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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16 SPRING

SPECIAL FEATURE

오늘날 한국 극장 : 사람들과 동향 특집 3 지금 한국에서 체호프를 다시 보아야 하는 이유 - 극단 연희단거리패 이야기

밀양연극촌은 가장 한국적이면서 상당히 현대적인 연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삶과 예술을 함께 일궈나가는 곳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여름공연축제가 열린다. 연희단거리패(Street Theatre Troupe)가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즐거움이고 문화예술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향해 보내는 메시지이다.

신성한 빵과 포도주가 상징하는 구원의 힘을 주제로 한 종교극과 순전히 오락 위주의 세속극이 공존하던 14세기 초 영국의 솔즈베리 주교(아마 Simon of Ghent로 짐작되는)는 음란하고, 아첨하며, 취흥이나 돋우는 전문배우들을 유형별로 나누어 조목조목 저주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록도 남겼다.
“광대라고 불리는 다른 이들이 있다. 이들은 통치자의 행동이나 성인들의 삶을 노래하고 아프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자들을 위로하며, 춤꾼이나 춤추는 여자, 부끄러운 복장을 하고 마술이나 다른 방법으로 유령을 보여주는 자들과는 달리 수많은 추행을 꾸며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에게 위안을 준다.”(「연극의 역사」, 오스카 브로캣 외, <연극과 인간> 발간, 194-195쪽 참조) 길 떠나는 극단 1999년 9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그럼으로써 위안을 받던 한 극단이 그들의 터전이던 서울의 대학로를 떠났다. 흥행에 실패하고 내분으로 좌절한 극단을 떠올렸다면 수정하기 바란다. 창단 13년째인 이 극단은 때로는 굿과 연극을 결합한 낯설고 실험적인 공연으로, 때로는 높은 사회의식을 담은 작품으로 관객들을 몰고 다녔으며, 이런 성공으로 한국의 연극을 해외에 소개하는 대표적인 극단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한 해 전인 1998년에는 <느낌, 극락 같은>이란 작품으로 서울국제연극제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5개 부문의 상을 휩쓴, 꽤 잘 나가던 극단이었다(이 때가 한국 경제가 디폴트의 위기에서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던 시기였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러나 화려한 조명 아래서 받는 박수소리와는 상관없이 이들의 심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갈수록 상업화되고 통속화되는 시대에 맞서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공연 연습을 하는 틈틈이 길거리에서 전단을 돌리며 호객을 하거나 홍보 기사 몇 줄을 얻기 위해 전화통을 붙들고 애면글면하는 일뿐이었다. 공연이 성공했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단원들의 생활은 여전히 불규칙했으며, “지하에서 잠들고 지하에서 연습하고 지하에서 공연하는 지하생활자의 삶”은 건강을 위협했다.
이 극단의 창업자인 이윤택(Lee Youn-taek 李潤澤)씨는 당시 한 칼럼에서 “나는 영원한 20세기인으로 남겠다”는 고도의 문학적인 표현을 썼지만, 그보다는 “건강한 정신과 몸으로 연극을 하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는 말이 단원들의 솔직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새롭게 정착한 곳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350킬로미터 떨어진 밀양이라는 인구 10만 남짓 되는 소도시의 폐교였다. “긴급 피난”을 결행한 단원들은 모두 60여 명. 이 극단이 올해로 창단 30주년을 맞은 연희단거리패다.

이들을 지칭하는 말들은 많다. “문화 게릴라”, “문화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최근 한 일본 학자가 규정한 “이상주의 연극 공동체‘ 등이 그것이다. 이런 별칭이 좀 낯설게 들리긴 하지만 따지고 들면 그렇게 난데없는 표현들은 아니다. 우선 이 표현들은 이들이 선택한 생존 방식을 반영한다. 이들은 함께 먹고 자는 공동생활을 하며, 함께 연극을 만들고, 필요와 요청에 따라 경향 각지로 흩어져 공연을 다니는 일종의 유랑극단의 삶을 택했다.

“약자들의 힘”
이 극단의 운영 체계가 문화 소비의 근거지인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부분의 극단의 체계와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것도 아니다. 한국에는 조선 후기에 남사당패가 전국을 떠돌며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일본의 가부키 극단, 중세 이후 유럽의 유랑극단들도 오래된 모델로 꼽을 수 있다. 또 프랑스에는 50년이 넘게 <태양 극단>이 공동 분배, 공동 창조, 공동 운영을 모토로 꾸준한 활동하고 있으며, 함께 농사를 지으며 수확한 빵을 나누고 그 부산물로 인형을 만들어 인형극을 올리는 미국 버몬트의 <빵과 인형 극단Bread and Puppet Theater>도 연극 공동체의 색다른 유형으로 주목 받고 있다. 그러니까 이 광대들의 공동체는 주류 사회(자본주의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의 특화된 극적 본능을 그 시대의 가치(교환 가치)로 삼아 살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출발해 저마다의 사회적 환경에 최적화된 삶의 형식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선택으로 그들은 주류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 사회의 체계 밖과 안에 걸쳐 있는 어중간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들의 자발적인 선택을 존중한다 치더라도 경쟁에서 밀려난 패자들의 삶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나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광대, 빈민, 장애인, 정신병자, 샤먼, 예언자 같은 경계인(그는 ‘코뮤니타스communitas의 존재’라고 부른다)들이 가진 ‘약자들의 힘’에 주목했다. 그는 이 사회적 약자들을, 자신들이 가진 ‘상징적 힘’(위험성, 전염성, 무정부성, 익명성 등)을 통해 그 사회가 버려둔 상대적 가치(동질성, 평등성, 도덕성, 공동 소유와 분배 등)를 극대화함으로써 현재의 사회구조를 다른 사회구조로 ‘통과’시키는 존재로 보았다. 이는 연희단거리패가 지난 30년 동안 보여준 궤적이나 추구한 가치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그리는 체호프는 천박하고 거칠고 시끄럽다. 지루한 사실주의의 통일성과 균형이 깨진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훼손되고 파헤쳐진 그 벚꽃동산에서 오히려 벅찬 혁명의 기운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바로 이 희극이 21세기의 한국에서 우리가 읽어낸 체호프다.”

공동체의 삶
숙소와 공연장, 그리고 관련 시설을 갖춘 ‘밀양 연극촌’이 만들어지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선 이곳에서 해마다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를 열었다. 이 축제는 국내외 다양한 공연 예술을 선보이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만 문화 소외 계층에게 다양한 연극 체험을 제공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 ‘젊은 연출가전’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잘 만들어진 작품보다는 현실에 맞서는 자기만의 표현 방식을 찾는 실험적인 공연 예술을 장려했다.
1996년에 설립한 ‘우리극 연구소’도 극단원 훈련 과정으로 체계를 갖추었다. 단원이 되려면 누구나 이 연구소에 입소해 한 달 간의 기초 교육을 받고 다양한 실무 과정을 거치게 했다. 제작자나 기획자가 작품을 선정하고 오디션을 통해 배우를 뽑는 제도권 선발 시스템과는 전혀 다르다.


연희단거리패의 김소희 (金昭希 Kim So-hee) 대표는 ‘우리극 연구소’ 1기생이고, 그를 중심으로 20년이 넘는 경력을 가진 10여 명의 단원들이 각자의 역할에 따라 적극적으로 극단의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단원 수는 80여 명. 이들이 평균 3,4개 팀으로 나뉘어 5편 정도의 상설 공연을 한다. 그러다 보니 배우 한 사람이 적게는 4개 많게는 7~8개의 배역을 맡는다. 숙식은 무료이고 10년 전부터는 월급도 주고 있다. 월급은 본봉과 수당으로 이루어지며 본봉은 50만원에서 200만 원 사이다. 수당에는 다양한 인센티브도 포함되는데 결과보다는 가치에 중심을 둔다는 점에서 일반 회사와 다르다. 그 운영진의 일원인 배우 김미숙(金美淑 Kim Mi-sook) 씨는 그 평가에 모두가 동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갈등의 원인이 된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함께 공동생활을 하다 보니 이곳에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 사람들도 여럿이다. 그들에게는 가족을 위한 공간이 따로 주어진다. 26세에 극단에 들어와 마흔을 넘긴 이승헌(李承憲 Lee Seung-heon) 씨는 작년 2월에 젊은 여성 단원과 결혼해 이곳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으며, 이곳에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걸고 있다. 조인곤(趙仁坤 Cho In-kon) 기술감독은 지난 해 봄에 동료이자 아내였던 이윤주(李允珠/ Lee Yun-joo) 씨와 사별했다. 촉망 받는 연출가이자 배우였던 그녀와 남편 조인곤 감독 사이에 태어난 11살짜리 딸은 이곳 식구들의 사랑과 돌봄을 받으며 자란다. 극단 사무실 벽에 걸린 일정표에는 또 다른 부부의 탄생을 예고하는 결혼식 날짜가 붉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다.

한국적 부조리극의 산실
밀양에 오면서 고유의 연극 방법론을 가진 집단으로서의 성격은 한층 더 깊어졌다. 안정된 팀워크를 바탕으로 어지간한 소도구나 의상은 스스로 만들다 보니 제작비가 줄었다. 그만큼 시장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시장을 일깨우고 싶다는 도전 의식이 더 커졌다. 역사에 대한 관심과 소외된 사람에 대한 편애, 제의적 요소는 한층 더 강화됐고, 역동적이고 전복적이며 부조리적인 무대에서의 상상력은 샘솟았다. 세도 정치에 저항한 선비 남명 조식을 다룬 「시골선비 조남명」, 변방인 과학자 장영실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궁리」, 체제에 희생된 예술가 시인 백석을 다룬 「백석우화」, 쓰레기 매립지를 무대로 한 환상극 「원전유서」, 은둔형 외톨이 이야기를 다룬 「방바닥 긁는 남자」 같은 작품들이 이 밀양의 ‘공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관객들은 환호했고, 공연계는 그때마다 커다란 상을 안기며 이들의 질주에 화답했다.
연희단거리패는 올 봄에 두 개의 큰 공연을 앞두고 있다. 하나는 체호프의 「벚꽃동산」(2016.4.8-5.1, 서울 <눈빛극장>)이고, 또 하나는 「길 떠나는 가족」(2016.3.19-21, Bogota )이다. 「길 떠나는 가족」은 보고타 연극제(Ibero-American Teatre Festival of Bogota) 참가작이다. 보고타 연극제에는 올해로 세 번째 초청받았다. 콜롬비아가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의 나라임을 감안해 이번에는 화가 이중섭의 삶을 다룬 「길 떠나는 가족」을 준비했다. 콜롬비아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밀양 연극촌에 온 클라우디아 오세호(Claudia Osejo, 박스 기사 참조)도 이 연극 팀의 일원이다. 보고타에서 연희단거리패의 연극을 보고 자극 받아 이곳에 온 그녀는 아직도 밤늦도록 이어지는 연습 시간만은 적응이 잘 안 된다.

체호프의 희곡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공연되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다수의 러시아 유학파들이 돌아오면서부터다. 이 무렵 러시아 연극 특히 체호프의 극은 대학가와 전문극단을 망라해 대세를 이루었다. 숭고한 인간 정신의 세계를 탐구하는 스타니슬랍스키 류의 방식, 등장인물의 성격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바흐탄고프적인 방식 등의 체호프 연극이 소개되었다. 이 체호프를 최근 러시아와 무관한, 어찌 보면 가장 한국적인 극단으로 불리는 연희단거리패가 다시 주목했다. 지난 해 「바냐 삼촌」(연출 이윤택)을 시작으로 「갈매기」(연출 김소희)를 올린 연희단거리패는 체호프의 단편소설 7편을 4명의 연출가가 저마다의 시선으로 각색해 올리는 색다른 실험을 했다. 그리고 그 하이라이트로 「벚꽃동산」을 창단 30주년 기념작으로 준비하고 있다.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인 이윤택은 자신의 연출 의도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리는 체호프는 천박하고 거칠고 시끄럽다. 벚꽃동산의 영주 라네프스카야는 치매 걸린 노인으로, 농노 출신 상인 로파힌은 극도의 현실적인 인간으로, 영주의 오빠 가예프는 건달로, 이웃의 몰락한 영주 피쉬크는 햄릿형 인간으로 만들었다. 슬랩스틱 코미디를 방불케 할 만큼 모든 것이 과장되어 있다. 하지만 지루한 사실주의의 통일성과 균형이 깨진 그 자리에서, 그러니까 훼손되고 파헤쳐진 그 벚꽃동산에서 오히려 벅찬 혁명의 기운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의 대포소리가 울려 퍼진다. 바로 이 희극이 21세기의 한국에서 우리가 읽어낸 체호프다.” 사회는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는 에머슨의 말에 동의한다. 사회는 물결이다. 한쪽이 나아가면 한쪽은 뒤처진다. 기술을 얻으면 본성을 잃고, 자본을 취하면 자유를 잃는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시대에 속해 있건 인간의 극적 본능은 퇴화하지 않고 우리를 열광하게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때로는 그런 우리에게 위안을 줄 것이다. 이것이 21세기 한국에서 체호프를 다시 보아야 하는 이유이고, 보고타의 「길 떠나는 가족」이 기대되는 이유다.

한 외국인 여배우가 본 연희단거리패

클라우디아 오세호 Claudia Osejo 연극인

내가 연희단거리패를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내가 살던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열린 이베로아메리칸 연극 축제(Ibero-American Theater Festival)에서다. 이 극단이 공연한 <햄릿>을 본 나는 서양의 고전 연극과 한국의 전통 예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벅찬 감동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4년 보고타에서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피의 결혼>이란 작품으로 이들을 다시 만났다. 나는 그들이 스페인의 작품을 자신들의 전통에 온전히 적용시켰다는 점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들과 함께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연기에서의 호흡’라는 워크숍에 참여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연기에 대한 갈증만 더 깊어갔다. 이런 나의 바람은 콜롬비아 정부가 주는 젊은 예술가를 위한 특별 장학금으로 실현되었다. 이로써 나는 이들과 한국에서 함께 생활하며 작품 제작 과정과 연기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리허설은 물론이고 공연을 이루는 모든 과정들을 사진 찍는 일을 담당했다. 이 사진 작업을 통해서 훌륭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팀 전체가 헌신과 직업의식으로 열심히 일하고 관리하며 창조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배우나 조명담당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작품에서 행동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정확성과 엄격함에 대해 배웠다. 각 움직임에는 호흡과 에너지 조절이 수반되었고 음악은 필수였으며, 목소리는 노래뿐만 아니라 대화에서도 의도와 뉘앙스를 표현해냈다.
연희단거리패의 배우들이 춤과 노래, 연기라는 세 가지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점도 놀라웠다. 서양의 극단에서는 춤추는 사람과 연기자는 구별되어 있으며, 비록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더라도 노래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역사 의식을 일깨우는 명예로운 인물들의 삶과 정신을 소재로 만든,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전기적인 작품들은, 기억이란 예술이라는 행위를 의미 있게 하고 그 메시지가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도구임을 잊지 않도록 나를 이끌었다. 특히 이윤택 선생님의 연기 지도를 보면, 배우들의 연기가 차별화되고, 힘이 넘치고, 깊이 있는 움직임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 틀을 잡았다. 장면마다 일상의 소리를 넣어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은 관객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연희단거리패에서의 생활은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공간과 극장, 숙소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어떤 원칙이 있다. 예를 들어 배우들은 겸손하게도 자신이 연기할 극장을 직접 청소한다. 배우로서 생각하건대, 연습실이나 무대를 청소하는 것은 교육의 일부이다. 훌륭한 연극인이자 훌륭한 사람을 키우는 과정인 것이다. 이곳에서의 유학 생활은 아직 진행 중이며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연극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소중한 배움의 기회라는 것은 이미 입증됐다. 연희단거리패는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의 무대 예술에 유산을 남기고 있다.

이창기(李昌起, Lee Chang-guy)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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