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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ove with Korea

2016 WINTER

생활

한국의 벗들 ‘신의 손’을 길러내는 골키퍼 코치 신의손

모스크바에서 프리미어리거로 활약하던 타지키스탄 출신 골키퍼 발레리 사리체프(Valeri Sarychev)는 한국의 프로축구팀에 스카우트되어 1992년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 연속 최소실점 신화를 쌓아가는 그를 언론은 ‘신의손(God’s Hand)’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그는 지금 귀화한 한국인 GK 코치 신의손으로 축구 교육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선수 시절 ‘0점대 실점률’, ‘K리그 역대 최고령(44세) 출전기록’, ‘귀화 1호 축구선수’ 같은 특별한 타이틀들을 얻은 골키퍼 신의손은 2005년 은퇴 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 몇몇 구단을 거쳐 지금은 이천대교 여자축구단 GK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이천대교 여자축구단을 찾았을 때는 마침 점심 식사시간이었다. 20대 여자 선수들로 가득 찬 구내식당에서 192센티미터에 민머리, 서양인 외모의 신의손 코치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기자가 명함을 내놓으며 인사를 하자 함께 밥을 먹던 골키퍼 정지수, 김재희 선수를 소개시켜주었다. “보통 한 팀에 골키퍼가 세 명인데 우리 이천대교 팀은 네 명이다 됩니다. 전 국가대표 전민경 선수도 우리 팀이에요”라며 자랑도 곁들였다.
그는 올해 이 여자축구단의 GK 코치로 부임했다. 2008 년부터 2011년까지 대교의 필드코치 겸 GK코치를 지냈으니 5년 만의 복귀이다. 선수들은 신코치의 컴백에 사기가 올라WK리그(한국 여자축구실업팀 리그)에서 승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과거 4년 동안 신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2009년, 2011 년 WK리그에서 우승을 이끌어낸 바 있는 전민경 선수의 다짐은 남다르다. “우리나라 골키퍼들은 보통 발보다 손을 많이 쓰는데, 신코치는 발을 적극적으로 쓰도록 충고해요. 그래서 스텝을 많이 배웠고 손과 발을 모두 활용하는 강점을 갖게 되었지요. 2012년 신의손 코치가 K리그 부산 아이파크로 떠난 뒤 인천 현대제철에게 3연승을 내주었어요. 이제 그가 돌아왔으니 WK리그 우승을 되찾아와야죠.”
신코치는 식사 도중 “한국말 못해? 나보다 잘하잖아.” 같은 농담을 쉴 새 없이 던져 좌중을 웃겨주었다. 김재희 선수가 이렇게 귀띔해주었다. “우리에게 아주 세심하게 마음을 쓰세요. 조금 처져있거나 우울하면 웃는 표정 보여줄 때까지 풀어주려고 계속 애쓰시는 거예요.”
신의손 코치는 “ 6년 동안 남자 선수들을, 5년 동안 여자 선수들을 지도해봤는데 여자선수들의 정신력 관리, 감성 관리가 제겐 더 어려운 과제로 느껴져요”라며 눈을 꿈적해 보였다. 여러 골키퍼 중에 경기 나가는 선수는 단 한 명이니 선수들이 예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영광 뒤에 닥친 고난
신의손 코치(56)는 한국 축구에서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러시아의 유명 골키퍼였던 그는 32살 때 한국에 용병으로 와서 일약 스타가 되었고 나아가 한국 축구 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로 떠올랐다. 90년대 한국 프로축구 역사를 그를 빼고 기술할 수 없을 정도로 각종 기록과 사건을 만들었다. 그의 한국 생활 24년은 한 편의 드라마감이다.
그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속한 타지키스탄의 두샨베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축구를 시작하여 18살에 프로축구단에 들어갔고 22살부터 10년간 모스크바에서 프리미어리거로 뛰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골키퍼 야신을 기리는 야신클럽의 멤버가 되어 유명세를 얻었고 1991년에는 소련리그 올해의 골키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해 한국의 프로축구팀인 천안 일화 천마(현 성남FC)의 박종환 감독은 소련 출장을 자주 가던 사업가 친구에게 좋은 골키퍼를 물색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소련 붕괴 직전, 한-소 무역이 막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였다. 당시의 MVP사리체프가 당연히 가장 먼저 물망에 올랐다. 박감독은 10월에 사리체프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입단 테스트를 했다.
“단 두 번 연습경기를 치렀을 뿐인데 박종환 감독이 당장 계약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1992년부터 일화 천마 선수로 뛰게 되었어요.”
당시 한국에는 6개의 프로축구팀이 있었다. 일화 천마는 그 중에서 거의 꼴등 수준이었다. 고정운, 신태용 이상윤 등의 좋은 선수와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이 있었음에도, 골키퍼가 부실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에서 온 “체프형”이 합세한 첫 해에 일화는 정규리그 준우승, 아디다스 우승을 차지했다. 그 다음 해부터 1995년까지 내리 3년간 K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96년에는 아시안 슈퍼컵, 컨티넨탈컵까지 차지했다. 당시 일화는 3년 연속 최소실점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는데 0점대(0.87) 실점율의 철벽방어를 만든 사리체프 덕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언론에서 그에게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지어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어느 날, TV스포츠 뉴스를 보는데 제 이름과 함께 신의손이라는 자막이 떴어요. 그때만 해도 한글도 한국어도 잘 몰랐으니 한국 친구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지요. God’s Hand래요. 깜짝 놀랐어요. 한국이 급격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그에게 쏟아지는 축구팬들의 관심과 사랑만큼 한편에선 질시와 배척이 시작되었다. 외국인 골키퍼 때문에 국내 골키퍼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신문이 한국 프로 축구팀을 분석하면서 다른 축구팀들은 외국인 스트라이커, 미드필더를 수입하느라 돈을 엄청나게 쏟아 부었지만, 일화는 값이 싼 골키퍼 한 명 데려와서 다 이겼다고 썼어요. 그 기사가 저에게는 불행의 불씨가 되었어요. 기사가 나온 이듬해에 9개 프로축구단에서 모두 다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해 온 거예요. 다른 선수들의 반값이면 골키퍼를 사올 수 있거든요.”
그때부터 프로축구연맹은 외국인 골키퍼 영입제한, 출전제한 등의 규정을 만들기 시작하여 1999년부터는 아예 출전을 금지시켰다. MVP는커녕 출전금지라니, 사리체프가 한국에 온 지 7년 만에 만난 고난이었다.

한국인이 되어 그라운드 복귀
다시 해외이적을 하자니 나이가 많아 쉽지 않았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심했다. 그때 안양 LG(현 FC서울)의 조광래 감독이 그에게 코치 자리를 제안하여 출구를 열어주었다. 그래서 정들었던 일화를 떠나 안양 LG에서 플레잉 코치겸 GK코치로 후배양성에 나섰지만 난생 처음 예정에도 없던 지도자 생활을 하려니 마음은 여전히 골대 앞에 가 있었다. 조광래 감독 역시 ‘골키퍼’ 사리체프가 필요했다. 사리체프가 뛰면 우승은 떼어 놓은 당상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귀화하면 어떨까? 한국인 국적을 얻으면 얼마든지 경기에 내보낼 수 있는데”라고 권유했다.

안양LG 현역 시절인 2001년, 신의손 골키퍼가 숙명의 라이벌 수원삼성의 골을 막아내고 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어요. 거듭되는 권유에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죠. 다시 선수로 뛸 수 있다는데 무엇을 못하랴. 당장 한국사,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어요. 선수들이 키프러스 전지훈련 간 한 달 동안 죽어라 외우고 또 외워서 시험에 통과했어요”
그는 귀화 시험 치던 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먼저 필기시험을 봤어요. 40분간 20개 질문에 답해야 하는데, 너무 떨려서 문제도 잘 이해되지 않았어요. 방안 가득 있던 수험생 중에는 5분 만에 다 쓰고 나가는 사람도 있어서 얼마나 부러웠던지요. 저는 마지막까지 시험지 붙들고 있었어요. 그리고 말하기 테스트 방으로 이동했는데 어떤 방송국 카메라팀이 저를 따라오는 거예요. 시험관이 당황스러운지 아주 간단한 질문만 몇 개 하더니 나가라고 하더군요. 저는 떨어졌구나 생각했어요.”
그는 당시 구단 측에서 언론플레이를 한 게 아닌가 추측된다며 한참 웃었다. LG 구단이 있는 도시 구리를 본관으로 정하여 ‘구리 신씨’의 시조가 된 한국인 의손 씨가 그 해 조광래 감독에게 우승을 안겨주었음은 물론이다.
“귀화한 후 받은 백 넘버가 44번이었어요. 그때 속으로 결심했어요. 그래, 앞으로 4년, 44살까지 선수생활하고 은퇴하자.”
44살 은퇴식 날, 그는 TV인터뷰에서 “언제까지나 한국인으로서 한국축구 발전을 위해 기여하겠다”며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실제로 그는 2009년 홍명보 U-20 청소년 국가대표팀 감독에게 GK코치로 발탁되어 이집트 U-20월드컵에 태극마크를 달고 골키퍼 코치로 참가해 8강에 오르는 성적을 거둬 그 약속을 지켰다.

그는 한국축구에 두 가지 측면에서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 받는다. 첫째는 골키퍼도 스타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골키퍼의 중요성을 알린 것이다. 둘째는 골키퍼 코치라는 새로운 역할을 창출했다는 점이다.

축구 교육자로서의 삶
그는 한국축구에 두 가지 측면에서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 받는다. 첫째는 골키퍼도 스타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골키퍼의 중요성을 알린 것이다. 김병지나 이운재와 같은 걸출한 골키퍼가 나온 것은 그들이 신의손 시대에, 신의손의 활약을 보며 선수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골키퍼 코치라는 새로운 역할을 창출했다는 점이다. 그전까지는 국가대표팀 외에 골키퍼에게 따로 코치를 둔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다른 필드 플레이어에게는 따로 코치가 붙지만 골키퍼는 선배들의 경기나 해외선수 비디오를 보고 독학하는 것이 관례였다.

지도자 신의손은 이천대교 여자축구단에서 국가대표팀 골키퍼를 양성하겠다는 포부로 훈련에 임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골키퍼 교육 매뉴얼과 동영상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FC서울, FC경남, 대교 캥거루스의 수석 및 골키퍼 코치로 프로축구 선수들을 지도하고, 틈틈이 유소년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이 생각은 더욱 굳어져왔다.
아내 올가 사리체바와 처음 한국으로 이사올 때 딸아이 올가는 8살, 아들 에브게니는 6살이었다. 현재 딸은 캐나다에서, 아들은 미국에서, 부부는 시흥 대교연수원에서 10분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 “2,3년 뛰다 떠나려 했는데 벌써 24년째 한국에 살고 있네요,” 새삼스러운 듯 그가 말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아내와 단둘이 사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신의손의 유일한 취미는 음악 감상이다. 집에 LP만 700장을 갖고 있다며 제네시스와 비틀즈의 올 콜렉션을 자랑한다. 특히 락 음악을 좋아해서 프로그레시브 록, 비트 록, 로큰롤 등 가리지 않고 듣는다고 한다.

김현숙 (Kim Hyun-sook, 金賢淑) 케이무비러브(K-MovieLove)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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