은 유학은 물론이고 서양 학문과 사상에도 개방적이었으며 천주교를 신봉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 천주교를 용인하던 정조가 사망한 이듬해인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정약종은 순교를 당했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유배를 가게 되었다. 정약전은 죽음을 맞을 때까지 16년 동안 당시 소흑산이라 불리던 우이도에 9년, 오늘날의 흑산도인 대흑산에서 7년을 살았다.
흑산도를 떠올리는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역사의 몇 장면들이 겹쳐 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 들어선 조선은 왜구의 출몰을 이유로 흑산도 주민들을 모두 영산포로 강제 이주시킴으로써 흑산도를 절해고도로 만들었다. 이른바 공도(空島) 정책이다. 이로써 15세기 이후 동아시아 해상 교역은 붕괴되었으며 흑산도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를 준비하던 때에 조선과 명나라는 오히려 폐쇄의 길로 돌아선 것이다.
이 섬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부터다. 일본과 힘겨운 전쟁을 치르면서 지방의 통제력이 현저히 약화되자 사회의 온갖 차별과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땅을 찾아 돌아다닌 이들에게 섬은 자유롭게 숨어살기에 좋은 ‘땅’이었다. 생활 여건은 어려웠지만 수천 년 동안 그랬듯이 적어도 자연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섬을 여행하다 만나는 입도조(入島祖) 기념비의 주인공들은 대개 이 시기에 들어와 자손을 퍼뜨린 이들이다. 그리고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삼정의 문란’으로 요약되는 학정과 그 ‘꼬리 칸’에 실린 섬사람들의 거칠고 핍박한 삶, 그리고 그들과 어울려 유배 생활을 했던 올곧은 선비에 대한 존경과 연민의 마음이 한데 뒤엉켜 어둡고 음울한 흑산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유배지에서조차 근해의 해산물을 조사하고 분류하여 <현산어보(玆山魚譜)>(일명 자산어보)라는 뛰어난 해양생물학 저서를 남긴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한 다수의 문학작품들이 생산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정약전은 <현산어보>의 서문에서 “흑산(黑山)이라는 이름은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집안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항상 흑산을 현산(玆山)이라 쓰곤 했다”고 적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 검은 색은 북쪽을 뜻한다. 남방항로의 한 가운데를 흑수양(黑水洋)이라고 부르는 것은 남중국에서 보았을 때 북쪽 바다이기 때문이다. <고려도경>에도 “흑수양은 곧 북해양(北海洋)이다.”라고 못 박고 있다. 자연히 흑산(黑山)은 북쪽의 산이고, 북동쪽으로 흐르는 쿠로시오 해류의 한자어 역시 ‘흑조(黑潮)’다. 다만 검을 흑(黑)자에는 ‘어둡다’, ‘잘못되다’라는 부정적인 뜻이 담겨 있으므로 ‘멀다’, ‘아득하다’, ‘심오하다’라는 뜻을 가진 검을 현(玆)자로 대체한 이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다. 흑산에 대한 이런 일련의 연상은 개별적인 듯이 보이지만 보편적이고,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이란 점에서 지금의 한국인들의 바람과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패총과 고인돌
그렇다면 흑산도에서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그들은 왜 이곳에 왔을까? 이런 질문들은 몇몇 사람이 남긴 얼마 안 되는 문자에 얽매이는 고리타분한 역사시대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학자들은 마지막 빙기인 뷔름 빙기를 지나 온대성기후가 시작되는 BC 2만 5000년경에 오늘날과 같은 기후조건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빙하가 녹기 직전이었으니 이때의 해수면은 지금보다 약 140m나 낮았다. 그 무렵의 흑산도의 해안선을 상상해보라. 가거도, 홍도, 영산도, 장도, 상태도, 하태도 등 296개 유•무인도로 이루어진 흑산군도는 하나의 땅덩어리였을 것이고, 한반도는 대륙은 물론 일본열도와도 잇닿아 있었을 것이다.
기후가 따듯해지니 해변으로 나가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갔을 것이다. 모험심이 강한 이들은 가장 유용한 식량인 고래를 따라 이동했을 것이고, 일행 중에 볍씨를 가진 이들도 있었으리라. 고인돌은 농경문화와 관련이 깊다. 동아시아 지역에는 고인돌이 중국의 절강성과 산동반도, 요동지방, 그리고 한국의 서해연안에 환상형으로 퍼져있다. 흑산도 여객선 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죽항리 지역에서 발견된 패총과 그 위쪽 진리 언덕에 열을 이루고 있는 남방식 지석묘군들은 그걸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해수면이 오늘날 수준에 도달한 것은 불과 4,000년 전의 일이다.

그 4000년 동안 이용해 온 포구가 오늘의 흑산항이다. 다시 역사시대로 돌아와 1000년 전의 기록을 들춰보자. “흑산은 백산 동남쪽에 있어 서로 바라볼 정도로 가깝다. 처음 바라보면 매우 높고 험준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첩첩이 쌓인 산세를 볼 수 있다. 앞의 작은 봉우리 가운데가 동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곳이 있는데 배를 감출 수 있을 정도이다.”(<고려도경>) 고인돌이 있는 진리(鎭里)는 수군진(水軍鎭)이 있던 마을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이처럼 천연의 양항인 흑산항은 오늘날에도 어업 기지로서 먼 바다로 나가는 배들의 보급과 휴식, 바람의 대피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4~10월까지는 고기잡이배들이 모여들고, 70년대까지 성행했던 파시는 아니어도 대규모 어시장이 벌어진다. 전갱이•고등어•조기•상어•갈치•홍어 같은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데 특히 흑산도 홍어는 한국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특별한 음식으로 값도 비싸다.

땅 길, 하늘 길
흑산도를 일주하는 25.4km의 해안도로가 완공된 지는 불과 16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 길을 닦는데 27년이나 걸렸을 만큼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하다. 이런 이유로 흑산도의 크고 작은 마을들은 모두 접안이 가능한 포구를 끼고 있다. 물길이 훨씬 빠르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면사무소가 있는 진리에서 출발해 당산(堂山)을 지나 왼쪽 해안도로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관사지(館舍址)와 무심사 선원지(无心寺禪院址)다. 최근 지표조사를 통해 기록에만 있던 사신들이 묵었다는 관사 터가 확인되었고, 석탑과 석등으로 절터임을 짐작해오다 무심사선원(无心寺禪院)이라 새겨진 수키와 편을 수습함으로써 절의 이름이 무심사선원(无心寺禪院)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다를 오가는 이들이 무사와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오르면 9세기 초에 해상왕 장보고(?-846)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상라산 반월성을 지난다. 그 정상에 봉화대와 제사 터가 있다. 모두 흑산도가 해상 무역의 근거지였음을 확인하게 하는 해양 문화의 흔적들이다.
정약전이 사촌서당(沙村書堂)을 짓고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사리마을을 향해 가다 보면 병풍처럼 바다를 막아선 채 줄기차게 따라오는 긴 섬이 있다. 이 섬이 장도(長島)다. 장도 정상에는 도서지역에서는 드물게 이탄층으로 된 산지습지가 있어 이 섬 주민들에게 깨끗한 식수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500여 종의 생물들의 서식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한때 목장이 될 뻔한 이곳을 마을사람들이 사들여 관리해오다 2005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되었다.
지난 해 말 흑산도에 활주로 1.2km의 미니 공항을 신설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로 한때 흑산도의 땅값이 들썩였다고 한다. 계획대로 2020년까지 공항이 완공되면 서울에서 50인승 프로펠러 항공기로 흑산도까지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다. 점점이 늘어선 흑산군도를 발밑으로 내려다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신혼부부들을 볼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중국 사신의 배가 도착하면 밤에는 산 정상에서 봉화를 밝힌다.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 왕성까지 이르는데, 이것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고려도경>)
당신은 어떤 풍경이 더 마음에 드는가?

이창기 (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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