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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Review

2016 SUMMER

CULTURE & ART

아트 리뷰 한국 근대미술사에 비로소 자리를 찾은 러시아 한인화가 변월룡

러시아 연해주에서 고려인 2세로 태어나 레핀예술아카데미 교수로 35년간 재직했던 변월룡(Pen Varlen 邊月龍 1916-1990)은 오랜 세월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화가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세 명의 화가를 차례로 조명하는 ‘백년의 신화: 한국 근대미술 거장전’ 시리즈를 기획하고 그 첫 순서로 3월3일부터 5월8일까지 변월룡의 대규모 회고전을 마련함으로써, 그의 삶과 예술의 자취를 되돌아보는 작업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한 화가의 자화상이 있다. 얼핏 거친 듯하지만 매우 자신 있고 분방한 붓질로 자신의 상반신을 그렸다.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에서 그려져, 우리는 그림 속 인물을 정면에서 응시하면서도 마치 우러러보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화가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는 자화상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미완성작이다. 사인도 없다. 마치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자신이 처할 위치를 암시라도 하듯이….

이주 한인 2세 화가의 마음에 새겨진 고국
변월룡 회고전이 열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가는 길은 봄 꽃이 한창이었다. 덕수궁 정문 앞에서부터 전시장에 이르는 길 양쪽에는 전시를 알리는 배너가 곳곳에 걸려 있었는데, 낯선 러시아 문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Пен Варлен”. 변월룡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어 표기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뻰 봐를렌’이라는 러시아식 발음으로 불렸을지언정 평생 변월룡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살다 간 고려인이다.
변월룡은 1916년 러시아 시베리아 동남단 프리모르스키주(연해주)의 쉬코토프스키에서, 기근과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터를 잡은 조선인의 2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변월룡이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 마을인 신한촌에서 중등교육을 마치자, 그의 부모는 미술 전문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아들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우랄산맥 부근의 스베르들로프스크(현재의 예카테린부르크) 미술학교에 편입시켰다. (그가 이 학교 재학중이던 1937년 그의 가족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떠났다.) 변월룡은 1940년 이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소련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모이는 레닌그라드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 들어갔다. 기량이 뛰어난 데에다 노력파였던 그는 졸업작품 <조선의 어부들>(1947)로 교수들의 인정을 받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1951년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 학교의 데생과 조교수가 되었다. 이 학교는 뒤에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 일리야 레핀의 이름을 딴 레핀 예술아카데미로 개명했다.
1953년 6월, 변월룡은 소련 문화성의 명령에 따라 북한에 들어갔다. 한국전쟁 뒤 미술계의 발전을 꾀하던 북한이 그를 지목하여 소련 당국에 파견을 요청한 결과였다. 그는 평양미술대학의 학장 겸 고문이라는 직책을 받아 1년 3개월 동안 재직하면서 전체 커리큘럼을 짜고,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진을 지도하는 한편, ‘8.15 해방 9주년 전람회’ 등의 전시를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일에 열정을 쏟은 나머지 병을 얻었고 1954년 9월에 건강도 회복하고 부족한 화구도 더 마련할 생각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영영 북한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북한 당국의 귀화 제의를 거절한 데다가,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으로 그의 북한 입국을 주선했던 친구 정상진이나 소련주재 북한대사 이상조가 권력 다툼에서 숙청되는 북한 내부의 정치 상황이 맞물려 재입국을 허가 받지 못한 것이다. 북한 미술의 터전을 세우기 위해 힘을 기울였고 많은 미술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북한 땅을 밟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북한 미술사에서 아예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

4개의 방, 4개의 주제
전시는 유화, 에칭, 석판화, 드로잉 등 200여 점의 작품을 ‘레닌그라드 파노라마’, ‘영혼을 담은 초상’, ‘평양 기행’, ‘디아스포라의 풍경’이라는 4개의 주제로 나누어졌다. 변월룡의 존재를 한국 사회에 처음 본격적으로 알리는 전시인만큼 그의 생애의 궤적을 오롯이 보여주기 위한 구성으로 보인다. 전시 해설자도 관람객들에게 전시 작품들 자체보다는 거기 담긴 작가의 생애를 소상하고 감동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작품들은 충실한 사실적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매우 섬세한 에칭, 다소 격정적인 붓질이 드러난 유화 작품이 주를 이룬다. 그밖에 젊은 시절에 출판사의 의뢰로 그린 포스터 4점과 작품 준비 과정에 나온 드로잉들이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관찰을 더 풍부하게 뒷받침해 준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그린 사람들의 모습이다. <무용가 최승희의 초상>(1954)에는 세계무대에서 이름을 떨쳤지만 월북 뒤 숙청되어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고 알려진 한국 최초의 근대무용가이자 무용이론가 최승희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붉은 부채를 펼쳐 들고 있다. 또한 북한 주체문학의 기초를 마련한 작가 한설야(1900-1976)의 초상(1953년 작)과 새 발목에 인식표를 매달아 날려보내서 휴전선 이북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사를 알린 애틋한 사연으로 널리 알려진 남한 조류학자 원병오 박사의 부친 모습이 담긴 <조류학자 원홍구 박사의 초상>(1954)도 있다. 1950년대 북한의 문화를 일궈냈던 이들의 빛나는 순간의 모습들이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의 문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초상>(1947)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고향 연해주, 그리고 짧은 기간 열정을 바쳐 일했으나 다시는 가보지 못한 고국을 향한 마음이 그의 그림들 한 구석에 작게 새겨진 한글 서명이나 제목에 숨어 있는 듯이 보인다. 이는 모두 누구에게 건네는 이야기였을까? 언젠가는 남-북한 미술계에 자신의 그림이 알려지기를 소망한 것일까?

변월룡의 그림이 한국에서 이번에 처음 전시된 것은 아니다. 200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광복60주년 기념 <한국 미술 100년>전의 ‘광복과 분단’ 섹션에 그의 작품이 몇 점 조용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 근대미술사를 전공하는 필자는 당시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할 수 있었는데, 그때 소개된 작품이 이번 전시에서도 볼 수 있는 화가 김용준(1904-67)과 카프문학의 선구자 이기영(1895-1984)의 초상화, 그리고 ‘금강산’과 ‘모란봉’ 동판화 등이었다.

그가 그린 초상화에 유명인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수줍은 듯 미소 짓는 빨간 저고리를 입은 소녀, 내일의 희망을 보여주는 듯한 흰 양복저고리를 입은 조선인 학생도 그렸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S. 한슈라의 초상>(1969) 등 노동자를 영웅으로 표현한 작품 구석구석에서는 사실 그대로를 그린다기보다 바람직한 장면을 그려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을 볼 수 있다. 부인 제르비조바의 젊은 시절 모습과 큰아들 알렉산드르, 둘째아들 세르게이와 딸 올랴의 어린 시절 모습이 담긴 그림에서는 각별히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고 어머니의 초상 앞에서는 저절로 발길이 멈추어진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것은 그가 타계하기 불과 5년 전인 1985년의 일로, 지금은 아들이 물려받아 쓰는 그의 화실 한가운데 벽에 걸려 있던 것을 이번 전시를 위해 가져왔다고 한다.
‘평양 기행’ 섹션에 걸린 작품들에는 개성의 선죽교, 평양의 대동문과 모란봉, 대동강변에서 빨래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늠름한 소나무를 그린 작품도 있다.

이 그림들 중에는 북한 체류 기간에 그린 것도 있지만, 당시 그렸던 스케치를 바탕으로 소련으로 돌아간 뒤에 그린 작품들도 많다. 공식적인 소임을 다하면서 그 짧은 기간 동안 그토록 많은 작품을 구상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디아스포라의 풍경’에는 1960년대 이후 그가 방문한 유럽의 여러 곳,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리고 해마다 방문한 연해주의 풍경들이 포함되었다. 명문 미술대학의 교수로 해외 여행의 특전을 누리며 비교적 평온하게 지냈던 변월룡의 후반기 생애를 보는 듯 이 풍경들은 다소 정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비(버드나무)>(1971)나 <블라디보스토크의 해변>(1972)와 같은 에칭은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과, 그 바람에 일렁이는 나무의 움직임이, 마치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내면의 격정과 외침을 드러내는 듯도 하다.

고향 연해주, 그리고 짧은 기간 열정을 바쳐 일했으나 다시는 가보지 못한 고국을 향한 마음이 그의 그림들 한 구석에 작게 새겨진 한글 서명이나 제목에 숨어 있는 듯이 보인다. 특히 재일동포 북송을 주제로 다룬 <북조선은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1960)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보고 싶은 청진을 보지 못하고 레닌그라드에서 깊은 생각만 가지고 그렸씀니다”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다. 러시아인들의 초상화에도 한글을 적어 넣은 것이 종종 눈에 띈다. 이는 모두 누구에게 건네는 이야기였을까? 언젠가는 남-북한 미술계에 자신의 그림이 알려지기를 소망한 것일까? 1985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변월룡의 유언은 “ 내 묘비에 이름을 한글로 새겨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베르노예 클라드비세(북부 묘지)에 자리한 그의 묘비에는 “변월룡인”이라는 글귀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아쉬운 점 이번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기까지는 그를 발견하여 연구하고 널리 알리고자 한 미술비평가 문영대 씨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1990년 한-러 수교가 이루어진 후 1994년에 러시아로 유학 간 그는 ‘뻰 봐를렌’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보고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고 한다. 지도교수에게 문의하여 그가 몇 해 전 타계한 고려인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자 문씨는 작가의 유족을 수소문해 둘째아들 세르게이와 딸 올랴, 그리고 부인 제르비조바를 만날 수 있었다. 아들 세르게이가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는 그의 화실에서 많은 작품들도 온전히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 변월룡을 소개하고자 20여년 동안 꾸준히 노력했으며 『러시아 한인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2004년),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2012)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남-북한의 근현대 미술사는 상호간의 연결고리를 아직 다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 이런 현실에 이번 전시는 큰 디딤돌을 하나 놓은 셈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눈에 띄었다. <조선의 모내기>를 제외하고는 대작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를테면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박물관 소장의 <청진항에 상륙한 태평양함대 부대> 같은 대작도 전시 시작 부분에 연표를 뒷받침하는 소형 복제 패널로 처리된 것에 그쳤다. 변월룡의 러시아 미술계에서의 활동과 북한 미술사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앞으로 러시아 기관 소장 대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진으로만 남아 있고 소재가 파악되지 않은 작품들까지 더 적극적인 수배와 추적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을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어떻게 수용할지를 더 깊이 고찰해야 한다. 관람객들이 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면서, 이번 전시가 그 첫걸음이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백년의 신화 — 또 다른 거장들
변월룡에 이어 전시가 계획된 화가는 이중섭(1916-1956)과 유영국(1916-2002)이다. 이중섭은 짧고 파란만장한 생애에 관한 이야기와 은지화라는 독특한 매체, 그리고 친근한 조형으로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작가이다. 그와 일본 도쿄문화학원 미술과를 함께 다니기도 한 유영국은 독특한 조형 방식으로 한국 추상미술을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 받는다. 이들의 회고전은 각기 2016년 6월 3일부터 10월 3일 까지, 그리고 2016년 10월 21일부터 2017년 3월 1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목수현 (Mok Soo-hyun, 睦秀炫) 미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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