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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Review

2018 SUMMER

문화 예술

아트리뷰 허기와 풍족함을 동시에 선사한 음식 연극

로스엔젤레스에서 출생한 한국계 미국 극작가 줄리아 조(Julia Cho)는 2000년대 초반부터 희곡과 TV 드라마를 통해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2017년 윌 글릭크먼 어워드(Will Glickman Award)를 수상한 작품「가지」(Aubergine)가 국립극단의 성공적인 국내 초연(연출 정승현)에 이어 올해 재공연을 통해 색다른 감동을 선사하며 그의 작품 세계가 관심을 끌고 있다.

국립극단이 한국계 미국 극작가 줄리아 조의 희곡을 번역해 무대에 올린 연극 「가지」는 음식을 소재로 삼아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 레이의 삼촌이 헤어진 지 30년 만에 죽어가는 형을 위해 한국에서부터 준비해 온 음식 재료 자라를 꺼내 보이고 있다.

음식을 주제로 다루는 연극 「가지」는 담백하면서도 꽤나 맛깔스럽다. 이 연극에서 음식은 작가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다. 여기에 작가가 영어와 한국어를 영리하게 혼용한 점, 그리고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담담한 시선이 매력을 더해 준다.
애당초 행복과 불행은 관점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삶과 죽음도 그저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고 죽음이 그저‘한 끼 식사’일지도 모른다. 그 관점을 바꾸는 일은 결국 전환 버튼 하나 누를 수 있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작은 용기에 달린 일일 수도 있다. 줄리아 조는 이 작품을 통해 그러한 메시지를 유쾌하게 발신하고 있다.

화해의 매개가 된 한 끼 식사
2016년 미국의 버클리 레퍼토리 시어터에서 초연된 연극 「가지」의 밑바탕에는 미국에 정착한 한국인 이민 2세대의 가족사가 있다. 주인공 레이는 어릴 때 자동차 사고로 엄마를 잃고, 무뚝뚝한 아버지와 함께 살아왔다. 엄마 없는 허기진 세월 속에서 외롭게 성장했던 그가 찾아낸 직업은 요리사였다. 그러나 엄격하고 매정한 아버지는 레이의 뛰어난 음식 솜씨를 한 번도 칭찬한 적이 없었다. 오해와 불화가 깊어지던 중 제대로 화해할 기회도 없이 아버지는 병이 깊어졌고, 산소 호흡기에 의존한 채 죽어 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레이의 감정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레이를 돕는 주변 인물은 여자 친구 코넬리아와 호스피스 간호사 루시앙이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코넬리아는 그렇지 못한 레이를 대신해 한국에 있는 레이의 삼촌에게 연락을 해 줬고, 루시앙은 아버지의 쓸쓸한 죽음을 지켜보는 레이의 복잡한 감정이 안정되도록 돕는다.
한국에 있던 삼촌은 코넬리아의 전화를 받고 30년 만에 형을 찾아온다. 어머니가 차려 준 마지막 밥상 앞에서 울먹이던 형의 모습을 기억해 낸 그는 형에게 ‘마지막 한 끼’를 차려 주기 위해 자라탕 재료를 챙겨 가지고 온다. 하지만 형에게 음식을 먹이고 싶어 하는 삼촌과 그 음식을 만들고 싶지 않은 레이가 부딪친다.

작가는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오해와 이해를 데칼코마니 같은 개념으로 바라본다. 상실감 역시 풍족함과 동일 선상에 있는 개념일 것이다. 대척점에 놓인 상반된 개념들이 본질적으로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녀는 관객이 관점을 전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언어의 차이에 대한 관점
줄리아 조는 이 작품에서 영어만 할 줄 아는 인물(레이, 루시앙), 한국어만 쓰는 인물(삼촌),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인물(코넬리아)을 등장시킨다. 실제로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작가는 원작에서 알파벳으로 발음을 표기한(삭제. 원작 확인 결과 한국어 대사는 한글로 쓰고 괄호 안에 영어 번역을 넣었음) 한국어 대사와 영어 대사를 혼용했다. 번역자는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만일 번역자가 그 이유를 간파하지 못했다면 이 작품은 맥락을 잃고 진부해졌을 것이다. 다행히 번역자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챘고, 연출가와 배우들은 이를 영리하게 반영했다.

영어만 할 줄 아는 아들과 영어에 서투른 아버지는 오랜 세월 갈등을 빚어 왔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오해는 소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로 보인다.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레이와 영어를 모르는 삼촌의 대화는 정상적인 의사 소통이 아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언어의 불통으로 인한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도 서로의 오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코넬리아는 그런 두 사람의 입장을 필요에 따라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재치 있게 통역해 끝내 관객들의 유쾌한 박수를 이끌어 낸다.
각자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오해는 단순히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짜인 것이 아니라 ‘이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위한 장치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가 가진 다른 생각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거나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서로를 존중하는 그들의 태도는 객석에도 충분히 전달되고, 관객들도 그 순간 자신이 존중되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으로 ‘Eggplant’가 아닌 ‘Aubergine’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영어에는 다른 문화권에서 파생된 표현이 있다. 그 명칭이 에그플랜트인지 오버진인지에 따라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전하고 싶었다.”
에그플랜트라는 평범한 단어와 프랑스어에서 온 오버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루시앙이 동네 텃밭에서 기른 가지를 레이에게 가져다주었을 때 레이는 에그플랜트보다 오버진이 훨씬 맛있게 들린다고 말한다.
언어는 사물을 기호화한 규칙일 뿐이다. 하나의 사물에 연관된 서로 다른 언어는 그 규칙이 다를 뿐 본질은 같다. 그러나 언어가 우열을 가리는 잣대가 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지도, 생활하지도 않았던 줄리아 조가 한국 사회에 잠재된 언어적 차별성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다만 언어의 차이를 ‘차별’이 아닌 ‘다름’으로 존중했고, 이를 성실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이를 일상생활에서 외국어가 상대적으로 선호되는 한국적 맥락으로 짚어 낸 것은 한국 번역가와 연출가, 배우이고 그 의미를 다시 읽어 낸 것은 관객들이다. 극의 흐름을 따라 별다른 생각 없이 이 작품을 즐긴 관객들은 막이 내린 후에야 문득 제목의 의미를 되물었을 테고, 처음부터 제목을 화두 삼아 연극에 몰입했던 관객들이라면 작가의 깃털처럼 가벼운 터치가 오히려 싱거웠을지 모른다.

코넬리아는 레이가 준 오디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린다. 이 연극에서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등장인물들이 음식을 매개로 각자의 그리움과 추억을 반추한다.

관객을 신뢰하는 작가의 태도
한동안 극작을 쉬고 있던 작가는 음식을 소재로 한 프로젝트를 제안받았을 때 “비교적 수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음식이라는 소재가 “가족, 기억, 문화처럼 좀 더 깊이 있는 주제들과 엮여 있음을 뒤늦게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이 연극에서 등장인물들은 음식에 대한 기억과 추억, 그리움을 각자의 시선으로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요리에 대한 과도한 열정 때문에 음식을 싫어했던 코넬리아는 레이가 건네준 뽕나무 열매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고 맛의 기억을 되찾는다. 또 인색하고 매정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순간 레이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진정한 요리사가 된다. 아버지가 해 주던 파스트라미 샌드위치 맛을 그리워하며 남편과 함께 세계 곳곳의 식당을 찾아다니는 미식가 다이앤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등장하며, 마치 에피타이저와 디저트처럼 연극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다이앤을 등장시키는 수미쌍관의 구도처럼 작가는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오해와 이해를 데칼코마니 같은 개념으로 바라본다. 상실감 역시 풍족함과 동일 선상에 있는 개념일 것이다. 대척점에 놓인 상반된 개념들이 본질적으로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녀는 관객이 관점을 전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우리가요, 죽어 가는 사람 손잡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들 손잡는 거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우리 손 잡아 주는 거지.”(“We hold the hands of the dying. But we are not the ones holding their hands. They are the ones holding ours.”)
호스피스 루시앙의 입을 통해 작가는 “당신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떠날 시간은 결국 아픈 사람이 선택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환자 곁을 24시간 지키기보다 당장 냄새나는 당신 몸부터 씻고 든든하게 밥 먹는 것이 우선이어도 괜찮다”고 권한다.

현재를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임을 강조하는 줄리아 조의 역설은 관객으로 하여금 허기와 만족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2018년 제54회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삼촌 역의 김정호가 연기상을 수상한 「가지」는 지난해 국내 첫 공연 당시 평단과 관객들에게 “잔잔하면서도 울림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 3월 다시 한 번 국립극단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비슷한 시기에 미국 메릴랜드의 올니 시어터 센터(Olney Theatre Center)에서도 재공연되었고, 볼티모어의 에브리맨 시어터(Everyman Theatre)에서도 공연이 이어졌다.
구성이나 문장력으로 보자면 이 작품은 평범한 편이다. 그럼에도 많은 관심 속에 공연이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겁고 어두운 주제인 죽음과 상실을 다루면서 지루하게 부연 설명을 늘어놓거나 애써 함의를 강조하지 않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덜어 내는 쪽을 택할 때 작가에게는 관객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관점을 옆으로 한 발자국만 옮기면 새삼스럽게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 덫이 되었던 생각의 허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시야는 보다 넓어진다. 「가지」에서 관객이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놀라는 순간은 작가의 설명이 생략되거나 가볍게 스치는 장면에서다. 줄리아 조는 이 작품을 통해서 관객을 믿는 사려 깊은 작가의 태도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 주었다.

김수미 (Kim Su-mi 金壽美)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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