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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Review

2016 AUTUMN

문화 예술

아트리뷰 이중섭, 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긴 기록

이중섭(李仲燮 Lee Jung-seob)은 20세기 한국 화가 중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의 작품들은 1970년대 이후 ‘이중섭 붐’이라 할 만한 폭발적인 대중적 관심 속에 상당 부분 개인 소장가들 사이로 흩어져, 일반인이나 연구자들이 유작들을 일목요연하게 포괄적으로 감상하기 어려웠다. 그의 탄생 100주년, 작고 60년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이 마련한 <이중섭, 백년의 신화>는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이다.

<길 떠나는 가족 Family on the Road>(1954), 종이에 유채, 29.5 x 64.5 cm 아직 태양이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에 온 가족이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가족을 다시 만날 희망에 부푼 작가의 마음이 반영된 그림이다.

이중섭은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대중적인 인기의 대상이 되어 왔다. 비범‧비련‧유랑‧요절 등 극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그의 짧은 생애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 1916년 태어나 1956년 마흔 살의 나이로 외로운 죽음을 맞을 때까지 그는 누추하면서도 제법 유쾌한 삶을 누렸고,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별이 되었다. 2014년 <이중섭 평전-신화가 된 화가, 그 진실을 찾아서>를 펴낸 미술사가 최열(崔烈)씨는 이중섭이 국민화가로 등극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전쟁으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건 황폐한 시절을 견뎌낼 만큼 순결한 영혼이었고, 그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이중섭이었다. 폭발하는 천재이자 맑은 영혼의 모습으로 부활한 이중섭은 순수의 상징이 되었다.”

유랑하는 영혼의 기록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나 평양, 도쿄, 제주 서귀포, 부산, 통영, 서울을 포함해 열 곳이 넘는 도시를 떠돌았다. 그의 그림에 우울과 사랑에의 갈구가 스며있고, 공허함과 천진난만함이 나란한 것은 떠도는 영혼의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이면서도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했던 그는 그 만남에서 길어 올린 시적(詩的) 예술 혼으로 유랑 생활의 아픔을 승화시켰다. 이중섭은 생전에 “예술은 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긴 기록”이라고 했다.
6월 3일부터 10월 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회고전은 미국 뉴욕 근대미술관(MoMA)을 비롯해 60여 개 소장처로부터 200여 점의 작품과 100여 점의 자료를 빌려 이중섭의 전모를 살필 수 있게 꾸몄다. <황소(Bull)>, <길 떠나는 가족(Family on the Road> 연작 등 그의 대표적인 유화 60여 점, 은지화, 드로잉, 엽서화, 편지화, 유품 등을 풍부하게 펼쳐놓았다. 가난과 전쟁 등으로 가족과 떨어져 산 시간이 길었기에 탄생한 엽서그림과 편지그림은 그 자체로 애틋한 가족사, 한민족의 이별의 역사를 보여준다.

<투계 Cockfighting>(1955), 종이에 유채, 28.5 x 40.5 cm 대각선으로 화면을 가르며 닭 두 마리가 싸우는 장면을 담았다. 삼원색으로 기본형상을 그리고 그 위에 짙은 회색을 입힌 다음, 채 마르기 전에 넓은 끌로 단숨에 긁어내어 완성한 작품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1950년대 5년여에 걸쳐 집중해 제작된 것을 보면 전쟁 직후 빈궁과 고통 속에 타오른 그의 창작열에 놀라게 된다. 특히 생애 마지막의 1년 남짓한 기간, 화가는 거식증과 정신질환, 간염 등으로 사투를 벌이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죽음이 어른거리는 순간에도 그는 가난 때문에 일본으로 떠나 보낸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과의 재회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의지를 다졌다. 1954년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에서 그런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와 모든 것을 바쳐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어요. 독신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아고리[턱이 긴 이씨라는 뜻의 이중섭 별명]는 그런 타입의 화가는 아니에요. 나는 스스로를 올바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예술은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라오. 진정한 사랑으로 가득 찰 때 비로소 마음은 순수와 청정에 이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대만을 가슴 가득 품고 작품을 제작하는 대화공 중섭을 굳게 믿고, 도쿄에서 가장 드높은 자존심과 기개로 마음을 항상 밝게 가지고 건강하게 지내길 바라오.”

이중섭은 스스로를 ‘정직한 화공(畵工)’이라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자기감정에 충실한 솔직함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아이들 묘사로 드러난다. 화가는 자신을 동자(童子)에 투영하면서 고단하고 구차했던 일상을 잊었는지 모른다. 아득하게 먼 꿈을 찾아 부유하듯 화폭을 떠도는 소년의 모습에 화가의 순한 얼굴이 겹친다.

1954년 통영에서 열렸던 4인전 당시 이중섭의 모습이다.

은지화의 창조
이중섭의 작품 세계를 논할 때 앞머리에 놓이는 것이 은지화다. 그는 담배도 즐겨 피웠지만 정작 더 중요한 건 담뱃갑 안에 포장재로 들어 있던 은종이였다. 그는 그림 재료 살 돈이 없어 은지를 캔버스 삼았다. 부산 피란 시절에 집중해 생산된 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그림 장르라 할 만큼 세계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녔다. 은지화는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 하는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깊이 파인 선으로 이루어진 드로잉이 완성되었는데 평면이면서도 오목 볼록 음영이 생길 뿐 아니라 반짝이는 효과까지 드러나 매력적이다.
대부분 9cm X 15cm 크기에 도상을 가득 채워 그린 은지화는 300여 점 가량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 몇 가닥으로 형태의 본질을 잡아내는 드로잉은 ‘화골(畵骨)’이란 단어가 표현하듯 사물의 뼈대를 드러낸다. 이중섭은 은지화에 벌거벗은 아이들을 많이 그렸는데 선묘의 직설적이면서도 깊은 맛은 가족에 대한 화가의 그리움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느끼게 한다. 화가는 이 은지화들이 나중에 벽화를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은지화만을 모아 전시한 제2전시관 벽면을 기가픽셀로 촬영한 은지화 확대영상으로 가득 채워 그 뜻을 새겼다. 재료를 가리지 않고 이어진 조형 실험 이중섭의 아내와 두 아들에 대한 애정은 그의 작품 전반을 꿰뚫는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이 남녀노소 대중적인 호감과 지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시절에 도쿄의 문화학원에서 만난 일본인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 이름 이남덕 李南德)에게 90여 통의 엽서 연서(戀書)를 줄기차게 보내 부부의 연을 맺었다. 엽서의 한 면을 가득 채운 그림은 <신화에서In Mythology> <남자와 여자 Man and Woman> 등 환상적인 이야기가 담긴 초현실적 화풍을 보여준다.

손바닥 크기 그림이지만 뿜어내는 에너지는 만만찮다. 은지화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독립적인 그림 장르를 이루고 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 보내고 홀로 남은 이중섭은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흘러 다니면서도 편지 쓰기를 잊지 않았다. 애정이 듬뿍 담긴 사연에 그림을 곁들인 편지화는 70통 가량, 150장에 이른다. 이 편지 그림은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의 관계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자유자재 서체와 즉흥적 그림이 어우러져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기에도 손색이 없다. “열심히 그림을 그려서 빨리 전시회를 열어 그림을 팔아서 돈과 선물 많이 사 들고 갈 테니까 건강한 모습으로 기다려주세요”라는 사연이 뭉클하다.

<두 아이 Two Children>(1950년대), 은지에 새김, 8.5 x 15.5 cm 은지화는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금속공예의 은입사 기법을 연상시키는 이중섭만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이중섭에게 그림 재료는 큰 의미가 없었던 것 같다. 몰두해서 그리기 시작하면 어디서나 망설이지 않고 새로운 조형 실험에 뛰어들었다. 올 4월에 끝난 최근 조사에 따르면 그가 남긴 작품 수는 총 540여 점인데 그 중 유화는 140여 점, 채색 소묘화는 160여 점에 달한다.
이중섭의 소는 화가의 분신이자 그의 작품세계를 응축한 일종의 혼이었다. 그는 유독 흰 소를 좋아했는데 흰 옷을 입는 조선인, 환난을 극복하는 인내와 끈기의 암호 같은 것이었다. 비쩍 말라 골격이 다 드러난 소는 육중한 걸음으로 대지를 박차며 단호한 행진을 이어간다.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Three Children with Fish>(1950년대), 종이에 유채, 27 x 36.4 cm

몇 번의 붓질만으로 이토록 강력한 소의 형상을 잡아낸 필력은 그의 맹렬한 기를 짐작하게 한다. 서예의 필법을 보듯 기운생동이 화폭 위에 펼쳐진다.
이번 전시에는 모두 5점의 소 그림이 나왔다. 그 중 가장 대표작이라 할 만한 1953-4년 작 <황소>는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울부짖는 거대한 붉은 소의 머리 부분을 클로즈업한 유화다. 큼직한 눈망울, 포효하는 순간의 벌린 입, 깊이 파인 볼의 주름 등 사실적인 묘사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최열 씨는 소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유복했던 젊은 날 환영과 신비를 추구하던 순수주의자 이중섭은 전쟁을 겪으며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시대정신의 소유자로 거듭났다. 살육과 부도덕함과 가난함에 맞서는 인본주의야말로 당대 현실에서 가장 앞서야 할 인간의 가치였다. 이중섭은 세상과 가족 안에서 그 가치를 발견했고, 따라서 1950년대 ‘소’ 연작은 민족사와 개인사 사이에 자리 잡은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중섭은 은지화에 벌거벗은 아이들을 많이 그렸는데 선묘의 직설적이면서도 깊은 맛은 가족에 대한 화가의 그리움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느끼게 한다. 화가는 이 은지화들이 나중에 벽화를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끝나지 않은 전설
이중섭은 1956년 9월 6일 입원 중이던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 무연고자로 처리된 그의 시신을 나흘이 지나 문병 온 친구가 거두었다. 비극적인 인생의 마무리와 대조되게 사후 그의 전시회는 늘 화제였고 큰 인기를 끌었다. 1986년 6월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30주기 특별기획 이중섭전’은 관람객이 밀려들어 연장전시까지 하며 10만 명을 불러들였다. 1999년 1월 서울 갤러리현대에서 연 ‘이중섭 특별전’도 비슷한 수효의 관객을 모았다.

<황소 Bull>(1953-54), 종이에 유채, 32.3 x 49.5 cm 이중섭이 남긴 여러 점의 소 그림 중 가장 강렬한 작품으로 꼽힌다.

일생의 벗으로 화가의 생애를 곁에서 지켜본 시인 구상(1919-2004, Ku Sang, 具常)은 그를 기리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중섭처럼 그림과 인간, 예술과 그 진실이 일치하는 예술가를 모른다. 그는 그와 사귄 모든 사람에게 티 없고 따스한 인정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그 밝고도 그윽한 애정을 짐승이나 새, 물고기, 또는 나무나 풀에 이르기까지 뜨겁게 쏟아서 그것들의 살고 어울리는 모습을 싱싱하고도 힘찬 필치로 그려놓았다.”
이중섭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왜 현재 진행형인지를 일러주는 전언이다.

정재숙 (Chung Jae-suk, 鄭在淑)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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