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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16 SPRING

SPECIAL FEATURE

오늘날 한국 극장 : 사람들과 동향 특집 4 한국 연극의 새로운 주역들

공연장의 다양화와 여러 지역에 자리잡은 연극축제들, 연극인들의 폭넓은 국제교류를 바탕으로 연극판이 날로 역동성을 더해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한국적인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벗어나 동시대성을 고민하는 새 세대 연출가들이 있다.

2000년대 한국 연극은 사뭇 역동적이다. 젊은 세대들은 꾸준히 그리고 더 폭넓게 연극 창작에 뛰어들고 있고 공연물을 제작하거나 상연하는 플랫폼들도 규모나 수효에서 크게 성장하고 있다.

역동성의 기반
서울 한복판 대학로는 연극만이 아니라 뮤지컬, 무용, 엔터테인먼트 쇼 등을 볼 수 있는 중심지로 자리잡은 지 오래 되었고 연중 크고 작은 연극축제들이 이 곳뿐 아니라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그리고 다른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대형 극장들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규모에서나 관객들의 호응에서나 성황을 이루는 연극축제들은 지역에서 자리잡았다. 밀양여름공연예술제, 춘천마임축제, 거창국제연극제 등은 모두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성공한 연극축제들이다.
공공극장의 역할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 공공극장은 발표공간이 부족한 민간극단에게 좀 더 싸고 좋은 환경의 극장을 제공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었는데, 2000년대 들어 직접 제작하는 공공극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LG아트센터, 두산아트센터 등 민간기업이 문화재단을 만들어 운영하는 극장들뿐만 아니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남산예술센터와 같은 공공기금으로 운영되는 극장들도 직접 제작한 연극으로 연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극장을 벗어난 거리나 일상의 공간에서 벌이는 장소특정적 공연들이 늘어난 것도 특징이다. 한편, 새로운 공연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공간들이 공연장으로 주목 받고 있다. 서울만 보자면 한남동 ‘테이크아웃 드로잉’ 류의, 전시와 공연이 모두 가능한 복합문화공간, 작업실이면서 공연장으로도 개방되는 공간들, 영등포 공장지대의 공장을 개조한 ‘인디아트홀 공’ 류의 공연장, 오래된 거주지의 상업시설을 개조한 문화공간들이 그 예이다. 이런 공연장에서 젊은 연극인들이 새로운 시도들을 이어가고 있다.
폭넓은 국제교류로 외연도 확장되고 있다. 2015년 가을 개관한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내 아시아예술극장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신진 및 중견 아티스트들의 아시아를 테마로 한 신작들을 대거 소개했다. 한국 연극의 해외 진출 사례도 점점 증가하여 아시아와 유럽은 물론 남미 등지에서도 다양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국제 협업의 폭도 눈에 띄게 넓어져서, 외국 연출가들이 한국의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한국 연출가들이 해외에서 공연을 맡기도 하며, 국내외 극단들의 공동 작업도 점차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에서 ‘지금 여기’로
이제 이러한 역동성에 힘입어 떠오른 한국 연극의 새로운 주역들로 세 연출가를 꼽아 살펴보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잠시 이야기를 더 앞으로 돌려 보자.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처럼, 한국에서도 근대극은 서양연극의 도입에서 시작됐다. 이 때문에 많은 연출가들이 자신의 연극정체성을 고민하며 서구에서 유입된 새로운 연극문화로서의 근대극과 한국의 전통을 접목하는 문제에 주목해왔다. 김정옥(Kim Jung-ok 金正鈺), 허규(許圭), 손진책(孫桭策), 오태석(吳泰錫), 이윤택(李潤澤) 등 20세기 한국 현대연극 거장들의 주요 작품들은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국 연극의 정체성을 모색해온 데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비극이나 셰익스피어 등의 서구 고전을 한국 전통연극의 언어로 재해석해 연출한다든가, 일상의 공간에 포함되어 있는 넓고 평평하지만 광장보다는 작은 공간, 때로는 집 마당에서 벌이던 한국의 전통 의례나 연희를 근대극장 무대로 옮겨와 재구성했다. 이들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굿, 탈춤, 민요, 판소리 등 전통 공연예술의 현대적 연극성을 발견하고 현대극에 접목하여 연극언어를 풍성하게 했다.

2000년대 작가-연출가들은 그들과 확연히 달랐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보다 동시대성에 대한 고민을 앞세웠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극언어가 어쩌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남의 말로 연극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에서 벗어난 대신에 지금 내가 혹시 연극으로 가짜 집을 짓고 가짜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한다. 물론 이들의 선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거장들의 제자, 후배 혹은 동료였던 김석만(金錫滿), 이상우(李相宇), 김광림(金光林) 등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방향을 튼 첫 세대라 하겠다.
박근형(朴根亨Park Kun-hyung)은 동시대성을 화두로 새롭게 등장한 세대의 가장 앞자리에 있는 작가이자 연출가다. 1999년 발표한 <청춘예찬Beautiful Youth>은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기도 한데, 제목과 달리, 가족의 해체를 겪고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청년의 이야기다. 대학로의 가장 작은 극장 중 하나인 ‘혜화동1번지’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채 100석이 되지 않는 극장의 텅 빈 블랙박스 무대에 객석으로 사용하는 긴 스툴 두 단을 올려놓은 것이 무대장치의 전부였다. 문자 그대로 가난한 연극이다. 그 빈 무대에 이불을 깔거나 소주에 김뿐인 작은 술상을 놓으면 청년과 아버지가 살고 있는 방 안이 되고, 광고 포스터가 붙으면 낡은 술집이 된다. 그는 “우리 삶이 그렇지 않은데 무대 위에 큰 집을 짓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말하며 풍요로운 우리 시대의 가장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펼쳐놓는다. 때때로 그의 작품은 연극적 생략과 왜곡 그리고 과장된 놀이 같은 전개가 두드러지지만, 그러한 왜곡과 과장에서 우리가 잊고 사는 이 시대의 모습이 극사실주의적 재현처럼 섬뜩하게 다가온다.
박근형의 많은 작품들은 가족 이야기이되, 인간의 마지막 보루라 할 가족 관계마저도 해체되거나 온전치 않은 상황에 놓인, 이 사회의 주변으로 떠밀려난 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의 연극은 어떤 이상한 가족의 이야기를 넘어 한국사회 도처에 존재하는 상처와 아픔을 냉소와 휴머니즘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풀어간다.

단순하고 유려한 감각
박근형이 ‘지금, 여기’를 집요하게 파고든다면 고선웅(高宣雄Koh Sun-woong)은 연극성으로 충만하다. 고선웅도 작가와 연출을 겸하고 있는데, 특히 고전을 자신의 스타일로 새롭게 고쳐 쓰는 데에서 연극의 새로운 언어와 활기를 개척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각색한 2010년도 작품 <칼로 막베스Killbeth 手举屠刀的麦克白>는 끊임없이 죽고 죽이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때와 장소를 알 수 없는 어떤 곳을 배경으로 한다. 원작의 타이틀 롤을 한국어의 유사한 소리로 비튼 연극 제목처럼 (‘맥베스’를 칼을 휘둘러 죽고 죽이는 난투극을 연상케 하는 막 베었다는 뜻의 비속어 표현으로 바꾸어 놓았다) 연극은 첫 장면부터 칼과 칼이 부딪치는 난투로 시작되고 시시때때로 함성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며 때로는 육탄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연극이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볼거리 화려한 칼싸움으로 각색한 것은 아니다. 배우들의 몸을 타고 흐르는 땀이 만져질 듯 육체를 과시하는 움직임이 강조됐지만 그것 못지않게 관습적인 극적 상황을 비틀어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는 대사들도 현란하다. 고선웅의 대사는 일상적인 대화나 비극적 운율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면서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 리듬에 실려오는 말들은 한껏 고조시킨 긴장을 허무하게 무너뜨리고 마는 개그적 반전을 만드는가 하면 심각한 극적 상황과 대비되는 의도적 이완으로 비극적 긴장을 넘어 히스테릭한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긴장과 이완이 현란하게 교차되는 움직임과 말이 서로 리듬을 주고받으면서 전개되는 고선웅의 연극은 보고 있자면 꽉 채워져 있는 연극적 에너지에 숨이 찰 정도다.
고선웅이 2015년 발표한 신작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 趙氏孤兒 The Orphan of Zhao>은 그의 스타일이 재기발랄한 감각성을 넘어 어떻게 인간의 고통 한복판으로 뚫고 들어가는가를 보여준다. 기군상(紀君祥 Ji Junxiang)이 쓴 중국 고전희곡 <조씨 고아>는 조씨 일족 삼백 명이 도륙당하고 마지막 남은 갓 태어난 ‘고아’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치고 장성한 고아가 자신의 가문을 도륙한 원수에게 복수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끔찍한 복수극에서 고선웅은 장치도 움직임도 말도 한껏 덜어낸다.

무대를 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붉은 막이 무대 장치의 전부인 빈 무대에서 사건과 행위는 약호화된 움직임과 소품으로 단순화된다.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의 인물들은 모두 고아의 복수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고선웅은 그들의 선택을 도덕이나 정의를 위한 비장함으로 미화하지도 않고, 복수극에 대한 허무주의적 의심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선택 앞에 선 인물들이 느끼는 삶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럼에도 끝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받아들이는 격렬한 갈등과 고통과 결단을, 한껏 덜어내어 오히려 단순하고 유려한 움직임과 말로 그려낸다. 이러한 비극적 사건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인간이지만, 죽음과 삶을 건 선택 앞에서 선택을 행하는 것도 인간이다.

2000년대 작가-연출가들은 그들과 확연히 달랐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보다 동시대성에 대한 고민을 앞세웠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극언어가 어쩌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남의 말로 연극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에서 벗어난 대신에 지금 내가 혹시 연극으로 가짜 집을 짓고 가짜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의심한다.

감각의 윤리
이경성(李敬誠Lee Kyung-sung)은 이제 갓 서른을 넘겼지만 연극을 만드는 독자적인 방법론으로 ‘젊은’이라는 수식을 일찌감치 떼어냈다. 그가 이끄는 연극집단 크리에이티브 VaQi(Creative VaQi)는 횡단보도, 광장 등 일상의 공간에서 극적 상황을 일으키는 장소특정적 작업으로 처음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경성은 단지 새로운 작업방식이라든가 새로운 시도로 주목 받는 젊은 연출가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경성과 크리에이티브 VaQi의 <남산 도큐멘타 : 연극의 연습 - 극장편>(Namsan Documenta: Practice-Theatre Version)>(2014)은 이 작품이 공연된 남산예술센터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1960년 드라마센터로 개관한 이래 한국현대연극의 주요한 공연장이었지만 잊혀졌다가 최근 제작극장으로 재개관한 극장이다. 공연은 극장의 역사, 극장이 위치한 남산이라는 장소와 관련된 다양한 공적 사적 자료들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얻은 영상 자료들을 편집해서 직접 보여주는가 하면, 이 극장 개관 프로그램이었던 <햄릿>의 한 장면을 고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연출해서 상연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가상 인터뷰를 통해 이 극장과 이 극장이 위치한 남산을 한국현대사의 사건 현장으로 소환하기도 한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 연극으로 소개되지만, 이경성과 크리에이티브 VaQi의 작업은 자료들의 편집에 머물지 않고 제시와 재현, 사실과 허구 등의 경계를 명민하게 타고 넘으면서 극장이라는 공간, 연극이라는 작업의 본질을 지금, 여기라는 현실을 환기하면서 감각적이고도 지적으로 탐구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최근작인 <비포 애프터Before After>(2015)에서 한층 완숙한 시선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작품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세월호 참사를 다루지만, 사건의 재현이나 사건의 원인과 영향을 추적하지 않는다. 이들은 도리어 이 엄청난 사건을 두고 고통의 감각에 대해 질문한다. 현대사회는 고도의 기술사회이면서도 치명적인 사건 사고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재난에 노출되어 있으며 발달한 기술은 이러한 사건 사고를 뉴스로 소비하게 한다. 전쟁이 중계되는 시대에 재난 역시 영상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비포 애프터>는 이런 고통의 소비를 멈춰 세우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작품은 한 배우가 겪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중심으로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들 각자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나레이션, 재현 등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화한다. 또한 실시간 영상을 통해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동을 또 다른 시선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는가, 그것을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가에 대한 차분하고도 치밀한 작업으로 크게 주목 받았다.

김소연(Kim So-yeon, 金炤然)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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