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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2023 SPRING

현대 공예의 새로운 미덕

한국의 현대 공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중이다. 그동안 공예 재료로는 잘 쓰이지 않던 소재들로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는가 하면 ‘공예는 손으로 작업하는 것’이라는 통념을 깨고 문명의 이기를 수용하는 작가들도 있다. 이러한 변화는 시대와 조응하며 공예의 본질을 다시 정립하려는 고민에서 비롯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즈잇 강영민의< AFF Collection > , 류종대의< D-SABANG > , 이우재의< PaperBricks > , 한은석의 아트 주얼리.
작가들 제공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일상에 뿌리를 내린 지금, 동시대의 한국 공예는 대중적인 문화 현상이 되고 있다. 젊은 공예가들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까지 공개한다. 공공 기관에서도 전통 공예를 전승하는 장인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소개하거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체험 프로그램을 개최하며 대중적 확산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변화는 이런 데에만 있지 않다. 기존에는 공예 재료로 여기지 않았던 플라스틱이나 산업 폐기물, 재활용 소재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가들이 늘면서 공예의 개념이 확장되고 있다. 도자 공예, 금속 공예, 목공예, 섬유 공예 등 기존 규범이나 장르만으로는 현대 공예를 설명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최근 주목받는 작가 네 명의 작업을 살펴보겠다. 이들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기반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하며, 제작 방식의 의미를 탐구하고, 인류의 지속 가능한 삶을 고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성의 재해석

폐신문지를 조각 작품으로 변신시킨 이우재의 최근작< In Presence > 는 종이의 물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진다.
© 이우재

허리 높이까지 오는 직육면체 사각기둥들은 언뜻 시멘트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불규칙한 표면의 질감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또 몇몇은 검은빛을 띠고 있어 도대체 무엇으로 만든 작품인지 궁금해진다. 이 작업은 이우재(Lee Woo-jai, 李宇宰)의 2022년 작< In Presence > 이다. 작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문지에 주목했다. 한 번 읽고 버려지는, 때로는 읽히기도 전에 폐기되는 신문지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관람객들은 그의 작품에서 인쇄된 활자를 읽을 수도 없고, 그가 신문지를 재료로 사용했다는 사실도 파악하기 어렵다. 작가가 신문을 으깨어 펄프로 되돌렸기 때문이다.

종이는 부드러울 수도 있고, 딱딱할 수도 있다. 또한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그는 종이의 물성에 대한 선입견에 도전하며 무엇이 과연 ‘진짜’인지 질문한다. 이러한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수작업이 꼭 필요했다. 작품 표면의 질감은 물, 접착제, 펄프의 혼합률에 따라 달라진다. 그는 무수한 실험과 반복적인 노동을 통해 원하는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자신만의 공식을 찾았다. 작가는 종이라는 보편적 소재의 물성을 탐험함으로써 미학적 질서를 발견하고자 한다. 나아가 시각과 촉각을 결합한 공감각적 경험을 향한 실험도 계속하고 있다.

이우재의 작품은 고요하다. 각국에서 발행된 신문은 정치‧사회‧경제 분야에서 일어난 일들의 중대성과 상관없이 종이라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소재로 환원된다. 작품으로 수렴된 사건 사고는 더 이상 소란스럽지 않다.

발상의 전환

서울 성수동에 자리한 분또블루(Punto Blu) 갤러리에서 2020년 12월 열렸던 이즈잇의< Reborn > . 이 전시 이후 해외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아티스트 크루 이즈잇의 멤버인 강영민은 공장에서 버려진 PVC로 가구와 다양한 오브제를 만들며 새로운 협업 모델을 제시했다.
© 이즈잇 강영민

현란한 색과 구불거리는 형상이 천이나 가죽 무더기를 쌓아 놓은 듯 보이지만, 어떤 재료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어떻게 쓰러지지 않고 중력을 견디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이즈잇(1S1T) 강영민(Kang Young-min, 康榮民)의< 플라튜보 컬렉션 AFF 의자(Platubo Collection AFF Chair) > 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이다. 그는 건축, 공학, 디자인, 사진, 순수 미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작업을 선보이는 그룹 이즈잇의 일원이다. 그가 사용하는 주재료는 폐플라스틱인데, 이 폐기물은 녹을 방지하기 위해 강철 파이프에 PVC 또는 PP 계열의 플라스틱을 코팅하는 과정에서 색상을 바꿀 때 발생한다.

어느 날 그는 협업 제안을 받고 찾아간 플라스틱 파이프 생산 공장에서 버리기 위해 대형 포대 자루에 담아 놓은 플라스틱 폐기물을 발견했다. 이 소재는 약 200℃에서 반죽 같은 가소성 높은 상태가 되었다가 상온에서 고체로 변한다. 작가는 이것을 폐기하는 대신 특정한 모양의 틀 안에 적층하면 해당 형태의 사물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플라스틱 폐기 과정을 작품 제작 현장으로 탈바꿈시킨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는 내열 장갑을 끼고,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기계에서 빠져나오는 뜨겁고 말랑한 플라스틱을 나무로 된 사과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아 나갔다. 상자에서 분리된 직육면체의 사물은 더 이상 폐기물이 아니었다. 곧이어 그는 스테인리스로 틀을 만들어 의자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즈잇 강영민의 작업이 가진 미덕은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의 생각을 환기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PVC가 자연적으로 분해되는 데는 길게는 500년까지 걸린다고 추정하는데, 플라스틱이 발명된 지 100년 남짓 되었으니 이론적으로는 아직 자연 분해된 플라스틱이 없다. 작가와 협업하는 공장에서도 PVC를 1년에 50톤씩 폐기했었다. 그는 이 산업 폐기물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공예가의 시대적 소임

금속공예를 전공한 한은석은 오랫동안 금과 은을 사용해 전통적 스타일의 장신구를 만들어 왔지만, 동시대의 환경 문제에 작가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2020년부터는 알루미늄 캔과 바이오 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실험적인 아트 주얼리를 제작하고 있다.
© 한은석

본래 장신구 디자인은 유한계급의 특권을 시각화하는 예술 분야 중 하나로, 여기에 창의성과 도전 의식을 개입하는 일은 20세기 중반까지도 거의 없었다. 최근에 와서는 장신구 디자인이 이러한 전통적 권위에 도전하면서 그 영역을 확장 중인데, 한은석(Han Eun-seok, 韓銀錫)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알루미늄 캔과 바이오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흔해 빠진 재료로도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성공적으로 보여 줬다.작가는 재료의 분해, 조립, 배열, 결합이라는 매우 기본적인 조형 방법을 채택했다. 이때 재활용 캔에 프린트된 글자와 상표, 색깔은 그대로 디자인적 요소가 되었다. 붉은색 장신구는 코카콜라 캔에 있는 빨강을, 황금색 장신구는 맥주 캔의 바탕색을 그대로 드러낸다. 만약 작가가 한국에서 인기리에 판매되는 음료수 캔을 사용했다면 한국의 대중문화를, 미국에서 널리 소비되는 캔을 사용했다면 미국의 대중문화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셈이 된다.

한은석의 장신구는 산호와 같은 해양 생물을 닮았는데, 이는 재료의 문제를 넘어 작가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보여 준다. 그가 이 장신구 연작을 본격적으로 제작한 시기는 2020년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였다. 작가는 바이러스로 인한 전 지구적 위기가 수온 상승 같은 기후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에게 자연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느꼈고, 재활용 캔과 같은 재료로 아름다운 장신구를 만들어 나가는 노력으로 자신만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한은석의 장신구는 값비싼 재료로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동시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장신구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첨단 기술의 수용

바이오 플라스틱으로 제작한 류종대의< 모던 모듈 > 은 동시대의 디지털 기술과 소재, 조형적 변화와 혁신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 류종대

류종대의 대표작< D-SOBAN >시리즈는 3D 프린팅을 거친 친환경 플라스틱(PLA)을 전통 옻칠로 마감한 작품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이 전통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 류종대

2000년 이후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한 도전은 공예와 가구 디자인 분야에서 지속되어 왔다. 최근 그 사례는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데, 류종대(Ryu Jong-dae, 柳鐘大)의 작품은 단연 돋보인다. 그의 대표작은 디지털 기술의 새로움과 옛 사물의 아름다움이 동시에 드러나는< 디소반(D-SOBAN) > 이다. 상판은 목공예 기술로 호두나무를 얇게 깎아 만들었고, 다리 부분은 한옥 기와를 원통형으로 변형해 3D 프린터로 제작했다.

이 작품은 좌식과 입식을 혼용하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생활 문화를 반영한다. 데이터값을 변경해 높이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바닥에 앉아서 사용할 수 있는 소반으로 제작할 수도 있고, 의자에 앉아 사용할 수 있는 원형 식탁으로도 제작 가능하다. 또한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색을 입힐 수 있다는 점도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진행된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구 디자인의 맥락과 통한다.

류종대의 작업에서 조립 과정 및 후가공은 중요하다. 3D 프린터가 노동의 수고를 줄여 주고 경제적으로도 이점이 있지만, 마법의 도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조립 블록을 차근차근 맞추면서 희열을 느끼듯 작가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제작한 부분과 옻칠 등 정교한 후가공 과정을 거친 부분을 정성 들여 조립한다. 그는 옥수수 전분에서 추출한 원료로 만든 친환경 플라스틱을 작품 제작에 사용한다. 뜨거운 음식을 담아도 환경호르몬, 중금속 등 유해 물질이 검출되지 않아 식기로 사용해도 안전할 뿐 아니라 폐기 시 미생물에 의해 생분해되는 장점이 있다.

류종대는 동시대의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공예가 실험적 태도가 필요한 창의적 도전의 영역임을 검증했다. 이렇게 시대정신과 조응하며 비전통적 재료의 수용과 첨단 도구를 통해 공예의 창의성을 실험하는 작가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조새미(Cho Sae-mi)미술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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